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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88. 체르노빌의 목소리.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

요호호 2014. 9. 4. 00:16



체르노빌의 목소리

저자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 지음
출판사
새잎 | 2011-06-07 출간
카테고리
정치/사회
책소개
두려움만이 우리를 가르칠 수 있다. 첫 번째 수업은 체르노빌이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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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사람은 자신만 구하고 나머지는 다 배반했다. 사람이 떠난 후에 군인이나 사냥꾼들이 마을로 와 동물들을 총살했다. 그럼에도 개와 고양이들은 사람의 목소리를 듣고 반가워 뛰어나왔다. 말들도 그랬다.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했다. 동물은, 새는 아무런 잘못이 없지 않은가? 더 무서운 것은 짐승들이 아무런 소리도 내지 못하고 죽었다는 것이다. 멕시코와 기독교를 받아들이기 전의 러시아 원주민들은 양식을 위해 죽여야만 했던 동물과 새에게 용서를 빌었다. 고대 이집트에서는 동물들이 사람을 상대로 고소할 권리도 가졌다. 피라미드에 보관됐던 파피루스에는 “황소는 N.을 상대로 아무런 소송도 제기하지 않았다”라는 글이 발견됐다. 이집트인들은 저승으로 떠나기 전에 다음과 같은 기도를 했다. “나는 그 어떠한 창조물에도 폐를 끼치지 않았다. 나는 동물에게서 곡물도, 풀도 빼앗지 않았다.”

체르노빌의 경험이 우리에게 준 것은 무엇인가? 조용하고 비밀스러운 ‘다른 존재’의 세상으로 눈을 돌리도록 이바지했는가?

19. 두 개의 재난이 겹쳤다. 첫 번째 재난은 사회주의의 몰락이었다. 우리 눈앞에서 소련이 붕괴하면서 거대한 사회주의 선박이 침몰했다. 또 다른 재난은 체르노빌이라는 우주적 재앙이었다. 두 개의 세계적인 폭발이 일어났다. 첫 번째 폭발은 그나마 더 가깝고 이해할 만했다. 사람들은 생계에 대해 고민했다. 돈은 어떻게 모으고, 어디로 가야 하나? 무엇을 믿어야 하나? 어떤 깃발 아래 서야 하나? 아니면 자신을 위해 자신의 삶을 사는 방법을 터득해야 하나? 자신을 위해 사는 삶은 우리에게 낯설었고 할 줄 모르는 것이었다. 그렇게 산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모두 그 걱정을 했다. 한편 체르노빌에 대해서는 잊고 싶어했다. 사람들의 의식이 체르노빌 앞에서 무너졌기 때문이다. 의식의 재난이었다. 우리가 생각하던, 우리 가치관의 세상이 폭발했다. 만약 우리가 체르노빌을 이기거나 다 이해했더라면 그에 대해 더 많이 생각하고 더 많은 책을 썼을 것이다. 하지만 현재로서는 우리와 우리의 의식은 각자 다른 세상에 살고 있다. 현실은 사람 속으로 들어오지 못하고 스쳐지나가기만 한다.
 그렇다. 현실을 잡는 것은 불가능하다.
 한 가지 예를 들자면, 아직도 우리는 ‘멀다 - 가깝다’ 또는 ‘우리 - 남’과 같은 말을 쓴다. 하지만 체르노빌 구름이 나흘 만에 아프리카와 중국에 도착했는데, 체르노빌이 발생한 후에 멀고 가까운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알고 보니 지구는 정말 작은 것이었다. 콜럼버스 시대의 지구가 아니다. 그런 끝 없는 세상이 아니다. 공간에 대한 우리의 생각은 이제 바뀌었다. 우리는 지금 파멸한 공간에서 살고 있다. 그리고 최근 100년 동안 사람의 수명은 늘어났지만, 그럼에도 우리 땅에 정착한 방사성 핵종의 수명 앞에서는 보잘것없을 정도로 짧다. 그들 중 대다수가 수천 년씩 살아남을 것이다. 우리는 그렇게 멀리는 내다볼 줄도 모른다! 그들 앞에 서면 시간에 대한 느낌이 달라진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이 체르노빌이다. 체르노빌의 흔적이다. 그런 일이 과거와 환상, 지식에 대한 우리의 태도에도 일어나고 있다. 과거는 나약한 것이고, 지식 중에는 우리의 무지에 대한 지식만이 살아남았다. 

20. 우리를 제외한 모든 것이 변했다.
 어떠한 사건이 역사가 되려면 최소한 50년은 걸린다. 그런데 이 사건은 아직도 자취가 강렬하게 남아 있다.
구역, 떨어진 세계……. 다른 모든 세상과 구별되는 곳이다. 이곳은 원래 몽상가들이 상상한 곳이었지만 현실에 그 자리를 내주었다. 우리는 이제 체호프의 영웅처럼 100년 후면 사람이 아름다워질 것이라던가 삶이 아름다워지리라고 믿을 수는 없다. 그러한 미래를 우리는 잃어버렸다. 100년 사이에 스탈린의 굴라크오 아우슈비츠가 세워졌다. 체르노빌이 폭발했다. 그리고 뉴욕의 9월이 발생했다. 
 운명은 한 사람의 인생이고, 역사는 우리 모두의 삶이다. 나는 운명을 보존하면서 역사를 들려주고 싶다. 한 사람을 잃지 않도록…….
 체르노빌에서는 ‘모든 것 후’의 삶이 더 기억에 남는다. 사람 없는 물건, 사람 없는 풍경……. 목적지 없는 길, 목적지 없는 전선……. 또 생각해보면 이것은 과거일까, 미래일까?
 가끔 내가 미래를 쓰는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69. 증언하고 싶다. 내 딸은 체르노빌 때문에 죽었다. 그런데 그들은 우리가 침묵하기를 원한다. 아직 과학적으로 증명이 안 됐다고, 정보가 충분히 수집되지 않았다고 한다. 수백 년 더 기다려야 한단다. 하지만 나의 인생은 그렇게 길지 않다. 나는 못 기다린다.
 적어두었으면 한다. 당신들이라도 적어두었으면……. 내 딸의 이름은 카탸였다. 카튜센카……. 일곱 살에 사망했다.

80. “성호도 긋고, 기도도 해. 주여! 경찰이 두 번이나 와서 난로를 부수뜨려 트럭에 싣고 갔어. 나는 도로 갖고 오고! 집에 올 수만 있도록 해준다면 사람들이 좋아서 기어서라도 갈 텐데. 그들이 우리 슬픔을 온 세상에 퍼뜨렸어. 죽은 사람만 돌아올 수 있지. 묻으려고 데리고 오더라. 산 사람들은 밤에 왔어. 숲을 건너 왔어.” 

81. “사람들이 많이 와. 우리에 대해서 영화도 찍었는데 우리는 평생 그 영화를 못 보겠지. 텔레비전도, 전기도 없으니까. 볼거리라고는 창 밖 풍경뿐이야. 물론, 기도도 하지. 한 때는 신 대신 공산당원이었는데, 이제는 신만 남았어.”

87. 다들 똑똑했더라면 왜 바보짓을 했겠어? 불이 났다는데, 그러라지. 불은 일시적인 거니까 그걸로는 아무도 겁먹지 않았어. 핵이 뭔지 몰랐어. 맹세코 진실이야! 그러면서 원자력 발전소 바로 옆에 살았어. 거리상으로는 30킬로미터, 고속도로로 가면 40킬로미터 떨어진 곳이었어. 다들 매우 만족해하면서 살았어. 표를 끊어서 거기까지 다녀오곤 했어. 거기에는 모스크바 물건을 팔았거든. 소시지도 저렴했고 상점에는 항상 고기를 팔았어. 종류도 많았어. 좋은 시절이었어!
 이제는 두려움뿐이야. 개구리와 하루살이만 남고 사람은 없어질 거라 했어. 사람 없는 세상일 거라고 했어. 과장된 동화를 퍼뜨려. 그런 걸 좋아하면 바보지! 하지만, 거짓뿐인 이야기는 없어. 벌써 오래된 노래지.

118. 5월 9일 승전기념일에 장군이 왔다. 우리를 대열로 세우고는 축하인사를 했다. 우리 중 한 사람이 용기를 내 물었다. “방사선 쉬를 숨기는 이유가 뭡니까? 우리가 얼마나 노출되어 있습니까?” 대단한 용기였다. 장군이 떠난 후에 지휘관이 그를 불러 뺨을 때렸다. “도발하는 거야? 소란을 일으키는 놈아!” 며칠 후 방독면을 나눠줬지만, 아무도 사용하지 않았다. 방사선 측정기를 두 번 보여줬지만, 아무도 만져보지 못했다. 3개월에 한 번씩 이틀간 휴가가 주어졌다.
 (…) 제대하기 전 KGB 요원이 모두를 소집해서 본 것에 대해 어디에서도, 누구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당부했다. 아프가니스탄 전쟁에서 돌아왔을 때 나는 내가 살아남았다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체르노빌에서는 정반대였다. 집에 가면, 바로 그때 죽는다.
 집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이제 시작이다. 

129. 나는 이제 죽음이 두렵지 않다. 죽음 자체는…….
 하지만 어떻게 죽을지는 모른다. 친구가 죽을 때 몸이 부어올라 드럼통처럼 커졌다. 옆집 사람, 그도 거기 있었다. 크레인을 운전했다. 그는 숯처럼 까매지고 어린아이처럼 야위어갔다. 나는 어떻게 죽을지 모른다. 선택할 수만 있다면 평범하게 죽고 싶다. 체르노빌 식 죽음이 아닌 평범한 죽음……. 한 가지는 확실히 안다. 내 몸 상태로는 오래 못 산다. 그 순간을 알아서 이마에 총알을 박을 수 있으면 좋겠다. 나는 아프가니스탄에도 갔다 왔다. 거기서는 총알로 죽기가 더 쉬웠다.

 아프가니스탄에는 자원해서 갔다. 체르노빌도 마찬가지였다. 내가 나서서 갔다. 프리퍄티 시에서 일했다. 이 도시는 국경에서나 볼 것 같은 뾰족한 철조망으로 두 겹 둘려 있었다. 깔끔한 고층 건물과 거리가 두꺼운 먼지로 덮인 것을 봤다. 나무는 잘려 있었다. 공상영화의 한 장면이었다. 우리는 명령을 실행했다. 도시를 ‘세탁’하고 오염된 흙을 20센티미터 정도 파낸 후 깨끗한 모래로 덮는 것이었다. 쉬는 날은 없었다. 전쟁 같았다.

137. 아직은 모르지만, (기형아인 내 딸도) 언젠가 물어볼 것이다. “왜 나는 사람들이랑 달라요?” “왜 나는 남자의 사랑을 받을 수 없어요?” “왜 나는 아이를 낳을 수 없어요?” “왜 모두한테, 나비, 새한테도 일어나는 일이 나에게는 안 일어나요?” 나는……. 나는 증명해야만 했다. 딸이……. 나는 증명 서류를 받고 싶었다. 딸이 자라서 이 사실을 알도록. 바로 나와 내 남편의 잘못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 사랑 때문이 아니라는 것을……. (또 울음을 참는다) 4년을 싸웠다. 의사들과, 공무원들과 싸웠다. 높은 사람들과 면담도 했다. 힘들게 노력했다. 4년 만에 딸이 앓는 무서운 병이 전리 방사선, 저준위 방사선과 관련이 있음을 확증하는 진단서를 받아냈다. 나는 4년 동안 거절당했고, 그들은 내 딸이 소아 장애를 앓고 있다고 주장했다. 소아 장애라니? 내 딸이 앓는 장애는 체르노빌 장애다.

140. 내 기억으로, 사고 후 며칠 사이 방사능, 히로시마와 나가사키, 게다가 뢴트겐에 대한 책까지 도서관에서 다 사라졌다. 불안감이 조성되는 걸 막기 위한 상부의 명령이라는 소문이 곁들여졌다. 바로 우리의 안녕을 위한 조치라는……. 체르노빌 사고가 파푸아 섬에서 일어났더라면 파푸아 사람을 제외한 전 세계가 놀랐을 거라는 농담도 생겼다. 건강과 관련한 권고는 전혀 없었다. 정보도 없었다. 능력이 되는 사람들은 어디선가 요오드화칼륨 알약을 구해왔다. 이 약 한주먹을 입에 털어 넣고 알코올 한 잔으로 삼키려는 사람들까지 생겼다. 그럴 때면 위세척을 하러 구급차가 달려왔다.
 첫 외국 기자들이 왔다. 첫 촬영팀도 왔다. 그들은 플라스틱 멜빵 바지에 헬멧을 쓰고 발에는 고무 덧신을, 손에는 고무장갑을 꼈으며, 카메라까지 특수 케이스에 넣어서 가지고 왔다. 한편 그들을 수행한 우리 통역사 아가씨는 여름 원피스에 샌들을 신고 있었다.
 사람들은 인쇄된 글이라면 무조건 믿었지만, 사실 아무도 진실을 찍어내지 않았다. 말하지 않았다. 한편으로 감추었지만, 또 다른 한편으로 모든 것을 이해하는 것도 아니었다.

141. 왜 체르노빌에 대한 글이 없을까? 우리 작가들은 아직도 전쟁과 스탈린의 수용소를 주제로 글을 쓰면서 이에 대해서는 침묵한다. 책이 한두 권 있고, 더는 없다. 우연이라고 생각하는가? 사건은 아직 우리 문화 속으로 들어오지 못했다. 문화의 트라우마다. 우리의 유일한 답변은 침묵이다. 아이들처럼 눈을 감고 생각한다. ‘꼭꼭 숨었으니까 못 찾겠지.’ 무언가 미래에서 우리를 기다린다. 하지만 우리 감정이 그것을 받아들일 수 있을지, 우리가 그것을 견뎌낼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158. “그렇게 많은 사람이 피해를 봤는데 아무도 책임을 안 졌소. 원자력발전소 지도부만 감옥에 가두고는 끝이야. 그런데 솔직히 누구 탓인지 확실히 말하기는 어렵소. 위에서 그렇게 하라고 명령을 내리면 어쩌겠어? 하는 수밖에 무슨 실험을 했다더군. 신문을 보니 군용 플루토늄을 추출할 거라고 했소. 핵폭탄 만들려고. 그래서 그렇게 터진거요. 좀 심하게 말하자면 왜 하필 체르노빌이야? 프랑스나 독일이 아니라 왜 우리한테 이런 일이 생긴 거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