만나다/책

(책)대한민국 부모. 가정문제의 근본은 무엇일까

요호호 2014. 2. 3. 22:41

17. (살아남기 위해 일탈하는 아이들) 살아남기 위해 병드는 아이들이 있는가 하면, 살아남기 위해 일탈행동을 하는 아이들도 있다.

19. 아이들에게 공부는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이유를 불문하고 그냥 해야 하는 의무 같은 것이다. 미래의 행복한 삶을 위한 것이라 하지만 그건 부모의 이야기다. 중요한 것은 현재 아이들에게는 재미도 없고 의미도 없는 그 공부 때문에 다른 모든 것을 포기해야 하는 고통일 뿐이라는 점이다. 그런 공부를 ‘해내고’ ‘해드리기’위해서 아이들에게는 일탈이 필요한 것이다. 연애를 하고, 성관계를 맺고, 게임을 하고, 술을 마시면서 그 힘든 삶을 이겨내고 견뎌낸다. 그래서 일탈은 공부와 경쟁의 삶에서 살아남기 위한 수단이자 오아시스다.

29. 무기력은 통제감을 잃어버리는 데서 온다. 아무리 노력해도 자신이 뭔가를 변화시킬 수 없고 어느 것에도 영향력을 미칠 수 없다고 느끼면 사람은 무기력해진다. 상담실에 오는 많은 아이들은 무기력하다. 요즘 중고등학교에서는 수업시간에 자는 아이들이 부지기수이고, 심지어 유치원에서도 피곤하다며 잠을 자려는 아이들이 많아지고 있다고 한다. 공부를 ‘해드리고’ 학원에 ‘가드리며’ 몸은 엄마의 뜻에 따라 움직이고 있지만, 아이들의 눈빛은 공허하고 시도 때도 없이 졸음이 밀려오고 틈만 나면 자고 싶다. 의미나 목적 없이 학교와 학원을 쳇바퀴 돌며 열등감을 키우는 아이들에게 무기력은 자살하지 않고 살아남기 위한 유일한 선택이자 부모에게 할 수 있는 마지막 남은 보복이다. 즉 자신의 감정과 신념, 자신의 삶과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 자들에 대한 보복인 것이다.
 아이들은 원래부터 무기력한 것이 아니라 무기력을 ‘선택’한 것이다. 이들이 언제 그 선택을 철회하고 활력을 찾을지는 아이들 자신 말고는 아무도 모른다. 확실한 것은 무기력한 아이를 잡고 흔들면 흔들수록 아이는 더 무기력해지리라는 점이다. 그 어떤 칭찬이나 제안이나 훈계나 질책도 이 아이들을 일으킬 수 없다. 부모가 말한 대로 열심히 살지 않아야만 자신의 존재를 보존하고 살 수 있다는 것을 일찌감치 깨달았기 때문이다. 아이들은 무기력으로 부모가 원하는 삶을 살기를 거부하고 있다.
 부모는 아이에게 묻는다. 그렇다면 너희는 어떻게 살기를 원하느냐고. 그것을 알려 하기 전에 부모가 먼저 알아야 할 게 있다. 아이는 지금 어느 때보다 강하게 자신의 의사표시를 하고 있다는 것이다. 아무것도 안 하는 것이 아니라 아무것도 안 하겠다는 의사를 표시하는 것이다. 아이를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고 묻는 부모는 먼저 자기 자신에게 물어야 한다.
 ‘무기력은 살아남고 싶은 아이가 보여주는 강력한 거부의 의사표시다. 이것이 무슨 말인지 나는 이해할 수 있는가?’

35. 물론 대학에 교무실이 없어서 등록을 포기하는 아이는 매우 소수일 것이다. 그러나 많은 상위권 아이들은 그와 유사한 경험을 한다. 노는 일이나 친구 사귀는 일과 공부는 절대 병립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아니, 그렇게 생각하도록 훈련받았다. 그래서 둘 가운데 하나만을 선택해야 한다고 믿는다. 공부를 선택하고 나머지는 대학 가서 하면 된다고 생각한다. 교우관계는 공부하는 데 방해가 되지 않는 정도여야 한다. 아이들은 어떤 인간관계도 공부에 우선할 수 없다고 배웠다. 관계와 정서적 경험을 경시한 대가로 여러 증상이 나타나지만 대학 가면 다 나아질 것이라 믿고 무시해버린다. 하지만 대학에 가도 증상은 나아지지 않는다.

42. 어른을 경험하지 못한 아이들 (부모를 안티하는 아이들) 인터넷에 ‘부모안티카페’라는 검색어를 치면 아이들이 만든 카페가 나온다. 이곳에 한번 방문해보기를 권한다. 게시판에 올라온 글을 읽다보면 아이들이 부모에게 느끼는 분노가 너무 적나라해 섬뜩하기까지 하다.

 아이들의 분노가 왜 이리 극단적일까? 아이들이 왜 이토록 적의에 차 있을까? 아이들이 올린 글을 살펴보면, 자신을 노예로 만들려는 엄마에 대한 분노, 부모자신도 안 하는 일을 자기에게 강요하는 데 대한 분노, 공부를 몬한다고 성정이 떨어졌다고 멸시당하는 데 대한 분노 때문이다. 무엇보다 아이들은 모든 것을 공부와 연결시켜 공부라는 말을 통하지 않고서는 아예 아이와 대면하려 하지 않는 천박한 부모들에게 분노하고 있다.

47. (집 밖에서야 어른다운 어른을 만나는 아이들) … 엄마와의 대화도 마찬가지였다. 공부해라. 공부했니? 공부하니? 언제 공부할거니? 이런 말 말고는 나눌 이야기가 없었다. 어쩌다 대화를 시작하면 이야기는 늘 공부로 끝났다. 좋아하는 가수 이야기로 시작해도, 같은 반 아이가 축구하다 다친 이야기를 해도, 담임 선생님 이야기를 해도, 교장 선생님이 새로 오셨다는 이야기를 해도 엄마는 항상 공부를 열심히 해야 한다는 결론으로 끝맺을 수 있는 위대한 능력을 갖고 있었다.

51. 어른이라면 아이가 기댈 수 있어야 한다. 기대도 무너지지 않을 것 같아야 하고, 기대라고 억지로 잡아당기지 않는 사람이어야 한다. 그런 존재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든든하고 다시 스스로 일어설 수 있는 힘이 난다. 아이와 같은 수준에서 싸우고, 아이에게 자신도 옳지 않다고 생각하는 거짓 삶을 강요하고, 아이가 말을 안 들어준다고 토라지고, 아이의 고민을 묵살하고, 아이의 고통을 다 안다는 듯 우습게 여기는 것이 부모의 권리일까? 그것이 어른다운 모습일까? 그런 부모는 아이들의 분노만 키울 뿐이다. 그래서 아이들은 부모를 싫어하고 우습게 여기기까지 한다. 그리고 우리나라 부모들은 이처럼 어른스럽지 못하다.

63. 테러리스트가 되려는 아이들이 점점 많아지고 있다. 학교에 가스통을 가져와 폭파해 버리고 싶다는 아이, 학교에 불을 지르고 싶다는 아이, 학교 급식에 독극물을 넣어 다 죽인 뒤 자신도 죽었으면 좋겠다는 아이…… 경쟁에서 도태되는 친구들에 대한 미안함이 부채감, 죄책감으로 자리 잡은 아이들. 이 아이들은 학교와 사회를 버리다 못해 아예 없애려 하고 있었다. 떠나고 버리는 것만으로는 부족해서 아예 없애려고 하는데 도대체 무엇을 없애야 이 거대한 학력생산 공장이 멈추게 될지 몰라 화염병을 들고 그냥 그 자리에서 눈물만 흘리고 있다.

64. 속이 텅 빈 아이들 (무기력보다 더 큰 문제) 요즘 아이들에게 자기 이야기를 해보라 하면 알 수 없는 침묵에 빠지는 경우가 많다.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같은 질문 자체를 생소하게 여기는 것이다. 부모가 자기에게 원하느 ㄴ것, 부모가 싫어하는 것은 부모 자신보다 더 잘 아는데 자신의 생각이나 자신이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은 정작 잘 모른다. 어쩌면 무기력보다 더 심각한 요즘 아이들의 증상이 아닐 수 없다.

71. 사육당하는 아이들은 자신의 내면이 텅 비어가는 줄은 모른 채, 오로지 사육사가 오늘은 밥을 적게 주나 많이 주나, 오늘은 채찍을 휘두르나 안 휘두르나, 훈련을 많이 시키나 적게 시키나, 어려운 훈련이 얼마나 있나 이런 것만을 걱정하고 있다.

(자신의 삶을 상상하지 못하는 아이) 
지금의 아이들은 자신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상상하는 일조차 귀찮아한다. 자신의 욕구가 현실에서 이루어지지 못하리라는 무력감 때문이기도 하지만, 더 근본적인 이유는 아이들에게 상상하고 싶은 자기 삶에 대한 욕망이 없기 때문이다. 부모만 쳐다보고 있으니 자신을 쳐다볼 시간이 없는 것이다.

73. ‘엄마에 의해 주도된 자기주도학습’을 하는 상위권 아이들이나 공부를 억지로 ‘비주도적으로 해드리는’ 아이들이나 속이 텅 비어 있는 것은 마찬가지다. 자신의 삶을 주도하지 못하고 공부 스케줄만 주도하고 있는데 어떻게 자신의 삶에 대한 욕망이 생기겠는가. 자신의 삶에 대해서 상상하지 못하기는 마찬가지다.

77. 이제 대한민국 아이들은 두 분류로 나뉘는 것 같다. 이미 증상이 나타난 아이들과 아직은 증상이 나타나지 않은 아이들. 이렇게까지 단순화하여 주장하는 근거는 아이들이 보이는 증상의 유형과 정도가 다양함에도 그 원인과 기능이 유사하기 때문이다. 아이들의 병은 개별 가정의 문제가 아니다. 아이들이 보이는 증상의 원인을 들여다보면 결국은 하나다. 자신의 삶을 누릴 자유가 없다는 것, 삶에 대한 감각을 상실해버렸다는 것이다.

(좀비처럼 살아가는 아이들)
자신의 감각으로 느끼고, 상상하고, 욕망하고, 그 욕망을 현실에서 표현할 수 있을 때 우리는 살아 있는 존재라고 느낀다. 삶에 대한 자유와 감각을 잃어버리도록 강요당하는 상황에서 아이들은 스스로 살아 있음을 확인할 수도 없다. 어디까지가 나의 생각이고 나의 느낌인지 경계가 희미할 뿐 아니라, 자신에 대한 인식조차 희박할 수밖에 없다. 감각 기능마저 마비돼 마치 좀비처럼 살아가는 아이들에게 인간다운 존재로 성장하기를 기대하기는 어렵다.
 어디에서도 자신을 확인할 수 없는 아이는 결국 자신을 신뢰하지 못한다. 성적이 상위권인 아이들조차 문제가 생길 때마다 누군가에게 물어보고, 누군가 알려주지 않으면 자신의 생각과 느낌을 믿을 수 없어서 불안해하고 초조해한다. 자신을 믿지 못하는 아이들은 부모와 사회의 요구에 더욱 맹목적으로 순종한다. 비대해진 머리를 지탱하는 자신의 가냘프고 병든 몸은 그렇게 하면 안 된다고 경고하지만 감각이 마비돼가는 아이들에게는 다른 대안이 없다. 이렇게 대한민국 아이들은 산 채로 죽어간다.
 이것은 대한민국 부모와 사회의 증상이 만들어낸 고통을 아이들에게 전가한 결과다. 태어나기 위해, 잉태되기도 전에 부모와 일방적 계약을 맺은 아이를 상상할 수 있는가? 불행히도 대한민국 아이들은 자신의 의사와는 무관하게 그렇게 태어나고 길러진다. 이것이 아이들을 구하기 위해 대한민국 부모들이 가진 증상을 들여다볼 수밖에 없는 이유다. 상담실을 찾는 아이들의 증상은 결국 일그러진 대한민국 부모의 자화상이기 때문이다.

237. 중요한 것은 진단이 아니라 원인일 것이다. 규형씨 부부가 섹스리스인 것은 서로가 더이상 성적으로 매력적이지 않아서, 또는 규형씨가 너무 힘들고 지쳐서일 수 있다. 하지만 대한민국 남편에게 아내는 하나의 ‘부담’인 경우가 많다. 규형씨가 ‘식구’라고 표현하는, 가장으로서 부양해야 할 책임의 대상들, 집에 오면 그 ‘살아 있는 책임들’이 떡 하니 버티고 앉아 왜 더 많이 잘해주지 않느냐고 한다. 한마디로 가족은 ‘끊임없이 요구’하는 존재다.
 ‘끊임없는 요구’. 그 요구의 대부분은 교육과 관련되어 있다. 사교육, 공교육, 예체능교육. 그런데 그렇게 많은 교육을 받으면서 애들은 왜 저렇게 예의가 없을까? 자발적으로 자기 인생의 대부분을 아이들 교육에 희생하면서 왜 아내는 자기 삶이 없음을 한탄하며 이 어려움을 해결할 수 있는 방법으로 더 많은 수입만을 요구할까? 가족이 식구가 되고, 식구가 요구가 된 가정. 이런 상황에서 ‘살아 있는 책임’과 섹스가 가능하다면 그편이 더 이상한 거다. 누가 아버지들을 이 요구로부터 해방시켜줄 수 있을까? 누가 남편이 성을 건강하게 발산할 수 있도록 해줄까?

239. 공간이 하나의 상징적 권력을 나타낸다면, 옛날 아버지의 권력은 집 전체였지만 지금 아버지의 권력은 집 어디에도 없다. 사생활은 없고 회사생활과 가정생활만 있는 한국의 아버지들에게, 한 뼘의 공간도 사적으로 점유할 수 없는 그들에게 이제 더이상의 요구는 무리다. 그 요구의 대부분이 투자에 비해 보장은 터무니없는 ‘대학’ ‘교육’이라는 허울 때문에 발생한다는 것이 이 시대 아버지들이 겪는 발기불능의 비극이다.

255. 한 번도 공교육이 무엇이며 어떠해야 하는지, 아니 교육이란 무엇이며 어떠해야 하는지 고민해본 적 없는 엄마들과, 사랑이 무엇인지, 관계가 무엇인지 한 번도 제대로 고민해보지 않고 자신이 무엇을 해야하는지 성찰해본 적 없는 아내들. 그들이 만들어가고 유지해가고 ‘지켜가는’ 이 한국 사회의 가정과 교육은 오늘날 ‘외도’로써만 가능하게 되었다. 그래서 그들의 아이들 역시 무단결석도 하고, 폭력이라는 의식도 없이 폭력을 저지르고, 일탈을 감행하며 의미 없는 등교행위를 지속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268. 관계에서 상대방을 심리적으로 위축시키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다. 먼저 어떤 것을 요구한다. 요구는 은밀하거나 요구의 티가 나지 않는 것일수록 좋다. 그런 다음 상대가 그것을 해주면 만족스럽지 못하다고 한다. 물론 이것도 티가 나게 하면 안 된다. 가능하면 약간은 만족하지만 완전히 만족스럽지 않다는 메시지를 전달하면 된다. 문제가 큰 것이면 대놓고 무시해도 된다. 아니면 은근히 두고두고 불만을 표시하면 된다. 그러면 상대는 위축되고 미안해지고 자기 능력에 대해 불신이 들면서 급기야 주눅이 들 것이다.
 또 하나는 상대의 노력을 기본적으로 누구나 다 하는 것으로 만들어 버리는 것이다. 남편들이 자신의 어려움, 가족을 위해 노력하고 있는 일들을 이야기하면, 아내들은 “제발 생색 좀 내지마. 그건 남자들이면 다 하는 거야”라든지, “누구네 아빠는 돈도 잘 벌고 애들하고 잘 놀아주면서 여행도 잘 다니던데, 당신은 그중에 하나도 제대로 못하냐?”라든지, “야, 요즘 그런 것도 안 하고 사는 남자들이 어딨냐? 당신만 잘난거 아니니까 제발 잘난 척 좀 하지마”하고 말한다. 이런 말을 한두 달에 한 번 정도만 날려주면 남편 주눅 들게 하는 건 3년이면 충분하다. 
 아내들이 결국에는 이겨내고 마는 방법 중 또 하나, 가장 흔하고 잘 먹히고 부작용이 없는 방법이 있다. 자기를 피해자로 만드는 것이다. “당신이 나한테 해준 게 뭐가 있는데?” 이런 말은 애교에 속한다. 남편이 행패를 부리거나 비상식적인 행동을 하면 그것으로 비극을 한 편 쓰면 된다. 자기 인생을 나락으로 빠뜨린 사람이 남편이라고, 모든 책임을 남편에게로 돌리고 자신은 불가항력적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노라고, 자기 삶의 모든 고통은 남편에게서 비롯되었다고 하면 된다. 이렇게 자신을 비극의 주인공으로 만들고, 그럼에도 “이 엄마는 너희들만 믿고 산다. 너희들을 위해서라면 이 고통도 다 감내하며 살 것이다”라고 하면, 아이들은 피해자인 어머니의 숭고한 희생정신에 미안해하고 어머니의 삶을 불쌍하게 여겨 아버지를 배척하고 어머니의 편에 설 것이 분명하다. 게다가 아버지는 돈 버느라 바빠서 아이들과 정서적 동맹을 맺을 틈도 없으니 아이들이 엄마 편이 되기란 아주 쉽다.

(…) 아이가 달라져야 한다고? 남편이 달라져야 한다고? 선생님이 달라져야 한다고? 맞다. 하지만 ‘아내’도 달라져야 한다. 남편의 정서는 돌보려 하지 않는 아내가 아이들을 제대로 키울 수 있을까? 아이들을 아바타로 만들어 자신의 삶을 만회하려 하고, 남편을 가해자로 만들어 자신을 비극의 주인공으로 만드는 아내의 희생자 코스프레는 이제 막장드라마만큼이나 지겹다.

273. (어른이 되지 못한 오누이 부부) 대한민국 부부들은 아직 어른이 되지 못한 것 같다. 자신의 상처를 돌보는 데 몰두해 자기 자신에게만 집착하는 것 같다. 아내나 남편이나 자신은 희생하고 고통을 감내하고 있는데 상대방이 그것을 알아주지 않는다고 어린아이처럼 투정부리고 억울해한다. 하지만 과연 누구를 위해, 무엇 때문에 그 고통을 감내하고 있는지 정작 자신은 모르고 있다. 배우자나 자식 때문에 고민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모두 자기 안에 있는 결핍과 공허함으로 고통받고 있는데도 말이다.

결국 아내들이 경험하는 가장 큰 고통은 자기 내면이 공허하다는 것이다. 비슷한 문제로 상담실을 찾는 중년 여성들에게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이야기해보라고 하면 머리가 하얗게 비고, 시커먼 동굴처럼 끝이 보이지 않는 두려움이 먼저 가슴에 밀려온다고 말한다. 자기 안에 무엇이 있는지, 자기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도무지 알지 못한다. 생각해보면 자신의 삶을 어떻게 채울지 제대로 고민해본 적도 없다. 그러니 결국 붙잡을 것은 아이들밖에 없다. 남편을 위로해주고 싶지 않은 것도, 자식에게 지나치게 집착하는 것도, 결국 자기 안의 결핍 때문이라는 것을 모르지 않는다. 그저 그런 자신을 들여다보고 싶지 않을 뿐이다.

(문제는 관계의 결핍이 아니다) 
상담에서 많은 부부들이 어떻게 부부관계를 회복할 수 있는지를 묻는다. 그러면 이런 이야기를 들려준다. “먼저 자신이 상대에게 무엇을 요구하고 있는지를 보세요. 상대에게 요구하는 그것이 바로 당신 자신에게 결핍된 것이고, 그것은 당신 스스로 채워야 합니다. 자신의 결핍을 상대를 통해 채우려는 어리석은 욕망을 뭄추어야 합니다. 모든 문제는 관계의 결핍이 아니라 자신의 결핍에서 와요. 자신이 타인의 지옥이 될 수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지금 대한민국 가정에서 ‘교육’의 이름으로, ‘교육’을 위해 행해지는 일은 정치와 자본의 음모로서, 그들이 만들어낸 제도와 시스템이 우리에게 유령처럼 스며들어 우리 삶을 송두리째 불안 속으로 밀어넣고 있기에 가능한 일이다. 이제 그 연결고리를 밝히려 한다. 그것은 제도와 시스템을 유지하기 위해 희생해온 우리의 삶을 변화시키고, 그 제도와 시스템을 우리의 삶을 위한 것으로 되돌려놓기 위한 시작이다.

한국 사회에서 높은 대학진학률은 성숙한 시민의 등장을 나타내는 지표가 아니라 주류를 향한 모방적인 경쟁의 악순환을 나타낼 뿐이다. 대학은 모방경쟁 대열에 합류 하지 않는 사람들을 손쉽게 비주류, 주변부로 몰아내는 천박한 선별 기준으로도 기능한다.
… ‘대졸자 주류’는 한국 사회에서 다양한 삶의 방식을 주변화하면서 주류적 가치와 소비를 주도하는 보수적인 집단으로 기능하고 있을 뿐이다.
… 이들이 ‘정상’이라고 느끼는 감각은 ‘남들’과 비교해 뒤치지지 않는 삶이다. 남들이 누리는 것을 누리지 못하는 삶은 뭔가 문제가 있는 삶이며 주류에서 밀려난 삶과 동이시된다. 정상-비정상, 주류-비주류의 기준은 늘 내가 아닌 남에게 있다. 그래서 그토록 남들 다 가는 대학, 남들 다 사는 아파트, 남들 다 타는 차에 집착하고, 끊임없이 남들을 모방하며, 모방하기 위해 경쟁한다. 그러나 그런 자신이 특별히 욕심이 많다거나 대단한 것을 바라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저 대한민국에 사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가지는, 평범하고 소박한 소망일 뿐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것은 아이들을 죽이고 미치게 만드는 ‘잔혹하게 소박한’ 소망이다.

사실 어느 사회든 주류와 비주류는 있기 마련이다. 그러나 한국처럼 ‘대졸자 주류’가 만들어낸 욕망에 의해 압살되는 사회는 어디에도 없다. 물론 대졸자 주류가 그 사회에 좋은 가치를 제시하고 모범이 된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을 것이다. 그러나 대학을 졸업하고도 제대로 된 전공 지식은 고사하고 시민으로서 갖춰야 할 기본적인 교양조차 갖추지 못한 사람이 태반인 상황이라면 문제는 달라진다.
 사실 자신에게 진정으로 가치 있고 의미 잇는 것은 무엇이며 그 가치를 따르는 삶은 어떠한 것인지 제대로 생각해본 적도, 경험해본 적도 없는 대학 신봉자들. 이들은 분열된 자신의 삶에 눈감은 채 시스템의 중력에 몸을 싣고 놀라울 정도로 무책임하게 자신의 아이들을 희생시키면서까지 시스템의 재생산에 기여하고 있다. 자신들이 기대고 있는 사회의 시스템에 휘둘리면서 그 시스템이 안겨다주는 어떤 치욕도 참아내면서 주류의 삶에서 밀려나지 않겠다는 일념으로 하루하루를 버티고 있다. 그 대가로 얻은 것은 무엇이고 잃은 것은 무엇인지 돌아보려 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제는 직시할 때가 되었다.

… 앞서 대학은 진짜 문제가 아니라고 했다. 그렇다면 무엇이 문제일까? 난파선에서 구명조끼를 얻었다며 모두들 환호하는 사이 누군가는 쾌속선을 타고 이미 그 상황에서 빠져나갈 수 있었던 것처럼, 다들 무언가에 홀린 듯 앞뒤 보지 않고 그저 살아남겠다는 생각으로 악다구니를 쓸 때 진짜 문제는 다른 곳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경제학자 장하준은 <그들이 말하지 않는 23가지>라는 책에서 자본주의 사회의 경제적 불평등 문제를 이야기하며 ‘기회의 평등’뿐 아니라 ‘결과의 평등’을 보장 할 수 없다면 그 사회는 실질적인 의미의 평등을 보장하지 못하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구명조끼라고 생각했던 ‘대학’은 난파해가는 삶을 직면하는 것을 유예해주는 낡은 뗏목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무엇이 우리를 이런 상황으로 이끌었는지 제대로 바라볼 수 없도록 우리의 눈과 귀를 가린 시스템의 거짓말이었던 것이다. 현재 한국의 교육은 내용은 텅 비어 있고 절차라는 껍데기만 남아 있을 뿐이다.

게다가 문제는 그 두려움과 공포를 더 강화한 곳이 다름 아닌 학교였다는 사실이다. 인도의 사상가 비노바 바베는 교육의 목적은 ‘두려움으로부터의 자유’라고 했다. 그러나 적어도 한국에서 학교교육은 두려움을 더욱더 내면화하는 과정에 지나지 않는다. 인생에서 가장 꾸밈없고 자유로워야 할 시간을 우울하고 억압적인 환경에 얽매여 있어야 한다.

생각해보면 학교는 ‘가상현실’이 등장하는 영화를 틀어주는 극장 같은 곳이었다. 정치철학자 슬라보예 지젝은 카페인 없는 커피, 알코올 없는 맥주처럼 핵심적인 것이 빠진 현실을 ‘가상현실’이라고 말한다. 학교가 우리에게 보여준 것은 자유 없는 자유, 평등 없는 평등이라는 일종의 가상현실이 아니었던가. 그러나 영화가 끝나고 극장을 나서는 순간 현실은 밀려오고 우린 제도의 폭력과 맞닥뜨린다.

(대학은 생계형 보험? 보험비 버느라 파괴된 가정)
아이의 미래에 대한 불안처럼 보이지만 실은 부모 자신의 노후에 대한 불안이기도 한 것이다. 비빌 언덕이 없는 대한민국 부모들이 믿는 유일한 보험은 교육이다. … 누구도 자식의 미래, 자신의 노후를 보장해주지 않기 때문이다.

부모는 아이를 위해 야간 대리운전과 노래방 도우미도 불사했지만 가족은 산산조각이 났다. 어쩌면 이 순간에도 또다른 야간 대리운전 기사 아빠와 노래방 도우미 엄마는 아이의 학원비를 벌기 위해 열심히 ‘부모 노릇’을 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해서라도 아무도 보호해주지 않는 사회 안에서 자신과 아이들이 살아남으려 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 믿음은 결국 파멸과 불행만 낳았을 뿐이다.

이제 누가 우리를 지켜줄 것인가? 대학은 이제 출세와 신분 상승을 위한 교두보가 아니라 신분 하락을 막아줄 마지노선인 것이다. 대학마저 나오지 못한다면 이 험한 세상에서 무엇 하나 믿을 것이 없으니 아이들의 앞날이 캄캄하다. 더 나아가 30, 40대 가장이 되어서도 제 앞가림을 못하는 자식들을 돌보아야 할 자신의 노후가 암담하고 공포스럽다. 그래서 대한민국 부모들은 이렇게 또다시 무지한 종속적 삶의 방식을 고수한다. 구명조끼를 다른 말로 바꿔보면, 대학은 생존을 위한 최소한의 보험이 된다. 투자에 비해 아무것도 보장되지 않거나 터무니없이 보잘것없는 보상만이 주어지는 보험이지만 그나마 잡지 않으면 아무런 미래도 없을 것 같아서 대학이라는 보험을 구명조끼를 놓지 못한다.

복지나 사회적 안전망이 갖추어지지 않은 상황에서 교육과 학력은 서민들에게는 생존을 위한 생계형 보험으로 받아들여진다. 그 보험마저 없다면 미래가 너무나 공포스럽다. 비빌 언덕이 없는 부모들이 선택한 유일한 보험인 교육, 그런데 그것은 과연 우리에게 무엇을 보장해주고 있는가? 불안과 공포를 보장해주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대한민국의 부모들은 사회와 제도에 대한 의심이 자기 삶에 대한 공포로 확장되는 것을 서둘러 차단하기 위해, 자신도 완전히 수긍할 수 없는 그 제도에 순응한다. 하지만 그것이 결국 우리 아이들과 가족에게는 붕괴의 길이 되고 만다. 아이들을 더욱 극악해지는 경쟁적인 삶으로 내몰고 숨통을 조이면서 ‘포기하는 것은 너무 억울하다. 우리 아이만큼은 해낼 수 있을 거야’라며 스스로를 희망고문하고 있을 뿐이다.

(우리가 불행한 이유)
결국 부모들이 필사적으로 틀어막으며 직면하고 싶어하지 않는 진짜 이야기는 따로 있다. 현실은 학력, 재산, 인맥으로 견고하게 짜인 ‘그들만의 리그’이며 계층 간의 차별과 격차를 넘는 것이 쉽지 않다는 사실 말이다. 복지나 사회적 안전망이 갖추어지지 않은 상황에서 교육과 학력은 서민들에게 생존을 위한 보험일 수밖에 없다. 그 보험마저 없다면 미래가 너무나 공포스럽다. 중상층이나 중산층 부모들에겐 사회적 지위와 권력을 유지할 수 있는 최소한의 자격요건이다. 교육은 일종의 절차가 되어버려 그것을 통과하지 않으면 최소한의 안정적인 직업 선택과 삶의 기회마저 주어지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많은 부모들이 주문을 외우듯 일단 대학만 가면 다 해결된다며 아이들을 닦달한다.

(무엇에 대한 불안인가)
진짜 문제는 문제 자체가 잘못되었다는 사실이다. 그런데도 부모들은 정답이 없는, 답할 수 없는 문제에 꾸역꾸역 애써 답을 만들었다. 애초 문제가 잘못되었다고 항의하지 못하고 그저 어떻게라도 답을 만들려 한 것이다. 정작 문제를 낸 사람은 답을 내놓지 않고 있는데 말이다. 그러나 엿까지 고아가며 정답을 만들어온 부모들을 어리석다고 비난할 자격이 과연 우리에게 있을까? 제도가 원하는 정답을 만들어온 부모들은 사교육에 살림이 거덜나고, 가정이 파괴되는 한이 있어도 아이를 명문대에 입학시키려는 우리와 실은 다르지 않다. 잘못된 제도를 그대로 둔 채 그저 자신의 아이만은 그 제도의 선택을 받기 바랄 뿐이니 말이다.
 제도의 불합리함과 문제점을 알고 그 때문에 고통받으면서도 우리는 왜 그것을 고치려 하지 않는가? 어차피 강요된 선택인데 왜 그것을 누구보다 충실히 이행하는가? 잘못된 질문을 던지며 정답을 만들어 오라는 어처구니없는 요구에 대해 오직 “예”라고 주억거릴 뿐 왜 저항하지 못하는가? 이것이 자신의 삶에 대한 자발적인 고문이 아니고 무엇일까? 자포자기와 같은 행위에서 우리는 무엇을 즐기고 있나? 이 제도와 시스템은 우리의 고통을 먹고 사는 것이 분명한데 말이다. 이런 세상에서는 살기 싫다며 몸을 던지는 아이들의 외침에 우리는 왜 귀를 막고 있는가? 우리는 아이들의 미래를 담보로 시스템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과 우리가 할 수 있는 것 사이의 간극을 메우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한국 교육 문제의 핵심은 ‘불안’이라고들 말한다. 부모들은 움직이는 동력은 다름 아닌 불안감이라는 것이다. 내 자식이 남보다 못할까봐, 남에게 뒤처질까봐, 사회에서 낙오자가 될까봐 무보들은 전전긍긍한다. 사실 불안만큼 확실한 겁박은 없다. 부모의 불안은 자식의 미래보다. 아니 지금 눈앞에 있는 아이보다 더 확실하다. 불안으로부터 면제되는 사람은 없다. 그런데 부모들의 불안에는 좀더 근본적인 원인이 있는 것 같다.
 우리는 실은 시스템 자체가 불안한 것이다. 시스템이 자신을 보호해줄 것이라고 믿지 못할 뿐더러, 시스템의 문제해결 능력도 믿을 수가 없기 때문에 불안한 것이다. 제도와 시스템이 자신을 보호해주리라는 확신이 들고 그것에 기댈 수 있을 때 사람들은 그 안에서 뭔가해볼 마음을 먹는다. 그런데 우리 사회는 시스템에 대한 신뢰가 제로에 가깝다. 그런 상황에서 사람들은 결코 시스템을 바꾸거나 제도적인 변화를 위해 노력을 기울이며 자신의 미래를 걸지 않는다. 시스템을 향해 자신의 요구를 호소하지 않는다. 그나마 시스템이 유지되는 것은 그것이 제대로 굴러가고 있다고 믿고 싶은 사람들의 희생과 노력 때문인지도 모른다.

경험적으로 우리는 이 사회가 시스템으로 굴러가는 것이 아니라 돈과 빽으로 움직인다는 것을 안다. 제도나 시스템이 있지만 허울뿐이거나 현실을 가리는 하나의 연막에 지나지 않고, 세상은 돈과 빽에 의해 움직인다고 생각한다. 그러니 겉으로는 제도와 시스템을 따르지만, 제도와 시스템의 변화에 노력을 기울이는 대신 각자 알아서 돈과 빽의 세상에 다가갈 수 있는 동아줄을 잡는 일에 고군분투할 수밖에 없다. 시스템에 대한 불안을 반동적이고 투기적인 방식으로 해결하려는 것이다. 여기에 불안과 공포는 투기적인 삶을 더욱 조장하는 기폭제가 될 뿐이다. 결국 누군가의 말처럼 한국에서 교육은 “판돈이 크게 걸린 아슬아슬한 도박”에 지나지 않는지 모른다.
 그런데 썩은 동아줄이라도 붙잡겠다며 악다구니 쓰는 사람들은 그 바람을 이룰 수 있을까? 안타깝게도 그들은 ‘헛똑똑이’에 지나지 않는다. 잘못된 제도와 시스템은 점점 그들을 옥죄어올 것이다. 현재 우리가 고통받고 있는 것은 잘못된 제도와 시스템을 그대로 방치한 우리의 책임이 크다. 그 고통은 이제 우리 아이들을 옥죄고 있다. 이제 시스템의 문제를 외면하고는 지금 우리가 처한 곤경으로부터 한 걸음도 나아갈 수 없다.

<아이는 부모의 성찰을 물려받는다>
부모 노릇도 전문가와 매뉴얼로부터 배우는 부모들. … 그래서 그런지 아이가 문제가 아니라 부모가 문제라는 말을 부모 자신의 입으로도 서슴없이 한다. 그런데도 점점 더 많은 부모들이 부모 노릇이 막막하다고 한다. 부모가 문제라는 것도 알고, 어떻게 양육해야 하는지를 책에서도 텔레비전에서도 보는데 왜 부모 노릇은 점점 더 막막하기만 할까?

진짜 불안은 부모 자신도 확신할 수 없는 삶의 가치. 가뜩이나 불안함으로 쩔쩔매는 부모들에게 이것이 진짜 정답이라고 소리치면서 이 프로그램을 따르지 않으면 크게 후회할 것이라며 부모를 더 불안하게 하는 ‘자칭 전문가’들이 너무 많다. 그들은 모두 학원 원장과 다름없는 교육시장의 하이에나들이다. 단호히 말하지만 아이의 미래는 매뉴얼이나 부모교육 프로그램으로는 얻을 수 없다.
 아이의 미래는 부모가 물려주는 무언가로 그 일부를 채울 것이다. 그러나 아이에게 물려줄 수 있는 것은 오직 부모 자신이 확신할 수 있는 것이어야 할 터이다. 그것이 없으니 불안할 수밖에 없다. 부모들이 불안한 것은 의사소통 기술을 잘 활용하지 못해서가 아니라 사실은 사회적 성공 말고는 자녀에게 물려줄 가치라는 것이 아예 없기 때문인지 모른다.

부모인 내가 유예했던 것은 내가 옳다고 믿는 가치를 나의 삶으로 받아들여, 그것을 삶 속에서 구현해내는 일이었다. 인간됨이 돈과 권력과 학력에 의해 유린당하고 파괴되는 세상의 가치를 생각으로만 거부하면서 술자리에서 침 튀기며 욕하는 데 그치지 않고 실제 그 가치대로 사는 행동을 유예한 것이다. 다른 사람의 삶에 관심을 가지고 다른 사람을 위해 내 삶을 열어놓아야 함을 알면서도, 개인과 사회가 분리될 수 없음을 알면서도 실행에 옮기지 않았다. 결국 사회 속에서 정치적 개인으로 살아가는 공동체적 삶을 유예한 것이다. 그렇게 나는 아이에게 유예를 대물림하였고 아이는 바로 유예하는 삶의 방식을 대물림받았다.
 이제 막막해하는 아이에게 부모인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부모로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이제부터라도 나의 삶의 가치에 확신을 가지고 그 가치대로 사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리라. 대물림된 나의 유예를 거두어들일 수 있는 방법은 내가 더이상 그 유예를 허용하지 않는 것이다.

부모의 책임은 사회가 함께 나누어야 한다. 옳다고 믿는 가치를 삶 속에서 실현하는 것이 왜 그토록 힘들고 어렵고 막막했을까? 아이가 학교에서 교육이라는 이름으로 교육자에 의해 행해지는 반인권적이고 폭력적인 언사와 행동과 규칙들을 겪어내는 동안 왜 그러한 일을 더 적극적으로 항의하지 못하고 중단할 것을 요청하지 못했을까? 왜 결국 그러한 상황을 아무 말 하지 않고 견뎌내는 것으로 수용할 수밖에 없었을까?
 일차적으로 부모인 나 자신이 확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확신이 없었던 것이 과연 내 개인만의 문제였을까? 나는 함께할 누군가가 필요했다. 학교가 잘못되고 있다면 그것을 누구에게 어떻게 항의할 수 있으며 그 절차를 누구와 의논하고 누구와 연대할 수 있는지 부모인 나에게 어떤 권리가 법적으로 보장되어 있고 그것이 어떤 절차로 실행되고 있는지, 그 속에서 부당함을 고발하는 나와 내 아이는 어떻게 보호될 수 있는지……. 그러나 이에 대한 충분한 정보와 이를 지원하는 제도적인 도움을 얻지 못했다.
 독일에서는 전문계 학교를 다니는 고등학생들이 산업체에 실습새으로 나가면 회사에서는 가장 먼저 안전교육과 더불어 학생들이 어떤 권리를 가지고 있는가를 설명한다. 휴식시간, 임금, 노동시간, 안전수칙 등과 관련해서 학생들이 어떤 권리를 가지고 있고 회사가 이를 어길 경우 어디에 어떻게 항의할 수 있는지를 알려준다.
 내가 일해야 하는 회사에서 제일 먼저 내가 어떤 권리를 가지고 있고 만약 부당한 대접을 받을 경우 어떻게 대응할 수 있는지 가르쳐준다면, 그 회사는 얼마나 믿을 만한 회사이며 그런 기업이 있는 사회는 얼마나 든든한 사회인가. 마찬가지다. 우리 사회에서 집단이나 조직에서 개인이 느끼는 부당함에 대해 개인의 권리는 어떻게 보장되어야 하고 개인은 어떻게 보호받아야 하는지 제도적인 장치가 마련되어 있다면, 개인이 희생되거나 문제를 회피하지 않아도 될 것이며 집단과 사회의 문제도 해결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한 제도와 시스템을 같이 연대해서 고민하고 만들어내 그것이 정당한 방식으로 움직이도록 지켜내야 한다. 이것이 문제를 제기한 개인이 더 큰 불이익을 당하거나 조직의 부당함을 말하면 제거당하지 않고 우리 사회를 바로잡을 수 있는 가장 올바른 방법일 것이다.

 결국 부모 노릇이 막막한 것은 우리가 매뉴얼을 모르기 때문이 아니라 부모 개인에게만 부모 노릇의 책임이 부여되기 때문이다. 우린 지금 내가 겪고 잇는 문제가 결국 나만의 문제가 아닌 우리 모두의 문제이며, 우리 사회가 더 나은 방향으로 변화하는 데 기여할 수 있는 문제임을 지지해주는 가치와 시스템이 필요하다. 부당한 가치를 강요하는 사회에서 자기만의 삶의 방식과 가치를 지켜내려는 부모들이 보호받고 연대할 수 있는 제도와 시스템이 필요하다. 현재의 교육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하는 부모들이 얼마나 많은가. 하지만 어디서부터 어떻게 변화해야 할지, 달리 노력해볼 수 있는 제도적인 지원과 연대의 물꼬를 찾지 못해 주저하는 것이다. 

 이제 부모가 부모 노릇을 제대로 하기 위해서는 개인의 자각도 필요하지만 이를 지원할 수 있는 사회 시스템이 필요하다. 그 시스템은 양육과 교육이 부모 개인만이 아닌 사회 공동체의 과제가 되어야 한다는 가치를 지지하는 시스템이다. 적어도 미래 세대를 키워내는 양육과 교육과 보건은 사회와 국가가 지원하는 공공의 영역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한 인간을 키우는 것이 부모만의 염려와 책임이 아니어야 한다. 
 유럽의 경우 이 같은 제안이 민주적인 절차와 토론, 제도적인 뒷받침을 통해 사회의 공동체적 가치로 받아들여지는 과정을 거쳤지만 우린 아직도 제대로 된 논의조차 못 하고 있다. 이를 테면 여전히 논란이 일고 있는 무상급식의 경우 왜 부자인 아이가 똑같이 돈을 내지 않고 밥을 먹어야 하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공교육은 국민의 세금으로 국가가 책임져야 할 영역이라는, 하나의 가치를 채택하는 문제다. 다시 말하면 우리 사회가 공동체적 가치를 추구하는 방향으로 나아갈 중요한 기로에 서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선택은 바로 부모인 우리 자신의 선택인 것이다.

서민들은 죽도록 서로 싸우고, 가진 자들은 그냥 세습한다. 여기에는 부화뇌동한 우리 자신의 책임이 분명히 있다. 황새가 되고 싶어 안달난 뱁새부모들. 그들의 계층 상승을 향한 욕망, 신분 상승을 향한 대열에서 탈락할지 모른다는 불안이, 아이들만 죽이는 것이 아니라 그들 자신을 죽이고 있다. 뱁새를 부정하고 황새가 되려고 전전긍긍할 것이 아니라 뱁새라는 것이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 당당한 삶을 지켜내면 되는데 말이다.

(부모의 자기부정. 나처럼 살지 마라) 언젠가부터 한국의 부모들은 자식들에게 ‘나처럼 살지 말라’고 말하기 시작했다. 근대화라는 급격한 단절을 겪으면서 한국의 자식들은 ‘부모처럼 살지 말아야 한다’는 신념을 가져야 했다. ‘부모처럼 살지 말라’는 말은 곧 가난하게 살아서는 안 된다는 말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부모처럼 살겠다는 생각은 품어서는 안 될 불효였다. 바로 부모를 부정해야만 효도가 되는 비극의 시작이었다.

(부모가 먼저 자신의 삶과 마자하라) 상담을 하면서 가끔 아이들에게 부모님이 행복해 보이는지 묻곤 한다. 그러면 대부분의 아이들은 별로 행복해 보이지 않는다고 답한다. 왜 그렇게 생각하느냐는 물음에 아이들이 내놓는 대답이 날카롭다. 부모님은 늘 “너는 나처럼 살지 말아라”라고 말한다는 것이다. 나 같은 직업을 가지면 안 된다, 나 같은 결혼을 하면 안 된다, 나 같이 공부하면 안된다, 나 같은 성경을 가지면 안 된다 등등.
 아이들은 부모에게서 실패를 했든, 어려움을 겪었든, 상처를 지녔든 그것이 다 삶에 의미가 있다는 이야기를 한 번도 들어보지 못했다. 자신의 삶을 부정하면서 아이가 실패하지 않기를 바라는 부모의 모습에서 아이들이 배우는 것은 역설적이게도 ‘더 나은 사람’이 되려는 희망이 아니라 자신의 존재에 대한 부정이다. 부모가 자신의 삶을 부정하고 있는데 아이가 자기 존재를 온전히 받아들일 수 있을까? 자기는 못 누리고 못 가진 것을 모두 누리고 가진 아이들이 왜 자신을 소중히 여기지 않는지 답답해하기 전에, 아이한테 그렇게 누리고 갖게 하고 싶은 부모의 결핍이 무엇인지를 먼저 느껴야 한다. 그리고 결국 그 결핍을 채워야 할 대상은 아이가 아니라 자기 자신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요즘 아이 교육의 핵심 키워드로 통하는 아이의 ‘자존감’이란 것도 결국 부모 자신의 자존감에서 비롯된다. 아이에게 자존감을 갖게 한답시고 전문가들을 찾아다니며 온갖 코칭과 매뉴얼을 배우기 전에 부모 자신을 먼저 돌아보고 살필 일이다. 자신의 삶을 긍정할 수 없고, 삶의 과정과 자신이 찾은 삶의 의미를 당당하게 자식에게 전할 수 없는 부모들이 자식의 행복을 볼모로 자신의 삶을 되찾으려고 한다는 것을 말이다. 자신의 삶을 받아들이지 않는 부모를 보면서 어떻게 아이들이 자신의 미래의 행복을 기대할 수 있겠는가. 부모의 현재는 곧 아이들의 미래다. 아이들은 부모의 삶에서 자신들의 미래를 본다.

(자식으로부터 독립하라) 아들과 이혼해라. 그리고 제발 독립해라. 성인이 되어야한다. 자기 삶을 자신이 책임지고, 누구에게도 의존하려 하지 말아야 한다. 성인식이 없어져서 성인이 되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성인이 되고자 하는 과정이 없어졌기 때문에 성인식이 사라진 것은 아닐까? 성인식이 없고 통과의례가 없는 한국사회에서 어른들이 먼저 제대로 된 어른이 되어 아이들을 제대로 된 어른으로 성장시켜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 스스로 두렵고 불안하고 거부하고 싶은 ‘책임’이라는 과업을 수행하고, ‘독립적 인간됨’이라는 자기성장의 경험을 먼저 거쳐야 한다.

그런데 (성장) 과정을 지켜보는 나는 부모로서 불안과 두려움을 참고 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아이가 어른이 되기 위해 거쳐야 할 이 과정을 견디는 것뿐이다. 아이가 어른이 되는 과정이기 전에 내가 어른이 되는 과정이며, 아이에게 어른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 부모가 되는 과정이다. 개인적으로는 고통스럽고 흔들리는 경험이다. 그러면서 아이의 불안한 성장을 지켜보며 감내해야 하는 것이 나 자신이 어른으로 성장하는 마지막 과정이 아닐까 생각하게 되었다. 내가 가장 집착할 수 밖에 없는 대상인 아이에게서 독립하는 것. 아이가 나에게서 독립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아이에게서 독립하는 것, 이것이야말로 핵심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동료들과 생각을 나누고 서로에게 기여하지 못하는 아이의 사고력이나 지식은 별로 의미가 없다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너희가 몹시 떠들어서 내가 더이상 말을 계속할 수 없었다. 그래서 말을 중단했는데 내 뜻을 알아차리고 조용히 해주니 고맙구나. 지금까지 너희는 초등학생이었고, 이젠 김나지움 학생이 된다. 김나지움 학생이 된다는 것은 여러 가지 의미가 있다. 더 재미있는 공부와 활동을 하게 되고, 더 많은 지식을 배우게 되고, 같이 먼 여행도 가게 된다. 하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이렇게 많은 학생과 교사들이 어떻게 서로를 이해하고 도와가면서 같이 협력하고 생활하는지를 배우게 될 거라는 점이다. 아무리 공부를 잘해도 다른 사람과 함께 살아갈 수 없다면 그건 외롭고 재미없는 일이다. 너희가 다녔던 초등학교는 이 학교보다 훨씬 작은 학교이고, 그에 비해 이 학교는 훨씬 크다. 그래서 우리가 더 많은 차이와 갈등을 겪게 될 것이고, 그것을 잘 조정하고 서로를 배려하는 것이 필요하다. 지금 너희가 내가 목이 아프게 소리 지르지 않아도 되도록 내 뜻을 알아차리고 조용히 해준 것처럼 말이다. 오늘 너희의 행동을 보니 벌써 김나지움 학생이 된 것 같다.”

중요한 것은 자신의 삶의 방향과 원칙을 스스로 세우고 지킬 수 있는 자율이다. 더 적게 가진 사람에게 좀더 나눠주는 평등이 아니라 그 사람과 함께 살아갈 수 있는 연대의식이다. 내가 좀더 불편하고 손해를 본다 하더라도 그 길이 우리 중 누구도 아주 불행하고 힘들지 않게 살 수 있는 길이라면, 그래서 결국 조금 느리지만 다 같이 성장할 수 있는 길이라면 기꺼이 그 길을 선택하려는 공동체 의식 말이다.

뉴질랜드에는 있지만 한국에는 없는 제도를 별로 본 적이 없다. 한국에도 있을건 다 있다는 말이다. 내가 느끼는 가장 큰 문제는, 법과 제도도 잘 갖추어져야 하지만 결국 그것을 지켜야 할 우리들일 그것을 제대로 경험할 기회가 없었다는 것이다. 한국에도 좋은 제도는 있지만 그것을 제대로 지켜낼 시민, 성숙한 시민으로 길러낼 교육이 부재하다.
 사실 우리는 시민으로서 어떻게 생각하고 행동해야 하는지 제대로 교육을 받은 적이 없고 그런 사회를 우리의 힘으로 만들어본 경험도 없다. 여기에서 우리가 실은 제대로 교육받지 못했다는 사실과 우리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교육이 무엇인지가 극명하게 드러난다. 독일이나 뉴질랜드와 한국의 차이는 경제력의 차이라기보다는 공동체를 지키고 시민을 길러내는 교육의 차이다. 공동체의 가치를 지키며 서로를 배려하는 교양 있는 사람을 키우는 교육이야말로 교육다운 교육이 아닌가.

(다시 태어나기 위해, 이제 무엇을 해야 할까) 대한민국이 살 만한 곳이라고 믿는 사람들이 얼마나 될까? 이렇게 힘든 삶이 지속된다면 언젠가는 파국에 이를지도 모른다. 그 사실을 외면하기 위해 가능한 한 눈과 귀를 닫고 살기에 마음 깊은 곳에 우울함이 자리 잡고 있다. 그 우울함조차 애써 외면하며, 갈수록 복잡하고 견고해지는 경쟁체제 속에서 모두가 노력과 성공의 신화에 취해 스스로를 착취하고 있다는 사실조차 미처 깨닫지 못하고 있다. 오로지 살기 위해, 살아남기 위해 삶의 가치를 외면하고 삶의 의미를 반납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