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흑 같은 밤과 마주할 때면, 
앞으로의 계획이 성공할 수 있을까 하는 의심이 나를 사로잡는다. 
안정을 벗어나 울타리를 넘을 때 의례 나타나는 전형적인 현상인 줄 알지만 
이 틈을 부지런히 노리는 의심을 쉽게 뿌리치기 힘들다.

그 동안 이 사람, 저 사람에게 내가 여행을 떠나는 이유를 수도 없이 말했다.
내 나이 스물여섯. 바람에 몸을 맡긴 스무살에서 이젠 뿌리를 내려야하는
때를 향해 가야 한다. 하지만 울타리가 되어주고 많은 배움을 주었던
10년의 군생활을 마무리 하고 새롭게 길을 나서려 한다.
이 이상 머무는 것은 정착이라는 느낌보다는 퇴보라는 느낌이 들었다. 
군대에서 삼십 년을 상상해 본다. 그 모습은 너무도
서글프다. 그것은 진정 내가 원하는 삶이 아니다.

부모님, 내 삶의 큰 기둥들이신 분들. 그분들의 은혜를 어찌 갚을 수 있을까.
둘째 아들이 이제 혼자 앞가림 한다 싶으셨을 텐데
걱정과 불효를 드린다. 하지만 어느날 보았던 햇볕을
쫓아 기괴한 모습으로 자라버린 무화과 나무.
있어야 할 곳이 아닌 곳에 뿌리를 내려버린 존재처럼 살 수는 없다.

포근한 안개속을 걷듯 행복했던 어린 시절, 내 존재를 드러내기 위해 조바심
내던 이십대 초반, 나만의 길을 찾아온 요즘까지. 나는 정말 안정적인 인생을 살았다. 

그런데 왜 이것이 중단되어야 하는가. '나의 행복을 바라는 이들’이 내게 진정
바라는 것은 무엇일까? 침착하게, 체념하듯 따뜻한 아파트 안에서 책을
읽거나 소파에 누워 TV를 보면서 노년의 덜미에 붙잡히기를 기다리는 것?
아니 내게 그런 세월은 없을 것이다. 

내 안에서는 새로운 만남과 배움 그리고
새로운 삶에 대한 막연하지만 분명한 욕망이 나를 부르고 있다.
머나먼 초원과 얼굴로 쏟아지는 비바람과 느낌이 다른 햇살아래 몸을
맡기는 것을 꿈꾼다. 변명하기 위한 삶을 살지 않겠다.
이제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넌다.
아직 아무것도 시작되지 않았다.

2012년 12월 5일.
전역 신청서를 제출하며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