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에게 보낸 편지

저자
앙드레 고르 지음
출판사
학고재 | 2007-11-27 출간
카테고리
시/에세이
책소개
세상은 텅 비었고, 나는 더 살지 않으려네. 우리는 둘 다, 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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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난 알게 되었습니다. 심각하게 구는 것, 권위에 순종하는 것 따위는 당신에게 늘 다른 세상의 일이겠구나 하는 것을요.
 하지만 이런 모든 것들로도 우리가 처음부터 하나로 묶여 있다고 느낀 그 보이지 않는 인연을 설명할 수는 없습니다. 아무리 우리가 뼛속 깊이 서로 다른 존재라 해도, 뭔가 근본적인 것을 공유하고 있다고 난 느꼈습니다. 뭐랄까, 원초적 상처라고 할까요. 앞에서 말한 ‘근본적인 경험’, 즉 불안의 경험 말입니다. 우리둘의 경험의 성격이 똑같은 건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상관없었어요. 그 경험의 의미는 당신이나 나나 우리가 이 세상에서 확실한 자리를 갖고 있지 않았다는 뜻이었으니까요. 그 자리는 오직 우리가 앞으로 만들어가야 하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자율성을 받아들이며 살아야 했고, 나중에 나는 알았습니다. 그런 일에는 나보다 당신이 더 잘 준비된 사람이었다는 것을.

30. 당신은 내가 몸과 마음 모두를 사랑할 수 있고 함께 있으면 깊은 공명을 느끼는 최초의 여자였습니다. 한마디로 당신은 나의 진정한 첫사랑이었던 것입니다. 만약 내가 당신을 진정으로 사랑할 수 없다면, 나는 결코 세상 어느 누구도 사랑할 수 없을 것입니다. 예전에는 입밖에 낼 줄 몰랐던 말들을 나는 찾아냈습니다. 우리가 영원히 함께했으면 한다는 마음을 당신에게 전할 수있는 말들을.

40. 그때는 내 기분이 왜 그리 침울했는지, 그 이유를 당신에게 결코 말해주지 않았습니다. 아마도 부끄러웠던 것이겠지요. 당신의 흔들림 없는 의연함, 미래를 신뢰하는 당신의 믿음, 주어지는 행복의 순간을 포착할 줄 아는 당신의 능력, 그런 것이 감탄스러웠습니다. 어느 날인가 당신이 베티와 생제르맹 광장의 어느 작은 공원에서 커다란 버찌 아이스크림 하나로 점심을 때울 수 있었던 것, 그것도 나는 좋았습니다. 당신은 나보다 친구가 더 많았습니다.

55. 그 책의 출간으로 내 상황은 바뀌었습니다. 세상에 내가 있을 자리 하나를 그 책이 준 것이지요. 그 책은 내가 생각했던 것에 현실성을 부여했습니다. 그 현실성으로 말미암아 나는 스스로를 다시 규정하고 끊임없이 스스로를 넘어서야 했습니다. 타인들이 나에 대해 만든 이미지의 포로가 되지 않고, 또 객관적 현실에 의해 나와 다른 존재가 되어버린 산물(책)의 포로가 되지 않기 위해서 말입니다.

(…) 즉 나 자신의 의지로 할 수 있는 것보다 더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것, 나 자신에게 질문하는 것, 내가 혼자서는 규정하지 못했던 목적을 추구하는 것을 말입니다.

57. 끝났음을 받아들여야 한다. 즉 여기에 있음으로써 다른 아무 곳에도 없음을, 이것을 함으로써 다른 것을 하지 않음을 받아들여야 한다. ‘지금’이지, ‘결코’나 ‘항상’이 아님을 받아들여야 한다. (…) 오직 이 생밖에 없음을 받아들여야 한다. <늙어간다는 것>에서

59. <배반자>를 쓰면서 나는 ‘책 한 권을 쓰는’ 것이 아니기를 바랐습니다. 연구 결과를 내놓고 싶었던 것이 아니라 진행중인 연구 자체를, 무언가가 갓 태어나는 상태를 발견하고, 그러다 망치기도 하고, 잘못된 길로 들어서기도 하면서, 완성되지 않은 하나의 방법을 더듬더듬 모색하며 만들어가는 연구 자체를 쓰고 싶었던 것입니다. “모든 것을 다 말하고 난 뒤에도 여전히 모든 것은 아직 말해져야 하는 상태로 남아 있다. 언제나 모든 것은 아직 말해져야 하는 상태로 남을 것이다.” 다시 말해 중요한 것은 ‘말하는 행위’이지 ‘말한 내용’이 아니었기에, 나는 내가 이미 쓴 것보다 앞으로 이러서 쓸 수 있는 것에 훨씬 더 관심이 많았습니다. 글쟁이 혹은 작가라면 누구나 그럴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72. 당신은 내게 삶의 풍부함을 알게 해주었고, 나는 당신을 통해 삶을 사랑했습니다. 아니, 삶을 통해 당신을 사랑한 건지도 모르겠군요.

74. 낭비, 스모그, 케첩 바른 감자튀김과 코카콜라, 거칠고 지옥 같은 리듬의 도시생활로 대표되는 미국 문명을 혐오했었지요. 그러나 머지않아 이 모든 것이 파리에도 예외 없이 들이닥치리라는 것을 우리는 미처 짐작하지 못했습니다.

85. 당신은 ‘다른 세상’을 보고 온 사람입니다. 한 번 가면 아무도 못 돌아오는 나라에서 돌아온 사람입니다. 그 때문에 당신의 눈빛이 달라졌습니다. 우리는 약속이나 한듯 똑같은 결정을 내렸습니다. 낭만적 영어로 하면 이렇게 요약되지요. 
There is no wealth but life. 
삶이 없는 한 풍요도 없다. (존 러스킨)

87. 내게 본질적인 단 하나의 일은, 당신과 함께 있는 것이라고 썼지요. 당신이 본질이니 그 본질이 없으면 나머지는, 당신이 있기에 중요해 보였던 것들마저도, 모두 의미와 중요성을 잃어버립니다.

89. 당신은 이제 막 여든두 살이 되었습니다. 그래도 당신은 여전히 탐스럽고 우아하고 아름답습니다. 함께 살아온 지 쉰여덟 해가 되었지만, 그 어느 때보다도 더,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요즘 들어 나는 당신과 또다시 사랑에 빠졌습니다. 내 가슴 깊은 곳에 다시금 애타는 빈자리가 생겼습니다. 내 몸을 꼭 안아주는 당신 몸의 온기만이 채울 수 있는 자리입니다. 

(…) 세상은 텅 비었고, 나는 더 살지 않으려네.(캐슬린 페리어의 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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