ㅡ 바람이 부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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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스탄불에서 아테네까지 1,149Km 자전거를 타던 시간의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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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자전거 여행은 자전거를 탄 날 16일에 쉰 날 4일을 더해 총 20일이 걸렸다. 아침, 밥을 먹고, 길을 달린다. 점심, 달리고, 달린다. 저녁, 숙소를 찾는다. 잠을 자고, 일어난다. 매일의 순환. 먹고, 달린다로 정리되는 단순한 과정. 하지만 ‘달린다' 안에는 평상시와는 차원이 다른 시간이 담겨 있었다. 시간의 농밀함. 그건 마치 어머니가 떠주시는 꿀과 같았다. 페달을 밟을 때 시간은 한없이 길어졌고 한없이 천천히 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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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을 견디는 것’. 그래, 이게 자전거 여행의 요체였다. 여행을 떠나기 전, 군인이었던 시절. 한 가득한 마음이 터질 것 같은데 쏟아낼 곳을 찾지 못했던 시절. 답할 수 없는 질문으로 가득했던 시절. 아무것도 아닌 인간이 되는 게 아닐까 두려웠던 시절. 화분에 못박힌듯 했던 시절. 그런 시절이 있었다. 한마디로 나는 흐르는 세월을 견딜 만큼 강한 몸을 갖지 못했다. 페달을 밟는 시간, 이 농밀함을 나는 견딜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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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전거를 탄지 11일째 되던 날, 달린 거리가 660킬로미터를 넘어섰다. 목적지인 아테네까지 대략 500킬로미터가 남았다. 여정의 반을 지나고 있었다. 시작이 반이라는 말대로 그제야 자전거 여행을 시작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라, 아테네까지 진짜로 갈 수 있겠는 걸?’ 어쩌면 완주할지도 모르겠다는 느낌이 그때야 들었다. 이스탄불에서 아테네까지의 거리, 1,149킬로미터. 자전거를 사고 나서야 알게된 거리. 끝이 보이지 않는 앞날. 과연? 호기심 반, 의심 반. 자신이 없었다. 자전거를 사고 이틀 후, 못을 박듯 여행을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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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주할 수 있을까? 자신할 수 없었다. 우선 조금만 지루해져도 '내가 왜 이걸?’ 이름의 싹이 쑥쑥 돋아나는 스스로를 믿을 수 없었다. 자전거 녀석에게도 책임이 있었다. 문제 없는 날보다 문제 있는 날이 더 많은 자전거였다. 내일은 나아지겠지. 그런 내일은 오지 않았다. 펑크는 일상이었다. 페달고정 볼트, 핸들고정 볼트 같은 중요 부품이 빠져버렸다. '나는 이제 틀렸네. 나를 버리고 가시게’라고 말하듯 했다. 내 의지보다 허약한 녀석이 이 우주에 존재한다니. 사실 십만 원 짜리 자전거는 묵묵히, 충실히 제값을 수행하고 있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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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자전거 여행이 어느새 중반을 넘어서고 있었다. 하루 주행을 마치고 침대에 누워 눈을 감았다. 눈을 뜨니 아침이었다. 마술 같은 시간의 흐름이었다. 정신을 차리면 도로 위에 있었고, 점심을 먹고 있었다. 아침, 도로, 펑크, 침대 사이를 반복하다 보니 660킬로미터 지점에 온 것이다. 어느새, 실로 위대한 단어였다. 그제야 자전거 여행의 실감이 왔고, '왜 자전거를 타고 있는 거지?' 의문이 생겼다. 그래, 우리는 왜 자전거를 타고 있는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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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전거 타고 가도 재밌겠다” 빈 깡통 둘이 만나면 메아리가 쉽게 생기기 때문일까. 빈 머리가 요란하기 때문일까. 장난스레 주고 받은 말. 그 다음 날 바로 자전거를 산걸 보면 빈 깡통 탓일 수도 있겠다. 그렇지만 여지껏 끈덕지게 이어진걸 보면, 우리 자전거 여행이 단순히 머리로부터 시작된 건 아닐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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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고등학교 3학년 여름방학, 자전거를 타고 제주도를 돌았다. 인터넷에서 만난 두 대학생 형들과 함께. 그 당시 나는 스스로 뭘 모르는지도 모르는, 다 컸다고 생각하는 고등학생이었다. 두 대학생 형들은 입대를 한 달 앞둔, 마치 세상의 종말을 기다리고 있는 듯한 형들이었다. 세상의 종말을 앞둔 두 사람과 봄날 망아지 한 마리, 각기 배경은 달랐으나 우리는 열심히 제주도를 돌았다. 한여름 뜨거운 햇볕이 작열하는 제주도를, 생명이 넘치는 제주도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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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은 그때나 지금이나 나와 연이 없었다. 한솥도시락으로 연명하고, 중간중간 주유소에 들러 물을 얻어 마시는 궁색한 여행이었다. 어느 밤, 고기가 너무 먹고 싶었다. 식당 갈 돈은 없어 슈퍼에서 삼겹살을 사왔다. 민박집 마당에서 고기를 구워먹었다. 기름 구멍이 없는 후라이팬. 고기 기름이 마구 튀겼다. 기름이 마구 튀던 후라이팬처럼 티격태격 분란이 멈추지 않는 여행이었다. 자전거 타기도 바쁠텐데 틈틈이 싸우고 삐쳤다. 한 바퀴 다 돌고 나서야 알게 됐다. 한낮의 열기를 피해 달려야 했다는 걸. 서늘한 아침, 오후 시간에만 자전거를 타야 했다는 걸. 몸으로도 교훈을 얻지 못한 미련한 여행이었다. 멜라닌 생성을 막는답시고 바른 선크림. 방수 선크림은 위대했다. 눈에 들어간 선크림은 눈물에도 지워지지 않았다. 흐르는 눈물을 닦으며 달렸다. 보기에도 안쓰러운 여행이었다.
도시락 가게에 들어선 그들. 핼쑥한 얼굴, 부어있는 두 눈, 땀에 절은 옷. 반팔 티 밖으로 나온 두 팔은 벌겠고 한쪽 쪼리는 끈이 떨어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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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랬던 8년 전 제주도 여행에서도 ‘어느새' 마법은 일어났다. 섬을 한 바퀴 돈 것이다. 첫날 출발했던 제주항 앞에 섰다. 대학생 형들은 가슴 벅차 기념사진을 찍는가 싶더니 '이게 다 무슨 소용인가’, 본연의 세상 종말 회색빛으로 돌아갔다. 나도 완주했던 날의 기억이 딱히 없는 걸로 보아 큰 감동이 없었나 보다. 굳이 교훈을 꼽자면, 자동차는 인류의 위대한 발명품이랄까. 섬을 한바퀴를 돌고 얻은 교훈이란 게 고작 렌터카 회사 아저씨가 말해 줄 법한 배움이었다. 이따위 교훈 자전거를 3박 4일이나 타지 않아도 아는 거 아닌가. 별수 없었다. 이미 돌았는 걸. 그리스에서 자전거를 타며 그 여름날이 생각났다. 그건 단순히 자전거 여행이라는 연관성 때문이었을까. 아니 그것만은 아닐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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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인이었던 시절, 어느 것, 어느 곳에도 마음을 두지 못했던 시절. 바닷물을 마신듯 무엇으로도 갈증이 채워지지 않았던 시절. 가슴 속 바람은 이곳에서 저곳으로, 저곳에서 또 다른 곳으로 나를 떠밀었다. 현재와 미래 사이 어딘가를 떠돌았다. 민들레 씨앗은 어느 곳에도 내려앉지 못했다. 전역을 결정했다. 가슴속 바람을 따라 돛을 펴기로 했다. 하지만 이 바람이 그저 젊은 날의 혈기라면, 젊음과 함께 홀연히 사라져 버리는 바람이라면. 그대로 주저앉게 된다면. 두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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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였을까 이 바람은. 모든 걸 버리게 한 이 바람은. 지구 반대편까지 오게 한 이 바람은. 어느 곳에도 뿌리를 내리지 못하게 했던 이 바람은. 자전거 여행을 생각했을 때, 불었던 이 바람은 무엇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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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년이 지나서 이어진 자전거 여행. 렌터카 아저씨의 교훈으로부터 한걸음 더 나아갔을까. 어줍잖게 깨달은 깜냥이 있다. 언덕을 오를 때, 우리는 그 순간에 집중을 해야 한다. 뒷바퀴에서부터 시선이 향하는 전방 2m. 그곳만이 나의 세계, 나의 우주다. 그 세계에 들어가는 순간 나란 사람은 잊혔다. 나와 너를 나누는 울타리가 사라졌다. 편견, 허영, 자만심, 나를 얽매는 껍데기 따위, 걱정, 불안 모두 사라졌다. 페달을 통해 전해지는 땅의 굳건함. 대지에 맞서 팽팽해지는 근육. 관념이 아닌 몸이 살아나는 세계. 그곳의 나는 존재하면서 존재하지 않았다. 언덕 하나에 두려움을, 언덕 하나에 의심을, 언덕 하나에 나를 넘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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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덕의 끝, 내리막이 열리는 곳. 지나온 길을 본다. 지난 시절 나를 채워주었던 조각, 잃어버렸던 조각. 깊이 잠겨있던 조각들이 떠오른다. 나의 속좁음에 놓쳐버린 인연들, 오늘의 나를 있게해준 고마운 사람들, 어린시절 꾸었던 꿈이. 페달을 밟았다. 내리막을 내달린다. 바람이 불었다. 나는 왜 자전거가 타고 싶었을까, 제주도로부터 이어진 기억은 왜 오늘을 기다려왔을까? 삶은 내게 무엇을 말해주고 싶었던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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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스 뮐러는 말했다. 인간 존재의 밑바탕을 이루는 것을 사랑이다. 천체가 서로 끌어당기고 상대를 향하며 만유인력의 법칙에 따라 서로 모여들 듯, 세상의 영혼들도 서로 끌어당기고 상대를 향하며 사랑의 법칙에 따라 서로 융화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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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왜 살아가는 걸까, 왜 누군가를 사랑하는 걸까? 그건 우리 안에서 바람이 불어오기 때문이다. 설렘이라는 이름의 바람이 불기 때문이다. 영혼의 끌림을 향해 나아갈 때, 서로를 바라보고 융화할 때, 우리 가슴에 바람이 불기 때문이다. 바람이 우리를 삶으로, 사랑으로 이끌기 때문이다. 그대 가슴에 바람이 부는가. 돛을 펼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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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 오늘도 굳건히 언덕을 오르길
담대히 내리막을 가르길.
존재하는 삶, 사랑하는 삶 우리 그 삶을 향해
함께 나아가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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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전거 여행 비디오
터키-그리스 국경을 넘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