쥐. 쥐가 나타났다. 슬그머니 부엌 한쪽 벽으로 빼꼼 고개가 나온다. 잠깐 눈치를 살피고 돌아가는듯 했다. 후다닥. 반대쪽 벽을 향한 질주. 하필, 그 한복판에 내가 있다. 생각했다 나는. 꿈을 꾸고 있다고.

처음 농가주택에 살며 쥐소리를 듣던 날이 생각난다. 와다닥. 뛰는 소리가 천장에서 들려왔다. 열두간지 중 자시(子時)의 주인답게 0시에 활발했다. 도시 촌놈으로써 내게 쥐는 동화 책 속의 동물이랄까. 어쩐지 집에 비누가 없어지고 있었다. 기분탓이라고 믿고 싶었다. 생각보다 크다. 적당한 둔기라고 잡은 게 고작 빗자루. ‘진짜 맞으면 어쩌지’라고 어중간히 내려친 빗자루에 쥐가 맞아줄리 만무. 쥐약을 또 놓아야 할까. 쥐약을 먹은 쥐는 집 밖으로 나가 죽는다고 한다. 구석에 놓아둔 쥐약이 없어지긴 하는데 사체를 보지 못하니 효과가 있는지 알 수 없다. 가장 확실한 만족을 얻는 건 역시 끈끈이. 눈앞에 결과가 보인다. 하지만 사체 처리가 문제.

 끈끈이에 잡힌 쥐를 본적이 있다. 찢어질 듯한 소리가 방에 울린다. 찍찍. 놀란 동료 쥐들도 함께 울었다. 한참 후, 이제 죽었으리라 다가가면 벌떡, 다시 곡을 한다. 검고 조그만 눈에 눈물이 고여있는 거 같이 보이기도 하다. 끈끈이를 반으로 접어 집 뒤에 묻었다. 여전 곡소리가 들리는 기분이다. 

 “어중뜨기 농사꾼에다 말류 소설가로 살면서 그나마 책 읽기조차 멀리하니 세상의 속내를 살필 눈이 있을 리 없다. 다만 내가 살아가는 농촌이라는 터전이 단말마의 고비에 처해 있다는 것, 어쩌면 인간의 건강성과 흙에 대한 추억이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마지막 인사를 우리에게 보내고 있다는 절박함이 조금이라도 전해졌으면 좋겠다.”

최용탁 <사시사철> 중

농부이자 소설가인 최용탁 씨는 책 서문에 이렇게 적었다. 농사지으며 지은 글의 부제는 ‘사시사철 기르는 생각 기르는 마음’이다. 충주에서 농사짓는 그의 글을 읽다보면 농촌에 살며 느끼는 울분과 고통이 우리 모두 함께 겪는 마음임을 알게된다.

가을 들판은 벼 수확이 한창이다. 대통령선거, 지방선거가 연달아 있었다. 요란한 행사는 지나갔는데, 그 이후 누구도 농민을 돌아보지 않는다. 농민들이 청와대 앞에서 한 달여의 단식 농성을 갖고서야 ‘농어업/농어촌특별위원회’ 설치를 ‘약속’ 받았다.

 최용탁 씨의 말대로 농촌은 지금도 농민 박멸을 향해 가고 있다. 스러져가는 농촌 이야기야 어제 오늘의 이야기가 아니지만, 쥐약을 보니 새삼 농촌의 모습이 떠오른다. 무엇이 덫인지, 쥐약인지를 가려 내는 건 농민 개인의 몫이다. ‘6차 산업’이 한물가니, 이제는 ‘스마트팜’ 시대가 열렸다. 농민 상부를 위한다는 농협의 마트에서조차 우리밀 제품 하나 찾기 힘든 현실인데 말해 무엇할까.

“밤콩을 털고 거름까지 다 내었으니, 올 농사는 그만이다. 김장도 여러 독 묻어 겨우내 맛이 들어 봄까지 갈 것이다. 산밤도 두어말, 고구마도 한 가마 턱은 되니, 구진한 겨울밤 간식거리도 넉넉하다.”

그럼에도 농민들이 지금 여기에 살아가는 이유는 무엇일까. 밭을 향하는 이유가 단순 배운 게 도둑질이라서가 아닌 농촌의 무언가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고향이 사라졌다는 사실은 갈수록 비통함을 더한다. 내 삶이, 뽑혀져 땡볕에 버려진 쇠비름처럼 시들부들한 이유가 고향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라고 스스로 진단하기도 한다.” 같이 고향을 지켜내는 일. 너도 약자이고 나도 약자임을 우리 깨달아 여기 가라앉고 있는 농촌을 함께 구하자고 손을 내밀 수 있을까. 

기사보기: http://www.hjn24.com/news/articleView.html?idxno=32744



호호에일 No. 16_스타우트(흑맥주)
_ 엿기름과 쌀, 민들레 뿌리

맥주는 보리를 발효한 술이다. 
보통 맥주를 만드는 보리는 2줄 보리이고, 
우리가 밥에 넣어 먹는 보리는 6줄 보리. 
2줄과 6줄은 한 줄기에 달린 알곡 숫자다.
2줄씩 맺으려다 보니 알곡이 더 크고
6줄씩 열려고 보니 알곡이 작다.
똑같은 양분을 2개로 나눌까 6개로 나눌까
엄 네이처의 선택이었달까.

큰 알곡과 작은 알곡의 차이라면
전분이 많고 적고의 차이이고, 
그 대신 전분 외의 성분이 적고 많고의 차이. 
그래서 
맥주에 2줄 보리를 대부분 쓰는 이유는
맥주를 맥주로 만드는 효모는
탄수화물만 먹기 때문이다. 다른 성분은 
잡식동물인 인간 입장에서 영양분이지,
당분만 먹는 효모에게는 그림의 떡.

6줄 보리를 쓴다. 
2줄 보리보 전분이 부족하기 때문에 
쌀을 넣는다. 쌀은 동네 형이 농짓고 찧 백미.
그 농부 이름 '하늬'를 따서
'하늬의 흑심'(가칭)이라고 한다.
가칭인 이유는 
- 좋아, 맛있으면 빌려줄 게
라는 저작권자의 조건때.

하늬형 최측근의 제보를 빌리자면
"맥주 맛도 모르는 주하늬가 뭐 이런..."
이 정도 난이도의 조건이랄까.

장작불로 불 피우고, '신토불이가 최고~"
라는 고루한 생각으로 만들고 있지만,
책도 읽고, 보리도 심고, 안주도 요리하며
놀고먹으며
100번쯤 만들면 하나쯤 건지지 않을까.

이것이 6줄 보리. 밥에 넣어 먹기도 하고, 식혜도 되고 엿기름도 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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탁탁. 영화를 보는 내내 드려오는 모닥불 소리. 겨울밤 언 몸을 녹이는 장작불이 아니다. 플라스틱과 비닐을 태워 살아가는 사람들의 소리다.

검은 연기 속에 사람들은 살아간다. 우리가 값싸게 쓰고 버리는 비닐세상 너머로 펼쳐진 세상. 이곳은 값싼 농산물 가격으로 도시 빈민으로 몰리는 중국 농민들의 생활현장. 폐비닐 속 양질의 비닐을 모아 녹여 플라스틱 알갱이로 만드는 플라스틱 공장 마을. 

보이지 않는다고 없는 것이 아니다. 이 다큐멘터리 이후 중국은 폐비닐 수입을 금지했고, 이제 이것은 우리 뒷통수로 다가올 문제다.

비닐을 효과적으로 재활용하는 방법은 없다. 사용을 줄이는 방법이 가장 좋다. 

그러자면 너무 값싼 비닐에 세금이 붙어야 한다. 세금을 물리자.




어쩌면 가습기 살균제 보다 더
당연했던, 살충제 계란 파동이 난리다.
그래서 나는 한편 반갑다.
이 기회에 '먹음'에 대해 생각해보았으면 좋겠다.

...

충남 홍성, 내가 사는 동네다.
사람보다 소, 돼지가 많은 동네.
농살이 3년차.
농촌에 살기 시작하면서 나는
우유와 삼겹살을 끊었다.
.
결론부터 말하면 살충제 계란의 원인은
공장식 축산에 있다.
사람보다 지구에 더 오래 살아온 닭에게 살충제가 필요하지 않았던 이유는 단순하다.
흙목욕을 하는 닭에게 진드기는 없다.
(함께 보면 좋을 다큐: MBC<육식의 반란>, SBS<옥수수의 습격>, MBC<검은삼겹살의 비밀>, EBS<가축의 권리를 말하다>)
.
사실 공장식 축산
(다르게 말하면 마더 네이쳐의 등골을 뽑아먹는 식문화)
에 대해 이미 오래전부터 경고가 있었다.
"거봐 내 그럴 줄 알았어~" 식의 자조를 하고 싶진 않다.
하지만, 이번 사태와 관련해,
1) '농업'은 친환경일 수 없다는 #황교익 씨의 발언(17.8.11. 뉴스공장)과
2) tbs 뉴스공장에서 #김어준 씨의 '친환경' 농장에서 더 많이 검출돼 충격이라는 발언(17.8.17)
을 들으며, 그와는 다른 생각이 있어 잔소리를 더한다.

1) 농업은 반-환경적이다(?)
맞는 말이다. 우리 시대의 농업은 환경 파괴적이다. 단일화, 대량화, 기계화... 등등으로 불리는 농업의 산업화. 이것에 대한 비판은 유기농업도 피해갈 수 없다. 하지만 맛칼럼니스트의 고민은 맛을 넘어 '먹음'까지로는 미치지는 못해 보인다. 그는 농업은 자연속에 인위적인(자연스럽지 못한) 생태계를 만드는 것이기에 "근본적으로" 친환경일 수 없다고 하였다. 나는 무릎을 치며, 아 역시갓교익씨은 멋쟁이.라고는 개뿔. 하, 이게 정녕 식문화를 논하는 우리 시대의 수준인가. '근본'을 아는듯 체하고 싶은 마음은 본인 일기장에서 했으면 좋겠다. 농업이 반-환경적이 된데는 착취에 근간한 식문화에 있다. 우리의 과도한 (육)식문화가 이 참사를 부른 것이다. 지금 시대의 육류 생산량은 기술발달이 이룩한게 아니다. 황금거위의 배를 가른것이다.
(함께 읽으면 좋을 책: <제3의 식탁>)

2) 바보야, 문제는 '친환경'이 아니고 친환경 '인증제도'야.
살충성분이 발견된 농가는 친환경 농가 '전체'가 아니다. '무항생제'농가다. 겨우 무항생제! 깊고 깊은 친환경 세상의 입구 정도에 서있는 '무항생제'인증 정도에서 살충성분이 나온 거다. 언론인들의 무신경이라고 볼 수도 있지만, 복잡 다단한 온갖 책상머리 인증들을 만들어 놓은 정책의 문제다.
(함께 읽으면 좋을 책: <누가 유기농을 망치나>)

결론은 동물이 행복하지 않으면 인간도 행복할 수 없다는 말이다.
그러기 위해선
1) 농부가 되자고(텃밭이라도 농사짓는 진짜 농부가 되자는 1차적인 의미를 포함하여 직거래 등의 확장적인 의미에서)
그게 어렵다면
2) 생협/유기농/제철/지역 농산물을 먹자고(불편하고 비싸다고 생각되지만, 나중에 치룰 비용을 생각해보자)
3) 초식주의자(채식과는 조금 다른 식문화다)가 되자고
말을 이제 시작하...려 했으나, 눈이 아파서 나중에 다시 하는 것으로 한다.

오랜만에 만든 영상.
우리동네의원의 개원3주년을 기념해서
장장 일개월의 게으름과 틈틈이 인터뷰와 며칠의 야근을 쏟았다.
어쩌다 보니 의료생협 영상을 매년 만들고 있다.
첫해는 나부터 동네 새내기라 누굴 만나야 할지 몰랐고 마주치는 대로 무작정 인터뷰를 했다. ...
두번째 해는 의료생협의 측근들을 만났다. 거기에 더해 지역 유지랄까, 저명한 분들을 주요하게 편집했다. 그럴듯해보이는 겉멋이랄까.


이번 영상은 얼굴있는 사람들의 치례가 아니라
정작 의원을 이용하는 사람들의 목소리랄까,
의원이 자리한 상하중(금평리)마을 주민들의 편지랄까.
가까이 사는, 이용하는 사람들의 마음이 궁금했다.
동영상 야근은 역시 눈알 빠지게 힘든 일이지만.
인터뷰를 하며, 영상을 편집하며,
즐거웠다.



ㅡ 육식주의자도 구원 받을 수 있을까

전국귀농운동본부 주관으로 매년 열리는 '내 손으로 만드는 햄, 소시지, 베이컨' 워크숍. 이 과정은 돼지 한 마리를 도축부터 발골, 가공, 시식까지 2박3일 간 이른바 '통-소화'를 한다. 이 글은 지난 2월 23일 경북 상주에서 열린 2018년 과정에 참여한 후기.

.........

그것은 눈 깜짝할새였다. ‘흑’. 짧은 비명조차 마음의 소리일 수 있다. 잠깐 다른 곳을 돌아보는 사이, 날카로운 칼이 그의 심장을 찔렀다. 움찔움찔. 피가 터져나온다. 전국 곳곳에서 모인 마음들, 부산하던 손들 모두 조용해졌다. 검은 털에 70kg 체중, 일 년 생 수컷, 그의 생이 마감되어 갔다. 이십여 명의 사람들과 한 마리 돼지. 다가오는 죽음을 그는 알고 있을까. 시간은 천천히 흘렀다. 눈 돌리는 이 없다. 피를 많이 흘리면 잠 오듯 죽음이 온다는데... 그가 평안하길 빈다.

사슴 눈의 선생님이 눈가 촉촉히 다가와 돼지 눈을 감겨준다. “잘 가라...” 꿈틀대던 돼지가 가만해진다. 분위기는 더욱 숙연하고 신비로워진다. “이제 갔네.” 다음 단계를 알리는 선생님과 다가가는 사람들. 하지만 숨은 질기다. 꿈틀거리는 돼지. 사람들은 깜짝. 다시 눈을 감기는 선생님. “잘 가라” 또 꿈틀. 잠시 계속되는 ‘잘 가라’ 예식 혹은 실랑이.

발골과 내장 정리. 돼지 몸은 사람 몸과 닮았다. 하나였던 몸이 부위별로 나뉘어 간다, 모락모락 더운 김을 내며. 뼈를 발라내는 과정은 머리보단 손의 일. 붓처럼 흐르는 칼. 칼 한자루로 이루는 유체이탈. 아, 발라버린다는 건 이런 말이군. 워크숍 준비물에 왜 눈 달린 칼은 없었나.

촉촉 눈망울 선생님이 돼지 내장을 설명한다. “이것이 식도입니다” 설명은 맛을 기준으로. “여기에 붙어있는 살이 정말 맛있습니다. 저는 이것부터 먹어요.” 만연한 선생님의 미소가 맛의 정도를 말한다. 피에 젖은 한 손엔 식칼을 또 한 손엔 내장을. (선생님 아까의 촉촉함은 어디로... )

햄, 소시지, 베이컨(이하 햄소베)은 각각 안심과 등심, 잡고기와 껍데기, 삼겹살과 갈비살로 만든다. 48시간 이상 숙성하면 좋다. 양념에 잰 고기를 용도에 따라 포장한다. 햄은 셀로판지에, 베이컨은 포장없이 그대로, 소시지는 재료를 모두 갈아 식용 콜라겐 껍데기에 넣는다-본래 소창을 쓰지만 우리는 순대 껍데기에 썼다. 모두 훈연통에 건다. 너무 뜨겁지 않은 연기를 낸다. (자세한 방법을 알고 싶으시면... 2019년 워크숍을 신청하시거나, 책 <내 손으로 만드는 햄 소시지 베이컨>을 읽으세요.)

귀농계에 전략공천이라도 있는 걸까. 어쩐지 상주 귀농 선생님들은 놀고먹기 어벤져스(팀)를 이룬다. 햄소베 선생님과 술 빚는 선생님, 가축 기르는 선생님과 바람잡이 선생님.


교육에 참가하기 전, 돼지를 잡는다고 하여 멱따는 소리를 떠올렸다. 망치로 정수리를 내려쳐 기절시킨 후, 돼지의 숨을 거두는 게 일반적인 모습. 말은 간단하지만 현실은 깔끔하지 않다. 살아있는 돼지의 정수리를 정확히 세게 내려치기는 어렵다. 전문 용어로 삑사리. 삑사리는 멱따는 소리를 의미한다. 고통과 공포의 비명이 마을에 울린다. (전하는 말로는, 친구의 친구가 호기롭게 망치로 돼지를 잡다가 멱따는 소리에 돼지 영혼이 씌어 그대로 집으로 돌아가 며칠을 앓았다고 한다. 나무아미타불)

이번 수업은 보통의 방법과 달랐다. 기절한 채 죽는 돼지와 달리 깨어있는 돼지는 ‘죽고 있음’을 알 테다. 어느 죽음이 더 평화로울까? 어느 죽음을 선택하겠느냐고, ‘돼화’를 나눌 수 있다면 마음이 편할까. ‘저승에 가느니 개똥밭에라도 구르겠네, 꿀꿀.’ 뼈와 근육, 오장과 육부. 내 몸과 닮은 그의 마음이 내 마음과 다르지 않겠지.

돼지 잡는 날은 잔칫날일 수밖에 없었겠다. 큰 돼지를 홀로 손질(소화) 할 수 없어, 남녀든 노소든 여러 손이 함께 한다. 뜨거운 물이 필요하고, 불은 나무에 피워야 제맛. 모닥은 원시의 마음을 깨우고, 인간은 불가에 모여 선다. 지글지글. 고기를 얹으니 불도 혀를 날름날름. 미안했던 마음이 살아나고 다물었던 입들도 열린다. 염라대왕 있는 저승까지 갈 것 없이, 다른 생명을 취하는 이유를 스스로에게 묻는다면 조그만 변명이 여기에 있지 않을까. 공동체를 위한 제물이라는 최소한의 예의 말이다.

우리는 더이상 햄소베를 만들지 않는다. 고기도 비닐에 쌓인 상품으로 만난다. 돼지 멱따는 소리를 들을 일 없으니 돼지에게 미안할 일도 없다. 햄소베 속 화학첨가물의 해로움에 대해 우리는 말한다. 천연재료에 대해, 좋은 고기에 대해 우리는 말한다. 하지만 우리가 잃어버린 것은 겨우 건강이 아니다. 햄소베를 먹고 나누던 시간은 말한다. 우리가 잃어버린 맛에 대해. 왁자지껄 불가에 모여 앉는 맛, 손맛, 나눠먹는 맛, 지혜와 배움의 맛, 고되고 번거로운 맛, 한 생명을 온전히 취하는 맛, 그러니까 사는 맛 말이다. 더 갖기 위해 우리가 치른 값은 무엇일까. 그것은 무엇이 중요한지 잃어버린 우리 삶, 인간성의 낭비 아닐까.


- 삼삼 선생님을 비롯한 상주 귀농 선생님들께 다시 한번 감사 인사드린다.


새해 인사이신가 쭈뼛 되돌아온 내게
마을 반장을 맡으라는 하명.

반장이라굽쇼!!
덜깬 잠이 번쩍.

기어이 올것이 왔구나.
반장 제의가 올터이나 이를 무르라는 귀뜸이 있은지 얼마였다.
옳거니. 입술이 달싹.
"이장님 죄송하지만 저.." 말을 꺼내려는 그때였다.
아니 잠깐... 문득 학교 권력의 앞잡이 노릇을 하던 학창시절이 떠올랐다.
그래, 감투의 맛은 달고도 달았더랬지.
수업시간에 떠든 놈들 이름을 적어
종례 때에 담임에게 보고하던 그 시절.
(후후)
.
.
마을 반장이 뭐겠느냐마는.
.
.
홍성에 내려와 산지 4년.
농촌살이의 즐거움 하나는

최근(이래봤자 5개월이 지남)
소속의 변동이 있었다.

같은 동네에서의 이동이었으나,
시민단체에서 영리기업으로
다른 업종으로의 이동이었다.
마을 단체들간의 협업(마을 자치)을 만드는 일에서
유기농 요구르트(돈)를 만드는 일로 이동.
.
요구르트라지만
건강한 기업 하나가 동네에 어떤 역할을 할 수 있는지 본다.
현금보기 어려운 농촌에 월급이라는 것이
동네 이모들(그리고 나)에게 어떤 의미인지.
마을 사람들의 자부심.
동네를 유지하는 힘이 되는 것을.
.
하지만
유기농이래도 축산업이라는 틀(한계)도 있다.
생명을 이용해 돈을 버는 것.

그렇지만 지역 운동 활발한 마을에 살아보니 이런 생각도 든다.
한계의 또 다른 이름이 '현실'이지 않을까는.
생명 철학에 근거한 유기농도 있지만
생계 수단으로써 또 하나의 농법인 유기농도 있다.

그런 이유로 나는 근사한 이유보다는
현실적인 이유가 만드는 힘을 배우는 중이랄 수 있다.

작년의 신고리 5, 6호기 원전 건설 중단 공론화 위원회는
경제성을 이유로 원전 건설 재개에 손을 들었다.
<2050충남 에너지 기획단>에 참여했던 경험에 의하면
탈석탄과 탈핵 같은 에너지 전환을 말하면 사람들은 자연스레
'불편'과 '상실'을 이야기한다.
과잉의 시대는 그렇게 말한다.
결국 삶의 전환없이 에너지 전환도 없다.

소박함과 충분함.
변화는 분명 멋진 것이다.

나는 믿는다.
마을이 전환의 본바탕이 될 것이라고.
그렇기에 농촌 공동체가 중요하다고.

지금은 불필요한 전깃불을 끄는 것도
안쓰는 전기코드를 뽑아놓는 일도
쓰레기통을 뒤져 분리수거를 하는 일도
우유를 하수구에 버리지 않고 퇴비화하는 일도
유난스러운 행태지만
지금 여기에서 시작이라고 믿는다.

앞으로는
생분해 플라스틱 포장이라거나 태양광 전기,
빗물 탱크라거나 더 행복한 젖소 목장 같은 일
함께 꿈꿔볼 수 있지 않을까.

그렇게 작은 기업이 마을을 유지하고
전환의 촛불을 켜는 일이 될 수 있지 않을까.

마을 반장이 뭐겠느냐마는
전깃불을 끄는 일이 뭐겠느냐마는
건강한 요구르트가 뭐겠냐마는
곁가지를 내어 본뿌리를 단디하는 정도.

작고 느리게
지금 이곳에서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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