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호 기자 X파일

저자
이상호 지음
출판사
동아시아 | 2012-07-19 출간
카테고리
정치/사회
책소개
삼성X파일 보도의 숨겨진 진실과 묻어두었던 기록, 시대를 위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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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신입기자 시절, 한 선배는 내게 물었다. ‘역사의 발전을 믿느냐’고. 18년을 두고 만지작거리는 화두를 던져준 선배. 그는 떠났지만, 책을 통해 되묻는다. ‘역사의 발전을 믿지 않고 어떻게 기자를 할 수 있느냐’고. 그리고 혼잣말로 남긴다. ‘역사의 발전을 믿는 기자가 얼마나 큰 용기를 감당해야 하는지 그때는 미처 몰랐다’고.

30. 고발기자에게 철칙이 있다. 제보자의 말을 전적으로 믿어서는 안 된다. 100% 순수한 마음으로 제보하는 사람은 흔치 않다. 누구나 말로는 공익이나 정의감을 강조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거기에는 원한관계나 공명심, 심지어 개인적 이익 등 불순한 요소들이 상존한다. 보석에도 불순물이 섞여있는데 사람의 마음이야 오죽하겠는가. 원석에서 보석을 가공해내듯 기자는 제보자로부터 사적 이해관계를 배제하고 공익적 가치를 지닌 팩트만을 추출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제보 경위’에 관심을 갖게 되는 이유는 다름 아닌 팩트 추출을 위한 필요성 때문이다. 불순한 의도가 개입되면 필연적으로 팩트에 굴절현상이 발생한다. 이를테면, 누군가에 대한 원한 때문에 제보를 한 경우, 주관적 감정 때문에 악의적 사실관계가 보태지는 반면 선의의 사실은 누락되는 등 정보의 왜곡이 심해진다. 결국 제보에 의존한 취재의 모든 과정은 제보자의 원천 제보 내용 중 왜곡된 사안을 걸러내고 굴절된 시선을 바로 펴는 등 팩트 보정작업에 다름 아니다. 결국 취재는 제보자와의 싸움일 수밖에 없다.

42. 알고도 보도하지 않는 것은 기자에게 범죄 그 이상이다. 법을 어기면 감옥에 갇히고 말지만, 양심을 속이면 세상이 온통 감옥이 된다.

46. 공명심. 그가 던진 말 한마디가 담배 연기와 섞여 어지럽게 흩어진다. 단 한마디로 사람을 이렇게 움츠러들게 만드는 말이 또 있을까? 뭔가 큰 잘못을 저지른 사람처럼 나는 한없이 작아지고 만다. 공명심에 사로잡혀 일을 그르치고 있는 건가? 질문이 꼬리를 물면서 단단히 무장했던 내 자의식의 밑동으로부터 허물기 시작한다. 담배 하나를 더 피워문다. 나는 왜 SBS를 고발했던 거지? 나보다 센 놈을 죽여 자신의 수컷을 과시하려는 공명심 때문이었던가? 솔직히 있었나, 없었나? 말해봐! 끝없는 질문과 대답의 알고리즘에 갇힐 것만 같다. 이럴 땐 입을 움직여 나지막이 혼잣말을 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 내 안의 이야기가 심장에 갇혀 터지지 않도록 말이다.

63. “선생님, 제가 꼭 필요할 때 쓰려고 지금껏 잘 간직해온 게 있습니다.”
“그게 뭔데?”
“제 목숨입니다.”

79. 나는 더욱 소외되고 더욱 격리될 것이다. 하지만 이게 최선이었다. 내 짐을 어깨에서 내려놓지 않고서 어찌 남의 짐을 질 수 있겠는가. 두렵지만 그만큼 홀가분해진 몸과 마음으로 회사에 들어왔다. 

84. 다이너마이트를 향해 돌진하는 심지의 불꽃, 그 불똥이 내 눈에 튀는 듯한 환영이 느껴졌다.

85. 그런 날이면 저녁식사가 풍성해진다. 상품권이 몇 시간 만에 후다닥 식탁 위의 찬거리로 잘게 부서져 올려진 것이었다.

87. 이번 출장은 자본에 대한 깊은 성찰을 수반하는 일이다. 정리하자면 이렇다. 향후 기자의 숙명은 자본을 경계하는 일이다. 기자의 본분은 시장을 감시하는 일이다. 이 모든 일은 기자가 자본으로부터의 순수성을 지키지 못하면 할 수 없는 일이다. 우리 모두 자본과 시장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다. 하지만 기자라면 젖어서는 안 될 일이다. 자본의 공세에 한번 젖게 되면 해일에 몰디브가 잠기듯 한순간에 끝난다. 자본에 젖은 기자는 앞으로 시대가 요구하는 기자상을 자임할 수 없는 것이다. 시장 안에서 최소한의 기능을 유지할 수는 있겠지만, 시장을 넘어선 통찰과 감시를 수행하기 곤란하다는 얘기다.
(…) 그리고 각오한다. 지금 내가 하려는 것은 자본의 심장에 도덕성의 창을 꽂는 일. 이를 위해 기자는 어쩌면 목숨보다 소중한 것을 걸어야 할 수도 있다. 불명예와 누명…. 자본은 자기보호를 위해 그보다 더한 오명을 기자에게 씌우려 할 것이다. 두려운 가운데 형용할 수 없는 비장미가 느껴진다.
 분명한 것은 나의 삶은 이번 출장 이전과 이후로 나뉘게 될 것이라는 점이다. 그리고 이번 분기점이 나만의 것은 아닐 것이라고 확신한다. 시대의 좌판 위로 주사위는 던져졌고, 활은 시위를 떠났다. 그저 담대하게 운명의 길을 걸어가리라.

91. 바로 그 순간 나는 들었다. 미친 바람의 절규를 그건 제트터빈의 날카로운 블레이드에 갈기갈기 찢긴 바람의 살점들이 분노에 치를 떨며 내는 비명이었다. 분노가 밀어내는 반발력. 사람과 화물을 가득 실은 거대한 쇳덩이를 허공으로 띄운 것은 바로 너희들 바람의 눈물이었구나. 돌아보니 바람의 눈물 자국이 비행기의 궤적을 그리며 따라오고 있었다. 마치 혼자만의 비밀을 갖게 된 사람처럼, 그저 나는 조용히 창밖을 응시한다. 입가에 작은 미소가 떠올랐다.

100. “아닙니다. 기자생활을 시작하고 살기 위해 기사를 써본 적 없습니다. 매번 유고기사라고 생각했습니다. 살기 위한 쪽보다는 죽는 길로 왔습니다. 제 소망입니다. 우리 사회를 위해 꼭 필요한 기사와 제 목숨을 바꾸고 싶습니다. 정말 꼭 필요할 때 몸을 던지기 위해 기자로서 깨끗하게 간직해왔습니다. 부자 친구 안 사귀고 정치인과 손잡지 않았습니다. 저 정말 죽고 싶어 환장한 놈입니다.

153. 역사는 과반수로 결정되는 것만은 아니거든. 20%가 지지하더라도 옳은 건 해야지. 지동설을 주장한 사람이나 종교개혁을 주창한 사람이나 모두가 1% 미만의 지지 기반을 가지고 움직였던 사람들이야. 옳은 건 옳은 것일 뿐이니까. 그게 기자지.

159. 만일 내가 정신과 치료를 받는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삼성 X파일 보도는 완전히 물 건너갈 것이다. 미친놈이 쓴 기사를 누가 믿겠는가? ‘이상호는 미친놈이다.’ 삼성에게 너무도 좋은 공격의 빌미가 될 것이다. 보도를 위해 나는 미치면 안 된다. 밤새 악몽을 꿨다. 미친 나와 미치지 않으려는 내가 뒤엉켜 싸운다. 새벽녘에 결국 세상이 미친 것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166. 그에게 사과했지만 그렇다고 아직 기도까지 할 생각은 없었다. 나는 아직 버틸 수 있고, 나를 위한 기도는 사치라는 내 오랜 자만을 포기할 수 없었다. 나 같은 놈까지 도와달라고 손을 벌리면 정말이지 신이 필요한 사람은 얻지 못하게 될 거라는 못된 확신이 있었다. 실제 사회에서건 종교적 교리에서건, 부유한 사람이 없는 사람이나 정말 필요한 사람의 기회를 뺏는 건 정말이지 싫다. 나는 정당한 인간적 노력을 통해 이룰 것이다.

182. 그와의 선후배 관계는 이것으로 끝이다. 삼성 X파일의 보도를 막는 사령탑으로서 그는 나와 보도국을 공격하게 될 것이다. 이인용이라는 거목을 뿌리째 뽑아간 삼성은 승리를 자축하고 있을 것이다. 그의 스카우트 비용으로 백억 대 가까운 돈을 들였다는 소문이 무성하다. 돈으로 어찌할 수 없는 것도 있다는 걸 보여주고 말 것이다!

219. 내가 철들어 간다는 것이
제 한 몸의 평안을 위해
세상에 적당히 길드는 거라면
내 결코 철들지 않겠다.

오직 사랑과 믿음만으로
굳게 닫힌 가슴 열어내고
벗들을 위하여 서로를 빛내며
끝까지 함께하리라.

모진 시련의 세월들이
깊은 상처로 흘러가도 변치 않으리,
우리들의 빛나는 청춘의 기상

우리 가는 이 길의 탄생을 
누구 하나 안 알아주어도
언제나 묵묵히 신념을 다 바쳐
세상을 지켜내면서

진짜 의리라는 게 무언지
참된 청춘의 삶이 무언지
몇 마디 말 아닌 우리의 삶으로
기꺼이 보여주리라.
몇 마디 말 아닌 우리의 삶으로 기꺼이 보여주리라.

(새 세대 청춘 송가 / 윤민석 글, 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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