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으로 가는 문

저자
미야자키 하야오 지음
출판사
현암사 | 2013-08-09 출간
카테고리
시/에세이
책소개
미야자키 하야오가 꼽은 어린이책 50권! '바람이 부는 시대'에...
가격비교 글쓴이 평점  


눈부시게 아름다운 여름방학. 반짝이는 호수에 떠 있는 우리 배. 돛으로 바람을 붙들어 어디든 자유롭게 갈 수 있습니다. 잔소리하는 어른들도 없습니다. 자유! 이 얼마나 멋진 여름인가요.
저에게도 이런 여름 방학이 있었다면…… . 손도 안 댄 방학숙제, 새 하얀 그림일기장, 악의로밖에 생각되지 않는 날씨 써넣는 칸(누가 이런 칸을 만들었을까요). 백일홍이 피고 애매미가 울기 시작하면 여름방학도 끝나는데, 지금도 가슴이 두근두근합니다. 
한숨이 나오네요.

정말 훌륭한 사람들이 있었고 지금도 있다는 사실을, 이제는 조금 알게 되었습니다. 그다지 유명하지 않은 사람 중에도 있습니다. 저는 그런 사람을 알고 나면, 위대하다고 생각하기보다 대체로 그이를 좋아하게 됩니다. 퀴리 부인을 만났다면 역시 그녀를 좋아했을 것 같습니다.

결국은 정신없이 끝까지 읽고 말았습니다. 반짝반짝 빛나는 단단한 알맹이를 품은 책입니다. 마치 선배처럼 건강하고 반듯한 소녀의 내면세계로 느껴지기도 했습니다.

아니, 그렇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소년 시절을 아득한 옛날에 두고온, 이젠 하릴없이 늙은이임에 틀림없는 저는 생각합니다. 사건은 분명 있었을 터입니다. 닿을 듯 말 듯 옆구리를 아슬아슬하게 스쳐 지났을지도 모릅니다. 다만 저는 못 본 척했거나 알아보려 하지 않았을 뿐입니다. 그것이야말로 더욱 안타까운 일이 아닌가 합니다.

77. 아이들은 신분을 증명할 만한 수단이 없었지만, 확인을 받는 일 따위는 없었습니다.

78. 갱지 같은 종이로 만든 얇은 책이었는데 글자만 쓰여 있어 마치 어른이 된 기분이 들었습니다.
 어린 시절에는 책을 읽는 데 장소를 가리지 않습니다. 여기서도 읽고 저기서도 읽습니다. 공부방 구석에서도 읽고 다다미방에서도 읽고, 저기를 향해서도 읽고 여기를 향해서도 읽습니다. 그리고 빨리 자라는 말을 들어도 이불 속에 숨어 계속 읽습니다. 어떤 자세로 읽었는가는 생각나지 않는군요.
 
80. 문예부 방을 빌려 쓰고 있었는데, 거기 역시 사람이 전혀 없었습니다. 가끔 한두 사람이 보일까 싶게 거의 활동을 멈춘 상태였습니다. 다시 말해 그 방은 우리가 멋대로 쓸 수 있었던 것이지요. 그래서 아지트로 삼고 4년을 지냈습니다.
그런 모임이었으니 “인형극을 하자” 해도 “뭐? 인형극을 한다고?” “난 인형극을 하러 여기 들어온 거 아닌데” 하면 “시끄러!” 하는 식이었지요. 시위를 하러 나가느니 마느니 하는 이야기로 세월을 보냈습니다.(웃음) 독서 토론을 해도 “어때, 이 책 재미있지?” “아니, 시시했어” 하는 이야기를 넘어서지 못한다거나 “그런 거 분석해봐야 어쩔 수 없는 거 아닌가” 하는 결론이었습니다. 즐겁기는 했으나 학구적이지는 않았지요.

100. 아이는 그렇지가 않습니다. 현명해지는 만큼 또 몇 번이고 바보 같은 짓을 합니다. 아이에게는 거듭 바보 같은 짓을 할 권리가 있습니다. 어린아이의 세계는 특히 더 그렇습니다.

131. 애니메이션이 없었다면 그림 같은 걸 그리지 않았을 사람이 애니메이션을 하고 있는 시대가 지금입니다. 서브컬쳐는 다시 서브컬처를 낳습니다. 그렇게 이차적인 것을 낳을 때 2분의 1이 되고, 다시 4분의 1, 8분의 1이 되며 점점 엷어집니다. 그것이 지금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이 세계를 어떤 식으로든 받아들일 때, 자신의 눈으로 실물을 직시하지 않고 간단히 ‘뭐 사진으로 됐잖아’ 해버리는 거죠. 사진도 색이나 음영을 얼마든지 바꿀 수 있으니, 자기 좋을 대로 만들어냅니다. 그러다보니 정말 자신의 눈이 어떻게 느끼는지 멈춰서 바라보지 않습니다.
 고화질 텔레비전은 인간의 눈에 보이지 않는 것까지 보여줄 수 있습니다. 그렇게 거짓에 거짓을 더해 뭉쳐놓으니 세계가 인간에게 미치는 충격은 점점 엷어져 16분의 1이 되고, 64부의 1이 되고, 끔찍한 결과에 다다른 느낌입니다.
 전기가 끊기고 영상이 사라지고 정보가 막히면, 모두 불안하고 병에 걸려 죽어버릴지도 모릅니다. 그래도 세계는 존재하겠지요. 이렇게 까다롭고 복잡한 세계에서 살아가기 위해서는 잔뜩은 아니어도 책이 꼭 필요합니다. 이 세계에 대해 쓴 책이 있으면 좋겠습니다. 단 <자본론>처럼 어렵지는 않고 이해하기 쉬운 책 말이지요.(웃음)

141. 요즘 정치가 어떻다느니 사회 상황이 어떻다느니 대중매체가 어떻다느니 세상 전체만 논할 게 아니라, 자신이 할 수 있는 범위에서 무엇을 할 수 있을까를 생각하면 된다고 봅니다. 그러면 상당히 여러 가지 것들이 변하지 않을까요?

145. 바람이 불기 시작한 시대.
바람이 불기 시작했습니다.
 최근 20년 동안, 일본에서는 경제 이야기만 해왔습니다. 마치 터질 만큼 물이 가득 찬 풍선처럼, 꼼짝도 할 수 없었습니다. 언제 터질까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영상과 게임과 소비에 빠져들면서, 개를 키우고 건강과 연금 걱정을 하고 조바심을 내면서, 결국 경제 이야기만 해왔습니다. 불안만큼은 착착 부풀어 올라 스무 살 젊은이와 예순 살 늙은이가 다르지 않게 되었습니다. 
 뭔가 일어날 거라고, 다들 예감하고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아무리 훌륭한 전쟁보다 어리석은 평화가 더 소중하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돌연 역사의 수레바퀴가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살아가기 어려운 시대의 막이 오른 것입니다.
(…)‘바람이 불기 시작한 시대’의 바람이란 상쾌한 바람이 아닙니다. 무섭고 요란하게 지나가는 바람입니다. 죽음을 안고 독을 품은 바람입니다. 인생을 뿌리째 뽑으려는 바람입니다.

149. 아버지는 아홉 살에 그리고 저는 일흔 살에, 같은 바람이 부는 시대를 만났다는 생각이 듭니다. 아버지의 시대와 카렐 폴라체크의 시대와 저의 만년은 같은 수레바퀴의 한 조각이었던 것입니다. 수레바퀴는 돌고 있었는데 알아채지 못했을 뿐입니다. 어쩐지 아버지를 전보다 잘 이해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앞으로의 과제는 우리들 안에 싹트는 값싼 니힐리즘을 극복하는 일입니다.
 니힐리즘에도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깊은 니힐리즘은 생명의 근원에 대한 물음에서 나온다고 생각합니다만, 값싼 니힐리즘은 게으름의 변명이기 일쑤입니다. 

150. 바람이 불기 시작한 시대의 영화는 책상 서랍에 숨겨야만 할 작품인지도 모른다는 각오가 필요합니다. 제 나이 탓만이 아니라 현장에 이쓴 이십대의 젊은 스태프들에게도 같은 일일 것입니다.
 원자력 발전 폐기하기, 청산할 수 없는 빚을 자손에게 남기지 않기 등, 우리는 시험을 치르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바람이 불기 시작한 시대의 들머리에서는, 행복한 애니메이션을 만들려고 해도 어쩐지 거짓말 같은 냄새가 나니까요. 정말 21세기의 막이 올랐습니다. 저는 거기에서 눈을 돌리지 않으려고 애쓰는 게 고작입니다.

153. 세상이 아무리 흥청거려도 저희는 온화하고 차분한 방향으로 키를 돌릴 생각입니다. 그 이유가 단지 나이를 먹었기 때문일 가능성도 있지만요.(웃음)
 하지만 그 방향에 우리가 찾는 새로운 판타지가 있지 않을까 생각을 합니다. 아직 말할 정도의 내용은 없지만, 그렇게 느끼고 있습니다.

무엇이 시작되는가
우리는 만드는 것 이상을 소비하는 이 생활을 그만둘 수밖에 없습니다. 가난해지기도 하겠지요. 전쟁마저 시작될지도 모릅니다. 전세계가 터질 것처럼 부풀어 있습니다. 이런 시기에 “괜찮습니다”같은 말을 할 수는 없습니다.
(…) 한편 절망의 깊이도 전보다 더 사무치고요. 역사가 움직이기 시작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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