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나다/책
#1100_달과 6펜스. 서머싯 모옴
요호호
2016. 2. 13. 16:43
14. 어떤 신비주의자도 평범한 일에서 그처럼 깊은 의미를 발견해 내지는 못할 것이다. 신비주의자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을 보고, 정신병리학자는 입에 담을 수 없는 것을 알아내는 법이다.
14. 거기에서 우연히 나는 그와 가까이 지냈던 사람들을 만났다. 덕분에 나는 그의 비극적인 삶 가운데 어둠에 묻혀 있던 대목을 밝혀줄 수 있는 사람이 되었던 것이다. 스트릭랜드의 위대성을 믿는 사람들이 옳다면, 생전의 그를 직접 알았던 사람들의 사적인 이야기를 군더더기라고는 할 수 없다.
24. 로즈 워터퍼드는 냉소주의자였다. 그녀는 인생을 소설 쓰는 기회 이상으로 보지 않았고 대중을 소설의 소재로 보았다.
42. 그녀는 갑자기 울음을 터뜨리면서 방을 뛰쳐나갔다.
나는 깜짝 놀랐다. 지금 생각해 보면, 남편이 늘 사오던 담배가 눈에 보이지 않자 불현듯 남편 생각이 났던 것이고 지금까지 익숙해 있던 생활의 조그만 낙을 잃고 말았다는 새삼스러운 생각이 들면서 돌연 가슴이 아팠던 모양이다. 이제 지난 생활은 사라져버렸고 모든 게 끝장이 나버렸음을 그녀는 깨달았다. 이제 우리는 더 이상 겉치레 예절로 그 자리를 버티고 있을 수 없었다.
51. 다시 돌아가지는 않소. 결정을 번복하지는 않겠소. 찰스 스트릭랜드
52. "딱 한 가지 설명밖에 없어요. 이제 예전의 그이가 아니라는 거예요. 어떤 여자가 꼭 쥐고 있는지 모르지만 그 여자 때문에 완전히 달라진 거예요. 모르긴 몰라도 꽤 오래된 사이일 거예요.”
54. 그이에게 말해 주세요. 온 가족이 애타게 찾고 있다고요. 다 그대로이면서, 다 달라지고 말았다고.
61. 나는 잠시 여유를 가지려고 담배에 불을 붙였다. 맡은 일을 어떻게 시작해야 좋을지 알 수 없었다. 내가 준비해 두었던 말들, 때론 애조를 띠고 때론 분개하는 웅변적인 수사는 이 클리시 거리에서는 아무래도 어울리지 않아 보였다.
62. “심하지요”
나는 놀라서 힐끗 그를 쳐다보았다. 하는 말마다 선선히 인정해 버리니 나는 도리어 맥이 쭉 빠졌다. 그러고 보니 내 입장이 우습게 된 건 말할 것도 없고 아주 복잡하게 되어버렸다. 사실 나는 별의별 준비를 다하고 있었다. 설득도 하고, 간청도 해보고, 권고도 하고, 충고도 하고, 훈계도 하고, 필요하다면 욕도 하고 화를 내면서 비꼬기도 할 작정이었다. 하지만 죄인이 자기 죄를 선선히 고백해 버리면 훈계자가 도대체 무슨 일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이런 경우에 어떻게 해야 할지 나에겐 경험이 없었다. 무엇에든 늘 부정하는 일에만 익숙해져 있었으니까.
스트릭랜드 설득하기.
66. “여자들이란 기껏 생각한다는 게 그런 것뿐이야. 애정, 그저 언제나 애정이지. 남자가 자기를 버리면 꼭 딴 여자 때문이라고 생각한다니까. 그래 당신은 내가 여자 때문에 바보처럼 이런 짓을 저질렀다고 생각하시오?”
“아니 그럼, 여자 때문에 부인을 떠난 게 아니란 말입니까?”
“당연히 아니오”
“명예를 걸고 맹세할 수 있어요?”
내가 왜 그렇게 물었는지 모르겠다. 그때만 해도 참 순진했던 모양이다.
“명예를 걸고 맹세할 수 있소”
“그럼 도대체 무엇 때문에 부인을 버렸단 말입니까?”
“나는 그림을 그리고 싶소”
나는 한참 동안 지그시 그를 바라보았다.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이 자가 돌아버리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때만 해도 나는 아주 젊었고 상대방은 내게 중년으로 보였음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딴 건 몰라도 몹시 놀랐던 것만은 기억한다.
“아니 나이가 사십이 아닙니까?”
“그래서 이제 더 늦출 수가 없다고 생각했던 거요”
(…) “아직은 안 돼요. 하지만 될 거요. 여기 온 것도 그 때문이지. 런던에서는 바라는 걸 얻을 수 없었소. 아마 여기서는 가능 할 거요”
“당신 나이에 시작해서 잘될 것 같습니까? 그림은 다들 십칠 팔세에 시작하지 않습니까?”
“열여덟 살 때보다는 더 빨리 배울 수 있소”
“어째서 그런 재능이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잠시 대답이 없었다. 눈길은 지그시 오가는 인파를 향해 있었지만 나는 그가 인파를 보고 있었다고는 생각지 않는다. 그는 엉뚱한 대답을 했다.
“나는 그려야 해요”
“승산 없는 도박을 하자는 것입니까?”
그러자 그는 나를 쳐다보았다. 두 눈에 야릇한 빛을 띠고 있어 나는 어쩐지 불안했다.
“나이가 몇이오? 스물셋?”
그 질문은 엉뚱하게 느껴졌다. 내 나이쯤이면 모험을 할 수 있다고 하겠지만 그는 벌써 청년기를 넘기고 버젓한 사회적 지위를 지닌 증권 중개업자이며, 아내와 두 아이까지 거느린 사람이다. 내게라면 자연스러운 선택일지 모르지만 그에게는 터무니없는 길이 아니겠는가. 나는 어디까지나 공평한 입장에 서고 싶었다.
“하기야 기적이란 것도 있으니, 훌륭한 화가가 되지 말란 법도 없지요. 하지만 그럴 가능성은 아주 희박하다는 걸 잘 아시지 않습니까? 나중에 가서 일을 그르쳤다고 후회하면 큰 낭패가 아닙니까?”
“난 그려야 해요” 그는 되뇌었다.
“잘해야 삼류 이상은 되지 못한다고 해봐요. 그걸 위해서 모든 것을 포기할 가치가 있겠습니까? 다른 분야에서는 별로 뛰어나지 않아도 문제되지 않아요. 그저 보통만 되면 안락하게 살수 있지요. 하지만 화가는 다릅니다.”
“이런 맹추같으니라구”
“제가 왜 맹추입니까? 분명한 사실을 말하는 게 맹추란 말인가요?”
“나는 그림을 그려야 한다지 않소. 그리지 않고서는 못 배기겠단 말이요. 물에 빠진 사람에게 헤엄을 잘 치고 못 치고가 문제겠소? 우선 헤어나오는 게 중요하지. 그렇지 않으면 빠져 죽어요”
그의 목소리에는 진실한 열정이 담겨 있었다. 나도 모르게 감명을 받았다. 그의 마음속에서 들끓고 있는 어떤 격렬한 힘이 내게도 전해 오는 것 같았다. 매우 강렬하고 압도적인 어떤 힘이, 말하자면 저항을 무력하게 하면서 꼼짝할 수 없도록 그를 사로잡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이해할 수 없었다. 정말이지 그는 악마에게라도 사로잡혀 있는 것 같았다. 악마가 느닷없이 달려들어 그를 갈가리 찢어놓을 것만 같았다. 하지만 그의 표정은 천역덕스러웠다. 물끄러미 바라보는 나의 눈길을 받고도 조금도 동요하지 않았다. 모르는 사람이라면 낡은 노퍽 재킷 차림에 허름한 중절모를 쓰고 앉아 있는 그를 어떻게 볼까 궁금했다. 바지는 헐렁하고 손은 더러웠다. 수염을 깎지 않아 더부룩한 붉은 턱, 작은 눈, 커다랗고 공격적인 코, 이것들이 다 투박하고 상스럽기만 하다. 입은 큼지막하고 입술은 두텁고 육감적이었다. 정말이지, 참으로 종잡을 수 없는 사람이었다.
“부인께 안 돌아가시겠단 말인가요?” 마침내 나는 물었다.
“절대 안 돌아가오”
“부인께서는 다 없던 일로 하고 새로 출발하실 수 있다고 하던데요. 아무런 탓도 하지 않으시고요”
“멋대로 하라지”
“사람들이 비열한 인간이라고 욕해도 괜찮단 말인가요? 부인과 아이들이 비렁뱅이질을 해도 상관없고요?”
“상관없소”
나는 다음 말에 힘을 주기 위해 잠시 뜸을 들였다. 그러고는 일부러 한마디 한마디에 힘을 주어 말했다.
“정말 천하에 악질이군요.”
“자, 이제 그만큼 했으면 속이 후련할 테니, 가서 저녁이나 합시다.”
71. 스트릭랜드의 심리 상태를 되도록 잘 알아내는 것이 오히려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함으로써 위로를 삼았다. 하긴 그런 일이 내게는 훨씬 흥미 있기도 했다. 하지만 스트릭랜드는 말주변이 좋지 않아 그것도 쉬운 일은 아니었다. 말이 마음을 전달하는 매체가 되어주지 못하는 듯, 그는 말로 자신의 생각을 나타내기가 힘든 모양이었다. 따라서 판에 박힌 상투어, 속어, 모호하고 어정쩡한 몸짓을 통해 그의 의도를 짐작해야 했다. 그런데 대단한 표현은 못했지만 그의 개성에는 사람을 따분하지 않게 하는 무엇인가가 있었다. 성실성 때문이었을까. 그는 파리를 처음 보면서도 별로 감격해하는 것 같지 않았다. 그에게는 낯선 풍경일 텐데도 그다지 놀라는 기색 없이 덤덤히 받아들이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파리를 수없이 가보았지만 갈 때마다 늘 마음이 설렌다. 파리의 거리를 걷노라면 뭔가 모험을 해보고 싶은 마음에 몸이 근질근질해진다. 그런데 스트릭랜드는 아무런 변화 없이 평온하였다. 지금 돌아보면 그는 자신의 영혼을 어지럽히고 있던 영상말고는 아무것도 눈앞에 보이지 않았던 것 같다.
74. 마치 암이 생체 조직 속에서 자라듯 걷잡을 수 없이 자라나서 마침내 존재 모두를 정복하여 급기야는 어쩔 수 없는 행동으로까지 몰아간 것이 아니었을까.
75. “여기에서는 화실에 나갑니까?”
“그렇소. 그 자가 오늘 아침에도 한 바퀴 돌아보던데, 그림 선생 말이오. 내 그림을 보고는 눈썹ㅇ르 쓱 치켜올리더니 아무 말 없이 가버리더군”
스트릭랜드는 낄낄 웃었다. 기가 죽은 기색은 조금도 없었다. 남들의 평에는 전혀 신경을 쓰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와 관련하여 가장 헛갈렸던 문제는 바로 이점이었다. 남들이 어떻게 생각하든 상관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그것은 대체로 자신을 속이는 말이다. 그 말은 아무도 자신의 기벽을 모르리라 생각하고 자기 하고 싶은 대로 한다는 것을 뜻할 뿐이다. 또한 기껏해야 자기가 이웃의 지지를 받고 있기 때문에 다수의 의견과는 반대로 행동하고 싶다는 뜻을 나타낼 뿐이다. 자기가 속한 집단의 경향이 탈인습적이라면 세상 사람의 눈에 자신도 쉽사리 탈인습적으로 비치기 마련이다. 그렇게 되면 터무니없는 자존심을 가지게 된다. 위험 부담 없이 용기 있는 행동을 함으로써 자기 만족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도 인정받고 싶은 욕망은 문명인의 가장 뿌리 깊은 본능일 것이다. 여자가 인습을 넘어서려다가 성난 도덕심의 돌팔매와 화살을 맞게 되면 기겁을 하고 재빨리 체통이라는 방패를 찾는다. 나는 남들의 의견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사람을 믿지 않는다. 그것은 무지에서 오는 허세이다. 그것은 남들이 자신의 조그만 잘못들을 비난할 때 그걸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뜻인데, 그들은 아무도 그 잘못을 발견하지 못할 것이라고 철석같이 믿고 있다.
하지만 남이야 어떻게 생각하든 정말 전혀 상관않는 사내가 여기 있었다. 그러니 인습 따위에 붙잡혀 있을 사내가 아니었다. 이 사내는 온몸에 기름을 바른 레슬링 선수처럼 도무지 붙잡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이 자는 도덕의 한계를 넘어선 자유를 누리고 있었다.
내가 그에게 이런 말을 했던 것을 기억한다.
“이것 보세요. 모두가 선생님처럼 행동한다면 세상이 어찌 되겠습니까?”
“어리석은 소리를 하는군. 나처럼 살고 싶어 하는 사람이 많을 줄 아오? 세상 사람 대부분은 그냥 평범하게 살면서도 전혀 불만이 없어요”
한번은 이렇게 비꼬아보기도 했다.
“아무래도 이런 격언을 믿지 않으시는군요. <그대의 모든 행동이 보편적인 법칙에 맞을 수 있도록 행동하라>는 격언 말입니다”
“들어본 적도 없거니와 돼먹지 않은 헛소리요”
“칸트가 한 말인데요”
77. 나는, 양심이란 인간 공동체가 자기 보존을 위해 진화시켜 온 규칙을 개인 안에서 지키는 마음속의 파수꾼이라고 본다. 양심은 우리가 공동체의 법을 깨뜨리지 않도록 감시하는, 우리 모두의 마음속에 있는 경찰관이다. 그것은 자아의 성채 한가운데 숨어 있는 스파이이다. 남의 칭찬을 바라는 마음이 너무 간절하고, 남의 비난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너무 강하여 우리는 스스로 적을 문 안에 들여놓은 셈이다. 적은 자신의 주인인 사회의 이익을 위해 우리 안에서 잠들지 않고 늘 감시하고 있다가, 우리에게 집단을 이탈하려는 욕망이 조금이라도 생기면 냉큼 달려들어 분쇄해 버리고 만다. 양심은 사회의 이익을 개인의 이익보다 앞에 두라고 강요한다. 그것이야말로 개인을 전체 집단에 묶어두는 단단한 사슬이 된다. 그리하여 인간은 스스로 제 이익보다 더 중요하다고 받아들인 집단의 이익을 따르게 됨으로써, 주인에게 매인 노예가 되는 것이다. 그러고는 그를 높은 자리에 앉히고, 급기야는 왕이 매로 어깨를 때릴 때마다 아양을 떠는 신하처럼 자신의 민감한 양심을 자랑스럽게 여긴다. 그리고 양심의 지배를 인정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온갖 독설을 퍼붓는다. 왜냐하면 사회의 일원이 된 사람은 그런 사람 앞에서는 무력할 수밖에 없음을 너무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스트릭랜드가 자신의 행위가 불러 일으킬 비난에 정말 전혀 아랑곳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나는 그 무서운 사람을 피해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마치 인간이랄 수 없는 괴물의 모습에 공포를 느끼고 뒷걸음 치듯.
84. 여자들은 사랑하는 사람이 죽어가는 자리에서 아름답게 행동하고 싶어하는 강렬한 욕망을 가지고 있는데 그런 욕망을 볼 때마다 나는 좀 황당한 생각이 들었다. 때로 여자들은 그 멋진 장면을 보여줄 기회를 갖지 못할까 봐 남자의 장수를 오히려 못마땅하게 여기는 것 같기도 하다.
85. 스트릭랜드 부인은 참을 수 없다는 듯이 어깨를 으쓱했다. 그때 나는 부인에게 약간 실망했던 것 같다. 그때만 해도 나는 사람의 인격이란 하나로 통일되어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런 훌륭한 여자에게 그토록 깊은 앙심이 들어 있는 것을 보고 가슴이 아팠다. 한 인간이 얼마나 다양한 특질로 형성되는지 아직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이제는 한 인간의 마음안에도 좀스러움과 위엄스러움, 악의와 선의, 증오와 사랑이 나란히 자리잡고 있음을 너무도 잘 안다.
85. “사실 저는 바깥분께서 본인의 행동에 정말 책임을 질 수 있는 상태인지 판단이 서지 않습니다. 제정신이 아닌 것 같아서요. 무슨 힘에 사로잡혀서 그 힘이 시키는 대로 하고 있는 것만 같습니다. 거미줄에 걸린 날파리처럼 꼼짝 못하고 계세요. 누가 마법이라도 걸어놓은 것 같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가끔 듣는 그 이상한 이야기들이 생각나는데요. 사람의 마음에 딴 인격이 들어가서 이전의 인격을 몰아낸다는 이야기 말입니다. 몸 안에 들어사는 영혼이 워낙 불안정해서 이상야릇하게 변모할 수 잇다고 하지 않습니까. 예전 같았으면 스트릭랜드 선생에게 귀신이 들었다고 했겠죠”
88. 이런 일이 있고 나서 오 년쯤 지난 뒤, 나는 한동안 파리에 가서 살기로 마음 먹었다. 런던에서 사는 일이 따분해졌던 것이다. 날이면 날마다 같은 일을 하는 게 싫증이 났다. 친구들도 단조롭고 판에 박힌 생활을 하고 있었다. 이제 그들은 신선한 자극을 전혀 주지 못했고, 만나면 하는 얘기도 늘 뻔했다. 연애 이야기라는 것도 지루할 만큼 진부했다. 우리는 종점에서 종점으로 오가는 전차와도 같아서, 이 전차를 타고 다니는 승객의 수를 거의 정확히 알아맞힐 수 있었다. 생활이 너무 편안하리만큼 정돈되어 있었던 것이다. 나는 끔찍한 생각이 들어서 내 작은 아파트를 비워주고 얼마 안 되는 소유물을 처분한 뒤, 새로운 출발을 하기로 결심했다.
92. “난 대단한 화가나 되는 것처럼 보이고 싶지는 않네” 하고 그는 말했다. “미켈란젤로 같은 사람은 못 되지. 하지만 내게도 뭔가는 있네. 내 그림이 팔리잖나. 난 누구에게든 그 사람의 집안에 낭만을 심어주네.”
92. 지금 생각해 보니 그런 환상이 줄곧 그를 사로잡고 눈을 현혹시켜 그로 하여금 진실을 보지 못하게 했던 모양이다. 현실은 무자비했지만, 그는 늘 영혼의 눈으로 낭만적인 산적이며 그림 같은 유적이 가득한 이탈리아를 보았던 것이다. 그가 그린 것은 하나의 이상이었다. 보잘것없고 평범하고 낡아빠진 것임에 틀림없었지만, 이상은 이상이었다. 그리고 그 이상을 향한 마음 덕분에 그의 성격은 특이한 매력을 띠게 되었던 것이다.
93. 그는 감정에 약한 사람이라 너무 쉽게 마음이 움직이는 바람에 어쩐지 좀 어수룩한 사람으로 여겨졌다.
(…) 하지만 자연의 신이 그라는 인간을 사람들의 놀림감으로 만들어놓기는 했지만, 눈치마저 없게 만든 것은 아니었다. 사람들이 자기를 제물로 삼아 이런저런 장난으로 끊임없이 놀려댈 때마다 그는 늘 괴로워하였다. 그러면서도 마치 일부러 그러하듯, 그는 놀림의 대상이 되는 것을 마다하지 ㅇ낳는 것이었다. 끊임없이 상처를 입으면서도 워낙 천성이 착하여 앙심을 품는 법이 없었다. 그도 독사에 물리는 일이 있으려만 그런 체험도 소용이 없었다. 고통이 가시자마자 또다시 독사를 가슴에 다정히 껴안는 것이었다. 그의 인생은 익살극의 소란스런 대사로 가득 찬 비극과 같았다.
94. 여는 화가들과 달리 그는 다른 예술들에 대해서도 아는 바가 많았고, 특히 음악과 문학에 대한 조예는 그림에 대한 그의 감식안을 깊고 다양하게 만들어주었다.
95. 그는 이것저것 정신없이 물어댔다. 그러고는 나를 의자에 앉힌 다음, 무슨 쿠션을 두드리듯 내 등을 계속 토닥거리면서 시가며 과자며 포도주를 쉴 새 없이 권하는 것이었다. 그는 나를 가만히 두지 않으려 했다. 위스키가 없다고 안타까워하다가는 커피를 끓여주겠다고 하는가 하면, 뭔가 나에게 해줄 일이 없을까 하고 머리를 쥐어짜기도 하다가, 만면에 미소를 띠면서 갑자기 웃음을 터뜨리기도 하도, 기쁨에 겨운 나머지 온몸에 땀을 뻘뻘 흘리기도 하였다.
96. “하여간 굉장하잖나? 이봐, 자네도 말일세. 공연히 시간 끌지 말고 얼른 장가를 가게. 난 정말이지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사람일세. 저 사람 앉아 있는 것 좀 보게나. 한 폭의 그림 같지않나? 샤르댕 그림 말이야. 나도 세상의 미인이란 미인은 다 봤지만 더크 스트로브 부인만 한 미인은 아직 못 봤네”
“여보, 가만히 계시지 않으면 나가버릴 거예요”
97. 미인이 될 뻔했다가 되지 못한 얼굴이랄까. 그러다 보니 귀여운 편도 못 되었다.
(…) 그녀가 솥이며 냄비 사이를 조용하게 바삐 움직이면서 집안일을 마치 하나의 의식처럼 수행하고, 그럼으로써 그 일들이 마침내 어던 정신적인 의미까지 띠게 되는 광경이 상상되었다. 영리하다든가 재미있는 여자 같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녀의 진지한 태도에는 어딘지 흥미를 끄는 점이 있었다. 말없는 태도에 어떤 신비로움마저 없지 않았다.
98. 참으로 이상한 노릇이었다. 남의 그림을 논평할 때는 그처럼 정확하고 참신한 비평적 감각을 가지고 말하는 사람이, 자기 그림에 대해서는 왜 그처럼 진부하고 통속적인 면도 제대로 보지 못하고 그대로 만족해 버리고 마는 것일까.
98. 그는 그림 몇 장을 더 보여주었다. 보아하니 그는 로마에서 몇 해를 두고 그렸던, 그 진부하면서도 곱게만 보이는 소재들을 파리에서도 여전히 그려댔던 모양이다. 하나같이 거짓되고, 불성실하고, 겉만 그럴싸했다. 하지만 더크 스트로브만큼 정직하고 성실하고 솔직한 인간도 없었다. 이 모순을 누가 풀어줄 수 있단 말인가?
102. “...아름다움이란 예술가가 온갖 영혼의 고통을 겪어가면서 이 세상의 혼돈에서 만들어내는, 경이롭고 신비한 것이야. 그리고 또 그 아름다움을 만들어 냈다고 해서 아무나 그것을 알아보는 것도 아냐. 그것을 알아보자면 예술가가 겪은 과정을 똑같이 겪어보아야 해요. 예술가가 들려주는 건 하나의 멜로디인데, 그것을 우리 가슴속에서 다시 들을 수 있으려면 지식과 감수성과 상상력을 가지고 있어야 해"
109. 무엇인가를 목표 삼고 있긴 했지만, 나로서는 도무지 알 수 없었고 자기 자신도 모르는 것 같았다. 그가 무엇인가에 홀린 사람 같다는 인상을 이번에는 더 강하게 받았다. 제정신이 아닌 것 같았다. 그림을 보여주지 않으려는 것은 자기 그림에 별 관심이 없기 때문인 것처럼 느껴졌다. 그는 꿈속에서 살고 있었고, 현실은 그에게 아무런 의미도 없었다. 오직 마음의 눈에 보이는 것만을 붙잡으려는 일념에 다른 것은 다 잊고, 온 힘을 다해 자신의 격렬한 개성을 캔버스에 쏟아붓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러고 나서 그림 그리기를 마치면, 아니, 그리기를 마친다기보다 자신을 불태운 열정을 소진시키고 나면, 그것에 관해서는 깡그리 잊어버리고 말았다. 그는 자기가 한 일에 만족하는 법이 없었다. 마음을 끊임없이 괴롭히는 환상에 비하면 일의 결과는 아무것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왜 작품을 전람회에 출품해 보시지 않습니까?” 내가 물었다. “남들의 생각을 듣고 싶어 하실 줄 알았는데요"
“당신은 그렇소?”
그가 이 두 마디 말에 담았던 그 측량할 수 없는 경멸감을 나는 지금도 다 표현할 길이 없다.
“명성을 바라지 않나요? 명성이야말로 대개의 예술가들이 무관심할 수 없는 거 아닙니까?”
“어린애 같은 것들이지. 개인의 의견에도 아랑곳하지 않는데 어찌 속된 무리들의 의견에 신경을 쓴단 말이오?"
“우리가 다 합리적인 존재는 아니지요” 나는 웃었다.
“명성은 누가 만드오? 비평가, 문인, 주식 중개인, 여자들 아니오?"
“알지도 못하고 보지도 못한 사람들이 당신의 작품을 보고 감동을 받는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미묘하면서도 격렬한 감등을 말예요. 기분이 썩 좋지 않겠어요? 누구나 힘을 행사하기를 좋아합니다. 사람의 혼을 움직여 연민이나 공포의 감정을 일으킨다면, 그보다 더 멋진 힘의 행사가 어디 있겠습니까?"
“몰로드라마 같은 소리"
“그럼, 왜 그림이 잘 됐나 못 됐나 신경을 쓰시죠?"
“난 신경 안 써요. 보이는 대로 그리고 싶을 뿐이지"
“전 이런 생각을 합니다. 무인도에서도 글을 쓸 수 있을까 하고요. 제가 쓴 글을 저밖에는 읽을 사람이 없는 게 확실하다면 말입니다."
스트릭랜드는 오랫동안 말이 없었다. 하지만 두 눈이 야릇하게 빛났다. 그의 영혼이 마치 뭔가를 보고 황홀경에 빠진 것처럼.
“나도 때로 생각해 보았소. 망망한 바다 한가운데 떠 있는 외로운 섬, 그 섬의 아무도 모르는 골짜기에서 신비스러운 나무들에 둘러싸여 조용히 살아볼 수 없을까 하고. 거기에서는 내가 바라던 것을 찾을 수가 있을 것만 같아서"
그가 꼭 그런 식으로 표현한 것은 아니었다. 적당한 형용사가 떠오르지 않으면 몸짓으로 대신했고, 가다가 말이 막히기도 하였다. 그가 말하고 싶었다고 생각되는 것을 나의 말로 표현해 본 것뿐이다.
112. “난 과거를 생각지 않소. 중요한 것은 영원한 현재뿐이지"
114. “이상하게 여겨질지 모르지만 이런 현상이 일어납니다. 그 일이 끝나면 말할 수 없이 순수해진 기분을 느끼게 된다는 것입니다. 육체를 벗어나 영혼만 남은 느낌 같은 것 말입니다. 그래서 아름다움이 마치 감촉할 수 있는 물건처럼 만질 수 있는 것으로 느껴집니다. 산들바람이며, 신록의 나무들, 오색 영롱한 강물과도 내밀하게 마음을 통할 수 있다고 느낍니다. 신이 된 기분이랄까요. 그런 기분을 설명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159. 스트릭랜드에게서는 그런 성향을 상상할 수 없었다. 사랑은 몰입하게 한다. 사랑하는 사람은 자기를 잊어버린다. 사랑에 빠진 사람은, 제 아무리 똑똑한 사람도 - 머리로는 알지 모르나 - 자기의 사랑이 끝날 것임을 깨닫지 못한다. 환상임을 알지만 사랑은 환상에 구체성을 부여해 준다. 사랑하는 이는 사랑이 아무것도 아님을 알면서도 사랑을 현실보다 더 사랑한다. 사랑은 사람을 실제보다 약간 더 훌륭한 존재로, 동시에 약간 열등한 존재로 만들어준다. 사랑에 빠진 사람은 이미 자기가 아니다. 더 이상 한 개인이 아니고 하나의 사물, 말하자면 자기 자아에게는 낯선, 어떤 목적의 도구가 되고 만다. 사랑에 감상이 전혀 배제된다고는 할 수 없다. 하지만 스트릭랜드는 어느 누구보다 그런 약점에 빠질 위인이 아니었다. 사랑이란 무엇에 사로잡혀 꼼짝 못하는 상태라고 할 수 있는데 그가 그런 상태를 곁뎌낼 수 있으리라고는 상상할 수 없었다. 그는 그런 외부의 낯선 속박을 견딜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자신을 끊임없이 미지의 어떤 것으로 몰아가는 그 불가해한 갈망을 방해하는 것이 혹시 자기 안에 들어와 있다면, 어떠한 괴로움이 있다 하더라도, 그러니까 결국은 만신창이가 되고 피투성이가 된다고 하더라도 그 방해물을 가슴속에서 뿌리째 뽑아낼 수 있는 인간 같았다. 내가 스트릭랜드에게서 받은 그 복잡한 인상을 이제까지 조금이라도 성공적으로 설명했다면, 내게는 그가 사랑하기에는 너무 위대한 사람이면서 동시에 너무 부족한 사람처럼 느껴졌다고 말한다 해도 터무니없는 말이 아닐 것이다.
182. “고향에 가본 지가 벌써 오 년이 되었네. 죄다 잊어버린 것 같아. 고향 집에서 너무 멀리 떨어져 살다가 이제 다시 찾아가려니 왠지 쑥스러운 생각이 드네. 그래도 지금으로선 편하게 쉴만한 곳이 거기뿐이니까"
멍들고 상처받은 그의 마음은 다시 다정한 어머니의 사랑을 찾고 있었다. 만사를 쾌활하게 받아들일 수 있게 해주었던 그의 탄력성은, 여러 해 동안 사람들의 놀림을 견뎌오느라 기력을 잃고 비틀거리다 마침내 블란치의 배신이라는 마지막 일격에 완전히 무너지고 말았던 것이다. 그는 이제 자기를 비웃는 사람들과 함께 웃어댈 수 없었다. 이제 홀로 버림받은 몸이 되어버렸다.
224. 앞서 말한 대로 내가 우연히 타히티를 여행하지 않았던들, 결코 이 책을 쓰지 못했을 것이다. 이곳이 바로 찰스 스트릭랜드가 오랜 방랑 끝에 이른 곳이엇으며, 이곳이 바로 그가 자신의 명성을 확립시켜준 그림들을 그려낸 곳이었다. 어떤 예술가라도 자신을 사로잡고 있는 꿈을 완벽하게 실현시킨 사람은 없을 것이다. 기교와 싸우느라 끊임없이 괴로워했던 스트릭랜드로서는 마음의 눈이 본 비전을 표현하는 일이 다른 이들보다 더 어려웠을지 모른다. 하지만 타히티에서는 사정이 그에게 유리했다. 그는 자신의 영감을 효과적으로 표현하는 데 필요한 소재들을 사방에서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었다. 그래서 후기 작품들은 적어도 그가 무엇을 찾아 헤맸던가를 암시해 주고 있다. 그것들은 우리의 상상력으로 하여금 새롭고 신기한 어떤 것을 보게 해준다. 마치 육체를 벗어난 영혼이 머무를 곳을 찾아 방황하다가 마침내 머나먼 이곳 이국 땅에서 다시 육체의 옷을 걸칠 수 잇게 되었던 것 같다. 진부한 표현을 사용하자면, 그는 여기서 자신을 발견했던 것이다.
225. 그곳을 떠난 뒤로 사흘 동안은 내내 바다가 거칠었다. 회색 구름장이 잇따라 하늘을 빠르게 달렸다. 그러더니 어느 사이에 바람이 뚝 그치고 바다는 고요와 푸르름을 되찾았다. 태평양은 어느 바다보다 더 황량하다. 공간이 훨씬 더 광막해 보이며 평범한 항해조차 여기에서는 모험의 기분을 느끼게 해준다. 여기에서 숨쉬는 공기는 신비한 영약처럼 예기치 못한 사건을 차분하게 맞이하도록 해준다. 육신을 가진 인간이라면 타히티에 가까이 갈 때야말로 그 어느 때보다도 정말 공상 속의 황금 왕국으로 가고 있다는 느낌을 받을 것이다. 타히티의 자매섬인 할 무레아 섬은 마법 지팡이가 만들어낸 허깨비처럼, 장엄한 바위섬의 모습을 망망한 바다 위에 신비롭게 드러낸다. 들쭉날쭉한 윤곽이 태평양의 몬트서래트 섬과 흡사하다. 거기에서는 폴리네시아 기사들이 기이한 의식을 올리며 사람들이 알아서는 안 되는 신성한 비밀을 수호하고 있을 것만 같다. 거리가 가까워질수록 멋진 봉우리들이 점점 뚜렷해지면서 섬의 아름다움은 그 베일을 벗는다. 하지만 배가 곁을 지날 때에도 섬은 아직 비밀을 드러내지 않은 채, 침범을 허용치 않으려는 듯 다가가기 힘든 험준한 바위들로 자신을 엄중히 감싸고 있는 듯하다. 산호초 사이로 겨우 통로를 찾았다 싶으면 그것은 어느새 시야에서 사라져버리고, 다시 가없는 외로운 푸른 태평양만이 눈앞을 가득 채우지만 여기에서는 그것이 조금도 놀라운 일이 아니다.
타히티는 높이 솟은 푸른 섬이다. 깊게 패인 짙은 초록색의 주름은 거기에 고요한 골짜기가 있음을 짐작하게 한다. 그곳 침침한 유곡에 신비가 깃들여 있고, 골을 따라 서늘한 시냇물이 졸졸거리면서 혹은 찰랑거리면서 흘러내린다. 이들 무성한 나무 그늘 아래 태고의 삶이 아직까지 태곳적 그대로 영위되고 있음을 느낄 수 있다. 여기라고 슬픔과 두려움이 없을까. 하지만 그 느낌은 금방 사라져버리고 오히려 현재의 즐거움만이 더 뚜렷이 느껴질 뿐이다. 마치 사람들이 광대의 재담에 웃음을 터뜨릴 때, 광대의 눈에 어리는 슬픔이 그러하듯. 다들 한바탕 웃음을 나눌 때 외로움이 더 사무치는 광대는 그 때문에 더욱 입가에 미소를 띠고 재담에 신명을 돋운다. 타히티는 늘 미소짓는 모습으로 정답기만 하다. 우아한 맵시로 자신의 아름다움과 매력을 아낌없이 나눠주는 미녀와 같다. 그리고 파페에테의 항구에 들어설 때만큼 푸근한 기분을 느끼게 해주는 때가 또 어디 있을까. 부두에 정박한 아담하고 말끔한 범선들. 하얗고 세련된 집들이 늘어서 있는 바닷가의 작은 타운.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발갛게 타오르는 홍염화는 정열의 외침인 양 제 빛깔을 마음껏 뽐낸다. 그들의 부끄러움 없는 격렬한 관능에 보는 이들은 숨이 막힐 것만 같다. 그뿐인가. 증기선이 닿을 때마다 부두를 가득 채우는 사람들의 무리는 즐겁고 쾌활하기만 하다. 떠들썩하고 유쾌하고 몸짓 요란한 사람들이 구릿빛 얼굴의 물결을 이룬다. 여러분은 불타는 하늘의 푸르름을 배경으로 색채의 움직임을 보는 듯한 인상을 받는다. 모든 것이 엄청난 북새통 가운데에서 이루어진다. 짐의 하역이며, 세관 검사 같은 것들이 다 그렇다. 모든 사람이 여러분에게 미소를 짓는 것 같다. 날은 뜨겁고 색채는 현기증을 일으킨다.
253. 나는 이런 생각이 든다. 어떤 사람들은 자기가 태어날 곳이 아닌 데서 태어나기도 한다고. 그런 사람들은 비록 우연에 의해 엉뚱한 환경에 던져지긴 하였지만 늘 어딘지 모를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가지고 산다. 태어난 곳에서도 마냥 낯선 곳에 온 사람처럼 살고, 어린 시절부터 늘 다녔던 나무 우거진 샛길도, 어린 시절 뛰어 놀았던 바글대는 길거리도 한갓 지나가는 장소에 지나지 않는다. 어쩌면 가족들 사이에서도 평생을 이방인처럼 살고, 살아오면서 유일하게 보아온 주변 풍경에도 늘 서먹서먹한 기분을 느끼며 지낼지 모른다. 낯선 곳에 있다는 느낌, 바로 그러한 느낌 때문에 그들은 사랑을 느낄 수 있는 뭔가 영원한 것을 찾아 멀리 사방을 헤매는 것이 아닐까. 또는 격세유전으로 내려온 어떤 뿌리 깊은 본능이 이 방랑자를 자꾸 충동질하여 그네의 조상이 역사의 저 희미한 여명기에 떠났던 그 땅으로 다시 돌아가게 하는 것일까. 그러다가 때로 어떤 사람은 정말 신비스럽게도 바로 여기가 내가 살 곳이라 느껴지는 장소를 우연히 발견하기도 한다. 그곳이 바로 그처럼 애타게 찾아 헤맸던 고향인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여태껏 한 번도 보지 못한 풍경, 여태껏 한 번도 보지 못한 사람들 사이에, 그들이 죄다 태어날 때부터 낯익었던 풍경과 사람들이었던 것처럼 정착하고 만다. 마침내 그는 이곳에서 휴식을 발견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