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건 벨기에 친구 캐롤린, 그녀의 집 벨기에의 작은 마을, 후셀트에서 신세를 지고 있을 때의 이야기.
2013년 9월 20일, 유럽에 온 지 2개월이 지날 즈음이었다. 유럽 물가는 정말 비쌌다. 이란에서 터키로 이동했을 때 물가가 30% 정도 비싸졌다고 느꼈는데 터키에서 그리스로 넘어가니 물가가 또 30% 정도 비싸졌다(이란에서 캔콜라를 500원 정도에 사 먹었는데 그리스에서 2,000원에, 숙박비는 만 원 정도에서 삼만 원 이상으로 올랐으니, 한 달 정도의 기간 동안 막차 끊긴 후 택시 같은 따따블 인플레이션이 몰아친 것이다. 그제야 나는 유럽 친구들이 왜 동남아시아에 와서 돈을 펑펑 쓸 수 있는지 이해할 것 같았다). 이런 궁색한 연유와 파리든 런던이든 그저 비슷하게만 보일 뿐인 유럽 관광지들을 피해 갈 곳이 필요했다. 그리하여 예정에 없던 벨기에지만 친구가 있는 벨기에에 달려갔다.
하늘도 내 응큼한 마음을 알았는지 내가 벨기에에 도착한 날부터 떠나는 날까지 날씨는 우중충했고 추웠다. 나는 부지런한 사람이지만 아침은 날씨도 춥고 졸리고 귀찮기때문에 밖에 나가지 않는다. 점심쯤이 되어서야 한량처럼 동네를 어슬렁어슬렁 돌아다녔는데, 벨기에에 간지 사흘째가 되던 날, 나는 듣고 말았다. 동네 근처에 오래된 중세 성이 있다는 사실을. 성 뒤로는 과수원도 있다는 사실을.
캐롤린의 집 주변에는 두 개의 케이크 가게가 바로 옆에 붙어 있었다. 그즈음 둘 중 어디가 더 맛있나 기웃거리던 게 하루의 낙이였는데, 참신한 일과가 생겼다. 캐롤린이 친절히도 구글맵을 이용해서 성으로 가는 경로를 찍어줬다. "큰길로 갈 수도 있느데, 그 길은 주변 풍경이 심심하니까 볼 것 많은 길로 가” 캐롤린은 내게 골목길을 가르쳐줬다. 그리고 다음날, '사나이는 자고로 큰길을 가야 하는 기라'라고 말했던 고등학교 친구가 생각난다. 나는 길을 잃었다. 분명 제대로 가고 있었(다고 생각했)는데 한참을 걷다가 약간 서늘한 기분이 들었다. 원래 고속도로를 지나야 하는 건가? 지도를 켜보았다. 역시나 엉뚱한 곳을 향해 가고 있었다(심지어 정반대 방향으로). ‘어쩐지 걸어도 너무 걸었어’ 이성적 사고기능도 뒤늦게 작동됐다.
‘그래, 원래 목적은 산책이었으니까’
난 길을 계속 걸었고, 그제야 그곳의 가을을 보았다. 한 해를 살아낸 낙엽이 쌓인 길을, 나무와 나무 사이로 흙내음이 담긴 안갯길을, 여름의 자리를 가득 채운 가을의 길을 걸었다. 길을 잃어보니 이런 생각이 든다. 길이란 역시 걷기 전에는 알 수 없다. 길은 우리가 걸을 때 가지가 자라듯 뻗어 나가고 그 전에 알지 못했던 길이 열리는 게 아닐까. 벨기에에 간 것도, 정말 생각지 못한 길이었다. 여행 중에 만나게 된 새로운 길, 그곳이 벨기에 였나보다.
벨기에에서 일주일을 머물렀다. 사귐 넓은 캐롤린 덕분에 난 매일매일 그녀의 가족들과 친구들을 만날 수 있었고, 그들에게 남북한의 관계, 한국 사람들의 생활, 정치, 역사, 교육 등을 이야기해주었다. 그리고 벨기에 맥주(수천 종이 넘는 벨기에 맥주에 대한 그들의 무궁한 자부심)를 마시고, 벨기에식 프렌치프라이(사실 다른 프렌치프라이와 무슨 차이가 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를 먹으며 지냈다.
우연히 만난 길이었지만 벨기에가 그렇고 그랬던 유럽 중에 가장 기억에 남는 이유는 현지인들의 실제 삶을 보자는 여행 목적에 맞았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 고성이 목적이 아니라 산책이 목적이었던 것처럼 말이다. 나뭇가지처럼 자라났던 여행길, 그 길에서 '하지만 난…'이라던가, ‘나중에'라던가 하는 주문을 외우는 순간 ‘우연히’라는 마법은 사라졌다. 그 순간을 온전히 받아들이려는 자세. 어제의 계획은 어제의 계획일 뿐. 진짜 멋지고 생각지 못한 길은 길 위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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