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7. 구례와 하동 들판에 다른 집 논은 다 새로 이발한 듯 깨끗이 추수가 끝났는데 여기저기 아직 추수 못한 논들이 부스럼 딱지처럼 남아 있었다. 그게 거긔 귀농자들의 논이었다. 다른 사람들의 논에서 탈곡한 벼 이삭들이 도로 가장자리에서 노릇노릇 말라가고 있는데 귀농자들의 논의 벼들은 하는 수 없지 않겠냐는 듯 우두커니들 서 있었다.
228. 사내는 할 말이 없었다. 그는 무작정 산으로 갔다. 하늘이 있다면, 산신이 있다면, 아니 귀신이라는 게 있다면 자신을 돌보아주어야 한다고 그는 맘속으로 절규했다. 그리고 모든 죄 없고 가난한 사람들이 그렇듯 “잘못한 게 많았다, 참회한다”고 외쳤고, 소박하고 경건한 사람이 그렇듯 “낫게만 해주시면 열심히 살겠다”고 수없이 머리를 조아리며 맹세했다. 산은 그에게 오솔길을 터주었고 그는 좁은 길들을 따라 사람의 발자취가 거의 닿지 않은 곳으로 더 높이 더 깊이 들어섰다. 언젠가 귀동냥으로 들은 적이 있는 온갖 약초와 버섯을 캐다가 저녁이면 풍로를 피워 그것을 손수 달였다. 그리고 그것을 아내에게 먹였다. 그가 줄 것은 지리산이 주는 그것 밖에 없었다.
328. “아주 작은 것이라도 제가 학교와 낙시인을 후원할 수 있다면 그렇게 하고 싶습니다.”
고알피엠의 머릿속으로 그 순간 수많은 영화/드라마/소설/연극/콩트가 지나갔다. 목소리의 주인공은 70대 후반, 병실에 앉아 죽음을 기다리는 늙은 백만장자, 아니 꼭 백만장자는 아니더라도 나름 자수성가한 상당한 재산가. 그는 실은 지리산의 빨치산 출신임을 숨기고 평생을 살아온 인물이다. 그에게는 혈육이 없다. 그는 거기서 모든 것을 잃었기 때문이다. 그는 신문이나 꽁지 작가의 글을 통해 낙장불입 시인의 내력을 파악했고 이제 죽기 전에 아직 밝혀지지 않은 지리산 마지막 전투의 비밀 몇 개를 털어놓고 낙시인에게 그 글을 부탁한 후 전 재산을 빨치산의 아들이며 지금은 지리산을 지키는 낙시인에게 물려주려 그를 애타게 찾고 있는 것이다. 아!
330. 지청구를 주지만 마음 깊은 곳에서 나는 알고 있다. 그곳은 사람이 사는 곳. 설사 내가 모든 것에 실패한다 해도, 설사 내가 모든 사람으로부터 외면받는다 해도, 설사 어느 날 내 인생이 이게 뭐야 마음속으로부터 절규가 불길처럼 뿜어져 나온다 해도, 외양간은 텅 비고 과일나무는 쓰러지고 산야가 불타버린다 해도, 그곳을 생각하면 세상에 무서운 게 없고 흐뭇해지는 것과 같은 이치일 것이다.
“50만 원만 있으면 될 거야. 그러면 1년치 집세를 내서 집을 얻고 그리고 젓가락이 있으면 돼.”
331. “바람도 아닌 것에 흔들리고 뒤척이기 싫어 나는 도시를 떠났다.” 내 등으로 전율이 다 지나가기 전에 버들치의 반주가 시작되었다.
338. 그의 아름다운 사진이 더 알려지고 그가 좋은 가정을 꾸미기를, 하는 수 없이 기원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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