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도 여행이라고] 


 시간이란건 강물처럼 흘러간다. 그리고 어느새라는 말 외에는 표현하지 못할 만큼 저 멀리 흘러가버린다. 나의 배낭여행도 어느새 200일 하고도 79일이 흘러 마무리가 됐다. 사실 18개월 여행을 계획했지만, 그 중간 즈음인 9개월째에 한국으로 돌아왔다. 여행을 떠나기 전 10년, 나는 직업군인이었다. 안정된 직장이란 것이 있었고 승진이란 것도 해보았다. 공부가 하고 싶을 땐 야간대학에 다녔다. 내 집과 차를 가져보았고, 사랑도 해보았다. 원하는 게 있다면 무엇이든 기꺼이 경험해보았다. 하지만 그 무엇도 나를 채워주진 못했다. 이렇게 저렇게 퍼즐을 맞춰보아도 도무지 만족할 수 없었다.

 작년 2월 군대를 떠났다. 기세 좋게 전역했지만 10년의 관성을 벗어난다는 건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었다. 부모님을 설득하지 못해 전역 신청 사실을 통보해야 했고, 당장 보험금 납부를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해야 했으며, 누우면 3분이면 잠드는 나지만 뜬눈으로 밤을 새우는 날들이 있었다. 어쨌든 삶이란 망망대해에 돛단배를 띄운 것이다. 그리고 한 달 후 배낭여행을 시작했다. 동해항에서 배를 타고 러시아로, 아시아를 거쳐 유럽으로, 아프리카 에티오피아까지. 이제와 돌이켜보면 개울물이 흐르듯 순조로웠던 길이였지만 그때그때 그 날들은 한 치 앞도 볼 수 없는 어두운 시간이었다. 작은 돌부리에도 걸려 넘어져야 했고 막혀있는 길이 있으면 새로운 길을 만날 때까지 돌아가야 했다.

신 어벙류 인간의 어설픈 여행

 인도 여행 당시의 일이다. 콜카타로부터 40시간의 기차 여행 후, 도착한 델리역은 어두운 새벽이었다. 기차에서 내릴 때부터 왠지 느낌이 좋지 않았다. 뭔가 일어날 것 같은 불안감, 장이 꼬이는 느낌. 그 느낌은 예상보다 빠르게 현실이 되었다. 어서 똬리를 틀라는 변 사또의 폭풍 같은 불호령. 인간지사 재수라는 게 뭐 항상 그런 거지만 어두컴컴한 델리역 주변에 화장실은 보이지 않았다. 나락으로 간다는 건 이런 기분일까. 고작 대소변으로 짐승과 인간을 구분한다면 그건 슬픈 일일 것이다. 난 인간임을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어떻게든 어떻게든……. 그 짧고도 길었던 천고의 시간, 인도는 실로 철학의 나라였다.
 이 일이 아무리 돌이켜봐도 그동안 있었던 최고의 위기가 아닐까 하는 게 이번 279일의 여행이다. 내가 생각해도 뭔가 부족해도 한참 부족한 어설픈 여행……. 그렇지만 이런 나조차도 말할 수 있는 것은 세상은 듣던 것만큼 무시무시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납치를 당한다느니, 사진을 찍고 보니 모든 짐이 사라졌다느니 그런 곳이 세상이 아니었다. 그리고 여행이란 게 즐겁고 유쾌한 것만도 아니라는 것도 배웠다. 오히려 대부분 고독한 날들이 연속되었다. 여행이 본디 외로운 과정이라는 것을 이제야 슬쩍 깨닫고 있지만, 그전까지 나는 끊임없이 나를 잃어야 했다. 매일 새로운 환경, 새로운 사람들 속에서 나를 새롭게 만들고 정의해야 했다. 울타리를 넘어가 어두움 앞에 선다는 건 쉽지 않은 일이었다. 두려웠다. 나를 잃게 되는 게 아닐지 아무것도 아닌 여행이 되는 게 아닐지. 여행을 하면서도 여행이 뭔지 몰랐던 것 같다.

 어벙류 인간인 나는 반응이 느리다. 직접 겪은 일도 우적우적 되새김질하지 않으면 내 경험으로 만들어내지 못한다. 여행하는 동안 끊임없이 뒤를 돌아보아야 했다. 느릿느릿 걸으며 지난 일들을 되새겨 보아야 했다. 느린 여행이었다. 적어도 하루, 이틀씩 더 느리게 움직여야 했다. 그런 와중에 내 못난 모습도 보아야 했고, 전역함으로 포기했던 '가지 않은 길'도 보아야 했다. 자괴와 의구심의 늪은 항상 발밑에 있어 어느 순간 정신을 차리고 보면 늪 속에 잠겨있는 나를 발견하곤 했다.

왜 여행을 해야하는가를 찾아서

'세월이 흘렀기 때문에 우리가 변한 게 아니라 우리가 변했기 때문에 세월이 흐른 것이다'고 김연수 작가는 말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유 한가지는 변해가기 위해서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한다. 우리는 새롭게 흘러오는 세월을 맞이해보고 싶은 게 아닐까. 결국 여행이란 것도 변해가는 과정이 아닐까 한다. 화장실을 찾지 못해 인간이란 무엇인가를 고민했었던 그 궁색한 시간 속에서도 세월이 조금은 흐르지 않았을까.
 여행을 할 때 좋아 보이는 것을 하지 않는 건 참기 힘든 유혹이었다. 어디에선 무엇을 먹어보아야 하고, 무엇을 해보아야 하고 같은 ‘MUST DO’가 정말 많았다. 하지만 휘황찬란하게 번쩍이던 네온사인들 속에 나를 진정으로 이끄는 별은 없었다. 소란함을 줄여나가고, 불순물을 걸러내야 했다. 그런 의미에서 여행의 속성은 어둠이 아닐까 생각한다. 고독하고, 외로운, 도망치고 싶은. 하지만 우리가 엄마의 자궁 속에서 태어났듯, 씨앗이 나무를 품고 있듯, 우리를 나아가게 하고 성장하게 하는 생명은 그 어둠 속에 있지 않을까. 나무가 뿌리를 내리듯 어둠 속에서 생명을 찾아가는 시간, 깊은 뿌리를 내려 세상과 만나고 대지를 움켜쥐는 과정이 여행이 아닐까.

 여행을 결심하던 날부터 그 경험들을 다른 분들과 나누고 싶었다. 하지만 부족한 자신을 나눈다는 건 넘기 힘든 벽이었다. 200일 하고도 79일, 여행을 시작했던 처음의 그 자리로 돌아왔지만, 벽은 여전히 내 앞에 있고 부족한 경험과 실수를 나눈다는 건 여전히 부끄럽다. 하지만 누군가의 모자람이 누군가에게 채움이 되길. 지나온 어둠 속에서 나를 변화시켜준 빛과 향기, 때론 씁쓸했던 경험들, 세월을 이 여행기를 통해 함께 나누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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