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 일반적으로 전문가라고 하면 의사나 변호사처럼 그 전문지식을 사회적으로 인증하는 시험에 합격해 자격증을 갖고 있거나, 또는 전문이으로서 높은 도덕률(히포크라테스 선서, 정의의 여신상을 연상해보십시오)을 요구 받는 위치에 있는 자를 가리킵니다. 또 전문가 집단은 대개 협회 등을 통해 자율적으로 운영됩니다. 자격증으로 대표되는 전문지식, 높은 도덕률과 자율성 등은 그래서 전문가 집단의 중요한 특성들로 받아들여집니다.
69. 청와대도, 삼성도, 시민도, 단지 자신들의 생각과 의견을 말하고 있을 뿐입니다. 다만 자신의 생각을 뒷받침하는 자료의 신뢰도에 차이가 있습니다. 언론은 이를 객관적으로 검증해야 합니다. 그게 언론의 본 역할입니다. 한국의 방송기자들은 이 언론의 본 역할을 거의 방기해왔습니다.
73. 언론인이 ‘우리 사회’가 아니라 ‘우리 회사’에 매몰되면 그는 더 이상 언론인이 아닙니다. 가치의 우선순위를 독자나 시청자가 아니라 ‘우리 회사’에 두는 사람의 정체는 ‘회사원’이기 때문입니다.
75. 길거리에서 풀빵을 찍어내는 노점상을 두고 ‘제빵사’라고 부를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보도자료를 그대로 베껴 뉴스를 풀빵 찍듯이 찍어내는 사람을 언론이라고 부르는 것은 참으로 민망한 일입니다. 대부분의 한국 중견 언론인들은 전문가도 아니고, 따라서 전문가적 양식도 없습니다. 전문가로서의 도덕률이나 자율성도 극히 빈약합니다. 그런 사람들이 만들어내는 뉴스의 값어치는 뻔한 것입니다. 좁고, 얕고, 얇고, 시끄럽고 게다가 편파적입니다. 따라서 뉴스를 보고 주식투자를 하기 전에 우리는 반드시 스스로에게 이렇게 자문해보아야 합니다.
97. ‘급등, 급락, 폭등, 폭락’ 등의 단어에는 부사나 형용사가 들어 있습니다. ‘급히 오르고’ ‘폭발적으로 떨어졌다’는 말입니다. 부사나 형용사에는 인간의 추정과 감정이 개입되어 있습니다. ‘대란, 공포, 후폭풍, 도미노’등의 단어 역시 사실을 정확히 묘사한 것이 아니라 언론사의 기자가 제멋대로 추정하거나 과장한 것일 뿐입니다. 때문에 기사 속 단어들의 감정, 추정, 편견 등은 떼어놓고 구별하는 습관이 필요합니다. 비판적으로 바라보고 냉처랗게 해석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133. 값싼 뉴스는 과잉으로 넘쳐나고, 진짜 정보는 없는 상황, 특히 논쟁적인 주제에서 뭔가 뉴스는 많은데 정보가 없는 현대 미디어의 상황을 스탠퍼드 대학의 역사학 교수인 로버트 프록토는 아그노톨로지Agnotology라는 용어로 정의했습니다.
아그노톨로지는 ‘사회-문화적으로 공고화된 무지에 대한 탐구’라는 뜻입니다. 좀 어렵습니다. 저도 어렵습니다. 쉽게 말하자면 이명박 정부가 4대강 사업을 추진한다고 하고 야당과 시민단체는 반대한다고 하는데, 시민들은 그 핵심 쟁점이 무엇인지 명확히 잘 알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핵심 쟁점에 관해 명확히 판단할 만한 정보를 가지고 있지 못하다는 것이지요. 이렇게 되는 이유는 언론에서 대중에게 주로 논쟁의 ‘가십거리’만 제공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되면 대중은 어디서 많이 들은 것 같지만 사실은 들은 게 없고, 아는 것 같지만 아는 게 없는 상황에 처하게 됩니다.
프록토 교수에 따르면, 대중이 이렇게 ‘사회-문화적으로 공고화된 무지’의 함정에 지속적으로 빠지는 이유는 바로 특정 이익집단이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일부러 핵심 쟁점과 내용을 혼란스럽게 만들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대중은 강호순이나 김길태와 같은 특정 정치 경제 집단의 이익이 얽혀 있지 않은 사건 사고에 대해서는 핵심적인 내용을 듣게 되지만, 4대강 사업이나 세종시처럼 세금, 환경 등 정작 자신들의 이익과 직결된 문제에 대해서는 온갖 소음만 듣게 된다는 설명입니다. 특정 이익집단인 ‘소음’을 통해 교란하고 물타기한다는 것이지요. 이 소음의 대부분이 우리가 보고, 듣는 뉴스입니다.
정부나 기업의 홍보 전문가들은 논쟁적인 사안의 진정한 사회적 문맥을 잘라버리고, 가공의 사회적 문맥을 만들어 이를 진정한 사회적 문맥이라고 선전합니다. 언론은 이들의 말을 받아쓰기만 할 뿐 제대로 질문하거나, 비판하거나 분석하지 않습니다. 이렇게 되면 정부나 기업의 홍보 전문가들의 말은 모두 ‘등가의 가치’가 되어 전달되고 독자와 시청자는 무엇이 진실한 정보인지 구별하고 판단하기 힘들어지게 됩니다. ‘가상의 현실’이 ‘현실’을 몰아내고 ‘가공의 사회적 문맥’이 진정한 사회적 문맥을 대체해버리는 것입니다.
137. 버블의 이면을 보다.
버블은 열광과 유행의 역사입니다. 17세기 네덜란드에서는 튤립 가격이 오르자 원예업자들이 대거 튤립 재배에 나서기 시작했습니다. 희귀 튤립의 구근 가격이 폭등하면서 튤립 구근 하나가 대저택 한 채의 가격을 웃돌 정도로 엄청난 버블이 형성됐습니다. 그러나 막상 수확 시기가 다가오자 튤립의 공급이 수요를 훨씬 초과한다는 사실이 명확해졌습니다. 결국 튤립 가격은 최고치의 수천 분의 1로 폭락했습니다.
1800년대 중반 미국에서는 철도가 운송 혁명을 주도하면서 철도 산업은 수많은 투자자들을 끌어들였습니다. 투자가 증가하면서 주가가 상승하자 사람들은 철도 산업에 대해 더 낙관적인 전망을 갖게 됐습니다. 그러나 단기간에 철도 노선이 급증하자 수요를 초과했습니다. 공급이 수요를 초과하니 우후죽순 생겨난 철도 회사들이 수익성을 잃고 무너지기 시작한 것은 당연한 결과였습니다. 1890년대 자전거의 발명과 함께 생겨난 버블도 마찬가지 전철을 밟았습니다. 1920년대 미국의 라디오 산업도 똑같은 패턴의 버블을 불러왔습니다. 1960년대에는 TV가 그러했습니다. 자동차, 비행기, 개인용 컴퓨터 그리고 우리도 비슷한 시기에 겪기 시작한 1990년대 후반의 인터넷 열풍까지…… 새로운 기술과 혁명은 사람들에게 ‘꿈’과 ‘거품’을 심어줬습니다.
버블의 역사에서 우리는 중요한 세 가지 사실을 발견합니다.
첫째, 버블은 패션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열광하지만 열광과 환희의 감정은 실체 없이 마냥 지속될 수 없었습니다.
둘째, 버블은 항상 급격한 공급 초과 현상을 불러왔습니다. 공급이 초과되면 공급은 수요에 맞춰 떨어집니다. 시차는 달랐지만 버블은 항상 꺼졌습니다.
셋째, 19세기 중반 이후 버블은 대부분 과학문명을 둘러싸고 일어났습니다. 과학과 산업문명의 시대에 접어든 대중은 과학으로 일군 기술 혁명에 굳건한 신뢰를 보냈습니다. 그래서 과학이 새로운 산업의 혁신을 이끌어낼 때마다 사람들은 열광했습니다. 열광한 대중은 눈이 멀게 되고 눈이 먼 대중은 사물을 제대로 평가할 능력을 상실합니다. 버블 속 대중은 과학의 힘을 절대 신뢰한 비과학적 광신도들이었습니다. 과학의 시대에 주기적으로 발생한 대중의 비과학적 열광이 곧 ‘버블의 역사’였던 것입니다.
'만나다 > 책' 카테고리의 다른 글
#1056. 당신의 인생을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클레이튼 M. 크리스텐슨 (0) | 2014.08.10 |
---|---|
#1055. 월경독서. 목수정. 책 어떻게 읽을 것인가. (0) | 2014.08.10 |
#1053. 이상호 기자의 X파일. 삼성을 보다. (0) | 2014.08.10 |
#1052 인문학은 밥이다. 김경집 (0) | 2014.08.03 |
책 #1051. 미국에서 태어난 게 잘못이야_토머스 게이건 (0) | 2014.07.1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