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의 나라로 불리는 인도에서는 그 명성에 걸맞게 소유와 존재에 대해 생각해 볼 일이 간간이 발생했다.
인도 콜카타에서 운이 좋게도 영제와 내게 고아원에서 일주일간 지낼 기회가 생겼다. 아쉬람 고아원은 한국인 선교사님이 운영 중인 고아원이다. 오전에는 고아원 보수 작업을 돕고, 오후에는 학교에 다녀온 아이들과 놀다 보면 하루가 뉘엿뉘엿 저물었다.
하루의 마무리가 샤워에서 오는 나는 알고 보면 깔끔한 면도 있는 남자다. 내게 샤워는 하루를 마무리하는 의식(촛불 켜고 하는 건 아니니 오해는 마시라). 의식이라 생각한다면 장소도 나름 중요할텐데 고아원의 샤워장은 '몸을 씻는다'는 본질적 철학은 공유하고 있으나 보통의 상상과는 다른 ‘장’이 눈앞에 펼쳐졌다.
그 샤워장은 세 개의 콘크리트벽과 한 개의 수도꼭지를 의미했다. 명도 30%의 흐릿한 조명은 반경 1미터 너머로는 어둑하게 보이는, 그래서인지 뒤에 뭔가 서있는 건 아닌가 싶은 은근한 분위기를 연출해주었다. 수도꼭지는 허리 정도 높이에 있어 무릎을 꿇고 샤워를 했는데, 그 덕인지 왠지 경건해지는 기분도 들었다.
어쨌든 그날도 평소와 같이 샤워를 마치고 몸의 물기를 닦고 있을 때였더랬다. 오늘 하루도 지나가는구나. 고생했다. 따위의 생각을 하다가 문득 위를 쳐다봤다. 머리 위에서 거미 두 마리가 신 나는 댄스파티를 열고 있었다. 영역 다툼인지 짝짓기를 위한 매력발산인지는 모르겠지만, 거미들은 엄지손가락 마디만 한 덩치로 점핑을 하고 있었다. 그 결에 거미줄도 출렁출렁. 정적 속에 펼쳐지는 무반주 바운스. 나는 곤충을 잘 모른다. 다행히 그 친구들은 한국에서도 흔히 보던 친구들이었다. 남성이라는 게 상대적인 개념은 아니겠지만, 나의 남성성은 주변에 여성이 없다면 굳이 흔적을 보이지 않는 예의바른 친구다. 나는 잠시 그들을 바라보고 서 있었다.
그래 냉정하자. 나는야 마초남. 이 거미들한테는 내가 오히려 공포의 대상(일 것)이다. 최소한 독은 없(을 것이)다. 마음을 추스르고 자기최면을 걸고 싶었다. 갑자기 어디서 온 건지 알 수 없는 또 한 마리 거미가 나타났다. 댄스파티 현장은 순식간에 아쉬람 샤워장배 댄스 배틀이 되었다. 고요했던 바운스 현장. 뭉크의 <절규>가 떠오른다. 무너져가는 자아의 자락을 붙잡으며 나는 생각했다.
왜 내 옷은 이 거미들 옆에 걸려있는가. 옷이란 무엇인가. 사람은 옷을 꼭 입어야 하는가.
아, 인도는 역시 철학의 나라.
고아원에 들어가면서 일주일간 한국과 연락이 끊겼다. 그때 부모님은 내가 쓴 유서를 보셨다.
여행을 준비하면서 여러 가지 물건들을 샀다. 노트북, 카메라, 신발 등. 물건들을 사면서 어차피 잃어버릴 물건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 번쯤 강도를 당하지 않을까? 강도를 당할 때까지 내가 잠시 맡아서 사용할 뿐, 내 물건이 아니라고, 연연하지 말자고 생각했다.
그렇게 물건을 사던 중, 그러고 보니 여행 중에 나도 죽을 수 있는 거 아닌가? 라는 생각에 이르렀다. 고등학생 때 땡볕에서 구보를 뛰다가 탈수증이 온 적이 있었다. 그때 ‘아, 사람이 이렇게 죽는구나’라고 생각했던 적 이후로 죽음이 이렇게 진지하게 다가온 건 처음인 것 같다.
울컥하는 마음에 부모님께 유서를 썼다. ‘두 분이 이 글을 읽으실 때쯤이면 저는 지금… ’ 으로 시작되는 편지. 비장한 마음으로 공책을 펼쳐 끄적거렸다. 눈물이 찔끔. 운이 썩 좋았던 인생이었구나 라는 생각.
하지만 결국 그 유서는 미완성에 그쳤다. 유서를 깔끔하게 편지지에 옮겨 적어 집에 있는 짐 속에 넣는다. 행여 내게 무슨 일이 생기면 짐을 정리하던 부모님이 그 유서를 발견한다.는 게 원래 계획이었다. 그런데 그만 그 북받쳤던 마음이 너무나 급속히 시들해져버렸고, 결국 쓰는 게 중단된 그 유서의 존재조차 나는 까먹어버렸다.
나는 그 유서가 되다만 문장이 적힌 공책과 함께 여행을 다녔다. 공책은 태국쯤에서 다 쓰여졌고 먼저 한국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썼다는 것도 까먹고 있었던 그 편지가 마치 고대 유적이 발견되듯 부모님의 손에 발굴이 된 것이다. 그러니까 그 유서는 애당초 읽혀서는 안돼는 유서였던 것이다. 연락 두절 상태에서, ‘두 분이 이 편지를 읽으실 때쯤이면 저는 지금…’으로 시작되는 유서를 부모님이 받았으니 매우 놀란 건 당연한 반응일 것이다.
살아오면서 썼던 편지 중 생각만 해도 찢어버리고 싶은 편지가 있다. 짝사랑했던 여자애에게 썼던 편지, 훈련소에서 친구들에게 썼던 편지. 그리고 그 유서. 하지만 여행을 나오기 전에는 그랬다. 죽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만약 길 위에서 죽게 된다면 내 명은 그곳까지인 것으로 생각하기로 했다.
한국에 돌아오고 얼마 뒤 어느 모임에 나갔다가 '세상에 무엇을 남기고 싶은가'라는 질문을 받았다. 치킨을 먹던 중이었다. 치킨 앞에서 입을 먹는 데 외에 쓰는 건 죄악이다. 나는 대답을 얼버무렸다. 집에 돌아오는 길, 치킨 맛은 잊혀졌지만, 질문은 잊히지가 않았다. 나는 세상에 무엇을 남기고 싶을까.
나라는 사람이 이 세상에 있다는 건 이 우주 어딘가 나라는 조각으로 채워질 시간과 공간이 있기 때문이지 않을까는 생각을 한다. 그렇다고 그게 죽기 전까지 뭔가 완성된 결과물을 이 세상에 남겨야 된다는 뜻은 아닐 것 같다. 인간이 살아야 하는 확실한 목적 따위가 존재한다면 인간은 또 그 목적의 노예가 될 테니까. 강제적인 의미에 의해서가 아니라 나는 내 자유 의지로 내 인생을 살고 싶다. 하루하루가 충만하다면 무언가 남기지 않더라도 삶은 그것만으로도 충분하지 않을까.
처음 여행기를 쓰자고 결심한 이유는 사실 여행을 통해 얻은 결과를 남기고 싶어서였다. 지금은 아니다. 여행이라는 과정 자체를, 마음에서 돋아나는 무언가를 발견하고, 망치기도 하고, 하나의 생각을 더듬더듬 짚어가고, 길을 찾아가는 과정 자체를 쓰고 싶다. 여행이란 무엇이다라고 정해져 있는 게 아니라, 각자의 삶에서 울타리를 벗어나보는 과정이므로. 그렇기에 세상에 똑같은 여행 따위는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결국 말하고 싶은 건 ‘여행의 과정’이지, ‘여행의 방법’이 아니다.
오스트리아 출신의 사상가 앙드레 고르는 인생 말년에 이런 말을 했다. "모든 것을 다 말한 뒤에도 여전히 모든 것은 아직 말해져야 하는 상태로 남아있다. 언제나 모든 것은 아직 말해져야 하는 상태로 남을 것이다." 내가 지나온 모든 시간과 공간들을 다 말할 수 있을까? 아마 그럴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해해주길. 우리는 이미 지나간 시간보다 앞으로 다가올 시간에 마음이 끌리는 존재이므로. 우리에게는 오늘이라는 시간이, 다시 시작해야 할 과정들이 있으므로. 모든 것은 여전히 말해져야 하는 상태에 남아있을 것이므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