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하게 된다. 여가와 풍요의 시대에 우리는 행복한가? 혹은 여가와 풍요를 행복과 등가화하지는 않더라도, 여가를 통해 충분한 자유와 즐거움을 느끼고 있는가? 이 질문에 대해 확신을 갖고 대답하기는 어렵다. ‘여가와 풍요의 시대에 대한 확신만큼 여가를 통한 자유, 즐거움, 그리고 행복에 대해 확신하기가 어렵다는 것이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이다.
초기산업사회부터 최근의 후기산업사회에 이르기까지 경제/사회/정치/문화/기술적 진보가 대중의 여가를 위한 잠재 가용 시간과 자원의 총량을 증가시켰으며, 그로 인해 여가에서 선택의 양과 폭이 예전과 다르게 확산된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문제는 근대 이후 이런 일련의 여가 환경의 양적/질적 변화에 비례해서, 여가가 본질적으로 추구하는 자유, 즐거움, 그리고 행복 역시 긍정적인 방향으로 진보했다고 볼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 오히려 많은 사람들이 옛 시절을 그리워하는 것을 종종 목도한다. 과거의 여가는 시간도 여건도 부족했지만 안락함과 편안함이 있옸고, 심지어 일을 통한 보람과 충족감도 적지 않았다. 반면 오늘날의 여가는 시간도 많고 여건도 풍요롭지만 과거의 안락함과 편안함, 그리고 그로 인한 뿌듯함은 희석되고, 오히려 삶의 팍팍함마저 느껴진다. 자유롭고 즐겁고 그래서 행복해야 하는 여가가 여가답지 못하고, 심지어 피곤한 상황을 만들어내는 ‘여가의 역설’현상이 심화되고 있는 것이다. ‘자유 없는 여가’, ‘여가 없는 여가’, 참으로 왜곡된 여가사회의 단면이다.
바쁜 일 때문에 가족과 함께 시간을 보내지 못하는 현대의 가장은 자신의 휴식과 즐거움을 위해서라기보다는 가장으로서 ‘의무화된 여가’를 보내느라 주말에 정작 쉬지 못한다. 그리고 여가 장소로 오가는 도중은 물론, 여가 장소에서도 가족을 배려하느라 늘 피곤한 상태이다. 이처럼 여가가 그 자체로 즐거움이나 자유로움을 추구하기 보다 어떤 목적을 이루기 위한 도구적 수단이나 일시적인 스트레스를 풀기 위한 ‘탈출형/재충전형’으로 전락되고 있다. 또한 가용 시간은 늘었지만 오히려 이 시간을 활용하여 부수적인 수입을 얻기 위한 대체 수단으로서의 역할이 증대되고 있다. 심지어 실업자나 조기 은퇴자의 경우처럼 객관적인 여가시간은 늘었지만 그 속에 진정한 자유가 없는 ‘강요된, 강제된 여가’를 보내는 이들도 눈에 띄게 증가하고 있다.
15. 우리는 이 문제를 풀기 위해서 여가를 중심에 놓고 세상을 해석하는 방법을 택하고자 한다. 사실 오늘날의 여가 이해는 근대적 생산을 중심으로 새로운 사회질서가 강요되는 가운데 노동과 여가가 분리되면서 노동 이해의 결과로서 얻은 것이라고 생각된다. 생산의 중심성과 그 연장선상에서, 노동의 중심성은 산업자본주의의 주된 생산력이 바로 노동이었기 때문에 필연적이었다. 생산 패러다임 혹은 노동 패러다임은 근대적 여가 이해의 중핵이 되었다.
이러한 노동 패러다임하에서의 여가는 기껏해야 노동의 주변적 지위로서 그 의미가 있을 뿐, 여가를 삶 차원에서 보다 넓고 깊게 이해하고 해석하는 데는 분명한 한계를 보인다.
16. 이런 폐해를 방지하기 위해 우리는 여가를 중심에 놓고 세상과 삶을 바라보는 여가중심적 접근을 시도한다. 이러한 접근은 여가를 해석의 대상이 아니라 세계와 삶을 이해하는 중심적 거점으로 이해하는 방식이다.
여가중심성이라는 지평 위에서 드러나기 시작하는 여가의 현실과 이상을 이해하려면 우선 여가가 이뤄지는 역사적/현재적 지평, 그리고 여가가 무엇인지에 대한 가치 기준이 온당하게 평가되어야 한다.
17. 자본주의적 여가의 삶 속에는 불가피한 부분과 정상적인 부분, 그리고 비정상적인 부분이 모두 녹아 있을 것이다. 이들을 가려내가 불가피한 부분과 비정상적인 부분에 대해 살펴볼 수 있을 것이다.
결국 ‘여가와 풍요의 시대’에 우리는 왜 여유롭고 자유스러운, 그래서 행복한 삶과 여가를 구현하지 못하고 있는가에 대한 대답은, 여가를 중심에 놓고 세상을 해석하는 가운데 현재의 여가가 어느 정도 왜곡되어 받아들여지고 있는지를 보면서 그 원인을 역추적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과정에서 여가와 풍요의 시대에 나타나는 역설적 현상 앞에서 우리의 삶을 반추하고, 더 나아가 삶과 세상에 대한 ‘여가적 상상력’을 통해 과거와 현재를 종합하는, 가치와 사실을 담아내는 다양한 삶의 모델을 제시할 수 있을 것이다.
18. 인간은 일하지 않고 살 수 없고, 동시에 여가없이 살 수 없는 존재이다. 일은 여가의 경제적 기반이고, 여가는 일의 심리적 동기에 해당한다. 이를 일과 여가의 구분을 넘어 일과 여가의 교호성이라 부르고자 했다. 일과 여가의 교호성은 인간의 삶을 지속시키고, 건강하고 의미 있는 생활을 위해 수행하는 이원적 율동과도 같다. 이것은 인간과 함께하는 자연스러운 삶의 리듬인 것이다.
19. 이 책에서는 일과 여가의 기능적 관계를 넘어서 삶의 존재 양식으로 일과 여가의 이원적 교호성의 개념과 의미를 설명할 것이며, 이 개념을 이 책의 종지로 사용할 것이다.
24. 말하자면 본원적 수준에서 즐거움과 기쁨을 주고 그래서 행복한 그런 충만한 여가가 아니라 스트레스 해소를 위한 ‘탈출’과 ‘재충전’이 목적인 표피적 수준의 1차원적 여가인 것이다.
오늘날의 여가 개념은 노동하지 않는 시간으로 이해되는데, 이는 노동 개념을 중심으로 한 편협한 시각일 뿐 아니라 경제 중심적인 한계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이다. 우리는 이런 틀을 벗어나 여가를 넓고 깊게 이해하기 위하여 교시적 틀을 도입했다. 이 틀은 인간의 존재 양상을 자유-필연, 가치-사실이 교차된 평면에서 종합적으로 조명하기 위한 것이다.
25. 반면 우리는 여가를 자유의 영역에 배치하고 자유와 여가의 내재적 관계를 탐색했다. 여가는 우선 노동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자유 시간이지만, 더 나아가 아리스토텔레스의 지혜를 빌려 마음이 바쁘지 않은 상태라야 여가가 될 수 있다고 보았다. 나아가 여가는 자기 발생성이라는 맥락에서 자유롭고 의미 있는 활동이어야 진정한 여가가 될 수 있다고 설명하려 한다. 여기서 여가는 활동을 의미할 뿐만 아니라 사유 또한 포함하는데, 세상의 번잡한 일로부터 자유로운 무위 수준에서 사유 삼매경에 몰입되어 이쓴ㄴ 것도 여가라 할 수 있다. 일의 세계는 목적 합리성과 도구적 합리성이 지배하는 인위적 세계이므로 마음의 여유를 바탕으로 인위의 무화를 통한 여가 상태로의 진입을 본원적 여가라 했고, 본원적 여가의 한 가지 형태를 성찰적 여가로 개념화했다. 그리고 성찰적 여가가 진정한 것일 때 비로소 여가적 성찰의 경지에 들어간다고 보았다.
56. 동양의 전통에서 관광은 ‘주역’ 관괘에 나오는 ‘관국지광’의 형태로 처음 등장한다. ‘관국지광’은 나라의 빛을 본다는 뜻이다. 당시 관국지광의 주체는 공경과 현자였고, 그 대상은 자연경관이 아니라 예악형정이었다.
공경은 주나라의 높은 관직자를 가리켰고, 예악형정에서 예는 예법 제도, 악은 음악, 형은 형벌, 정은 정령을 지시한다. 이렇게 볼 때 관국지광 및 관광에서의 광은 문자 그대로 자연 현상으로서의 빛남을 넘어 일국의 문물 및 제도의 탁월함, 빼어남을 의미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때 ‘국지광’의 내용은 예악형정이었으며, 곧 정치에 대한 음미와 그에 기반한 평가였다. 말하자면 관국지광은 국정의 예악형정에서 탁월함을 감별하고 기록함으로써 이를 평가하는 행위를 뜻했다. 전통 시대에는 예악형정이 서로 조화를 이뤄야 나라가 바로 선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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