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피로 유명한 에티오피아. 최초의 인류로 추정되는 루시가 발견됐고, 높은 수준의 문명이 존재했었던 나라. 북쪽에는 화산이 있는데 아직도 용암이 끓고 있다고. 바야흐로 한국을 떠난지 254일. 이집트를 떠나 에티오피아에 왔다. 수도인 아디스아바바에서 활화산 투어를 진행하는 여행사를 찾아다녔다. 이집트에서 비용을 알아봤었다. 활화산이라고 해봤자 결국 산일텐데, 그 비용이 2,000달러 정도가 필요하단다. 보통 외국에서 알아보는 가격이 현지에서 알아보는 가격보다 비싸기 때문에 이번에도 그러려니 하고 무작정 에티오피아에 왔다. 운이 좋게도 이곳에서 NGO 활동을 하는 일본인 친구를 알게됐다. 이 친구를 통해 또 현지인을 만났는데 그 친구가 또 여행사 사장을 소개해 주었다. 사장을 통해 결정된 최종 가격은 400달러. 활화산 그룹 투어는 3박 4일간 진행 됐다. 무슨 등산이 이렇게 비싼거야 했다. 에어컨 빵빵한 도요타 자동차와 운전기사, 영어가 유창한 가이드와 썩 괜찮은 파스타를 뚝딱뚝딱 만들어내는 요리사, 세계에서 가장 많이 생산됐다는 AK-47소총 세 자루와 보디가드들이 함께였다. 왜 비싼건지 의문이 풀렸다. 안전에 돈이 어쩔 수 없이 든다지만, 안전해질수록 어쩐지 빈곤, 아동범죄, 전쟁의 흔적 같은 그 나라의 진실과도 멀어졌다.
투어를 하는 3박 4일 동안 매일 7시간씩 차를 탔다. 멀미가 스멀스멀 올라오는 비포장길, 때론 길 없는 길. 한낮의 온도 37도. 먼지가 허옇게 일어나는 길을 달렸다. 이틀째 화산에 도착했다. 캠프에서 용암이 있는 정상까지는 2시간을 걸어 올라가야 했다. 열기가 가라앉는 밤에 올라가고 해가 뜨는 아침 내려온다. 이른 저녁을 먹고 해가 지기를 기다렸다. 쉬다가 보디가드가 벽에 기대어 놓은 AK-47을 보았다. 직업군인 출신이지만 총은 역시 무섭다. 화산이 있는 지역은 분쟁지역이었다. 2011년 분쟁으로인해 유럽인 관광객들이 죽었다고 한다. 그때부터 이 지역 여행은 경찰, 군인, 사설경비를 포함해서 가야했다고.
저 멀리 모래사막 너머로 해가 졌고 우리는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보이는 것은 앞사람의 검은 형체와 첩첩이 쌓인 바위와 어둠뿐. 시간이 지날수록 따끔따끔한 매캐한 향이 진해졌다. 무겁고 더디게 흐르는 시간. 이론에 따르면 시간 여행을 위해서는 일정한 조건이 필요하다고 한다. 여행을 한다는 건 언젠가 오래 전에 지나가버린 시간 속에 들어가는 것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절대반지를 파괴하기 위해 모르도르 화산을 올랐던 프로도와 샘이 생각났다.
전설에 따르면 절대반지는 현명함과 권력을 가져다주는 반지이다. 하지만 절대반지는 쓸수록 사용자의 몸을 점점 ‘소멸’시켜간다고 한다. 그러다가 결국에는 영원히 사라지게 된다고. 반지에 취한 영혼은 빛 없는 어둠 속을 헤매게 된다고. 혹 의지력이 강하거나 착한 사람이라도 그 시간이 다소 지연될 뿐, ‘소멸’을 막을 수는 없다고. 결국에는 악에 사로잡히고 만다고... 많은 유혹과 위험이 있었지만 프로도와 샘은 결국 반지를 파괴했다. 반지원정대에서 가장 약한 그들이 해냈다. 내가 프로도였더라면 반지를 용암 속에 던져버릴 수 있었을까. 또 나를 취하게 하고 '소멸'시키고 있는 반지는 무엇일까.
여행은 여행자에게서 유머를 빼앗아간다는 말이 있다. 내게 여행은 유머뿐만 아니라 모든 걸 빼앗아가는 과정, 파도에 차츰차츰 허물어져가는 자신을 바라봐야 하는 과정이었다. 지금껏 몸 담고 있던 세상, 나를 알아주는 친구들, 나를 정의하고 있던 관념과 문화에서 벗어나자 나 자신이라 생각했던 껍데기들이 한꺼풀 한꺼풀 벗겨져가는 과정이었다. 껍데기 속의 나는 그다지 현명하지도, 유쾌하지도, 호방하지도 않은 사람이었다. 나약한 마음과 두려움 마음이 새어들어왔고, 여행의 파도는 무정히 들이쳤다. 마음을 깎아나갔고, 생기를 빼앗아갔다. 여행이 지날수록 난 녹이 슨 무기물로 변해갔다. 거짓 지혜와 힘을 주는 절대반지에 취한 자의 모습이 아닐까.
산을 오르기 시작한지 2시간, 멀리 불이 보였다. 깊은 어둠에서 태어난, 아득하면서도 강한 불이었다. 출렁이는 붉은 용암, 그 위에서 녹아내리는 암석, 멀리까지 뿜어지는 열기, 냄새. 살아있기에 활화산이라고… 지구에게도 심장이 있다면 이런 모습이 아닐까. 피와 감각, 순환과 호흡, 소멸과 생성, 살아있음, 생명.
미국의 철학자 랄프왈도 에머슨은 말했다. 세상은 거짓을 꿰뚫어 보는 자의 것이다. 에머슨의 말은 적어도 여행에 있어서 헛된 거짓을 버릴 때 인간은 진실로 자유로울 수 있다는 말이었다. 절대반지를 버려야 자유로워질 수 있다는 말이었다. 절대반지는 결국 세상의 거짓이었다.
절대반지는 모르도르에 던져짐으로 파괴되었다. 한 인간의 허영과 거짓들도 불태워 버릴 수 있을까. 여행을 할때 사람은 그가 안다고 생각했던, 그 자신이라고 생각했던 것들이 무너짐을 느낄 것이다. 여행은 자신을 녹이고 불순물을 태우는 과정이므로. 인간이 자신의 온 존재를 태우고도 남을 것은 무엇일까. 사라지지도 않고 썩어 없어지지도 않을 것은 무엇일까. 인간이 온 생애를 다 바쳐도 아깝지 않을 궁극적인 목표와 목적은 분명 있다. 그 살아있음 속에 거짓을 불태우고, 꽃이 피어나듯 나날이 새로워질 수 있도록 해주는 힘이 있다. 그것이 심장을 가진, 살아있는 자의 권리이고 책임이 아닐까. 아침이 밝았다. 세상에 퍼져가는 햇빛과 함께 밟고 있는 땅이 보였다. 단단히 굳어가는 땅을 보았다. 새로운 하루가 시작되고 있었다.
그래, 아직 아무것도 시작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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