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은 수로인가 수렁인가


팡팡이가 새끼를 낳았다. 팡팡이는 옆집에 사는 개 이름. 배가 좀 부른거 같더니, 어느날 홀로 새끼를 낳은 것이다. 강아지 8남매. 꼬물꼬물 엄마 젖을 찾아 기어다녔다. 무더위에도 지지않고 쑥쑥 자라 눈을 뜨더니 어느새 뛰어다녔다. 그러던 어느날, 지금까지 이런 일은 없었다. ’팡팡이들’이 집 옆 도랑에 모여 낑낑 거리고 있었다. 플륨관, ‘측구수로관’이라는 시멘트 수로에 새끼 한 마리가 빠져 버린 것이다. 사람에겐 무릎 깊이지만, 키작은 강아지에게는 만리장성처럼 높은 벽이었다. 어쩌지 못하는 것은 팡팡이도 마찬가지. 엄마도, 새끼도 당황하여 낑낑 울었다.


가을 추수 후, 농한기가 되면서 농수로에 플륨관들이 한참 설치됐다. 실로 관이라 할 법한 깊고 넓은 관이었다. 흙고랑이던 자연 수로 시절, 수로 관리가 매년 농사 전, 주요 행사였다고 한다. 같은 물길을 쓰는 사람들 모여 물길을 정비했다고. 플륨관은 한 번 설치하면 관리할 필요가 없다. 편리한 세상이야라고 하지만, 물에게는 갈 수 있는 길과 가지 못하는 길이 구분지어졌다. 물은 오로지 하천을 향해서만 흐르게 됐다. 땅으로 스며들어 지하수가 될 기회도, 수생식물을 통해 정화될 기회도 잃어버렸다. 무엇보다 플륨관은 작은 동물들, 지렁이, 붕어, 개구리, 뱀 등에게는 넘지 못하는 벽이 되었다. 들리지도 보이지도 않는 죽음은 목소리 없는 이들의 몫이다.


"밀양송전탑 싸움은 분명 이 사회에 중요한 화두를 던졌다. 막무가내의 핵발전소 증설과 그에 따른 장거리 송전선로가 야기하는 불의하고 모순에 찬 구조가 폭로되었다. 대기업을 위해 도시 생활자들의 맹목의 소비생활을 위해 누가 어떤 고통의 맷돌 속으로 내던져지는지를 밀양송전탑 싸움은 대낮처럼 드러내 보여주었다."


<고르게 가난한 사회>는 밀양송전탑반대대책위 사무국장 이계삼씨의 칼럼집이다. 도시로 보내는 전기를 위해 발전소가 세워지고 그 사이를 잇는 고압의 송전탑이 세워졌다. 장거리 송전의 효율을 위해 초고압으로 전기를 보낸다. 형광등이 켜질 정도의 고압인 송전탑의 전자파는 대단하다. 송전탑으로 마을은 찬성과 반대로 갈라졌다. 갈등이 깊어지며 죽는 이도 있었다.


"우리는 무언가를 남기기 위해 싸우는 것은 아니다. 이 불의한 힘 앞에서 굴복하지 않고, 죽지 않고, 살아남기 위해서이다. 서로 손을 놓아서는 안 되는 분명한 이유는 누군가가 손을 놓아 버린다면 또다시, 좌절과 우울을 견디지 못한 다른 누군가의 죽음이 예비될지도 모를 것이기 때문이다."


효율이라는 이름 앞에 송전탑 밑에 사는 사람들의 생존권은 고려사항이 아니다. ‘송전탑’을 다른 단어로 바꾸면 우리의 상황도 다르지 않다. 홍성은 이미 폐기물 처리장, 공장식 축산, 화력발전소의 미세먼지 같은 다른 ‘송전탑’을 살고 있다. 목소리 없는 자들의 들리지 않는 아우성. 남의 일이라고 지나칠 수 있다. 하지만 작은 것 다음의 작은 것은 바로 나라는 사실까지 우리는 지나 칠 수 없을 것이다. 이것은 수로인가 수렁인가. 지금까지 이런 나락은 없었다. <고르게 가난한 사회>는 우리 사회의 플륨관에 대한 이야기이다. 수렁에 빠진 우리 함께 실마리를 찾아보면 좋겠다.

'남자답게'라는 말을 들은 만큼 
'인간답게'라는 말을 들으며 자랐더라면.
나는 살고 있었을까
강박과 억압이 아닌 자유와 즐거움이 있는 곳에. 
위가 아닌 아래에
강함이 아닌 약함에 있는 
천국에.


서평 <보이지 않게 일하다 사라져버린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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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라운 자연의 세계 : 겨우살이의 마케팅  (2) 2013.02.15


구제역이 다시 기승을 부리고 있다. 축산농가도, 방역 당국도 긴급 사태에 돌입했다. 하지만 봄 황사 소식처럼 구제역이라는 제1종 가축전염병도 때마다 접해서인지 살충제 계란 파동 때와는 달리 언론에선 조용히 지나가는 기분이다. 구제역은 발굽이 두 개로 갈라진 동물, 돼지와 소가 걸리는 바이러스성 전염병이다. 다 큰 동물의 경우 감기처럼 앓지만 어린 동물의 폐사율이 높은 편이고, 전염성이 괴장히 높다. 세계동물보건기구(OIE)도 중요 가축 전염병으로 지정했다.

“우리가 걱정해야 하는건 우리와 함께해왔던 ‘적응한 바이러스’가 아니라 ‘새로운 돌연변이 바이러스’예요. 바이러스는 다른 생명체보다 돌연변이가 잘 일어나거든요. 과학자들과 보건 전문가들이 걱정하는 것도 바로 이 점이에요.”

계란, 고기, 우유. 우리가 자주 먹는 축산물이다. 농가 입장에서도 쌀, 야채보다 훨씬 더 돈이 되는 품목이다. 공장식 밀집 사육 덕분에 우리는 값싼 육식을 누리게 되었다. 하지만 이 축산물에 붙어있는 가격표는 전부를 말하고 있지 않다. 축산업의 문제로 악취와 분뇨처리 문제를 주로 말하지만, 이는 빙산의 일각일 수 있다.

“공장식 밀집사육이 바이러스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기회입니다. 면역력이 떨어진 약한 돼지들이 따닥따닥 모여 있으니 한 마리만 바이러스성 전염병에 걸리면 순식간에 전파되겠죠. 게다가 여러 돼지를 거칠수록 바이러스는 돌연변이가 점점 많이 일어나게 됩니다. 그리고 종간 장벽을 넘는 데에도 돼지가 중간에 다리를 놓는 경우가 많습니다. 바이러스의 복제 과정에서 여러 종의 A형 독감 바이러스가 섞여 나타나는 잡종 바이러스가 생겨나고 종간 장벽을 넘는 가능성이 높아집니다. 이럴 때, 돼지는 여러 바이러스의 혼합 용기 역할을 하는 셈이죠. ... 돌연변이가 생기면 기껏 만든 백신도 소용없게 되죠. 구제역 바이러스의 변이가 빠르게 진행되고 있습니다. 새롭게 유행하는 구제역 바이러스는 이미 백신을 만들 때의 바이러스에서 변이가 진행된 경우가 많습니다.”

유전자변형식품(GMO) 사료 문제, 살충제 파동으로 제기됐던 안전 문제, 가축을 기계로 보는 윤리 문제는 이미 일반 시민의 문제의식이다. 책<지구 멸망, 작은 것들의 역습>은 두 과학 선생님이 학생들과 ‘과학과 기술, 그리고 우리’라는 주제로 수업하며 나눈 고민을 활자로 묶은 것이다. 책에서는 우리가 눈으로 보지 못하는 것들, 작은 것들의 이야기를 한다. ‘세균’에 대한 이해는 빈번해진 구제역 문제를 눈앞의 ‘싼 가격’ 문제를 넘어 새로운 관점을 제시한다. 구제역과 조류독감이 계속 반복되는 이유는 뭘까. 눈앞의 가격때문에 ‘전체 비용’을 보지 못하는 건 아닐까. 방역비용, 건강비용, 환경정화비용 등 우리는 이미 외부비용을 내고 있다. 책은 우리에게 인간이 바이러스에 적응하는 속도를 놓치고 있다고 말한다.

“인간 호흡기를 통해 감염되는 조류 독감 바이러스의 출현은 충분히 가능성 있는 일입니다. 과학자들이 인위적으로 돌연변이를 과다하게 시켜보았을 때, 호흡기 감염이 가능한 치명적인 조류 독감 바이러스가 만들어진다는 것을 확인한 보고도 이미 있습니다. 그것은 실험실에서만 일어나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마세요. 자연적으로 발생 가능성이 희미하다고는 하지만 우리는 이미 자연적이지 않은 상황에 놓여있습니다. ... 우리는 실험실 밖에서 이미 그 실험을 진행하고 있다고 보는 것이 맞을 것입니다.”

기술의 발전이 문제를 해결해줄거라고 믿고 싶지만, 이 문제는 애초 기술의 발전이 가져온 것이다. 구원이 앞서는지, 파멸이 앞서는지 어느 쪽이 앞설까. 이 게임의 승자는 노약자는 아닐것이다. 동물이 행복해야 인간도 행복하다는 말의 의미를 곱씹어봐야 한다. 희망은 있다. 개인은 약하지만 협동의 힘은 세다. 우리지역 ‘생협’을 이용해 볼 수 있다. 자연 축산 혹은 유기축산물을 구매하면 어떨까. 구매로 이들의 생산방식을 지지하자. 가격표 너머 가격을 볼줄 아는 시민의식이 필요하다. 의회에서는 밀식 사육만이 아닌 소규모, 유기축산도 지원하는 조례를 제정하면 어떨까. 규모화로 인한 분뇨문제, 악취로 인한 주민갈등. 이 덫에서 나올 수 있는 방법을 사람들은 이미 증명하고 있다. 구제역이 말하는 홍성의 미래, 호소에 답할 때가 되었다.

옆집에 김태리가 산다면

임순례 감독의 <리틀포레스트>는 김태리 주연의 농촌 영화다. 청년 귀농귀촌이라는 시대적 바람에 불을 지피나 했지만, 아쉽게도 또하나의 먹방 영화로 소비되어 버렸다는 평도 있다. 그럼에도 영화는 농촌의 사시사철 아름다움과 고향으로 돌아온, 고향을 지키는 젊은이들의 나날을 잘 보여준다. 그 나날은 도시의 회색빛 삶과 다른 창연한 삶이다. 물론 내가 농촌에 내려와 살기에 그렇게 본 것일 수도 있다.

“세상에서 가장 멋진 꼬리를 가졌구나! 우린 멋진 친구가 될 수 있을 거야”

어느날 문을 열어보니 새끼 고양이 한마리가 집앞에 버려져 있다. 만화 같은 일이지만, 이 아기고양이를 처음 발견한 이는 쥐다. 당신이 쥐라면 어떻게 하겠는가. <고양이 낸시>는 이렇게 이야기를 시작한다. 서점도 있고, 식료품점도 있는 제법 그럴듯한 크기의 이 쥐마을에 아기 고양이가 입양되면서 일어난 일들이 담겨있다. ‘호랑이 새끼를 키우는건 아닐까’라는 불안과 생명에 대한 예의라는 문제를 두고 마을회의가 열린다. 쥐마을은 고양이를 받아들이기로 한다. 그 이후, 마지막 장까지 이어지는 화두는 두려움이 아니다. 

“넌 아주 조금 달라. 하지만 그게 절대 나쁜 것이 아니란다!” 

낸시는 이미 주민으로 받아들여졌다. 낸시가 받을 충격을 최소화하는 것, 그것이 이 쥐들의 고민이다. 낸시가 공동체의 일원이 되어가는 과정은 이주자로 살아가는 나와 공동체를 돌아보게 한다. 결국 <고양이 낸시>는 우리에게 공동체란 무엇인가를 묻는다. 쥐들이 낸시와 화합할 수 있었던 이유는 앞으로 도움이 될지 말지 같은 정치적이거나 경제적 논리에서 온 것이 아니었다. 쥐마을이 고양이 낸시를 포용할 수 있었던 힘은 무엇일까. 

“고양이라서 나쁘다고... 낸시는 마을에서 쫓겨나고 말거야. 그러니까 우리가 지켜 줘야 해. 낸시는 우리 친구잖아.”

앞서 영화 <리틀포레스트>에서 한켠 아쉬운 부분은 주변 이웃들과의 관계까지는 담지 못한 점이다. 다양한 사람과의 관계로 이루어지는 공동체의 삶이 개인의 내적 고민과 동갑내기 친구들 중심의 다소 평면적으로 그려져 있다. 현실의 농촌생활은 쥐도, 고양이도 힘들다. 파편화되고 각자도생인 농촌에 승자도 강자도 없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공동체 회복이라는 거창한 구호가 아니다. 내 집 앞의 또 다른 ‘김태리’와 ’아기 고양이’를 이웃으로 받아들일 때, 선주민이던 후주민이던 함께 고향을 만들어갈 때, 비로소 공동체의 침몰을 멈출 수 있다. 누구랄 것 없이 동등한 입장에서 두려움과 편견을 딛고 마음을 여는 것. 이것이 농촌이 처한 현재의 난관을 풀 수 있는 유일하고도 현실적인 방법아닐까.

http://www.hjn24.com/news/articleView.html?idxno=33703


2013년 여름,  터키 이스탄불에서 그리스 아테네를 향해 

자전거 페달을 밟던 더웁고 뜨겁던 그날을 여전히 기억한다.


이스탄불에서 자전거를 살 때까지 우린 즐거웠다. 2대 15만원에 싸게 샀다고, 

돈을 썼지만 번 기분, 요즘말로 개이득. 

그때까지 이스탄불이 아테네까지 1,000km가 넘게 떨어져 있다는 걸

자전거로 기껏 제주도나 한바퀴 돌아본게 전부인 나는 알지 못했다. 

꼬셔서 미안하다 영제야. 


벗어나고 내던지고 싶던 시간들이 6년이 지나 

물집도, 까만 피부도 없는 지금은 아름다운 ㅊ...은 개뿔... 

그때의 속좁음과 유치함으로 보지 못했던 시간을 본다. 

내 친구 가가멜 영제야 먼 타지에서 유학하느라 고생 많고나


#그래서_이번_주인공은_너야

터키-그리스 자전거여행 7번째 이야기

청춘읜 여행, 바람이 부는 순간 결론은 책광고 <청춘읜 여행, 바람이 부는 순간>


시금치된장국 랩소디

된장국, 농촌에 살며 처음 배운 요리다. 머리와 내장을 떼어낸 멸치. 냄비에 살짝 볶아 비린내를 날린다. 쌀뜨물을 부어 육수를 낸다. 양파껍질, 파뿌리도 넣어 국물을 내면 금상첨화. 건더기를 건져낸 후 마늘을 다져 넣고, 된장을 푼다. 씻어둔 시금치 투하. 국간장으로 간을 맞추고 파송송 썰어 넣으면 완성. 김장 김치까지 꺼내니 밥 한그릇이 뚝딱이다.

인도에 커리가 있다면 우리에게는 된장이 있는 것 아닐까. 커리가 모든 재료를 받아들이듯, 된장국도 그렇다. 어느 재료든 아우르는 포용력. 기본만 알면 얼마든지 응용 가능. 해산물이나 고기를 넣을 수도 있지만 제철 채소만 넣어도 완전하다. 봄에는 쑥과 냉이, 여름에는 감자, 가을에는 아욱, 겨울에는 시래기. 오늘은 시금치 된장국. 달큰한 겨울의 맛이다.

“대두로 두부를 만들어 간장에 찍어 먹는 아시아의 오랜 요리법은 대두를 아무 탈 없이 건강하게 먹을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방법이다. 대두는 주요 곡물이지만, 건강에 좋다고 할 수는 없다. 대두에는 각종 ‘반영양소’가 들어 있다. 반영양소는 인체의 비타민과 미네랄 흡수를 방해하고, 호르몬 체계를 교란하고, 우리 몸이 콩 단백질을 분해하는 것까지 막는다. 아시아의 음식문화는 이 가망 없는 식물을 영양가가 높은 음식으로 변화시키는 방법을 알아냈다.”

‘먹방’이 유행하는 시대. 누가 더 맛있게 먹는지, 시각효과에 오디오효과까지 총동원되어 우리 시선을 사로잡는다. 먹방의 아이콘이라 할 수 있는 연예인이 2018년 연예대상을 받았다. 먹방이 흥행하는 이유로 잦아진 외식을 꼽을 수 있다. 외식이라는 단어는 선진국 중산층 같은 느낌을 풍기지만, 끼니 때우기식인 이 시대의 외식은 마음 한켠을 불편하게 한다. 맛과 가격 중심의 ‘가성비’ 메뉴에 원재료의 출처와 첨가되는 조미료에 대해 말할 틈이 없다. 식사에 들이는 비용과 시간을 절약한 만큼 병원비와 같은 건강관리 비용이 늘었다.

“식사가 진화 과정의 산물이라면, 새로운 음식이나 요리는 돌연변이 같은 것이다. 그것이 혁명적 발전일 수도 있지만, 그렇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

<잡식동물의 딜레마>라는 베스트셀러를 쓴 마이클 폴란. 그는 식품의 산업화에 문제를 제기했다. 식품이 넘치는 시대에 우리가 무의식으로 느끼고 있는 빈곤이 무엇인지, 후속작 <마이클 폴란의 행복한 밥상>은 그 문제에 대한 답을 찾아가는 책이다. 저자는 ‘영양주의’의 함정에 빠져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 음식은 단순히 영양과 영양의 합이 아니며, 진짜 음식을 먹어야 한다고 말한다. “좋든 싫든 토양, 식물, 동물, 인간의 건강은 모두 연결되어 있다.” 집된장이 왜 더 맛있을까, 우리 땅에 나는 채소 모두와 어울리는 마성은 어디서 올까. 여기 혀끝 뿐만 아니라 허기까지 채워주는 그의 책으로 새해를 끓여보자.

기사보기: http://www.hjn24.com/news/articleView.html?idxno=33572


남해의 죽방렴 멸치


겨울 시금치, 마늘, 유채(가까운 쪽에서부터)가 심겨진 남해의 논


10여 년간 마을에 지속돼온 사랑방이 있다. 거창한 모임은 아니었지만 건강에 관심 있는 이들이었고, 매주 금요일에 모였다. 서로 안부를 나누며 뜸도 떴다. 뜸을 좁쌀 크기로 놓기 때문에 시력이 약한 사람은 놓기 어렵다. 등이나 허리는 혼자 놓기 더 어렵다. 그런 사람들도 사랑방에 왔고, 주민들은 서로 떠주었다. 2년 전 이 모임에 속해있던 두 사람이 고발을 당했다. 서로 뜸을 뜨는 것이 불법의료행위라는 것이었다. 뜸을 매개로 모이던 마을 사랑방이 사라질 위기에 처하게 됐다.

고발인은 대한한의사협회였다. 주민들은 정식 재판을 신청하고 변호인단도 구성했다. 여러 차례 공판이 있었고 1심 무죄 판결이 나왔다. 검찰은 항소했다. 법원은 2심 항소기각으로 무죄를 확정했다. 2년의 시간이 걸렸다. 협회가 고용한 파파라치가 시골 마을까지 찾아왔다는 점도 그랬지만 재판을 위해 대형 로펌까지 선임했다는 점에 주민들은 분노했다. 대한한의사협회에 속한 회원들이 악인은 아닐 것이다. 협회 내부에서도 자성의 목소리가 있었을 것이다. 합리적이고 지적인 개인들이 모였지만 협회 또한 ’집단’이라는 덫에 빠져버렸을 뿐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개인들이 집단으로 모이며 생기는 힘. 그 힘이 균형을 잃는 순간의 집단이기주의 말이다.

2018년 대한민국에서는 의료 서비스도 하나의 상품이고 돈을 버는 수단이다. 의사도 경쟁해서 살아남아야 한다. 그래도 협회의 힘이 향해야 할 곳은 작은 시골 마을의 사랑방이 아니라 더 큰 기득권이었어야 하지 않을까. 상품화를 가속화시키는 예방보다 치료 중심의 의료 체계라거나 우리 전통 의학에 대한 정책 개선 같은 것 말이다.

“우리는 머리로 생각만 해서는 안 되고, 동시에 연민심으로 행동을 해야 합니다. 그건 책임감이기도 합니다. 어떤 일을 할 때 그것이 좋은 일이건 나쁜 일이건 혼자서만 하는 게 아니라는 것을, 남들과 함께, 남들을 위해 그런 일을 한다는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부디 남이 잘됐으면 하는 배려로 우리 모두가 연결된다면 그때 우리는 함께 앞으로 나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스테판 에셀&달라이 라마 ‘정신의 진보를 위하여’


지금 여기의 사랑방은 살아남았지만 어떤 사랑방들은 사라졌을 것이다. 집단행동은 필요하다. 하지만 ‘집단의 힘’이 ‘공동체’를 위하고 있는지는 스스로 매순간 던져야 할 질문이다.


기사보기: http://www.hjn24.com/news/articleView.html?idxno=33380

우리마을 뜸방의 재판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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