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하루가 각본 없는 생방송이듯 여행은 언제라도 불현듯 시작된다. 그래서 어르신들은 삶의 x값, 미지수를 운명이라고 불렀는지 모르겠다. 여행길 위에서 그 운명이라는 녀석은 마른 불처럼 갑자기 번져 올 때가 있었다. 운명 앞에 불나방일 수밖에 없는 우리는 그 불을 피해 갈 수 없었다. 이건 인도에 있을 적에 생겼던 운명의 불장난, 콜카타를 떠나기 전날 밤에 발생한 일이다.

 야간 택시 타기… 외국에서 그것도 인도라는 나라에서 야간 택시를 탄다는 건 우리나라 야간 택시를 타는 일과는 또 다른 차원의 일이었다. 5분만 거리를 걸어봐도 '치안이 불안하겠구나'를 삼척동자도 알 수 있을 콜카타에서 야간 택시 타기는 이전까진 차마 도전할 수 없었던, 아니 피해야 했던 일이다. 그날 우리는 고아원 봉사를 함께했던 성지와 저녁을 먹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하 호호 깨 볶으며 나누다 보니 헤어지는 시간이 늦어져 버렸다. 그래도 전철이 안 끊기고 있을거야 싶었는데, 요놈의 전철이 9시도 안 돼서 끊길 줄이야. 정말로 1분 차이로 마지막 전철을 놓쳐버렸다. 전철역 앞에서 호구 두 명을 기다리고 있던 택시 두 대. 호구 둘은 가격협상을 시작했다. 하지만 그건 말할 것도 없이 처음부터 우리가 불리한 게임. 협상이란 여유가 있는 사람이 우위에 설 수 있는 법인데, 밤이 깊어 갈수록 애가 타는 쪽은 우리였으니까. 두 대뿐인 택시, 부르는 요금도 똑같은 걸 보니 그마저도 서로 친구였나 보다. 그야말로 부르는 게 값인 상황. 만 원을 달라고 했다……(전철은 백 원 이잖아, 이 자식들아…라고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이 정도 호구 짓은 아침밥 먹듯 당했던 일. 진짜 간담이 쫄깃해지는 여행이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이미 캄캄해진 콜카타의 밤. 휑한 거리 위에서 불안하게 흔들리는 불빛. 정체 모를 리듬의 음악, 개 짖는 소리 등 낮보다 더 분명히 들리는 거리의 소음. 운전대 옆에는 힌두 신 누군가에게 바쳐지는 제단. 흑백 무성영화에서나 볼법한 우리의 택시는 그 사이를 달렸다. 우리가 탄 택시는 속도에 비례해 다른 방법으로 털털 떠는 택시였다. 거기에 속도 50Km/h 이상에서는 정신이 나가는 속도계 바늘은 50Km/h쯤에서 신 나게 춤을 추고 있었다. 혼자 슬그머니 안전띠를 매는 기사 아저씨.

 힌두교도일 그 기사 아저씨가 모세를 알련지는 모르겠다. 그 아저씨는 그 옛날, 홍해 앞에서 신께 기도했던 모세처럼, 빨간 신호등 앞에서 신들린 클락숑을 울렸다. 그런다고 모세 앞의 홍해처럼 길이 기적처럼 열릴 리 만무. 하지만 아저씨는 '내,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브레이크가 아닌 가속페달을 밟았다. '내가 먼저 지나가면 장땡’ 이런 속도였달까. 조금 전 성지와 함께 저녁을 먹은 시간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정말로 즐겁고 소중한 시간이었다. 하지만 딱 3분 정도는 일찍 헤어졌어도 되지 않았을까 하는 마음이 들었다. 지하철임에도 창문을 열고 자연풍 냉방을 한다고 비웃었던 콜카타 전철에도 뒤늦게 미안한 마음이….

 그래도 이런 쫄깃한 때에 영제가 함께 있다니 다행이다. 뒷자리에 앉아 있는 영제를 보았다. 나와 달리 영제는 ‘납치’당하는 중이 아닌가를 경계하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백미러로 보이는 아까 그 동료 택시. 왠지 모르겠지만 ‘정말로' 우리 택시를 쫓아오고 있다(우연이라고 말해줘… ). 같은 상황에 다른 걸 생각할 수 있다는 건 괜찮은 일이지만, 이건 교통사고냐 납치냐 둘 중 하나, 아니면 두 개가 같이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은 상황. '지금 납치를 당하는 중이라면 차라리 사고가 나는 게 다행이겠다.’ 마음이 조금은 편안해졌다.

 30분의 야간 택시여행. 다행히 우리는 안전하게 돌아갈 수 있었다. 어쩌면 당연히 안전하게 돌아간 거겠지만. 아무튼 그때 당시 난 간덩이가 장조림이 되는 줄 알았다. 인도, 처음으로 신변의 위험을 느끼게 해준 나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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