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이 인간인가] 프리모 레비


배제와 혐오의 결론은 결국 수용소일 수 밖에 없다. 절제된 감정으로 전해지는 저자의 경험적 결론.

재판관은 저자 스스로가 아니라, 독자여야 한다는 그의 의지. 인류 스스로의 자신감이 극에 달해가던 시대의 산물. 전쟁.

책 내용, 문체 모두 좋지만


사실 이와 상관없이 지금 여기 내 개인의 시점에서는 책 제목이 넘나 공감되는 것. 


이것이 인간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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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말


개별적으로든 집단적으로든, 많은 사람들이 다소 의식적으로 이방인은 모두 적이다라고 생각할 수 있다. 이러한 확신은 대개 잠복성 전염병처럼 영혼의 밑바닥에 자리잡고 있다. 그것은 우연적이고 단편적인 행동으로만 나타날 뿐이며 사고체계의 밑바탕에 깔려 있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러한 일이 발생하면, 그 암묵적인 도그마가 삼단논법의 대전제가 되면, 그 논리적 결말로 수용소가 도출된다. 수용소는 엄밀한 사유를 거쳐 논리적 결론에 도달하게 된, 이 세상에 대한 인식의 산물이다. 이 인식이 존재하는 한 그 결과들은 우리를 위협한다. 죽음의 수용소에 관한 이야기는 모든 이들에게 불길한 경종으로 이해되어야만 할 것이다.



여행


15. 하지만 어머니들은 여행 중 먹을 음식을 밤을 새워 정성스레 준비했고 아이들을 씻기고 짐을 꾸렸다. 새벽이 되자 바람에 말리려고 널어둔 아이들의 속옷이 철조망을 온통 뒤덮었다. 기저귀, 장난감, 쿠션, 그리고 그 밖에 그녀들이 기억해낸 물건들, 아기들이 늘 필요로 하는 수백 가지 자잘한 물건들도 빠지지 않았다. 여러분도 그렇게 하지 않았겠는가? 내일 여러분이 자식들과 함께 사형을 당한다고 오늘 자식들에게 먹을 것을 주지 않을 것인가?

 


17. 기차는 열두 량이었고 우리는 650명이었다. 우리 객차에는 45명이 탔는데, 그 객차는 좁았다. 그러니까 그 유명한 독일 수송열차 중의 한 대가 우리 눈앞에, 바로 우리 발밑에 있었다. 한번 타면 결코 되돌아올 수 없다고, 우리가 두려움에 몸서리치며 그리고 반신반의하며 그토록 누누이 들어온 그 기차였다. 꼭 듣던 대로 였다. 사소한 것 하나하나에 이르기까지. 화물 객차 바깥에서 문이 잠겼다. 객차 안에서는 남녀노소가 싸구려 상품들처럼 무자비하게 포개진 채 무無를 향한, 아래쪽을 향한, 바닥을 향한 여행을 했다. 이번엔 그 객차 안에 있는 사람들이 바로 우리라는 점만 달랐다.


 


21. 우리는 작별인사를 했다. 간단한 인사였다. 모두 옆 사람들에게 인사를 하며 삶에 작별을 고하고 있었다. 더 이상 두려움도 없었다.


클라이막스는 갑자기 들이닥쳤다. 기차 문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열리더니 뚝뚝 끊어지듯 야만적으로 들리는 낯선 외국어의 명령들이 어둠 속에서 메아리쳤다. 목소리의 주인은 지휘를 맡은 독일인들이었다. 그들은 마치 수 세기에 걸친 분노를 방출하는 듯했다.



     

바닥에서


34. 우리는 처음으로 우리의 언어로는 이런 모욕, 이와 같은 인간의 몰락을 표현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순식간에, 거의 예언적인 직관과 함께 현실이 우리 앞에 고스란히 정체를 드러냈다. 우리는 바닥에 떨어져 있었다. 밑으로는 더 이상 내려갈 곳이 없었다. 이보다 더 비참한 인간의 조건은 존재하지도 않았고 상상할 수도 없었다. 이보다 더 비참한 인간의 조건은 존재하지도 않았고 상상할 수도 없었다. 우리 것은 이제 아무것도 없었다. 그들은 옷, 신발, 심지어 머리카락까지 빼앗아갔다. 우리가 말을 해도 그들은 우리의 말을 듣지 않을 것이다. 설사 들어준다 해도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그들은 우리의 이름마저 빼앗아갈 것이다. 우리가 만일 그 이름을 그대로 간직하고 싶다면 우리는 우리 내부에서 그렇게 할 수 있는 힘을 찾아내야만 할 터였다. 그 이름 뒤에 우리의 무엇인가가, 우리였던 존재의 무엇인가가 남아 있게 할 수 있는 힘을 찾아내야만 했다.


50. 그러니까 나는 바닥에 있다. 사람들은 어쩔 수 없을 경우 과거와 미래를 지워버리고 새로운 것을 아주 빠르게 배워나간다. 수용소에 들어온 지 보름 뒤에 나는 이미 규칙적으로 배가 고팠다. 자유로운 인간들은 알지 못하는, 밤이면 꿈을 꾸도록 만드는, 우리 몸 구석구석에 자리잡은 만성적인 허기다. 나는 이미 도둑맞지 않는 법을 익혔다. 그리고 주인 없는 숟가락이나 철사, 단추를 발견했을 때 처벌의 위험만 없다면 주머니에 넣고 그것을 완전히 내 것이라고 생각했다. 내 발등에는 벌써 치료 불가능한 상처가 아무 감각도 없이 곪아가고 있다. 나는 수레를 밀었고, 삽질을 했고, 비에 젖었고, 바람에 몸을 떨었다. 내 육체는 이미 내 것이 아니었다. 배는 볼록하게 나왔고 팔다리는 장작개비 같았으며 얼굴은 아침이면 부었다가 저녁이면 홀쭉해졌다. 우리들 중 어떤 사람은 피부가 누렇게 혹은 잿빛으로 변했다. 사나흘 만나지 못하면 서로를 알아보기도 힘들었다.


우리 이탈리아인들은 매주 일요일 저녁 수용소 한쪽 귀퉁에서 만나기로 약속했다. 하지만 곧 그만두어야 했다. 숫자를 세는 게 너무 슬펐기 때문이다. 우리의 수는 매번 줄어들었고 매번 몰골이 더 사납고 더 비참해졌다. 모임에 나가려고 몇 발짝 떼어놓는 것도 힘이 들었다. 게다가 다시 만나게 되면 필연적으로 기억을 떠올리고 생각을 하게 되었는데, 그렇게 하지 않는 편이 더 나았다.



입문


56. 내가 왜 씻어야 한단 말인가? 그러면 내게 도움이라도 된다는 건가? 내가 누구의 마음에 더 들게 되기라도 한다는 건가? 하루, 아니 한 시간이라도 더 오래 살 수 있단 말인가? 아니, 그 반대다. 오히려 수명이 더 짧아질 것이다. 씻는 일도 노동이고 에너지와 칼로리의 낭비니까. 슈타인라우프는 우리가 석탄 자루 밑에서 30분만 낑낑대노라면 자기와 내가 구분조차 안 된다는 것을 모른단 말인가? 곰곰이 생각할수록, 이런 생활환경에서 얼굴을 씻는다는 것은 어리석고 심지어 무례하기조자 한 것 같다. 이것은 기계적인 습관일 뿐이다. 더 심하게 말하면, 절멸의 의례를 처량하게 반복하는 것일 뿐이다. 우리는 모두 죽을 것이다. 아니, 이미 죽기 시작했다. 기상과 노동 사이에 여유 시간이 10분 밖에 없다면, 나는 그 시간을 다른 데 쓰고 싶다. 나 자신 속으로 침잠하여 결산을 하거나, 이것이 어쩌면 마지막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며 하늘이나 바라보고 싶다. 아니면 아주 잠시나마 한가로움이라는 사치를 즐기도록, 그냥 그렇게 살아 있도록 내버려두고 싶다.


카베(병동)

60. 인간만이 이름을 가질 가치가 있으며 눌아흐첸은 더 이상 인간이 아니라는 것을 모두 알고 있는 듯하다. 나는 그 자신도 자기 이름을 잊어버렸다고 생각한다. 물론 그는 정말 그런 것처럼 행동한다. 말할 때, 바라볼 때, 완전히 텅 비어 있는 것 같은, 껍데기 밖에 남지 않은 것 같은 인상을 준다. 마치 늪 가장자리에 길게 늘어선 돌멩이들에 달라붙어 있다가 바람에 흔들리는 곤충의 허물 같다.


눌아흐첸은 굉장히 어리다. 이것은 매우 위험하다. 청소년들이 어른보다 노역과 배고픔을 참지 못하기 때문만은 아니다. 여기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에 단련되어 있어야 하는데, 젊은이들이 그러기란 매우 어려운 일이다. 눌차흐첸이 특별히 허약한 것은 아니지만 모두들 그에게 일을 시키지 않으려 한다. 그는 모든 일에 심드렁해서 힘든 일이나 구타를 피하려고도, 음식을 구해보려고도 하지 않는다.



그에게는 짐수레를 끄는 말만큼의 영리함도 없다. 말도 완전히 탈진하기 조금 전에 걸음을 멈춘다. 하지만 그는 기운이 완전히 바닥날 때까지 수레를 밀고 끌고 옮긴다. 그러고는 예고의 말 한마디 없이, 슬프고 우울한 눈을 땅에서 떼지도 않은 채 갑자기 쓰러져버린다.


63. 이번에는 내가 앞에 설 차례다. 받침대는 무겁지만 아주 짧다. 걸을 때마다 눌아흐첸의 발이 자꾸 내 발에 걸린다. 그가 내 걸음을 따라올 수 없거나 신경을 쓰지 않기 때문이다.

 스무 발자국 정도 걸어 우리는 철로에 도착한다. 넘어야 할 케이블이 있다. 짐은 제대로 놓여 있지 않고 뭐가 문제인지 어깨에서 자꾸 미끄러지려 한다. 쉰 발자국, 예순 발자국. 창고 문이다. 온 만큼의 거리를 다시 걸어가야 짐을 내려놓을 수 있다. 됐다. 더 걷는다는 건 불가능하다. 이제 짐의 무게는 온전히 내 팔에만 쏠려 있다. 아픔과 극도의 피로를 더 이상 견딜 수가 없다. 나는 소리치며 뒤로 돌아서려 한다. 바로 그때 눌아흐첸이 발을 헛디디며 모든 걸 집어던지는 것이 보인다.

 내가 예전처럼 날렵했다면 재빨리 뒤로 물러섰을 것이다. 하지만 다음 순간 나는 근육이 경직된 채 땅에 쓰러져 두 손으로 다친 발을 움켜쥐고 있었다. 너무 아파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무쇠의 뾰족한 모서리가 내 왼쪽 발등을 찍어버린 것이다.

 현기증 나는 통증 때문에 한동안 모든 것이 지워져버린다. 주위를 돌아볼 수 있게 되었을 때, 아직도 그 자리에 서 있는 눌아흐첸이 보인다. 그는 주머니에 두 손을 찔러넣은 채 꼼짝도 않고 한마디 말도 없이 무표정하게 나를 쳐다보고 있다.


70. 그는 나보다 머리 하나만큼 키가 더 컸지만 아주 친절해 보이는 인상이다. 배고픔을 겪지 않은 사람만이 그런 인상을 지닐 수 있다.


나는 언제 우리를 들여보내줄지 아느냐고 그에게 물어보았다. 그가 간호사를 향해 돌아섰다. 그와 쌍둥이처럼 닮은 남자 간호사는 구석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다. 두 사람은 이야기를 나누고 웃어대기만 할 뿐 내 말에 대답을 하지 않았다. 꼭 내가 그 자리에 없는 것 같았다. 이윽고 그들 중 하나가 내 팔을 잡더니 팔뚝에 새겨진 숫자를 보았다. 그러더니 더 크게 웃었다. 174,000번대가 이탈리아 유대인이라는 걸 모두 알고 있다. 두 달 전 도착한 이 유명한 이탈리아 유대인들은 모두 변호사, 대학 졸업자들이었는데, 처음엔 100명이 넘었으나 어느새 40명밖에 남지 않았다. 일할 줄 모르고, 빵을 도둑맞고, 아침부터 밤까지 얻어맞는 사람들이다. 독일인들은 이들을 왼손만 두 개라고 부른다. 심지어 폴란드 유대인들까지 이들을 무시하는데, 그건 이들이 이디시어를 할 줄 모르기 때문이다.


간호사가 남자에게 내 갈비뼈를 가리킨다. 내가 해부실의 시체라도 되는 듯이. 이어서 내 눈꺼풀과 부은 뺨, 가느다란 목을 가리켰고, 몸을 구부려 내 정강이뼈를 검지로 누른 뒤 밀랍처럼 창백한 내 살에 남은, 푹 들어간 손가락 자국을 보여준다.


폴란드인에게 말을 걸지 말았어야 했다. 내 평생 이보다 더 무례한 짓은 당해본 적이 없는 것 같다. 그 사이 간호사는 알아들을 수 없어 끔찍하게만 들리는 자신의 언어로 실연 설명을 다 끝낸 것 같다. 폴란드인이 내게 돌아서더니 독일어 비슷한 말로 너그럽게 요점만 정리해준다. “유대인, 너는 끝이다. 너는 금방 화장터로 간다. 끝이다


 


80. 카베는 육체적으로 가장 편한 수용소다. 그래서 아직 의식의 씨앗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거기서 의식이 다시 깨어난다. 그리하여 공허하고 긴날, 허기나 노동이 아닌 다른 것들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리고 그들이 우리를 어떤 상태로 만들려고 한 것인지, 우리 중 몇 명이나 죽었는지, 이것이 어떤 삶인지 진지하게 생각하게 된다. 상대적으로 평화로운 울타리인 카베 안에서 우리는 우리의 인간성이 아주 연약한 것이며 이 인간성이야말로 우리 생명보다 더 위태롭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므로 지금 우리를 위협하고 있는 이런 큰 위험을 상기시키는 게 옳았을 것이다. 수용소 안에서 자유로운 인간들에게 메시지를 전하는 것이 가능했다면 그 내용은 바로 이런 것이었으리라. 지금 여기서 우리를 괴롭히는 것을 당신들 지에서 겪지 않도록 주의하시오.


일을 하면 힘이 들고 생각할 시간이 없다. 우리의 집은 기억할 거리도 못 된다. 하지만 여기서는 시간이 있다. 침대에서 침대로 이동하는 것은 금지되어 있지만 그래도 서로를 찾아다니고, 이야기를 나누고 또 나눈다. 아픈 인류로 미어터질 듯한 막사에 언어가, 추억이, 다른 아픔이 들어찬다. 다른 아픔이란 독일어로 하임베(향수병)’라는 것이다. ‘집을 향한 아픔이라는 뜻의 아름다운 단어다.


우리는 우리가 어디서 왔는지 알고 있다. 바깥 세상에 대한 기억들은 우리의 꿈을, 깨어 있는 시간을 가득 채운다. 놀랍게도 우리가 아무것도 잊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떠오르는 모든 기억이 고통스러울 정도로 선명하게 우리 앞에 모습을 드러낸다.



그러나 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는지 알지 못한다. 어쩌면 이 병을 이기고 살아남을 수도, 선발을 피할 수도, 어쩌면 우리를 소진시키는 노동과 허기까지도 이겨낼 수 있으리라. 하지만 그러고 나면? 욕설과 구타로부터 일시적으로 멀어진 이곳에서 우리는 우리들 자신 속으로 다시 들어가 생각을 할 수 있었다. 그러자 우리가 돌아갈 수 없을 거라는 사실이 또렷해진다. 우리는 아무것도 볼 수 없도록 가려진 열차에 갇혀 여기까지 왔다. 우리의 여인들과 아이들이 무를 향해 떠나는 것을 지켜보았다. 우리는 노예가 되어, 이름 없는 죽음을 맞기 훨씬 전에 먼저 영혼이 죽어, 수백 번 행진하고 말없이 중노동을 했다. 우리는 돌아가지 못하리라. 아무도 여기서 나가선 안 된다. 팔뚝에 새겨진 숫자를 들이대며, 아우슈비츠에서는 인간이 인간으로 하여금 무슨 짓이든 하게 만들 수 있다는 불길한 소식을 세상에 전해서는 안 된다.


우리의 밤


 


87. 나는 너무 피곤하고 얼이 빠진 상태다. 나 역시 금세 곯아떨어진다. 마치 철로 위에서 잠드는 것 같다.


기차가 막 도착한다. 기관차가 씩씩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바로 내 옆에 있다. 나는 아직 깊이 잠들이 않아 그 기관차의 이중성을 알아차린다. 그것은 오늘 우리가 짐을 하역한 화차들을 끌고 온 기관차다. 아까 우리 옆을 지날 때처럼 지금도 그 검은 옆구리에서 뿜어져나오는 열기를 느낄 수 있기 때문에 그 기관차라는 것을 알아볼 수 있다. 기관차가 연기를 내뿜으며 점점 더 가까워진다. 거의 나를 칠 것 같다. 그러나 기차는 결코 도착하지 않는다. 내 꿈은 아주 가볍다. 아주 얇은 베일이다. 내가 원한다면 찢어버릴 수도 있다. 그렇게 할 것이다. 그걸 찢어리고 싶다. 그렇게 해야 내가 철로에서 벗어날 수 있다. 난 그렇게 하고 싶었다. 그런데 잠이 깬다. 완전히 깬 것은 아니고 조금 깨어나 무의식과 의식 사이의 계단에서 한 칸 더 올라간다. 나는 눈을 감는다. 잠이 달아날까봐 눈을 뜨고 싶지 않다. 그러나 소리는 들을 수 있다. 멀리서 들려오는 기적 소리는 현실이 분명하다.


 


88. (공통의 꿈) 여기 내 누이가 있다. 그리고 정확히 누구인지 알 수 없는 내 친구들 몇 명과 다른 사람들이 많이 모여 있다. 모두 내 이야기를 듣고 있다. 이야기는 이렇다. 세 가지 음으로 이루어진 경적 소리, 딱딱한 침대, 옆으로 밀어버리고 싶지만 나보다 훨씬 힘이 세기 때문에 잠을 깨울까 두려운 내 옆 사람 이야기다. 우리의 허기, 이 검사, 내 코를 주먹으로 때렸다가 피가 나니까 가서 씻고 오라고 한 카포에 대해 산만하게 이야기한다. 내 집에 돌아와 친한 사람들 속에서 여러 가지 이야기를 할 수 있다는 것은 강렬하고 구체적이고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기쁜이다. 그러나 청중들이 내 말을 듣고 있지 않다는 게 빤히 보인다. 그뿐 아니다. 그들은 완전히 무관심하다. 그들은 내가 그 자리에 없는 것처럼, 자기들끼리 전혀 다른 이야기를 정신없이 나눈다. 누이가 나를 보더니 자리에서 일어나 아무 말 없이 그곳을 떠난다.


마음속에서 황폐한 슬픔이 서서히 자라난다. 현실감각이나, 갑자기 침입하는 외적 요인 따위에 길들여지지 않는 순순한 상태의 고통이다. 어린아이들을 울리는 것과 비슷한 아픔이다. 다시 한 번 표면으로 헤엄쳐 올라가는 것이 더 나을 것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단호히 눈을 뜬다. 내가 실제로 깨어 있음을 확인해줄 어떤 것을 내 눈앞에서 찾기 위해서.


아직도 따뜻한 꿈이 내 앞에 있다. 잠을 깨기는 했지만 여전히 그 꿈의 고통에 사로잡혀 있다. 그때 이것이 우연한 꿈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제 나는 완전히 맑은 정신을 되찾는다. 이 꿈 이야기를 이미 알베르토에게 했던 것이 생각난다. 그리고 놀랍게도 그가 자기도, 또 다른 많은 사람들도 그런 꿈을 꾼다고 털어놓았던 것도 생각난다. 그는 어쩌면 모든 사람들이 그런 꿈을 꿀지도 모른다고 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날까? 왜 매일매일의 고통이, 우리가 이야기를 하는데 아무도 들어주지 않는 장면으로 거듭해서 꿈으로 번역되는 걸까?


나는 이런 생각을 하면서, 불멸의 시간을 이용해 조금 전 꿈속의 고통스러운 잔영들을 내 몸속에서 떨쳐버리려고 했다. 그래야 다음 꿈의 본질과 타협하지 않을 수 있을 테니까. 나는 어둠 속에 웅크리고 앉아 주위를 둘러보며 귀를 기울인다.



잠자는 사람들의 숨소리와 코고는 소리가 들린다. 신음을 하거나 잠꼬대를 하는 사람도 있다. 많은 사람들이 입술을 핥으며 턱을 움직인다. 음식을 먹는 꿈을 꾸는 것이다. 이 역시 집단적인 꿈이다. 가혹한 꿈이다. 탄탈로스의 신화를 만든 사람은 틀림없이 알 것이다. 음식이 눈에 보일 뿐만 아니라 확실히 구체적으로 손에 느껴진다. 풍요롭고 강렬한 음식 냄새도 맡을 수 있다. 어떤 사람은 음식을 입술에 닿을 정도로 가까이 가져간다. 그러다 매번 다른 어떤 상활이 끼어들어 그 행위의 완성을 방해한다. 그러면 꿈은 흩어져 그 꿈을 이루던 기본적인 요소들로 나뉜다. 잠시 후 그것들이 다시 모여 비슷하면서도 어딘가 달라진 꿈이 다시 시작된다. 우리 모두에게, 매일 밤, 잠을 자는 내내 쉼 없이 이런 일이 일어난다.


우리의 밤은 그렇게 흘러간다. 탄탈로스의 꿈과 이야기의 꿈이 점점 더 구별하기 힘든 이미지들의 천으로 짜여나간다. 굶주림과 구타, 추위와 노동, 두려움과 혼란으로 뒤범벅된 낮의 고통이, 밤이 되면 전대미문의 폭력이 담긴 무형의 악몽으로 변한다. 자유로운 삶에서는 열에 들뜬 날 밤에나 나타나는 것들이다. 매 순간 공포로 얼어붙어, 사지를 떨며, 부노에 가득 찬 목소리가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로 명령을 외치는 듯한 느낌 속에서 잠을 깬다. 통으로 이어지는 행렬, 맨발의 뒤꿈치가 나무 바닥을 무겁게 디디는 소리가 다른 상징적 행진으로 바뀐다. 우리는 회색이고, 모두 똑같고, 개미처럼 작기도 하고 달에 닿을 정도로 크기도 한데, 셀 수 없이 많은 수가 서로 딱 달라붙어 지평선까지 평야를 온통 뒤덮고 있다. 간혹 우리는 하나의 물질로 녹아내리기도 한다. 그러면 우리는 슬픔의 덩어리가 되어, 서로 뒤엉켜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한다. 또 때로는 시작도 끝도 없이 원을 그리며 행진을 한다. 눈이 핑핑 돌 정도로 현기증이 나고 욕지기가 가슴에서 목으로 강물처럼 밀려 올라온다. 배고픔 또는 추위, 혹은 팽창된 방광이 우리의 꿈들을 깨워 꿈의 요소들을 일상으로 되돌려놓을 때까지. 우리는 악몽 그 자체 혹은 고통이 우리를 깨웠을 때, 그 요소들을 찾아내 각각 따로따로 현재의 관심거리 밖으로 쫓아내려 한다. 우리의 잠이 다시 침입당하지 않도록 그렇게 하는 것이지만 별 소용이 없다. 눈을 감자마자 다시 한 번 뇌가 우리의 의지를 벗어나 움직이는 것이 느껴진다. 뇌는 휴식하지 못한 채 신호를 보내고 윙윙 소리를 내며 환영들과 무시무시한 기호들을 만들어낸다. 그리고 쉴 새 없이 꿈이라는 장막 위 회색 빛 안개 속에 그것들의 이미지를 투사하거나 만들어낸다.


그렇게 밤새도록 자다 깨고 악몽이 교차하는 가운데, 기상 시간을 가늠하거나 그것을 두려워하느라 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한다. 많은 사람들이 경험하는 신기한 능력에 따라 우리는 시계가 없는데도 곧 기상 사이렌이 울리리라는 것을 아주 정확히 예측할 수 있다. 기상 시간은 계절에 따라 변하지만 언제나 아주 이른 새벽이다. 수용소의 사이렌이 아주 오랫동안 울린다. 그러면 각 막사의 불침번이 근무를 끝낸다. 그는 불을 켜고 일어나 몸을 쭉 편 뒤 매일 똑같은 판결을 내린다. “기상


 


94. 낯선 외국어가 모든 사람들의 정신의 밑바닥으로 돌덩이처럼 떨어진다. ‘기상’. 따뜻한 담요가 만들어내는 몽환적인 경계, 잠이라는 튼튼하지 못한 갑옷, 고통스럽기도 한 밤으로의 탈출, 이 모든 것이 산산조각난다. 우리는 다시 무자비하게 잠에서 깨어나 벌거벗고 연약한 상태에서 잔인하게 모욕에 노출된다. 이성적으로는 그 끝을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긴, 다른 날과 똑같은 하루가 시작된다. 너무나 춥고 너무나 배고프고 너무나 힘이 들어 그 끝은 우리와 더 멀어진다. 그러므로 회색빛 빵 한 덩이에 우리의 관심과 욕망을 집중시키는 것이 더 낫다. 빵은 작지만 한 시간 후면 틀림없이 우리 것이 된다. 그것을 집어삼키기 전까지 5분 동안 그것은 이곳에서 우리가 합벅적으로 소유할 수 있는 모든 것으로 변할 수 있다.


...


나는 침대를 정리하고 옷을 입은 뒤 바닥으로 내려와 신발을 신는다. 그러자 아물지 않은 발의 상처가 다시 벌어지고 새로운 하루가 시작된다.


 


노동


99.침목들은 땅에 박혀 있고 무게가 80킬로그램이다. 우리가 쓸 수 있는 힘의 한계에 가깝다. 우리들 중 제일 건장한 이들이 둘씩 짝을 지어 일해도 몇 시간이 걸려야 침목을 옮길 수 있을 것이다. 나에게는 고문과 같다. 거의 맹목적으로, 있는 힘을 다해 첫번째 침목을 옮기고 난 뒤 내 어깨뼈가 고장난다. 어떤 비열한 행동을 해서라도 두번째 운반은 피해야 한다.


레스닉과 짝이 되어야 한다. 그는 훌륭한 일꾼처럼 보이고, 또 키가 크기 때문에 짐 무게의 대부분을 지탱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레스닉이 무시하듯 나를 거절하고 다른 튼튼한 사람과 짝이 되는 게 자연스러운 이치임을 잘 알고 있다. 그렇다면 변소에 간다고 말해 허락을 받은 뒤 가능한 한 오래 그곳에 머물러 있자. 곧 발각이 되어 웃음거리가 되고 구타를 당할 것이 확실할 정도로 오래, 변소에 몸을 숨기고 있을 테다. 그렇게 하는 것이 일하는 것보다는 낫다.


 하지만 아니었다. 레스닉은 나를 짝으로 받아들인다. 뿐만 아니라 혼자서 침목을 들어올려 조심스럽게 내 오른쪽 어깨 위에 올려놔준다. 그리고 다른 쪽 끝을 들어 자기 왼쪽 어깨 위에 올리고 출발한다. 


 눈과 진흙이 달라붙은 침목은 걸음을 옮길 때마다 내 귀를 쳐서 붙어 있던 눈이 떨어져 목으로 흘러내린다. 50걸음쯤 걷고 나자 일반적으로 인내력이라고 부르는 것의 한계에 다다른다. 무릎이 저절로 구부러지고 어깨는 바이스로 죄는 것처럼 쑤시고, 균형을 잃을 위기에 처한다. 걸음을 떼어놓을 때마다 발이 푹푹 빠지는 진흙 속에, 내 일상을 늘 실수투성이로 만들어놓으려고 사방 어디에나 매복하고 있는 이 폴란드의 진흙 속에 신발이 빨려 들어가는 기분이다.




 나는 입술을 꽉 깨문다. 작은 외적 통증을 자신에게 부과하는 것이 남아 있는 마지막 힘을 끌어 모으는 자극제가 된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카포들도 그것을 안다. 몇몇 카포들은 단순히 잔인하고 폭력적이어서 우리를 구타하지만, 어떤 카포들은 사나운 말을 다루는 마부들처럼 독려의 의미로, 거의 다정하게 짐을 나르는 우리에게 주먹을 휘두르며 매질을 한다.


 원통이 있는 곳에 도착한 우리는 침목을 땅에 내려놓는다. 나는 넋이 나간 눈으로 입을 헤벌리고 두 팔을 힘없이 떨어뜨린채, 고통이 중단된 것에 대한 일시적이고 허구적인 황홀감에 빠져 있다. 소진 상태가 거의 끝나갈 때면 나는 어쩔 수 없이 다시 떠밀려 일을 하게 되기를 기다린다. 몇 초 동안 기다리는 그 순간이라도 이용해 몸속의 힘을 조금이나마 끌어내려고 애쓴다.


그러나 아무도 나를 떠밀지 않는다. 레스닉이 내 팔꿈치를 건드린다. 우리는 가능한 한 느릿느릿 침목이 있는 곳으로 돌아간다. 그곳에서는 다른 사람들이 빙빙 맴을 돌고 있다. 다들 짐을 지기 전에 최대한 미적거리려 한다.


“자, 친구, 들자고” 이 침목은 젖지 않아 약간 가볍다.




  1. 복종을 의심하지 않는 사람답게 낮은 목소리로 말한다. “모두 밖으로”


맑은 날



106.삶의 의미에 대한 믿음은 인간의 모든 힘줄 속에 뿌리 박혀 있다. 이것이 인간 본질이 지닌 속성이다. 자유로운 인간들은 이러한 목적에 많은 이름을 부여하며 그 성질에 대해 깊이 생각하고 토론한다. 하지만 우리에게 이 문제는 훨씬 더 단순하다.


 오늘 그리고 여기서 우리의 목표는 봄에 도달하는 것이다. 지금은 다른 것은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 이제 이런 목표 뒤에 다른 목표는 아무것도 없다. 아침에 우리는 점호 마당에 줄을 서서 일하러 떠날 시간을 한없이 기다린다. 바람이 일 때마다 찬 공기가 옷 속으로 들어와 무방비 상태의 우리 몸속을 타고 내려간다. 주위의 모든 것이 회색이다. 우리도 회색이다. 새벽이 되면 우리는 사방이 아직 어둑어둑한데도 따뜻한 계절을 알리는 최초의 흔적들을 찾아보려고 동쪽 하늘을 자세히 살핀다. 매일 해가 뜨는 시간에 대해 이런저런 의견을 말한다. 오늘은 어제보다 조금 일찍 떴어. 오늘은 어제보다 약간 더 따뜻한데. 두 달 후, 한 달 후, 추위가 휴전을 선포할 것이고, 그러면 우리의 적이 하나 사라지는 것이다. 


오늘 처음으로 해가 진흙의 지평선 위로 환하고 선명하게 떴다. 폴란드의 태양은 차갑고 하얗고 멀기만 해서 피부에 온기만 살짝 전해질 뿐이지만 마지막 안개가 사라졌을 때, 웅성거림이 창백한 우리 다수를 관통했다. 나 역시 옷을 뚫고 들어오는 온기를 느꼇을 때 인간이 왜 태양을 숭배하는지 이해하게 되었다.



110.인간의 본성에 따르면 슬픔과 아픔은 여러 가지를 동시에 겪더라도 우리의 의식 속에서 전부 더해지는 것이 아니라, 정확히 원근법에 따라 앞의 것이 크고 뒤의 것이 작다. 이것은 신의 섭리이며, 그래서 우리가 수용소에서도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자유로운 삶에서, 인간이 만족할 줄 모르는 존재라는 말을 그토록 자주 듣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사실 이것은 인간이 애초에 완전한 행복의 상태를 누릴 수 없어서라기보다 불행의 상태가 지니는 복잡한 성질을 늘 충분히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수없이, 차례대로 늘어선 그 불행의 이유들이 단 하나의 이름을, 가장 큰 이유의 이름을 갖게 된다. 그 이유가 힘을 잃어버릴 때까지 말이다. 그런데 그때 우리는 그 뒤로 또 다른 이유가 등장하는 것을 본다. 비탄에 잠길 정도로 충격을 받는다. 하지만 실제로는 그뒤로 또 다른 이유들이 줄을 서 있다.

그리하여 겨우내 우리의 유일한 적이었던 추위가 가시자 우리는 배가 고프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그리고 똑같은 오류를 범하며 오늘 “배만 고프지 않다면!” 하고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어떻게 배가 고프지 않기를 바랄 수 있단 말인가? 수용소 자체가 배고픔이다. 우리 자신이 배고픔, 살아 있는 배고픔이다.


  1. 정말 특이하게도, 그는 많은 양의 죽을 보면 미리 자기 의지대로 장을 비워놓을 수 있다. 이것은 그의 놀라운 소화력에 기여한다.



익사한 자와 구조된 자


135.가장 간단한 방법은 굴복하는 것이다. 명령을 그대로 따르기만 하면 된다. 일터와 수용소의 규율에 따라서만 배급을 먹으면 된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3개월 이상 버티는 건 이례적인 일임을 경험이 입증했다. 가스실로 가는 무슬림들은 모두 똑같은 사연을 갖고 있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면 아무런 사연도 갖고 있지 않다. 그들은 바다로 흘러가는 개울물처럼 끝까지 비탈을 따라 내려갔다. 근본적인 무능력 때문에, 혹은 불운해서, 아니면 어떤 평범한 사고에 의해 수용소로 들어와 적응을 하기도 전에 학살당했다. 그들은 그 자리에서 쓰러졌다. 독일어를 배우기도 전에, 규율과 금지가 지옥처럼 뒤얽힌 혼돈 속에서 뭔가를 구별해내기도 전에 그들의 육체는 가루가 되었다. 선발에서, 혹은 극도의 피로로 인한 죽음에서 그들을 구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 그들의 삶은 짧지만 그들의 번호는 영원하다. 그들이 바로 ‘무젤매너(무슬림)’, 익사자, 수용소의 척추다. 그들은 끊임없이 교체되면서도 늘 똑같은, 침묵 속에 행진하고 힘들게 노동하는 익명의 군장/비인간들이다. 신성한 불끛은 이미 그들의 내부에서 꺼져버렸고 안이 텅 비어서 진실로 고통스러워할 수도 없다. 그들을 살아 있다고 부르기가 망설여진다. 죽음을 이해하기에는 너무 지쳐 있기 때문에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그들 앞에서, 그들의 죽음을 죽음이라고 부르기조차 망설여진다. 

얼굴 없는 그들의 존재가 내 기억 속을 가득 채우고 있다. 우리 시대의 모든 악을 하나의 이미지로 형상화할 수 있다면, 나는 내게 친근한 이 이미지를 고를 것이다. 고개를 숙이고 어깨를 구부정하게 구부린, 뼈만 앙상한 한 남자의 이미지이다. 그의 얼굴과 눈에서는 생각의 흔적을 찾을 수 없다. 

익사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없다면, 그리고 죽음으로 이르는 길이 단 하나의 드넓은 길이라면, 구원의 길은 이와는 반대로 수없이 많고 험하고 가파르며, 실제로 있을 것 같지 않다.


139.엄밀한 의미의 관리들 외에, 처음에는 운명의 호의를 받지 못했지만 오로지 자신의 힘으로 생존을 위해 투쟁하는 다양한 부류의 포로들이 있다. 그들은 흐름에 역행해야 한다. 매일 전투를 벌이고, 매 시간 노역, 허기, 추위, 그리고 거기서 유래하는 무기력과 싸워야 한다. 적에게 저항해야 하고 경쟁자를 동정하지 말아야 한다. 재치를 갈고닦아야 하며, 인내심을 쌓아야 하고, 의지력을 키워야 한다. 또는 체면을 모두 눌러버리고, 의식의 빛을 꺼버리고, 짐승들이 싸우는 싸움터로 내려가 잔인한 시기에 일족과 개인들을 지탱해주는 비밀스러운 힘들의 안내를 받아야 한다. 죽지 않기 위해 우리가 고안해내고 실행한 방법들은 수없이 많았다. 인간들의 다양한 성격만큼이나 많았다. 그 방법들은 모두 전체를 향한 개인의 힘겨운 투쟁을 담고 있다. 그중 많은 수가 적지 않은 일탈과 타협을 수용하고 있다. 자신의 도덕 세계의 한 부분이라도 포기하지 않은채 생존하는 것은, 강력하고 직접적인 행운이 작용하지 않는 한, 순교자나 성인의 기질을 소수의 뛰어난 사람들에게만 허용될 뿐이었다.


144.141565번 엘리아스 린친은 어느 날 화학 코만도에 이상한 방식으로 등장했다. 그는 키가 1미터 50센티미터도 안 될 만큼 작었지만, 나는 그와 같은 근육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옷을 벗으면 피부 밑의 모든 근육들의 움직임이 구별된다. 그 근육들은 마치 각기 다른 동물들처럼 힘있게 움직인다. 비율을 바꾸지 않고 그의 몸을 그대로 확대시키면 헤라클레스의 훌륭한 모델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머리는 보면 안 된다.

 그의 머리 가죽 밑에는 꿰맨 자국이 크게 불거져 있다. 두개골이 거대해서 쇳덩이나 돌 같은 인상을 준다. 눈썹과 밀어버린 머리의 검은 경계선 사이가 겨우 손가락 한 마디 정도밖에 안 된다. 코, 턱, 이마, 광대뼈는 다부지고 단단하며, 얼굴 전체는 들이받기에 적절한 도구인 성벽 파괴용 망치 같다. 그의 몸에서는 야수 같은 활력이 발산된다. 


147.그가 뛰어난 일꾼이라는 소문이 금방 퍼져나갔다. 덕분에 그는 수용소의 이상한 법칙에 따라 그때부터 일을 하지 않게 되었다. ... 엘리아스는 자연스럽고도 천진난만한 도둑이었다. 그는 그런 식으로 야생동물의 본능적인 영리함을 보여주었다. 그는 현장에서 잡히는 일이 없다. 확실한 기회가 왔을 때만 도둑질을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기회가 왔다 하면 엘리아스는 마치 돌이 위에서 툭 떨어지듯 운명적으로 당연하게 도둑질을 한다. 그런 그를 잡기가 힘들기도 하지만, 그의 절도에 대해 벌을 주려 해도 아무 소용 없을 것이다. 절도는 그에게 숨을 쉬거나 잠을 자는 것처럼 생명에 관계된 행동이기 때문이다.

 이제 이 엘리아스라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질문을 해볼 수 있다. 그는 미치광이에 이해할 수 없는 돌연변이 인간으로 어쩌다 우연히 수용소에 들어오게 된 것일까. 우리의 현대사회와는 어울리지 않는, 좀더 정확히 말하자면 수용소의 원시적인 삶에 어울리는 원시인이 아닐까. 혹은 수용소의 산물이 아닐까. 우리가 죽지 않는다면, 수용소 자체가 사라지지 않는다면 우리 모두가 그렇게 변할지도 모르는 새로운 유형의 인간이 아닐까. 

 위에 세 가지 가정이 모두 약간의 진실을 담고 있다. 엘리아스는 육체적으로 파괴될 수 없는 사람이기 때문에 외부로부터의 공격에서 살아남는다. 미치광이이기 때문에 내부로부터의 절멸에 저항한다. 그래서 제일 먼저 생존자가 된다. 그는 이런 식의 생존방식에 가장 적합하고 표본적인 인간이다.

 만일 엘리아스가 다시 자유를 찾게 된다면 인간사회의 가장자리에, 감옥이나 정신병원에 갇혀 살게 될 것이다. 하지만 여기, 이 수용소에서는 범죄자도 정신병자도 없다. 지켜야 할 도덕률이 없기 때문에 범죄자가 없으며, 우리가 하는 행동이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모든 것일 뿐, 우리에게 자유의지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정신병자도 없다.

수용소에서 엘리아스는 성공하고 의기양양하다. 그는 훌륭한 일꾼미여 훌륭한 조직꾼이다. 이 두 가지 이유 때문에 그는 카포와 동료들에게 확실하게 선택되고 존경을 받는다. 확고한 내적 지혜를 갖기 않은 사람에게, 삶에 뿌리를 내리는 데 필요한 힘을 자신의 의식으로부터 끌어낼 줄 모르는 사람에게, 유일한 구원의 길은 엘리아스에게로, 어리석은 행동으로, 그리고 음흉한 잔인성으로 이어진다. 다른 길들은 모두 막다른 골목이다.


152.앙리와 이야기하는 것은 유용하고 기분 좋다. 종종 따뜻하고 가까운 사람으로 느껴지기도 한다. 의사소통도, 심지어 정을 주고받는 것도 가능해 보인다. 일반적이지 않은 그의 개성에 담긴 인간적이고 쓸쓸하며 의식적인 깊이를 감지할 수 있을 것 같기도 하다. 그러나 다음 순간 그의 쓸쓸한 미소가, 마치 거울을 보고 연구한 듯한 냉담한 찌푸림으로 얼어 붙는다.  앙리는 예의 바르게 양해를 구한다. “할 일이 있어요.”, “만나야 할 사람이 있어요.” 다시 사냥과 투쟁 준비를 완전히 끝낸 그가 여기 있다. 그는 다루기 힘들고, 멀리 떨어져 있고, 갑옷으로 무장을 했고, 모두의 적이며 창세기의 뱀처럼 비인간적일 정도로 교활하고 이해 불가느한 존재다.

앙리와 대화를 하고 나면, 아무리 그의 이야기가 친절했다고 해도 늘 가벼운 패배감 같은 걸 맛보게 된다. 나 역시, 이유는 알 수 없지만, 그의 앞에 한 인간으로서 존재한 게 아니라 그의 손에 좌우되는 도구였던 건 아닌지 혼란스러운 의심이 든다.

내가 알기로 지금 앙리는 살아 있다. 자유인으로서의 그의 삶이 어떨지 몹시 궁금하지만 그를 다시 만나고 싶지는 않다.


화학시험


159.우리는 이 사실이 기뻤다. 기다리면 시간이 평온하게 흐른다. 시간을 빨리 보내기 위해 무슨 일인가를 하지 않아도 된다. 이와는 달리 일을 할 때는 매 순간이 힘들게 흘러가서 부지런히 그것을 쫓아버려야만 한다. 우리는 늘 기다리는 것을 좋아한다. 우리는 낡은 거미줄에 매달린 거미들처럼 완전히 무디고 무기력하게 몇 시간이고 기다릴 수 있다.


162.내가 다시 자유인이 되었을 때 그를 다시 한 번 만나고 싶었다. 보복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인간의 정신에 대한 내 호기심 때문이었다. 

 그 시선은 두 명의 인간 사이에 흐르는 시선이 아니었다. 전혀 다른 세계에 사는 두 존재 사이에 놓인, 수족관의 유리를 통해서 바라보는 것 같은 그 시선의 성질을 속속들이 설명할 수 있다면, 나는 제3제국의 그 거대한 광기의 본질도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우리 모두가 독일인에 대해 생각하고 말했던 것을 바로 그 순간, 그 자리에서 직접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파란 눈과 세련된 그 손들을 감독하는 뇌가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내 앞에 있는 이 무엇인가는 분명 억압해 마땅한 종에 속해. 하지만 특별한 경우 먼저 어떤 유용한 요소를 가지고 있는지 확인할 필요가 있지.’ 그리고 내 머릿속에는 텅 빈 호박속의 씨앗처럼 이런 생각이 떠올랐다. ‘파란 눈과 금발머리는 본질적으로 사악하지. 어떤 소통도 불가능해. 난 광산 화학 전문가야. 유기 합성물 전문가야. 난....”

그리고 심문이 시작되었다. 한쪽 구석에서 제3의 동물표본인 알렉스가 하품을 하며 이를 드러냈다.


164.일은 잘된 것 같았지만 나는 그것을 믿을 정도로 무분별하지는 않았다. 아무리 낙관적일지라도 그 어떤 예측도 해서는 안 되나는 것쯤은 이해할 정도로 수용소에 대해서 알 만 큼 알았다. 분명한 것은 내가 일을 하지 않고 하루를 보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오늘 밤은 배가 좀 덜 고플 것이다. 구체적으로 얻은 이익은 바로 이것이다. 

 부데에 다시 들어가려면 대들보와 금속틀들을 잔뜩 쌓아놓은 공토를 지나가야 한다. 기중기의 강철 케이블이 길을 가로막는다. 알렉스가 뛰어넘으려고 그것을 잡는다. ‘제기랄’, 그는 자기 손에 검은 기름이 묻은 것을 본다. 그 사이 내가 그에게 다가갔다. 알렉스는 증오의 말도 조소도 하지 않은 채 내 어깨에 손바닥과 손등을 문질러 깨끗이 닦는다. 만일 누군가 알렉스에게 내가 오늘날 바로 그 행동을 토대로 그를, 판비츠를, 그리고 아우슈비츠와 도처에 있던 수많은 사람들을, 크고 작은 그 사람들을 판단하고 있다고 말해준다면, 그 가엽고 잔인한 알렉스는 굉장히 놀랄 것이다.


오디세우스의 노래


170.”Tu es fou de marcher si vite. On a le temps, tu sais."(그렇게 빨리 걷다니 당신 바보네요. 우린 시간이 있잖아요)


우리는 천천히 걸었다. 피콜로는 노련했다. 그는 영리하게도 멀리 돌아서, 누구의 의심도 사지 않고 적어도 한 시간쯤은 걸어갈 수 있는 길을 택했다. 우리는 집, 스트라스부르와 토리노, 우리가 읽은 책들, 공부 이야기를 나누었다. 어머니들에 대해서도, 두 어머니가 어찌 그리 닮았던지! 그의 어머니도 그가 주머니에 돈이 얼마 있는지도 모른다고 그를 나무라곤 했다는 것이다. 그의 어머니도 그가 잘 해냈다는 것을, 하루하루 잘 해내고 있다는 것을 알면 깜짝 놀랄 거라고 했다.


그 여름의 사건들


179.우리는 이곳에 오기 전 삶에 대한 기억들을 간직하고 있었지만 그것들은 흐릿했고 아득했다. 그래서 몹시 달콤하고 슬펐다. 각자의 유년 시절에 대한, 이미 끝나버린 모든 일들에 대한 기억처럼. 반면 수용소에 들어오는 순간 각자 전혀 다른 일련의 기억들이 시작되었다. 이것들은 날카롭고 가까웠다. 또한 매일 상처가 덧나듯 현재의 경험에 의해 계속 상기되었다.

 작업장에서 알게 된 소식들, 즉 연합군이 노르망디에 상륙했다는 것과 러시아의 공격, 히틀러 암살 기도 실패에 대한 소식들은 거센 파도와 같은 희망을 불러왔지만 일시적이었다. 하루가 다르게 기운이 빠져나가고, 살고자 하는 의지가 약해지고, 정신이 흐릿해지는 것을 우리 모두 느꼈다. 노르망디와 러시아는 너무나 먼 반면 겨울은 가까이에 다가와 있었다. 배고픔과 절망감은 너무나 구체적이었고 그 외의 나머지 것들은 너무나 비현실적이었다. 그래서 진흙창인 우리의 세상과 이제는 그끝을 상상하기도 힘든 황량하고 정체된 우리의 시간 외에 다른 세상과 시간이 존재할 것 같지 않았다.

살아 있는 인간들에게 시간의 단위들은 항상 어떤 가치를 지닌다. 그것을 통과해 살아가는 사람이 거기서 내적 자원을 많이 얻으면 얻을수록 가치도 더욱 커진다. 그러나 우리에게 한 시간, 하루, 한 달은, 즉 우리가 가능한 한 빨리 제거하고 싶었던 이 무가치한 잉여의 물질은 생기 없이, 그리고 항상 너무 느리게 미래로부터 과거로 내려앉았다. 하루하루 생기 있게, 소중하게, 돌이킬 수 없이 흘러가던 시기가 끝나고 잿빛의 불투명한 미래가 우리 앞에, 마치 넘을 수 없는 장벽처럼 서 있었다. 우리에게 이야기는 정지되어 있었다.


180.우리는 늘 똑같고 가혹할 정도로 긴 단조로운 하루하루보다, 그러니까 그 체계적이고 질서정연하게 더러운 부나에서의 노동보다 나쁜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우리가 내뱉었던 저주가 우리들 자신까지 덮쳐버려서, 부나가 무너지기 시작했을 우리는 생각을 바꿔야만 했다. 우리는 먼지와 뜨거운 건물 잔해 사이에서 땀을 흘려야만 했다. 우리는 분노한 전투기들을 피해 땅에 납작 엎드려 겁에 질린 짐승처럼 몸을 떨었다. 우리는 밤에 노역으로 만신창이가 된 채 갈증에 시달리며 수용소로, 바람이 많은 폴란드의 길고 긴 여름밤 속으로 돌아왔다. 우리의 수용소는 엉망진창이었다. 마실 물도, 씻을 물도 없었다. 텅 빈 배를 채워줄 죽도 없었다. 다른 사람에게 빵을 도둑맞지 않을 만큼의 불빛도, 어둡고 고함 소리 요란한 블록의 아침에 신발과 옷을 찾을 만큼의 불빛도 없었다.

부나의 독일 민간인들은 오랜 지배의 꿈에서 깨어나 자신의 파멸을 보고 있었지만, 그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확신에 찬 인간 특유의 분노를 품은 채 한없이 포악스러워졌다.


187.나는 지금 내가 이렇게 살아 있게 된 것이 로렌초 덕분이라고 생각한다. 물질적인 도움 때문이라기보다는 그의 존재 자체가 나에게 끝없이 상기시켜준 어떤 가능성 때문이다. 선행을 행하는 너무나 자연스럽고 평범한 그의 태도를 보면서 나는 수용소 밖에 아직도 올바른 세상이, 부패하지 않고 야만적이지 않은, 증오와 두려움과는 무관한 세상이 존재할지 모른다고 믿을 수 있었다. 정확히 규정하기 어려운 어떤 것, 선의 희미한 가능성, 하지만 이것은 충분히 생존해야 할 가치가 있는 것이었다.

 이 책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인간이 아니다. 그들의 인간성은 땅에 묻혔다. 혹은 그들 스스로, 모욕을 당하거나 괴롭힘을 줌으로써 그것을 땅에 묻어버렸다. 사악하고 어리석은 SS대원들, 카포들, 정치범들, 범죄자들, 크고 작은 일ㅇ르 맡은 특권층들, 서로 구별되지 않으며 노예와도 같은 해프틀링까지, 독일인들이 만든 광적인 위계질서의 모든 단계들은 역설적이게도 균등한 내적 황폐감에 의해 연결되어 있었다.

 하지만 로렌초는 인간이었다. 그의 인간성은 순수하고 오염되지 않았다. 그는 이 무화의 세상 밖에 있었다. 로렌초 덕에 나는 내가 인간이라느 사실을 잊지 않을 수 있었다.


1994년 10월


188.우리는 겨울을 맞지 않으려고 온힘을 다해 싸웠다. 우리는 따뜻한 시간에 매달렸다. 해질녘이면 아직 하늘에 남아 있는 해를 조금이라도 더 잡아보려고 애썼지만 다 부질없는 짓이었다. 어제 저녁, 해는 복잡하게 뒤섞인 공장 굴뚝과 전선들, 지저분한 안개 속으로 어쩔도리 없이 가라앉아버렸다. 그리고 오늘 아침은 한겨울이었다.

지난 겨울을 여기서 났기 때문에 우리는 이게 무슨 뜻인지 알고 있다. 다른 사람들도 곧 알게 ㅗ딜 것이다. 이것은 앞으로 몇 달 동안, 그러니까 10월부터 내년 4월까지 우리들 열 명 중 일곱 명은 죽는다는 뜻이다. 죽지 않은 사람은 매 순간, 매일매일, 하루하루 고통 속에 살아갈 것이다. 이른 새벽부터 저녁 죽이 배급될 때까지 끊임없이 근육을 긴장시키고, 이리 뛰고 저리 뛰고, 추위에 저항하기 위해 두 손을 겨드랑이 안에 끼워야 할 것이다. 빵을 주고 장갑을 장만해야 할 것이고, 장갑이 해지면 수선하느라 밤잠을 설쳐야 할 것이다. 밖으로 먹을 것을 가지고 나갈 수 없기 때문에 막사에서 각자 손바닥만 한 바닥을 차지하고 서서 식사를 해야 할 것이다. 침대에 기대어 먹는 것도 금지되어 있기 때문이다. 모두 손이 터질 것이고, 붕대를 얻으려면 매일 밤 눈보라 속에 서서 몇 시간씩 기다려야 할 것이다.

 우리의 배고픔이 한 끼를 굶은 사람의 그것과 같지 않듯이, 우리의 추위에도 특별한 이름이 필요할 것이다. 우리는 ‘허기’라는 말을 쓴다. ‘피로’, ‘공포’, ‘고통’이라는 말도 쓴다. ‘겨울’이라는 말도. 하지만 이것은 전혀 다른 것들이다. 자기 집에서 기쁨을 즐기고 고통을 아파하며 살아가는 자유로운 인간들이 만들어내고 사용하는 자유로운 단어들이다. 만일 수용소들이 좀더 오래 존속했다면 새로운 황량한 언어들이 탄생했을 것이다. 영하의 날씨에 바람 속에서 셔츠와 팬티, 올이 성긴 천으로 만든 윗도리와 바지만 입은 채, 더할 수 없이 허약해지고 굶주린 육체로, 종말이 다가와 있다는 것을 의식하면서 하루 종일 노동하는 것의 의미를 설명하려면 새로운 언어가 필요하다.


 희망의 끝이 보이듯, 그날 아침 겨울이 찾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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