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 이 완벽한 자궁 안에서 그림자는 더 이상 떨리지 않으니,
생동감 넘치는 빛으로도 동요되지 않는다.
완벽한 자궁은 닫혀 있는 한 세계로서,
어둠의 질료들이 상호 작용하는 우주적 동굴이다.
ㅡ 가스통 바슐라르, <대지 그리고 휴식의 몽상>에서
33. ‘슬픔’은 어떤 타자가 나의 삶의 의지를 꺾으려고 할 때 발생하는 감정이다. 여지주가 주인으로서의 삶을 부정할 때, 게라심이 느꼈던 것도 바로 이 슬픔이다. 이런 슬픔이 반복되면 누구나 비루함에 빠져들게 될 것이다.
46. 누군가 나를 사랑한다는 단순한 사실 하나만으로 우리는 금방 자긍심을 회복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내 자신이 충분히 소중하고 매력적인 존재가 아니고서는, 어떻게 타인이 나를 사랑한다는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나겠는가.
48. 사랑은 경탄과 함께 시작되고, 경탄과 함께 유지되는 법이다. 결국 내 마음속에 애인에 대한 경탄이 없어졌다면, 사랑은 이미 덧없는 옛이야기가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어떻게 하면 우리의 사랑을 ‘오래오래’ 지속할 수 있을까?
49. 그녀의 검은 눈에서 금빛 광채가 반짝거렸다. 희로애락의 그 어떤 감정으로도 결코 꺼뜨리지 못할 장난기였다. 가브리엘은 전율을 느꼈다. 그는 여자를 잘 몰랐다. 아내가 있긴 하지만, 누구나 아는 바와 같이 아내라는 존재는 청혼에 응하는 그 운명적인 순간부터 여자라는 종에서 벗어나 별도의 잡종이 된다. 요컨대 가브리엘은 40년을 살도록 아직 이렇게 장난기 가득한 여왕 스타일은 만나 본 적이 없다. (‘오래오래’에서)
51. (기존의 세계에) 거리를 두게 하고, 심지어 자신을 기존의 모든 관계로부터 벗어나도록 만드는…
‘경탄이란 어떤 사물에 대한 관념으로, 이 특수한 관념은 다른 관념과는 아무런 연결도 갖지 않기 때문에 정신은 그 관념 안에서 확고하게 머문다.’ ㅡ 스피노자, <에티카>에서
다른 관념과 아무런 연결도 갖지 않는 특수한 관념, 그것은 한마디로 말해서 다른 것과 비교 불가능한 관념을 말한다. 지금까지 실물로 본 적이 없는 거대한 폭포 앞에 서는 순간, 우리는 입만 바보처럼 벌리고 경탄하게 된다. 다른 것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압도적인 풍경이기 때문이다.
(…)
“혼위의 사랑은 결혼 생활과 달라요. 게으르게 마냥 똑같은 모습으로 남아 있을 수가 없죠. 끊임없이 온갖 것을 파악해서 범상함을 초월해야 해요. 아니면 차츰차츰 너절한 타성에 빠져들어 그저 생리적인 욕구나 채우려고 만나는 관계가 되는 거예요.”('오래오래’에서)
엘리자베트의 말처럼 관계가 “범상함을 초월하려는” 노력이 사라지는 순간, 다시 말해 “너절한 타성에 빠져 그저 생리적인 욕구나 채우려고 만나는 관계”가 되는 순간, 우리는 더 이상 서로에 대해 경탄의 존재로 남을 수 없게 된다.
엘리자베트는 가브리엘의 “마음속 깊은 곳에 들어앉은 태양” 같은 존재였다. 그렇게 가브리엘에게 항상 ‘경탄’의 대상으로 남아 있기 위해, 현명한 엘리자베트는 ‘범상한 관계’를 초월하려고 노력했다. 오직 그럴 때에만 사랑은 지속될 수 있으니까.
76. 야심은 아카시아 나무와도 같다. 너무나 생명력이 강하고 뿌리가 깊어서 주변의 다른 나무들을 모조리 파괴하는 아카시아나무 말이다. 그렇지만 아카시아 꽃향기는 어찌나 매혹적인지! 야심은, 적절히 통제해야만 한다. 그럴 때에만 우리의 마음 속에 다른 수많은 감정들도 자기 결을 따라 제대로 자라날 수 있고, 그러면 우리는 그만큼 더 행복에 다가갈 수 있을 테니 말이다.
93. 사랑이 죽으면 대담함이라는 감정, 온갖 불의와 억압에도 당당할 수 있었던 가장 인간적인 감정도 맥없이 사라지기 마련이다. 이것이 바로 <1984>에서 작가가 우리에게 말하고자 했던 것 아닌가. 사랑을 지켜라, 그러지 못하면 인간의 모든 고귀한 가치들, 그리고 인간으로서의 자긍심도 무기력해질 테니까.
96. 이 점이 중요하다. 용기와 비겁은 불변하는 성격과도 같은 것이 아니다. 그러니까 나는 원래 비겁하거나 원래 대담하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 오직 위기를 감내하려고 할 때에만 용기와 대담함은 빛을 발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아무도 모를 일이다. 내가 번지점프대에 서는 것과 같은 위기 상황에서 앞으로 발을 내딛을지, 뒤로 물러날지 말이다. 분명한 것은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면 앞으로 발을 내딛을 가능성이 더 커진다는 사실뿐이다.
106. (탐욕) 돈에 대한 갈망에서 빠져나올 방법은 있을까? 그것은 나름대로 최적생계비를 생각하며 돈을 버는 것이다. 돈을 목적의 자리가 아니라 원래 자리, 그러니까 수단의 자리로 만들려면 이 방법밖에 없다. 돈은 여행을 가려고, 맛난 음식을 먹으려고, 혹은 멋진 옷을 사기 위한 수단이다. 그리고 돈은 또한 사랑하는 사람들 사이의 관계를 부드럽게 해주는 윤활유다. 바로 이것이다. 돈에 대한 갈망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방법은 있다. 최적생계비를 계산하고, 그것을 삶에 관철하는 것이다. “됐어. 이 정도면 됐어. 이제 삶과 사랑을 향유해야지.” 갈망에서 자유로워지는 첫걸음은 이렇게 내딛는 것이다.
116. (반감) 자신이 싫어했던 사람의 모습을 새로 만난 다른 사람에게서 다시 발견하게 되는 것은 섬뜩한 일이다. 이경우 우리는 그 새로 만난 사람을 싫어할 수 밖에 없다. (…) 이처럼 반감에 쉽게 사로잡히는 사람들은 과거 망령에 사로잡혀 살아가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현재의 행복과 미래의 행복을 모두 기대한다면, 비록 쉽지 않은 일이겠지만 이 망령을 쫓아내야만 하지 않을까?
123. (박애. 공동체 의식을 가능하게 만드는 원동력)내 삶이 가장 비참해질 때, 인생이 바닥까지 떨어질 때, 그만큼 모든 사람을 품어 줄 수 있는 역량을 기르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좌절하지 말고 그 바닥을 차고 올라오는 데 성공한다면 우리는 마침내 박애의 감수성을 배우게 되니까 말이다.
(…) 자신이 가진 전부를 내어줄 수 있을 때 박애라는 감정은 그 빛을 발하게 된다. 그렇지만 이 순간 박애의 주체는 동시에 비참한 신세로 전락하게 되겠지만, 동시에 제대로 사랑했다는 행복감을 만끽하게 될 것이다. ‘자발적인 가난’, 이것이 바로 박애가 드러나는 행동 양식이다. 비참한 사람들보다 더 비참해지려는 결의, 그들보다 더 피곤하려는 결의, 그들보다 더 가난해지려는 결의다. 그래서 한 번이라도 비참한 삶을 경험했던 사람이 박애의 감정을 갖기 더 용이한 법이다. 물론 비참함이라는 삶의 바닥을 박차고 일어나는 경험은 불가피하지만 말이다. 비참한 삶을 겪어내는 사람은 마침내 박애라는 숭고한 정신을 배울 수 있지만, 그런 경험이 전혀 없는 사람에게 박애는 막연한 미사여구에 지나지 않을 수 있다.
125. “‘평등’은 민사적으로는 모든 능력들이 동등한 기회를 갖는 것이고, 정치적으로는 모든 투표들이 동등한 무게를 갖는 것이고, 종교적으로는 모든 양심들이 동등한 권리를 갖는 것이오. (……) 여러분, 19세기는 위대하지만, 20세기는 행복할 것이오.” ㅡ 빅토르 위고
126. 사적인 차원에 국한되어 있든 공적인 차원으로 확장하든 간에, 사랑의 원리는 소유의 원리와 달리 무소유의 원리를 토대로 한다는 것만은 확실하다. 겨울의 찬바람에 애인이 떨고 있다면, 누구나 기꺼이 추위를 무릅쓰더라도 자신의 옷을 벗어 줄 것이다. 이럴 때 두 사람은 최소한 하나의 공동체를 형성하게 된다. 이렇게 공동체의 범위는 우리가 자신이 가진 것을 어디까지 나누어 주느냐에 의해 측정될 수 있다. 아무리 같은 마을이나 아파트 단지, 같은 도시나 같은 국가에 살고 있다고 할지라도, 그것만으로는 공동체가 저절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사랑의 원리가 관철되지 않는다면, 공동체라는 것은 아무런 의미도 없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지금은 커플 사이에도 무소유의 원칙, 사랑의 원리가 희석되고 있는 불행한 시대다. 합리적인 것처럼 쿨하게 더치페이를 외치고, 여자도 남자와 동등하게 일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그 바닥에는 자기 것을 지키겠다는 강한 소유 의지가 깔려 있기 때문이다. 커플이나 부부 사이에도 사랑의 원리가 훼손되어 있는데, 지역이나 국가 공동체의 경우는 어떻겠는가? 이런 시대에 전체 인류로 확장되는 사랑의 원리, 즉 박애의 정신이 어떻게 제대로 평가될 수 있겠는가. 연애에서부터라도 차근차근 사랑 연습을 하자. 상대방에게 아낌없이 자신이 가진 가장 소중한 것을 나누어주는 것, 이것도 연습이 필요한 시대니까.
130. (연민) 불행히도 연민은 결코 사랑을 바뀔 수 없다. 왜 그럴까? 타자의 불행을 감지했을 때 출현하는 감정이기에, 연민의 밑바닥에는 다행히 자기는 그런 불행을 겪지 않았다는 것, 나아가 불행한 타자를 도울 수 있는 자신에 대한 자부심이 깔려 있기 때문이다.
약자를 도울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 발생하는, 강자가 되었다는 자부심, 혹은 누군가에게 필요한 존재가 되었다는 존재감, 이것이야말로 연민의 감정 뒤에 숨겨진 이면의 정체다.
143. (회한) 바로 여기에 당시 클라망스가 느꼈던 무력감, 다시 말해 위기에 처한 사람을 구하려한 실마리가 있다. 자신의 무력감이 적나라하게 드ㅓ나는 슬픔만큼 비참한 경험이 또 있을까? 스피노자에 따르면 기쁨이란 자신의 힘이 증진되었다는 느낌에서 오는 감정이라면, 슬픔은 이와는 반대로 처절한 무력감에서 유래하는 감정이다. 그러니 회한이라는 감정은 얼마나 무서운가? 위기 상황에 이르면 타인을 구원하기는커녕 항상 무력감을 느낄 것 같은 예감이 드는데 어떻게 우정이나 사랑과 같은 소망스러운 감정에 빠져들 수 있겠는가. 센 강에서 느낀 무력감에 대한 회한이 클라망스의 내면을 어찌나 무겁게 짓누르고 있는지, 그는 배에서 쓰레기가 버려지는 장면마저도 누군가가 물에 뛰어드는 것으로 보일 정도였다.
158. (당황. 멘탈붕괴와 함께하는 두려움) 한마디로 나도 내가 누구인지 모르겠다는 느낌, 혹은 나 자신을 믿지 못할 것 같다는 느낌이 바로 당황이라는 감정의 정체다. 그러니까 당황의 감정은 라캉의 표현을 빌리자면 “이런 사람일거야.”라고 생각했던 나와 실제로 살아서 욕망하는 나 사이의 간극을 확인할 때 발생한다. 어쩌면 당황의 감정에 빠진 사람은 행운아라고 할 수 있다. 당황의 감정을 통해 우리는 진정한 자신, 혹은 자기의 맨얼굴을 찾을 수 있을 테니 말이다. 그러니까 가면의 욕망과 맨얼굴의 욕망이 우리 내면에서 격렬하게 충돌한다면, 당황의 감정에 사로잡힌 것이다. 그러니 당황에 빠질 때 걱정할 것ㄴ 없다. 무조건 맨얼굴의 욕망, 즉 내가 이런 사람이었나 하고 경이롭게 생각하는 욕망이 이길 수밖에 없기때문이다. 물론 아주 여린 사람들은 맨얼굴의 욕망을 거부할 수도 있다. (…) 뭐, 할 수 있을 때까지 자신에게 저항해 보라. 맨얼굴의 욕망을 부정하고 가면의 욕망을 추구하면 할수록, 낯빛은 피폐해지고 삶은 무기력해질 테니까.
162. (경멸. 자신마저 파괴할 수 있는 서글픔) 경멸이란 정신이 어떤 사물의 현존에 의하여 그 사물 자체 안에 있는 것보다 오히려 그 사물 자체 안에 없는 것을 상상하게끔 움직여질 정도로 정신을 거의 동요시키지 못하는 어떤 사물에 대한 상상이다. ㅡ 스피노자, <에티카>에서
167. 오스먼드는 변한 것이 없었다. 그는 구혼을 할 무렵에도 그녀에게 보닛ㅁ을 감추지 않았다. 그러나 이사벨은 그의 본성의 반쪽만을 보았으며, 그것은 마치 지구의 그늘 때문에 일부가 가려진 달의 표면을 본 것과도 같았다. 그러나 지금 그녀는 만월, 즉 인간 전체를 보게 된 것이다.
누군가를 앞에 두고서 다른 사람을 생각하는 것, 혹은 다른 사람을 생각하려고 하는 것, 이것이 바로 경멸이다.
184. 그렇지만 뭐 어떠한가! 하루라도 자신이 진정으로 욕망하는 것을 행하고 죽는 것, 그것이 더 커다란 행복이니 말이다. 기쁘면 기쁘다고 표현하고, 슬프면 슬프다고 표현하자. 그것이 바로 욕망을 긍정하는, 쉽지만 녹록치 않은 방식이다. 이러한 이유에서 자신의 욕망을 긍정하는 사람은 자신의 감정에 솔직한 사람인 것이다. 자신의 감정에 충실하기! 그것이야말로 우리가 자신의 욕망을 긍정하고 복원하는 유일한 방법이다.
“그 갈정은 단지 성적 욕망만이 아니라, 낭만과 모험, 죄악, 광기, 야수성 같은 금지된 모든 것에 대한 억제할 수 없는 욕망이었다.” (프랑스 중위의 여자 에서)
(욕망이 내 욕망인지 남의 욕망인지 알아보는 방법)출발의 설렘이 있다면, 과거 우리의 욕망은 나만의 욕망이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반면 완성의 허무함이 있다면, 과거 우리의 욕망은 불행히도 타인의 욕망을 반복했던 것임이 밝혀지는 것이다.
208. (멸시) 예를 들어 사랑의 감정에 빠져 들었다면, 우리는 상대방에게서 그 원인을 찾는다. 사랑의 감정을 일으킨 원인을 나 자신이 아니라 전적으로 상대에게 돌리니, 과대평가는 불가피한 일이다. 반대로 미움의 감정이 발생할 때도 우리는 전적으로 상대방에게서만 그 원인을 찾는 경향이 있다. 당연히 상대방은 미움을 가져다 준 사람이라고 저주받게 될 처지에 놓인다. 여기서 멸시라는 감정이 시작된다. 멸시라는 신호를 보냄으로써 우리는 상대방이 관계를 끊어주기를 바라는 것이다. 자신이 직접 미움의 관계를 단호히 청산하지 못하는 사람일수록, 그는 멸시를 통해 상대방을 막다른 궁지에 몰아넣으려고 한다. 관계의 시작과 끝에서 자신은 어떤 책임도 없다는 듯이.
232. (과대평가. 사랑의 찬란한 아우라) 사랑은 두 사람을 삶의 주인공으로 만드는 감정이다. (…) 그러니까 과대평가가 사랑에 빠진 사람들에게는 부수 효과가 아니라 본질적인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스스로 사랑에 빠져 있는지 확인하는 방법은 의외로 쉽다. 상대방을 지나치게 크게 평가한다면, 우리는 분명 그릴 사랑하고 있는 것이니까. 어쩌면 과대평가야말로 어떤 사람이 사랑에 빠져 있다는 것을 보여 주는 가장 강력한 증거라고 할 수 있다.
245. (호의) “내가 아는 거라고는 기즈키의 죽음으로 인해 내 젊음의 기능 일부가 완전하고도 영원히 망가져 버린 것 같다는 것뿐이었다. 나는 그것을 뚜렷이 느끼고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고 어떤 결과를 가져다줄 것인지, 그것은 나의 이해 범위를 넘어선 일이엇다.”
(노르웨이의 숲에서)나오코의 요양원 룸메이트는 도피의 세계를 찾는 영혼들에 대해 이렇게 설명한다.
우리는 분명 자신의 뒤틀린 부분에 잘 적응하지 못하는 건지도 몰라. 그래서 그 뒤틀림이 불러일으키는 현실적인 아픔이나 고뇌를 자기 내면에서 정리하지 못하고, 그런 것들로부터 멀어지기 위해 여기 들어온 거야. 여기 있는 한 우리는 남을 아프게 하지 않아도 되고, 남에게 아픔을 당하지 않아도 돼. 왜냐하면 우리 모두 스스로에게 ‘뒤틀림’이 있다는 사실을 아니까. 이런 점에서 외부 세계와 이곳은 완전히 달라. 외부 세계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스스로가 뒤틀렸음을 의식하지 않고 지내. 그러나 우리의 이 작은 세계에서는 뒤틀림이야말로 존재의 조건이야. 인디언이 머리에 자기 부족을 상징하는 깃털ㅇ르 꽂듯이 우리는 뒤틀림을 끌어안고 있어. 그리고 서로에게 상처를 주지 않으려고 조용히 사는 거야.
262. (영광. 모든이의 선망으로 타오르는 위엄) 그렇지만 영광을 추구하는 이면에는 다른 사람에게 당할 멸시나 경멸에 대한 원초적인 두려움이 전제되어 있다는 것을 잊지 말자. 권력이나 자본이 항상 상벌의 논리로 우리를 유혹할 수 있는것도 우리에게 영광을 추구하고 치욕을 멀리하려는 욕망이 있기 때문이다.
지나치게 영광에 집착하는 사람들은 스스로 기꺼이 고독을 감내해야만 한다. 영광에 집착하는 사람은 사랑과 유대의 가치를 망각하고 타인을 경쟁 상대로만 생각하기 때문이다. 인간적인 유대와 사랑을 원하는가? 공존과 공생을 원하는가? 그렇다면 영광을 멀리하고 치욕을 기꺼이 감내할 일이다. 이럴 때 우리에게는 전혀 다른 세상이 펼쳐지게 될 것이다.
274. (감사.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을 품고 친절을 베풀 수밖에 없는 서러움) 감사의 감정에는 분명 사랑이라는 열정적인 감정이 함축되어 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감사의 표현은 상대방에 대한 사랑의 열정ㅇ르 식힐 수 있다. 아니, 정확히 말해 식히려고 노력할 때, 우리는 서둘러 상대방에게 감사의 말을 전하는지도 모른다.
278.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 존재할까? 물론 존재한다. 그렇지만 … 이루어질 수 있는 사랑이 있고, 반대로 그럴 수 없는 사랑이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오히려 사랑을 이룰 수 없는 우리 자신이 문제일 것이다. 그러니까 사랑을 우리가 감당하지 못할 때, 그것은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 된다. 사랑이 어떻게 쉬운 감정이겠는가. 하나를 잡으면 다른 하나를 놓아야 하는 법인데! (…) 약한 사람에게 사랑은 삶을 뿌리째 뽑아 버릴 수도 있는 폭풍우로 느껴지기도 한다. 약하디 약한 존재가 바로 인간 아니겠는가. 두려워하는 것이 많아 이것저것 따지는 존재가 바로 인간이다. 고뇌와 고민은 항상 약자의 몫이다. 그렇지만 사랑 앞에서 복잡해져만 가는 생각 끝에 우리가 선택하는 것은 사랑이 가져다주는 불확실성이 아니라 익숙한 일상이기 쉽다. 어쩌면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사랑 앞에서 고뇌하는 것 자체가 이미 사랑에 몸을 던지기에는 우리가 너무 약하다는 증거니까 말이다. (…) 불행히도 더 이상 사랑을 감당할 수 없다는 것이 문제가 될 때, 우리는 상대방에게 감사의 마음을 가지게 된다.
287. (겸손. 진정한 사랑을 위한 자기희생)
드니즈는 아름다운 만큼 지혜로웠다. 그녀의 지혜로움은 그녀가 지닌 가장 고귀한 것들로부터 비롯되었다. 대부분이 하층민 출신인 백화점 판매원들이 점차 갈라져 떨어져 나가는 매니큐어처럼 피상적인 교육밖에는 받지 못한 반면, 드니즈는 가식적인 우아함과는 거리가 먼, 깊은 내면에서 우러나오는 매력과 멋을 지니고 있었다.
<여인들의 행복 백화점>에서
288. 겸손하게 되었을 때 우리는 자신을 지배하던 해묵은 편견, 허영, 그리고 자만심으로부터 자유로워진다. 색안경을 벗고 자신이나 세계, 그리고 타인들을 있는 그대로 보게 되었다고나 할까. 그러니까 자신의 무능력과 약함을 직시할 때, 우리는 자신이 무엇을 할 수 있고 무엇을 할 수 없는지를 정확히 알게 된다. 과거에는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이제 할 수 없는 것이 있다는 것을 안 것이다. 따라서 겸손해진 사람은 이 할 수 없는 것에 대해 무능력과 약함을 느꼈을 뿐이다. 이것은 반대로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에 대해서는 더 진지하고 성숙해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한마디로 성숙해진 것이다.
298. (분노. 수치심이 잔인한 행동이 될 때까지) 체제에 돌려야 할 분노를 인간에게 돌리고는 전전긍긍하는 개인, 그래서 한 없이 자본주의의 냉혹함에 무기력해지는 인간. 더 냉정하게 자본주의를 들여다보지 못하고, 자본주의에 대한 분노를 전당포 노파에게 혹은 자신에게 돌리는 것.
297. 표도르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은 작가 스스로 “범죄에 대한 심리학적 보고서”라고 밝혔듯이 ‘라스콜리니코프’라는 고뇌하는 청년의 대명사를 창조하여 죄와 속죄를 둘러싼 다양한 인식들을 탐구했다. 주인공 로쟈는 자신의 논문에서 “인간이 자연의 법칙에 따라 대체로 두 부류로 나뉜다.”고 주장한다.
“하나는 하급 부류(평범한 사람들), 오로지 자신과 비슷한 자들을 생산하는 데만 기여하는, 말하자면 재료이며, 다른 하나는 본질적으로 자신이 속한 무리에서 새로운 말을 할 수 있는 천부적 재능이나 능력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 첫번째 부류, 즉 재료는 대체적으로 말해 그 본성상 보수적이고 점잖은 데다가 순종하며 살고 또 순종하는 것을 좋아합니다. 제 생각으로는, 그들은 순종할 의무가 있는데, 그것이 그들의 사명이며 그렇다고 해서 굴욕감을 느낄 이유도 전혀 없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 부류는 전부 법률을 넘어서는 자들, 그 능력에 따라 파괴자이거나 그런 경향이 있는 자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의 범죄는 물론 상대적이며 그 종류도 다양합니다. 그들은 극히 다양한 성명을 통해 보다 더 나은 것의 이름으로 현재의 것을 파괴하길 요구합니다. (……) 첫 번째 부류는 항상 현재의 주인이며, 두 번째 부류는 미래의 주인입니다. 전자는 세계를 보존하고 수적으로 증대시킵니다. 후자는 세계를 움직이고 목표를 향해 이끌고 나갑니다.”
306. (질투. 사랑이 드리우는 짙은 그림자) 질투의 바닥에는 스스로가 주인공이 되고 싶은 감정이 똬리를 틀고 있었던 셈이다. 질투는 나를 주인공으로 만들어 줄 수 있는 사람이 그렇게 하지 않을 때 드는 감정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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