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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_가을 갈무리, 겨울의 길목_<주말엔 숲으로> 마스다 미리

요호호 2018. 11. 30. 06:30



가을 갈무리, 겨울의 길목에서


비바람이 친 가을밤이었다. 아침에 일어나니 나뭇잎 모두 땅에 떨어져 있다. 이 스산함은 희망에 대한 이야기 <마지막 잎새>의 한 장면을 보는 기분. 따듯한 날들이 떠나가고 있었다. ‘아, 마늘 심어야 하는데...’


마을 집집마다, 양지바른 곳마다 들깨며 콩대며 농산물이 서 있다. 한껏 볕을 받아 바삭한 그네들을 탈탈 털어내는 집. 그 바싹 마른 검불로 가마 불을 때는 집. 김장으로 형제들이 모여 떠들썩한 집... 지금 농촌은 가을걷이와 겨울 준비가 한창이다.


밭농사를 시작한 건 순전히 맥주 때문이다. 맥주는 보리를 발효시키는 술. 취미로 맥주를 만들어오길 두 해. 올해는 직접 보리를 심어보기로 했다. 동네 형에게 밭 한쪽을 빌렸다. 농촌진흥청에서 보급하는 겉보리 ‘혜미’도 주문. 보리는 손으로 뿌려도 된다고. 열의가 너무 셌나. 매년 직접 엿기름을 내고 엿을 만드는 동네 이모가 나를 믿고 보리를 안 심다고 하였다. 임전무퇴 배수진, 이모는 당신이 가진 보리 모두를 엿기름으로 만들었다(덜덜).


 장화를 신고 갈퀴를 들고 장엄히 보리밭으로 향했다. 보리를 뿌린 후 갈퀴로 흙을 슬슬 긁어 준다. 보리가 흙에 들어가도록. 밭을 긁는 내내 이걸로 과연 보리싹이 날는지 의구심이 돋는다. 다행히 보리싹이 났 새싹 앞에 엎드려 나는 감동한다. 참새 혀 같은 순에 가까이 다가가 앉으며 나는 엿기름 이모를 떠올렸다. 안도의 한숨. 하지만 너무 오밀조밀 심었다. 서로 너무 가까우면 쓰러질 가능성이 높다고 했는데.


조상님들은 낫 놓고 기역 자 모른다는 말씀을 하셨는데, 나를 위해 남기신 말인가. 서리 내릴 때 거둔다고 하여 서리태(콩)였다. 아, 나는 얼마나 부지런하여 추석 전에 전부 베었을까. 그래도 비 오기 전에 거둬가매 펴가매 가을볕에 잘 말렸다. 서리가 내리니 슬슬 털어볼까.


더 추워지기 전에 마늘, 양파도 심어야 한다. 진즉에 얻어놓은 마늘을 쪼갠다. 물 빠지는 길을 내고 줄 맞춰 마늘을 심는다. 생각보다 간단한 마늘 심기. 금세 한 접을 심었다. 양파까지 내쳐 심는다. “보나 마나 알이 작을걸” 전화기 너머 아버지는 자식의 첫 농사를 호언장담했다. 강매로 보답해야겠다.


“내년 봄에는 산호랑나비가 되는 거야. (중략) 내년을 약속하는 건 좋은 거 같아. 자신이 내년에도 건강하게 있을 거라고 생각할 수 있는 지금, 좋지 않아? 마음의 씨앗이 팟하고 터지는 듯해.”

마스다 미리, <주말엔 숲으로> 중


절인 배추는 항아리에서 익어가고, 감은 홍시가 되고, 장롱 옆에 둔 고구마와 끝물 고추로 담근 장아찌는 긴 겨울 양식이 된다. 토란대를 꺾어 말리며 뜨끈한 육개장을 상상하고, 저 스스로 자란 결명자를 거둔다. 벌여놓은 일을 정리하고 새로운 시작을 준비한다. 지금 여기의 하루하루 내가 되어간다. 정원에 묻어둔 수선화, 튤립은 긴 겨울을 이겨낸 새봄의 선물이랄까나. 내년, 새로운 시간을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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