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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73. 황홀한 글감옥. 조정래. 다시 읽기. 글쓰기와 인생쓰기.

요호호 2014. 8. 10. 15:43


황홀한 글감옥

저자
조정래 지음
출판사
시사IN북. | 2009-09-30 출간
카테고리
시/에세이
책소개
소설가 조정래 선생은 1970년 [현대문학] 6월호에 ‘누명’을...
가격비교 글쓴이 평점  


13. 소설이란 무엇인가 하는 물음에서부터 응답을 찾아야 되겠군요. 소설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인생이란 무엇인가 하는 물음에

20. 이렇듯 세계적인 고전의 반열에 오른 명작 거의가 그 민족과 그 땅의 삶을 총체적으로 그려내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작품들이 그들 민족만이 아닌 전 인류적 공감과 감동을 얻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요. 그 작품들은 자기네 민족에 국한하지 않고 전 인류의 이상과 행복, 인간다운 삶의 가치를 옹호하고 구현하는 보편적 미덕을 최소공배수와 최대공약수로 갖추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가장 민족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이라는 문학론이 고전적 정설로 자리 잡게 된 것입니다.

22. 작가가 민족과 연결되어 있는 고리는 끊을 수 없는 인연이되, 자기 민족에만 함몰되지 말고 전 인류의 인간다운 삶을 조명하는 데 의식이 열려 있어야 함은 필수 과제입니다.

32. 그러나 어떤 일을 하든지 그 본질과 근본의 가치를 망각하거나 경시해서는 안 된다는 것은 불변의 철칙입니다. 그 태도를 지켜내지 못하겠으면 곧바로 필을 꺾는 게 옳습니다. 배기가스나 소음만 공해가 아닙니다. 남겨져야 할 필연을 자각하지 못하고 씌어지는 글들은 영혼의 공해물질이기 쉽습니다.

모든 비인간적인 불의에 저항하고, 올바른 인간의 길을 옹호해야 하는 작가는 오로지 진실만을 말해야 하는 존재입니다. 그것은 인생을 총체적으로 탐구하는 작가에게 주어진 사회적 책무입니다. 그 책무를 달고 즐겁게 이행할 의지와 각오가 없다면 작가가 되기를 바라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헤밍웨이가 스페인 내전에 참전하고, 사르트르가 레지스탕스에 가담하고, 에밀 졸라가 드레퓌스 사건을 짊어지고 정부 권력에 도전 했던 것은 작품과 함께 해옹으로 진실을 지키고자 했던 본보기였습니다.

38. 그래서 일찍부터 문학의 정신을 휴머니즘이라 했고, 문학인을 휴머니스트라 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현실적으로 문학은 정치권력 앞에서 무력하기 짝이 없습니다. 또, 경제 위력 앞에서도 무능하기 그지없습니다. 문학은 현실 속에서 그 어떤 문제를 해결 할 수 있는 직접적인 수단이나 방법이 될 수 없습니다.
(정치력/경제력을 능가하는 그 어떤 것)
정치력/경제력이 현실적으로 발휘하는 위력 앞에서 문학의 힘은 더없이 미약하고 허약할 뿐입니다. 그러나 좋은 작품, 훌륭한 소설은 모든 것을 망각하게 하는 세월의 힘을 이겨내고 영생의 생명력을 발휘하게 됩니다.

45. (글 잘 쓰는 요령은 없다)
50여 년이 지났는데도 변함이 없습니다. 이런 게 인생사 아니던가요. 그런 현상은 ‘답보’가 아닙니다. ‘본질’의 문제이기 때문에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또 50년, 1백년이 지나도 그 질문은 계속될 것입니다. 그게 기계문명의 발달과 다른 인생 본연의 문제들 아닙니까.
결국 저는 그 사실 하나를 깨달으려고 대학 4년을 다닌 셈이었습니다. 그러나 대학 4년을 바쳐 그 사실 하나를 겨우 깨달았다고 해서 저는 서운해하거나 억울해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뿌듯했고 감사히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불교에서 말하는 ‘도통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어렴풋이 알 것 같은 생각이 들었고, 주제넘게도 열반의 기쁨이라는 것이 무엇인지도 헤아릴 수 있을 것 같기도 했습니다. 그만큼 저는 그 깨달음으로 제가 가야 할 문학의 길을 확실하고 분명하게 보게 된 것이었습니다.
 ‘돌은 단 두 개. 뒷돌을 앞으로 옮겨놓아가며 스스로, 혼자의 힘으로 강을 건너가야 한다. 그게 문학의 징검다리다.’

54. 물론 제가 이런 글을 써도 행정기관에서는 끄떡도 하지 않고, 세상도 들은 척도 안 한다는 것을 잘 압니다. 그러나 옳은 일, 바른 말은 열 번이고 스무 번이고 하고 하고 또 해야 하는 것이 지식인의 사명이고 책무입니다. 그 바보스러운 되풀이가 쌓이고 쌓여 결국에는 잘못된 세상사가 바로잡히고, 새로운 정책이 수립되고 합니다. 그것이 역사가 가르쳐주는 교훈입니다. 인류의 역사는 그런 우둔한 듯한 힘들이 뭉치고 커져서 변화하고 발전해왔습니다.

'모든 예술은 모방으로 시작하되, 그것을 넘어서야 한다.’
(…) 제가 앞에서 좋은 책을 많이 읽으라고 누누이 말한 것도 ‘창조적 모방’을 하라는 뜻일 수 있습니다.
 좋은 글을 읽고 감동하고, 그 감동에 자극되어 글을 쓰고 싶은 욕구가 샘솟을 때 그 글을 닮고 싶어 하는 건 너무나 자연스럽고 당연한 일입니다. 닮고 싶은 글이 있으면 서슴지 마시고 그 글을 흉내 내십시오. 그러나 여기서 필히 조심할 것이 있습니다. 한 작가의 작품에만 고정되거나 집착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다른 작가들을 보지 못하고 특정 작가에게만 빠져들다 보면 그 작가의 아류가 되고 맙니다. 그것은 자살의 올가미고 죽음의 늪입니다. 자기만의 창조적인 세계를 구축하지 못하고 아류로 끝나는 것처럼 비참한 실패는 없습니다. 
 여러 작가를 모방하되 끝내는 자기의 개성적인 세계를 창조해내야만 예술가로 입신할 수 있으니까 모방을 하되 ‘창조적 모방’이 되게 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방법은 효과와는 반대로 적잖은 위험을 안고 있기도 합니다. 옮겨 베끼기(필사)의 목적은 아류가 되자는 것이 아니고 보다 빠르고 효과적으로 자기의 본체를 확립하자는 것입니다. 그 누구도 흉내 내지 않은 자기만의 특색과 개성을 갖춘 문장, 그것을 문체라고 합니다. 앞에서 말한 ‘창조적 모방’이 바로 ‘자기만의 문체 확립’입니다.

그런 부끄러운 행위는 왜 발생할까요? 그 첫 번째 이유가, 모방을 넘어서 ‘창조적 모방’을 확실히 이루기 전에 작가가 된 때문이 아닌가 합니다. 곧 모방의 습관성의 연장이라는 뜻이지요. 두 번째는, 작가로서 빨리 입신하고 싶은 조급성 때문이지요. 세 번째는 세상이 모르겠거니 하는 비양심의 소행입니다. 이것이 가장 나쁜 동인입니다.

표절 : 남의 시가/문장 등의 글귀를 훔쳐서 자기 것인 것처럼 발표함.

국어사전의 해석입니다. 이 ‘훔쳐서’라는 말은 무슨 뜻인가요? 다름아니라 ‘도둑질’이라는 것입니다. ‘글 도둑질’이 곧 표절입니다. (…) 그런 행위를 하게 되는 건 능력 부족, 치열성 부족, 노력 부족, 양심 결여의 결과입니다.

모방으로부터 예술 행위를 시작하는 것은 아름다우나 끝내 모방 중독자가 되어버리는 것은 가장 비참하고 추한 모습입니다. 그 위험한 함정에 빠지지 않도록 조심하십시오. 그 방법이 뭐가 있느냐고요? 예, 아주 손쉬운 방법이 있습니다. 살 껍질이 닳아지고, 속살이 닳아지고, 뼈가 닳아질 때까지 ‘노력’하고 노력하십시오.

69. 위대한 천재들의 작품을 정신 집중해 차근차근 또박또박 읽어나가십시오. 그러면 당신은 무수한 봉우리를 넘고 골짜기를 건너며 온갖 모석을 줍게 될 것입니다. 작가마다 다른 다채로운 문체, 형형색색의 소재, 각양각색의 주제, 온갖 기발한 구상, 기기묘묘한 표현 기법, 무궁무진한 상상력, 세련된 대사 처리의 효과, 과감한 생략의 역효과, 뜻밖의 상징의 감동, 살아 생동하는 무수한 인물 군상…… 
그건 세계적인 천재들이 맘껏 펼치는 문학의 대향연이며, 언어의 대축제입니다. 그 잔치에서 맘껏 마시고, 취하고, 즐기십시오.

81. 왜 그렇게 그런 좋은 글을 쓰고 싶은 마음이 동하는 것인지 제 마음을 저도 모를 일이었습니다. 그걸 굳이 설명하자면 배고플 때 밥을 먹고 싶은 마음과 같은 것이라고 하면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글 말고, 이 세상 모든 일에 대해 각자가 하고 싶은 마음은 이런 식으로 절로 동해야 합니다. 그렇게 마음이 동하는 일이 있으면 망설임 없이 그 일을 직업으로 삼으면 실패가 없고, 후회가 없고, 그 생애는 행복합니다. 단, 사람에 따라서 그 발견의 시기가 다를 뿐, 누구나 한 가지 일에는 마음 동하게 되어 있습니다.

83. “말도 또록또록 잘허고, 시상 물정도 어런보담 더 초롱초롱 잘 암시로 워째 오짐을 싸고 요런다냐 와. 시상에 귀신이 곡헐 노릇이 따로 읎당께로.”
어머니가 제 머리통을 인정사정없이 쥐어박으며 쏟아놓는 전라도식 넋두리였습니다.

벌교는 그런 살벌함이 전혀 없이 아름다운 풍광에 평화로운 곳이었습니다. 하루에 두 차례씩 들고 나는 밀물과 썰물이 신비롭기 그지없었고, 포구의 풍성하고 기나긴 갈대밭이 한없이 아름답고 포근 했으며, 철따라 날아왔다가 떠나가는 기러기 떼의 그 정연한 비행과 청아한 울음소리는 또 얼마나 신기하고 마음 맑아지는 음아이었는지 모릅니다. 첨산의 신령스러움, 징광산의 우람함, 제석산의 의연함, 그리고 20리 방죽길의 길고 긴 아득함과 중도 들판의 풍성함, 갯내음 스민 개울가 논둑에 숨은 참게를 갈대꽃대로 살금살금 유인해 잡던 그 깨소금 맛, 설한풍 속에 피던 핏빛 동백의 처연한 아름다움, 겨울밤 대나무밭 참새 사냥의 설레임, 옛날이야기가 치렁치렁 이어졌던 겨울밤 머슴들 사랑방에서 생고구마 깎아 먹던 맛과 생두부에 김치를 감아 먹던 맛, 과부인 친구 어머니의 슬프고 외로운 소복 모습을 닮았던 하얀 치자꽃, 보리며 밀 서리를 하다가 쫓기던 재미, 비 쏟아지는 여름밤 발가벗고 감나무를 타고 올랐던 단감 서리의 아슬아슬함, 이런 벌교의 평화로움과 정다움이 저를 어루만지고 안정시켜 햑요 좋게 야뇨증을 치료해준 것입니다. 

87. 거기에 바로 제 눈을 사로잡는 그림이 끼워져 있었던 것입니다.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삼국지>의 으뜸 장수로 그 유명한 관우(관운장)가 힘센 말을 타고 긴 창을 휘두르며 적을 무찌르는 모습이었습니다. 부릅뜬 눈, 굳센 입, 준엄한 얼굴, 휘날리는 긴 수염, 전신에서 뻗쳐나는 힘, 긴 창을 꼬나 잡은 억센 두 팔, 그리고 전신의 근육이 울퉁불퉁 드러난 말의 역동적인 모습.
 그 생생히 살아 있는 모습은 충격적이고 감동적인 것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그림을 보고 제 가슴이 떨리도록 감동을 받은 것이 그때가 처음이었습니다. 저는 그 감동을 어찌할 수 없어 손수 그릴 욕심을 냈습니다.

그 즈음에 했던 또 하나 남다른 짓이 머슴방 밤 마실 돌기였습니다. 무한정 이어지는 옛날이야기를 듣는 맛에 홀렸던 것입니다. 옛날얘기 듣는 맛은 어찌 그리도 고소하고 달고 차지고 간드러졌던지요.

91. 초등학교 시절에 누구나 지긋지긋해한 방학숙제가 하나 있지 않습니까. 그건 그 야만적(?)인 ‘일기 쓰기’입니다. 그러나 저는 그 숙제를 가장 반겼습니다. 왜냐하면 날마다 쓸 거리가 무궁무진했기 때문입니다.
(…) 저는 전혀 달랐습니다. 썰매를 만들었으면 그 과정을 세세하게 써나갑니다. 그러다 보면 하루 일기가 대학노트 두 장도 되고, 석장도 되었습니다(그렇습니다. 저는 일기 숙제를 하기 위해 네모칸 큰 초등생용 공책을 쓰지 않고 처음부터 대학노트를 썼습니다. 쓸 것이 많다는 제 말에 아버지가 특별히 사주신 것이었습니다). 썰매를 타는 재미도, 얼음이 깨져 죽을 뻔한 일도 몇 장씩의 일기가 되었습니다. 뻘밭에서 한쪽 다리가 크고 빨간 농게를 잡다가 엎어지고 뒤집어지며 아이들과 싸운 일, 갈대꽃술 끝으로 참게를 까딱까딱 놀려 굴 밖으로 유인해낸 순간 재빨리 덮치다가 그만 손가락을 물려 소리소리 지르며 뺑뺑이를 치던 일들을 실컷 써나가다 보면 겨울방학 숙제와 여름방학 숙제는 대학노트 한 권으로는 모자라고는 했습니다.
 아버지는 새 대학노트를 사와 다 쓴 처음의 대학노트와 합본을 만들었습니다. 그건 먼저의 대학노트 뒷표지와 새 대학노트 앞표지를 실로 꿰매는 것이었습니다. 아버지는 평생에 걸쳐서 여자가 하는 일은 그 어떤 것도 손에 댄 일이 없습니다. 그런데 아버지는 대학노트 앞뒤 표지를 꿰매는 그 서툴고 어설픈 바느질을 손수 하셨습니다. 우리나라의 엄한 아버지가 거의 다 그렇듯 제 아버지도 자식들에게 ‘잘했다’는 그 간단한 칭찬 한마디를 한 일이 없습니다. 그런데 저는 아무 말 없이 대학노트 두 권을 합치고 있는 아버지의 손길이 제 머리를 쓰다듬는 것 같은 부드러움과 따스함을 느꼈습니다.

96. 회의가 없다면 사람일 수 없고, 발전도 있을 수 없겠지요. 그리고 그런 낙방들은 실패가 아니고 수련이고 단련입니다.
흔히 얘기하는 교훈 중에 대기만성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국어사전은 ‘큰 그릇을 만드는 데는 시간이 오래 걸린다는 뜻으로, 크게 될 사람은 늦게 이루어진다는 말’이라고 했습니다. 이 뜻풀이는 글자의 의미에 충실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만성’은 오래 걸린다는 뜻만이 아니라 ‘오래도록 노력해야만 한다’는 의미도 담고 있습니다. ‘크게 되려면 오래 노력해야 한다.’ 

102. ‘내가 지난 4년 동안 변화해온 것처럼 앞으로도 4년 단위로 그렇게 변해간다면 아마 40년쯤 후에는 나는 성인으로 변해 있을지도 모른다.’

104. ‘왜 그런 소재를 선택했을까.’
‘주제와 소재는 효과적으로 조화되어 있는가.’
‘주제의 형상화는 잘 이루어졌는가.’
‘사건 전개는 우연이나 조작적이지 않고 실감 있고 필연적인가.’
‘구성의 허술함이나 무리는 없는가.’
‘인물들의 개성과 생동감은 살아 있는가.’
‘문체의 특성은 무엇인가.’
‘감각과 묘사력은 특색이 있는가.’
‘결말 처리는 효과적이었는가.’
‘소설로서 성취도는 어느 정도인가.’

105. ‘아, 잘 썼다. 그치만 별것 아니네.’
 ‘나도 딴 방법으로 얼마든지 쓸 수 있어.’ 
당신이 소설을 쓸 수 있으려면 아무리 좋은 작품을 읽었더라도 당신의 독후감은 늘 이래야 합니다. 그것이 객기든, 만용이든, 오만이든, 오기든 다 좋습니다. 좋은 작품을 좋다고 인정하면서도 한 가닥 곤두서는 자신감. 그것이 당신의 영토이며, 당신이 차지할 ㅅ ㅜ있는 빈자리입니다. 수백, 수천 편의 좋은 작품을 읽었더라도 그 ‘빈자리’는 당신의 의식 속에 꼭 확보되어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섭섭하지만 작가 되기를 포기해야 할 것입니다. 기죽고 가위눌려서 뒤는 일은 없으니까요.

107. 인간과 인간 세상의 본질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인간은 혼자일 수 없고 서로서로 관계를 맺는 존재이며, 그 관계의 얽히고설킴이 사회고, 그 속에서 벌어지는 문제적 이야기들을 형상화하는 것이 소설입니다. 이 의식을 굳건히 세우고 있으면 어떤 방향으로 가야 하고, 어떤 소설을 써야 할지 그 길이 보일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