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이 언제나 맑고 아름답게 밝아 오고, 저녁이 항상 시원하고 상쾌하게 내려앉는 동안, 시간은 그렇게 흘러갔다.
샘은 어깨의 짐 보따리를 헐겁게 하고 머릿속으로 거기에 든 물건을 하나하나 더듬어 보면서 빠뜨린게 없는지 점검해 보았다. 먼저 가장 중요한 장비인 취사 도구, 항상 가지고 다니면서 틈날 때마다 채워 넣는 작은 소금 통, 상당 분량의 연초(틀림없이 모자라겠지만), 부싯돌과 부시, 털 양말, 아마포, 그리고 프로도가 잊은 잡동사니들도 있었는데 샘은 그것들이 아쉬울 때 의기양양하게 꺼낼 작정이었다.
그날 그들은 시원한 저녁이 찾아와 나뭇잎 사이로 초저녁 바람이 콧노래를 흥얼거릴 때까지 계속 걸었다.
그들은 그의 경쾌한 발걸음을 따라 산뜻한 잔디로 뒤덮인 비탈을 올라갔다. 프로도는 분명히 숨을 쉬고 있고, 얼굴에 와 닿는 찬바람은 주변의 살아 있는 꽃과 나뭇잎에도 스쳤지만 자신은 변하지 않고, 쇠하지 않고, 망각의 세계로 떨어지지 않는 무시간의 세계에 들어선 느낌이 들었다. 그 세계를 지나 다시 바깥 세상으로 나가게 된다 하더라도, 샤이어의 방랑자 프로도의 마음은 여전히 아름다운 로스로리엔의 엘라노르와 니프레딜 꽃들 사이로 풀밭 위를 거닐고 있을 것이다.
프로도는 오를 준비를 하면서 사다리 옆의 나무에 손을 대 보았다. 나무껍질의 촉감과 결을, 그리고 거기에 든 생명을 그렇게 갑작스럽게, 그렇게 예민하게 느껴 본 적이 없었다. 그는 목수도 산지기도 아니면서 나무와 나무의 촉감에서 어떤 기쁨을 느꼈다. 그것은 살아 있는 나무 그 자체의 기쁨이었다.
로리엔의 분수 옆에 앉아 요정들의 목소리를 들으면서 그의 생각도 서서히 아름다운 노랫가락으로 모양을 갖춰 갔다. 하지만 샘에게 노래를 들려주려고 시작할 때마다 마치 한 줌의 부스러진 낙엽처럼 노래는 산산이 흩어지고 작은 구절들만 희미하게 남곤 했다.
나뭇잎과 나뭇가지, 물과 풀, 우리가 사랑하는 로리엔의 첫 새벽에 비친 이 모든 것들의 빛깔과 아름다움이 이 옷들에 담겨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만드는 모든 물건에 사랑하는 모든 것들의 생각을 담기 때문이지요.
그의 눈에 비친 그녀는 이미 후대인들이 이따금 연상하는 그런 요정의 모습이었다. 존재하면서도 멀리 떨어져 있는, 그리고 유장한 시간의 흐름 속으로 저 멀리 사라져 버린 그 무엇인가의 살아 있는 환영이었다.
이것은 우리 모두의 슬픔이며, 이 시대에 대지 위를 걸어다니는 모든 이들의 슬픔이라고 해야 할 거요. 흐르는 강물 위로 배를 타고 갈 때 보이는 풍경처럼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것, 이것이 인생이지. 하지만 글로인의 아들 김리, 자넨 축복받은 존재요. 자네가 슬퍼하는 그 상실은 자네의 자유의지로 선택한 거요. 자네는 다른 길을 택할 수도 있었소. 하지만 자네는 동료들을 저버리지 않았고, 따라서 자네가 누리게 될 최소한의 보상은 바로 영원히 자네 가슴에 생생하게 또 깨끗하게 남아 있을 로스로리엔의 추억이지. 그것은 사라지지도 않고 썩어 없어지지도 않는 추억이오.”
어쩌면 그럴지도 모르지. 거기에 있는 동안 우리는 어디선가 오래전에 지나가 버린 시간 속에 머무른 거야. 내 생각에는 은강을 따라 안두인대하에 들어와서야 비로소 현실의 땅을 지나 대해를 향해 흘러가는 시간 속으로 되돌아온 것 같아.
거기선 시간이 늦게 간다고 할 게 아니라, 변화와 성장이란 것이 사물과 장소에 따라 일정하지 않다고 해야 맞을 거요. 요정들에게도 세계는 움직이는 거요. 매우 빨리 움직이기도 하고 아주 천천히 움직이기도 하지. 빠르다는 것은, 그들 자신은 전혀 변하지 않지만 그 외의 다른 것들이 덧없이 지나가기 때문이요. 이것이 그들에겐 슬픈 거지. 느리다는 것은, 그들이 흘러가는 세월을 세지 않는다는 뜻인데, 아무튼 그들 자신을 위해서는 세질 않지. 지나가는 계절이란 길고 긴 강물 위에 끝없이 반복되는 파도에 불과하니까. 하지만 태양 아래 존재하는 모든 것은 언젠가는 끝이 있게 마련이오.
레골라스는 벌써 일어나 어두운 북녘 하늘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 모습은 바람 한 점 없는 어둠 속에 서 있는 한 그루 어린 나무처럼, 상념에 젖어 고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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