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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70. 작은 것이 아름답다. 슈마허.

요호호 2014. 8. 10. 15:38


작은 것이 아름답다

저자
E.F.슈마허 지음
출판사
문예출판사 | 2002-03-10 출간
카테고리
경제/경영
책소개
『작은 것이 아름답다』는 실천적 경제학자이자 환경운동가로 유명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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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 병의 원인은 지혜를 현명함으로 대체한 데 있으므로, 아무리 현명한 검사도 그 병을 고치지 못한다. 그러면 지혜란 무엇인가? 어디서 그것을 찾을 수 있는가? 이제 우리는 문제의 핵심에 도달했다. 지혜에 대한 책은 수없이 많지만, 그것은 우리 내부에서만 발견될 수 있다. 그것을 발견할 수 있으려면, 무엇보다도 탐욕과 이기심의 지배로부터 자신을 해방시켜야 한다. 이런 해방 이후에 따라오는 평정 상태, 비록 단기적인 것일지라도, 가 다른 방법으로는 결코 얻을 수 없는 지혜의 통찰력을 제공한다.

83. 우리는 이 통찰력을 통해 주로 물질적인 목적을 추구하고 정신적인 목적을 가볍게 여기는 생활이 얼마나 천박하고 근본적으로 만족스럽지 않은 것인지를 알 수 있다. 이러한 생활은 필연적으로 인간과 인간, 국가와 국가를 서로 대립하도록 만든다. 왜냐하면 인간의 욕구는 무한한데, 이 무하성은 정신 영역에서만 달성될 수 있지, 물질 영역에서는 결코 충족될 수 없기 때문이다. 확실하게 말하면, 인간은 이 평범한 ‘세계’를 초월할 필요가 있는데, 그 길을 제공하는 것이 바로 지혜이다. 지혜가 없다면, 인간은 세계를 파괴하는 괴물 같은 경제를 건설하면서 달 착륙 같은 환상적인 만족을 추구하는 데 몰두하게 된다. (이는 곧) 인간이 신성함을 좇아 ‘세계’를 초월하는 것 대신에 부, 권력, 과학, 또는 온갖 환상적인 ‘스포츠’분야에서 탁월함을 보임으로써 그것을 극복하려는 것이다.

84. 과연 우리가 탐욕과 시기심을 버리려는 시도를 할 수나 있을까? 아마도 이 시도는 우리의 탐욕과 시기심을 훨씬 약화시키는 데서, 사치품을 필수품으로 전환하려는 유혹에 저항하는 데서, 심지어 우리의 욕구를 단순화하거나 줄일 수 없는지 꼼꼼히 점검하는 데서 시작해야 할 것이다. 이 중 어느 한 가지도 잘 해내지 못할지라도, 영속성을 보증할 수 없을 것 같은 경제적 ‘진보’유형에 박수갈채를 보내는 일을 멈추는 것은 가능하지 않을까? 아울러 기인이라는 비난을 두려워하지 않고 비폭력을 옹호하는 사람들, 이를 테면 자연보호론자, 생태학자, 야생동식물 보호론자, 유기농업자, 분배제도 개혁자, 촌락 생산자 등에게 우리가 할 수 있는 선에서 조그마한 지지를 보내는 것은 가능하지 않을까? 일반적으로 수많은 이론보다 하나의 행동이 귀중한 것이다.

104. 지난 25년 동안 경제학이 대단히 눈부시게 발전했지만, 시대적인 과제를 해결하는 데에는 자그마한 기여밖에 하지 못했다. 
(…) 사실상 조금도 기여하지 못했으므로 ‘자그마한 기여’라고 말하는 것은 완곡한 표현이다. 경제학은 현재 보여지는 모습에서 알 수 있듯이, 순수하게 양적인 분석에만 전념하고 사물의 실질적인 본성에 접근하는 것을 소심하게 거부하기 때문에, 시대적인 과제를 이해하는 데 가장 효과적인 방해물로 기능한다고 말해도 부당한 평가가 아닐 것이다.

118. 부의 근본 원천이 인간의 노동이라는 점에 대해서는 이론의 여지가 없다. 그런데 지금까지 근대 경제학자들은 노동을 필요악 정도로 여기도록 교육받았다. 고용주 입장에서 보면, 그것은 어느 경우에나 기계화 같은 방식으로 줄일 수 있는 한 최소로 줄여야 하는 비용 항목에 지나지 않는다. 노동자 입장에서 보면, 그것은 ‘비효용’이다. 노동은 여가와 편안함을 희생하는 것이며, 임금은 이 희생에 대한 보상이다. 따라서 고용주에게는 고용하지 않고 생산하는 것이 이상적이지만 피고용인에게는 노동하지 않고 소득을 올리는 것이 이상적이다.
 이러한 태도의 결과는 이론과 실천 두 측면에서 당연히 너무나도 극단적이다. 노동에 관한 이상향이 그것을 없애 는 것이라면 ‘노동 부담을 줄이는’ 방법은 모두에게 좋은 것이다. 기계화를 제외하면,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분업’인데, 이것의 고전적인 사례는 스미스가 <국부론>에서 칭찬했던 핀 제조공장이다. 여기서 분업은 인류가 아주 먼 옛날부터 이용해온 통상적인 전문화의 문제가 아니라 전체 생산 공정을 분할하여 완성품을 아주 빠르게 생산할 수 있게 하는 것으로, 그 과정에서 개인은 누구나 무의미할 정도로 적게 기여할 뿐만 아니라 대부분 단순한 근육운동을 해야 한다.
 불교 관점에서 보면, 노동의 역할에는 적어도 세 가지가 있다. 인간에게 자신의 능력을 발휘하고 향상시킬 수 있는 기회를 부여하는 것, 다른 사람들과 함께 공통의 임무를 수행함으로써 자기중심성을 극복할 수 있게 하는 것, 생활에 필요한 재화와 서비스를 만들어내는 것이 그것이다. 

121. 불교 경제학은 근대의 물질주의 경제학과 당연히 커다란 차이를 보이는데, 이는 불교가 문명의 본질을 욕망의 증식이 아니라 인간성의 순화에서 찾기 때문이다. <불교에서> 인간성은 주로 인간의 노동을 통해 형성된다. 아울러 노동은, 인간에게 존엄과 자유가 보장된 조건에서 적절히 수행될 경우, 그것을 행하는 사람과 그가 만든 생산물 모두에게 축복이다. 이에 대해 인도의 철학자이자 경제학자인 쿠마라파는 다음과 같이 요약한다.
 노동의 본질이 적절하게 평가되고 적용된다면, 그것이 고상한 능력과 맺는 관계는 음식이 신체와 맺는 관계와 같아질 것이다. 일은 고상한 인간을 길러내고, 이런 인간에게 활력을 주며, 그가 최고의 능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해준다. 노동은 인간의 자유 의지가 적절한 방향에 따라 행사되도록 유도하며, 인간의 내부에 존재하는 동물성을 길들여 좋은 길로 인도한다. 노동은 인간이 가치관을 보여주고 인격을 향상시키는 데 훌륭한 배경을 제공한다.

125. 물질주의자는 주로 물질에 관심을 보이지만, 불교도는 주로 해탈(liberation)에 관심을 보인다. 그렇지만 불교는 ‘중도’이므로 결코 물질적인 복지(wellbeing)에 대해 적대적이지 않다. 해탈을 방해하는 것은 부 자체가 아니라 부에 대한 집착이며, 즐거움을 향유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탐하는 마음이다. 따라서 불교 경제학의 핵심은 소박함과 비폭력이다. 경제학자의 관점에서 볼 때, 불교도의 생활방식은 경이롭다. 왜냐하면 놀랄 만큼 적은 수단으로 아주 만족할 만한 결과를 산출할 정도로 대단히 합리적이기 때문이다.
 근대 경제학자가 이것을 이해하기는 매우 힘들다. 그는 항시 많이 소비하는 사람은 적게 소비하는 사람보다 ‘행복하다’는 전제 아래 연간 소비량으로 ‘생활 수준’을 측정하는 데 익숙하다. 허나 불교 경제학자에게 이런 접근은 너무도 비합리적인 것이다. 소비는 단순히 인간의 복지에 대한 하나의 수단에 불과하므로, 최소한의 소비로 최대한의 복지를 확보하는 데서 목적을 찾는다. 그러므로 옷을 입는 목적이 어느 정도 쾌적한 온도와 매력적인 외모를 확보하는 데 있다면, 최소한의 노력으로 이 목적을 달성할 수 있는 길은 옷의 마모를 최소화하면서 가장 적은 노력으로 가능한 디자인을 활용하는 데 있다. 이러한 노력이 줄어들수록 예술적인 창조를 위한 시간과 힘이 늘어난다. 이를테면 근대 서구에서 주로 하는 복잡한 재봉질보다, 천을 자르지 않고 맵시 있게 주름잡아 몸에 걸치면 훨씬 더 아름답게 보일 수 있다. 천이 빨리 마모되도록 만드는 것은 너무도 어리석은 짓이며, 추하거나 초라해 보이도록 만드는 것은 너무도 야만스러운 짓이다. 방금 의복에 대해 말한 내용은 그 밖의 모든 필수품에도 똑같이 적용된다. 재화를 소유하고 소비하는 일은 목적을 위한 수단이며, 불교 경제학은 최소한의 수단으로 주어진 목적을 달성하는 방법에 대해 체계적으로 연구한다.
 이와 달리 근대 경제학은 소비를 경제 활동의 유일한 목적으로 여기며 토지, 노동, 자본 등의 생산 요소들을 그 수단으로 취급한다. 간단히 말해서, 불교 경제학이 적절한 소비 패턴으로 인간의 만족을 극대화하려는 데 반해, 근대 경제학은 최적의 생산 패턴으로 소비를 극대화하려 한다. 적절한 소비 패턴을 추구하는 생활방식은 최대의 소비를 추구하는 것보다 훨씬 더 적은 노력으로 유지될 수 있다.

127. 소박함과 비폭력은 분명히 밀접한 상관성이 있다. 적절한 소비 패턴은 비교적 적은 소비로 높은 수준의 만족감을 제공하는 것으로, 사람들은 압박감이나 긴장감 없이 생활하면서 “나쁜 일을 하지 말고 착한 일을 하라”는 불교의 첫 번째 계율을 지킬 수 있도록 해준다. 어디에서나 물질적인 자원은 한계가 있으므로, 적은 자원으로 욕구를 충족시킬 수 있는 사람들은 분명히 많은 자원에 기대어 살아가는 사람들보다 서로 다툴 가능성이 적다. 이와 마찬가지로 고도로 자급자족적인 지역공동체에서 생활하는 사람들은 국제 무역에 의존해서 살아가는 사람들보다 대규모 폭력에 휘말릴 가능성이 적다.

168. 현재의 경험만이 아니라 모든 역사에 비추어 볼 때, 기본적인 자원을 공급하는 것은 자연이 아니라 인간이다. 즉 모든 경제개발의 결정 요인은 인간의 정신에서 나오는 것이다. 대담함, 창의성, 발명, 건설적인 행위는 한 분야가 아니라 수많은 분야에서, 그것도 한꺼번에 갑자기 나타난다. 어느 누구도 이러한 활동들이 처음에 어디에서 시작되는지에 대해서는 말할 수 없지만, 우리는 그것을 지속시키면서 좀더 강화시키는 방법에 대해서는 알 수 있다. 그것은 바로 다양한 종류의 학교, 즉 교육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교육이야말로 진정한 의미에서 가장 중요한 자원 수단이자 단순한 가능성이며, 완성되지 않은 문장이다. 피아노가 음악이 아니듯 노하우는 문화가 아니다. 교육이 문장을 완성할 수 있게, 즉 가능성을 인간에게 유용한 현실성으로 전활할 수 있게 우리를 도와줄 수 있는가?
 이를 위해서는 교육이 무엇보다도 먼저 가치관, 즉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에 대한 관념을 전달해야 할 것이다. 물론 노하우를 전달하는 것도 필요한 일이겠지만, 이것은 부차적인 문제임에 틀림없다. 왜냐하면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에 대한 이성적인 관점을 갖고 있는지도 확실하지 않은 사람에게 상당한 권력을 넘겨주는 것은 분명히 어리석은 짓이기 때문이다. 오늘날 전 인류가 치명적인 위험에 직면해 있음은 거의 의심할 나위가 없는데, 그 이유는 우리가 과학 기술의 노하우를 부족하게 갖고 있어서가 아니라 지혜가 결여된 채 이 지식을 파괴적으로 사용하려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좀더 많은 교육은 그것이 좀더 많은 지혜를 산출하는 경우에만 우리에게 도움을 줄 수 있다.
 필자는 교육의 본질이 가치를 전달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는데, 가치란 자신의 것이 되지 않는 한, 바꿔 말하면 우리 자신의 정신을 구성하는 부분이 되지 않는 한, 우리의 인생을 이끌 수 없다. 이는 가치가 공식이나 교리 이상이고, 언제나 우리의 사고와 감정을 따라다니며, 우리가 세상을 바라보고, 해석하고, 체험하는 데 이용하는 수단 자체라는 것을 의미한다. 사람은 생각할 때, 생각만 하는 게 아니다. 관념과 함께 생각하기 때문이다. 우리의 정신은 백지 상태, 즉 타불라 라사(tabula rasa)가 아니다. 생각하기 시작했다면, 그것은 이미 생각에 이용되는 온갖 종류의 관념들이 정신에 들어 있기 때문에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이다. 의식적이면서 비판적인 정신이 일종의 검열관이나 보호자로서 [정신의] 입구에서 행동할 수 있기 전인 청소년기 내내 관념이 정신에 스며들면서 쌓이게 된다. 아마도 이 시기 [청소년기]는 [관념의] 상속인에 불과한 암흑시대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며, 한참이 지나고 나서야 비로소 상속 받은 것을 분류하는 법을 점차 알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