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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80. 고민하는 힘. 강상중_세상을 뚫어내는 힘

요호호 2014. 8. 26. 13:36


고민하는 힘

저자
강상중 지음
출판사
사계절 | 2009-03-24 출간
카테고리
인문
책소개
불안과 고민의 시대, 일본 100만 독자를 일으켜 세운 책! 재...
가격비교 글쓴이 평점  

30. 자아가 무엇인지를 설명하기는 매우 어렵지만, 간단하게 말하면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의식적으로 자기에게 묻는 ‘자아의식’이라도 해도 좋을 듯합니다.

37. 이것은 자아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들 대부분이 마주치게 되는 벽이라고 생각합니다. 자아가 비대해질수록 자기와 타자의 사이는 잇기 힘들어집니다.
 자아라는 것은 자존심이기도 하고 에고이기도 하기 때문에 자기를 주장하고 싶고, 지키고 싶고, 부정당하고 싶지 않다는 기분이 강하게 일어납니다. 그러나 타자 또한 비슷한 자아를 지니고 있기 때문에 그 역시 주장하고 싶고, 지키고 싶고, 부정당하고 싶지 않아 합니다. 그렇게 생각하면 아무것도 할 수가 없습니다.

 사람에 따라서는 ‘타자와의 관계에서 겉으로는 참고 견디고 진짜 자기는 감추는’ 방법을 선택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어려워 완전히 자기 속에 파묻히는 사람도 있습니다. 질주하는 자기를 멈춰 세우지 못하고, 그렇다고 해서 누군가로부터 구원을 받지도 못해 악을 쓰며 비명을 지르고 싶어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런 자아의 문제는 백 년 전이라면 이른바 ‘지식인’ 특유의 병으로 간주되었지만 지금은 모든 사람이 걸릴 수 있는 만인의 병이 되고 말았습니다. 당시에는 ‘신경쇠약’이라고 불렸는데, 나쓰메 소세키의 소설 속에 ‘키워드’처럼 등장합니다.
나쓰메 소세키의 ‘메모’에도 이런 말이 나옵니다.
"자아의식은 결국 신경쇠약을 낳는다. 신경쇠약은 20세기의 모두가 공유하는 병이 될 것이다.”
(…) 그렇다면 비대해지는 자아를 멈추고 싶을 때 어떻게 해야 할까요.

41. 나는 이런 경험을 바탕으로 자아는 타자와의 ‘상호 인정’에 의한 산물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인정을 받기 위해서는 자기를 타자에 대해 던질 필요가 있다는 점입니다. 
 나는 타자와 상호 인정을 하지 않는 일방적인 자아가 존재 할 수 없다는 것을 실감하고 있습니다. 확실하게 말하면 타자를 배제한 자아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43. 진지하게 고민하고 진지하게 타자와 마주하는 것. 거기에 어떤 돌파구가 있지 않을까요? 어쨌든 자아의 고민의 밑바닥을 ‘진지하게’ 계속 파고들어 가다 보면 그 끝이 있을 것이고 타자와 만날 수 있는 장소에 도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어중간한 태도를 취하면 안 됩니다. 이제 자아와 자기중심 주의자를 착각해서 단지 ‘나’의 세계만을 주장하는 일이 일어나서는 안 됩니다.

 그때의 일을 생각할 때마다 기분이 유쾌해집니다. 인생에 그런 시간이 있어도 좋지 않을까요? 책을 읽어도 좋고, 혼자서 끙끙거리며 고민을 하는 것도 좋고. 이런 시간은 큰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자기 삶의 의미에 대해 생각하거나, 인간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생각하거나, 타자와의 관계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거나, 자기와 세계의 관계에 대해 생각해 보기도 합니다. 이때 실무적인 문제 해결을 최우선으로 삼아 모든 일을 담백하게 넘기는 사람은 “그런 일을 진지하게 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야. 시간 낭비지. 그런 것 따위는 의미가 없어” 라고 말을 하겠지요. 그러나 그런 식으로 살게 되면 아마도 마지막에는 큰 고독에 시달리게 될 것입니다.
 타인과 깊지 않고 무난한 관계를 맺고, 가능한 한 위험을 피하려고 하며,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에 별로 휘말리지 않으면서 모든 일에 구애받지 않으려고 행동하는 그런 ‘요령이 뛰어난’ 젊음은 정념과 같은 것은 사전에 잘라낸, 또는 처음부터 탈색되어 있는 청춘이라 할 수 있습니다.

(종교)
신앙이 살아 있었던 시대가 훨씬 행복했다고 앞에서 말한 것은 바로 이 점 때문입니다. ‘무엇을 하든, 무엇을 믿든 자유’라는 말은 사실 괴로운 말입니다. 넓은 들판에 혼자 남겨지면 사람은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게 됩니다. 미아가 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덮쳐 오겠지요. ‘무엇을 하든, 무엇을 믿든 자유’라는 말은 그런 상황과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에리히 프롬은 <자유로부터의 도피>에서 1920년대 이후 독일이 개인주의로부터 급속도로 극단적 파시즘(전체주의)으로 이행한 것을 ‘자유’라는 관념으로 설명합니다. 일반적으로 사람은 자유를 동경한다고 생각하지만 의외로 그렇지 않습니다. 자유로부터 도망쳐 ‘절대적인 것’에 속하고 싶어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주어진 해답에 납득할 수 없다면 그 어떤 것에도 의지하지 못하고 막스 베버나 나쓰메 소세키가 그러했듯이 자기 지성만을 믿으면서 자기와 끝없이 싸우며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은 매우 힘든 방법입니다. (…) 그래서 미쳐 버릴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내가 그들에게 존경의 마음을 가지고 있는 것은 바로 그 부분 때문입니다. 그들은 ‘자아’와 ‘무엇을 믿을까’라는 근대 이후의 어려운 문제에 혼자 힘으로 맞섰습니다.

(확신할 수 있을 때까지 고민할 수밖에 없다)
의식하든 그렇지 않든 사람은 믿고 있는 것에서 사물의 의미를 얻습니다. 의미를 얻지 못하면 사람은 살 수가 없습니다.

(노동- 자기 존재를 확인받기 위하여)
나 스스로 ‘나는 왜 일을 하고 있는가’라고 물어볼 때가 있습니다. 이리저리 생각을 해보면 결국 ‘타자로부터의 배려를 원하기 때문에’라는 대답이 돌아옵니다. 지위나 명예는 필요 없다고 말하면 거짓이 될 터이고 돈도 필요하겠지만, 가장 큰 것은 타자로부터의 배려입니다. 그것을 통해 사회 속에 있는 자기를 재확인할 수 있고, 나는 이렇게 살아도 된다는 안도감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자신감과도 관계가 있는 듯이 보입니다.
 인간이라는 것은 ‘자기가 자기로 살아가기 위해’ 일을 합니다. ‘자기가 사회 속에서 살아가고 있어서 좋다’는 실감을 얻기 위해서는 역시 일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사랑)
 “내가 행복해지기 위해’라는 가벼운 생각으로 선택한 사랑은 ‘언제든지 대체 가능한 사랑’이 되기 쉽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사랑이 소모품이 될 우려가 잠재되어 있습니다.
 실제로 대체 가능한 사랑을 선택했을 때, 많은 사람들은 ‘이건 아니야’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진정한 사랑은 어디에 있지?’라고 생각하게 되고 극단적인 행동으로 이어집니다. 그 하나가 십대에 이미 졸업했어야 할 순애입니다.

 사랑은 계속 모습이 변합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매 순간 둘 사이에 물음이 있고 서로 그 물음에 대해 반응할 의지가 있는가 하는 점입니다.
 사람이 사랑하는 방법이라는 법칙은 없습니다. 체스를 두는 것처럼 사전에 정해진 규칙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때그때 상황에 따라 최선이라고 생각하는 수를 두는 것이지요. 그와 마찬가지로 상대가 던지는 물음 하나하나에 대응하다가 …

돌이켜 생각해 보면 사랑은 그때그때 상대의 물음에 응답하려는 의지입니다. 사랑의 모습은 변합니다. 행복해지는 것이 사랑의 목적이 아닙니다. 사랑이 식을 것을 처음부터 겁낼 필요는 없습니다.

젊은 사람들은 더 크게 고민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고민을 계속해서 결국 뚫고 나가 뻔뻔해졌으면 좋겠습니다. 그런 새로운 파괴력이 없으면 지금의 일본은 변하지 않을 것이고 미래도 밝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사실 지금의 시대는 여러 가지 의미에서 꿰뚫고 나가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정치와 경제, 지식의 세계가 모두 가득 차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