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고 많은 동물 중에

하필이면 '고라니'로 농장
이름을 짓는 이유는
ㅡ 내가 농사 짓는 밭이
마을 어귀 언덕 아래에 있어
고라니가 드나드는 길목인 때문이다

우린 아직 제대로 만나진 못했는데,
지난 가을 그는 발자국으로 존재를 알렸고
나는 보리를 심어 인사를 했다.
그가 팥과 콩을 좋아한다고 들어
보리는 괜찮으리라 생각했다.

훌훌 손으로 뿌린 보리는
푸른 싹으로 겨울을 났고
얼고 녹으며 부푼 땅을
밟아주며 뿌리를 붙이는 요즘이다.
오늘 보리순을 따는데
손이 아닌 입으로 뜯은 듯한
흔적을 발견했다.
나물에 미친 놈이 아니고서야
풀을 입으로 따먹진 않을 것이다.
미친놈이 아니면 필시 짐승의 소확행.

끊긴 길이로 보아 그는 순차적으로
방문했(뜯어먹었)다.
한 달 전, 2주 전, 심지어 오늘 아침.
아무것도 모르고 실실거리며 왔다갔다 하던 나를
멀리서 비웃었을 그의 얼굴이
그려진다.
...
왕년 공군 중사였던 나는
소똥 묻은 작업복을 벗어던지고
화약 냄새 폴폴나는
총포소지허가증을 꺼내
오프로드 경운기에 시동을 건다.
손에 땀띠나는 추격전의 시작은
항상 그렇듯 ...잠깐 해본 망상.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고라니 농장이라고 이름지은 것은
건강한 공생을 고민해보겠다는 의미랄까
당하고만 살지 않겠다는 말이랄까
(지난 학창시절이 생각나..)
인간이라는 바위를 향해
내던져지는 고라니 계란을
기억하고 싶은 다짐이랄까

#하지만_만나면_강냉이_털릴_준비해라..

* 이번 겨울에 있었던 2주 간의 유해조수
포획기간 동안 홍성에서만 1200마리의
고라니가 죽었다고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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