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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75. 사랑과 연애의 달인 호모 에로스. 고미숙 _ 사랑한다면 삶을 창조하라

요호호 2014. 8. 20. 12:40


사랑과 연애의 달인 호모 에로스

저자
고미숙 지음
출판사
북드라망 | 2012-08-31 출간
카테고리
인문
책소개
사랑과 연애에 대한 인문학적 접근으로, 많은 공감을 불러일으켰던...
가격비교 글쓴이 평점  



13. 그런데 이 복수혈전의 멜로적 공식구에는 치명적인 함정이 하나 있다. 복수의 씨앗인 그 사랑과 헌신이 자신이 ‘원해서’ 한 짓이라는 사실, 누가 시켜서, 혹은 누가 강요해서 한 짓이 아니란 사실이 결락되어 있다는 점이다. 아무리 심한(?) 배신을 당했다 할지라도 애초 모든 사건이 자신으로부터 비롯했음을 망각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자신이 원인이 될 때, 사랑은 그 자체로 축복이다. 열심히 사랑한 다음, 그 대가로 천국에 가는 게 아니라, 사랑하는 행위 자체가 천국인 것. 거기에는 배신과 복수 따위가 들어설 자리가 없다. 따라서 복수혈전이 펼쳐진다는 건 그 사랑의 원인이 내가 아니라, 상대로부터 비롯되었음을 전제하고 있는 셈이다. 나는 별로 원하지 않았는데 상대의 유혹에 의해 엮인 것이라고 하는. 그리고 역시 상대한테 속아서 억지로 희생과 헌신을 강요당했다고 하는. 요컨대, 원인이 모조리 상대에게 있는 것이다.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그 사랑은 보상과 대가가 필요하다. 내가 해준 만큼, 아니 그 이상으로 보답을 받아야 한다. 희생과 복수의 공식구가 등장하는 건 바로 이 대목이다. 그런데 만약 그렇게 모든 원인이 상대한테 있다면, 그걸 사랑이라고 이름할 수 있을까? 그건 사랑이라기보다 노동이나 거래라고 해야 맞지 않을까. 그런 점에서 우리시대 멜로드라마에는 사랑이 없다!

이렇듯, 사람들은 사랑을 언제나 대상의 문제로 환원한다. 한마디로 대상만 잘 고르면 만사형통이라 여기는 것이다. 사랑에 실패한 건 대상을 잘못 골랐기 때문이고, 아직까지 사랑을 제대로 못해 본 건 ‘이상형’이 나타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식으로. 참으로 신기한 인과론이다. 모든 것이 다 갖춰져 있는 판에 나는 몸만 쏙! 들어가면 되는가? 실패한 다음엔 다시 몸만 쏙! 빠져나와 복수극을 펼치면 되고? 이렇게 지독한 이기주의가 또 있을까? 상대를 잘못 만나 인생을 망쳤다면, 그런 상대를 선택한 ‘나’라는 조재는 대체 뭔가?
 상식적인 말이지만, 사랑 따로 대상 따로 나 따로가 아니라, 나와 사랑과 대상이 하나로 어우러질 때 사랑이라는 사건이 발생한다. 각자 따로 존재하다 서로 플러스된다면, 그건 사랑이 아니다. 작업이거나 게임이지. 그러므로 작업이나 게임이 아닌 제대로 된 사랑을 꿈꾼다면, 반드시 환기해야 한다. 사랑과 대상과 나 사이는 결코 분리될 수 없다는 것, 나아가 사랑하는 대상, 그것은 바로 ‘나’자신이라는 것을. 

테제 2: “실연은 행운이다!”

자본의 코드, 상품의 고스로부터 탈주해야 비로소 운명적 사랑을 만날 수 있다.
 내 욕망을 자본의 프레임에 구겨 넣으려는 상대와는 가차 없이 결별해야 한다. (…) 죽기 위해 사랑을 하는 인간은 없다. 살기 위해, 더 충만하게 살기 위해 하는 것이다. 그럼, 산다는 건 뭔가? 존재의 자유와 해방을 향한 여정이다. 이 여정을 가로막는 상대라면, 그 대가로 주어지는 것은 성적 쾌락과 소비의 충만함일 터, 그건 ‘죽음충동’에 다름 아니다. (…) 그러므로 연애와 존재가 충돌하면 당연히 존재를 택해야 한다. 

16. 인생 또한 끊임없이 변곡점을 통과해야 한다. 한 번 변곡점을 통과할 때마다 인생은 전혀 다른 길로 접어들게 되어 있다. 그때 케케묵은 인연에 발목이 잡힌다면 참으로 난감한 일이다. 그러니 그 이전에 나를 버리고 떠나 준다면 그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그리고 또하나. 차는 것과 차이는 건 동일한 사건이다. +-방향만 다를 뿐, 일종의 어긋남을 겪어야 한다는 점에선 다를 게 없다. 단지 역할만 다른 셈이다. 그리고 결별의 진짜 이유는 아무도 알지 못한다. 사랑할 때 아무 이유가 없었듯이, 헤어질 때 역시 마찬가지다. 멜로드라마에서처럼 선악과 시비, 인과가 그렇게 선명하게 갈라지는 경우는 거의 없다. 굳이 원인을 찾는다면, 시절인연이 어긋난 탓이라고 밖에는. 봄이 가면 여름이 오고, 여름이 지나면 가을이 오듯이 말이다. 사랑도, 삶도 마찬가지다. 시절인연이 바뀌면 서로 헤어져야 한다. 심하게 말하면 어떤 사건들 때문에 헤어진다기보다 헤어질 때가 되어서 그런 사건들이 일어난다고 하는 게 더 정확하다.

테제 3: “에로스는 쿵푸다!”

사랑은 몸의 화학적 변이를 수반한다. 사랑에 빠진다는 건 신체가 전혀 다른 화학적 조성을 갖게 된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 화학적 변이를 동력 삼아서 존재는 전혀 다른 궤도 속으로 들어가게 된다. 만약 그런 변이와 전이를 체험하지 못했다면, 아직 사랑하지 않은 것이다! 그건 사랑이 아니라, 쾌락이요 소유의 환락일 뿐이다. 사랑이 이 쾌락의 함정에 빠지지 않으려면? 방법은 오직 하나! 공부를 해야 한다. ‘사랑도 공부를 해야 하나?’가 아니라, 사랑이야말로 공부가 필요하다.
 앎의 크기가 내 존재의 크기를 결정한다. 그러므로 앎의 열정이 없는 존재가 운명적 사랑을 한다는 건 우주적 이치상 불가능하다. 주류적 척도로부터 벗어나 자유의 새로운 공간을 확보하고자 하는 열정, 자본과 권력의 외부를 향해 과감하게 발을 내디딜 수 있는 내공. 공부는 무엇보다 이 열정과 내공을 쌓아 가는 과정이다. 이런 공부는 머리가 아니라 몸으로 해야 한다. 그래서 쿵푸다. 쿵푸를 해야 사랑이 도래하고 그때 사랑은 스쳐 지나가는 바람이 아니라 ‘운명을 건 도약’이 된다.

18. ‘모든 관계는 훈련의 한 형태이며 모든 관계는 움직임입니다. 정지되어 있는 관계는 없습니다. 모든 관계가 저마다 새로운 배움을 필요로 합니다. 설사 결혼한 지 40년이나 되었고, 부부간에 늘 편안하고 늘 한결같고 품위 있는 관계를 이루어 놓았다 해도 그 관계가 이미 하나의 패턴으로 자리 잡는 순간 더 이상 배우지 못합니다.'
ㅡ 배움과 지식에 대하여, 크리슈나무르티

그에 따르면, 사람들은 아주 오래된 이미지, 상징, 관념 같은 것들에 의존하여 서로 관계를 맺는다. 그리고 그걸 사랑이요 배려라고 착각한다. 하지만, “그것은 아무런 생기도 없고 아무런 생명력도 없고 열정도 없이, 죽은 것, 정체된 관계를 만들” 따름이다. 그러므로 그는 단언한다. “오직 배우는 마음만이 열정이 넘칩니다.”
 덧붙이면, 사랑은 절대 사적인 것이 아니다. 흔히 평생 가슴속에 은밀히 담아 두는 것이라 생각하지만, 그거야말로 무지의 소치다. 사랑을 야기하고 실천하는 욕망 자체가 사회적 배치의 산물이자 우주적 본능의 발현인데, 어찌 그럴 수 있단 말인가. 그렇게 협소한 영역에 가둬 두는 한 절대 상처와 연민, 동정 등의 미망에서 헤어날 수 없다. 상처로부터 떠나고 싶다면, 동정과 연민의 늪에서 벗어나고 싶다면, 마땅히 공공연히 배우고 익혀야 한다. 사랑 혹은 에로스적 본능이란 단지 둘 사이의 문제가 아니라, 존재가 외부와 맺는 모든 관계를 포함한다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

23. “무서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붓다의 유명한 가르침이다. 그 무엇에도 기대지 말고, 혼자의 힘으로 가라는 뜻이다. 왜? 우리 자신이 바로 붓다니까. 따라서 깨달음의 여정에는 어떤 우상도, 의지처도 용납되지 않는다. 중생을 구제하는 자비와 지혜도 그때 비로소 가능하다. 혼자 갈 수 있어야 무리와 접속할 수 있다는 이 도저한 역설! 만약 이 가르침을 사랑의 기술로 활용한다면? 사랑을 꿈꾸는 자 또한 그러하다.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야 한다. 홀로 갈 수 없다면, 절대 타자를 사랑할 수 없다. 그때 사랑이란 의존과 예속의 다른 이름일 뿐이다. 그리고 혼자 갈 수 있으려면 무엇보다 가벼워야 한다. 무거운 자들은 길을 나설 수도, 떠날 수도 없기 때문이다. 가장 먼저 사랑에 관한 망상과 싸워야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망상은 무겁다. 갖가지 오만과 편견으로 존재를 한없이 무겁게 얽어맨다. 그 그물망을 벗어던져야만 비로소 떠날 수 있다. 요컨대, 홀로 가기 위해선 먼저 가벼워져야 한다. 다시 붓다의 말을 빌리면, “오직 날개의 무게로만 가는 새처럼 가라!”

35. 수없이 우리를 불행에 빠뜨리고 있음에도 절대 그에 대해 질문을 던지지 않는다. 다시 말해, 그 이상을, 그 외부를 사유하려 하지 않는다. 우리의 존재와 생을 잠식하는 오만과 편견들! 오만과 편견은 나란히 간다. 오만하기 때문에 편견에 휩싸이고, 그 편견이 또다른 오만을 부른다. 이 오만과 편견이야말로 우리를 미망에서 헤어나지 못하게 만드는 중력장이다.
 그러므로 호모 에로스가 되기 위해 가장 먼저 터득해야 할 제 1초식은? 오만과 편견으로 가득 찬 망상기제를 낱낱이 파악할 것!

40. 박태원의 <소설가 구보씨의 하루>에 나오는 그 구보다. 1930년대에 출현한 유형이다. 자기만의 글쓰기 안에 갇혀 연애는 커녕 여자랑 수작하는 것조차 힘들어하는 ‘자의식의 화신’이다. 그의 연애는 썰렁하기 이를 데 없다. 그렇다고 순진한 건 절대 아니다. 생각은 억수로 많다. 하지만, 그 생각이란 게 상대 여성에 대한 감정이 아니라, 오직 감정에 대한 분석뿐이다. 구체적인 행동이라곤 ‘곁눈질’ 말곤 거의 없다. 근데, 마치 무슨 대단한 연애경험이나 한듯 주절주절 늘어놓고 있다. 즉, 행위로서의 연애는 없고, 연애에 대한 담론(썰)만이 난무하고 있다. 자의식의 줄에 꽁꽁 묶인 도시인의 전형. 이 또한 우리에게 너무나 익숙한 캐릭터다. 
일본 근대 문학의 거장 나쓰메 소세키는 이 자의식에 대해 이렇게 진단한 바 있다. “자의식이라는 것은, 문명이 진보함에 따라 점점 더 예민해지는 것이기 때문에 나중에는 일거수일투족도 자연스럽게 할 수 없게 되지. …… 앉으나 서나 ‘나’, 자나 깨나 ‘나’가 항상 따라다니기 때문에 인간의 언행이나 행위가 공산품처럼 자질구레해지고, 저절로 옹색해지고, 세상이 괴로워질 뿐이어서 아침부터 밤까지 마치 맞선 보는 젊은 남녀처럼 잔뜩 긴장한 상태로 지내지 않으면 안 되는 거거든. …… 사시사철 두리번두리번 살금살금하면서, 무덤에 들어가기 직전까지 잠시도 안심할 수 없는 게 현대인이 안고 있는 마음의 병이야. 문명의 저주인 거지.” <나는 고양이로소이다.>

그의 말대로 이 자의식은 문명의 저주다. 타자와의 소통을 가로막는 장벽이기 때문이다. 신경쇠약과 우울증 및 각종 질병의 원인이기도 하다. (…) 봉구와 구보씨. 열렬히 타오르거나 썰렁하게 가라앉거나. 이 두 유형이 근대 초기에 구축된 가장 보편적인 이분법이다.

42. 냉소의 벡터는 그 반대다. 자기 안에 웅크리고 있으면서 절대 일정한 선 이상을 허용하지 않는다. 선을 넘는 순간, 바로 밀쳐 낸다. 그 경계선을 어떻게 아냐고? 그러니 그거 계산하느라 머리가 깨진다. 겉으로야 지적이고 냉철한 듯 보이지만, 그런 건 지성이 아니라, 잔머리다. 그리고그렇게 머리를 굴려 대는 이유는 지극히 간단하다. 자의식을 침범당하는 게 두려워서다. 자신을 온전히 내보이는 게 겁이 나서다. 그렇다고 내면에 대단한 무엇이 있느냐? 하면 그것도 아니다. 그래서 더 완강하다. 그 두려움의 표현형식이 바로 냉소다.

44. 충동과 열정은 전혀 다른 개념이다. 충동이란 무엇인가? 내가 통제할 수 없는, 그래서 늘 중독적 상태로 치닫는 힘이다. 나에게 엄청난 쾌락을 주긴 하지만, 그 원인은 늘 외부에 있다. 그러므로 강도가 높아지면 높아질수록 나는 노예적으로 끄달리게 된다. 따라서 필연적으로 죽음충동과 마주칠 수밖에 없다. 알코올과 마약, 게임, 도박 같은 걸 떠올리면 된다. 열정은 정확히 그 반대의 벡터를 지닌다. 즉, 아무리 뜨겁게 솟구친다 해도 삶의 의지와 연동되어 있다. 그러므로 절대 중독되지 않는다. 충동이 존재 전체를 불안으로 요동치게 한다면, 열정은 ‘유래 없는 평온’을 선사한다. 수백 도의 열속에서 도자기가 단단히 구워지는 것과 같은 이치다.
 에리히 프롬에 따르면, 대개의 연인들은 “사랑을 ‘하게 되는’ 최초의 경험과 사랑하고 ‘있는’ 지속적 상태” 혹은 “사랑에 ‘머물러’ 있는 상태”를 혼동한다. 그래서 “강렬한 열중, 곧 서로 ‘미쳐 버리는’ 것을 열정적인 사랑의 증거로 생각하지만, 이것은 기껏해야 그들이 서로 만나기 전에 얼마나 외로웠는가를 입증할 뿐이다.” 물론 초기의 격정엔 충동과 열정이 섞여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이 둘 사이의 균형추가 어디로 기우느냐에 따라 사랑의 행로가 결정된다. 분명한 건 충동이 잦아들어야만 열정이 순연히 타오를 수 잇다는 점. 그렇지 못할 경우, 둘 중 하나의 코스를 밟는다. 순식간에 냉각되거나 아니면 중독되거나. 쿨하거나 미치거나! 결국 순정과 냉소가 한통속이었듯, 선수와 스토커 역시 한끝 차이인 셈이다.

47. 사랑과 섹스 사이엔 만리장성이 가로놓여 있다. 대체 왜? 성욕이 개입할수록 사랑은 타락해 버린다는 전제 때문이다.

50. 사랑이 둘만의 역학적 배치를 만들어 내는 건 맞다. 또 열정의 차이에 따라 권력관계가 형성되는 것도 맞다. 헌데, 가장 중요한 건 시절인연이다. 말하자면, 대상이 누구냐보다 언제 어디서 만났느냐가 더 결정적이다. 즉, 어떤 특별한 ‘시공간적 배치’ 속에서 사랑이라는 특별한 감정이 생기고 관계가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따라서 만약 그 관계에 균열이 일어났다면, 즉 누군가 먼저 결별을 선언하게 되었다면, 그것은 일단 둘의 인생행로에 커다란 ‘시공간적 격차’가 생겼다는 걸 의미한다. 그리고 그 점에선 가해자, 피해자가 있을 수 없다. 둘 다 그 간극만큼의 번뇌를 감당해야 하는 까닭이다. 소위 ‘차는 쪽’도 그 어긋남이 가져오는 번뇌에서 절대 자유로울 수 없다. 그 역시 감정의 온전한 교감에 있어 실패한 건 마찬가지니까. 그리고 그 또한 자신의 감정과 행위가 그런 식의 굴절을 겪는 것에 대해 충분히 통찰할 능력이 없다. 그것을 일러 무명 혹은 무능력이라 이른다. 어리석음과 무능력은 폭력과 짝한다. 상대에게 치명적인 상처를 입히는 건 바로 그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은 자신에게도 고스란히 적용된다. 왜냐면, 폭력은 그만큼의 반작용을 불러오기 때문이다. 작용과 반작용의 법칙! 따라서 그때 당시가 아니라면 이후에라도 반드시 대가를 치르게 되어 있다. 여기엔 어떤 예외도 없다. 
 만약 그런 경우가 아니라, 상대방이 비열한 사기꾼이거나 변덕스런 바람둥이였다면, 상대를 비난하고 복수의 칼을 갈기 이전에 그런 상대한테 꽂힌 자기 자신에 대해 더 심각하게 질문을 던져야 한다. 대체 나의 어떤 성향이 그런 대상을 욕망하도록 유도했는지, 그런 식의 시절인연이 인생 전체의 리듬에서 어떤 의미가 있는지 등등. 이 과정을 통과하지 않으면 이후에도 반드시 동일한 상황을 반복하게 마련이다. 자신을 망가뜨리는 상대한테만 끌리는 경우는 참으로 흔하다. 이걸 단지 상대의 도덕성의 문제로만 환원할 수 있을까? 요컨대, 어떤 경우건 만남과 헤어짐이라는 사건에는 두 사람의 성향 및 행로를 포함하여 시공간적 흐름이 깊이 관여하고 있다.

52. 사랑과 우정의 차이. 차이가 대체 뭐지? 배타적 소유가 바로 그것이다. 사랑은 존재를 ‘통째로’차지하는 것인 데 반해, 우정은 그런 식의 독점을 지향하지 않는다는 것. 그래서 결국은 ‘모 아니면 도’식으로 승부를 걸게 된다. 
 그렇게 되면 결국 모든 연애는 ‘차거나 차이거나’하는 양분법적 굴레를 벗어나기 어렵다.
(…) 사랑이 정말 소중하다면, 또 진실로 누군가를 사랑한다면, 그 사랑이 어떤 조건하에서 어긋나게 될 경우, 우정을 통해 그 열망을 지속시키려는 생각은 왜 하지 않는가? 아니, 그 이전에 사랑과 우정 사이를 가르는 이 지독한 이분법이 삶의 행복이라는 측면에서 볼 때 과연 유용한 전략인가?

57. ‘반쪽’은 없다.
자신에게 딱맞는 반쪽이란 있을 수가 없다. 그건 마치 비틀거리며 걷는 사람끼리 나랑 반대로 비틀거리는 인간을 찾는 것과 같다. (…) 중요한 건 반쪽을 향한 무한도전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 함께 걸어갈 수 있는 짝을 찾는 일이다.
 그래서 시절인연이 아주 중요하다. 시절인연이란 서로 다른 길을 가던 두 사람이 어떤 강한 촉발에 의해 공통의 리듬을 구성하게된 특정한 시간대를 뜻한다. 일종의 매트릭스 같은 것이다. 사랑은 대상이 아니라, 나 자신의 문제다. 어떤 대상을 만나느냐가 아니라, 내 안에 잠재하고 있던 욕망이 표면으로 솟구칠 때 사랑이라는 사건이 일어난다. 그런데, 이 욕망이 솟아오르려면 시절을 타야 한다. 시절을 타게 되면 아주 작은 촉발만으로도 사랑에 빠지게 된다. 봄이 오면 겨우내 잠자고 있던 씨앗들이 순식간에 땅을 뚫고 나오는 것과 같은 이치다. 서로 눈이 맞는다는 건 상대방 역시 같은 흐름을 탔다는 의미다.

75. 유치할수록 진실하다는 편견이다. 남들에게 절대 보여 줄 수 없는 치졸함, 인간적 나약함, 어리광 따위를 주고받는 것을 연애라고 간주하는 것이다. 이런 식이니, 사랑에 관한 한 성숙해진다는 관념이 들어설 여지가 없다. 10대의 풋사랑이건 중년의 일탈이건 로맨스 그레이건 수준이 다 똑같다. 사랑이 지배와 예속관계를 반복하는 것도 이런 구조와 무관하지 않다. 

126. 동안이 아니어도 언제나 젊음을 구가하는 길이 있다. 어슬프게 청년들을 모방하는 것이 아니라, 삶 자체를 싱싱하게 만들면 된다. “젊음이란 20대 청년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자기 연령에 걸맞는 청춘을 매번 새롭게 ‘창조하는’ 것이다.” 들뢰즈의 말이다.

마음이 성욕과 야망과 투쟁과 적대감과 온갖 욕망의 전쟁을 치르고 나서, 자신 속으로 돌아가 자신과 산다는 것이 얼마나 대단한 일인가! 그리고 마음이 연구와 학문에서 영양분을 섭취할 수 있다면, 노년보다 더 즐거운 것은 아무것도 없을 것이네. <노년에 관하여> 키케로

“키케로가 말하는 노년이란 더 이상 젊음의 열정을 탐하지 않기에 자유로운 시기요, 헛된 쾌락에서 벗어나 철학에 전념할 수 있는 새로운 호기다. 나이가 들수록 무능력하거나 탐욕스러워진다면, 그건 늙음 때문이 아니라 개인의 어리석음과 집착 때문이다. 학문을 닦고 미덕을 실천하며 집착과 미망을 놓아 버리는 법을 훈련하는 이들에게는 늙어 감이야말로 지복이다.” <고전에서 길찾기> 채운

141. “괴물과 싸우는 자는 자신이 그 괴물이 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니체)는 말이 있다. 치열하게 싸우되 적대와 증오에 머무르지 말고 삶의 창조를 향해 나아가라는 뜻이다. 이질성의 범람 속에서 아주 낯선 타자들과 조우하는 것, 그리고 자본과 상품에 의해 박탈당한 사랑의 능력을 되찾는 것, 이것이야말로 이 거대한 저항을 승리로 이끄는 길이자 광장의 진정한 ‘용법’이 아닐까.

159. “네 안에 너를 멸망시킬 태풍이 있는가?”
인연의 형성 자체가 자신의 몸이 불러오는 것임을 환기할 필요가 있다. 뇌파에서 일어나는 헛된 망상, 상체의 허열이 가져오는 변덕과 동요, 이런 것을 넘어 자신의 몸 깊숙한 곳, 이른바 배꼽 아래 ‘하단전’에서 열정이 솟구쳐야만 비로소 사랑이라는 사건 속으로 진입하게 된다. 그 순간 존재는 엄청난 변이를 경험하게 된다. 그 열기는 자아를 송두리째 뒤엎을 정도로 강력하다.
 니체는 말했다. “네 안에 너를 멸망시킬 태풍이 있는가?” 나를 멸망시킨다는 건 바로 지금까지의 나, 자아 혹은 자의식의 성채를 무너뜨리는 힘의 노래를 의미한다.

누구나 일생에 한두 번은 이런 심연의 폭풍을 경험한다. 문제는 그 절호의 찬스를 그냥 흘려보낸다는 거다. 사랑이라는 걸 대상의 문제로만 접근하기 때문이다. 상대방이 나를 어떻게 받아 주는가, 어떻게 하면 상대방을 사로잡을 수 있을까 등등에만 골몰하는 것이다. 요컨대, 오직 최종적 결과(결혼을 할 수 있을까, 없을까? 영원히 소유할 수 있을까, 없을까?)에만 집착한다. 따라서 거기에선 존재의 전이가 일어나기 어렵다. 존재가 뒤바뀌는 체험을 하려면 폭풍 자체를 충분히 음미할 수 있어야 한다. 

160. 그런 점에서 이것은 미쳐 날뛰는 광기나 변덕스런 충동과는 전혀 다른 것이다. 광기나 충동은 절대 폭풍을 일으키지 못한다. 그저 대지의 표면을 휩쓸고 지나가는 바람일 뿐. 심연의 폭풍과 스쳐 지나가는 바람은 천지 차이다. 둘을 구별하는 방법은 아주 간단하다. 기존의 나로부터 떠날 수 있다면, 다시 말해 나의 세계관과 습속의 배치를 바꾸어 준다면, 그것은 폭풍이다. 그렇지 않다면, 아무리 강하게 불어닥친다 한들 그건 그저 스쳐 지나가는 바람(변덕)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진정, 운명적인 사랑을 하고 싶은가? 그렇다면 먼저 자신에게 이렇게 물어야 한다. “나는 나를 멸망시킬 용기가 있는가?”

163. “턱에는 교만심이, 가슴에는 자긍심이 있다. 배꼽에는 벌심이 있고 배에는 과장하려는 마음이 있다. 머리에는 약탈하려는 마음이 있고, 어깨에는 사치하는 마음이, 허리에는 게으른 마음이 있으며, 엉덩이에는 훔치고자 하는 마음, 곧 노력 이상으로 챙기는 마음이 있다.” 사상의학을 체계화한 동무 이제마의 말이다. 이건 절대 비유도, 과장도 아니다. 있는 그대로다. 즉, 게으름이나 교만심, 벌심 등을 고치려면 그 부위(?)에 해당하는 신체적 흐름을 바꾸면 된다.
이제마는 이 사특한 마음을 이겨 내면 바로 그곳에 삶의 지혜가 샘솟는다고 했다. 그렇다면, 우리 몸 전체가 각종 마음들의 전쟁터인셈이다. 그러니 이 격전지를 버려 두고 대체 어디서 ‘나’를 찾으며, ‘나의 사랑’을 찾는단 말인가. 당연한 말이지만, 내 몸과 소통하는 힘에 비례하여 상대에 대해서도 알아차릴 수가 있다. 고로, 사랑의 힘과 통찰력은 분리불가능하다. 상상하는 연애에서 관찰하는 연애로!

178. 사랑 자체를 “실체화”하지 않는 것이다. 그것을 절대화하는 만큼 결별의 고통과 번뇌는 엄청나게 증폭된다. 이미 언급했듯이, 사랑이라는 사건에서 가장 중요한 건 ‘시절인연’이다. 시절인연이란 내 몸과 천지의 기운이 딱 상응하는 그 타이밍을 말한다. 여기에 나이를 비롯하여, 계절이나 절기, 그리고 둘을 둘러싼 사회적 조건 등이 두루 망라된다. 이것들이 한데 어우러져서 사랑이라는 사건을 발생시키는 것이다. 부연하면, 사람들은 저마다 고유의 리듬과 강도를 지니고 태어난다(시른바 사주팔자가 바로 그것이다). 그런데 그 리듬과 강도는 어떤 외부적 조건을 만나느냐에 따라 아주 다른 양상으로 펼쳐진다. 이런 시간적 흐름 속에서 어떤 특별한 배치가 형성되면, 그때 누군가를 만나고 사랑에 빠지는 것이다. 흔히 생각하듯이 이상형을 찾아 헤매다 누군가를 만나고 누군가를 만나서 사랑에 빠지는 것이 아니라, 때가 무르익으면 누군가가 ‘만나지는’ 것이다. 머릿속의 이상형과는 전혀 다른 상대한테 필이 꽂히는 것도 그 때문이다. 물론 그때는 상대가 이상형처럼 보인다. 둘 사이에 강력한 인력이 작용하기 때문이다(시쳇말로는 눈이 먼다고 말한다^^).
 같은 이치로 이 인연의 배치가 달라지면 아무리 노력을 해도 그 인연의 고리는 해체될 수밖에 없다. 갑자기 아주 사소한 사건으로 운명이 엇갈리기도 한다. 그러면 원인을 찾기 위해 안간힘을 쓰다가 번뇌가 눈덩이처럼 불거지거나 아니면 평생 원한을 품고 살아가기도 한다. 그게 바로 무명이다. 시절인연이라는 이 단순한 인연법을 간과한 데서 오는 무명! 좀더 극단적으로 말하면, 불화나 배신 때문에 결별했다기보다 헤어질 때가 되어서 그런 사건이 일어났다고 봐야 맞다. 사랑을 둘러싼 ‘인연법’에 있어 우리가 헤아릴 수 있는 인과의 법칙들은 정말 새발의 피에 불과하다. 그걸 넘어서서 더 넓은 인연의 장을 통찰하고자 하지 않으면 만남과 헤어짐의 과정에 담긴 의미들을 파악하기란 결코 쉽지 않다. 하지만 사람들은 대개 통찰 대신 미련과 원한의 굴레 속으로 몸을 던져 버린다. 니체는 이 원한의 정신이야말로 약자요 노예의 정신이라고 했다. 무엇보다 모든 원인을 남의 탓, 세상 탓으로 돌리기 때문이다. 내 운명을 망친 것, 나를 비극으로 몰아넣은 것, 그 모든 것이 다 타자라면, 당연히 나는 내 운명의 주인공이 아니다. 그래서 노예라고 하는 것이다.

180. “만날 때에 미리 떠날 것을 염려하고 경계하지 아니한 것은 아니지만, 이별은 뜻밖의 일이 되고 놀란 가슴은 새로운 슬픔”을 불러온다. <님의 침묵>

181. 병은 내 모든 습속을 바꿀 권리를 나에게 부여했다. 병은 나에게 망각을 허용했고 또 그것을을 명령했다. 병은 나에게 조용히 누워 있을 것을, 여가를 가질 것과 기다림과 인내가 필요함을 일깨워 주었다. <이 사람을 보라> 니체

마음의 병 역시 절대 위로와 연민으로 다스려서는 안 된다. 진통제가 몸을 나약하게 만들 듯, 동정과 위안 역시 존재의 능력을 한없이 떨어뜨린다. 사랑의 고통 역시 마찬가지다. 어설픈 위안을 꾀하지 말고 차라리 아플 만큼 충분히! 아픈 게 훨씬 낫다. 아플 수 있는 것 또한 존재의 능력이자 권리다.

189. 자신감/ 무엇보다 자시에 대한 믿음, 사랑을 위해 자신의 존재를 걸 수 있다고 확신했기에 가능한 일이다.

190. 진정으로 발원을 할 수만 있다면, 짝사랑이건 배신이건 두려워할 게 없다. 왜냐? 발원이란 존재를 거는 것이고, 그 순간 이미 나는 그 장면을 구현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그 순간, 사랑은 이미 내게 현존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물리적 이치상 어떤 방식으로건 인연조건을 만들어 내게 되어 있다. 평생 동안, 전심으로 누군가를 바라본다고 생각해 보라. 내가 어떤 대상을 향해 엄청난 인력을 쏘고 있다면, 어떤 식으로든 인연이 만들어지지 않을리가 있겠는가. 인디언들은 가뭄이 들면 비를 내려 달라고 제의를 지낸다. 그러면, 비가 온다. 왜? 올 때까지 하니까. 그 발원의 형식도 아주 재미있다. 비가 내리는 동작을 그대로 묘사한다. 스스로 비가 되는 것이다. ‘비-되기’. 가뭄이란 천지의 기운이 꽉 막힌 것인데, 그런 식의 발원을 통해 인간과 자연 사이의 교감을 시도하는 것이다.
 짝사랑도 이렇게 하면 된다. 일단 인연이 교차하기 시작하면, 수많은 변곡점들이 생기게 되면서 그러다 보면 시절인연을 만나게 된다. 이를테면, 나의 생명력과 시공간적 조건 사이의 강렬한 마주침, 그것이 곧 시절인연이다. 시절인연을 만나면 구체적인 행동방식은 저절로 결정된다. 매뉴얼 따위는 전혀 필요 없다. 그런 점에서 원초적으로 짝사랑이란 없다! 더 중요한 건 그 과정에서 전혀 다른 삶을 살게 된다는 것. 아주 낯선 세계 속으로 들어가게 된다는 것. 그리고 그것이야말로 사랑의 진정한 결실이다. 그러니 간절히 발원하라.

228. 사랑한다면, 삶을 창조하라!
루쉰과 쉬광핀에겐 사랑이라는 단어를 동원하지 않고도 서로 나눌 이야기들이 너무나 많았다. 시대에 관하여, 문학에 관하여, 일상에 관하여. 친구들에 관하여, 적들에 관하여, 또 그 무언가에 관하여. 쉽게 말하면, 그들은 삶 전체를 “통째로” 주고받았던 것이다. 그들은 사랑을 확인하고 확인 받는 일보다 삶을 함께 만들어 가는 일에 더 골몰하였다. 보통은 사랑을 확인하고 난 다음, 무엇을 함께 할까를 고민하는 수순을 밟지만, 이들은 사랑의 시작과 더불어 즉각 서로의 삶을 서로에게 “선사”한 것이다. 하여, 굳이 상대의 감정을 확인하기 위해 밀고 당기고 하는 식으로 힘을 소모할 필요가 없었다.

232. 그러므로 사랑을 원한다면 혹은 지금 운좋게 사랑을 하고 있다면, 무엇보다 서사의 능력을 키우도록 하라. 다시 말하지만, 서사는 화술이 아니라, 나의 삶과 외부가 맺는 관계성의 문제다. 따라서 서사의 능력을 키우기 위해선 대략 두 가지 전략이 필요하다. 하나는 지금까지와는 아주 다른 삶의 영역을 개척하는 것. 다른 하나는 자신의 평범한 일상에 생생한 힘과 활력을 불어넣는 것. 물론 이 두 가지는 함께 맞물려 있다.

233. 니체는 차라투스트라의 입을 빌려 이렇게 말했다. 좋은 결혼이란 “더욱 높은 신체를 창조하는, 창조하는 자를 창조하는 것”이라고 표현했다(‘아이와 결혼에 대하여’). 역시 핵심은 몸이다. 창조는 몸을 통해서만 자신을 표현한다. 따라서 삶을 창조한다는 건 구체적으로 새로운 몸을 창조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럼, 어떻게 새로운 신체를 창조할 것인가? 원리는 간단하다. 리듬과 강도. 우리 몸은 이미 어떤 종류의 리듬과 강도로 세팅되어 있다. 
(…) 리듬과 강도란 우리 몸이 만들어 내는 에너지장 정도로 이해하면 되겠다.
(…) 요컨대, 삶의 창조란 거창한 추상적 이념이 아니라, 바로 이 ‘지금, 여기’를 구성하고 있는 내 몸의 리듬과 강도를 바꾸는 것을 의미한다. 거꾸로 말하면, 이 리듬과 강도를 바꿀 수만 있다면, 인생 역전도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뜻이다.
 평소, 우리의 리듬과 강도는 엄청 산만하다. 한마디로 멍~하게 지낸다는 뜻이다. 그게 바로 무명이다. 그 무명 속에서 ‘탐진치’가 자라난다. 뭔가 큰 촉발이 일어날 때라야 이 무명의 상태에서 깨어나는데, 주로 분노하거나 쾌락에 빠지거나 둘 중의 하나인 경우가 많다. 쾌락과 분노는 다 몸에 해롭다. 따라서 그냥 멍한 상태로 살면 분노와 쾌락 사이를 오가느라 점점 더 리듬과 강도가 낮아질 수밖에 없다. 이런 상태론 뭘 해도 열정과 끈기가 따라붙지 않는다. 그렇다면, 가장 먼저 이 멍하고 산만한 상태에서 벗어나야 한다. 리듬의 거품을 빼면 강도는 절로 확보된다. 인류의 위대한 스승들, 인생의 대가들은 이 점에서 아주 탁월하다. 매일매일의 일상은 물론이려니와 단 한순간, 아니, 단 하나의 호흡도 쓸데없이 낭비하지 않는다. 그렇게 되면, 몸과 마음, 말과 행위 사이에 완벽하게 상응을 이루게 된다. 이런 것을 일러 삶의 진정성이라 할 터. 사랑이란 그런 진정성을 확보할 수 있는 절호의 찬스에 해당한다.
 사랑은 내 안에 잠자고 있던 태풍이 몰아쳐 나로 하여금 뭔가에 강렬하게 집중하도록 하는 일대 사건이다. 그때 일어나는 집중력은 실로 놀라운 수준이어서, 그 정도의 힘이라면 내 몸에 쌓인 낡은 흔적들을 일거에 몰아낼 수 있다. 만약, 그 정도가 아니라면, 그건 사랑이라고 할 수도 없다. 예컨대, 사랑을 하고 있는데, 자신의 몸과 일상에 어떤 변화도 일어나지 않았다면, 단언컨대! 사랑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니 사랑을 하고 잇따면, 사랑을 꿈꾸고 있다면 먼저 동선을 바꾸라.
동선을 바꾼다는 건 일상의 차서를 재배치하는 것이다. ‘차’란 시간적 순서, ‘서’란 공간적 질서를 뜻한다. 차서를 재배치한다는 건 중요한 것과 중요하지 않은 순서를 바꾸고 하루의 활동들을 시공간적으로 다르게 안배한다는 뜻이다. 삶은 몸의 에너지들이 서로 교호하는 물리적 장이다. 내가 리듬과 강도를 바꾸면 당연히 내 주변에 이전과는 다른 물리적 장이 형성된다. 인연조건이 달라진다는 뜻. 그렇게 되면 그걸 바탕으로 새로운 관계와 활동 속으로 들어갈 수 있다. 그게 바로 새로운 신체의 창조며 삶의 창조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사랑은 어떤 경우에도 절대 대상을 위해 나를 희생하는 것이 아니다. 일차적으로는 내가 사랑하는 대상과, 더 넓게는 이 세계와의 공존을 기획하는 일이다. 이 공존에서 가장 필요한 건 바로 자신이 원인이 되는 것이다. 사랑을 통한 삶의 창조, 그것은 그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나의 영역이다.
 “우리는 욕망들을 지닌 채, 욕망들을 통해서 성을 이해해야 하며, 새로운 형식적 관계, 새로운 형식의 사랑, 새로운 형식의 창조를 진행해야 한다. 성은 숙명이 아니다. 성은 창조적인 삶을 위한 가능성이다.”<성, 권력, 정체성의 정치학> 푸코

240. 만일 내가 참으로 한 사람을 사랑한다면, 나는 모든 사람을 사랑하고 세계를 사랑하고 삶을 사랑하게 된다. 만일 내가 어떤 사람에게 “나는 당신을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다면 “나는 당신을 통해 모든 사람을 사랑하고 당신을 통해 세계를 사랑하고 당신을 통해 나 자신도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사랑의 기술> 에리히 프롬

241. 사랑 또한 그러하다. 사랑의 창조, 그 궁극적 지점은 다름 아닌 자신을 사랑하는 것이다. 자신의 삶의 현장, 곧 ‘지금, 여기에 있음’자체를 사랑하는 것이다. 지나간 것에도, 도래할 것에도 끄달리지 않는, 자신의 현존성에 대한 절대적 긍정! 그렇게 될 수 있다면 사랑은 그 자체로 창조의 여정이 될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