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 이런 일도 있었지...


항공기 정비사는 

자전거 빵꾸도 때울 수 있을것인가


변태 폭포와의 만남

무시무시한 가시와의 만남

가가멜 영제를 개과천선 시키기 위한

말썽 맹공은 계속되는데...

영제는 과연 자신의 사악함(?)을 

지킬 수 있을것인가.


말썽 하나, 깨달음 하나


그리스 아테네 이스탄불 자전거 여행 청춘의 여행 바람이 부는 순간


그리스 아테네 베나키 박물관out of the box!

알렉산드리아 면직물 재벌의 아들인 안토니 베나키의 화려한 소장품들, 고대 조각품, 페르시아 유물, 비잔틴 유물, 콥트 유물, 중국 도자기, 성상, 엘그레코 회화, 그리고 전통 의상등이 전시되어 있다.
<론리 플래닛>

에 혹해서 가게된 BENAKI MUSEUM(학생 5유로).

큰 기대없이 갔다.
(내 무식함은 박물관을 그닥 흥미로운 곳이라 말하지 않는다)
그런데 아테네 베나키 박물관은,
포스터가 말해주듯 OUT OF THE BOX(상자 밖의, 발군의) 
내 경험의 틀을 벗어난 박물관이었다.

유물들 자체도 대단했다. 더 흥미로운 건 그 유물로부터 영감을 얻은 디자인들!!
회화와 직물, 도자기들의 문양의 일부를 변형/재해석해서 만들어진 새로운 상품들.

과거로부터 현재를 가져온다는 말을 실행/구현한 걸 보았다.
물론 내가 본 한 장면만 가지고 
그리스 디자인이 더 대단하다는 일반화를 하자는 것은 아님!(발뺌)

어쨌든 베나키 내 스스로를 돌아볼 기회를 주었다.

유럽 그리스 아테네 베나키 박물관과거 유물과 현대 작품과의 상관관계를 보여주는 설명지


아 또 흥미로웠던 점.
박물관이라면 의례있는 기념품에 관한 것이다.

이들은 기념품을 사람들이 박물관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는 곳인 전시관에 
적절히 배치해 둠으로써, 홍보효과(저는 이러이러한 이야기를 갖고 있는 상품입니다.라고 상품이 말하고 있었다)를 만들었다. 이 마케팅은 내가 세계여행중이 아니라면, 곧 한국으로 돌아간다면, 돈이 많았다면 사고 싶을 정도의 힘이 있었다.

 특히 인상적이었던 건 상품이 상품으로써 가치를 지니고 있었다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여러 기념품점을 가보면(기념품 자체가 그 나라의 이미지가 아닐까 생각한다) 줘도 안가질 그런 조잡한 상품, 중국산의 저가 제품이 대부분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것을 본다. 
우리의 상품 구조나 디자인업계를 잘 모르지만
기념품 하나로도 문화적 충족감을 얻을 수 있는 상품(유물 또한 본래는 상품이였다는걸 잊지말자)이 언젠가 나오길 기대한다.

유럽 그리스 아테네 베나키 박물관유물들로 부터 온 디자인. 그리고 그 디자인의 제품. 화분


  


요리와는 거리가 멀었던 내가 요리를 시작한 건, 그리스를 여행 할 때부터였다. 매일 먹은 삶은 계란과 콘푸로스트, 빵과 잼의 식단을 웨스턴 식이라고 위안하기도 질렸을 때였다. 가장 처음 했던 요리는 카르보나라 파스타였다. 이건 사실 요리라기보다는 라면 정도의 수준이었다. 수프를 넣고 되는 대로 끓였더니 완성이 돼버렸다. 맛있게 먹는 영제를 보며 어쩌면 나라는 인간의 쓸모는 요리에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음날 1kg 당 1,000원에 파는 감자와 양파를 보았다. 좋아, 오늘은 감자 볶음이다. 엄마가 대충 이렇게 요리했었더랬지……? 서걱서걱 자르고 슥삭슥삭 볶아보았다. 방금 막 외계에서 불시착한 듯한 으깬 감자 ‘덩어리’가 완성됐다. 그래도 영제는 맛있게 먹어주었다. 영제는 참으로 대단한 남자였다. 맛있게 먹는 영제를 보며 나는 그만 요리에 재미를 붙여버렸다. 하지만 내 요리는 만드는 족족 처음 목표와는 다른 무언가를 만드는 과정이었다. 프랑스에서는 오징어 볶음 만드는 법에 따라 요리를 했는데 라볶이쯤 되는 것이, 숙주나물 볶음을 만들려 했는데 태국의 볶음국수 팟타이 비슷한 것이 만들어졌다. 굳이 맛을 표현하자면 ‘이게 뭡니까’ 맛. 이름으로 담을 수 없는 요리들. 요리는 진정한 의미에서 창조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느 날 공자가 제자 자공에게 물었다고 한다. “내가 많이 배우고 그것을 다 기억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느냐”, 자공은 반문했다. “그렇지 않습니까?” 공자는 말했다. “자공아, 나는 단지 하나의 이치로 모든 것을 꿰뚫을 뿐이다.”


 공자 선생이 자공에게 약을 판 건 아닐 테지만 나는 때때로 궁금하다. 세상의 모든 것이 정말 하나의 이치로 꿰뚫어질까. 공자의 이 대화가 떠오를 때마다 생각나는 사람들이 있다. 여행을 다니며 만난 사람들이다. 한 사람은 인도에서 만난 누님이고, 다른 한 사람은 몽골에서 만난 아저씨다.


 북인도의 맥그로드 간즈, 이곳은 티베트 사람들이 중국의 강제 합병을 피해 망명 온 마을이다. 우리가 상해에 임시정부를 세웠던 것처럼 이곳에도 티베트 임시 정부가 있고, 티베트인들의 정신적 지주 달라이 라마가 있다. 그곳은 작은 산촌이라, 길이 많지않아 오가며 한국 사람도 이따금 마주칠 수 있었다. 그 누님과도 이곳에서 만났다. 위인전을 읽다 보면 자주 나오는 말이 있다.  누님은 ‘그놈 참 장군감’이라는 말이 절로 생각나는, 드센 사람이었다. 그 장군감 기운을 누님은 말을 하는데 쓰는 듯 했다. 도무지 쉬지를 않고 말을 쏟아냈다. 누님 일행은 우리 옆 방에 묵었고 그 방에는 매 끼니 한국 음식이 출몰했다. 김치찌개, 햇반, 참치 통조림, 3분 카레, 소주. 한식의 유혹과 맞서야 했다. 누님은 '인도여행'에 대해서 모르는 게 없어 보였다. 어디 이름을 꺼내면, 어떻게 가는지, 어디를 봐야 하는지, 언제 가야 좋다든지 등등이 방언 터지듯 다다다닷 쏟아졌다. 인도여행 2주, 인도를 어서 빨리 벗어나고 싶은 게 나의 제 1 소원이었다. 그런 내 눈에 인도를 수없이 왔다고 말하고 있는 그 누님은 해탈의 빛이 나는 존재였다. 만약 인도 여행학 학위라는 게 있고, 그걸 받아야 한다면 그 누님과는 면접관으로 다시 만나지 않을까는 생각도 들었다.


 며칠 오가며 누님의 여행에는 정해진 범위가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인도 여행은 잘 알지 모르겠지만, 정작 인도는 없었다. 함께 다니던 일행도 자기 통제 범위 안에 있는 사람들, 먹는 음식도 이미 익숙한 것들, 여행경로도 이미 경험한 장소. 범위 안에서 오가는 여행. 확인을 위한 여행. 


 또 다른 사람인 아저씨와는 몽골 게스트하우스에 머물 때 만났다. 밤 9시를 넘어가고 있을 때 두 아저씨가 체크인했다. 한국인 아저씨들이었다. 오랜만에 만난 한국 사람. 안녕하세요. 몽골에서 코이카 활동 중인 아저씨와, 이 아저씨를 만날 겸 몽골 여행을 온 아저씨였다. 코이카 아저씨는 대화의 대부분을 본인의 이야기로 채웠다. 그리고 아저씨는 굳이 ‘나 게스트하우스에 왔다'는 말을 여러 번 반복했다. 평상시에는 호텔에 다니는 데 호텔이 다 차서 게스트하우스에 어쩔 수 없이 왔다. 게스트하우스에 오니 여행자 느낌도 느껴보고 좋다. 아, 이거 참 같은 방에 주무셔 주셔서 감사하네요. 같은 송구스런 마음마저 들었다. 한참이 지난 후에야 아저씨는 우리가 여행 중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어디 어디 가는데?” 우리는 말했다. “중국이랑요,”(음, 가봤지), ”베트남에 가구요.”(음, 거기도 가봤어), “태국이요.”(아, 거긴 별로야) 평가를 바라고 말을 한건 아닌데, 친절한 아저씨였다. 그리고는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듯 또 본인의 이야기를 시작했다.


 사실 이 두 만남을 통해 만난 건 내 모습일 것이다. 나라는 사람도 결국 내 경험만으로 세상을 보고 해석하는 부류니까.


 우리는 경험을 하며 살아간다. 경험하는 것, 그 자체가 인간의 삶일지도 모르겠다. 경험이란 무엇일까.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를 더 깊게 이해하기 위해, 우리의 세계를 넓혀가기 위한 도구가 아닐까. 하지만 그 도구는 때로 자신을 가두는 상자와 틀이 돼버리기도 한다. ‘외국인 노동자’라는 말을 듣는 즉시 그 사람의 대부분을 알게 됐다고 판단하는 것처럼 말이다.


 안다는 건 모른다는 걸 알아가는 거다. 아는 것이 없음. 무지의 상태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진공의 상태. 알아간다는 것은 우리 안에 진공을 만들어가는 게 아닐까 생각이 든다. 자연은 진공을 싫어하 듯, 진공을 만들어지는 순간 우리는 그 공간을 향해 빨려간다. 물이 높은 곳에서 낮은 곳을 향해 흘러가듯, 바람이 많은 곳에서 적은 곳을 향해 불어가듯, 자연에 속한 우리도 자연의 법칙에 따라 그 공간을 향해 나아가는 게 아닐까. 그 힘을 활력이라 말하는 게 아닐까. 살아 움직이는 힘. 


 나는 공자가 말한 이치를 알지 못한다. 얻고 싶지 않다. 한 가지로 만 가지를 꿰뚫어볼 수 있다는 게 과연 행복일까. 나를 뒤흔들고 공간을 만들어 가는 과정, 이전까지 알아왔던 세계, 그 울타리 너머의 어둠을 밝히고 넓혀가는 과정. 진공을 채워가는 과정, 삶에 대한 탐구. 창조. 이건 뭡니까 맛 파스타를 만들어가는 것, 살아있다는 건 이런 게 아닐까.

 


* 이건 이스탄불에서 아테네까지 1,149Km 자전거를 탔던 때의 이야기.

 우리의 자전거 여행은 달린 날 16일에, 쉰 날 4일을 더해 총 20일이 걸렸다. 아침에 일어나 먹고, 달리고, 먹고, 달리고, 숙소, 먹고, 자고, 일어난다.의 과정이 반복됐다. 먹고, 달리고, 잔다… 이론상으론 굉장히 단순한 과정. 하지만 ‘달린다' 안에는 평상시와는 차원이 다른 시간의 농밀함이 담겨 있었다. 한없이 길어지고 천천히 흘러가는 시간.

 시간을 견뎌내는 것이 자전거 여행의 요체였다. 군 생활을 하던 시절, 쏟아낼 곳을 찾지 못해 터질 것 같았던 마음이, 답할 수 없는 질문들로 가득했던 날들이,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되는 게 아닐까 하는 두려웠던 날들이 있었다. 나는 흘러가는 세월을 견딜 만큼 강한 몸을 갖지 못했다. 자전거 20일의 그 농밀한 시간, 그건 어쩌면 내게 시간을 견디는 훈련이 아니었을까 생각을 한다.

 자전거를 탄 지 11일째 되던 날. 영제와 나는 그날까지 약 660킬로미터를 달렸다. 아테네까지 약 500킬로미터 정도가 남았을 때니 대략 여정의 반을 지나고 있었을 때였다. 시작이 반이라는 말대로, 이제 시작을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제야 나는 “아테네까지 갈 수 있겠는걸?” 라는 느낌이 들었다. 우리는 자전거를 얼마나 타야 하는 줄도 모른 채 자전거를 샀다. 그리고 알게 된 이스탄불-아테네의 거리, 1,149킬로미터. 호기심과 의심이 반반 섞인 마음으로 여행은 시작됐다. 솔직히 말해 난 1,149킬로미터를 완주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우선 조금만 지루해져도 '내가 왜 이걸? - 싹'이 우후죽순마냥 돋아나는 나를 믿을 수 없었다. 자전거 녀석에게도 문제가 없던 날보다 문제가 생긴 날이 더 많았다. 내일은 나아지겠지 했지만, 페달 고정 볼트, 핸들 고정 볼트 등 중요 부품이 빠져버린다든가, 펑크가 난다거나 했다. 내 의지보다 약한 녀석이 이 우주에 존재한다니, 싶었지만 사실 우리의 십만 원 짜리 자전거는 묵묵히, 그리고 충실히 제값을 수행해주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어느새 중간을 넘어섰다. 저녁에 눈을 잠깐 감았다가 뜨면 아침, 도로, 점심, 다시 도로, 펑크, 침대의 사이클을 반복하다 보니 660킬로미터를 달린 것이다. 어느새, 그건 실로 위대한 단어였다. 

 그때쯤 돼서야 내겐 ‘나는 왜 자전거를 타고 있는 거지?'라는 의문이 들었다. 우리는 왜 자전거가 타고 싶었던 걸까?

 빈 깡통이 요란하듯, 영제와 나, 생각 없는 두 머리가 만나면 메아리가 쉽게 생기기 때문일까. “재밌겠다.”라고 장난스레 주고받았던 말에 그 다음 날 바로 자전거를 산 걸 보면 그럴 수도 있겠다. 하지만 우리의 자전거 여행이 단순히 머리로부터 시작된 건 아닐 것 같다.

 8년 전 여름, 고등학교 3학년이었던 여름방학, 나는 제주도를 자전거로 일주했다. 인터넷에서 만난 두 대학생 형들과. 그 당시 나는 내가 뭘 모르는지를 모르는, 스스로 다 컸다고 생각하던 고등학생이었다. 두 대학생 형들은 입대를 한 달 앞둔, 마치 세상의 종말을 기다리고 있는 것 같은 분위기의 형들이었다. 세상의 종말을 앞둔 두 사람과 봄날 망아지 한 마리, 각기 배경은 달랐으나 우리는 열심히 제주도를 돌았다. 한여름 뜨거운 햇볕이 작열하는 제주도를, 생명이 넘치는 제주도를. 

 돈이라는 건 그때나 지금이나 나와는 인연이 없는지라, 한솥도시락으로 연명하고, 중간중간 주유소에 들러 물을 얻어 마시는 궁색한 여행이었다. 다 돌고 나서야 '한낮의 열기를 피해 서늘한 아침, 오후 시간에만 자전거를 타야 한다던데?'를 알게 된, 몸으로도 교훈을 얻지 못한 미련한 여행이었다. 멜라닌 생성을 막는답시고 바른 선크림이 눈에 들어가 울면서 달린, 보기에도 안쓰러운 여행이었다. 어쨌든 8년 전에도, ‘어느새' 마법은 일어났고 우리는 섬을 한 바퀴 돌았다. 완주했던 그 날, 처음 출발했던 제주항 앞에 섰다. 대학생 형들은 감개무량 기념사진을 찍는가 싶더니, 본연의 세상 종말 회색빛으로 돌아갔다. 나도 완주했던 날의 기억이 딱히 없는 걸로 보아 큰 감동까지는 없었나 보다. 굳이 그때를 통해 배운 교훈을 꼽자면, '자동차는 인류의 위대한 발명품’이라는 렌터카 아저씨가 말해 줄 법한 배움 뿐. 그런 배움 따위 굳이 3박 4일 자전거를 타지 않았어도 아는 건데 말이다. 그랬던 그 날들이 그리스에서 자전거를 타며 기억난 이유는 단순히 자전거라는 연관성 때문일까.

 군인이었던 시절 나는 어느 것, 어느 곳에도 마음을 오래 두지 못했다. 마치 바닷물을 마시듯 마셔도 마셔도 갈증은 없어지지 않았다. 가슴 속 바람들은 바람처럼 나를 이곳에서 저곳으로, 저곳에서 또 다른 곳으로 떠밀었다. 민들레 씨앗 마냥 어느 곳에도 내려앉지 못한 채 현재와 미래 사이 어딘가에서 살았다. 전역을 결심하기 전, 가장 두려웠던 점은 그 바람이, 단순히 젊은 혈기라는 조바심이면 어쩌지, 그 바람이 홀연히 사라져 버리면 어쩌지, 그대로 주저앉게 되는 게 아닐지 하는 점이었다. 그 바람은 무엇이었을까. 자전거를 탄다고 했을 때, 내 안에서 불어온 바람은 무엇이었을까. 모든 걸 버리고 지구 반대편 그리스까지 오게 한 그 바람은 무엇이었을까. 어느 곳에도 뿌리를 내리지 못하게 했던 바람, 그 바람의 정체가 알고 싶었다.

 8년이 지난 후, 자전거를 타며 얻게 된 깜냥이 있다면, 언덕을 오를 때, 우리는 그 순간에만 집중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페달을 통해 전해지는 땅의 굳건함. 그 굳건함을 내디딜 때 팽팽해지는 근육들. 관념이 아닌 몸이 살아나는 세계. 그 세계에 드는 순간 나란 사람은 잊혔다. 편견, 허영, 자만심 등 내 자신을 얽매는 껍데기 따위도, 걱정도, 불안도 사라졌다. 뒷바퀴에서부터 내 시선이 머무는 전방 2m까지 만이 나의 세계, 나의 우주. 그곳에 나는 존재하면서 존재하지 않았다. 그리고 언덕을 지나면 열리는 내리막길. 바람이 불었다.

 막스 뮐러는 말했다. 인간 존재의 밑바탕을 이루는 것을 사랑이라고. 천체가 서로 끌어당기고 상대를 향하며, 만유인력의 법칙에 따라 서로 모여들 듯, 세상의 영혼들도 서로 끌어당기고 상대를 향하며 사랑의 법칙에 따라 서로 융화한다고.

 우리는 왜 살아가는 걸까, 왜 누군가를 사랑하는 걸까? 그건 우리 안에서 바람이 불어오기 때문이 아닐까. 영혼의 끌림을 향해 나아갈 때, 설렘이란 이름의 바람이 불어와 우리는 살아가고, 누군가를 사랑하는 게 아닐까. 나는 왜 자전거를 타게 된 걸까? 나는 왜 직장을 그만둬야 했을까? 아니, 바른 질문은, '왜 바람이 불었을까?’, '나는 지금 가슴 뜀을 향해 살아가고 있는가?'가 아닐까? 



그대 오늘도 굳건히 언덕을 오르길, 
담대히 내리막을 가르길. 
존재하는 삶, 우리 그 삶을 향해
함께 나아가길.


* 자전거 여행 비디오 보기.

http://www.youtube.com/watch?v=xp8DhSt8jK4



사과를 먹다 잠들어버렸다


펑크를 때우자.


자전거 짐받이 지지대가 결국 끊어져버렸다.


숙소에 들어가기 전 음식을 사며


'터키-그리스' 국경을 넘다




지친 타지생활에서

여행을 계속 할 수 있는 힘은

'한국에서 들려오는 응원의 소리'입니다.


중요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우리는 오직 마음으로만 정확히 볼 수 있다.


라는 셍텍쥐베리의 말처럼

마음으로 보는 법을 알려주신

WOW를 응원해주시는 모든 분들께.


"사랑합니다!!!"


인기를 얻고 싶으십니까

건강해지고 싶으십니까
여기 그 답이 있습니다.

그리스 터키 자전거 여행


주변에서 흔히 하는 말중에
'무슨 바람이 불었길래'라는 말이 있습니다.

무슨 바람이 분거야.
10년 몸 담았던 직장을 떠나고
18개월 여행을 하는거야.
지금은 왜 자전거를 타고 있는거야.

청춘의 경솔함이 아닐까
곧 멈춰버릴 들뜸이 아닐까
두려웠던 때가 있었습니다.

가슴에서 불어오는, 
삶이라는 이름의 바람, 
페달을 밟으며 마주할 수 있었던
바람, 그 가슴 뜀.

1,149km의 시간 동안
그 힘을 머리가 아닌 몸으로 

기억하고 싶었습니다.


그리스 터키 자전거 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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