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이 인간인가] 프리모 레비


배제와 혐오의 결론은 결국 수용소일 수 밖에 없다. 절제된 감정으로 전해지는 저자의 경험적 결론.

재판관은 저자 스스로가 아니라, 독자여야 한다는 그의 의지. 인류 스스로의 자신감이 극에 달해가던 시대의 산물. 전쟁.

책 내용, 문체 모두 좋지만


사실 이와 상관없이 지금 여기 내 개인의 시점에서는 책 제목이 넘나 공감되는 것. 


이것이 인간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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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말


개별적으로든 집단적으로든, 많은 사람들이 다소 의식적으로 이방인은 모두 적이다라고 생각할 수 있다. 이러한 확신은 대개 잠복성 전염병처럼 영혼의 밑바닥에 자리잡고 있다. 그것은 우연적이고 단편적인 행동으로만 나타날 뿐이며 사고체계의 밑바탕에 깔려 있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러한 일이 발생하면, 그 암묵적인 도그마가 삼단논법의 대전제가 되면, 그 논리적 결말로 수용소가 도출된다. 수용소는 엄밀한 사유를 거쳐 논리적 결론에 도달하게 된, 이 세상에 대한 인식의 산물이다. 이 인식이 존재하는 한 그 결과들은 우리를 위협한다. 죽음의 수용소에 관한 이야기는 모든 이들에게 불길한 경종으로 이해되어야만 할 것이다.



여행


15. 하지만 어머니들은 여행 중 먹을 음식을 밤을 새워 정성스레 준비했고 아이들을 씻기고 짐을 꾸렸다. 새벽이 되자 바람에 말리려고 널어둔 아이들의 속옷이 철조망을 온통 뒤덮었다. 기저귀, 장난감, 쿠션, 그리고 그 밖에 그녀들이 기억해낸 물건들, 아기들이 늘 필요로 하는 수백 가지 자잘한 물건들도 빠지지 않았다. 여러분도 그렇게 하지 않았겠는가? 내일 여러분이 자식들과 함께 사형을 당한다고 오늘 자식들에게 먹을 것을 주지 않을 것인가?

 


17. 기차는 열두 량이었고 우리는 650명이었다. 우리 객차에는 45명이 탔는데, 그 객차는 좁았다. 그러니까 그 유명한 독일 수송열차 중의 한 대가 우리 눈앞에, 바로 우리 발밑에 있었다. 한번 타면 결코 되돌아올 수 없다고, 우리가 두려움에 몸서리치며 그리고 반신반의하며 그토록 누누이 들어온 그 기차였다. 꼭 듣던 대로 였다. 사소한 것 하나하나에 이르기까지. 화물 객차 바깥에서 문이 잠겼다. 객차 안에서는 남녀노소가 싸구려 상품들처럼 무자비하게 포개진 채 무無를 향한, 아래쪽을 향한, 바닥을 향한 여행을 했다. 이번엔 그 객차 안에 있는 사람들이 바로 우리라는 점만 달랐다.


 


21. 우리는 작별인사를 했다. 간단한 인사였다. 모두 옆 사람들에게 인사를 하며 삶에 작별을 고하고 있었다. 더 이상 두려움도 없었다.


클라이막스는 갑자기 들이닥쳤다. 기차 문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열리더니 뚝뚝 끊어지듯 야만적으로 들리는 낯선 외국어의 명령들이 어둠 속에서 메아리쳤다. 목소리의 주인은 지휘를 맡은 독일인들이었다. 그들은 마치 수 세기에 걸친 분노를 방출하는 듯했다.



     

바닥에서


34. 우리는 처음으로 우리의 언어로는 이런 모욕, 이와 같은 인간의 몰락을 표현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순식간에, 거의 예언적인 직관과 함께 현실이 우리 앞에 고스란히 정체를 드러냈다. 우리는 바닥에 떨어져 있었다. 밑으로는 더 이상 내려갈 곳이 없었다. 이보다 더 비참한 인간의 조건은 존재하지도 않았고 상상할 수도 없었다. 이보다 더 비참한 인간의 조건은 존재하지도 않았고 상상할 수도 없었다. 우리 것은 이제 아무것도 없었다. 그들은 옷, 신발, 심지어 머리카락까지 빼앗아갔다. 우리가 말을 해도 그들은 우리의 말을 듣지 않을 것이다. 설사 들어준다 해도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그들은 우리의 이름마저 빼앗아갈 것이다. 우리가 만일 그 이름을 그대로 간직하고 싶다면 우리는 우리 내부에서 그렇게 할 수 있는 힘을 찾아내야만 할 터였다. 그 이름 뒤에 우리의 무엇인가가, 우리였던 존재의 무엇인가가 남아 있게 할 수 있는 힘을 찾아내야만 했다.


50. 그러니까 나는 바닥에 있다. 사람들은 어쩔 수 없을 경우 과거와 미래를 지워버리고 새로운 것을 아주 빠르게 배워나간다. 수용소에 들어온 지 보름 뒤에 나는 이미 규칙적으로 배가 고팠다. 자유로운 인간들은 알지 못하는, 밤이면 꿈을 꾸도록 만드는, 우리 몸 구석구석에 자리잡은 만성적인 허기다. 나는 이미 도둑맞지 않는 법을 익혔다. 그리고 주인 없는 숟가락이나 철사, 단추를 발견했을 때 처벌의 위험만 없다면 주머니에 넣고 그것을 완전히 내 것이라고 생각했다. 내 발등에는 벌써 치료 불가능한 상처가 아무 감각도 없이 곪아가고 있다. 나는 수레를 밀었고, 삽질을 했고, 비에 젖었고, 바람에 몸을 떨었다. 내 육체는 이미 내 것이 아니었다. 배는 볼록하게 나왔고 팔다리는 장작개비 같았으며 얼굴은 아침이면 부었다가 저녁이면 홀쭉해졌다. 우리들 중 어떤 사람은 피부가 누렇게 혹은 잿빛으로 변했다. 사나흘 만나지 못하면 서로를 알아보기도 힘들었다.


우리 이탈리아인들은 매주 일요일 저녁 수용소 한쪽 귀퉁에서 만나기로 약속했다. 하지만 곧 그만두어야 했다. 숫자를 세는 게 너무 슬펐기 때문이다. 우리의 수는 매번 줄어들었고 매번 몰골이 더 사납고 더 비참해졌다. 모임에 나가려고 몇 발짝 떼어놓는 것도 힘이 들었다. 게다가 다시 만나게 되면 필연적으로 기억을 떠올리고 생각을 하게 되었는데, 그렇게 하지 않는 편이 더 나았다.



입문


56. 내가 왜 씻어야 한단 말인가? 그러면 내게 도움이라도 된다는 건가? 내가 누구의 마음에 더 들게 되기라도 한다는 건가? 하루, 아니 한 시간이라도 더 오래 살 수 있단 말인가? 아니, 그 반대다. 오히려 수명이 더 짧아질 것이다. 씻는 일도 노동이고 에너지와 칼로리의 낭비니까. 슈타인라우프는 우리가 석탄 자루 밑에서 30분만 낑낑대노라면 자기와 내가 구분조차 안 된다는 것을 모른단 말인가? 곰곰이 생각할수록, 이런 생활환경에서 얼굴을 씻는다는 것은 어리석고 심지어 무례하기조자 한 것 같다. 이것은 기계적인 습관일 뿐이다. 더 심하게 말하면, 절멸의 의례를 처량하게 반복하는 것일 뿐이다. 우리는 모두 죽을 것이다. 아니, 이미 죽기 시작했다. 기상과 노동 사이에 여유 시간이 10분 밖에 없다면, 나는 그 시간을 다른 데 쓰고 싶다. 나 자신 속으로 침잠하여 결산을 하거나, 이것이 어쩌면 마지막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며 하늘이나 바라보고 싶다. 아니면 아주 잠시나마 한가로움이라는 사치를 즐기도록, 그냥 그렇게 살아 있도록 내버려두고 싶다.


카베(병동)

60. 인간만이 이름을 가질 가치가 있으며 눌아흐첸은 더 이상 인간이 아니라는 것을 모두 알고 있는 듯하다. 나는 그 자신도 자기 이름을 잊어버렸다고 생각한다. 물론 그는 정말 그런 것처럼 행동한다. 말할 때, 바라볼 때, 완전히 텅 비어 있는 것 같은, 껍데기 밖에 남지 않은 것 같은 인상을 준다. 마치 늪 가장자리에 길게 늘어선 돌멩이들에 달라붙어 있다가 바람에 흔들리는 곤충의 허물 같다.


눌아흐첸은 굉장히 어리다. 이것은 매우 위험하다. 청소년들이 어른보다 노역과 배고픔을 참지 못하기 때문만은 아니다. 여기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에 단련되어 있어야 하는데, 젊은이들이 그러기란 매우 어려운 일이다. 눌차흐첸이 특별히 허약한 것은 아니지만 모두들 그에게 일을 시키지 않으려 한다. 그는 모든 일에 심드렁해서 힘든 일이나 구타를 피하려고도, 음식을 구해보려고도 하지 않는다.



그에게는 짐수레를 끄는 말만큼의 영리함도 없다. 말도 완전히 탈진하기 조금 전에 걸음을 멈춘다. 하지만 그는 기운이 완전히 바닥날 때까지 수레를 밀고 끌고 옮긴다. 그러고는 예고의 말 한마디 없이, 슬프고 우울한 눈을 땅에서 떼지도 않은 채 갑자기 쓰러져버린다.


63. 이번에는 내가 앞에 설 차례다. 받침대는 무겁지만 아주 짧다. 걸을 때마다 눌아흐첸의 발이 자꾸 내 발에 걸린다. 그가 내 걸음을 따라올 수 없거나 신경을 쓰지 않기 때문이다.

 스무 발자국 정도 걸어 우리는 철로에 도착한다. 넘어야 할 케이블이 있다. 짐은 제대로 놓여 있지 않고 뭐가 문제인지 어깨에서 자꾸 미끄러지려 한다. 쉰 발자국, 예순 발자국. 창고 문이다. 온 만큼의 거리를 다시 걸어가야 짐을 내려놓을 수 있다. 됐다. 더 걷는다는 건 불가능하다. 이제 짐의 무게는 온전히 내 팔에만 쏠려 있다. 아픔과 극도의 피로를 더 이상 견딜 수가 없다. 나는 소리치며 뒤로 돌아서려 한다. 바로 그때 눌아흐첸이 발을 헛디디며 모든 걸 집어던지는 것이 보인다.

 내가 예전처럼 날렵했다면 재빨리 뒤로 물러섰을 것이다. 하지만 다음 순간 나는 근육이 경직된 채 땅에 쓰러져 두 손으로 다친 발을 움켜쥐고 있었다. 너무 아파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무쇠의 뾰족한 모서리가 내 왼쪽 발등을 찍어버린 것이다.

 현기증 나는 통증 때문에 한동안 모든 것이 지워져버린다. 주위를 돌아볼 수 있게 되었을 때, 아직도 그 자리에 서 있는 눌아흐첸이 보인다. 그는 주머니에 두 손을 찔러넣은 채 꼼짝도 않고 한마디 말도 없이 무표정하게 나를 쳐다보고 있다.


70. 그는 나보다 머리 하나만큼 키가 더 컸지만 아주 친절해 보이는 인상이다. 배고픔을 겪지 않은 사람만이 그런 인상을 지닐 수 있다.


나는 언제 우리를 들여보내줄지 아느냐고 그에게 물어보았다. 그가 간호사를 향해 돌아섰다. 그와 쌍둥이처럼 닮은 남자 간호사는 구석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다. 두 사람은 이야기를 나누고 웃어대기만 할 뿐 내 말에 대답을 하지 않았다. 꼭 내가 그 자리에 없는 것 같았다. 이윽고 그들 중 하나가 내 팔을 잡더니 팔뚝에 새겨진 숫자를 보았다. 그러더니 더 크게 웃었다. 174,000번대가 이탈리아 유대인이라는 걸 모두 알고 있다. 두 달 전 도착한 이 유명한 이탈리아 유대인들은 모두 변호사, 대학 졸업자들이었는데, 처음엔 100명이 넘었으나 어느새 40명밖에 남지 않았다. 일할 줄 모르고, 빵을 도둑맞고, 아침부터 밤까지 얻어맞는 사람들이다. 독일인들은 이들을 왼손만 두 개라고 부른다. 심지어 폴란드 유대인들까지 이들을 무시하는데, 그건 이들이 이디시어를 할 줄 모르기 때문이다.


간호사가 남자에게 내 갈비뼈를 가리킨다. 내가 해부실의 시체라도 되는 듯이. 이어서 내 눈꺼풀과 부은 뺨, 가느다란 목을 가리켰고, 몸을 구부려 내 정강이뼈를 검지로 누른 뒤 밀랍처럼 창백한 내 살에 남은, 푹 들어간 손가락 자국을 보여준다.


폴란드인에게 말을 걸지 말았어야 했다. 내 평생 이보다 더 무례한 짓은 당해본 적이 없는 것 같다. 그 사이 간호사는 알아들을 수 없어 끔찍하게만 들리는 자신의 언어로 실연 설명을 다 끝낸 것 같다. 폴란드인이 내게 돌아서더니 독일어 비슷한 말로 너그럽게 요점만 정리해준다. “유대인, 너는 끝이다. 너는 금방 화장터로 간다. 끝이다


 


80. 카베는 육체적으로 가장 편한 수용소다. 그래서 아직 의식의 씨앗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거기서 의식이 다시 깨어난다. 그리하여 공허하고 긴날, 허기나 노동이 아닌 다른 것들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리고 그들이 우리를 어떤 상태로 만들려고 한 것인지, 우리 중 몇 명이나 죽었는지, 이것이 어떤 삶인지 진지하게 생각하게 된다. 상대적으로 평화로운 울타리인 카베 안에서 우리는 우리의 인간성이 아주 연약한 것이며 이 인간성이야말로 우리 생명보다 더 위태롭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므로 지금 우리를 위협하고 있는 이런 큰 위험을 상기시키는 게 옳았을 것이다. 수용소 안에서 자유로운 인간들에게 메시지를 전하는 것이 가능했다면 그 내용은 바로 이런 것이었으리라. 지금 여기서 우리를 괴롭히는 것을 당신들 지에서 겪지 않도록 주의하시오.


일을 하면 힘이 들고 생각할 시간이 없다. 우리의 집은 기억할 거리도 못 된다. 하지만 여기서는 시간이 있다. 침대에서 침대로 이동하는 것은 금지되어 있지만 그래도 서로를 찾아다니고, 이야기를 나누고 또 나눈다. 아픈 인류로 미어터질 듯한 막사에 언어가, 추억이, 다른 아픔이 들어찬다. 다른 아픔이란 독일어로 하임베(향수병)’라는 것이다. ‘집을 향한 아픔이라는 뜻의 아름다운 단어다.


우리는 우리가 어디서 왔는지 알고 있다. 바깥 세상에 대한 기억들은 우리의 꿈을, 깨어 있는 시간을 가득 채운다. 놀랍게도 우리가 아무것도 잊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떠오르는 모든 기억이 고통스러울 정도로 선명하게 우리 앞에 모습을 드러낸다.



그러나 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는지 알지 못한다. 어쩌면 이 병을 이기고 살아남을 수도, 선발을 피할 수도, 어쩌면 우리를 소진시키는 노동과 허기까지도 이겨낼 수 있으리라. 하지만 그러고 나면? 욕설과 구타로부터 일시적으로 멀어진 이곳에서 우리는 우리들 자신 속으로 다시 들어가 생각을 할 수 있었다. 그러자 우리가 돌아갈 수 없을 거라는 사실이 또렷해진다. 우리는 아무것도 볼 수 없도록 가려진 열차에 갇혀 여기까지 왔다. 우리의 여인들과 아이들이 무를 향해 떠나는 것을 지켜보았다. 우리는 노예가 되어, 이름 없는 죽음을 맞기 훨씬 전에 먼저 영혼이 죽어, 수백 번 행진하고 말없이 중노동을 했다. 우리는 돌아가지 못하리라. 아무도 여기서 나가선 안 된다. 팔뚝에 새겨진 숫자를 들이대며, 아우슈비츠에서는 인간이 인간으로 하여금 무슨 짓이든 하게 만들 수 있다는 불길한 소식을 세상에 전해서는 안 된다.


우리의 밤


 


87. 나는 너무 피곤하고 얼이 빠진 상태다. 나 역시 금세 곯아떨어진다. 마치 철로 위에서 잠드는 것 같다.


기차가 막 도착한다. 기관차가 씩씩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바로 내 옆에 있다. 나는 아직 깊이 잠들이 않아 그 기관차의 이중성을 알아차린다. 그것은 오늘 우리가 짐을 하역한 화차들을 끌고 온 기관차다. 아까 우리 옆을 지날 때처럼 지금도 그 검은 옆구리에서 뿜어져나오는 열기를 느낄 수 있기 때문에 그 기관차라는 것을 알아볼 수 있다. 기관차가 연기를 내뿜으며 점점 더 가까워진다. 거의 나를 칠 것 같다. 그러나 기차는 결코 도착하지 않는다. 내 꿈은 아주 가볍다. 아주 얇은 베일이다. 내가 원한다면 찢어버릴 수도 있다. 그렇게 할 것이다. 그걸 찢어리고 싶다. 그렇게 해야 내가 철로에서 벗어날 수 있다. 난 그렇게 하고 싶었다. 그런데 잠이 깬다. 완전히 깬 것은 아니고 조금 깨어나 무의식과 의식 사이의 계단에서 한 칸 더 올라간다. 나는 눈을 감는다. 잠이 달아날까봐 눈을 뜨고 싶지 않다. 그러나 소리는 들을 수 있다. 멀리서 들려오는 기적 소리는 현실이 분명하다.


 


88. (공통의 꿈) 여기 내 누이가 있다. 그리고 정확히 누구인지 알 수 없는 내 친구들 몇 명과 다른 사람들이 많이 모여 있다. 모두 내 이야기를 듣고 있다. 이야기는 이렇다. 세 가지 음으로 이루어진 경적 소리, 딱딱한 침대, 옆으로 밀어버리고 싶지만 나보다 훨씬 힘이 세기 때문에 잠을 깨울까 두려운 내 옆 사람 이야기다. 우리의 허기, 이 검사, 내 코를 주먹으로 때렸다가 피가 나니까 가서 씻고 오라고 한 카포에 대해 산만하게 이야기한다. 내 집에 돌아와 친한 사람들 속에서 여러 가지 이야기를 할 수 있다는 것은 강렬하고 구체적이고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기쁜이다. 그러나 청중들이 내 말을 듣고 있지 않다는 게 빤히 보인다. 그뿐 아니다. 그들은 완전히 무관심하다. 그들은 내가 그 자리에 없는 것처럼, 자기들끼리 전혀 다른 이야기를 정신없이 나눈다. 누이가 나를 보더니 자리에서 일어나 아무 말 없이 그곳을 떠난다.


마음속에서 황폐한 슬픔이 서서히 자라난다. 현실감각이나, 갑자기 침입하는 외적 요인 따위에 길들여지지 않는 순순한 상태의 고통이다. 어린아이들을 울리는 것과 비슷한 아픔이다. 다시 한 번 표면으로 헤엄쳐 올라가는 것이 더 나을 것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단호히 눈을 뜬다. 내가 실제로 깨어 있음을 확인해줄 어떤 것을 내 눈앞에서 찾기 위해서.


아직도 따뜻한 꿈이 내 앞에 있다. 잠을 깨기는 했지만 여전히 그 꿈의 고통에 사로잡혀 있다. 그때 이것이 우연한 꿈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제 나는 완전히 맑은 정신을 되찾는다. 이 꿈 이야기를 이미 알베르토에게 했던 것이 생각난다. 그리고 놀랍게도 그가 자기도, 또 다른 많은 사람들도 그런 꿈을 꾼다고 털어놓았던 것도 생각난다. 그는 어쩌면 모든 사람들이 그런 꿈을 꿀지도 모른다고 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날까? 왜 매일매일의 고통이, 우리가 이야기를 하는데 아무도 들어주지 않는 장면으로 거듭해서 꿈으로 번역되는 걸까?


나는 이런 생각을 하면서, 불멸의 시간을 이용해 조금 전 꿈속의 고통스러운 잔영들을 내 몸속에서 떨쳐버리려고 했다. 그래야 다음 꿈의 본질과 타협하지 않을 수 있을 테니까. 나는 어둠 속에 웅크리고 앉아 주위를 둘러보며 귀를 기울인다.



잠자는 사람들의 숨소리와 코고는 소리가 들린다. 신음을 하거나 잠꼬대를 하는 사람도 있다. 많은 사람들이 입술을 핥으며 턱을 움직인다. 음식을 먹는 꿈을 꾸는 것이다. 이 역시 집단적인 꿈이다. 가혹한 꿈이다. 탄탈로스의 신화를 만든 사람은 틀림없이 알 것이다. 음식이 눈에 보일 뿐만 아니라 확실히 구체적으로 손에 느껴진다. 풍요롭고 강렬한 음식 냄새도 맡을 수 있다. 어떤 사람은 음식을 입술에 닿을 정도로 가까이 가져간다. 그러다 매번 다른 어떤 상활이 끼어들어 그 행위의 완성을 방해한다. 그러면 꿈은 흩어져 그 꿈을 이루던 기본적인 요소들로 나뉜다. 잠시 후 그것들이 다시 모여 비슷하면서도 어딘가 달라진 꿈이 다시 시작된다. 우리 모두에게, 매일 밤, 잠을 자는 내내 쉼 없이 이런 일이 일어난다.


우리의 밤은 그렇게 흘러간다. 탄탈로스의 꿈과 이야기의 꿈이 점점 더 구별하기 힘든 이미지들의 천으로 짜여나간다. 굶주림과 구타, 추위와 노동, 두려움과 혼란으로 뒤범벅된 낮의 고통이, 밤이 되면 전대미문의 폭력이 담긴 무형의 악몽으로 변한다. 자유로운 삶에서는 열에 들뜬 날 밤에나 나타나는 것들이다. 매 순간 공포로 얼어붙어, 사지를 떨며, 부노에 가득 찬 목소리가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로 명령을 외치는 듯한 느낌 속에서 잠을 깬다. 통으로 이어지는 행렬, 맨발의 뒤꿈치가 나무 바닥을 무겁게 디디는 소리가 다른 상징적 행진으로 바뀐다. 우리는 회색이고, 모두 똑같고, 개미처럼 작기도 하고 달에 닿을 정도로 크기도 한데, 셀 수 없이 많은 수가 서로 딱 달라붙어 지평선까지 평야를 온통 뒤덮고 있다. 간혹 우리는 하나의 물질로 녹아내리기도 한다. 그러면 우리는 슬픔의 덩어리가 되어, 서로 뒤엉켜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한다. 또 때로는 시작도 끝도 없이 원을 그리며 행진을 한다. 눈이 핑핑 돌 정도로 현기증이 나고 욕지기가 가슴에서 목으로 강물처럼 밀려 올라온다. 배고픔 또는 추위, 혹은 팽창된 방광이 우리의 꿈들을 깨워 꿈의 요소들을 일상으로 되돌려놓을 때까지. 우리는 악몽 그 자체 혹은 고통이 우리를 깨웠을 때, 그 요소들을 찾아내 각각 따로따로 현재의 관심거리 밖으로 쫓아내려 한다. 우리의 잠이 다시 침입당하지 않도록 그렇게 하는 것이지만 별 소용이 없다. 눈을 감자마자 다시 한 번 뇌가 우리의 의지를 벗어나 움직이는 것이 느껴진다. 뇌는 휴식하지 못한 채 신호를 보내고 윙윙 소리를 내며 환영들과 무시무시한 기호들을 만들어낸다. 그리고 쉴 새 없이 꿈이라는 장막 위 회색 빛 안개 속에 그것들의 이미지를 투사하거나 만들어낸다.


그렇게 밤새도록 자다 깨고 악몽이 교차하는 가운데, 기상 시간을 가늠하거나 그것을 두려워하느라 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한다. 많은 사람들이 경험하는 신기한 능력에 따라 우리는 시계가 없는데도 곧 기상 사이렌이 울리리라는 것을 아주 정확히 예측할 수 있다. 기상 시간은 계절에 따라 변하지만 언제나 아주 이른 새벽이다. 수용소의 사이렌이 아주 오랫동안 울린다. 그러면 각 막사의 불침번이 근무를 끝낸다. 그는 불을 켜고 일어나 몸을 쭉 편 뒤 매일 똑같은 판결을 내린다. “기상


 


94. 낯선 외국어가 모든 사람들의 정신의 밑바닥으로 돌덩이처럼 떨어진다. ‘기상’. 따뜻한 담요가 만들어내는 몽환적인 경계, 잠이라는 튼튼하지 못한 갑옷, 고통스럽기도 한 밤으로의 탈출, 이 모든 것이 산산조각난다. 우리는 다시 무자비하게 잠에서 깨어나 벌거벗고 연약한 상태에서 잔인하게 모욕에 노출된다. 이성적으로는 그 끝을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긴, 다른 날과 똑같은 하루가 시작된다. 너무나 춥고 너무나 배고프고 너무나 힘이 들어 그 끝은 우리와 더 멀어진다. 그러므로 회색빛 빵 한 덩이에 우리의 관심과 욕망을 집중시키는 것이 더 낫다. 빵은 작지만 한 시간 후면 틀림없이 우리 것이 된다. 그것을 집어삼키기 전까지 5분 동안 그것은 이곳에서 우리가 합벅적으로 소유할 수 있는 모든 것으로 변할 수 있다.


...


나는 침대를 정리하고 옷을 입은 뒤 바닥으로 내려와 신발을 신는다. 그러자 아물지 않은 발의 상처가 다시 벌어지고 새로운 하루가 시작된다.


 


노동


99.침목들은 땅에 박혀 있고 무게가 80킬로그램이다. 우리가 쓸 수 있는 힘의 한계에 가깝다. 우리들 중 제일 건장한 이들이 둘씩 짝을 지어 일해도 몇 시간이 걸려야 침목을 옮길 수 있을 것이다. 나에게는 고문과 같다. 거의 맹목적으로, 있는 힘을 다해 첫번째 침목을 옮기고 난 뒤 내 어깨뼈가 고장난다. 어떤 비열한 행동을 해서라도 두번째 운반은 피해야 한다.


레스닉과 짝이 되어야 한다. 그는 훌륭한 일꾼처럼 보이고, 또 키가 크기 때문에 짐 무게의 대부분을 지탱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레스닉이 무시하듯 나를 거절하고 다른 튼튼한 사람과 짝이 되는 게 자연스러운 이치임을 잘 알고 있다. 그렇다면 변소에 간다고 말해 허락을 받은 뒤 가능한 한 오래 그곳에 머물러 있자. 곧 발각이 되어 웃음거리가 되고 구타를 당할 것이 확실할 정도로 오래, 변소에 몸을 숨기고 있을 테다. 그렇게 하는 것이 일하는 것보다는 낫다.


 하지만 아니었다. 레스닉은 나를 짝으로 받아들인다. 뿐만 아니라 혼자서 침목을 들어올려 조심스럽게 내 오른쪽 어깨 위에 올려놔준다. 그리고 다른 쪽 끝을 들어 자기 왼쪽 어깨 위에 올리고 출발한다. 


 눈과 진흙이 달라붙은 침목은 걸음을 옮길 때마다 내 귀를 쳐서 붙어 있던 눈이 떨어져 목으로 흘러내린다. 50걸음쯤 걷고 나자 일반적으로 인내력이라고 부르는 것의 한계에 다다른다. 무릎이 저절로 구부러지고 어깨는 바이스로 죄는 것처럼 쑤시고, 균형을 잃을 위기에 처한다. 걸음을 떼어놓을 때마다 발이 푹푹 빠지는 진흙 속에, 내 일상을 늘 실수투성이로 만들어놓으려고 사방 어디에나 매복하고 있는 이 폴란드의 진흙 속에 신발이 빨려 들어가는 기분이다.




 나는 입술을 꽉 깨문다. 작은 외적 통증을 자신에게 부과하는 것이 남아 있는 마지막 힘을 끌어 모으는 자극제가 된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카포들도 그것을 안다. 몇몇 카포들은 단순히 잔인하고 폭력적이어서 우리를 구타하지만, 어떤 카포들은 사나운 말을 다루는 마부들처럼 독려의 의미로, 거의 다정하게 짐을 나르는 우리에게 주먹을 휘두르며 매질을 한다.


 원통이 있는 곳에 도착한 우리는 침목을 땅에 내려놓는다. 나는 넋이 나간 눈으로 입을 헤벌리고 두 팔을 힘없이 떨어뜨린채, 고통이 중단된 것에 대한 일시적이고 허구적인 황홀감에 빠져 있다. 소진 상태가 거의 끝나갈 때면 나는 어쩔 수 없이 다시 떠밀려 일을 하게 되기를 기다린다. 몇 초 동안 기다리는 그 순간이라도 이용해 몸속의 힘을 조금이나마 끌어내려고 애쓴다.


그러나 아무도 나를 떠밀지 않는다. 레스닉이 내 팔꿈치를 건드린다. 우리는 가능한 한 느릿느릿 침목이 있는 곳으로 돌아간다. 그곳에서는 다른 사람들이 빙빙 맴을 돌고 있다. 다들 짐을 지기 전에 최대한 미적거리려 한다.


“자, 친구, 들자고” 이 침목은 젖지 않아 약간 가볍다.




  1. 복종을 의심하지 않는 사람답게 낮은 목소리로 말한다. “모두 밖으로”


맑은 날



106.삶의 의미에 대한 믿음은 인간의 모든 힘줄 속에 뿌리 박혀 있다. 이것이 인간 본질이 지닌 속성이다. 자유로운 인간들은 이러한 목적에 많은 이름을 부여하며 그 성질에 대해 깊이 생각하고 토론한다. 하지만 우리에게 이 문제는 훨씬 더 단순하다.


 오늘 그리고 여기서 우리의 목표는 봄에 도달하는 것이다. 지금은 다른 것은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 이제 이런 목표 뒤에 다른 목표는 아무것도 없다. 아침에 우리는 점호 마당에 줄을 서서 일하러 떠날 시간을 한없이 기다린다. 바람이 일 때마다 찬 공기가 옷 속으로 들어와 무방비 상태의 우리 몸속을 타고 내려간다. 주위의 모든 것이 회색이다. 우리도 회색이다. 새벽이 되면 우리는 사방이 아직 어둑어둑한데도 따뜻한 계절을 알리는 최초의 흔적들을 찾아보려고 동쪽 하늘을 자세히 살핀다. 매일 해가 뜨는 시간에 대해 이런저런 의견을 말한다. 오늘은 어제보다 조금 일찍 떴어. 오늘은 어제보다 약간 더 따뜻한데. 두 달 후, 한 달 후, 추위가 휴전을 선포할 것이고, 그러면 우리의 적이 하나 사라지는 것이다. 


오늘 처음으로 해가 진흙의 지평선 위로 환하고 선명하게 떴다. 폴란드의 태양은 차갑고 하얗고 멀기만 해서 피부에 온기만 살짝 전해질 뿐이지만 마지막 안개가 사라졌을 때, 웅성거림이 창백한 우리 다수를 관통했다. 나 역시 옷을 뚫고 들어오는 온기를 느꼇을 때 인간이 왜 태양을 숭배하는지 이해하게 되었다.



110.인간의 본성에 따르면 슬픔과 아픔은 여러 가지를 동시에 겪더라도 우리의 의식 속에서 전부 더해지는 것이 아니라, 정확히 원근법에 따라 앞의 것이 크고 뒤의 것이 작다. 이것은 신의 섭리이며, 그래서 우리가 수용소에서도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자유로운 삶에서, 인간이 만족할 줄 모르는 존재라는 말을 그토록 자주 듣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사실 이것은 인간이 애초에 완전한 행복의 상태를 누릴 수 없어서라기보다 불행의 상태가 지니는 복잡한 성질을 늘 충분히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수없이, 차례대로 늘어선 그 불행의 이유들이 단 하나의 이름을, 가장 큰 이유의 이름을 갖게 된다. 그 이유가 힘을 잃어버릴 때까지 말이다. 그런데 그때 우리는 그 뒤로 또 다른 이유가 등장하는 것을 본다. 비탄에 잠길 정도로 충격을 받는다. 하지만 실제로는 그뒤로 또 다른 이유들이 줄을 서 있다.

그리하여 겨우내 우리의 유일한 적이었던 추위가 가시자 우리는 배가 고프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그리고 똑같은 오류를 범하며 오늘 “배만 고프지 않다면!” 하고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어떻게 배가 고프지 않기를 바랄 수 있단 말인가? 수용소 자체가 배고픔이다. 우리 자신이 배고픔, 살아 있는 배고픔이다.


  1. 정말 특이하게도, 그는 많은 양의 죽을 보면 미리 자기 의지대로 장을 비워놓을 수 있다. 이것은 그의 놀라운 소화력에 기여한다.



익사한 자와 구조된 자


135.가장 간단한 방법은 굴복하는 것이다. 명령을 그대로 따르기만 하면 된다. 일터와 수용소의 규율에 따라서만 배급을 먹으면 된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3개월 이상 버티는 건 이례적인 일임을 경험이 입증했다. 가스실로 가는 무슬림들은 모두 똑같은 사연을 갖고 있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면 아무런 사연도 갖고 있지 않다. 그들은 바다로 흘러가는 개울물처럼 끝까지 비탈을 따라 내려갔다. 근본적인 무능력 때문에, 혹은 불운해서, 아니면 어떤 평범한 사고에 의해 수용소로 들어와 적응을 하기도 전에 학살당했다. 그들은 그 자리에서 쓰러졌다. 독일어를 배우기도 전에, 규율과 금지가 지옥처럼 뒤얽힌 혼돈 속에서 뭔가를 구별해내기도 전에 그들의 육체는 가루가 되었다. 선발에서, 혹은 극도의 피로로 인한 죽음에서 그들을 구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 그들의 삶은 짧지만 그들의 번호는 영원하다. 그들이 바로 ‘무젤매너(무슬림)’, 익사자, 수용소의 척추다. 그들은 끊임없이 교체되면서도 늘 똑같은, 침묵 속에 행진하고 힘들게 노동하는 익명의 군장/비인간들이다. 신성한 불끛은 이미 그들의 내부에서 꺼져버렸고 안이 텅 비어서 진실로 고통스러워할 수도 없다. 그들을 살아 있다고 부르기가 망설여진다. 죽음을 이해하기에는 너무 지쳐 있기 때문에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그들 앞에서, 그들의 죽음을 죽음이라고 부르기조차 망설여진다. 

얼굴 없는 그들의 존재가 내 기억 속을 가득 채우고 있다. 우리 시대의 모든 악을 하나의 이미지로 형상화할 수 있다면, 나는 내게 친근한 이 이미지를 고를 것이다. 고개를 숙이고 어깨를 구부정하게 구부린, 뼈만 앙상한 한 남자의 이미지이다. 그의 얼굴과 눈에서는 생각의 흔적을 찾을 수 없다. 

익사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없다면, 그리고 죽음으로 이르는 길이 단 하나의 드넓은 길이라면, 구원의 길은 이와는 반대로 수없이 많고 험하고 가파르며, 실제로 있을 것 같지 않다.


139.엄밀한 의미의 관리들 외에, 처음에는 운명의 호의를 받지 못했지만 오로지 자신의 힘으로 생존을 위해 투쟁하는 다양한 부류의 포로들이 있다. 그들은 흐름에 역행해야 한다. 매일 전투를 벌이고, 매 시간 노역, 허기, 추위, 그리고 거기서 유래하는 무기력과 싸워야 한다. 적에게 저항해야 하고 경쟁자를 동정하지 말아야 한다. 재치를 갈고닦아야 하며, 인내심을 쌓아야 하고, 의지력을 키워야 한다. 또는 체면을 모두 눌러버리고, 의식의 빛을 꺼버리고, 짐승들이 싸우는 싸움터로 내려가 잔인한 시기에 일족과 개인들을 지탱해주는 비밀스러운 힘들의 안내를 받아야 한다. 죽지 않기 위해 우리가 고안해내고 실행한 방법들은 수없이 많았다. 인간들의 다양한 성격만큼이나 많았다. 그 방법들은 모두 전체를 향한 개인의 힘겨운 투쟁을 담고 있다. 그중 많은 수가 적지 않은 일탈과 타협을 수용하고 있다. 자신의 도덕 세계의 한 부분이라도 포기하지 않은채 생존하는 것은, 강력하고 직접적인 행운이 작용하지 않는 한, 순교자나 성인의 기질을 소수의 뛰어난 사람들에게만 허용될 뿐이었다.


144.141565번 엘리아스 린친은 어느 날 화학 코만도에 이상한 방식으로 등장했다. 그는 키가 1미터 50센티미터도 안 될 만큼 작었지만, 나는 그와 같은 근육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옷을 벗으면 피부 밑의 모든 근육들의 움직임이 구별된다. 그 근육들은 마치 각기 다른 동물들처럼 힘있게 움직인다. 비율을 바꾸지 않고 그의 몸을 그대로 확대시키면 헤라클레스의 훌륭한 모델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머리는 보면 안 된다.

 그의 머리 가죽 밑에는 꿰맨 자국이 크게 불거져 있다. 두개골이 거대해서 쇳덩이나 돌 같은 인상을 준다. 눈썹과 밀어버린 머리의 검은 경계선 사이가 겨우 손가락 한 마디 정도밖에 안 된다. 코, 턱, 이마, 광대뼈는 다부지고 단단하며, 얼굴 전체는 들이받기에 적절한 도구인 성벽 파괴용 망치 같다. 그의 몸에서는 야수 같은 활력이 발산된다. 


147.그가 뛰어난 일꾼이라는 소문이 금방 퍼져나갔다. 덕분에 그는 수용소의 이상한 법칙에 따라 그때부터 일을 하지 않게 되었다. ... 엘리아스는 자연스럽고도 천진난만한 도둑이었다. 그는 그런 식으로 야생동물의 본능적인 영리함을 보여주었다. 그는 현장에서 잡히는 일이 없다. 확실한 기회가 왔을 때만 도둑질을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기회가 왔다 하면 엘리아스는 마치 돌이 위에서 툭 떨어지듯 운명적으로 당연하게 도둑질을 한다. 그런 그를 잡기가 힘들기도 하지만, 그의 절도에 대해 벌을 주려 해도 아무 소용 없을 것이다. 절도는 그에게 숨을 쉬거나 잠을 자는 것처럼 생명에 관계된 행동이기 때문이다.

 이제 이 엘리아스라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질문을 해볼 수 있다. 그는 미치광이에 이해할 수 없는 돌연변이 인간으로 어쩌다 우연히 수용소에 들어오게 된 것일까. 우리의 현대사회와는 어울리지 않는, 좀더 정확히 말하자면 수용소의 원시적인 삶에 어울리는 원시인이 아닐까. 혹은 수용소의 산물이 아닐까. 우리가 죽지 않는다면, 수용소 자체가 사라지지 않는다면 우리 모두가 그렇게 변할지도 모르는 새로운 유형의 인간이 아닐까. 

 위에 세 가지 가정이 모두 약간의 진실을 담고 있다. 엘리아스는 육체적으로 파괴될 수 없는 사람이기 때문에 외부로부터의 공격에서 살아남는다. 미치광이이기 때문에 내부로부터의 절멸에 저항한다. 그래서 제일 먼저 생존자가 된다. 그는 이런 식의 생존방식에 가장 적합하고 표본적인 인간이다.

 만일 엘리아스가 다시 자유를 찾게 된다면 인간사회의 가장자리에, 감옥이나 정신병원에 갇혀 살게 될 것이다. 하지만 여기, 이 수용소에서는 범죄자도 정신병자도 없다. 지켜야 할 도덕률이 없기 때문에 범죄자가 없으며, 우리가 하는 행동이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모든 것일 뿐, 우리에게 자유의지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정신병자도 없다.

수용소에서 엘리아스는 성공하고 의기양양하다. 그는 훌륭한 일꾼미여 훌륭한 조직꾼이다. 이 두 가지 이유 때문에 그는 카포와 동료들에게 확실하게 선택되고 존경을 받는다. 확고한 내적 지혜를 갖기 않은 사람에게, 삶에 뿌리를 내리는 데 필요한 힘을 자신의 의식으로부터 끌어낼 줄 모르는 사람에게, 유일한 구원의 길은 엘리아스에게로, 어리석은 행동으로, 그리고 음흉한 잔인성으로 이어진다. 다른 길들은 모두 막다른 골목이다.


152.앙리와 이야기하는 것은 유용하고 기분 좋다. 종종 따뜻하고 가까운 사람으로 느껴지기도 한다. 의사소통도, 심지어 정을 주고받는 것도 가능해 보인다. 일반적이지 않은 그의 개성에 담긴 인간적이고 쓸쓸하며 의식적인 깊이를 감지할 수 있을 것 같기도 하다. 그러나 다음 순간 그의 쓸쓸한 미소가, 마치 거울을 보고 연구한 듯한 냉담한 찌푸림으로 얼어 붙는다.  앙리는 예의 바르게 양해를 구한다. “할 일이 있어요.”, “만나야 할 사람이 있어요.” 다시 사냥과 투쟁 준비를 완전히 끝낸 그가 여기 있다. 그는 다루기 힘들고, 멀리 떨어져 있고, 갑옷으로 무장을 했고, 모두의 적이며 창세기의 뱀처럼 비인간적일 정도로 교활하고 이해 불가느한 존재다.

앙리와 대화를 하고 나면, 아무리 그의 이야기가 친절했다고 해도 늘 가벼운 패배감 같은 걸 맛보게 된다. 나 역시, 이유는 알 수 없지만, 그의 앞에 한 인간으로서 존재한 게 아니라 그의 손에 좌우되는 도구였던 건 아닌지 혼란스러운 의심이 든다.

내가 알기로 지금 앙리는 살아 있다. 자유인으로서의 그의 삶이 어떨지 몹시 궁금하지만 그를 다시 만나고 싶지는 않다.


화학시험


159.우리는 이 사실이 기뻤다. 기다리면 시간이 평온하게 흐른다. 시간을 빨리 보내기 위해 무슨 일인가를 하지 않아도 된다. 이와는 달리 일을 할 때는 매 순간이 힘들게 흘러가서 부지런히 그것을 쫓아버려야만 한다. 우리는 늘 기다리는 것을 좋아한다. 우리는 낡은 거미줄에 매달린 거미들처럼 완전히 무디고 무기력하게 몇 시간이고 기다릴 수 있다.


162.내가 다시 자유인이 되었을 때 그를 다시 한 번 만나고 싶었다. 보복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인간의 정신에 대한 내 호기심 때문이었다. 

 그 시선은 두 명의 인간 사이에 흐르는 시선이 아니었다. 전혀 다른 세계에 사는 두 존재 사이에 놓인, 수족관의 유리를 통해서 바라보는 것 같은 그 시선의 성질을 속속들이 설명할 수 있다면, 나는 제3제국의 그 거대한 광기의 본질도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우리 모두가 독일인에 대해 생각하고 말했던 것을 바로 그 순간, 그 자리에서 직접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파란 눈과 세련된 그 손들을 감독하는 뇌가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내 앞에 있는 이 무엇인가는 분명 억압해 마땅한 종에 속해. 하지만 특별한 경우 먼저 어떤 유용한 요소를 가지고 있는지 확인할 필요가 있지.’ 그리고 내 머릿속에는 텅 빈 호박속의 씨앗처럼 이런 생각이 떠올랐다. ‘파란 눈과 금발머리는 본질적으로 사악하지. 어떤 소통도 불가능해. 난 광산 화학 전문가야. 유기 합성물 전문가야. 난....”

그리고 심문이 시작되었다. 한쪽 구석에서 제3의 동물표본인 알렉스가 하품을 하며 이를 드러냈다.


164.일은 잘된 것 같았지만 나는 그것을 믿을 정도로 무분별하지는 않았다. 아무리 낙관적일지라도 그 어떤 예측도 해서는 안 되나는 것쯤은 이해할 정도로 수용소에 대해서 알 만 큼 알았다. 분명한 것은 내가 일을 하지 않고 하루를 보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오늘 밤은 배가 좀 덜 고플 것이다. 구체적으로 얻은 이익은 바로 이것이다. 

 부데에 다시 들어가려면 대들보와 금속틀들을 잔뜩 쌓아놓은 공토를 지나가야 한다. 기중기의 강철 케이블이 길을 가로막는다. 알렉스가 뛰어넘으려고 그것을 잡는다. ‘제기랄’, 그는 자기 손에 검은 기름이 묻은 것을 본다. 그 사이 내가 그에게 다가갔다. 알렉스는 증오의 말도 조소도 하지 않은 채 내 어깨에 손바닥과 손등을 문질러 깨끗이 닦는다. 만일 누군가 알렉스에게 내가 오늘날 바로 그 행동을 토대로 그를, 판비츠를, 그리고 아우슈비츠와 도처에 있던 수많은 사람들을, 크고 작은 그 사람들을 판단하고 있다고 말해준다면, 그 가엽고 잔인한 알렉스는 굉장히 놀랄 것이다.


오디세우스의 노래


170.”Tu es fou de marcher si vite. On a le temps, tu sais."(그렇게 빨리 걷다니 당신 바보네요. 우린 시간이 있잖아요)


우리는 천천히 걸었다. 피콜로는 노련했다. 그는 영리하게도 멀리 돌아서, 누구의 의심도 사지 않고 적어도 한 시간쯤은 걸어갈 수 있는 길을 택했다. 우리는 집, 스트라스부르와 토리노, 우리가 읽은 책들, 공부 이야기를 나누었다. 어머니들에 대해서도, 두 어머니가 어찌 그리 닮았던지! 그의 어머니도 그가 주머니에 돈이 얼마 있는지도 모른다고 그를 나무라곤 했다는 것이다. 그의 어머니도 그가 잘 해냈다는 것을, 하루하루 잘 해내고 있다는 것을 알면 깜짝 놀랄 거라고 했다.


그 여름의 사건들


179.우리는 이곳에 오기 전 삶에 대한 기억들을 간직하고 있었지만 그것들은 흐릿했고 아득했다. 그래서 몹시 달콤하고 슬펐다. 각자의 유년 시절에 대한, 이미 끝나버린 모든 일들에 대한 기억처럼. 반면 수용소에 들어오는 순간 각자 전혀 다른 일련의 기억들이 시작되었다. 이것들은 날카롭고 가까웠다. 또한 매일 상처가 덧나듯 현재의 경험에 의해 계속 상기되었다.

 작업장에서 알게 된 소식들, 즉 연합군이 노르망디에 상륙했다는 것과 러시아의 공격, 히틀러 암살 기도 실패에 대한 소식들은 거센 파도와 같은 희망을 불러왔지만 일시적이었다. 하루가 다르게 기운이 빠져나가고, 살고자 하는 의지가 약해지고, 정신이 흐릿해지는 것을 우리 모두 느꼈다. 노르망디와 러시아는 너무나 먼 반면 겨울은 가까이에 다가와 있었다. 배고픔과 절망감은 너무나 구체적이었고 그 외의 나머지 것들은 너무나 비현실적이었다. 그래서 진흙창인 우리의 세상과 이제는 그끝을 상상하기도 힘든 황량하고 정체된 우리의 시간 외에 다른 세상과 시간이 존재할 것 같지 않았다.

살아 있는 인간들에게 시간의 단위들은 항상 어떤 가치를 지닌다. 그것을 통과해 살아가는 사람이 거기서 내적 자원을 많이 얻으면 얻을수록 가치도 더욱 커진다. 그러나 우리에게 한 시간, 하루, 한 달은, 즉 우리가 가능한 한 빨리 제거하고 싶었던 이 무가치한 잉여의 물질은 생기 없이, 그리고 항상 너무 느리게 미래로부터 과거로 내려앉았다. 하루하루 생기 있게, 소중하게, 돌이킬 수 없이 흘러가던 시기가 끝나고 잿빛의 불투명한 미래가 우리 앞에, 마치 넘을 수 없는 장벽처럼 서 있었다. 우리에게 이야기는 정지되어 있었다.


180.우리는 늘 똑같고 가혹할 정도로 긴 단조로운 하루하루보다, 그러니까 그 체계적이고 질서정연하게 더러운 부나에서의 노동보다 나쁜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우리가 내뱉었던 저주가 우리들 자신까지 덮쳐버려서, 부나가 무너지기 시작했을 우리는 생각을 바꿔야만 했다. 우리는 먼지와 뜨거운 건물 잔해 사이에서 땀을 흘려야만 했다. 우리는 분노한 전투기들을 피해 땅에 납작 엎드려 겁에 질린 짐승처럼 몸을 떨었다. 우리는 밤에 노역으로 만신창이가 된 채 갈증에 시달리며 수용소로, 바람이 많은 폴란드의 길고 긴 여름밤 속으로 돌아왔다. 우리의 수용소는 엉망진창이었다. 마실 물도, 씻을 물도 없었다. 텅 빈 배를 채워줄 죽도 없었다. 다른 사람에게 빵을 도둑맞지 않을 만큼의 불빛도, 어둡고 고함 소리 요란한 블록의 아침에 신발과 옷을 찾을 만큼의 불빛도 없었다.

부나의 독일 민간인들은 오랜 지배의 꿈에서 깨어나 자신의 파멸을 보고 있었지만, 그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확신에 찬 인간 특유의 분노를 품은 채 한없이 포악스러워졌다.


187.나는 지금 내가 이렇게 살아 있게 된 것이 로렌초 덕분이라고 생각한다. 물질적인 도움 때문이라기보다는 그의 존재 자체가 나에게 끝없이 상기시켜준 어떤 가능성 때문이다. 선행을 행하는 너무나 자연스럽고 평범한 그의 태도를 보면서 나는 수용소 밖에 아직도 올바른 세상이, 부패하지 않고 야만적이지 않은, 증오와 두려움과는 무관한 세상이 존재할지 모른다고 믿을 수 있었다. 정확히 규정하기 어려운 어떤 것, 선의 희미한 가능성, 하지만 이것은 충분히 생존해야 할 가치가 있는 것이었다.

 이 책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인간이 아니다. 그들의 인간성은 땅에 묻혔다. 혹은 그들 스스로, 모욕을 당하거나 괴롭힘을 줌으로써 그것을 땅에 묻어버렸다. 사악하고 어리석은 SS대원들, 카포들, 정치범들, 범죄자들, 크고 작은 일ㅇ르 맡은 특권층들, 서로 구별되지 않으며 노예와도 같은 해프틀링까지, 독일인들이 만든 광적인 위계질서의 모든 단계들은 역설적이게도 균등한 내적 황폐감에 의해 연결되어 있었다.

 하지만 로렌초는 인간이었다. 그의 인간성은 순수하고 오염되지 않았다. 그는 이 무화의 세상 밖에 있었다. 로렌초 덕에 나는 내가 인간이라느 사실을 잊지 않을 수 있었다.


1994년 10월


188.우리는 겨울을 맞지 않으려고 온힘을 다해 싸웠다. 우리는 따뜻한 시간에 매달렸다. 해질녘이면 아직 하늘에 남아 있는 해를 조금이라도 더 잡아보려고 애썼지만 다 부질없는 짓이었다. 어제 저녁, 해는 복잡하게 뒤섞인 공장 굴뚝과 전선들, 지저분한 안개 속으로 어쩔도리 없이 가라앉아버렸다. 그리고 오늘 아침은 한겨울이었다.

지난 겨울을 여기서 났기 때문에 우리는 이게 무슨 뜻인지 알고 있다. 다른 사람들도 곧 알게 ㅗ딜 것이다. 이것은 앞으로 몇 달 동안, 그러니까 10월부터 내년 4월까지 우리들 열 명 중 일곱 명은 죽는다는 뜻이다. 죽지 않은 사람은 매 순간, 매일매일, 하루하루 고통 속에 살아갈 것이다. 이른 새벽부터 저녁 죽이 배급될 때까지 끊임없이 근육을 긴장시키고, 이리 뛰고 저리 뛰고, 추위에 저항하기 위해 두 손을 겨드랑이 안에 끼워야 할 것이다. 빵을 주고 장갑을 장만해야 할 것이고, 장갑이 해지면 수선하느라 밤잠을 설쳐야 할 것이다. 밖으로 먹을 것을 가지고 나갈 수 없기 때문에 막사에서 각자 손바닥만 한 바닥을 차지하고 서서 식사를 해야 할 것이다. 침대에 기대어 먹는 것도 금지되어 있기 때문이다. 모두 손이 터질 것이고, 붕대를 얻으려면 매일 밤 눈보라 속에 서서 몇 시간씩 기다려야 할 것이다.

 우리의 배고픔이 한 끼를 굶은 사람의 그것과 같지 않듯이, 우리의 추위에도 특별한 이름이 필요할 것이다. 우리는 ‘허기’라는 말을 쓴다. ‘피로’, ‘공포’, ‘고통’이라는 말도 쓴다. ‘겨울’이라는 말도. 하지만 이것은 전혀 다른 것들이다. 자기 집에서 기쁨을 즐기고 고통을 아파하며 살아가는 자유로운 인간들이 만들어내고 사용하는 자유로운 단어들이다. 만일 수용소들이 좀더 오래 존속했다면 새로운 황량한 언어들이 탄생했을 것이다. 영하의 날씨에 바람 속에서 셔츠와 팬티, 올이 성긴 천으로 만든 윗도리와 바지만 입은 채, 더할 수 없이 허약해지고 굶주린 육체로, 종말이 다가와 있다는 것을 의식하면서 하루 종일 노동하는 것의 의미를 설명하려면 새로운 언어가 필요하다.


 희망의 끝이 보이듯, 그날 아침 겨울이 찾아왔다.




아핫, 타이밍을 놓쳤지만요.
생일을 축하해주신 여러분께 감사 인사드립니다. 물론 써주신 글에 일일이 댓글을 달아야겠다고 생각은 했는데요. 내 고마움을 전하기엔 디지털은 넘나 차가운것...이라기 보단 일일이 답다는 건 넘나 귀찮은 이유입니다.


.. 쭈그라든건 페북에 대한 제 마음이지 고마와하는 제 마음이 아니라는거 아시죠? .. ;) 

지난 주말, 닭장에 습격이 있었습니다. 제보에 의하면 토, 일, 월 하루에 한 마리씩 생을 달리했습니다. 처음 4마리를 받아 중간에 4마리를 더했는데요. 한 마리씩 잃고 잃어 마지막으로 남아 있던 3마리를 어제 마저 묻은 것입니다. 

1년여를 함께 했습니다. 닭들의 모습을 보노라면 가슴 깊은 곳 경탄이 일깨워집니다. 매혹적인. 더 표할말은 없을겁니다. 그네들에겐 나는 그저 밥주는 존재지만, 그래도 나는 좋아라하게 만드는 우리의 관계. 돌본다는건 그런건가 봅니다. 

30대가 되었지만 저는 역시 어리둥절 합니다.
여전히 상처받고, 호들갑 떨고, 사랑에 빠지고요.
읽고 싶은 책은 쌓여만 가고, 
여전히 게으르고 부모님께는 퉁퉁이고요.
나와의 약속은 점점 커지는 계란말이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또 한번의 시간을 돌았습니다.
수레바퀴를 돌아 또 한번의 봄을 맞은 것이죠.

두 발로 세상을 단단히 디딛는 것
손으로 더듬어 길을 열어가는 것
가슴이 하는 말을 몸으로 하는 것
더 약하고 가난한 존재가 되는 것

생을 달리한 그들을 묻으며
작은 꿈을 읊조려 봅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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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삶?]
태어날 준비는 용기와 믿음을 필요로 한다.
안전을 포기할 용기, 타인과 달라지겠다는 용기,
고립을 참고 견디겠다는 용기다.

01 인간은 타인과 같아지고 싶어 한다
02 인간의 본질은 대답이 아니라 질문이다
03 자유는 진짜 인격의 실현이다
04 자아는 적극적으로 활동하는 만큼 강핟
05 인간은 자신의 인격을 시장에 내다 판다
06 현대인은 깊은 무력감에 빠져 있다
07 진짜와 허울의 차이를 보다

p. 148
... 사물이 완성되면 인간은 그 사물의 주인이 아니라 시종이 된 듯한 느낌에 사로잡힌다. 물질세계 전체가 인간 삶의 방향과 속도를 지정하는 거대한 기계의 괴물이 된다. 인간에게 봉사하고 행복을 선사하기 위해 인간의 손으로 탄생시킨 작품이 인간을 소외시키는 세계가 되고, 현대인은 그 세계에 비굴하고 무기력하게 복종한다.
...
통제와 권력에 대한 소망의 강화는 무력감에 대한 반응이자 그 강화의 뿌리인 것이다. 이렇게 악순환이 일어난다.
.
우리 시대에 폭주하는 남성성(반생명, 폭력, 개발)의 원인은 뭘까. 난개발이라거나 비교양이라거나, 방금 읽게 된 ㅡ남자는 모르는 여자가 겪는 30가지 이야기 (https://univ20.com/66752)ㅡ라거나. 일상화된 폭력의 원인. 돈이 돈을 필요로 하는 '이자' 메커니즘. 물리적 원인과 이를 통제하지 못하는 인간의 한계. 무기력의 관점에서 에리히 프롬의 생각을 들어보자.
.
p.180
적극적으로 행동하고 자신 및 사회의 운명에 영향력을 행사하기 위한 첫 번째 조건은 결정적인 힘과 상황을 올바르게 통찰하는 것이다. 때문에 무지와 인식의 결핍은 개인을 무력하게 만드는 결과를 초래하고, 무력감을 인식하지 않으려고 온갖 망상을 총동원하여 절망적으로 저항해 봤자 개인은 결국 내면적으로 그 무기력을 인식하기 된다. 올바른 사회 이론, 개인에게 적용할 올바른 심리학 이론을 갖추지 못한 것은 무력감의 중요한 원인이다. 이론은 행동의 조건이다.



젖소 키운지 40년 
결혼 후 들여온 젖소 한 마리와
부부가 매일 한 트럭씩 풀을 베던 기억.
해방둥이로 태어나 오늘까지.
지게꾼의 나무 지게는 산처럼 보였고,

군대에서 들은 비보와
삼남매가 같이 감기 걸렸던 날.
어린시절 바라보던 세상과
지난 후에 보이는 변화들, 
당연하게 감내해온 고생.
지나온 것들과 마음에 남은 것들.
한 인간이 땅을 딛고 살아온 이야기



우리 시대의 과제는 기후 변화를 훨씬 넘어서는 것임을 명심해야 한다. 우리는 시야를 넓혀 더 높은 곳을 바라보고, 더 깊이 있게 탐구해야 한다. 지금 우리가 논의하고 있는 문제는 이 행성에서 살아가는 우리의 생활 방식 일체를 바꾸어 놓는 것이다. 

ㅡ 리베카 타버튼, 열대 우림 행동 네트워크 사무국장


대부분의 기후 변화 이론들은 앞으로 온실가스 배출량, 기온 상승, 해수면 상승 등의 변화가 점진적으로 일어날 것이라 추정한다. 일정 정도의 온실가스는 일정 정도의 기온 상승으로 이어지고, 다시 일정 정도의 해수면 상승으로 이어지리라는 것이다. 그런데 기후와 관련한 지질학적 기록들을 살펴보면, 기후를 구성하는 한 가지 요소의 지극히 미미한 변화가 기후 시스템 전체의 급격한 변화로 이어진 순간들이 나타난다. 말하자면, 기온이 특정 임계점을 넘어서는 순간, 예측할 방법도 역전시킬 방법도 없는 엄청난 파괴력과 대규모 충격과 함께 급격한 변화가 일어날 수 있다는 뜻이다. 일단 그 단계에 들어서면 인류가 더 이상 대기 중에 이산화탄소를 배출하지 않는다 해도 결코 멈출 수 없는 과정들이 전개될 것이다. 기후 급제동에 따른 통제 불능 상황이라 할 수 있다. 그렇게 되면 기후 문제와 그로 인한 파급 효과는 우리가 통제할 수 있는 영역 밖에 놓일 것이다.

ㅡ 미국 과학 진흥회의 보고서, 2014


34. 많은 주요 분석가들은 현재의 배출량 궤도를 그대로 따라갈 경우, 섭씨 4도를 훨씬 넘어서는 온난화에 직면하게 된다고 판단한다. 평소 극단성을 보이지 않는 국제 에너지 기구 또한 2011년에, 이대로 가다가는 섭씨 6도의 온난화에 도달할 거라고 예측하는 보고서를 발표했다. 국제 에너지 기구 수석 경제학자의 말을 인용해보자. ‘이런 상황이 우리 모두에게 파멸적인 영향을 미치리라는 건 초등학생도 알 수 있는 일이다.’ 이 연구에 따르면, 섭씨 6도의 온난화는 몇 가지 중요한 임계점을 자극할 가능성이 높다. 앞서 말한 서남극 대륙 빙하의 해빙처럼 느리게 진행되는 현상뿐 아니라, 북극 영구 동토층의 메탄 대량 배출처럼 급속히 진행되는 현상까지 촉발할 것이다. 대형 회계 법인 프라이스워터 하우스쿠퍼스 역시 우리가 섭씨 4도, 혹은 섭씨 6도의 온난화로 향하는 경로에 있음을 경고하는 보고서를 발표했다.


35.기후 과학자들은 우리가 평상시처럼 생활을 유지하며 지금껏 해왔던 일을 그대로 해나가다가는 결국 문명의 파멸을 맞게 될 거라고 말해 왔다. 


설상가상이라더니, 하필이면 이런 때


36.앞선 질문에 대해선 여러 가지 답이 나와 있다. 전 세계 모든 정부들이 만장일치로 합의를 보기란 극히 어렵다는 주장, 현실성 있는 기술적 해법이 없다는 주장, 요원해 보이는 위협에 대해서는 집단적인 대처를 꺼리는 게 인간의 본성이라는 주장, 게다가 이미 판세가 기울어진 지금에 와서는 아무리 애를 써도 헛일이니 흐르는 물에 몸을 맡기고 주위 경관이나 한껏 감상하자는 주장까지 나왔다.

 일견 타당한 면이 있기도 하지만, 이 주장들은 하나같이 큰 결함을 안고 있다. 많은 나라들이 단일한 행동 경로에 합의하기가 너무 어렵다는 얘기를 살펴보자. 물론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그런 합의는 과거에도 여러 번 이루어졌다. 유엔은 정부들이 마주 ㅇ낮아 오존 파괴 문제와 핵 확산 문제 등 까다로운 국가 간 분쟁 사안을 논의할 수 있도록 도와 왔다. 도출된 합의안은 완벽하진 않았어도 실질적인 진전을 보였다. 협력을 이루기엔 너무나 강고한 난관이 있다는 구실을 내세워 온실가스 감축에 필수적인 강력하고 구속력 있는 법률적 조치 채택을 무산시키던 바로 그 기간 동안에도, 우리 정부들은 기어코 세계무역기구를 꾸리는 데 성공했다. 상품과 서비스의 세계적인 교역ㅇ르 통제하는 매우 복잡한 시스템을 마련하고 명료한 규칙들을 부과하며, 규칙 위반에 대해 엄중한 처벌을 시행하는 바로 그 기구 말이다.


기술적인 해법을 찾지 못하기 때문에 집단적인 대응에 나설 수 없다는 주장 역시 설득력이 떨어진다. 풍력과 수력처럼 재생 가능한 원천에서 에너지를 얻는 방식은 화석 연료가 출현하기 전부터 존재했을 뿐 아니라, 심지어 갈수록 생산 비용이 떨어지는 반면 효율성은 높아지고 저장도 점점 쉬워지고 있다. 최근 20년 동안 우리는 녹색 도시 계획은 물론, 기발한 자원 순환형 디자인의 폭발적인 성장을 목격해 왔다. 우리는 화석 연료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기술적인 도구를 이미 확보하고 있으며, 이런 저탄소 생활 방식으로 막대한 성과를 거둔 소규모 지역의 사례 또한 셀 수 없이 많다. 그런데도 우리는 재앙을 예방하기 위한 집단적 대응의 기회 앞에서 대대적인 전환에는 손을 대지 못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망설임의 이유는 결국 인간의 본성 때문일까? 그러나 우리는 위협에 직면했을 때 인류가 감수해 왔던 집단적인 희생을 여러 사례를 통해 알고 있다. 

… 사실 우리는 늘 추상적인 대의를 위해 집단적인 희생을 감수한다. 우리는 연금 손실을 감수하고, 힘들게 따낸 노동자의 권리가 약화되는 것을 감수하고, 예술 활동과 방과 후 프로그램이 사라지는 것을 감수한다. 우리는 갈수록 학생 수가 늘어나는 학급에, 갈수록 교사 업무가 늘어나는 학교에 아이들을 보내기를 감수한다. 우리는 자동차를 타거나 일상생활에서 유해한 에너지를 사용하는 대가로 지불하는 에너지 요금의 대폭 상승도 감수한다. 우리는 요금만 치솟을 뿐 서비스는 개선되자 않거나 오히려 퇴보하는 버스와 지하철을 이용하는 희생도 감수한다. 한 세대 전에는 듣도 보도 못한 일이지만, 우리는 공립대학 교육을 받은 뒤 학자금 대출 상환에 반평생을 바쳐야 하는 희생을 감수한다 .캐나다 사람들은 더 이상 우편물이 집까지 배달되지 않는 상황을 감수하고 있다.

 공공 부문의 축소는 최근 30년 동안 꾸준히 진해오디어 왔다. 이제는 긴축 논리가 이처럼 집단적인 희생에 대한 끊임없는 요구들을 정당화하는 구실로 쓰이고 있고, 공공 부문의 축소 역시 긴축의 명목하에 전면 옹호되고 있다. 과거에도 긴축과 마찬가지로 일상생활과는 동떨어진 단어들과 문구가 이와 똑같은 목적을 위해 동원되곤 했다. 이를테면 ‘균형 예산’이나 ‘효율성 향상’, ‘경제 성장 촉진’등이 그렇다. 

 많은 사람들에게 불안정한 삶을 강요하고 훨씬 많은 비용을 부담시키는 경제 시스템을 위해 이처럼 큰 집단적 혜택을 양보할 여지가 있다면, 모든 생명체가 의존하고 있는 물리적 시스템의 안정을 위해 생활방식의 일부를 바꿀 여지 또한 분명히 있ㅇ르 거라고 나는 생각한다. 온실가스의 급격한 감축에 요구되는 여러 가지 변화들은 지구인 절대다수의 삶의 질ㅇ르 실질적으로 향상시킨다는 사실 또한 유념해야 한다. 기후에 유익한 활동을 할 때 우리에게 돌아오는 중/단기적인 혜택은 무수히 많다.


물론 시간이 촉박하다. 하지만 화석 연료 소비를 대폭 줄이고 재생 에너지 기술을 이용하여 탄소 배출이 전무한 청정에너지로 전환하려는 일에 지금 당장 총력을 기울인다면, 전환과정은 10년 안에 본격적인 단계에 접어들 것이다. 이런 활동을 진행하기 위해 필요한 도구는 이미 우리의 손에 쥐여져 있다. 지금 당장 행동을 개시한다면, 해수면 상승과 폭풍의 기습을 완전히 막지는 못할지언정 재앙과 같은 온난화를 막을 가능성은 훨씬 높아진다. 모든 나라가 온난화의 파도에 휩쓸리는 결과를 막을 수 있을 것이다.


  1. 하지만 우리는 번져 가는 불을 끄는 일에 나서지 않고 있다. 오히려 불에 기름을 끼얹고 있다. 2009년 금융 위기 때문에 잠깐 줄어들었던 전세계의 온실가스 배출량은 2010년에 자그만치 5.9퍼센트나 급증했다. 산업 혁명 이후로 가장 높은 상승률이다. 내 머릿속에서는 늘 그 질문이 맴돈다. 대체 왜 이러는 걸까? 우리 모두가 살고 있는 집이 홀라당 타버릴지도 모르는데, 왜 우리는 불을 끄려하지 않는 걸까?
  2.  많은 사람들이 복잡한 설명을 내놓고 있지만 내가 보기에 그 답은 아주 간단하다. 우리가 온실가스 감축을 위해 요구되는 행동들에 나서지 않는 이유는, 그것이 근본적으로 탈규제 자본주의와 충돌하는 행동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위기에서 벗어날 길ㅇ르 찾으려고 안간힘을 쓰는 내내 이러한 지배 이데올로기가 우리 목을 조이고 있었다. 파멸적인 재앙을 피할 최선의 기회를 열어 줄(또한 지구인 절대 다수에게 혜택을 안겨줄) 행동이 우리 경제와 정치 과정, 대다수 주요 매체 위에 군림하고 있는 소수 엘리트에게 심각한 위협이 되기 때문에 모두가 옴짝달싹 못 하고 있는 것이다. 만일 이런 문제가 역사의 다른 시점에 불거졌다면 우리는 이 문제를 거뜬히 극복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과학계가 기후 위기의 심각성에 대해 결정적인 진단을 내린 것은, 엘리트들이 정치와 문화와 학문 분야에서 1920년대 이후로 가장 강력하고 무제한적인 권력을 누리던 바로 그 순간이었다. 하필이면 이런 때.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직면한 가혹하기 짝이 없는 집단적 불운이다.


최근 25년간 이루어진 국제 협상의 역사를 돌아보면 두 가지 중요한 과정이 눈에 띈다. 난항에 난항을 거듭하다가 목적했던 바를 전혀 이루지 못한 기후 협상 과정과, 빠른 속도로 승리에 승리를 거듭하는 경제의 세계화 과정. 최초의 자유 무역 협정부터 시작해서 세계 무역 기구의 창립, 소비에트 연방에 속했던 경제의 대규모 민영화, 아시아 지역에서의 자유 무역 지대 확대와 아프리카의 ‘구조 조정’까지, 이 모두가 경제의 세계화를 통해 이루어졌다. 물론 이 과정에 무역 협상과 자유 무역 협정에 반대하는 대중 운동이라는 난관이 있었지만 세계화 협상 과정을 뒷받침하는 이데올로기적 토대는 변함없이 강력한 힘을 유지했다. 사실 세계화 협상은 국가 간 상품 교역 문제(예컨대 프랑스산 와인ㅇ르 브라질에 팔거나 미국산 소프트웨어를 중국에 파는 행위 등)에 대해서는 전혀 다루지 않았다. 이 협상은 포괄적인 협정과 그 밖의 다양한 도구를 동원해서 다국적 기업들이 최대한 싼 값에 상품을 생산하고 거의 아무 규제도 없는 조건에서 상품을 팔 수 있도록(그러면서도 세금은 최대한 적게 낼수 있도록) 최대한의 자유를 허용하는 세계적인 범위의 정책 기조를 마련했다. 


  1. 누구나 알듯이, 새로운 시대의 3대 정책 기조는 공공 부문의 민영화, 민영 부문의 규제 완화, 그리고 법인세 인하 및 공공 지출 삭감이다. 이 정책들을 유지할 때 발생하는 현실적인 문제, 예컨대 금융 시장의 불안정과 갑부들의 방종, 갈수록 소모품으로 전락하는 저소득층의 절망적인 상황, 공공 기간 시설과 서비스의 노후화 문제 등은 많은 연구서들을 통해 다루어진 바 있다. 하지만 심각한 위협으로 부상한 기후 변화 문제에 집단적으로 대응하려고 시도했던 바로 그 시점에 전성기에 도달한 시장 근본주의가 처음부터 기후 대응을 계획적으로 방해해 왔다는 사실으 다루는 연구서는 매우 드물다. 

여기서 핵심적인 문제는, 시장 논리가 전권을 장악하고 대중의 생활을 좌지우지하게 되면서 무엇보다 직접적이고 명료한 기후 대응 방안이 정치적인 이단처럼 여겨지게 되었다는 점이다. 


  1. 기후 운동은 다른 분야와 합세하여 이처럼 합리적인 대응을 봉쇄하는 극단적인 이데올로기에 반격을 전개하고, 일체의 구속을 벗어던지 기업권력이 지구 생태계에 막중한 위협을 안기고 있음을 폭로하고자 노력했어야 했다. 하지만 오히려 기후 운동에 몸담은 대부분의 단체들은 기후위기라는 네모난 못을 탈규제 자본주의라는 동그란 구멍에 쏙 들어가도록 깎아 내느라, 또 시장 그 자체로 이 문제를 해결하는 방안을 적극 옹호하느라 귀중한 세월을 허비했다(이 일이 여러 해 동안 진행된 뒤에야 나는 대형 오염 기업들과 대규모 환경 단체들 간의 긴밀한 공모 관계를 확인했다)

한편 시장 근본주의는 강력한 기후 행동을 봉쇄하는 것 말고도 또 다른 경로를 통해 기후 위기를 심화시켜 왔다. 훨씬 더 직접적인 방법이 있었다. 다국적 기업ㅇ르 거의 모든 규제로부터 해방시켜 준 적극적인 정책 역시 지구 온난화 심화에 결정타로 작용하는 온실가스 배출량을 크게 부추겼다. 온실가스의 급격한 상승은 수치로도 확인할 수 있다. 시장 세계화가 급속히 진전되던 1990년대 세계 온실가스 배출량은 연평균 1퍼센트씩 상승했다. 중국 등의 ‘신흥 시장’이 세계 경제에 완전히 통합된 2000년대에는 배출량 상승률이 재난 수준으로 치솟아 연간 3.4퍼센트에 이르렀다. 


돌이켜 생각해 봐도, 당시 다른 상황이 전개되었을 가능성은 떠올리기 힘들다. 이 시대의 두 가지 특징은 원거리 수송(엄청난 양의 탄소를 태우는)을 통한 상품의 대량 수출과, 더 이상 소모적일 수 없는 생산, 소비, 그리고 화석 연료를 대량으로 연소하는 농업 모델의 세계적인 확산이다. 말하자면 세계 시장의 자유화는 지하에서 해방된 유례없는 양의 화석 연료를 동력 삼아 온난화를 대대적으로 심화시키며, 이를 통해 북극을 지키던 빙하에게까지 모습을 바꿀 자유를 선사하는 셈이다.


이제 기후 행동은 우리 경제 모델의 핵심을 이루는 근원적인 명제, 즉 성장 지상주의와 싸워야 한다.


지금 우리의 경제 시스템은 지구 시스템과 전쟁을 벌이고 있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우리 경제는 인간을 비롯한 지구 상의 수많은 생명체들과 전쟁을 벌이는 중이다. 지구 기후의 파멸을 피하기 위한 대원칙은 인류의 자원 이용 억제이며, 경제 모델의 파멸을 피하기 위한 대원칙은 규제 없는 성장이다. 이 두 가지 원칙 가운데 인간의 힘으로 바꿀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나, 경제의 무한한 팽창이다. 게다가 그것은 자연법칙에도 위배되는 원칙이다.


다행스럽게도 자원을 절약하는 방향으로, 또한 가장 취약한 사람들을 보호하고 가장 책임이 큰 사람들에게 부담을 많이 지우는 공정한 방법으로 우리 경제를 변화시키는 건 확실히 가능하다. 우리 경제의 고탄소 분야를 제한하는 정책을 추진하되, 저탄소 분야는 더욱 팽창시켜 일자리를 창출하도록 장려해야 한다. 하지만 문제는 이처럼 거대한 규모의 경제 계획 및 관리가 지배 이데올로기와 전면적으로 충돌한다는 점이다. 현재의 시스템이 용납할 수 있는 유일한 제약은 극심한 경기 침체 뿐인데, 이로 인한 고통은 대부분 가장 취약한 사람들의 몫이다.

따라서 우리는 지금 엄중한 선택의 갈림길에 서 있다. 기후 혼란이 세계의 모든 것을 변화시키도록 지켜만 볼 것인가, 아니면 기후 재앙을 피하기 위해 우리 경제의 모든 것을 변화시킬 것인가? 그전에 분명히 명심해야 할 것이 있다. 집단적인 외면으로 수십 년을 허송해 온 탓에, 이제 우리는 점진적이고 단계적인 접근법을 선택할 수 있는 입장이 아니다.

… 급진적인 변화가 필요하다는 시각은 더 이상 급진주의자의 전유물이 아니다. ... 

중요한 위치에 있는 많은 사람들은 이를 받아들이기 어려울 것이다. 이 주장이 자본주의보다 훨씬 강력한 힘을 발휘하는 맹목적인 중도주의(적당함, 진지함, 절충, 무엇에든 과도하게 흥분하지 않는 태도)에 도전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는 우리 시대의 지배적인 사고방식이며, 위기 자체를 부정하는 보수주의자들보다 기후 정책에 관심이 많은 자유주의자들 사이에서 훨씬 두드러진다. 기후 변화는 이처럼 신중한 중도주의에 대해 강력한 도전을 제기한다. 어중간한 절충으로는 아무런 상과를 거둘 수 없기 때문이다.


채취냐 내핍이냐, 오염이냐 가난이냐 하는 암울한 대안만 남아 있다고 자포자기할 때마다, 자본주의는 이긴다. 

따라서 우리 앞에 놓인 도전은 단순히 막대한 자금을 투입해 수많은 정책을 바꾸는 것이 아니다. 미약하나마 변화의 가능성을 열어 놓기 위해서 우리는 다른 방식으로,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생각해야 한다. 오늘날 시장 논리는 지배의 정신과 맹렬한 경쟁을 부추기며 개가를 올리고 기후 변화에 대응하기 위한 거의 모든 진지한 시도들을 마비시키고 있다. 국가들 사이의 극심한 경쟁 때문에 유엔 기후 협상은 수십 년째 교착 상태에 빠져 있다. 부유한 나라들은 온실가스 감축을 이행하길 완강하게 거부하며 세계 위계 서열의 최고 지위를 상실할 위험을 무릅쓰지 않겠다고 선언한다. 한편 가난한 나라들은 결국 자신들에게 가장 큰 피해를 안길 재앙을 부채질하는 행위임을 알면서도, 부자 나라들이 풍요로운 성장을 이루는 과정에서 그랬듯이 대량의 온실가스를 배출할 권리를 포기하지 않겠다고 선언한다.


이런 상황을 변화시키기 위해서는 자연과 이웃 나라들을 적으로 여기는 대신, 공동의 재도약이라는 원대한 프로젝트 안에서 긴밀히 협조하는 동반자로 보는 세계관이 힘을 얻어야 한다.


47.이런 상황을 고려하면, 자유 시장이 흔히 내놓는 호언장담ㅡ기술적 해법이 곧 출현할 것이다!ㅡ은 그저 허풍일 뿐이다. 중국과 인도에게 디킨스의 소설에 나오는 더러운 발전 단계를 밟으라고 1백 년의 시간 여유를 줄 수는 없다. 우리는 이미 수십 년의 세월을 허송했고, 따라서 지금 당장 방향을 전환해야 한다. 그게 가능할까? 물론 가능하다. 탈규제 자본주의의 근본 논리에 도전하지 않고서도 그게 가능할까? 어림도 없다.


48.기술적 해법들을 이용해서 수익성만 중시하는 현재 상황을 변화시킬 수 있는 사회적/정치적 환경을 조성해야 한다. “기후 변화에 근본적으로 대응하기 위해서는 사회적인 측면에서 급진적인 해법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이에 비하면 차세대 태양 전지가 상대적으로 효율적이라는 건 지극히 사소한 내용일 뿐이다.” 개리 스틱스

이 책은 사회적인 측면은 물론 정치적/경제적/문화적 측면에 필요한 급진적인 변화를 다룬다. 전환의 물리적인 측면, 즉 더러운 에너지에서 청정에너지로의 전환, 승용차에서 대중교통으로의 전환, 무질서하게 뻗어 나가는 교외의 전원주택에서 도보 생활이 가능한 밀집형 도시로의 전환 과정은 나의 주된 관심사가 아니다. 그보다는 이미 오래전에 제시된 이런 해법들이 대대적으로 시행되지 못하도록 봉쇄해 온 권력과 이데올로기의 장벽을 집중적으로 조명하고자 한다. 

지금 우리가 해결해야 할 핵심 문제는 태양의 힘의 메커니즘이 아니라. 인간의 힘을 둘러싼 정치적 역학 관계, 즉 권력을 쥔 주체를 바꿀 수 있느냐 없느냐와 깊이 관련되어 있다. 말하자면 권력 주체가 기업에서 공동체로 전환되어야 하고, 이런 방향으로 권력 전환이 이루어지려면, 현행 시스템에서 부당한 취급을 받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이 힘의 저울추를 변화시킬 수 있을 만큼 확고하고 다양한 사회 운동을 구축해야만 한다. 취재 과정에서, 나는 인간이 지닌 힘의 속성에 관한 기존의 사고(이간은 그 결과에 신경 쓰지 않고 더 많은 것을 채취할 권리와, 복접한 자연의 시스템을 원하는 대로 변조할 능력을 가지고 있다)의 일대 전환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걸 깨닫게 되었다. 이러한 전환은 자본주의에 대한 도전이자 현대 자본주의가 출현하기 전부터 존재해 온 문질 만능주의의 기본 태도, 이른바 ‘채취주의’ 사고방식에 대한 도전이다.


채취주의 사고방식에서 벗어나면 우리가 줄곧 외면해 온 진실이 드러난다. 기후 변화는 우리가 걱정해야 할 문제 리스트에서 의료와 세금 다음 항목에 추가하면 되는 ‘단순한 사안’이 아니다. 기후 변화는 문명의 경종이며 산불과 홍수와 가뭄, 그리고 생물 종의 멸종을 통해서 선포되는 강력한 메시지다. 우리에게 완전히 새로운 경제 모델을 구축하고 새로운 방식으로 지구를 공유할 것을 요구하는 메시지, 우리 인류가 진화를 이루어야 한다고 역설하는 메시지다.


아들을 생각한다면, 나는 마땅히 공포감을 가져야 한다. 우리 모두는 자기 자신은 물론이고 다른 사람까지 생각한다면, 마땅히 공포감을 가져야 한다.

우리가 사는 이 행성이 하루하루 활력을 잃어 가면서 파멸을 향해 치닫고 있다는 공포감. 이 감정을 가지고 우리는 과연 무엇을 해야 할까? 우선, 이러한 공포감이 결코 사라지지 않으리라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공포감이야말로 세계가 파멸로 치닫고 있다는 참혹한 현실에 직면해서 우리가 취할 수 있는 가장 합리적인 반응이라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 대다수 지구인이 하는 여러 가지 활동들이 지구의 파멸을 부추기고 있다는 참혹한 현실에 대해서 우리는 마땅히 공포감을 품어야 한다.

그 다음엔, 이 감정을 이용해야 한다. 공포감은 생존을 위한 자연스러운 반응이다. 공포감에 휩싸이면 달아날 힘이 생기고 높은 곳으로 뛰어오를 힘이 생기며, 때로는 초인적인 힘이 나오기도 한다. 물론 그보다 먼저 해야 할 일은 어디로 달려갈지 목표를 정하는 것이다. 목표가 정해져 있지 않으면 공포감에 휩싸여도 우리는 옴짝달싹도 하지 못한다. 우리의 묘책, 우리의 유일한 희망은 많은 이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나은 세계를 건설할 수 있다는 전망을 단단히 다지는 것이다. 그리하여 미래에 대한 공포감을 상쇄하고 누그러뜨리는 것이다.

물론 많은 것을 잃을 것이다. 누군가는 호화로운 생활을 포기해야 할 것이고 몇몇 산업은 완전히 자취를 감출 것이다. 게다가 이미 때를 놓친 탓에 기후 변화를 완전히 막아 낼 방법이 없다. 기후 변화는 이미 진행중이고, 아무리 기를 써도 우리 앞에는 갈수록 심해지는 참혹한 재난이 펼쳐질 것이다. 하지만 최악의 상황을 막아 낼 시간적 여유가 아직은 남아 있다. 더 늦기 전에 우리 스스로를 변화시켜야만 재난의 순간에 벌어질, 인간을 상대로 한 인간의 잔혹한 행동을 최대한 막아 낼 수 있다. 


1장 우파가 옳다


58. 기후 과학자들은 기후 변화가 현재 진행형이라고 입을 모은다. 기후 과학자 가운데 97퍼센트가 확고한 증거에 입각하여, 인간 활동으로 인한 기후 변화가 진행되고 있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이런 합의는 하나의 논문만이 아니라 과학자들이 20년간의 조사를 통해 수집한 증거, 그리고 이 분야의 거의 모든 전문가 협회가 동료들의 심사를 거쳐 내놓은 논문의 내용 분석과 공식 성명에 밝혀져 있다.

ㅡ 미국 과학 진흥회의 보고서, 2014년


65. 예일 대학의 문화 인지 프로젝트에 따르면, 한 사람이 지닌 특성 가운데 지구 온난화에 대한 ‘개인적인’ 입장과 가장 큰 연관성을 보이는 것은 ‘문화적 세계관’, 즉 세계를 보는 정치적 성향이나 이데올로기적 견해다. 나이나 인종, 교육, 지지하는 정당보다 개인의 세계관이 더 강한 연관성을 지니는 것이다.

예일 대학 연구원들의 설명에 따르면, ‘평등 의식’과 ‘공동체 의식’이 강한 사람들(이들은 집단 행동과 사회 정의를 지향하며 불평등에 대한 우려와 기업 권력에 강한 의구심을 갖는다)은 대부분 기후 변화와 관련한 과학자들의 통설을 지지한다. 반면에 ‘위계 서열 의식’과 ‘개인주의’성향이 강한 사람들(이들은 저소득층과 소수자에 대한 정부 지원에 반대하고 산업을 강력히 옹호하며, 부자의 소득이 많은 것은 사회에 기여한 몫이 크기 때문이라고 믿는다)은 대부분 과학계의 통설을 부정한다. 


66. 이 연구를 주도한 예일 대학 교수 댄 케이헌은 ‘세계관’과 기후 과학에 관한 견해가 긴밀한 상관관계를 이루는 것은 ‘문화적 인식’의 차이 때문이라고 본다. 문화적 인식이란 새로운 정보를 받아들일 때 정치적 지향과는 무관하게 ‘자신이 생각하는 유익한 사회에 대한 전망’에 보탬이 되는 방향으로 그 정보를 여과하는 과정이다. 만일 새로운 정보가 자신의 전망을 뒷받침한다고 판단하면 선뜻 그것을 받아들여 자기 것으로 만든다. 반대로 새로운 정보가 자신의 신념 체계를 흔들어 놓을 우려가 있으면 두뇌는 불청객을 격퇴하기 위해 지적인 항체를 생산한다. 


케이헌이 ‘네이처’지에 발표한 논문에 따르면, ‘자신이 고결하다고 여기는 행동기 사회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고, 자신이 비열하다고 여기는 행동이 사회에 유익한 영향을 미친다고 판단하는 순간 사람들은 불안감을 느낀다. 어떠한 견해를 받아들임으로써 동료들과 사이가 틀어질 수 있다는 불안감이 생기는 경우, 감정은 그 견해를 부인하려는 쪽으로 크게 기운다.’ 한마디로, 세계관의 갈등을 견디기보다는 현실을 부정하는 편이 훨씬 쉽다는 얘기다.


본질적으로 체계를 정당화하는 입장에 선 보수파가 기존 경제 체계의 정당성을 흔드는 증거를 대할 때마다 격분하듯이, 본질적으로 체제를 부정하는 입장에 서 있는 좌파는 기업과 정부가 내놓는 증거들을 불신하기 쉽다. 

신념 체계가 스스로를 방어하기 위해 그 증거들을 보이지 않게 감춰 버리기 때문이다.


68. 시장근본주의의 대안은 존재하지 않는다며 승리를 선언할 준비를 갖추었다. 그러고는 자신감에 차서 기업 활동의 자유를 쟁취하기 위한 다음 과업에 착수했다. 오래전부터 활약해 온 시장 근본주의는 정치적 격동과 심각한 경제 위기를 기회 삼아 최상의 성과를 거두었고, 자유 무역 협정과 세계 무역 기구 회원국 가입 유도를 통해 확고한 기반을 다졌다. 

 모든 게 잘 풀려 가고 있었다. 시장 근본주의는 성가신 규제와 정부감독에서 벗어난 금융권의 무분별한 이윤 추구가 빚어낸 2008년 경제 위기까지 견디고 살아남았다. 하지만 허틀랜드 콘퍼런스를 조직한 사람들은 기후 변화를 또 다른 위협으로 인지했다. 이것은 단순히 공화당 지지자와 민주당 지지자의 대립 구도가 아니었다. 이것은 대기와 해양의 물리적 경계선에 관한 문제였다. 


이 맹신자들은 시장 논리와 양립 가능한 온건한 기후 행동을 촉진하려는 다양한 시도조차 인정하지 않는다. 세계화 경제는 화석 연료의 사용을 통해 구축되었으며 앞으로도 화석 연료에 의존할 수밖에 없음을 이들은 알고 있다. 또한 화석 연료 의존도를 낮추기 위해서는 몇 가지 유연한 시장 메커니즘의 도입으로는 아무런 성과를 낼 수 없으며 강력한 개입이 불가피하다는 사실 역시 분명히 알고 있다. 오염 활동에 대한 강력한 규제 법률, 친환경적 대안에 대한 적극적인 보조금 지원, 위반 행위에 대한 엄중한 처벌, 오염을 규제할 세금 신설, 새로운 공공 토목 공사, 민영화의 역전 등, 이들이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개입의 목록은 끝없이 이어진다.


70.또한 기후 협상 과정에는 ‘지구적 차원의 형평성’ 문제가 꾸준히 제기된다. 기후 정의론은 지구 온난화가 2백 년 넘는 세월 동안 대기 중에 쌓인 온실가스로 인한 것이라는 과학적 사실에 근거한다. 산업화에 연륜이 깊은 일부 국가들이 배출해 온 온실가스양은 다른 국가들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많다. 그러나 기후 변화의 충격을 가장 먼저, 가장 심하게 겪고 있는 곳은 그동안 온실가슬르 거의 배출하지 않은 많은 나라들이다. 이 나라들은 지리적으로 불리한 위치에 있을 뿐 아니라 빈곤 때문에 피해를 입을 가능성이 특히 높다.


이런 구조적인 불공정을 바로잡기 위해서는 지구의 기후 시스템을 동요시키지 않도록 중국과 인도 등 급속한 경제 성장을 이루고 있는 국가들을 설득하는 한편, 북미 대륙과 유럽 등 오랜 연륜을 지닌 온실가스 배출 국가들이 솔선해서 온실가스 규제의 부담을 더 많이 짊어지도록 유도해야 한다. 또한 빈곤 국가들에는 저탄소 경로를 이용하여 빈곤을 극복할 수 있도록 자원과 기술의 대대적인 이전 작업이 필요하다. 


강경한 보수파 사이에서 기후 변화 부정 운동이 급속히 퍼져 나가고 있는 현실은 바로 이런 두려움을 반영한다. 이들은 기후 변화를 현실로 인정하는 순간 이 시대의 핵심적인 이데올로기 투쟁, 즉 공공의 목적과 가치관에 맞게 사회를 계획적으로 관리할 필요가 있다는 입장과 시장의 마법만으로도 이러한 과제를 충분히 달성할 수 있다는 입장이 대결하는 이데올로기 투쟁에서 패배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분명히 파악하고 있다.


기후 변화 이론은 보수파가 의지하는 이데올로기의 기반을 무너뜨리는 폭약이다. 집단 행동을 비방하고 일체의 기업 규제 조치와 일체의 공적 조치를 향해 전면전을 선포하는 신념 체계를 가진 사람들의 입장에서 보자면 유례를 찾을 수 없을 만큼 대대적인 규모의 집단 행동과 위기의 씨앗을 심고 그것을 심화시켜 모든 시장의 힘에 대한 철두철미한 규제를 통해서만 해결할 수 있는 기후 변화를 결코 인정할 수 없다.


72.많은 보수자에게 있어서 기후 과학은 ‘그들이 지닌 가장 근본적이고 가장 중요한 근본 신념, 즉 <인류>가 지구와 지구의 모든 결실을 정복하고 자연에 대한 <지배력>을 구축할 능력과 권리를 지니고 있다는 신념에 오물을 끼얹는 행위’다. 


많은 부정론자들은 자신이 기후 과학을 불신하게 된 이유와 관련하여, 기후 변화가 사실이라면 정치적 파급력이 어마어마하리라는 극단적인 불안감이 한몫을 했다고 솔직하게 인정한다. 

‘현대의 환경주의는 좌파들이 선호하는 여러 가지 대의(부의 재분배, 세금 인상, 정부 개입의 확대, 규제)를 진전시키는 데 효과적이다.’ 

‘좌파에게 기후 변화는 완벽한 도구다. ... 기후 변화를 인정할 경우 우리는 좌파가 원하는 모든 것을 무조건 시행해야 한다.'

자신과 동료들이 기후 문제를 기후 문제를 물고 늘어지는 건 과학적 사실에 오류가 있어서가 아니라는 점도 솔직히 인정한다. 사실 그들은 기후 변화라는 과학적 사실이 경제적/정치적인 측면에서 엄청난 함의를 품고 있다는 것에 겁을 먹어 이에 대한 반박에 착수한 것이다.


그들은 정부 개입과 관련한 찬반 논쟁에서 이기기 위해 어떤 방법을 써야 할까? 간단하다. 정부 개입ㅇ르 허용할 경우 기후 변화 이론을 방치한 지난 수십 년 보다 훨씬 큰 경제적 대가를 치르게 될 거라고 주장하면 그만이다.


따라서 허틀랜드 콘퍼런스에 모인 이데올로기 전사들은 이처럼 심각한 위협을 물리칠 방법은 딱 하나 뿐이라고 판단한다. 바로 수많은 과학자들이 거짓말쟁이이며, 기후 변화는 정교하게 고안된 사기극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폭풍이 갈수록 강력해진다는 건 그들의 망상일 뿐 사실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만약 사실이더라도 그건 인간의 행동 때문에 나타난 결과가 아니라고, 더 한발 물러나 정말로 그렇다 해도 인간의 행동을 멈출 방법은 없다고 주장한다. 한마디로 현실을 부정하는 것이다. 오로지 그 현실이 암시하는 미래가 있을 법하지 않다는 이유로 말이다.

 바로 여기에 내가 생각하는 불편한 진실이 있다. 나는 이 강경한 이데올로그들이 정치 분야에서 활동하는 ‘온난화주의자들’보다 기후 변화의 중요성을 훨씬 정확하게 꿰뚫고 있다고 생각한다. 온난화주의자들은 여전히 기후 변화 대응이 점진적이며 고통을 초래하지 않을 것이라고, 따라서 화석 연료 기업은 물론이고 어느 누구와도 전쟁을 치를 필요는 없다는 생각을 고수한다. 

 다음 논의로 넘어가기 전에 내 입장을 분명히 밝혀 두겠다. 세계의 기후 과학자들 중 97퍼센트의 의견에 따르면, 기후 과학과 관련한 허틀랜드의 판단은 완전히 엉터리다. 하지만 하지만 과학적으로 입증된 사실들이 정치와 경제에 엄청난 파급력을 미친다는 대목, 그리고 인간의 에너지 소비 행태는 물론 이윤 추구를 목적으로 하는 자유주의 경제의 근본 논리에도 급진적인 변화를 요구한다는 대목에서는 이들의 판단이 정확하다. .. 재앙을 피하기 위해 요구되는 변화의 범위와 강도를 돈 문제와 관련시켜 따지는 한, 이들의 판단은 정확하다.


79.기후 변화의 과학적 근거를 부정하는 태도와 사회/경제적 특권 사이에 분명한 상관관계가 존재한다. 기후 변화를 부정하는 사람들 중에는 보수주의자, 백인, 남성 그리고 평균 소득이 높은 사람들이 압도적으로 많다.

‘보수적인 백인 남성 그룹의 경우, 자신이 속한 경제 시스템 내에서 권력을 행사하는 위치를 차지하는 비율이 다른 그룹에 비해 아주 높다. 기후 변화가 산업 자본주의 경제 시스템에 강력한 도전장을 던지고 있는 상황에서, 시스템의 정당성을 확신하는 보수적인 백인 남성들이 기후 변화를 부인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 급격한 사회적/경제적 변화가 일어날 경우, 사회적/경제적 특권을 지닌 사람들은 많은 것을 잃게 된다. 


81.이들이 기후 과학을 부인하는 이유는 우월주의에 기반한 자신들의 세계관을 무너뜨릴 위험 때문만이 아니다. 이들의 세계관은 거대한 인류애를 외면하고 빙하 융해 덕분에 수익을 올리는 것을 합리화할 수 있는 지적인 도구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우리는 이처럼 공감이 결여된 사고방식(문화 이론가들은 이를 ‘위계적’, ‘개인주의적’이라고 표현한다)의 위험성을 인식해야 한다. 기후 변화는 오래지 않아 우리의 도덕성을 실험할 것이다. ... 기후 난민이 물이 새는 보트를 타고 우리의 해안에 도착한다면 우리는 과연 이들을 어떻게 대할까? 신선한 물과 음식이 갈수록 희귀해져 갈 때 우리는 과연 어떻게 행동할까?

 이런 일은 이미 진행 중이고, 따라서 그 답도 뻔히 나와 있다. 기업들은 자연 자원을 손에 넣기 위해 갈수록 탐욕ㅇ르 부리고 난폭한 행동을 일삼을 것이다. 부유한 국가는 식품과 연료를 확보하기 위해 경작이 가능한 아프리카의 땅을 차지할 것이고, 이미 극심한 수탈에 시달려 온 세계 전역의 땅들은 신식민주의적 수탈에 또다시 유린당할 것이다.

… 전 지구적인 차원에서 비슷한 과정이 진행될 것이다. 지구의 기온을 낮추기 위한 공학적 방법이 도입되면 열대 지역에 사는 사람들은 북미와 서유럽, 공업화된 동아시아 지역에 사는 사람보다 훨씬 더 큰 위험에 노출된다. 정부는 우리의 대응(혹은 무대응) 때문에 땅을 버리고 떠나야 하는 기후 난민들에게 도덕적 채무가 있음을 인정하지 않은 채, 최첨단 기술을 동원하여 더욱 견고한 요새를 구축하고 더욱 가혹한 이민자 규제 법률을 채택할 것이다. 또한 ‘국가 안보’를 내세워 수자원, 석유, 경작지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타국의 분쟁에 개입하거나 직접 분쟁을 일으킬 것이다. 요컨대 우리 문화는 이미 해오고 있는 일을 전보다 훨씬 잔인하고 난폭하게 진행할 것이다. (지금) 우리 시스템은 바로 이런 일을 하기 위해 구축되어 있기 때문이다.




[영화리뷰] 100억의 식탁 
백남기 선생이 돌아가셨다.
함께 살길을 찾아 거리로 나온 이의
죽음은 무겁다. 
때때로 이런 생각이 든다.

우리는 말세를 보고 있는건 아닐까.
그리고 우연찮게 영화리뷰를 적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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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보기는 아래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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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밭 두고 떠난 간 이를 기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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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일주일에 하루, 홍동면을 순환하는 버스를 운전하고 있습니다. 이동성이 떨어지는 농촌 마을. 일주일에 한 번 마을 어르신들의 발이 되어드리는 즐거움을 얻습니다. 더불어 방방곡곡을 도는 덕에 시시각각 변해가는 마을의 풍경을 즐기고 있습니다. 홍동천 수계를 따라 펼쳐진 논, 한가로이 노니는 백로. 벼꽃이 피나 했더니 푸른 물결은 어느새 황금 물결로 변했습니다. 그런데 왠지 피(잡초)바다 논이 많습니다. 아침 해보다 부지런한 마을 농민들께 무슨 일이 생긴 걸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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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인은 한숨부터 나오는 낮은 쌀값에 있습니다. 인건비도 안 나오는 데 무엇하러 논에 나가냐는 말을 듣습니다. 경제개발 시절 중공업 중심 정책은 저곡가 정책을 기반으로 했습니다. 낮은 인건비를 유지하기 위해 저렴한 생활비가 요구됐던 것이죠. 젊은이들은 농촌을 떠났습니다. 제 아버지 세대에게 농촌이 ‘가난'으로 기억되는 건 이 때문일 것입니다. 사실 저곡가 정책은 21세기에도 변하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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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착한’ 가격은 정말 착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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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트에 가면 어렵지 않게 ‘득템’의 기분을 느낍니다. 이런 생각 해보셨나요? 생닭은 어째서 4천 원 밖에 안될까? 흙만 먹여 키워도 이런저런 비용 다하면 배는 할 텐데요. 비밀은 외부화된 비용에 있니다(어느 물건이 만들어지고 폐기되는데까지 치러져야 하는 비용이 있습니다. 이중 일부를 다른 이가 내고 있다는 말입니다. 예를 들어, 자동차 배기가스로 발생하는 초미세먼지의 피해가 심각합니다. 우리나라는 개인이 공기청정기를 사면서 값을 치르고 있습니다. 자동차(환경오염+도로건설+교통사고)로 인한 비용을 다수의 사람이 분담하고 있는 것입니다). 4천 원에 생닭을 살 수 있는 건 밀집 사육과 외국에서 들여오는 값싼 사료(옥수수, 콩) 덕입니다. 아니, 우린 저렴하게 치킨을 먹을 수 있고, 그들은 농산물을 팔 수 있다니. 누이 좋고 매부 좋구먼! 좋은 일 아닌가. 안타깝게도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의 구매 합리성(싼 가격)이 누군가를 땅 파먹고 살도록 만들고 있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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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분의 합리성이 전체의 최선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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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GMO 없는 홍성시민모임’에서 영화 상영회를 했습니다. 다큐영화 <100억의 식탁>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학자들은 2050년 세계인구가 100억 명으로 증가할 것으로 예상합니다. 감독은 농산업이 100억 명을 어떻게 먹일 것이냐는 질문으로 세계를 여행합니다. 기업과 연구소는 답을 알고 있을까요. 스스로 답을 찾아가는 시민들도 찾아갑니다. 이들은 각자의 답으로 식량문제 해결을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유전자조작종자를 만드는 기업, 토종종자를 지키는 농부, 땅속 비료를 채취하는 기업, 동물의 똥으로 농사짓는 농부, 공장식 축산을 하는 기업, 전환도시, 지역사회가 지원하는 농업, 시카고 곡물거래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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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중반부, 공장식 농장이 퍼지고 있는 아프리카의 모습이 나옵니다. 이들은 공장식 축산의 사료로 쓰일 콩을 재배합니다. 숲을 파괴한 후 들어서는 농장. 생태계 파괴도 환경의 문제도 있지만, 지역 원주민의 땅을 강제로 뺏는 인권의 문제도 있습니다. 농장주는 지역에 일자리를 제공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광대한 농장에서 만들어지는 일자리는 그 땅에 살아가던 농민들이 고용되기엔 턱없이 적습니다. 그나마 일용직입니다. 공장식 농장의 농작물이 저렴해 보이는 이유는 일자리를 줄이고 무상으로 빼앗은 땅 덕분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마트에서 만나는 '착한(값싼)'닭의 비밀이 조금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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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조각을 잃지 않는게 지적 탐구의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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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거되는 이야기가 복잡한듯하지만 전개는 단순합니다. ‘질문과 답, 답에 대한 의문’의 방식으로 조각을 하나씩 이어갑니다. 어느 한 편의 이야기만 전하지 않습니다. 다방면의 주장으로 퍼즐을 맞춥니다. 그러면서 점차 근본적인 질문으로 들어갑니다. 미래 자원까지 소모하지 않는 방식으로 식량을 생산하는 방식은 무엇일까. 유기농은 부자들만 먹을 수 있는 먹거리일까. 기아는 생산량의 문제일까. 먹거리 접근성을 높이는 방법은 무엇일까. 지역사회가 농업을 지원하는 방식은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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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가 말하는 희망 : 농적인 삶에 대한 믿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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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의 흥미로운 점은 사례로 나온 대안적인 활동들이 이미 우리 지역에서도 다양하게 이뤄지고 있다는 점입니다(물론 공장식 축사나 화학비료 사용 등도 이뤄지고 있죠). 홍동면의 유기농 역사는 70년대부터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주민들이 스스로 협동조합을 조직해왔습니다. 홍성씨앗도서관에서는 토종 종자를 지키는 일을 합니다. 얼굴 있는 농산물, 홍동농협의 로컬푸드 매장. 도시민과 농민의 관계를 회복하기 위한 꾸러미. 자연의 힘으로 농작물을 기르는 자연재배협동조합. 더불어 사는 평민을 기르는 마을대학 풀무학교 전공부. 지역에서 생산한 물건을 지역 소비를 돕는 풀무학교생협. 축재 못 하는 돈, 외부 유출을 막는 돈, 돈의 순기능을 돕는 지역화폐 ‘잎’... 자립과 자치가 몇몇사람의 유별난 생각이 아닌 것을 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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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여기 : 우리는 무엇을 먹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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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의 이어지는 문답은 마지막에 가서 하나의 질문으로 끝납니다. 이제 우리가 답할 차례입니다. 공장식 사육은 최근 많이 알려졌습니다. 전국 제일의 축산 도시 홍성도 이미 오랜 세월 피해를 보았습니다. 먹거리 문제는 결코 제삼 세계 빈민국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정의로운 먹거리에 대한 접근성과 독립성은 지금 우리의 문제입니다. 쌀값이 20년째 동결 중이라는 걸 우린 알고 있습니다. 농민이 왜 장사꾼이 되어야 하나요. 얼마 전 정부의 쌀값 정책에 항의하기 위해 거리로 나섰던 농민이 죽었습니다. 함께 사는 길을 묻고자 길에 나섰던 이의 죽음은 우리에게 질문을 던집니다. 쌀농사는 죽어가는 농촌의 마지막 생명줄일 것입니다. 농부가 떠난 마을은 어떤 모습일까요. 농부 없는 나라에 건강도 없습니다. 결국 ‘착한’ 가격의 문제는 우리 자신의 문제이며, 상상력의 문제인 것입니다. 영화가 끝난 후 개인적으로 저는 텃밭으로 가고 싶어졌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마음이 드셨나요? 들려주시기 바랍니다. 영화는 EBS 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 홈페이지에서 다시 보실 수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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