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꿈치 사회

저자
강수돌 지음
출판사
갈라파고스 | 2013-04-09 출간
카테고리
정치/사회
책소개
경쟁이 어떻게 우리 시대를 지배하는 최고의 가치가 되었나? 끊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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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이런 복합적 문제를 과연 어디서부터 따져나가야 돌파구가 보일까? 세상의 모든 일은 결코 우리의 일상과 무관하지 않다. 따라서 우리가 매일 경험하는 일과 삶, 학교와 직장, 사회와 역사에 대하여 그 근원을 캐묻고 본질을 파악하기 시작하면 서서히 삶의 진실이 보이기 시작한다. 삶의 진실을 깨닫고 나면 지배층이나 기득권층이 우리에게 강요하는 이데올로기나 세뇌교육의 본질이 드러나고 만다. 사람답게 살고 싶은 우리의 열렬한 소망은 바로 이 과정을 거친 뒤에 비로소 가능하다. 허상을 벗겨내고 진실 위에 새로운 대화와 토론을 시작해야 한다. 그 과정에서 사람도 바꾸고 제도도 바꾸고, 그리하여 전체 삶의 구조도 바꾸어야 한다. 결코 쉽진 않지만, 이것이 바른 길이다.

이 책은 우리가 굳게 내면화하는 경쟁의 논리를 근본적으로 되짚어보고, 일과 삶, 학교와 직장, 사회와 역사를 완전히 새로운 논리 위에 재구성해야 함을 강조한다. 80년 정도 지속되는 인생 여행, 그것을 마감할 무렵 그간 헛된 삶을 살았노라고 후회하지 않기 위해서 지금부터라도 삶의 본질을 제대로 알아야 한다. 내가 진심으로 원하는 것은 그 어떤 이데올로기나 권력이 아니다. 내가 진심으로 원하는 것은 더불어 사는 행복한 사회다. 이 책이 모든 개인에게, 그리고 우리 사회에 전반적으로, 삶을 새롭게 접근해 가는 데 좋은 길잡이가 되길 바랄 뿐이다.

21. 탈락과 배제에 대한 공포가 우리를 짓누른다. 비정규직은 정규직이 되려고 또는 비정규직이라도 유지하려고 눈치를 보고 스트레스를 참으며 일한다. 정규직은 잘리지 않으려고 또 비정규직으로 전락하지 않으려고 윗사람에게 잘 보여야 한다. 노동시간은 자연히 길어지고 노동강도는 절로 높아간다. 그 사이에 부모와 자녀, 부부 사이, 동료 사이, 이웃 사이의 친밀한 소통과 유대 관계는 모래알처럼 낱낱이 부서진다.
 서양에서는 기존의 공동체적 관계망이 해체되면서 그나마 국가 복지 체제나 강력한 노동조합 체제가 개별 노동자들의 삶에 보호막이 되었다. (…) 한국의 경우 해방 이후 폭력적인 후발 산업화 과정에서 복지국가나 강한 노조가 등장하기도 전에 기존의 공동체적 관계망이 체계적으로 해체되었다. 그런데다가 이제 신자유주의 세계화 파도가 거침없이 들이닥친다.

22. 한국사회에서는 일단 직장에서 쫓겨나면 곧 ‘죽음’이란 의식이 더욱 팽배하다. 직장 생활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딴 생각’말고 죽은 듯 일해야 하는 상황이다. 기업이 직면한 치열한 경쟁 압박이 개별 노동자들에게 그대로 전가된다. 노동자들은 생존의 두려움 앞에서 경쟁을 내면화하고 만다. 심지어 일중독에 걸려도 일중독인 줄도 모르기 일쑤다. 바로 이것이 한국이 자랑하는 세계 최고의 장시간 노동이라는 수수께끼를 푸는 한 열쇠다.

31. 요컨대 오늘날 우리가 일에 대해 일정한 지향성을 갖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일이 우리에 대해 일정한 지향성을 강제하는 셈이다. 겉으로는 우리가 일에 대한 가치관을 자유로이 선택할 수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우리가 일에 대한 가치관을 강요받는다. 필요에 따라 일하기보다는 거꾸로 일의 필요에 따라 우리가 끌려 다니며 일한다. 그 와중에 굳이 우리가 일에 대해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면, 그것은 일이 우리 내면의 고통이나 두려움을 회피할 수 있는 ‘도피처’ 내지 ‘망각제’ 역할을 한다는 점이다.
일중독 문제나 중독사회의 문제에 애해 A.W.셰프는 이렇게 말한다. “내가 늘 끊임없이 반복되는 집안일에 묻혀 바삐 지내는 것은 실제 그 일들이 꼭 해야 할 일들이기 때문이라기보다 내 스스로 바쁠 필요성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는 스스로 자기 내면 깊은 곳을 들여다보는 것을 두려워해 왔다. 속을 들여다보았다가, 거기에 아무것도 없는 것을 확인하게 될까 두려웠기 때문이다.”

35. 이제 돈의 논리가 삶의 논리를 대신하고, 마침내 삶 그 자체를 지배하게 된다. 그리하여 경제가 사회를 압도하고 병합해버린다. 이것을 범지구적으로 추진하는 움직임이 바로 신자유주의 세계화요, WTO요, FTA다. 안타깝게도 소수의 지배 엘리트들과 그를 추종하는 대다수 대중들은 “대세를 거스를 수 없다”고 하며 현실에 적응하기만을 강조한다.
 이렇게 전도된 현실을 우리가 바로잡고자 한다면, 사유와 노동의 이분법, 인간과 자연의 이분법, 경제와 사회의 이분법을 과감히 넘어서야 한다. 이 점과 관련하여 프랑스의 소설가 V. 포레스테를 상기해보자.

우리는 지금 위대한 속임수 속에서 살고 있다. 왜냐하면 이미 사라진 세계 속에 살고 있음에도 우리는 그 사실을 인정하려 들지 않을 뿐만 아니라, 세상은 온갖 정책을 동원하여 오히려 그 세계가 영원할 것이라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수백만 명의 운명이 바로 이 같은 시대착오적 사고 때문에 파괴당하고 소멸되었다. 그리고 이 시대착오적 사고는, 우리가 가장 신성시하는 한 가지 터부를 영원불멸한 것으로 제시하려는 끈질긴 책략에서 비롯되었다. 그 한 가지 터부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노동에 대한 터부다.

한마디로 노동을 더 이상 신성시하지 않아야 하는데 사람들은 여전히 이를 ‘신성시’하며, 나아가 고통스런 현실적 삶의 ‘도피처(쉼터)’로 삼는 것이 문제라는 것이다. 피비린내까지 풍기는 ‘신성한 쉼터’로서의 노동, 이것이 일중독 시대에 우리 대다수가 내면화해버린 노동관이다.

38. 일이 돈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는 것은 일이 일종의 마약, 즉 현실적 고통에 대한 진정제가 되거나 아니면 가슴을 들뜨게 하는 흥분제로 작용했음을 암시한다. 이것이 일중독 사회 속에 사는 우리의 솔직한 모습이다.

43. 그 결과 사람들은 일의 결과가 얼마나 좋은가와는 무관하게, 오로지 일 속에서 삶의 의미를 찾으려고 하는 ‘자기강제’를 하게 되고 자연히 실 노동시간도 길어질 수밖에 없다. 이 모든 현실은 경제와 사회가 이분법적으로 분리되었을 뿐만 아니라 마침내 사회가 경제 속에 합병된 결과, (돈이나 일에 의해, 즉 자본에 의해) ‘삶의 식민화’가 고도로 진척되었음을 말해준다.

44. 사유와 노동의 이분법을 넘는다는 것은 너도 나도 삶의 문제 해결에 이론가이자 실천가로 적극 나서야 함을 뜻한다. 더 이상 가정과 학교에서 “땅 파고 살지 않으려거든 공부해라”라고 강요하지 않는 사회를 만드는 것이다. 모든 이가 땅을 파면서도 땅의 철학자가 되는 감동적인 사회, 이것이 돌파구다. 그것은 지금의 수직적 사다리 질서를 수평적 원탁의 질서로 바꾸어야 가능하다. 그 출발점은 우리 마음속의 사다리 질서부터 걷어내는 일이다.
 인간과 자연의 이분법을 넘는다는 것은 한편으로 인간이 자연속으로 겸손하게 회귀함을 뜻하며, 다른 한편으로 ‘자연의 노동’을 적극 인정함을 뜻한다. 인간이 자연으로 회귀한다는 것은 자연의 순환고리 중 일부로 동참하는 것이며 따라서 그 순환에 들어가지 못하는 ‘쓰레기’를 더 이상 만들지 않음을 말한다. 자연의 노동을 적극 인정한다는 것은, 햇볕의 노동, 바람의 노동, 물의 노동, 흙의 노동, 미생물의 노동, 풀의 노동, 밀알의 노동, 나무의 노동을 인간의 노동과 동등하게 보는 것이다.

별들이 온 힘으로 굴러서 해는 떠오르고
화분에 작은 싹 하나도
매순간 심호흡으로 자기 생을 밀어 올린다.
(조향미, 그 나무가 나에게 팔을 벌렸다)

경제와 사회의 이분법을 넘는다는 것은 돈벌이 그 자체를 목적이 아니라 살림살이의 수단으로 되돌린다는 말이다. 아이들은 점수나 등수로 판단해서는 안 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한 사람을 직업이나 소득, 지위로 판단해서는 안 된다. 모든 사람을 사람 그 자체로 인정하며 살갑게 더불어 살 때, 비로소 경제 사회 이분법이 극복된다.

사유와 노동의 이분법, 인간과 자연의 이분법, 경제와 사회의 이분법을 과감히 넘어가는 길의 입구는 어디에 있을까? 그것은 아마도 우리 자신 안에서 분리된 내면과 외면을 다시금 통일하는 데 있다. 참된 자아와 다시 접촉하는 것이다. 내가 살아 있다는 것이 무엇인가, 내 내면에서 꿈틀거리는 것이 무엇인가, 무엇이 나의 참된 행복인가, 무엇이 삶의 기쁨이요, 존재의 기쁨인가? 이런 질문에 답하려면 결국 외피에 가려진 내면의 진실을 찾아야 한다.
 그런데 참된 자아는 과연 이 세상과 독립적으로 존재할까? 그렇지 않다. 우리는 나 홀로 가면서도 더불어 가는 존재다. 또 더불어 가면서도 나 홀로 가기도 한다.
 ‘같이 또 따로, 따로 또 같이’ 존재하는 것이 우리의 실존이 아닐까? 소유양식이 아닌 존재양식의 삶을 강조한 에리히 프롬, 라다크 마을이나 남태평양 아누타 섬, 그리고 북미 원주민들이 가졌던 ‘확장된 자아’의 삶, 사람을 관계적 존재로 보자는 신영복 선생의 시각도 바로 이런 점에서 일맥상통한다. 우리가 좁은 의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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