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리옹
"예약 안 하셨는데 들어오시면 어떡해요."
예약이 꽉 찼다는 한인 민박집을 돌아나오며 쫓겨나는 기분을 지울 수 없었다. 스위스 인터라켄, 민박집을 찾아 비를 맞으며 걸어갔던 길, 비를 맞으며 다시 돌아섰다. 민박집 주인이 한 말이 계속 맴돌았다. “예약 안 하셨는데 들어오시면…” 예약 안 하면 사람이 아닌가. 옆에 있던 아버지에게도 괜한 말을 듣게 한 것 같아 더 무안했다.
여행을 시작한 지 5개월쯤, 처음으로 한인 민박집에 갔다. 긴 추석 연휴에 휴가를 더한 아버지가 유럽에 왔고 나는 한인 민박을 인터넷으로 찾았다. 역시 한국은 IT 강국답게 민박도 예약을 초간편 하게 할 수 있었다. 는 자다가 씨나락 쪼아먹는 소리였다. 외국의 민박 사이트는 원클릭으로 예약이 된다. 한인 민박집은 민박집을 일일이 검색. 정보를 비교. 이메일로 예약할 수 있는지 문의. 답변이 오면 예약금을 계좌이체... 나는 (모든 과정을 무시하고) 민박집을 찾아갔다. 벨을 눌렀고 주인이 나왔다. 빈방이 없었다. 그리고 주인은 말했다. “예약 안 하셨는데 들어오시면 어떡해요.” 아, 이런 걸 주거침입이라 부르는 것이군요. “죄송합니다.” 혹시 다른 한인 민박집은 어디 있는지 물었다. 민박집 주인은 (어머, 그런 건 당연히 관광 안내소 가서 물어보셔야지요. 모르셨어요? 의 분위기로) 관광안내소가 어디 있는지 알려주었다.
겨우 한 곳의 경험이었을 뿐이다. 겨우 한마디 말이었을 뿐이다. 그렇게 넘어가고 싶었다. 하지만 사람을 돈으로 보는 장사치의 모습을 나는 한인에게서만 유독 꾸준히 보았다. 물론 만나보진 못했지만 분명 그렇지 않은 한인도 있으리라 믿는다. 믿고 싶다. 단순히 돈과 물건을 주고받는 게 아니라 가치와 가치의 교환을 시장활동의 본질이라 생각한다. 그리고 나는 많은 장사치에게 불쾌함을 선사 받았다.
어느 연구에 따르면 페이스북 사용자는 페이스북을 하면서 불행을 느낀다고 한다. 사람들은 페이스북을 보며 질투, 외로움, 좌절감 등 부정적인 감정을 얻게 되는 데, 가장 큰 요인은 바로 다른 사람의 행복한 모습이라고 한다. 여행을 출발하기 전, 나는 페이스북 페이지를 열었다. 여행 영상도 만들어서 올렸다. 세계여행을 할 수 있는 건 운이 좋았기 때문이라는 생각을 했기 때문이다. 국민 세금으로 10년을 살아온 최소한의 보답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어느 날 오히려 페이스북으로 다른 사람에게 박탈감을 주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했다. 사진과 글을 올리면 많은 친구가 댓글을 달아주었다. ‘부럽다.’, ‘멋지다.’ 같은 말이 점점 많아지는 걸 보았다. 물론 친구들은 아무 의미없이 쓴 말일 수 있지만 괜한 걱정이 되었다. ‘멋지다'와 ‘부럽다'는 말속에 본인의 상태를 낮춰보거나 내 상태를 높이 보고 있다는 느낌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 자체로 멋진 각자의 삶이, 어쩐지 나로인해 그림자가 드리워진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의도했던 의도하지 않았던 내 여행은 사람들에게 불행을 주고 있었다.
빛이 있으면 그림자가 있듯, 누군가의 행복은 다른 이에게 그림자를 드리울 수밖에 없는 걸까? 내 여행은 그림자를 만들 수밖에 없을까. 내 여행과 내가 그렇게 욕했던 장사치는 결국 똑같은 것일까. 인류사에 큰 빛이었던 마더 테레사가 생각났다. 그녀로 인해서도 그림자가 생겼을까. 그녀의 행동은 무엇이 달랐을까? 그녀의 빛은 무엇이었을까?
정약용 선생은 이렇게 말했다. “몸을 닦는 일은 효우로 바탕을 삼아야 한다. 그렇지 못한다면, 제아무리 학식이 고명하고 문사가 아름답다 해도 흙담에 대고 색칠을 하는 것일 뿐이다.” 공부하기 전에 사람이 되라는 말씀이다. 다산은 이어서 말했다.
사람이 문장을 지님은 초목에 꽃이 피는 것과 같다. 나무 심는 사람은 처음 심을 적에 뿌리를 북돋워 줄기를 안정시킨다. 이윽고 진액이 돌아 가지와 잎이 돋아나, 이에 꽃이 피어난다. 꽃은 갑작스레 얻을 수가 없다. 정성을 쏟아 바른 마음으로 그 뿌리를 북돋우고, 도타운 행실로 몸을 닦아 그 줄기를 안정시킨다. 경전을 궁구하고 예법을 연구하여 진액이 돌게 하고, 널리 듣고 예를 익혀 가지와 잎을 틔워야 한다. 이때 깨달은 바를 유추하여 이를 축적하고, 축적된 것을 펴서 글을 짓는다. 문장이란 것은 갑작스레 얻을 수가 없다. (…) 어찌해야 효우의 마음가짐을 내 안에 깃들일 수 있는가? 언제나 만백성을 이롭게 하고 만물을 길러내겠다는 마음을 지닌 뒤라야 바야흐로 책을 읽은 군자가 될 수 있는 법이다. <다산 선생 지식경영법>에서
정약용 선생의 사람이 되라는 말은 비단 공부에만 한정되지 않을 것 같다. 배웠다는 사람이 많은 이들의 가슴을 아프게 하는 경우를 많이 본다. 검을 쓰는 기술은 배웠으나 검을 어디에 써야 하는지 길(道)을 배우지 못한 사람들을 많이 본다. 빛은 그림자를 만들 수밖에 없는 건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쩌면 마더 테레사가 되려 노력한 것은 빛이 아니라 오히려 그림자가 아니었을까 생각이 든다. 그녀는 찬란한 태양이 되려 했던 게 아니라 사람들이 밟고 설 수 있는 넓은 땅이 되려 했던 게 아닐까. 성숙해간다는 것, 깊어져 간다는 건 이런 것이 아닐까.
'세계여행 > 여행기_이것도 여행이라고' 카테고리의 다른 글
여행기#21 앞일은 정말 알수 없을까. (0) | 2014.08.11 |
---|---|
여행기 #20 당신이 세상을 바라보는 창문. 시베리아 열차를 타고 본 세상 (0) | 2014.08.08 |
여행기 #18 낙타와 사자, 그리고 어린아이. 함께 파도를 (0) | 2014.07.15 |
여행기 #17 나를 길들인 개요정 대장. 인도 트리운드를 오르며 (0) | 2014.06.22 |
여행기 #16 이건 뭡니까 맛 파스타를 만드는 비법 (0) | 2014.06.2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