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여행/여행기_이것도 여행이라고

여행기#21 앞일은 정말 알수 없을까.

요호호 2014. 8. 11. 22:30

앞일이란 정말 모를 일일까


 베트남에서 지낼 때 영제가 나시티를 샀다. 아디다스 로고가 박혀있는 짝퉁 티였다. 가격은 10만 동(약 5천 원). 사야되나 말아야되나 길고 긴 고민을 했더랬다. 겨우 5천 원 일뿐이지만 돈은 없고 시간은 많은 게 여행자. 고민과 토론, 흥정 끝에 사기로 했다. 하지만 영제는 먹을 것 외에 돈을 쓴다는 자괴감이 컸는지, 나도 옷을 사라고 부추겼다. ‘두고두고 입으면 되잖아~‘, ‘…음, 그렇지.' 졸지에 나도 추리닝 바지를 샀다. 


 영제가 나시티를 산 그날 밤, 나는 영제의 자연 그대로의 겨드랑이 숲과 만났고, 영제는 낮에 산 것과 똑같은 나시티를 야시장에서 더 싼값에 만났다. 가격은 6만 동(약 3천 원). 거 참, 5천 원도 싸다고 샀는데 어떻게 3천 원에 파는 걸까.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영제는 충격을 받았는지 '4만 동(약 2천 원)이나 싼 이 옷은 뭔가 흠이 있을 거다.’라고 말같지 않은 소리를 했다. 그리고 다음날, 이 무슨 운명의 장난인지, 우리는 10만 동에 반바지까지 주는 나시티를 봤다. 애써 밝은 척하는 영제가 안쓰러웠다. 그런 영제를 기리는 의미로 나는 10만 동에 반바지까지 주는 나시티를 샀다... 앞일이란 정말 모를 일일까


 지난 해 3월 31일, 동해항에서 출발해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로 향하는 이스턴드림호를 탔다. 279일의 여행이 시작된던 날이다. 점점 멀어져가는 한국의 모습을 갑판에 서서 담았다. 비장한 결의를 다지고 싶었는데 배가 고팠다. 새벽 5시에 일어나 서울을 거쳐 동해로, 동해항 터미널에서 입선 수속을, 2시가 되도록 밥을 못 먹었다. 결의는 좀 있다 다지기로. 식당에 갔다. 붉은 카펫이 깔리고 샹들리에가 달려 있는 고급 식당이었다. 메뉴판을 펼쳤다. 고급스런 외관이 자칫 손님들에게 부담을 줄까봐 걱정이 됐는지 메뉴는 어묵, 돈까스, 라면 등 고속도로 휴게소에 온 듯 친근한 것들이었다. 휴게소 정신까지 계승했는지 어묵, 돈까스, 라면은 비쌌다. 메뉴를 3번 정독해보았지만 적당(저렴)한 음식을 찾을 수 없었다.


라면 : 6,000 원


‘우와, 진짜 비싸다. 이런 가격에 팔고도 너희가 인간이냐.’ 하지만 오랫동안 한국을 떠나는 이 마당에 라면을 언제 다시 먹어보겠냐.는 지극히 나다운 생각이 들었다. 웨이터를 불렀다. 잠시후 독점 자본주의의 정수가 담겨있는 라면이 나왔다. 국물을 천천히 맛보았다. 한국을 떠난지 한 시간도 안 됐는데도 애틋한 맛이 느껴졌다. 


‘아, 이제 라면에 미련은 없다.’ 마지막 국물을 마시며 라면과의 이별의식을 마쳤다.


 러시아에서부터 몽골을 거쳐 베트남까지 두 달, 주구장창 라면을 먹었다. 그 라면이 또 한국산이라는 사실에 이 라면 이별의식을 더욱 민망하게 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그건 러시아나 몽골 시골의 작은 구멍가게조차에도 당연하다는 듯 한국 라면이 있다는 사실을 모른 것도 이유였지만, 당연하다는 듯 라면을 산 나도 원인이었다. 의식적이었든 무의식적이었든 두 달간 라면을 사먹은 건 나다. 그렇다 두 달간 라면을 열심히 사먹게 만든 건 그 전에도 라면을 먹었던 내 경험이다. 인간은 의지를 갖지 않는 한 그가 겪은 경험의 울타리를 벗어날 수 없다. 경험이 선택을 만들고 선택이 미래를 만든다. 그렇기에 내가 변하지 않는 한 앞일이란 모를 일이지만 예측은 할 수 있다. 사실 우리는 이미 앞일을 어느 정도 알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앞일의 선택지를 넓히는 건 경험의 깊이와 넓이가 아닐까. 경험의 울타리를 넓히는 일. 무엇이 있을까.



문제의 나시티. 바지 포함 10만 동.


배 아파할 영제를 생각하니 고소했다.


덧. 베트남 호치민 여행. 거 참, 풍요롭군. 로컬시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