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 아쉬람 고아원에서 지낼 때의 일이다.

그날은 고아원의 오랜 숙원 사업이었던 모래 운동장이 만들어진 날이었다. 고아원에는 넓은 공터가 있었다. 그곳이 운동장 구실을 해왔지만, 흙으로 돼있어서 물이 잘 빠지지 않았다. 콜카타는 비가 자주 오기 때문에 운동장은 진흙 탕이 되기 일쑤였다. 그래서 선교사님은 이 사업을 오랫동안 구상해 왔던 것이다. 

‘이게 강가에서만 구할 수 있는 모래인데, 건축용으로는 못 쓰일 정도로 입자가 너무 고운 거야. 그래서 물이 잘 빠지지. 내가 이걸 구하려고 …’ 로 시작하는 일련의 설교를 매일 들었다. 그래서 그 모래가 일반 모래랑 뭐가 다른 건지 난 도통 모르겠는데, 마침내 그 모래가 운동장에 깔린 것이다.

운동장 단장 기념으로 그날 고아원의 모든 아이들이 멀리뛰기, 땅따먹기 등의 게임을 했다. 그리고 이내 우리는 축구를 하게 되었다. 축구! 어린시절이 아련하게 떠오른다. 피구왕 통키 시절 동네에서 똥볼 좀 찼던 내가 아니던가. 볼만 있어서 외로웠던 내가 아니던가. 잊고 있었던 어린 시절이 떠올랐다. 한편 현란한 축구 실력으로 아이들 속에서 빛나는 영웅이 된 내 모습도 그려졌다. 내 실력을 보여주마……. 

하지만 난 곧 이성을 되찾았다. 나는 어른이 아니던가. 그러고는 내가 봐도 어른스런 생각을 했다. 꼬맹이들 사이에 나(=어른)라는 불균형을 만들 수 없지. 나는 심판을 보기로 했다.

아이들은 생각보다 훨씬 잘했다. 냅다 차고 냅다 뛰는 동네 축구가 아니었다. 주고받는 패스가 있는 팀플레이 축구를 구사했다. 어느새 한쪽 팀이 18 대 8점이라는 농구 경기에서나 볼 법한 점수 차로 지고 있었다. 지는 팀 아이들에게 안쓰러운 마음이 들었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 이 녀석들 내가 섞어준 팀이 아니라 자기들 마음대로 팀을 바꿔서 경기를 하고 있었다. 그래서 실력 차이가 크게 났던 것이다. 이 괘씸한 녀석들. 나는 불의를 바로잡겠다는 마음이 들었고, 지고 있는 팀 선수로 들어갔다.

20분 후. 21 대 8…. 나(=어른?)는 애초에 이 경기에서 불균형의 요인이 전혀 될 수 없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분하다. 지고 있어 분하기도 했지만, 이런 와중에도 그만 쉬고 싶다고 생각하는 나 자신에게도 분했다. 그런데 아까부터 자꾸 내 앞에서 깐족깐족 까불거리는 꼬맹이가 또 깐족이는 게 보였다. 만화나 영화를 보면 주인공들은 대게 분노를 통해 더 강해지는 양상을 보인다. 내게 분노는 성장이라기보다는 진심으로 그 꼬맹이 얼굴에 궁서체 총알 슛을 날려주고 싶다는 마음이 들게 했다. 경기는 끝이났고 나는 그날 밤 방에 누워 생각했다. 나는 언제 어른이 되는걸까...

어느새 일주일이 지났고 고아원을 떠날 시간이 되었다. 헤어지던 날 아침, 영제는 결국 아이들을 울렸다. 

고아원에서 지내며 많은 일이 있었다. 손을 잡아주고, 안아주고, 미소 지어주고, 웃어주고, 바라봐주고, 함께 춤춰주고……아이들은 우리에게 많은 선물을 주었다. 고아원에 가서야 깨달은 사실은 베푸는 일은 내가 아니라 아이들이 해준 일이라는 것이다. 나라는 존재도 사랑이라는 걸 할 수 있다는 걸 깨달았다. 하지만 그 수많은 아이들을 지켜보고, 잡아주기에는 내 두 손과 두 눈은 부족하다는 것도 배웠다. 사랑 앞에 나는 작은 존재였다. 그렇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작은 것에서부터 사랑을 실천해야 한다는 걸 배웠다. 실천하는 사랑이야말로 진정한 사랑이다.

사람은 언제 성숙해지는 걸까. 단순히 나이를 먹는다고 성숙해지는 게 아니라는 것쯤은 나도 이제 안다. 실천하는 사랑을 통해, 나를 낮추고 깊어짐으로써 우리는 성숙을 더 해가는 게 아닐까. 어렸을 땐 ‘나'만 알던 아이가 ‘우리'라는 것을 알게 되듯, 인간은 ‘우리'라는 울타리를 넓혀감으로 더 큰 어른이 되는 게 아닐까. 그러므로 세상은 밝아지는 게 아닐까 생각이 든다.

위대한 사랑을 실천한 마더 테레사의 시 한 편을 붙인다.

한번에 한 사람씩

난 결코 대중을 구원하려고 하지 않는다.
다만 한 개인을 바라볼 뿐이다.
나는 한번에 단지 한 사람만을 사랑할 수 있다.
한번에 단지 한 사람만을 껴안을 수 있다.
단지 한 사람, 한 사람, 한 사람씩만…

따라서 당신도 시작하고
나도 시작하는 것이다.
난 한 사람을 붙잡는다.
만일 내가 그 사람을 붙잡지 않는다면
난 4만 2천 명을 붙잡지 못했을 것이다.

모든 노력은 단지 바다에 붓는 한 방울, 물과 같다.
하지만 내가 그 한 방울의 물을 붓지 않았다면
바다는 그 한 방울만큼 줄어들 것이다.
단지 시작하는 것이다.
한번에 한 사람씩


* 여행 비디오 보기
: 가슴과 가슴에 닿는 길-인도 고아원
http://www.youtube.com/watch?v=k2KijKQKTPA




박진균 선교사님




 



철학의 나라로 불리는 인도에서는 그 명성에 걸맞게 소유와 존재에 대해 생각해 볼 일이 간간이 발생했다. 

인도 콜카타에서 운이 좋게도 영제와 내게 고아원에서 일주일간 지낼 기회가 생겼다. 아쉬람 고아원은 한국인 선교사님이 운영 중인 고아원이다. 오전에는 고아원 보수 작업을 돕고, 오후에는 학교에 다녀온 아이들과 놀다 보면 하루가 뉘엿뉘엿 저물었다. 

하루의 마무리가 샤워에서 오는 나는 알고 보면 깔끔한 면도 있는 남자다. 내게 샤워는 하루를 마무리하는 의식(촛불 켜고 하는 건 아니니 오해는 마시라). 의식이라 생각한다면 장소도 나름 중요할텐데 고아원의 샤워장은 '몸을 씻는다'는 본질적 철학은 공유하고 있으나 보통의 상상과는 다른 ‘장’이 눈앞에 펼쳐졌다.

그 샤워장은 세 개의 콘크리트벽과 한 개의 수도꼭지를 의미했다. 명도 30%의 흐릿한 조명은 반경 1미터 너머로는 어둑하게 보이는, 그래서인지 뒤에 뭔가 서있는 건 아닌가 싶은 은근한 분위기를 연출해주었다. 수도꼭지는 허리 정도 높이에 있어 무릎을 꿇고 샤워를 했는데, 그 덕인지 왠지 경건해지는 기분도 들었다.

어쨌든 그날도 평소와 같이 샤워를 마치고 몸의 물기를 닦고 있을 때였더랬다. 오늘 하루도 지나가는구나. 고생했다. 따위의 생각을 하다가 문득 위를 쳐다봤다. 머리 위에서 거미 두 마리가 신 나는 댄스파티를 열고 있었다. 영역 다툼인지 짝짓기를 위한 매력발산인지는 모르겠지만, 거미들은 엄지손가락 마디만 한 덩치로 점핑을 하고 있었다. 그 결에 거미줄도 출렁출렁. 정적 속에 펼쳐지는 무반주 바운스. 나는 곤충을 잘 모른다. 다행히 그 친구들은 한국에서도 흔히 보던 친구들이었다. 남성이라는 게 상대적인 개념은 아니겠지만, 나의 남성성은 주변에 여성이 없다면 굳이 흔적을 보이지 않는 예의바른 친구다. 나는 잠시 그들을 바라보고 서 있었다.

그래 냉정하자. 나는야 마초남. 이 거미들한테는 내가 오히려 공포의 대상(일 것)이다. 최소한 독은 없(을 것이)다. 마음을 추스르고 자기최면을 걸고 싶었다. 갑자기 어디서 온 건지 알 수 없는 또 한 마리 거미가 나타났다. 댄스파티 현장은 순식간에 아쉬람 샤워장배 댄스 배틀이 되었다. 고요했던 바운스 현장. 뭉크의 <절규>가 떠오른다. 무너져가는 자아의 자락을 붙잡으며 나는 생각했다.

왜 내 옷은 이 거미들 옆에 걸려있는가. 옷이란 무엇인가. 사람은 옷을 꼭 입어야 하는가.
아, 인도는 역시 철학의 나라.

고아원에 들어가면서 일주일간 한국과 연락이 끊겼다. 그때 부모님은 내가 쓴 유서를 보셨다.

여행을 준비하면서 여러 가지 물건들을 샀다. 노트북, 카메라, 신발 등. 물건들을 사면서 어차피 잃어버릴 물건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 번쯤 강도를 당하지 않을까? 강도를 당할 때까지 내가 잠시 맡아서 사용할 뿐, 내 물건이 아니라고, 연연하지 말자고 생각했다.

그렇게 물건을 사던 중, 그러고 보니 여행 중에 나도 죽을 수 있는 거 아닌가? 라는 생각에 이르렀다. 고등학생 때 땡볕에서 구보를 뛰다가 탈수증이 온 적이 있었다. 그때 ‘아, 사람이 이렇게 죽는구나’라고 생각했던 적 이후로 죽음이 이렇게 진지하게 다가온 건 처음인 것 같다.

울컥하는 마음에 부모님께 유서를 썼다. ‘두 분이 이 글을 읽으실 때쯤이면 저는 지금… ’ 으로 시작되는 편지. 비장한 마음으로 공책을 펼쳐 끄적거렸다. 눈물이 찔끔. 운이 썩 좋았던 인생이었구나 라는 생각.

하지만 결국 그 유서는 미완성에 그쳤다. 유서를 깔끔하게 편지지에 옮겨 적어 집에 있는 짐 속에 넣는다. 행여 내게 무슨 일이 생기면 짐을 정리하던 부모님이 그 유서를 발견한다.는 게 원래 계획이었다. 그런데 그만 그 북받쳤던 마음이 너무나 급속히 시들해져버렸고, 결국 쓰는 게 중단된 그 유서의 존재조차 나는 까먹어버렸다.

나는 그 유서가 되다만 문장이 적힌 공책과 함께 여행을 다녔다. 공책은 태국쯤에서 다 쓰여졌고 먼저 한국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썼다는 것도 까먹고 있었던 그 편지가 마치 고대 유적이 발견되듯 부모님의 손에 발굴이 된 것이다. 그러니까 그 유서는 애당초 읽혀서는 안돼는 유서였던 것이다. 연락 두절 상태에서, ‘두 분이 이 편지를 읽으실 때쯤이면 저는 지금…’으로 시작되는 유서를 부모님이 받았으니 매우 놀란 건 당연한 반응일 것이다.

살아오면서 썼던 편지 중 생각만 해도 찢어버리고 싶은 편지가 있다. 짝사랑했던 여자애에게 썼던 편지, 훈련소에서 친구들에게 썼던 편지. 그리고 그 유서. 하지만 여행을 나오기 전에는 그랬다. 죽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만약 길 위에서 죽게 된다면 내 명은 그곳까지인 것으로 생각하기로 했다. 

한국에 돌아오고 얼마 뒤 어느 모임에 나갔다가 '세상에 무엇을 남기고 싶은가'라는 질문을 받았다. 치킨을 먹던 중이었다. 치킨 앞에서 입을 먹는 데 외에 쓰는 건 죄악이다. 나는 대답을 얼버무렸다. 집에 돌아오는 길, 치킨 맛은 잊혀졌지만, 질문은 잊히지가 않았다. 나는 세상에 무엇을 남기고 싶을까.

나라는 사람이 이 세상에 있다는 건 이 우주 어딘가 나라는 조각으로 채워질 시간과 공간이 있기 때문이지 않을까는 생각을 한다. 그렇다고 그게 죽기 전까지 뭔가 완성된 결과물을 이 세상에 남겨야 된다는 뜻은 아닐 것 같다. 인간이 살아야 하는 확실한 목적 따위가 존재한다면 인간은 또 그 목적의 노예가 될 테니까. 강제적인 의미에 의해서가 아니라 나는 내 자유 의지로 내 인생을 살고 싶다. 하루하루가 충만하다면 무언가 남기지 않더라도 삶은 그것만으로도 충분하지 않을까.

처음 여행기를 쓰자고 결심한 이유는 사실 여행을 통해 얻은 결과를 남기고 싶어서였다. 지금은 아니다. 여행이라는 과정 자체를, 마음에서 돋아나는 무언가를 발견하고, 망치기도 하고, 하나의 생각을 더듬더듬 짚어가고, 길을 찾아가는 과정 자체를 쓰고 싶다. 여행이란 무엇이다라고 정해져 있는 게 아니라, 각자의 삶에서 울타리를 벗어나보는 과정이므로. 그렇기에 세상에 똑같은 여행 따위는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결국 말하고 싶은 건 ‘여행의 과정’이지, ‘여행의 방법’이 아니다.

오스트리아 출신의 사상가 앙드레 고르는 인생 말년에 이런 말을 했다. "모든 것을 다 말한 뒤에도 여전히 모든 것은 아직 말해져야 하는 상태로 남아있다. 언제나 모든 것은 아직 말해져야 하는 상태로 남을 것이다." 내가 지나온 모든 시간과 공간들을 다 말할 수 있을까? 아마 그럴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해해주길. 우리는 이미 지나간 시간보다 앞으로 다가올 시간에 마음이 끌리는 존재이므로. 우리에게는 오늘이라는 시간이, 다시 시작해야 할 과정들이 있으므로. 모든 것은 여전히 말해져야 하는 상태에 남아있을 것이므로.







우리는 젊다는 이유 만으로,
청년이란 그 사실만으로,
아무 이유가 없어도
사회가 비난할 만한 큰 이상과 신념을 가져야 한다.
- 안준희 대표 -

무모한 꿈에 도전하라!
우린 실패조차 아름다운 ‘청춘’이다

청춘의 여행 바람이 부는 순간 오토바이 아프리카 세계 배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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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몽골에서 유목민들과 일주일을 지낼 때의 이야기(2)

유목민 집에 가기 전 나와 영제는 양을 칠 거라는 생각에 얼씨구나 신이 났었다. 하지만 인간지사 한치 앞도 모른다더니, 우리는 몰랐다. 먹구름이 꾸물꾸물 밀려오고 있음을…유목민 가족과 함께한 일주일은 처음부터 난항을 겪었다. 가족이 있는 곳은 몽골 중부 지역이었었는데, 수도인 울란바토르로부터 300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곳이었다. 약 6시간 버스를 타고, 2시간 자가용을 타고 들어가야 했다.

목적지에 도착하고 나서야 버스를 잘 못 탔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출발하던 날, 새벽같이 버스 터미널에 갔지만 우리가 타야 할 버스는 이미 출발하고 난 뒤였다. 우리는 그것도 모르고 그 버스를 찾았다. 떠나버린 버스표를 들고 돌아다니는 우리가 불쌍했는지 다른 버스 기사 아저씨가 그 근처를 지나가는 김에 우리를 태워준 것이었다. 하지만 그런 사실을 알리가 없는 우리. 기사아저씨는 우리에게 버스비를 달라고 했다. 우리는 고이 간직하고 있던, 하지만 오래 전에 쓸모가 없어진 버스표를 공손히 드렸다.

아저씨는 친절하게도 우리가 왜 돈을 내야하는지 모든 과정을 또박또박 설명 해주었는데, 역시 우리는 같은 기마민족이었어서 그런지 그 몽골말을 잘 알아들었을리 만무. 호구 인증을 받고 싶지 않은 두 벙어리와 친절하지만 몽골말 밖에는 할 줄 모르는 기마민족 아저씨(심지어 종이에 글을 써서 보여줬는데 그 조차 몽골어였다. 벙어리가 아니라고...) 어쨌든 게스트하우스 주인아주머니의 전화로 오해는 풀렸다. 아, 좋은 분들이셨군요. 바이를싸(고마워요)! 

역시 편히 집에 누워 텔레비전으로 보는 양치기와 현실의 양치기는 달랐다. 양을 치는 일은 절대 낭만스러운 일이 아니었다. '늑대가 나타났다.'고 거짓말을 치려 해도 주변 마을까지는 뛰어서 3시간이었다. 바람만 옴팡지게 부는 허허벌판. '겨우 일주일' 하고 갔는데, 게르에서의 첫날밤 나는 집이 그리웠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갓 입소한 군인의 마음.

당연한 말이지만 양에게도 입이 있어, 매일매일 풀을 먹여야 했다. 쉬지 않고 매일 먹으면 하루쯤 쉬어줄 법도 한데, 어제도 먹고 오늘도 먹었다. 풀을 먹이기 위해 게르에서 2~3킬로미터 떨어진 곳으로 이동해야 했다. 바이에르 뭉크에게는 대략 1,000마리의 양이 있었다.

양을 치는 방법은 단순했다. 양들은 ‘막대기를 든’ 사람이 다가가면 그를 피해 움직였다. 그리고 한 마리가 움직이면 곁에 있던 양들은 그 한 마리를 따라 모두 움직였다. 즉, 양 떼를 이동시키고 싶다면 뒤에 선 녀석을 앞으로 나아가게 하기만 하면 된다는 말이다. 한 가지 까다로운 점이 있다면, 양들은 앞서 가는 리더를 쫓는 게 아니라 분위기에 따라 수동적으로 딸려 간다는 점에서 발생했다. 뒤에 있는 양은 앞서 가는 양을 쫓아가고, 앞서 가는 양은 뒤에서 쫓아오니까 밀려가는 요상한 알고리즘.

그러니까 양들에게 방향 따위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러니 뒤에서 한 방향으로 밀어도, 최종적으로 전체에 전달되는 파급은 사방팔방, 우왕좌왕, 그야말로 난리법석이 됐다. 게다가 양은 200마리고, 양치기라고는 그 200마리를 뿔뿔이 흩어놓고, ‘내가 뭘 한거지?’를 묻는 얼치기라면 양 떼로도 개판을 만들 수 있는 거로구나를 깨닫게 된다.

며칠 관찰해본 결과, 양은 순종적인 동물이라기보다는 삶에 이유가 없는 동물이었다. 이리 몰면 이리 가고, 저리 몰면 저리 가고, 옆에 친구가 가면 따라가고, 살아가는 데에 먹는 것 외에 딱히 욕망이 없어 보였다. 요런 동물적 감각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녀석들이 어떻게 만 년을 넘게 살아남았을까.

나는 군대에서 7년을 지냈다. 군인 고등학교였던 것까지 더한다면 10년간 월급을 받았다. 매달 10일이면 월급이 들어왔다. 한 번쯤 틀릴 법도 한데 월급은 통장에 꼬박꼬박 정확하게 들어왔고, 나는 그게 참 신기했다. 돈이라는 걸 10년간 받아보니, 그건 적으면 적은 대로 많으면 많은 대로 언제나 적당히 부족한 물건이라는 걸 알게됐다. 그리고 돈에게는 마법과 같은 힘도 있어 많이 가질 수록 오히려 그 주인을 소유했다. 

언젠가 동물원에서 백수의 왕 사자를 본 적이 있다. 때마다 꼬박꼬박 밥을 먹는 사자를 보면서 과연 사자는 자기가 사자라는 것을 알까 궁금했다. 물론 남들이 너는 사자야라고 말해줘서 알 수도 있겠지만, 그런 모래성을 진정한 자아라고 할 수 있을까. 사자는 스스로 사자라는 걸 어떻게 증명할 수 있을까. 그건 그의 타고난 근육과 발톱을 써서 사냥을 하는, 즉 본연의 결대로 살아가는 모습을 통해서만이 아닐까.

타고난 결이 거세되었다는 점에서 그날 동물원에서 본 사자와 사슴은 다를 바가 없는 존재였다. 그리고 나 또한 그들과 다를 바가 없는 존재였다. 그때껏 나는 내 힘으로 살아 본 적이 없었다. 평생 관념과 상상, 자기세계에 빠져 누군가 해주는 데로, 누군가 원하는 데로 살아왔을 뿐이었다. 나라는 사람은 야생에서 사냥을 해본 적도, 과일 채집을 해본 적도, 비를 쫓아 대이동을 하는 등 나를 스스로 증명해 본 적이 없었다. 만약 야생이 ‘살아있음’을 뜻한다면, 나는 아직 살아본 적이 없는 자, 미생(未生)이었다. 나는 무엇일까. 인생을 밝혀나갈 불꽃과 같은 심지가 내겐 없었다. 

내가 근무한 부대는 분당 근처였다. 분당에는 탄천이라는 개울을 따라 산책로가 있었다. 나는 거의 매일 밤 그 길을 걸었다. 산책을 나온 많은 사람을 보았다. 연인과 나온 사람, 아이와 함께 나온 사람, 머리에 흰 서리가 앉은 황혼의 부부. 그 사람들에게서 언젠가 거쳐갈 내 인생의 정거장도 보았다. 군대라는 울타리 안에서 행복이란 사탕은 이미 내 손안에 있었다.

양치기를 한지 일주일, 거울에 비친 더부룩한 수염을 보았다. 남성은 2차 성징부터 수염이 나기 시작한다고 한다. 옛사람들은 수염이 나는 것으로부터 어른이 되는 것이라 생각을 했다고. 지난 10년, 나는 수염을 기를 수 없었다. 언제나 단정하게 나를 다듬어야 했다.

겨우 수염일뿐이지만 나는 그조차 이제야 비로소 내 의지로 기를 수 있게 되었다. 이제야 비로소 나는 내 인생 앞에 섰다. 이제야 비로소 나는 내가 누구인지 알아낼 기회가 온 것이다. 물론 내 상상과 달리 나는 겁많은 몽구스일 수도, 순진한 양일 수도 있다. 하지만, ‘야생 양은 활기차며 용기가 있고 독립적이다.’고 위키백과는 말하니 두고 볼 일 아닐까. 야생 양이 된다면 나라는 사람도 용기 있고 독립적인, 진짜 사람이 될지 모르니. 적어도 ‘누군가'가 아니라 ‘나’로 죽을 수 있을 테니.

* 몽골 여행 비디오 보기(동호 편)
http://www.youtube.com/watch?v=VSicLh_XDlY



유목민 바이에르 뭉크


양떼로도 개판을 만들 수 있다


집에 가고 싶었다.

쉽지 않은 유목생활


* 이건 이스탄불에서 아테네까지 1,149Km 자전거를 탔던 때의 이야기.

 우리의 자전거 여행은 달린 날 16일에, 쉰 날 4일을 더해 총 20일이 걸렸다. 아침에 일어나 먹고, 달리고, 먹고, 달리고, 숙소, 먹고, 자고, 일어난다.의 과정이 반복됐다. 먹고, 달리고, 잔다… 이론상으론 굉장히 단순한 과정. 하지만 ‘달린다' 안에는 평상시와는 차원이 다른 시간의 농밀함이 담겨 있었다. 한없이 길어지고 천천히 흘러가는 시간.

 시간을 견뎌내는 것이 자전거 여행의 요체였다. 군 생활을 하던 시절, 쏟아낼 곳을 찾지 못해 터질 것 같았던 마음이, 답할 수 없는 질문들로 가득했던 날들이,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되는 게 아닐까 하는 두려웠던 날들이 있었다. 나는 흘러가는 세월을 견딜 만큼 강한 몸을 갖지 못했다. 자전거 20일의 그 농밀한 시간, 그건 어쩌면 내게 시간을 견디는 훈련이 아니었을까 생각을 한다.

 자전거를 탄 지 11일째 되던 날. 영제와 나는 그날까지 약 660킬로미터를 달렸다. 아테네까지 약 500킬로미터 정도가 남았을 때니 대략 여정의 반을 지나고 있었을 때였다. 시작이 반이라는 말대로, 이제 시작을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제야 나는 “아테네까지 갈 수 있겠는걸?” 라는 느낌이 들었다. 우리는 자전거를 얼마나 타야 하는 줄도 모른 채 자전거를 샀다. 그리고 알게 된 이스탄불-아테네의 거리, 1,149킬로미터. 호기심과 의심이 반반 섞인 마음으로 여행은 시작됐다. 솔직히 말해 난 1,149킬로미터를 완주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우선 조금만 지루해져도 '내가 왜 이걸? - 싹'이 우후죽순마냥 돋아나는 나를 믿을 수 없었다. 자전거 녀석에게도 문제가 없던 날보다 문제가 생긴 날이 더 많았다. 내일은 나아지겠지 했지만, 페달 고정 볼트, 핸들 고정 볼트 등 중요 부품이 빠져버린다든가, 펑크가 난다거나 했다. 내 의지보다 약한 녀석이 이 우주에 존재한다니, 싶었지만 사실 우리의 십만 원 짜리 자전거는 묵묵히, 그리고 충실히 제값을 수행해주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어느새 중간을 넘어섰다. 저녁에 눈을 잠깐 감았다가 뜨면 아침, 도로, 점심, 다시 도로, 펑크, 침대의 사이클을 반복하다 보니 660킬로미터를 달린 것이다. 어느새, 그건 실로 위대한 단어였다. 

 그때쯤 돼서야 내겐 ‘나는 왜 자전거를 타고 있는 거지?'라는 의문이 들었다. 우리는 왜 자전거가 타고 싶었던 걸까?

 빈 깡통이 요란하듯, 영제와 나, 생각 없는 두 머리가 만나면 메아리가 쉽게 생기기 때문일까. “재밌겠다.”라고 장난스레 주고받았던 말에 그 다음 날 바로 자전거를 산 걸 보면 그럴 수도 있겠다. 하지만 우리의 자전거 여행이 단순히 머리로부터 시작된 건 아닐 것 같다.

 8년 전 여름, 고등학교 3학년이었던 여름방학, 나는 제주도를 자전거로 일주했다. 인터넷에서 만난 두 대학생 형들과. 그 당시 나는 내가 뭘 모르는지를 모르는, 스스로 다 컸다고 생각하던 고등학생이었다. 두 대학생 형들은 입대를 한 달 앞둔, 마치 세상의 종말을 기다리고 있는 것 같은 분위기의 형들이었다. 세상의 종말을 앞둔 두 사람과 봄날 망아지 한 마리, 각기 배경은 달랐으나 우리는 열심히 제주도를 돌았다. 한여름 뜨거운 햇볕이 작열하는 제주도를, 생명이 넘치는 제주도를. 

 돈이라는 건 그때나 지금이나 나와는 인연이 없는지라, 한솥도시락으로 연명하고, 중간중간 주유소에 들러 물을 얻어 마시는 궁색한 여행이었다. 다 돌고 나서야 '한낮의 열기를 피해 서늘한 아침, 오후 시간에만 자전거를 타야 한다던데?'를 알게 된, 몸으로도 교훈을 얻지 못한 미련한 여행이었다. 멜라닌 생성을 막는답시고 바른 선크림이 눈에 들어가 울면서 달린, 보기에도 안쓰러운 여행이었다. 어쨌든 8년 전에도, ‘어느새' 마법은 일어났고 우리는 섬을 한 바퀴 돌았다. 완주했던 그 날, 처음 출발했던 제주항 앞에 섰다. 대학생 형들은 감개무량 기념사진을 찍는가 싶더니, 본연의 세상 종말 회색빛으로 돌아갔다. 나도 완주했던 날의 기억이 딱히 없는 걸로 보아 큰 감동까지는 없었나 보다. 굳이 그때를 통해 배운 교훈을 꼽자면, '자동차는 인류의 위대한 발명품’이라는 렌터카 아저씨가 말해 줄 법한 배움 뿐. 그런 배움 따위 굳이 3박 4일 자전거를 타지 않았어도 아는 건데 말이다. 그랬던 그 날들이 그리스에서 자전거를 타며 기억난 이유는 단순히 자전거라는 연관성 때문일까.

 군인이었던 시절 나는 어느 것, 어느 곳에도 마음을 오래 두지 못했다. 마치 바닷물을 마시듯 마셔도 마셔도 갈증은 없어지지 않았다. 가슴 속 바람들은 바람처럼 나를 이곳에서 저곳으로, 저곳에서 또 다른 곳으로 떠밀었다. 민들레 씨앗 마냥 어느 곳에도 내려앉지 못한 채 현재와 미래 사이 어딘가에서 살았다. 전역을 결심하기 전, 가장 두려웠던 점은 그 바람이, 단순히 젊은 혈기라는 조바심이면 어쩌지, 그 바람이 홀연히 사라져 버리면 어쩌지, 그대로 주저앉게 되는 게 아닐지 하는 점이었다. 그 바람은 무엇이었을까. 자전거를 탄다고 했을 때, 내 안에서 불어온 바람은 무엇이었을까. 모든 걸 버리고 지구 반대편 그리스까지 오게 한 그 바람은 무엇이었을까. 어느 곳에도 뿌리를 내리지 못하게 했던 바람, 그 바람의 정체가 알고 싶었다.

 8년이 지난 후, 자전거를 타며 얻게 된 깜냥이 있다면, 언덕을 오를 때, 우리는 그 순간에만 집중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페달을 통해 전해지는 땅의 굳건함. 그 굳건함을 내디딜 때 팽팽해지는 근육들. 관념이 아닌 몸이 살아나는 세계. 그 세계에 드는 순간 나란 사람은 잊혔다. 편견, 허영, 자만심 등 내 자신을 얽매는 껍데기 따위도, 걱정도, 불안도 사라졌다. 뒷바퀴에서부터 내 시선이 머무는 전방 2m까지 만이 나의 세계, 나의 우주. 그곳에 나는 존재하면서 존재하지 않았다. 그리고 언덕을 지나면 열리는 내리막길. 바람이 불었다.

 막스 뮐러는 말했다. 인간 존재의 밑바탕을 이루는 것을 사랑이라고. 천체가 서로 끌어당기고 상대를 향하며, 만유인력의 법칙에 따라 서로 모여들 듯, 세상의 영혼들도 서로 끌어당기고 상대를 향하며 사랑의 법칙에 따라 서로 융화한다고.

 우리는 왜 살아가는 걸까, 왜 누군가를 사랑하는 걸까? 그건 우리 안에서 바람이 불어오기 때문이 아닐까. 영혼의 끌림을 향해 나아갈 때, 설렘이란 이름의 바람이 불어와 우리는 살아가고, 누군가를 사랑하는 게 아닐까. 나는 왜 자전거를 타게 된 걸까? 나는 왜 직장을 그만둬야 했을까? 아니, 바른 질문은, '왜 바람이 불었을까?’, '나는 지금 가슴 뜀을 향해 살아가고 있는가?'가 아닐까? 



그대 오늘도 굳건히 언덕을 오르길, 
담대히 내리막을 가르길. 
존재하는 삶, 우리 그 삶을 향해
함께 나아가길.


* 자전거 여행 비디오 보기.

http://www.youtube.com/watch?v=xp8DhSt8jK4



사과를 먹다 잠들어버렸다


펑크를 때우자.


자전거 짐받이 지지대가 결국 끊어져버렸다.


숙소에 들어가기 전 음식을 사며


'터키-그리스' 국경을 넘다



여행은 설레임과 고독, 기쁨, 성장이 순환되는 과정이 아닐까 생각이 됩니다.


자연이 봄, 여름, 가을, 겨울이 순환되는 것처럼,
바람, 땅, 물, 불이 우주의 기본 요소라고 믿었던 고대인들의 세계처럼.











 하루하루가 각본 없는 생방송이듯 여행은 언제라도 불현듯 시작된다. 그래서 어르신들은 삶의 x값, 미지수를 운명이라고 불렀는지 모르겠다. 여행길 위에서 그 운명이라는 녀석은 마른 불처럼 갑자기 번져 올 때가 있었다. 운명 앞에 불나방일 수밖에 없는 우리는 그 불을 피해 갈 수 없었다. 이건 인도에 있을 적에 생겼던 운명의 불장난, 콜카타를 떠나기 전날 밤에 발생한 일이다.

 야간 택시 타기… 외국에서 그것도 인도라는 나라에서 야간 택시를 탄다는 건 우리나라 야간 택시를 타는 일과는 또 다른 차원의 일이었다. 5분만 거리를 걸어봐도 '치안이 불안하겠구나'를 삼척동자도 알 수 있을 콜카타에서 야간 택시 타기는 이전까진 차마 도전할 수 없었던, 아니 피해야 했던 일이다. 그날 우리는 고아원 봉사를 함께했던 성지와 저녁을 먹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하 호호 깨 볶으며 나누다 보니 헤어지는 시간이 늦어져 버렸다. 그래도 전철이 안 끊기고 있을거야 싶었는데, 요놈의 전철이 9시도 안 돼서 끊길 줄이야. 정말로 1분 차이로 마지막 전철을 놓쳐버렸다. 전철역 앞에서 호구 두 명을 기다리고 있던 택시 두 대. 호구 둘은 가격협상을 시작했다. 하지만 그건 말할 것도 없이 처음부터 우리가 불리한 게임. 협상이란 여유가 있는 사람이 우위에 설 수 있는 법인데, 밤이 깊어 갈수록 애가 타는 쪽은 우리였으니까. 두 대뿐인 택시, 부르는 요금도 똑같은 걸 보니 그마저도 서로 친구였나 보다. 그야말로 부르는 게 값인 상황. 만 원을 달라고 했다……(전철은 백 원 이잖아, 이 자식들아…라고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이 정도 호구 짓은 아침밥 먹듯 당했던 일. 진짜 간담이 쫄깃해지는 여행이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이미 캄캄해진 콜카타의 밤. 휑한 거리 위에서 불안하게 흔들리는 불빛. 정체 모를 리듬의 음악, 개 짖는 소리 등 낮보다 더 분명히 들리는 거리의 소음. 운전대 옆에는 힌두 신 누군가에게 바쳐지는 제단. 흑백 무성영화에서나 볼법한 우리의 택시는 그 사이를 달렸다. 우리가 탄 택시는 속도에 비례해 다른 방법으로 털털 떠는 택시였다. 거기에 속도 50Km/h 이상에서는 정신이 나가는 속도계 바늘은 50Km/h쯤에서 신 나게 춤을 추고 있었다. 혼자 슬그머니 안전띠를 매는 기사 아저씨.

 힌두교도일 그 기사 아저씨가 모세를 알련지는 모르겠다. 그 아저씨는 그 옛날, 홍해 앞에서 신께 기도했던 모세처럼, 빨간 신호등 앞에서 신들린 클락숑을 울렸다. 그런다고 모세 앞의 홍해처럼 길이 기적처럼 열릴 리 만무. 하지만 아저씨는 '내,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브레이크가 아닌 가속페달을 밟았다. '내가 먼저 지나가면 장땡’ 이런 속도였달까. 조금 전 성지와 함께 저녁을 먹은 시간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정말로 즐겁고 소중한 시간이었다. 하지만 딱 3분 정도는 일찍 헤어졌어도 되지 않았을까 하는 마음이 들었다. 지하철임에도 창문을 열고 자연풍 냉방을 한다고 비웃었던 콜카타 전철에도 뒤늦게 미안한 마음이….

 그래도 이런 쫄깃한 때에 영제가 함께 있다니 다행이다. 뒷자리에 앉아 있는 영제를 보았다. 나와 달리 영제는 ‘납치’당하는 중이 아닌가를 경계하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백미러로 보이는 아까 그 동료 택시. 왠지 모르겠지만 ‘정말로' 우리 택시를 쫓아오고 있다(우연이라고 말해줘… ). 같은 상황에 다른 걸 생각할 수 있다는 건 괜찮은 일이지만, 이건 교통사고냐 납치냐 둘 중 하나, 아니면 두 개가 같이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은 상황. '지금 납치를 당하는 중이라면 차라리 사고가 나는 게 다행이겠다.’ 마음이 조금은 편안해졌다.

 30분의 야간 택시여행. 다행히 우리는 안전하게 돌아갈 수 있었다. 어쩌면 당연히 안전하게 돌아간 거겠지만. 아무튼 그때 당시 난 간덩이가 장조림이 되는 줄 알았다. 인도, 처음으로 신변의 위험을 느끼게 해준 나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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