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종이 위에 숫자로 표현된 1인당 GDP가 아니다. 누구나 골고루 잘 산다는 사실이 더 중요하다. 세계에서 잘 산다고 꼽히는 나라들은 대체로 좌파 성향이 강하다. 이 말은 사회민주주의 국가에서는 누구나 ‘돈’을 갖고 있다는 얘기다. 특별히 내세울 게 없는 오래된 도시 쾰른에서는 곳곳에서 그 이름 그대로 향수(cologne) 냄새가 났다. 반면에 미국에서는 제일 괜찮다는 도시라 해도 공원에 오줌 냄새가 진동을 한다.
32. 내가 만약 더 오래 일해서 돈을 더 많이 벌어들이면 좋을까? 그렇지 않다. 내 생활의 많은 부분이 그만큼 희생됨으로써 ‘기회비용’도 더 커지게 된다. 이를테면 돈을 벌 욕심에 노동시간을 늘리고 취리히 여행을 포기하는 것이다. 다른 예를 들어 보자. 임금이 올랐어도 내 생활은 더 나빠질 수 있다. 주변 사람들과 소득 차이가 더 벌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게 무슨 대수냐고? 내가 많은 소득을 올릴수록 상대적인 빈곤을 심화시키는 결과를 낳을지 모른다. 내가 속한 공동체를 살기 팍팍한 곳으로 만들 수도 있다.
보수파 싱크탱크인 카토연구소의 연구원들은 “미국에서 못살겠다고 하는 사람도 1인당 GDP상으로는 그렇지 않다. 뭐가 문제인가?”라며 입에 침 튀기며 떠들어 댈 것이다. 그러도록 내버려 둬라. 논쟁을 해서 이길 생각은 없다. 하지만 그들이 다 떠들고 나면 밖에 데리고 나가서 주변을 한번 둘러보게 할 참이다.
돈을 더 많이 벌려고 애쓸수록 우리의 삶의 질은 하락한다. 유럽의 연평균 노동시간은 1500시간 정도이다. 이에 비해 미국의 연평균 노동시간은 1800시간이다. 하지만 실상을 따져 보면 대부분의 노동자들이 2300시간 이상을 일한다. 이렇게 2300시간 이상을 일해서 1인당 GDP가 상승하고 나면 다음과 같은 상황에 맞닥뜨리게 된다.
6주의 휴가가 없다. 사무실 이외의 장소에서 커피 한잔 마음 놓고 마실 시간 여유가 없다. 제비꽃이 만발한 강둑을 거닐면서 한가롭게 맑은 공기를 마실 수 있는 도시가 없다.
겉으로 드러난 것만 보면 미국은 엄청난 선진국처럼 보인다. 그러나 좋아하지 마라. GDP 증가분의 3분의 2 이상이 부자에게 돌아갔다. 예를 들어 2005년 미국 생산직 노동자의 시간당 실질임금은 1973년에 비해 약 8퍼센트 하락한 반면 시간당 산출량은 55퍼센트 상승했다. 따라서 1989년 이후 미국인 대부분의 실질구매력이 단 한 푼이라도 늘었는지 모르겠다. 미국의 1인당 GDP가 유럽보다 높다 해도 실제로는 속빈 강정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반면에 유럽 각국의 경우 미국보다 1인당 GDP 수준이 낮지만 ‘중산층’은 교육, 의료보험, 제비꽃이 만발한 도시 등 공공재를 무료로 향유할 수 있다. 이런 것까지 집어넣어 순구매력 기준 1인당 GDP를 따져 보면 어떻게 될까? 실질적으로 유럽이 높다고 해도 반박할 사람이 없을 것이다.
미국에는 노동시간이 천차만별이기 때문에 이 ‘평균’에 담긴 의미를 주의해서 생각해야 한다. 나 같은 변호사나 맥도널드 매장에서 3교대로 일하는 청소년 등 빠듯하게 살아가는 미국인들은 사실 ‘평균’보다 훨씬 더 오래 일한다. 또 평균 이하로 일하면서 천문학적인 돈을 버는 사람들도 부지기수이다. 솔직히 말해서 미국에 널려 있는 수많은 ‘사장님’의 힘이 어디에서 나오겠는가? 1년에 2300시간 가까이 죽도록 일하는 사람들에게서 나오는 것 아닌가?
유럽은 어떨까? 결코 이런 일이 있을 수 없다. 노동조합이 장시간 노동을 가만히 내버려 두지 않기 때문이다.
38. 나는 유럽이 ‘조세 피난처’라고 생각한다. (…) 바꿔 말하면 미국인은 세금을 덜낸 것에 훨씬 못 미치는 혜택을 받지만, 유럽인은 세금을 더 낸 것 이상의 복지 혜택을 돌려받는다.
45. (첫 프랑스 여행) 1977년 5월 일주일 동안 짐과 함께 난생처음 프랑스로 여행을 갔다. 혼자 외롭게 배낭여행을 하다 글래스고에서 포기하고 어머니가 공항에 마중 나왔던 그 짐 말이다. 그렇게 생고생을 했는데 짐은 왜 또다시 유럽여행을 떠났느냐고? 나와 함께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외롭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우리는 같은 밧줄에 묶인 산악 등반가였다. 함께 다니면 공항으로 각자의 어머니가 마중 나오는 불상사는 막을 수 있을 듯했다.
하지만 파리 여행 첫날에 짐은 어떤 여자를 만난 뒤 나를 팽개쳤다. 지금도 그애가 눈에 선하다. 미국인이고 출판사 집안의 딸이었으며 무언극을 공부하러 그해 여름 파리로 왔다고 했다. 무언극을 배우는 게 프랑스어를 공부해야 하는 부담감에서 벗어나는 그녀만의 방법이 아니었을까.
48. 파리는 어떨까? 물론 파리에서는 우리 시대의 뛰어난 성과라고 할 만한 일이 진행되고 있다. 즉 생활수준이 향상하고, 인간 역사의 그 어떤 시대보다 더 사람들이 존엄성을 유지하며 장수를 누리게 되었다. 그러나 이런 것은 기사거리가 되지 못한다. 그림물감이 마르는 과정을 지켜보는 것과 같다. 설령 그 그림이 루브르 박물관에 전시된다고 해도 누가 마를 때까지 지켜보겠는가?
51. 헤밍웨이는 이런 광경을 보지 못하고 죽었다.나도 무척 아쉬움이 남는다. 내가 만약 지금 스물일곱이라면 프랑스인을 사귈 수 있을 텐데. 프랑스에 간다 해도 대화에서 소외되지는 않을 텐데. 하지만 이제 나는 너무 늙었다. 아! 27세로 되돌아가 다시 파리에 갈 수 있다면! 프랑스인을 만날 기회가 한 번만 더 있다면! 혼자 밖에 나가 <이동하는 축제>의 페이지를 휙휙 넘기며 “파리는 항상 나와 함께할 거야.”라고 중얼거리지 않을 텐데. 아무튼 헤밍웨이도 그렇고 나도 그렇고 프랑스인을 사귀지 못했다.
55. “미국의 경우 가난한 사람이 많으므로, 결혼을 고민하는 여자라면 남자의 소득을 물어봐야 한다. 자식을 굶기지 않으려면 그렇게 해야 한다. 전체 아동 중 빈곤 아동의 수가 4분의 1 가까이 되는 현실에서는 그러는 게 정상이 아닌가?”
그러나 정부에 가정을 꾸리는 본능을 충족시켜 달라고 당당하게 요구할 수 있는 프랑스 여성은 미래의 남편이 돈을 얼마나 버는지 신경을 곤두세울 필요가 별로 없다. 최소한 록 음악 평론가와 만나 데이트를 할 여유는 있다. 왜냐고? 자녀 양육비를 지원받을 수 있으니까. 보육 시설도 더 좋으니까. 교육비? 당연히 무료니까.
60. (…) 나는 미국 여자와 이야기를 나눌 수 잇었다. 우리 네 사람은 합석하기로 했다. 하느님, 감사합니다@ 해냈어요! 드디어 인간과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습니다!
이제 어머니는 나를 데리러 공항으로 나오시지 않아도 되리라.
63. 1980년에서 2000년, 혹은 1990년에서 2000년, 이런 식으로 10년, 20년 단위로 살펴보면 프랑스를 비롯한 유럽 각국의 정부는 재정 지원 항목을 꾸준히 늘려 왔고, 기존 항목에 대한 지원 역시 확장시켜 왔음을 알 수 있다.
64. 미국에서는 우리가 낸 세금의 일부만이 되돌아온다. 그 대부분은 민간부문으로 흘러간다. 사악한 민간 보험회사와 제약 회사, 그리고 응급 병원의 의사와 경영진의 수중에 들어가는 것이다. 이들은 모두 공공재가 되어야 하는 것을 중간에서 가로채 폭리를 취한다. 유럽인은 단순히 돈을 더 쓰는 게 아니다. 미국인과 달리 그들은 효과적으로 돈 쓰는 방법을 안다. 비효율적이라고 평가받는 독일의 의료보험도 관련 총비용이 GDP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11퍼센트에 지나지 않는다. 반면에 미국의 의료보험 관련 총비용은 GDP의 17퍼센트나 되지만 보험에 가입하지 않은 사람은 물론 보험에 가입한 중산층도 종종 혜택을 받지 못한다.
유럽의 시스템을 사회민주주의라고 부르는 것은 이처럼 공공재를 효율적으로 분배하기 때문이다.
69. 미국인은 힙합에는 관심이 많아도 헤겔 철학에는 관심이 없다고 하는 게 더 정확한 표현일 수도 있다. 헤겔 철학으로 무엇을 해야 하는지 모르는 탓이다. 이것은 영어를 말하는 것과 비슷하다. 우리는 언어를 사용한다. 그러나 오로지 영어 하나밖에는 모른다.
70. 아! 내가 만약 프랑스에서 살았다면, 아니 꼭 살지는 않아도 유럽인 친구가 있어서 빈번하게 오갔다면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아마 <리베라시옹>을 읽고 휴일을 꼬박꼬박 찾아 썼을 것이다. 여유를 누리면서 한결 느긋하게 살았을 것이다. 디처럼 책을 쓰는 데 열중했을지도 모른다. 또 일에 매달려 허우적대기보다는 일할 때와 일하지 않을 때를 가리는 법을 익혔을 수도 있다. 아무튼 파리에서 살았다면 나의 시간 개념은 지금과 상당히 달랐을 것이다. 헤겔과 힘합에 대해서도 깊게 따져 보았을 테고.
72. “진짜예요. 그런데 지금 살고 있는 아처 앤드 할스테드 근처에는 아무도 없어요. 노크를 하지 않고 내 방에 함부로 들어올 사람이 없는 거지요.”
누군가 총을 쏴서 문짝을 부수는 것으로 노크를 대신하지 않을까 심히 걱정되었다.
76. 유럽이 ‘헌법적으로’ 통합되고 값싸고 편리한 교통수단 덕분에 자유롭게 왕래하는 반면, 미국은 ‘헌법적으로’ 해체되는 중이다. 어느 도시건 교통 체증에 시달리지 않는 곳이 없다. 국가의 힘이 약해지고 구체적인 토지 이용 계획 같은 게 없으면 마치 바스티유 감옥에 갇힌 것처럼 답답하기 짝이 없는 미국인의 삶은 더욱 악화되기 마련이다. 시카고에는 저 멀리 미시시피강 상류 끝자락에서부터 출퇴근하는 사람들도 있다. 매일 시카고 순환도로까지 편도 2시간 30분이 걸리는 길을 운전한다. 왜 그럴까? “아이들을 위해서지요.”
이것은 미국의 사회 기반 시설이 붕괴되었음을 보여주는 징표이다. 시카고 도심에서 가까운 교외 지역, 특히 시카고 남부와 서부의 공립학교는 한마디로 난장판이다. 부모로서는 먼 곳으로 이사할 수밖에 없다. 자녀들이 대학에 가서 대출을 받기라도 하면 더 먼 곳으로 이사한다.
82. 도시계획과 사회 기반 시설이 부족한 탓에 미국인은 낭비하고 또 낭비한다. 바버라는 자가용으로 출퇴근하는 데 매일 두 시간을 꼬박 바친다. 왜냐고? 세금을 덜 내는 탓이다. 세금을 덜 낼수록 학교가 사라진다. 그래서 더 멀리까지 오가야 한다. 그곳의 학교마저 문을 닫으면 더더욱 멀리 오가야 한다. 낮은 세금 때문에 미국인은 계획이 사라진 혼돈의 삶에 빠져들지만 그 대신에 GDP는 마냥 올라간다. (…) 교통정체로 인해 GDP가 상승할수록 바버라의 삶은 열악해지지만 명목상의 1인당 GDP는 이사벨보다 높아진다.
84. 결국 한마디로 말해서 1인당 GDP를 상승시키는 동력이 삶을 즐기는 데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생명을 부지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데서 나온다고 할 수 있다.
(최상위층 중심의 경제 구조)
미국의 경제적, 사회적 불평등이 심각하다는 것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지만 바버라에게 불평등은 다른 방식으로 부과되는 세금과도 같다. 무엇보다 바버라에게 ‘가장 이득이 되는 상품’이 거래되는 시장을 위축시킨다. 누구든 자기와 소득수준이 비슷한 사람들이 많을수록 구매 조건이 더 유리해지는 법이다.
예컨대 유럽에서는 미국보다 이용료가 저렴하면서도 시설이 뒤처지지 않는 세련된 호텔을 찾기가 쉽다. 바버라처럼 교육 수준이 높고 먹고 살만한 사람들이 두터운 수요층을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유럽에는 하룻밤에 500달러나 쓸 수 있는 부자가 별로 없지만, 단돈 5달러도 아까워서 벌벌 떠는 밑바딱 계층도 찾아보기 힘들다. 유럽이 어느 면을 보든 미국보다 더 낫다고 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단적으로 말해서 유럽 제품을 보라. 조잡한 게 있는가? 유럽에서는 이사벨처럼 품질을 앞세우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에 제품 수준이 높다.
그러나 바버라가 이사벨처럼 자기 취향을 살리며 미국 땅에서 살아가려면 돈이 훨씬 더 많이 든다. 왜 그런가? 미국은 유럽과 달리 최상위 부자 중심으로 생산 및 소비구조가 짜여 있다. 바버라가 자기 취향에 어울리는 부르주아적 생활 방식을 추구하려면 그들을 따라할 수밖에 없다. 규모의 경제를 실현하기 어려워 가격 대비 품질이 뛰어난 제품이 시장에 나오지 않기 때문이다. 이뿐이 아니다. 최상위 부자들은 자기들보다 못사는 사람들의 자식이 다니는 것을 막으려 유명 사립고등학교나 사립 대학교의 수업료가 치솟게 만든다. 그래서 바버라가 자녀를 좋은 학교에 보내려면 엄청난 학비를 부담해야 한다.
미국 모델에서 빈곤층은 물론 바버라와 같은 최상위 부자 밑의 계층이 감수해야 하는 손해는 이것만이 아니다. 최상위 부자는 부유하기에 알게 모르게 누리는 혜택이 많고 자기들만의 다양한 모임에서 양질의 정보를 주고받을 수 있다. 결국 그들이 돈 벌 기회를 독점하게 되는데, 그 피해는 고스란히 바버라 같은 그 밑의 계층이 떠안는다. 전문직에 종사하는 바버라 역시 나름대로는 상류층에 속하나 시간이 지날수록 최상위 부자와는 멀어진다. 불평등이 심화되는 것이다. 이런 식의 불평등은 미국 모델에서 우연히 나타나는 측면이 아니라 본질적인 측면이다. 미국 모델에서는 바버라와 같은 엘리트도 온갖 불이익을 감수해야 한다. 바버라의 1인당 GDP 수준이 높다고 하지만 황폐해지는 사회 기반 시설, 교도서 경비원, 경찰관, 민간 경호원처럼 곳곳에 널린 상비군, 점차 심해지는 빈부 격차 등에서 기인하는 ‘악성 GDP’가 그녀의 삶에 장애물로 작용한다. 악화가 양화를 구축하듯이 바버라가 미국에서 쌓아올린 ‘악성 GDP’는 이사벨이 사회민주주의 사회에서 누리는 양성 GDP’ 또는 ‘즐거운GDP’를 구축한다.
86. (도박이냐 장시간 노동이냐) 더 안 좋은 것은 미국의 GDP가 월스트리트의 다양한 금융업, 각종 투기업 등의 도박에서 창출되고 있다는 점이다.
95. (국가가 책임지는 유럽, 개인이 책임지는 미국)
이사벨은 바버라보다 소비자로서 더 나은 삶을 사는데 그 이유를 정리하면 이렇다. 첫째, 세금을 많이 낸다. 둘째, 국가가 그녀의 지출을 관리해준다. 이사벨은 바버라보다 세금을 더 많이 내기 때문에 돈을 더 아낄 수 있다. 역설적으로 들리겠지만 사실이다. 유럽식 사회민주주의는 일정한 방식으로 개인의 소비지출 방향을 안내한다. 국가는 이사벨에게서 세금을 거둬들인 후 그녀가 정말로 필요한 것을 제공하는 데 사용한다. 국가는 이사벨을 위해 무엇을 ‘구입’해 줄까? 퇴직연금, 의료보험, 교육, 대중교통, 보육.
국가는 이사벨에게 이런 공공재를 대량으로, 그리고 대단히 효율적인 방식으로 구입해 준다. 세금을 내면 상당 부분 걱정이 덜어지므로, 이사벨은 남은 돈을 여유 있게 쓸 수 있다.
103. 이것이 사회계약이고 유럽식 거래이다. 이사벨처럼 부유한 사람들은 공적 연금, 무료 의료보험이 원활히 굴러갈 수 있도록 많은 세금을 납부하고 그 아래 계층의 다수의 유럽인 이사벨이 오페라를 관람하는 비용을 얼마간 보조해 준다.
말하자면 이런 논리이다. “당신이 여가를 즐겁게 보내게 해 줄 테니 당신도 우리가 여가를 즐겁게 보낼 수 있게 해 줘.” 독일 금속노동조합의 조합원은 오페라를 관람하고 사회 엘리트층은 헤비메탈이나 록 음악 공연을 감상하는 데에도 다 논리적 근거가 있다. 유럽에서는 결국 사회 구성원 모두 자기가 원하는 유형의 사회정의를 누리는 셈이다.
경제사학자 니얼 퍼거슨은 이렇게 묻는다. “사람들은 왜 자기가 하고 싶은 것에 자기 돈을 쓰는 대신 서로 교차 보조하는 것일까?” 이론적으로 볼 때 이 스코틀랜드 경제사학자에게 교차 보조란 말이 안 되는 일이다. 그러나 그것은 일종의 방위조약과 같이 사람들을 하나로 결속한다.
104. 유럽인은 예술을 공공재로 여긴다.
(…)사회민주주의 사회에서는 록 음악을 하는 예술가조차 사회 안전망 안에서 안심하고 활동할 수 있는 것이다.
108. 그렇다면 유럽의 일자리 사정이 미국보다 훨씬 나은데도 왜 유럽의 똑똑한 젊은이들이 맨해튼은 물론 캠브리지와 팰러앨토에 몰려올까?
위험을 무릅쓰기 좋아하는 알파형 인간은 미국 사회의 고위험 고수익에 매력을 느끼기 때문이다. 미국은 유럽에서 살아가는 게 따분하다고 생각하는 저돌적이고 출세 지향적인 사람들을 빨아들이는 마력 같은 게 있다. 달리 말해서 부와 욕망을 추구하기에 안성맞춤인 곳이다. 미국은 재벌을 꿈꾸는 사람들과 그들의 BMW를 실은 화물차를 얼마든지 받아들일 수 있다. 전 세계의 부 사냥꾼을 빨아들이는 것이다. 그와 동시에 그 먹잇감이 되기에 딱 좋은 사람들도 빨아들인다.
하지만 바로 이런 현상 덕분에 이사벨의 삶의 질이 더 나아질 수 있다. 부 사냥꾼이 미국으로 몰려드는 한 독일과 프랑스는 유화적이고 관대한 삶의 방식이 지배하는 나라가 된다. 이사벨이 더 안전하게 잘 살 수 있는 이유를 알겠는가?
133. 고비용 구조인 오늘날의 독일이 어떻게 국제적으로 경쟁력 잇는 제품을 그렇게 많이 생산할 수 있는 것일까? 노동비용 절감 경쟁이 치열하게 벌어지는 ‘평평한 세계’에서 독일 경제는 왜 전보다 더 잘나가는 것일까?
134. 다시 한 번 묻겠다. 독일 경제가 경쟁력을 유지하는 비결은 무엇인가? 독일 기업은 미국 기업과 달리 비용 경쟁에서 이기겠다는 헛된 생각을 품고 있지 않았기에 경쟁력을 더 높일 수 있었다.(그래서 유로화가 상승해도 버틸 수 있다.) 또 미국식으로 노동조합을 분쇄해야 중국 등과의 경쟁에서 이길 수 있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 스웨덴, 프랑스, 독일 등 고임금 구조를 유지하는 사회민주주의 국가가 미국이나 영국보다 산업 경쟁력이 더 앞선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영국과 미국, 신자유주의자, 그리고 <이코노미스트> 등 대부분의 언론은 1970년대에서 90년대에 이르는 동안 유럽의 사회민주주의자들을 조롱했다. “노동조합을 파괴하는 게 좋을 거야. 그래야 산업을 살릴 수 잇으니까.” 미국과 영국이 바로 그렇게 했다. 비용 면에서 경쟁력을 지녀야 한다면서 노동조합을 파괴했다. 그 결과 어떻게 됐냐고? 단기간 내에 산업 기반이 완전히 무너지고 말았다.
그러나 독일, 스웨덴, 프랑스는 그들의 충고를 귀담아 듣지 않았다. 노동조합을 무력화하지도 않았다. 대신에 높은 노동비용의 부담을 이겨내기 위해 ‘고부가가치’ 제품 중심으로 산업구조를 재편해 나갔다. 독일은 어느 부문에서 경쟁력이 있을까? 최고 수준의 기술을 보유한 기술자가 만드는 첨단 정밀기계 제품에 강점이 있다. 미국인은 독일 이야기가 나오면 “실업률이 어떻지?”라고 묻는다. 아무도 “노동력이 얼마나 부족하지?”라고 묻지 않는다. 사실 2008년 금융 위기가 시작될 시점에도 ‘세계화’의 열풍에 힘입어 독일은 고숙련, 고임금 일자리를 채울 유능한 엔지니어가 심각할 정도로 부족했다. 이와는 정반대로 미국에서는 제아무리 실력 있는 엔지니어도 일자리를 찾지 못해 아우성치다가 결국에는 영업탓에 엔지니어가 마음 놓고 일할 일자리를 창출해 낼 능력이 없다. 그 때문에 역설적인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 노동비용이 높은 독일은 제조업 경쟁력이 더 강화되는 반면 노동비용이 너무 낮은 영국과 미국은 제조업을 버리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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