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내게 독서는 달콤하거나 쓰라린 연애와 같다. 아이들이 그 무엇이든 놀이적 요소가 없으면 하다가 팽개치는 것처럼. 난, 그 무엇이든 연애적 요소가 없으면 다가서지 않는다. 연애의 핵심은 유혹, 달콤함, 쓰라림, 한숨, 그리고 오르가슴. 무엇엔가에 홀려 직관적으로 책을 집어들고, 허겁지겁 그 매력과 유혹에 빠져든다. 그리고 뒤통수를 맞거나 경이로운 황홀경 속에서 나른한 한숨을 내뿜으며 몇 날 밤을 보내고, 약간 거친 느낌의 공책을 찾아, 뽀드득거리는 느낌의 필기구로, 마음에 꽃힌 문구들을 적어본다. 사랑에 빠지고, 새로운 환희에 볼을 붉혀 보면서 한 권의 책이 주는 도취 속에 발부터 머리끝까지 푹 담근다. 목욕물이 미지근해져서, 더 이상 버틸 수 없을 때, 거기서 나온다.
나의 책읽기에 대한 글을 쓰기로 하면서, 커다란 부대자루 속에 손을 쑥 집어넣어, 아직도 발갛게 달아오른 온기가 꺼지지 않아 내 손을 후끈하게 하는 돌멩이들을 몇 개 골라냈다. 이 발그레한 돌멩이들을 한데 모아놓고 보니 눈부시다. 뜨겁다. 모든 걸 태워버릴 만큼. 겨울밤 활활 타오르는 벽난로처럼. 그들이 한데 모여 전해주는 그 빛과 온기가 새로운 탄생을 위한 위대한 소멸의 축제를 벌이는 듯하다.
사흘 뒤, 이사를 간다. 서가에 꽂혀 있다가 박스 속으로 들어간 책들이 벌써 80박스를 넘어가고 있다. 경험컨대 새로운 공간은 늘 새로운 독서를 요구한다. 시대와 공간, 성을 초월하여 깊숙이 누군가의 영혼에 내 영혼을 접속시키는 이 은밀한 정신의 간음. 월경의 새로운 시작을 꿈꾸며, 지난 시절 나와 희롱을 벌이던 책들과의 연애에 대한 기록을 시작한다.
46. <이사도라 던컨> 말이나 글을 통해서가 아니라 전 생애를 혁명적으로 살아낸 한 놀라운 인간을 만난다. 마르크스나 마오, 레닌 같은 수컷의 혁명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한 방울의 피도 흘리지 않고, 누구를 밟고 올라서거나 누군가가 몰락할 필요 없이, 모두가 해방되고 환희에 젖는 그런 혁명의 여전사를.
48. 피아노 레슨을 하고 어머니가 늦게 귀가하는 동안, 이사도라는 오빠들과 함께 바닷가를 맘껏 뛰어다니며, 거대한 파도의 리듬과 로키 산맥을 타고 넘는 바람을 춤으로 노래했다.
이런 환경과 무한한 자유 속에서 누렸던 자연에 대한 탐험, 그 속에서 발견하는 자연의 우아하고 조화로운 아름다움은 그녀가 가졌던 자신의 존재에 대한 당당함과 자신이 새롭게 창조할 미의 세계에 대한 확신을 구축해준 바탕이었다. 그녀는 오히려 자식들의 평안을 위해 큰 재산을 남기려 하는 아버지들을 한심하게 여겼고, 부잣집 아이들이 가정교사와 보모의 울타리에 갇혀 세상에 대한 그 어떤 탐험도 하지 못한 채 양육되는 모습을 가엽게 여겼다.
(…) 니체를 자신의 춤의 스승으로 삼았다. 열한 살의 나이에 학교를 그만두고 마을의 소녀들을 모아 춤을 가르친 그녀. (…) 선생이 발끝으로 서보라고 말하자 이사도라는 왜 그렇게 하느냐고(감히!) 물었다. 그건 아름답기 때문이라는 답이 돌아왔다. 이사도라는 “그건 오히려 추하고 자연에 위배되는 일”이라 반박하고 다신 발레학교에 가지 않았다.
‘아직 모르지만, 열쇠만 발견한다면 내가 거기 들어가도록 운명적으로 정해진 세계가 있다는 느낌만은 갖고 있었다. 나의 예술은 내가 어렸을 때부터 이미 내 속에 존재하고 있었다.’
49. 이상이 이끄는 삶. 세상은 강렬한 신념을 가진 자의 것이다. 단단한 신념을 가슴에 품고 살지 못하는 대부분의 사람들 사이에서 운명처럼 강한 신념을 가지고 그것을 향해 의심 없이 다가서는 사람은 주변 사람들을 자신 앞으로 모은다. 사람들은 그 알 수 없는 신념에 매료되고 그 사람의 신념은 모두의 신념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그것은 이 건조한 세상에서 종종 마술이 벌어지곤 하는 계기이기도 하다. 이사도라의 신념은 세상 사람들에게 마술을 걸었고, 그녀의 춤은 인간의 몸을 해방시키는 현대무용의 신기원을 열었으며, 그녀의 이야기는 신화가 되었다.
‘프로메테우스가 인류에게 불을 가져다주었듯이, 이사도라는 그녀 자신만의 온전한 권위로, 그리고 새로운 자각에 따라 인류에게 춤을 가져다주었다.’
당시(19세기 말~20세기 초) 서구사회에서, 무대에서 볼 수 있는 춤은 토슈즈에 발을 넣고 발끝으로 서는 것으로부터 시작되는 발레가 전부였다. 그것은 형식화된 틀 안에 신체를 종속시키는 일이며, 예술이라고 부를 수조차 없다고 이사도라는 생각했다. (…) 주눅 들지 않고 눈치 보지 않는 야성의 힘을 간직한 자아의 힘이었다.
누군가가 춤이 무엇인지 말해주기도 전에, 자유로운 신체와 영혼을 지닌 인간으로서 바다의 파도의 리듬에 따라 춤추었던 그녀가 발레라는 정형적 틀을 만났을 때, 오싹하는 두려움까지 느꼈을 정도로, 그것이 자신이 꿈꿔왔던 것과 완전히 적대적인 것임을 알았다.
‘나는 최초의 순간에서부터 나의 인생만을 춤춰왔다. 어렸을 때는 성장하는 일에 대한 무의식적인 즐거움을 춤췄다. 젊은 시절에는 내면의 슬픔에 대한 최초의 인식에서 오는 불안, 사정없는 잔인함, 인생의 허물어져가는 과정에서 오는 불안을 표현하는 즐거움으로 춤을 췄다.’
이사도라는 춤을 살아 있는 모든 자들이 자신의 기쁨과 슬픔을 표현하는 방식이라고 여기며 이를 모두가 누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51. 왜였을까? 거기엔 문명의 잉여물들이 차곡차곡 쌓아온 장식들이 제거된, 자연과 소통하는 영혼이 뿜어내는 박력 넘치는 원초적 순수가 담겨 있었기 때문이다.
52. ‘어리고, 특별한 재능이 없는 아이들이라도 내가 정신을 집중해서 영혼의 귀로 음악을 들어요. 자, 듣는 동안 몸속 깊은 곳에 자리 잡고 있는 저 속에 있는 내가 깨어나는 것을 느낄 수 있죠? 하면 바로 이해한다. 그 힘에 의해 머리를 들고 그 힘으로 팔을 들어봐요. 그 힘으로 빛을 향해 천천히 걸어가는 이 깨어남이 바로 춤의 최초 스텝이 되는 것이다. 일단 그것을 경험하고 난 후부터는 일상의 걸음, 일상의 모든 몸짓 속에 영적인 힘과 우아함이 깃들게 된다.’
53. 단지 뛰어난 무용수로서의 삶에만 만족했다면 그녀의 삶은 훨씬 쉬웠을 것이다. 모든 걸 내던지고 동토의 땅으로 이주하는 모험을 감행할 필요도, 학생들을 먹이고 가르치고 치료하느라 번번이 파산할 필요도 없었을 터다. 그러나 그녀는 죽는 날까지 철저하게 이상이 이끄는 삶을 살았고, 바로 이 점에서 그 어떤 예술가와도 이사도라 던컨은 달랐다. 그녀는, 자신의 예술이 가진 혁명적 이상을 거대하게 사회에서 구현해내길 희구했고, 그 과감한 시도를 멈추지 않았던 진지한 혁명가였다.
54. 혁신적인 아동교육의 선구자이나 정작 본인은 혼외로 낳은 아이를 버렸던 몬테소리 여사, 하녀와 낳은 아이를 정적의 비난을 피해 감추고 모른 척했던 칼 마르크스, 기념비적인 교육론 <에밀>을 집필했지만 정작 자신의 아이 다섯은 모두 고아원에 맡겼던 장 자크 루소. 거룩한 인간들에겐 자신의 거룩함을 위해 숨겨야 하는 진실의 질척이는 웅덩이가 있게 마련이다. 그러나 바로 그러한 모순을 가졌기에 그들은 피와 살을 가진 인간이기도 한 것이다.
57. ‘육체를 갖고 태어난 사람들은 모두 고통을 겪게 마련이다. 이를 갈아내고 뽑아내고 다시 해 박는 식의 고통을 우리 모두 알고 있다. 그렇다면 어째서 그 육체가 최고의 즐거움을 맛 봐서는 안 된단 말인가? 하루 종일 머리를 썩혀가며 일한 사람, 어떤 때는 무겁고 괴로운 문제로 찢어질 것 같은 고통을 겪는 사람이 아름다운 팔 안에서 그의 고통을 식히고 아름다운 시간, 생각의 시간을 갖는 것이 왜 나쁘단 말인가?
64. <몽실언니> “소설가는 자신의 생이라는 집을 허물어 그 벽돌로 다른 집을 짓는 사람”이라고 밀란 쿤데라는 말했다. 그렇다면 책을 읽는 사람들은 다시 그 작가들이 지은 책들을 벽돌 삼아 자신의 집을 짓는다. 그리고 우리가 읽은 하나하나의 책들이 우리의 세계를 이루는 벽돌이라면, 그 벽돌들이 잘 붙어서 하나의 집이 되도록 해주는 시멘트는 우리가 삶에서 직접 마주하는 경험들이다. 한 권의 책은 우리가 책을 읽기 전이나 후에 겪은 실제적 경험들을 통해 공명할 때, 비로소 견고한 내 정신세계의 한 벽돌로 굳건히 자리하는 것이다. 오래도록 내 현실의 삶 속에서 공명을 하지 못하는 책들은 곧 잊히고, 벽돌은 허물어진다.
78. <꽃들에게 희망을> 새 생명이 움트는 것보다 감동적인 사건이 이 우주에 또 있을까. 땅을 뚫고 올라오는 작은 새싹, 이제 막 피어오르기 직전인 꽃봉오리, 손을 꼼지락거리며 젖 냄새를 풍기는 아기의 존재는 순식간에 우리의 감탄을 자아낸다.
80. “해야만 한다는 건 할 수 있다.” 엠마누엘 칸트
그렇다. 우리가 할 수 없는 것을 해야 할 리 없다. 우리 속에 어떤 욕망이 싹튼다는 건, 바로 우리에게 그것을 실현할 수 있는 능력과 지혜도 함께 자라고 있다는 걸 의미한다.
(…) 오래도록 익숙한 둥지를 떠나 세상과 그 속에 처한 자신을 여러 각도에서 바라볼 수 있을 때 비로소 세상의 수많은 진리에 눈 뜬다. 나를 안아주고 키워준 둥지의 안온함을 박차고 일어서서 세찬 비바람과 우연한 사건들이 기다리는 세상에 몸을 던지는 것. 거기서 다른 무언가를 찾을 수 있을 거라고 믿는다면 분명 우리에게 그럴 수 있는 힘이 충분히 있는 것이니.
85. 동지. 나와 같은 뜻을 가진 사람을 우리는 가끔 만난다. 내 머릿속에서만 맴돌던 생각이 동지를 만나 공명하게 되면, 내 생각은 마치 신의 목소리처럼 강력한 힘을 얻는다. 생각이 행동으로 전환되는데, 동지를 얻는 것만큼 강력한 촉매제는 없다.
87. 세상의 모든 살아 있는 것은 영원하지 않다. 고로 사살이 언젠가는 사그라지거나 다른 모습으로 진화한다는 사실은 그것의 생명력을 반증하는 것이기도 하다.
92. 고치는 바로 내가 쌓아 이룩하는 나의 성이다. 내가 고요히 들어앉아 나를 완성시킬 수 있는 그 성을 짓는 것. 삶의 진정한 혁명을 이루고자 하는 이들에게 저자 트리나 폴러스가 건네는 과업이다. 성을 지어야 한다면, 우리는 당연히 그것을 지을 수도 있을 것이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96. 무릇 사랑이 시작되기 위해 우린 수많은 우연의 새들을 맞이해야 한다. 그리고 그것을 적어도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는 눈을 뜨고 새가 날아 앉는 순간을 포착해야 한다. 살랑은 기다리는 사람에게만 찾아온다는 이야기는, 적어도 이 우연의 새들이 지나가는 순간을 알아차릴 수는 있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페르세폴리스>
121. 낯선 땅에 홀로 떨어진 이들에겐 한동안 한 다스의 미친 사람들이 스쳐간다. 그 시기를 잘 넘기고 나면 내 주변에 한두 명 나를 받아주는 사람들이 생겨나는데, 그때 내 존재를 잠시 내려놓고, 나를 받아주는 그룹으로 들어가, 그들의 비위를 어느 정도 맞춰가며 지낸다. 혼자 완전히 외톨이가 되지 않으려면.
122. 우리가 굴종하지 않는 법을 순종의 미덕만큼이나 열심히 배웠다면, 굴종에 직면해야 할 일들은 지금보다 훨씬 줄어들었을 것이다. 인류가 저지른 가장 참혹한 사건들은 불족종이 아니라 복종에 의해 이루어졌다.
130. 마르잔의 당찬 성장기를 공유하는 것만으로, 모래 속에 묻혀 있던 거대한 하나의 세계가 내 앞에서 의미를 갖고 드러났다. 내가 이해하는 세상이 늘어나는 것, 결국은 나를 확장하는 것. 나를 확장하는 것은 곧 내 행복의 지평을 넓히는 것.
144. 어디가 최종 종착지인지 알 수 없지만, 떠나야만 한다는 사실만은 알 때가 있다. 그럴 땐, 떠나는 수밖에. 어디서든지 눈을 부릅뜨고 킁킁대며 생을 향해 나아가면, 삶은 살아진다는 거. 열정을 놓치지 않고, 그것이 숨쉬도록 펼쳐두면, 언젠가는 만개하고 만다는 거.
<섬>
156. 여행은 몇 가지 낯선 감각들을 체험해보는 것으로 내 안의 충동들을 일깨우고 나를 확인하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도피하기 위해서 떠나는 여행일지라도, 결국 그것은 우리 자신을 되찾기 위해서 하는 여행이기 때문이다. 낯선 도시에서 깜짝 놀라는 경험을 할 때, 우리가 바라보게 되는 것은 그 낯선 세상이 아니라, 바로 우리 자신의 진정한 모습이기 때문이다.
이 섬에서 저 섬으로 홀연히 발을 옮기며, 채움이 아니라 공백을 만들고, 한없이 낮아지는 일탈을 간절히 꿈꾸며 종종 시도하는 이 브르타뉴 남자는 여행 자체가 갖는 의미에 대해서만은 우리를 의혹의 구덩이로 밀어넣지 않는다. 바로 손을 잡아준다. 노련하고 친절한 가이드처럼.
<서울에서 보낸 3주일>
167. 난 내가 왜 그들만큼 많이 서럽게 울지 않는지를 신경 써야 할 만큼, 아버지의 죽음이 사무치게 비통하지 않았다. 오히려 가장이라는 사람이 사라진 자리에 남겨진 미성년의 삼남매와 별다른 직업이 없는 엄마가 서게 된 그 황량한 벌판, 거기에 서서 바라보는 낯선 풍경에 더 깊게 살이 베인다.
<우주로부터의 귀환>
184. ‘우주 공간으로 나가면 허무는 완전한 암흑으로, 존재는 빛으로, 즉물적으로 인식할 수가 있다. 존재와 무, 생명과 죽음, 무한과 유한, 우주의 질서와 조화라는 추상 개념이 즉물적으로, 감각적으로 이해된다.
186. 재미있는 건, 내가 머릿속으로 아무리 멀리 자유롭게 우주를 날아도 시선은 항상 지구를 향한다는 거다. (…) 아직 우린 지구의 인력으로부터 도저히 독립할 수 없는 진화 단계에 있는 것일까.
<심미적 이성의 탐구>
197. 눈을 뜨고 있고 머리를 열어두고 있어도, 어떤 사실은 때가 되어야만 비로소 자각된다.
책을 읽고 또 현실의 삶을 한걸음씩 이어가면서 깨닫는 한 가지는, 결국 하나의 거대한 모자이크를 맞추고 있는 내 모습이다. 우연인 듯 집어들은 것 같지만, 기실 이 모든 조각들은 애초에 하나였던 그림을 누군가 조각내어 흩어놓았던 것. 나는 그것을 하나하나 주워 맞추면서, 내가 찾도록 운명 지어진 하나의 그림을 찾아간다. 질긴 운명과도 같은 모자이크 놀이의 판을 엎어버리고 싶은 충동을 느낄 때도 있지만, 충동이 잦아들고 나면 난 여전히 모자이크를 맞추고 있다.
<늑대와 함께 달리는 여인들>
216. 사랑은 단순한 희롱이나 이기적인 향락 추구가 아니라, 끈기라는 심리적 힘줄로 이뤄진 확실한 연대, 또는 행운과 불행을 통해 면면히 이어지는 결합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가장 완전한 사랑은 일련의 죽음과 재생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사랑한다는 것은 한 사람과의 관계에 있어 동시에 수많은 종말과 시작을 포용하고 이겨냄을 뜻한다. 사랑을 하려면 죽음과 춤을 출 필요가 있다. 살다보면 끊임없이 뭔가가 찼다 기울고, 태어났다 죽고, 다시 돌아오는 걸 느끼고 말 터이니. 사랑은 바로 이 주기를 배우는 과정인 것이다.
223. 언제나 명성을 듣고, 누군가를 찾아 나서면, 명성이 그를 스쳐 지나간지 오래된 때에 이르러서야 그 사람과 만나게 되는 운명이 다시 반복되는 듯했다.
236. 우리는 왜 위로만, 그리고 슬금슬금 오른쪽으로만 향하는가. 우리에게는 왼쪽으로 그리고 아래로도 세상을 탐험할 권리가 있으며, 바로 그러한 자기 확장을 통해서 더 높은 차원의 행복을 추구할 권리가 있는 것이다. 세상 사람들이 일관되게 추구하는 더 높은 곳으로만 향하는 지루하고 어리석은 경주를 거부하고, 상하좌우로 온전히 세상을 경험하며 자아를 확장할 수 있었던 사람들만이 진정한 자유를 누렸으며, 그들만이 애벌레에서 나비로 환골탈태하는 도약을 경험했으리라.
262. 예기치 않은 솔직함이야말로 진정으로 강한 자만이 가질 수 있는 무기가 아니던가.
<미국민중사>
285. 1920~30년대 인디언들과 함께 살았던 학자 존 콜리어는 “만약 우리가 그들의 정신을 가질 수 있다면, 영원히 고갈되지 않는 대지에서 끝없이 지속되는 평화를 이루며 살게 될 것이다”라고 말했다.
293. “우리는 이미 충분히 황금의 지배라는 저주를 받아왔다. 돈은 결코 문명의 적절한 토대가 될 수 없다. 인류애를 근거로 하는 사회를 다시 만들어야 할 때가 됐다.”
297. ‘계급적 이해는 언제나 국익이라는 모든 것을 감싸는 베일 뒤에 가려져 왔다. 나는 나 자신의 전쟁 경험과 미국이 벌인 모든 군사 개입의 역사를 통해, 고위 공직자들이 자신들의 정책을 정당화하기 위해 국익이나 국가 한보에 호소하는 말을 들을 때마다 언제나 그 진실성을 의심했다. 한 줌도 안 되는 사람들이 전쟁을 결정하고, 수많은 다른 사람들은 그런 결정의 결과로 목숨을 잃거나 불구가 된다고 할 때, 국익이라는 게 과연 존재할까.'
299. ‘미국 역사에서 어떠한 중요한 변화도 순전히 선거와 투표 행위의 결과로 달성되지 않았습니다. 아프리카 흑인 노예, 노동 조건 개선, 남부의 인종차별, 베트남전 종전 등이 그랬죠. 제도정치권에서 비롯된 게 아니라, 조직적인 사회운동을 통해서 이뤄졌습니다. 제도정치는 늘 사회운동이 일종의 국가적 분위기를 조성한 뒤에야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제도정치는 사회적 변화를 주도하지 않습니다. 시민의 요구가 충분히 강할 경우에만 반응합니다.
303. 진흙탕같이 추하게 질척이는 이 세상을 구해줄 그 어떤 메시아도, 그럴싸해 보이는 시대의 영웅도 기대하지 말자. 그 누가 국가의 수장이 되든 역사의 바퀴는 그것을 함께 굴려가는 시민들의 열망대로 흐를 것이니. 독재자의 딸이 펼치는 저 역겨운 시대착오적 여왕 놀음을 시민정신이 용납하지 않는다면, 그 공허한 권력의 허세는 세상을 한치도 움직일 수 없을 터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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