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 따위 엿이나 먹어라

저자
마루야마 겐지 지음
출판사
바다출판사 | 2013-10-30 출간
카테고리
시/에세이
책소개
한 치 앞은 어둠이고 빛이기도 하다. 어둠에 내던져질지, 빛으로...
가격비교 글쓴이 평점  



10. 생각한들 어떻게 되는 것이 아니니 그냥 내버려 둘 수밖에 없다는, 지금까지 대부분 사람을 지배해 왔던 체념에 그대로 주저 앉아도 좋은가.
정말 그래도 좋은가.
모순에 찬 세상을 살아가기 위한 기본 중의 기본인 이 문제를 회피하고서는 아무리 고뇌해 본들 별다른 소용이 없다. 온갖 쾌락에 젖는다 해도 고뇌를 떨쳐 버릴 수 없다.
 동서고금의 천재적인 철학가들이 이것도 아니고 저곳도 아니라며 머리를 쥐어짜고도 명확한 해답을 얻지 못했는데, 우리 같은 보통 사람에게서 무슨 결론이 나겠느냐는 흔하디흔한 단정도 좋지 않다.
 왜냐하면 얼토당토않은 명제에 명확한 결론을 내리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이 문제를 똑바로 인식하고 자기 나름으로 생각해 보는 데 의의가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해 보느냐 마느냐에 따라, 이후의 마음가짐과 인생이 전혀 다른 모습으로 전개되기 때문이다.
(…) 이 무겁고 성가시고, 다소 우스꽝스러운 문제를 새삼 생각하려면, 뜬구름 잡듯 할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실마리를 찾아 최대한 현실적으로 고민하는 편이 좋을 것이다. 그래야 이 허접한 세상을 대하는 자세가 바뀔 확률이 커진다.

12. 이 기회에 부모가 있기에 나도 있다는, 너무도 감정적이고 국가 권력이 두 손 들고 반가워할 도덕적인 규범에서도 벗어나기로 하자.

16. 아무 배경 없는 자신으로 돌아가 처음부터 다시 생각해야 한다. 부모의 기대를 저버리는 일에 두려움을 느끼거나 주저함이 있다면, 그것은 어렸을 때부터 부모를 포함한 가정 환경에 세뇌되어서다. 그런 생각 안에는 진정한 자신이 존재한다고 볼 수 없다. 그 때문에 자아가 없는 인생을 보내게 되는 것이다. 

20. 오로지 자식을 어엿한 성인으로 키우는 것만이 목적인 부모는 너무도 적다. 더 나아가 이제 어른이 되었으니 앞으로는 네 힘으로 살아가라고 진지하게 가르치고, 자신들은 어떻게든 살아갈 테니 네 인생에만 집중하라고 충고하고 또 그렇게 되기를 진심으로 바라는 부모는 더욱 적다.

24. 어딘지 모르게 음울한 분위기가 감도는 사람들에게 이 세상은 무의미한 사건들로 가득하고, 놀고먹다 보면 지나가는 것에 불과하다. 그들의 가슴을 무겁게 짓누르고 있는 것의 정체가 부모와 자식 간의 비정상적인 연대라는 것을 알았을 때는, 이미 다 늙어 꼬부라진 후이다. 
집을 떠난다는 것은 제2의 탄생을 뜻한다.
(…) 요컨대 집을 떠나는 것이 성인식인 셈이다.

25. 이렇게 양쪽이 진정한 부모 자식 관계가 무엇인지를 깨우치고, 서로 돕고 사는 것이 인간의 도리라는 안이한 근성을 버려야 타인이 아닌 오직 자신을 의지해 사는 올바른 삶을 살 수 있는 것이다.

31. 올바른 행동의 규범이 되는 정신을 기대할 수 없는 자는 인간의 꼴을 하고 있을 뿐, 고뇌하면서도 다시 정신을 가다듬고 살아가는 참인간이라 할 수 없다.

33. (가족은 일시적인 결속일 뿐이다) 언젠가 부모는 부모의 세계로, 자식은 자식의 세계로 돌아가야 하는 것이다. 각자의 세계로 돌아가는 것이야말로 자연스럽고 건전한 숙명이다. 동물은 모두 그렇게 함으로써 삶의 건강함을 유지하고 있다.
(…) 요컨대 인간이 되느냐 되지 못하느냐는 부모와 집에서 얼마나 빨리 벗어나느냐에 달려 있다.
일단은 부모를 버린다. 집을 버린다.
이후 세상 풍파를 겪으면서 그런대로 쓸만한 인간이 되었을 때, 경제적으로 약간의 여유도 생겼을 때, 집과 부모를 돌아보고 어떤 관계를 맺는 것이 옳은지를 생각한다.

34. (부모를 버려라) 부모들이 그 나이가 되도록 살아온 것은, 징징거리며 우는 소리로 자식 인생을 망치기 위함은 아니었을 터이다. 
그들은 자기 힘으로 자기 하나 어쩌지 못하는 경박한 인간이 되려고 경험과 체험을 쌓았다는 말인가.
그들은 지금까지 대체 무슨 생각을 하며 살아온 것인가.
그렇게 태연하게 이기적인 투정을 부리는 부모는 그저 부모라는 의미밖에 없는 거짓 존재일 뿐, 오래 산 가치가 있는 참된 부모와는 다른 생물이다.
(…) 자식을 소유물로 간주한다. 자신을 위해 존재하고, 또 자신을 위해 이것저것 보살피는 편리한 가정부라 착각한다. 이 때문에 학교며 직장이며 결혼 상대며, 하나에서 열까지 모든 것이 자신이 깔아 놓은 레일 위를 달려야 마땅하다고 믿는 것이다. 이렇게 진저리가 나도록 뻔뻔한 부모는 아무리 타당한 논리를 내세워도 통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할 말은 분명히 해야 한다. 하고 싶은 말이 있는데 입을 꾹 다물고 있으면, 그들의 태도를 더욱 조장하고 부모 입장이 절대적이라는 자세를 더욱 굳건하게 하는 결과를 낳는다.
 합리적인 말이 합리적으로 통하는 부모 자식 사이가 되기를 바란다면, 진심을 털어놓고 부딪쳐야 한다. 핵심을 건드리지 않는 것은 가족을 남으로 취급하는 행위이고, 그것은 오히려 냉정하 처신이다.
상대에게 상처를 주고 싶지 않다, 나 역시 상처를 받고 싶지 않다는 이유로 속을 내비치지 않는 것은 배려 따위가 아니다. 비겁한 것일 뿐이다.
(…) 남남끼리라면 몰라도 적어도 부모 자식 간에는, 울분을 터트리는 신경질적인 말투가 아니라 날씨 얘기라도 하듯이 가볍고 밝게 서로 하고 싶은 말을 나눌 필요가 잇다. 욕설이나 고함으로 속내를 털어놓는 것은 어린아이들이나 하는 짓이다.

36. “그러면 서로에게 좋지 않습니다. 자기 인생은 있는 힘껏 혼자서 사는 게 좋아요.” 
37. 흐르는 시간이 언젠가는 가르쳐 줄 것이다.

38. (자신을 직시하고, 뜯어고쳐라) 자식은 우선 자신이 어떻게 키워졌는지를 정확하게 파악해야 한다. 그래서 성격이 어떠한지를 분명하게 인식할 필요가 있다. 이 기본적인 사항을 파악하려 하지 않거나 게으름을 피우고 외면하려 한다면, 이후에는 어떤 것도 설계할 수 없다. 그뿐만 아니라 마음에 생긴 균열이 점점 커져 종국에는 와르르 무너지고 정신도 잃을 수 있다.
다만 여기에서 문제는, 정확한 자기 인식이 가능한지 가능하지 않은지 그것이다. 냉정하게 자기라는 인간을 직시할 수 있는 눈을 가지고 있는지, 그것이다.
(…) 집 밖으로 나서면 우글거리는 불안 요소를 일일이 따져서는 그 썩어 빠진 근성을 평생 안고 살 수밖에 없다.

40. 버스나 기차를 타고, 아니면 자전거나 오토바이를 타고 밤을 새워 최대한 멀리까지 몸을 옮겨 놓는다. 돌아갈 교통비가 없어질 만큼 먼 곳이 좋다. 홀로 선 사람만이 느끼는 두려움과 기대감, 긴장감을 동반한 설렘이 자유로 가는 입구다.
일단 그 입구를 통과하기만 하면, 부모에게 기대 얻는 안정따위는 하잘것없어진다. 또 집에 틀어박혀 즐기는 암울한 취미와는 비교가 되지 않는, 참되고도 신선한 감동을 만끽하게 된다. 그렇군, 사람이란 이 때문에 사는 것이로군, 하는 삶의 흔들림 없는 해답에 육박해 가는 감동이야말로 자신이 마음속으로 추구했던 것임을 확신하게 된다. 

41. 부모에게 신세지지 않고는 살 수 없는 몸이라면, 무슨 일을 하고 무슨 도전을 하든 어차피 어린애 장난의 연장에 지나지 않는다. 예술을 하든 학자의 길을 걷든, 자신에 대한 인식 없이 부모의 도움으로 쌓아 올린 것은 언젠가는 허물어지게 되어 있다. 평생을 거기에 몸 받친다 해도 결과는 꺼데기뿐, 획기적인 공적은 남길 수 없다.
 또 인터넷을 통해 제아무리 그럴싸한 의견을 피력해 봐도 공론이나 다름없다. ‘빌붙어 사는 자식이 말은 번지르르하군.’ 하는 한마디에 된통 깨지고 마는 것이 고작이다.
그렇다. 자기 힘으로 먹고살지 않는 자에게는 주장할 권리가 없다. 조금은 있을지 모르나, 그 한심한 행각이 세상에 들통 나버리면, 진지하게 귀 기울이는 자라고 해 봐야 처지가 같은 자들 정도다.

42. 남자는 어머니에게 응석을 부리다 결혼해서는 아내에게 부린다. 그러다 아내가 포기하고 떠나가면, 이번에는 강해 보이는 남자를 찾아 응석을 부린다. 평생 응석을 부리며 사는 이 나라 남자들, 정말 한심하다. 그들 탓에 나라까지 한심해진다.

43. (내 배는 내 힘으로 채우자) 제 손으로 일해 먹고살아야 비로소 집과 부모를 떠난 의미가 있는 것이다. 그래야 독립한 인간이다. 
그렇다면, 일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수렵 채취 시대와 마찬가지로 살아 있음을 뜻하는 필연적인 행위다.
내 배를 내 힘으로 채운다는 것은 지금도 변함없는 일의 근본 철학이다.
살아가는 데 가장 중요하고 절대 빼놓을 수 없는 행위에는 반드시 본능적인 기쁨이 따른다. 
그런데 아쉽게도 문명의 발달이 일의 가치를 심하게 변질시키고 말았다. 삶의 기쁨을 누리기는커녕 오히려 고통을 강요하는 부자연스러운 것으로 바꿔 놓은 것이다.
과거 인간은 다른 야생동물과 마찬가지로 비록 수명은 짧고 위험이 가득한 환경에 살았지만, 살아 있는 것만으로도 충만감을 얻을 수 있는 행복한 존재였다.
 그런데 문명의 발달이 가져다준 편리함과 복잡함이 일의 대부분을 불쾌하고 고통을 수반하는 것으로 변질시켰고, 이는 비관적인 인생관과 불행의 원천이 되었다.

44. (직장인은 노예다) 어떤 일을 하며 먹고사느냐에 따라, 진정으로 자립할 수 있는지 진정한 인생을 살 수 있는지가 결정된다. 
일은 크게 어딘가에 소속되어 근무를 하는 것과 자영업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학교에서 공부하는 주 이유는 대개 전자를 지향하기 때문이다.
조금이라도 좋은 위치, 즉 높은 연봉에 안정적이고 남에게도 좋아 보이는 직업을 얻기 위함이다. 그러기 위해 배운 것에 불과하니, 충분히 학문을 익히지 않았다 한들 큰 문제는 없다. 고용주가, 단순히 사회적인 값어치를 매기는 데 목적이 있는 학력을 그렇게나 중시하는 까닭은 오로지 순종할 인물인지 아닌지를 확인하기 위해서다. 세상의 가치관에 어디까지 순종적일 수 있는지, 그 어처구니없는 입시 전쟁에 얼마나 투신한 인간인지를 판단하고 싶기 때문이다.
그런데 애당초 그들은 왜 직장인을 지향한 것일까.
그것이 문제다. 아주 큰 문제다.
이 넓은 세상에는 다양한 직종이 있고, 저마다 다른 삶의 모습이 있다. 그렇게 폭넓은 세상에 살면서 왜 처음부터, 어린 시절부터 회사에 취직하는 것에 목표를 두고 살아왔는가. 
 마치 다른 길은 없는 것처럼 제대로 고민해 보지도 않고, 또다른 직종은 쳐다봐서도 안 되는 것처럼 다짜고짜 직장인이 되기로 결심한 근거는 무엇인가.

46. 직장인이 되기 위해 태어났는가.
직장인의 처지란 노예 그 자체라는 것을 모르는가.
누가 강제로 끌어가는 것도 아니고, 법률로 정해져 있는 것도 아닌데 왜 스스로 노예의 길을 선택하는가. 
제정신인가.
직장인의 세계를 제대로 알고 있기는 한가.
마음 편하고 안정적이며, 먹고살 걱정은 없는 무난한 곳이라고 정말 믿는가.
만약 그렇다면, 왜 그렇게까지 느긋한 인생에 매료되는가.
자기 안에 다양한 능력과 가능성이 숨어 있을지도 모르는데, 왜 처음부터 그렇게 매가리 없는 생활을 추구하는 것인가. 
정말 이 세상을 살고 싶기나 한 것인가.
사실은 죽고 싶어 하는 것은 아닌가.
아직 아무것도 시작되지 않았고 있는 힘을 다해 도전해 보지도 않았는데, 모든 것을 내던지다 못해 목숨까지 내던진 것은 아닌가.
세상이 재미있어 보이지 않아도, 그렇기에 재미있게 하기 위해 이렇게도 저렇게도 시도해 보자는 생각은 하지 않는가. 
세상을 사는 확실한 의미 따위가 존재한다면 또 그 의미의 노예가 될 뿐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강제적인 의미가 없다는 것은 자유로운 의지로 나만의 인생을 살 수 있다는 뜻이라고는 생각지 않는가.
남에게 고용되는 처지를 선택하는 것은 자유의 9할을 스스로 방기하는 일이다. 인생 전부를 남의 손에 빼앗기는 것이다.

51. 그 어떤 국가도 불특정 다수의 것이 아니다. 듣기 좋은 그 어떤 말로 둘러대 본들 결국은 특정 소수의 것이다. 이 엄연한 진실을 무시하고 그 위에 이상적인 세계를 구축하려 해 봐야 헛수고다.

52. (국가는 당신을 모른다) 만약 특정 소수가 진심으로 국가와 국민을 위하는 길이 무엇인지를 생각하고, 또 진심으로 국가와 국민을 위할 수 있기를 바란다면 그렇게 일상을 적당히 보내지는 않을 것이다. 죽을 힘을 다해도 다 처리할 수 없는 일들에 시달려 하루가 다르게 말라 갈 것이다.
 게다가 그렇게 풍족하게 생활하지도 않을 것이다. 진지하게 국민의 행복을 바라는 행정가라면 적어도 생활수준을 평균 정도로 낮추었을 것이고, 좀 더 마음 있는 자라면 저소득층 생활에 맞추었을 것이다. 
수치심 때문에라도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국가를 통솔하는 자로서 자기 위치를 자각하고 책임감도 강했다면 국민 한 사람이라도 비참한 처지에 있을 때에는 도저히 참을 수 없었으리라.

53. 이것만 봐서도 그들이 어떤 목적으로, 무엇을 노리고 그 위치를 지향하고 또 차지하고 있는지를 알 수 있다. 입을 벌렸다 하면 ‘국가를 위하고, 국민을 위해서’라고 줄기차게 외치지만 실상은 그들 자신을 위함이다. 결코 다른 이유가 있어서가 아니다. 그들은 원래 돈과 지위 상승에 대한 욕망밖에 없는, 그 누구보다 심성이 비천한 이들이다. 보통 국민의 몇 배나 되는 풍족한 생활과 높은 지위를 그럴싸한 말과 엉터리 연극만으로도 간단히 거머쥐며, 이것들을 대대로 아니 영원히 누릴 수 있기를 바란다.

54. 막상 선거 철이 되면, 갓난아기는 물론 강아지에게까지 애교를 떤다. 온갖 사람과 악수를 하고 엉터리 노래까지 부르는가 하면 무릎 꿇고 울면서 애원하는 짓까지 거리낌 없이 해댄다. 이런 작자들이 그 대가로 국가와 국민에 대한 순수한 봉사라는 명예만을 바랄 리가 없지 않은가. 그런 고귀한 이념을 위해 그 굴욕적이고 수치스러운 선거전을 펼쳤을 리가 없다. 
이들의 가장 큰 목적은 필요 이상의 ‘풍족한 생활’이지 그 외에는 아무것도 없다.
욕망은 크나 능력은 부족한 작자들, 그저 튀고 싶거나 아버지가 닦아 놓은 기반을 고스란히 물려받으려는 작자들, 또는 지금까지 해 오던 일이 순조롭지 않거나 실력이 없어서 실패한 작자들, 세상에 이름을 알려 뭔가를 해 보려는 작자들, 그런 자들만 우글거리는 곳이 바로 정치판이다. 정상적인 인간이 발을 들여 놓을 곳이 아니다.

55. 양쪽이 똑같은 셈이다. 인간적인 수준이 너무도 낮은 탓에 그런 정부가 생겨난 것이다. 고매한 인간이 저열한 인간을 택할리 없지 않은가. 
그런 추악한 관계를 최대한 이용해서 국민의 대표 나부랭이가 된 작자들은 자신들에게 더러운 한 표를 던진 국민은 상상도 못할 막강한 자리에 올라서는 고작, 국가를 지배하는 실체인 대기업의 수하가 되어 이권과 금권에 들러붙는다.

56. 자신들에게 위협적이거나, 자신들의 방식이 잘못되었다고 외치고 공공연하게 반대하고 나서는 자들에게는 눈에 띄지 않는, 겉으로는 폭력이라는 것을 알 수 없는 더 음흉한 수법으로 채찍을 휘두른다. 그 자의 인생을 본인하고, 가능하면 암매장해 버리려 끈질기게 획책한다. 출세를 방해하거나 직장에서 쫓아내는가 하면, 아예 직장을 갖지 못하게 하는 등 사회적인 음지로 내쫓아 해가 없는 인간으로 만들어 버리는 것이다. 

57. 선택된 자나 선택한 자나 국가를 배신하는 악행을 저지른 것이다. 두 부류를 똑같이 부정하고, 철저하게 거부하고, 최대의 적이라 간주해야 한다. 혹시라도 같은 국민이라고 여겨서는 안 된다. 
세금을 포탈하거나 가로채려는 탐욕스러운 자들도 그렇지만, 그런 잡배를 자신들의 대표랍시고 국회로 보낸 자들 역시 국가의 적인 것이다.
(…) 인간으로서 질적 수준이 낮은 국민이 국가를 정의와 이상에서 점점 멀어지게 하는 최대 주범이다. 

60. (영웅 따위는 없다) 애당초 국가를 전적으로 책임지고, 국가를 위해 전심전력을 다할 고매한 저신과 능력의 소유자는 없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어쩌면 존재할지 모른다는 환상조차 단 한순간도 품지마라.
(…) 유사 이래 나라를 궁지에서 구한 영웅 중의 영웅으로 전승되는 이들도 그들에 얽힌 신화의 껍질을 냉정하게 하나하나 벗겨 내면 속물근성을 지닌 평범한 인간이었을 뿐이다.

61. 인간은 왜 영웅과 지배자와 강자를 원하는가.
인간은 모두 지배받고 싶어 하는 약자이기 때문이다.
한시도 안심할 수 없는 이 세상을 자신의 판단과 결단과 실천으로 살아가기 괴로워하는 것이 바로 인간이다. 그래서 가능하면 그 고통을 누군가 대신 없애 주었으면 하고 바란다.
 초식동물의 흔적인 그런 겁 많은 특질이 모여 불필요한 집단과 조직을 만들고, 사회와 나라를 이룬다. 그리고 그 세계를 반듯하게 관리할 능력이 있을 법한 인물을 추대해서는, 그를 따르고 충성할 것을 맹세함으로써 한순간이나마 안심하려 한다. 
(…) 강자와 영웅을 원하는 유치한 소망과 그들에게 무턱대고 의존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하기 짝이 없는 사태를 초래하는지 충분히 인식해야 할 것이다.
 권력이나 권위에 무조건 굴복하는 것이 얼마나 큰 비극을 불러오는지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64. (분노하지 않는 자는 죽은 것이다) 허호아된 이미지나 좇게 하는 인터넷 세계를 전부라 여기고, 아주 적은 돈으로 살 수 있는 당장 눈앞에 보이는 즐거움으로 뻥뚫린 마음을 메우려 몸부림치는 젊은이들의 허망하고 기이한 나날들.
 피할 수 없고, 피해서도 안 되는 싸움을 피하면서 잇달아 밀려오는 불안을 어떻게든 외면하려는 그들의 무의미한 생활.
(…) 정해진 운명이라는 인식밖에 없고, 절망적인 체념밖에 하지 못하는 젊은이들이 늘어 국가는 크게 안도하고 있다.
왜냐하면 더 바랄 나위 없는 국민이 되어 주었기 때문이다.
절대 반란을 일으키지 않는 모범적인 노예가 되어 주었기 때문이다. 
요컨대 국가가 바라는 대로 된 것이다.

66. 젊음의 상징인 분노의 정신은 죄 잃어버리고, 국가의 질서를 따르고 사회의 상식에 발맞추면서 어떻게 하면 이 세상을 무난히 헤엄쳐 나갈 수 있을지만 궁리하는 젊은이가 늘고 있다. 중장기적으로 보면 이 나라를 파멸로 이끌 파국의 씨앗이다.

68. 나는 모르겠다는 태도로 일관하면서 자기 일이 아니면 돌아보지 않는 삶의 태도를 근본적으로 바꾸지 않고 만화영화에나 나오는 강자를 기다리다가는, 정신이 들었을 때는 독재자에게 굴복해 소총을 들고 군가를 흥얼거리며 행진하고 있는 허울뿐인 자신을 발견하게 될지 모른다. 총알받이의 하나로 최전선에 배치되어 희생을 강요당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74. (머리는 폼으로 달고 다니나) 게임이나 그와 유사한, 너무도 내향적이고 유치한 가상현실 놀이에 푹 빠져 마음이 파괴되고 인격이 붕괴된 성격 파탄자가 될 것인가, 아니면 세상의 모순과 국가의 악을 일일이 날카롭게 지적하고, 정의란 이념을 드높이며 마침내 하나가 되어 봉기하는 젊은이가 될 것인가. 

76. 어리석은 자가 될 것인가 아니면 현명한 자가 될 것인가. 이는 지능지수나 학력차로 결정되지 않는다. 신문 사회면을 떠들썩하게 하는 강도나 살인 같은 명명백백한 악이 아니라 눈을 부릅뜨고 잘 봐야 알아볼 수 있는, 언뜻 선처럼 보이지만 정의의 옷을 걸쳤을 뿐인 악을 간파할 수 있느냐 없느냐로 결정되는 것이다.
 간파하는 것을 넘어 평소에도 그 속셈에 넘어가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덫을 설치하려는 자들을 멸시하고 혐오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통쾌하게 한 방을 날릴 각오와 실천력을 갖고 잇지 않으면 진짜 현명한 사람이라고는 하기 어렵다. 

76. (머리가 좋다는 것은 홀로 살아가려는 의지가 강하다는 것이다) 정말 좋은 머리에 관해 운운할 때에는, 가장 먼저 의지가 얼머나 강한지를 문제 삼아야 한다. 오로지 자기 힘만으로 살아가려는 의지 여부에 따라 머리의 좋고 나쁨이 갈린다.
그러니 자립의 정도가 그것을 결정하는 셈이다. 자립에 반하는 삶의 방식은 곧 명석함이 부족하다는 것을 뜻한다. 자립이란 인간이 약한 존재라는 사실을 충분히 곱씹은 후, 강한 인간을 지향하면서 과감하게 분투하지 않으면 가능하지 않다.
독서와 우애, 교양만으로는 그 왕도를 터득할 수 없다. 혼자 힘으로 이 가혹한 세상을 끝까지 살아 보겠다는 마음가짐이 얼마나 강하고 굳은지에 모든 것이 달려 있다.

102. 안정은 언제나 겉보기에 불과할 뿐, 한 치 앞에는 칠흑 같은 어둠이 기다리고 있다. 안정은 망상이거나 환상에 지나지 않는다. 안정은 아버지의 무사안일주읭에서 태어나고, 어머니가 심어 준 신기루에 불과하다. 아무리 좇아 가도 멀어지기만 하지, 손에 잡히는 일은 없다.
 설사 안정된 생활이 실제로 존재한다 쳐도, 그런 생활이 대체 뭐가 재미있다는 것인가.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 인생, 내일 또는 미래의 자신이 어떻게 변해 있을지 짐작도 할 수 없는 두근거림과 설렘의 연속 속에서 진정한 충만감을 추구하는 것이야말로 의미 있는 삶이 아닌가.

105. 자유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가.
하루 세 끼를 먹고, 그럭저럭 남과 같은 생활을 하고 있는데도, 왠지 하루하루가 밋밋하고, 살아 있음을 진심으로 즐거워하는 일도 없고, 새 아침을 맞아 본들 마음에서 우울함이 떠나지 않는 원인을 찾아본 일이 있는가.
그 이유를 알고 있는가.
인생이란 그저 그런것이라고 믿는 것은 아닌가.
동물원의 동물이나 애완동물이 아닌, 즉 야생에 사는 동물들이 그렇게 가혹하고 불안정한 환경에서도 어떻게 그렇게 생기 발랄할 수 있는지 생각해 본 적이 있는가.
 그들은 태어난 순간부터 죽음이 찾아오는 순간까지 끊임없이 위험에 노출되어 있지만, 수많은 위험과 정면으로 맞서는 데서 오는 충만감으로 삶을 이어 간다. 긴장으로 점철된 하루하루를 즐기는 것이 몸에 배어, 비록 수명은 인간보다 훨씬 짧아도 삶의 충만감은 인간과 비교할 수 없다. 이런 충만감이야말로 이 세상을 사는 자로서 누려야 마땅한 진정한 행복이라는 것을 온몸과 오감으로 확신하고 있는 것이다.

107. (자유를 방기한 사람은 산송장이다)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자유 안에서만 빛나도록 생겨 먹었다는 철칙을, 그 우선권을 가벼이 여겨서는 안 된다. 
 어떻게 살든 본인 멋대로라는, 자유와 함께하는 삶만이 존재의 기반이라는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109. 마음을 갉아먹고, 정신을 썩게 하고, 생기를 빼앗아 간다. 그러다 끝내는 혼에도 녹이 슬어 비인간적인 존재로, 자신에게도 반발하지 못하는 로봇 같은 무기물로 기울어 간다.

119. (신 따위, 개나 줘라) 그렇다. 현실을 직시하지 못하는 소심하고 게으른 자들은 그럴싸해 보이는 자들에게 지속적으로 속고 싶어 한다. 도취 상태로 평생을 지내고 싶어 하는 알코올 의존증자들과 유사한 길을 걷고자 한다.

129. (당신 안의 힘을 믿어라) 자기 신뢰의 습관을 터득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가장 큰 수확은 전 생애에 걸친 목적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이다. 자기만의 흔들림 없는 목적이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자립의 정도를 판단할 수 있다.
 살아가는 자기만의 목적을 구체적으로 갖고 있고, 그 목적을 향해 하루하루 매진하면서 충만감을 느끼느냐 아니냐는 독립한 인간이 되었는지 아닌지를 판단하는 중요한 기준이다. 그리고 그럴 만한 목적이 생겨야 비로소 인간으로 살고 있다 할 수 있는 것이다.

162. 진심으로 상대를 배려하는 마음이 딱 일치하는, 연애의 핵심이며 기본 중의 기본인 것을 싹 무시하고, 자신이 혹 불이익을 당하지는 않았을까 노심초사하는 연애 놀이는 몇 번을 한들 행복이라는 종착역과는 한참 거리가 멀다. 그런 연애는 분노와 절망만 남기는 어리석은 행위의 반복에 불과하다.

164. 정신을 바짝 차리고 이성과 지성을 무기로 싸우면 활기차게 살 수 있는 남자가 본능과 직결된 연애를 인생 최고의 목적으로 삼다니, 너무도 한심한 일 아닌가.
 남자의 정욕은 욕망 중에서 겨우 한 부분에 불과하다. 젊음이 넘쳐 나는 청춘 시절에는 그것이 전부인 한때가 있다. 하지만 오래 지속되지는 않는다.
 정상적인 성장 과정을 거쳐 어엿한 어른이 된 남자의 두뇌와 근육은 대부분 이 세상을 헤쳐 나가는 일과, 몸을 써서 처자식을 지키는 일에 무게를 두도록 만들어져 있다. 한마디로 남자는 일을 무엇보다 우선시한다. 늘 가족 전체를 배려하고, 주변을 경계하면서 닥쳐오는 이런저런 위험에 대처하고, 그런 일들에 몰두함으로써 생의 보람과 충만감, 쾌락 등을 느끼는 체질인 것이다.

166. 동물에게 있어 이성을 고르는 것은 지상 최대의 과제이다. 특히 수컷에게 중대한 일이다. 인생의 반려를 제 손으로 선택할 수 없다거나 그럴 마음이 전혀 일지 않는다면, 생물로서 치명적인 결함을 지녔다 하지 않을 수 없다.
 그 목표를 실현할 수 있는 힘을 지닌 시기는 기껏해야 서른 살까지다. 이성에 대한 순수한 관심이 정점을 찍는 시기, 뭐가 뭔지 모른 채 반이성적인 감정과 충동이 거듭 활화산처럼 폭발하면서 연애를 하고 주변의 반대를 무릅쓰고 결혼도 했다면, 훗날 땅을 치며 후회한다 해도 그것이야말로 진정하고 순수한 사랑이었으니, 

171. (청춘, 인생은 멋대로 살아도 좋은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잠재적인 다양한 능력을 갖고 있다. 이를 스스로 발견하는 것은 자기 인생을 충실하게 하기 위해 빼놓을 수 없는 필수 조건이다. 발견을 할 수 있느냐 없느냐, 또는 그것을 찾아낼 마음이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삶을 위한 삶인지 죽음을 위한 삶인지가 뚜렷하게 갈린다.

172. (생각 좀 하고 살아라) 약한 인간에게 유일무이하고 강력한 무기인 그 훌륭한 뇌를 그냥 썩히며 평생을 사는 자는 안이든 밖의 위기든 이겨 낼 수 없다.

175. 자신을 스스로 단정하면 단정할수록 정답에서 멀어질뿐, 무슨 일이든 직접 부딪쳐 보지 않고는 알 수 없다는 얘기다.

175. 다 도전해 보라고 젊음이 있는 것이다.

180. 두개골 안에 꽉 들어차 있는 것은 과연 무엇인가.
곰팡이가 피어 버릴 수밖에 없는 된장인가.
더 멋지게, 더 인간답게 살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지혜의 샘이 바로 뇌라는 것을 잊었는가.
아무리 애써도 다 쓸 수 없는 양의 뇌를 갖고 있는 이유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있는가.
사람은 생각하기 위해 태어나고, 생각함으로써 생명을 불태우고, 생각하기에 존재 의의가 있다. 이 확고하고 엄연한 진리를 묵살할 작정인가.

181. (인간이라면 생각하고 생각해 재능을 찾아야 한다)무적의 무기인 원대한 목적을 품으려 하지 않고, 누구도 사랑도 미워도 하지 않으며, 비굴한 신조와 영악한 사려분별에 매달리고, 눈앞의 야욕만 보며 사는 자는 자신의 수명을 손가락으로 꼽을 뿐인 인생을 보낼 수밖에 없다.
 생애를 다 바쳐도 좋을 만큼의 궁극적인 목표와 목적은 환영 따위가 절대 아니다. 차분히 기다리고 말없이 시시각각 관찰하는 끈질김만 잃지 않는다면, 반드시 찾을 수 있고 언젠가 만날 수 있는 현실 자체이다.
 전심전력으로 노력할 가치가 있는 목적을 향해 길 아닌 길을 걸어가는 자에게 온갖 장소는 보고일 수 있다.
 또한 목표 중의 목표, 목적 중의 목적은 온 정력과 인생을 쏟아 부어도 발전과 진보가 멈추지 않을 만큼 심오한 것이어야 한다. 게다가 아무도 발을 내딛지 않은 미지의 세계와 통하는 것이어야 한다.
 한 번 그것을 발견하고 그 길에 발을 디딘 자는 거짓 삶과 진정한 삶을 구별할 수 있다. 나아가 수많은 사람이 혈안이 되어 추구하는 행복, 즉 단순히 본능을 만족시키기 위한 공허한 충만감 따위는 상대하지 않게 된다.
(…) 그리고 목표와 목적을 찾기 위한 재능을 스스로 긴장을 늦추지 않는 각고의 노력으로 갈고닦는다. 더 몰두해 핵심에 가까이 다가갔음을 자각했을 때, 그렇게 집요하게 따라다니며 사람을 꼼짝 못하게 하던 고독에 증오심을 품지 않게 된다. 더없는 환희의 샘을 얻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고독이야말로 친애하는 친구였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185. (인생은 멋대로 살아도 좋은 것이다) 진정한 목적을 지닌 자는 타인과 교류하는 것을 성가셔 한다. 
투신할 만한 가치가 있는 목표가 생긴 순간 시간이 귀중해져 인간관계를 꼭 필요한 범위로 좁힌다.
(…) 만약 태어나기 이전에 태어날 확고한 의미와 흔들림 없는 목적이 마련되어 있었다면, 사람은 그 의미와 목적의 노예가 되어 오히려 그것들을 잃고 말 것이다. 
 의미도 목적도 주어지지 않는다는 것은 즉, 스스로 찾을 수 있다는 의지의 자유로움이 존중된다는 뜻이며, 의지의 세계에는 정해진 것이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요컨대 스스로 그것들을 발견하면서 멋대로 사는 것이 좋다는 영원한 암시인 동시에, 그렇게 하지 않으면 사는 의미가 없다는 경고이기도 하다.

195. 생이 부동의 것이 되고, 생명이 전제적인 지배력을 아낌없이 발휘하여 우위를 점한다. 죽을 몸이라는 생각도 청춘의 찬란함과 다망함에 쫓겨 거의 사라진다. 나아가 자신이 두발로 짓밟고 있는 따분하면서도 가혹한 현실을 나름대로 즐기는 자로 세상에 뿌리를 내리게 되면 인생에 대한 부정적인 생각은 꼬리를 감추고, 오늘을 살고 또 내일을 살 수 있다는 기쁨을 발견하게 된다. 

196. 부끄러운 것들을 끊임없이 불태워 버리고, 도덕적인 악인 부정을 한 꺼풀씩 벗겨 내고, 꽃이 흐드러지게 핀 초원에 섰을 때처럼 가볍게 나날이 새로워질 수 있는 것도, 무미건조한 세상에 안주하면서 변화 없는 일상에서 감동과 감명거리를 찾아낼 수 있는 것도 모두 살아 있기에 가능하다.

201. 나는 칠십 가까이 살면서 절체절명, 고립무원, 사면초가 등의 궁지에야말로 명실상부한 삶의 핵심이 숨겨져 있음을 느꼈다. 그 안에서 필사적으로 몸부림치는 과정에야말로 진정한 삶의 감동이 있다고 확신했다.
 한 번 그 맛을 알고 나면 이성으로 자신을 계몽하면서 나아간다. 갖은 고난과 역경을 굳이 배척하려 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그런 상황에 단호하게 대항하는 것에 삶의 참된 가치가 있음을 깨닫고 ‘자기 의존’이야말로 궁극의 목적이라는 것도 알게 된다.
 마음의 나태를 가벼이 여기고 행동으로 이어지지 않는 지식을 열심히 쌓아 올리는 것은 지성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다.

202. 영원히 살아남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어차피 죽을 몸인데, 왜 그렇게까지 겁을 내고 위축되고 주저해야 하는가.
자신의 인생을 사는 데 누구를 거리낄 필요가 있는가.
그렇게 새로운 마음가짐과 태도를 무기로, 애당초 도리에 맞지 않고 모순투성이인 이 세상을 마음껏 사는 참맛을 충분히 만끽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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