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 오늘날 가정의 이미지는 더 이상 ‘보금자리(nest)’가 아니라 단순한 ‘버스정류장(bus-stop)'으로 변하고 있다. 가정은 노동에 종속되어 노도의 긴 여정을 다니기 위한 간이정류장으로 변했다. 아이들도 노동하는 어른들과 둘러앉아 삶의 의미와 행복을 나누는 시간을 함께 갖기 어렵다. 다만 그 간이정류장에 간간이 들러 냉장고 문을 열고 먹을 것만 챙겨 먹고 바삐 떠난다. 차라리 학원에서 또는 독서실에서 공부하는 척이라도 하면 마음이 좀 편한 듯하지만, 여전히 내면은 불안하고 공허하다. 어른들은 삶이 고달플수록 그 고통을 잊기 위해 일에 더 매진하는 병적 경향도 있다. 가시적 성과를 올리면 다소 마음이 편해지기 때문이다. 이렇게 어른들, 아이들 모두 일중독으로 내몰리고 있다.
31. 요컨대 오늘날 우리가 일에 대해 일정한 지향성을 갖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일이 우리에 대해 일정한 지향성을 강제하는 셈이다. 겉으로는 우리가 일에 대한 가치관을 자유로이 선택할 수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우리가 일에 대한 가치관을 강요받는다. 필요에 따라 일하기보다는 거꾸로 일의 필요에 따라 우리가 끌려 다니며 일한다. 그 와중에 굳이 우리가 일에 대해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면, 그것은 일이 우리 내면의 고통이나 두려움을 회피할 수 있는 ‘도피처’내지 ‘망각제’ 역할을 한다는 점이다.
35. 이제 돈의 논리가 삶의 논리를 대신하고, 마침내 삶 그 자체를 지배하게 된다. 그리하여 경제가 사회를 압도하고 병합해버린다. 이것을 범지구적으로 추진하는 움직임이 바로 신자유주의 세계화요, WTO요, FTA다. 안타깝게도 소수의 지배 엘리트들과 그를 추종하는 대다수 대중들은 “대세를 거스를 수 없다”고 하며 현실에 적응하기만을 강조한다.
이렇게 전도된 현실을 우리가 바로잡고자 한다면, 사유와 노동의 이분법, 인간과 자연의 이분법, 경제와 사회의 이분법을 과감히 넘어서야 한다.
한마디로 노동을 더 이상 신성시하지 않아야 하는데 사람들은 여전히 이를 ‘신성시’하며, 나아가 고통스런 현실적 삶의 도피처(쉼터)로 삼는 것이 문제라는 것이다. 피비린내까지 풍기는 ‘신성한 쉼터’로서의 노동, 이것이 일중독 시대에 우리 대다수가 내면화해버린 노동관이다.
38. 한국인들은 ‘노는 것’에 대해 일종의 죄책감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그리 놀랄 일도 아니다. 그것이 P. 부르디외가 말한 아비투스(습속)로 굳어지다 보니, 이제는 잘 ‘놀 줄’도 모르는 사람들이 되고 말았다. 반면에 일이 돈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는 것은 일이 일종의 마약, 즉 현실적 고통에 대한 진정제가 되거나 아니면 가슴을 들뜨게 하는 흥분제로 작용했음을 암시한다. 이것이 일중독 사회 속에 사는 우리의 솔직한 모습이다.
43. 어른들은 어린 시절의 좌절감을 보상받기 위해, 또는 그러한 내면의 불안감과 두려움을 은폐하기 위해, 일이라는 일종의 중독물에 빠져듦으로써 견디기 어려운 심적 고통을 피해가고자 한다. 그 결과 사람들은 일의 결과가 얼마나 좋은가와는 무관하게, 오로지 일 속에서 삶의 의미를 찾으려고 하는 ‘자기강제’를 하게 되고 자연히 실 노동시간도 길어질 수밖에 없다. 이 모든 현실은 경제와 사회가 이분법적으로 분리되었을 뿐만 아니라 마침내 사회가 경제 속에 합벽된 결과, (돈이나 일에의해, 즉 자본에 의해) ‘삶의 식민화’가 고도로 진척되었음을 말해준다.
44. 사유와 노동의 이분법을 넘는다는 것은 너도 나도 삶의 문제 해결에 이론가이자 실천가로 적극 나서야 함을 뜻한다. 더 이상 가정과 학교에서 “땅 파고 살지 않으려거든 공부해라”라고 강요하지 않는 사회를 만드는 것이다. 모든 이가 땅을 파면서도 땅의 철학자가 되는 감동적인 사회, 이것이 돌파구다. 그것은 지금의 수직적 사다리 질서를 수평적 원탁의 질서로 바꾸어야 가능하다. 그 출발점은 우리 마음속의 사다리 질서부터 걷어내는 일이다.
인간과 자연의 이분법을 넘는다는 것은 한편으로 인간이 자연속으로 겸손하게 회귀함을 뜻하며, 다른 한편으로 ‘자연의 노동’을 적극 인정함을 뜻한다. 인간이 자연으로 회귀한다는 것은 자연의 순환고리 중 일부로 동참하는 것이며 따라서 그 순환에 들어가지 못하는 ‘쓰레기’를 더 이상 만들지 않음을 말한다. 자연의 노동을 적극 인정한다는 것은, 햇볕의 노동, 바람의 노동, 물의 노동, 흙의 노동, 미생물의 노동, 풀의 노동, 밀알의 노동, 나무의 노동을 인간의 노동과 동등하게 보는 것이다.
별들이 온 힘으로 굴러서 해는 떠오르고
화분에 작은 싹 하나도
매순간 심호흡으로 자기 생을 밀어 올린다.
조향미, 그 나무가 나에게 팔을 벌렸다
경제와 사회의 이분법을 넘는다는 것은 돈벌이 그 자체를 목적이 아니라 살림살이의 수단으로 되돌린다는 말이다. 아이들을 점수나 등수로 판단해서는 안 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한 사람을 직업이나 소득, 지위로 판단해서는 안 된다. 모든 사람을 사람 그 자체로 인정하며 살갑게 더불어 살 때, 비로소 경제 사회 이분법이 극복된다.
다시 물어보자. 사유와 노동의 이분법, 인간과 자연의 이분법, 경제와 사회의 이분법을 과감히 넘어가는 길의 입구는 어디에 있을까? 그것은 아마도 우리 자신 안에서 분리된 내면과 외면을 다시금 통일하는 데 있다. 참된 자아와 다시 접촉하는 것이다. 내가 살아 있다는 것이 무엇인가, 내 내면에서 꿈틀거리는 것이 무엇인가, 무엇이 나의 참된 행복인가, 무엇이 삶의 기쁨이요, 존재의 기쁨인가? 이런 질문에 답하려면 결국 외피에 가려진 내면의 진실을 찾아야 한다.
그런데 참된 자아는 과연 독립적으로 존재할까? 그렇지 않다. 우리는 나 홀로 가면서도 더불어 가는 존재다. 또 더불어 가면서도 나 홀로 가기도 한다.
‘같이 또 따로, 따로 또 같이’ 존재하는 것이 우리의 실존이 아닐까? 소유양식이 아닌 존재양식의 삶을 강조한 에리히 프롬, 라다크 마을이나 남태평양 아누타 섬, 그리고 북미 원주민들이 가졌던 ‘확장된 자아’의 삶, 사람을 관계적 존재로 보자는 신영복 선생의 시각도 바로 이런 점에서 일맥상통한다.
59. 진리를 위한 경쟁이 아닌 타자를 누르기 위한 생존경쟁, 즉 세계시장을 둘러싼 상품경쟁은 어떤 상품이 승리하는가와 무관하게 자본주의 세계체제의 지배를 존속시키는 조건이 된다. 내가 시장경쟁에 참여하는 순간, 그 승패와 무관하게 경쟁의 희생자가 된다. 나아가 그것을 넘어 (우리 모두를 지배하는) 자본의 지배력을 강화시켜주게 된다. 바로 이 점을 명확히 인식하는 것이 자본주의 경쟁의 본질을 꿰뚫어보는 것이다.
60. 마찬가지로 노동자들이 서로 자기 노동력을 팔기 위해 유혈적 경쟁(경매)을 하지 않고, 모두가 일어나서 “왜 우리끼리 피터지게 경쟁하나?”라며 한꺼번에 단결하여 몰려 나간다면 그것은 자본에 치명적이다. 그 자본은 이윤추구를 포기하든지 인간답게 살고자 하는 노동자의 요구를 억지로 들어주든지, 이 둘 중 ‘양자택일’을 해야 한다.
61. 따라서 유일한 대안은 그 기업이 가는 곳마다 모든 노동자들과 연대하여 통일된 조건을 요구하는 것이다. 경쟁을 그만두는 것, 이것이 ‘노동조합’의 원초적 존재이유다. 즉 ‘경쟁과 분열’을 통해 지배와 착취를 강요하는 자본에 맞설 수 있는 것은 노동자 간 ‘경쟁의 지양’을 통한 단결과 연대뿐이다. 이것만이 노동자의 유일한 무기다. 이런 본질을 모든 노동자들이 꿰뚫어보고 실천하지 못한다면 노사간 힘겨루기는 결과가 뻔하다.
66. 그렇다면 대부분의 사회구성원이 문제제기조차 않고 굳게 내면화화한 ‘경쟁 이데올리기’에 제대로 맞서는 방법은 무엇인가? 그것은 일차적으로 ‘탈경쟁’이 자아내는 모중의 두려움을 정면으로 꿰뚫으면서 넘어가는 것이며, 다음에는 ‘연대의 실천을 통해 그 두려움의 축소와 에너지의 분출을 직접 경험하는 것이다.
72. 경쟁이 낳는 비극 중 하나는, 타자의 불행을 자기 행복의 기초로 삼는 일이다. 경쟁이 최대 비극은, 서로 경쟁하는 가운데 모두 공멸한다는 점이다. 스스로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80. 라이벌 기업, 경쟁 회사가 죽어야만 내가 살아나는 그런 게임이다. 그 말은 거꾸로, 우리 회사가 패배해야만 경쟁사가 살아남는다는 말이기도 하다. 그렇게 치열한 생존게임을 하는 가운데, 우수한 회사는 우수한 대로 좀 못한 회사는 좀 못한 대로 자기가 부리는 노동력을 효과적으로 지배한다. 전체적으로 보면 경쟁 원리를 통해 1등부터 꼴찌 회사까지 자본의 지배를 별 저항 없이 잘 받아들이게 만들 수 있다. 이게 바로 경쟁의 본질이다. 즉 경쟁이란 자본의 지배를 위한 수단이다.
81. 현실 자본주의 경제가 돌아가는 원리가 이러하니, 갈수록 사람들이 피곤해지고 삶이 무의미하게 느껴질 수밖에 없다. 그런데도 우리는 ‘경쟁은 필연이고 좋은 것이니 해야만 한다’고 말한다. 이제부터 이런 생각은 버려야 한다. 그런 생각은 결국 자본과 그 대리인들, 대리 조직들이 만들어낸 것에 불과하다. 원래 사람이 살아가는 원리는 경쟁이 아니라 협동이다. 서로 돕고 나누는 가운데 온갖 역경도 이겨내며 같이 살아온 것이 인류의 생존방식이었다.
82. (생존)경쟁은 필연이 아니라 자본이 자신의 필요에 따라 만들어낸 것이다. 나아가 일단 자본이 요구하는 경쟁에 빨려들다 보면 처음엔 공정 경쟁으로 출발하는 것 같지만 결국은 불공정 경쟁으로 갈 수밖에 없다. 그리고 처음엔 적절한 경쟁으로 가는 것 같지만 나중에 지나친 경쟁으로 가게 되어 있다. 심지어 둘 다 죽을 듯 내달리다가 살기 위해선 먼저 무릎을 꿇고 피하라는 식의 공멸적인 ‘치킨 게임’으로 치닫기도 한다. 이처럼 지금의 경쟁은 상생의 경쟁이 아니라 공멸의 경쟁이다.
124. 니묄러 목사의 고백은 한 개인의 양심과 철학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지적하기도 하지만, 사실은 소통과 연대의 중요성을 특별히 강조하고 있다. 당장 내 일이 아니라고 타자의 고통을 외면하는 순간 우리는 탈연대를 실천하는 셈이다. 그렇게 우리는 상호 고립되고 원자화한다. 그렇게 될수록 지배자들의 힘은 더욱 강해진다. 반면 아무리 작은 일이라도 타자의 고통이 나의 고통임을 느끼면서 소통하고 연대하는 순간, 우리의 힘은 두 배 이상으로 커진다.
그러면 여기서 이런 질문이 필요하다. 사태의 본질이 이러한데도 왜 우리는 대개 소통과 연대를 하지 않고 경쟁과 분열에 빠지고 마는가? 그것은 앞서도 말했지만 우리가 기존 시스템, 즉 기득권 경쟁을 강제하는 사회경제 구조 자체를 바꾸려 하기보다는 그 속에서 좀 더 높은 자리를 차지하는 것을 인생의 목표로 삼기 때문이다. 왜 그렇게 될까? 그것은 우리가 ‘어떻게 감히 내가 이 구조를 바꿀 수 있단 말인가?’하고 아예 처음부터 체념하기 때문이다. 또한 그것은 우리가 ‘나도 저 위의 높은 사람들처럼 강자가 되어 기득권을 맘껏 누려야지’라고 욕망하며 ‘강자 동일시’ 태도를 취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왜 우리는 변화를 꿈꾸기보다 이런 강자 동일시의 태도를 갖게 될까? 그것은 한편으로 변화를 꿈꾸던 사람들조차 좌절하거나 핍박을 받고 상처를 받는 것을 보았기 때문에, 그리고 다른 한편으론 그저 주어진 현실 구조에 잘 적응하여 상부(권력자)로부터 인정받고 출세한 사람을 보면서 ‘나도 (저 사람처럼)할 수 있다’는 꿈을 꾸기 때문이다. 요컨대 저항과 억압에 대한 두려움, 그리고 성공한 자에 대한 부러움이 한데 섞인 결과, 우리는 ‘강자 동일시’ 심리를 강하게 내면화한다.
149. 초중고 학생들이 단지 아직 어른이 아니라는 뜻에서 미숙한 학생이 아니라, ‘나날이 자라는 과정에 있는 하나의 인격체’임을 가르치지 않는다. 아이들을 미숙아로 보는 관점은 아이들을 통제의 대상으로 만든다. 그러나 아이들을 성숙과정에 있는 인격체로 보는 관점은 아이들이 스스로 책임성 있고 자율성 있는 삶의 주체로 성장하도록 곁에서 도와주게 한다. 두발 단속이나 복장 단속, 지각 단속, 술 담배 무조건 금지 등과 같은 각종 통제는 아이들을 삶의 주체로 보는 거시 아니라 불신과 감시의 대상으로 보는 것이다. 단속이나 통제를 우선시하기 전에 아이들이 스스로 토론하고 현실의 문제점을 정리해 스스로 대안이나 해결책을 찾아가도록 조언하는 방식이 옳다.
152. 심지어 생활환경을 정리하고 청소하는 일마저 벌칙의 일부로 만듦으로써, 그것이 마치 죄인들이 하는 일인 양 가르치고 만다.
155. 사실 학교란 이래야 한다. 그것은 참된 배움의 과정을 체험하면서 이 세상에 살아 있다는 것이 얼마나 좋은지, 친구들과 함께 아무 걱정 없이 어울려 논다는 것이 얼마나 신나는 일인지, 수업 시간에 사회와 자연과 언어나 수학을 하나씩 알아가는 것이 얼마나 기쁜지 느끼면서도 내가 무얼 잘하고 무얼 하고 싶은지 서서히 깨달아가는 것이다. 자아발견과 시민 소양, 바로 이것이 교육의 기본 방향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자아발견이란 내가 좋아하는 것, 내가 잘할 수 있는 것, 내가 의미를 발견하는 것을 찾으며 나도 이세상에서 뭔가 보람을 느끼며 살 수 있는 소중한 존재임을 깨닫는 것이다.
156. 사회와 역사는 어떻게 생겼으며 윤리와 도덕은 무엇인지, 이 사회에서 더불어 살아가는데 필요한 것은 무엇인지를 알아가는 것이다. 나중에는 공동체를 위해 뭔가 작은 기여라도 할 수 있게 역량과 태도를 길러가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159. 오컨대 꿈의 발견, 실력 증진, 사회헌신, 바로 이 세 가지 내용을 갖고 아이들과 함께 행복하게 인생 여행을 하는 것, 이것이 곧 건강한 교육이요 배움이다.
167. 이런 뒤틀린 사랑은 삶을 과정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결과로만 보기 때문에 생긴다. 날마다 아이들의 성장이나 변화를 자상하게 보면서 서로 아기자기한 대화와 소통을 통해 매 순간 삶의 기쁨, 존재의 기쁨, 관계의 기쁨을 누리는 것이 아이와 어른이 모두 행복해지는 길이다.
180. 반면 꿈의 길을 가는 자는 어떠한가? 꿈의 길을 가는 이는 다른 사람의 평가나 시선에 맞추어 살지 않는다. 자신이 좋아하거나 잘하는 일, 아니면 사명감을 느끼는 일에 일관되게 매진한다. 혹시 부모가 경제적으로 뒷받침을 못해준다 하더라도 마음의 지지만 있다면 얼마든지 용기 있게 달려 나간다. 혹시 마음의 지지가 없더라도 내가 갈 길은 꼭 간다. 꿈이 확실하다면 당장은 힘들지만 나중엔 부모조차 그 일관된 마음에 감동하고 마침내 지지의 눈물을 흘릴 때가 온다. 자신의 꿈을 이루고자 하는 이는 자신의 실력을 키우기 위해 막노동도 마다 않는다. 부모가 밀어준다면 더욱 좋지만 그렇지 않아도 즐겁다. 막노동을 하면서 몸은 힘들지만 마음은 기쁘다. 자신이 어디로 가야 할지 방향을 알고 어떤 선생님을 찾아 배워야 할지 알기 때문이다. 남들이 말하는 일류대가 아니라도 좋다. 내 꿈을 이루는 데 도움을 주는 훌륭한 선생님이라면 서울이나 지방, 국내나 해외를 가리지 않고 달려갈 자세가 되어 있다. 그렇게 고생해서 목표를 갖고 찾아간 선생님에게 배우는 학생은 일 분 일 초라도 아깝고 소중하다. 선생님의 말씀이 귀에 쏙쏙 들어온다. 실력이 갈수록 향상되며 새로운 배움을 얻는 기쁨을 누린다. 꿈의 길을 걷는 이는 꿈을 꿀 때부터 그리고 그 길을 걷는 모든 발걸음이 즐겁다. 나중에 꼭 성공해야 기쁜 게 아니다. 결과나 속도가 아니라 과정이고 느낌이다. 이렇게 열심히 가다 보니 실력은 증진되고 어느새 선생님이 “자네 실력을 보아 하니, 이제 내 조교로 따라 다녀도 되겠군”이라 하고 새 길이 열린다. 이 사람은 비록 날마다 호화판 뷔페 음식을 먹지는 않지만 된장찌개에 김치를 먹더라도 행복하다. 비록 세계적 유명인사가 되지 않더라도 자신의 마을이나 지역에서 이웃에게 유익한 일을 하면서 자신의 꿈을 실현할 수 있다. 이게 사회 헌신이다.
202. 기엄들은 그 ‘기업의 사회적 책임’도 경쟁력이나 이미지 향상에 도움이 되는 만큼만 숭행할 수밖에 없는 근원적 한계를 갖고 있다.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지려고 하는 양심적 기업이 물불을 가리지 않고 생산성을 높여 경쟁력을 확보하는 기업을 이길 가능성은 낮기 때문이다. 따라서 ‘기업의 사회적 책임’조차 일부 기득권층에 속하는 기업들의 배부른 소리에 지나지 않는 사침품인지도 모른다.
중요한 것은 사람들이 ‘두려움’으로 인하여 서로 살벌하게 경쟁하는 것만이 유일한 삶의 전략이라 믿고 따른다는 점이다. 서로가 서로에게 경쟁자로 행위하고 또 그러한 경쟁을 당연시하는 것, 이것이야말로 지배적 시스템에 ‘모두’ 지배당하게 되는 근본원리다.
그러면서도 소수의 기득권층은 사치와 향락에 젖어 세상이 얼마나 병들어 가는지 눈치 채지도 못하는 것, 바로 이것이야말로 자본주의 기업체제의 근원적 무책임성이 아니고 무엇인가.
219. 한편 독일 베를린에 있는 ‘제너시스 연구소’의 설립자 페터 슈피겔은 <더 나은 세상을 여는 대안 경영>에서 ‘기업의 사회적 책임 2.0’을 이야기한다. 그것은 기업들이 이윤 추구 과정에서는 별 짓을 다하다가도 느닷없이 사회적 책임을 다한다는 이름 아래 온갖 예쁜 짓만 하는 척하는 자기기만을 그만두고 아예 처음부터 ‘사회혁신적 사업’을 성공적으로 수행함으로써 경제와 사회의 조화를 일관되게 추구하자는 것이다. 일례로 가장 가난한 농촌 여성들에게 무담보 소액대출을 해주어 자립할 수 있게 도와준 ‘그라민 은행’, 전기가 잘 들어가지 않아 비싼 에너지 비용을 내야 했던 오지의 시골 마을에 친환경적이고도 값싼 태양관 셀을 높은 장대 위에 달아 문제를 해결한 ‘그라민 샥티’ 사업 같은 것을 들 수 있다.
기후위기, 사회위기, 금융위기, 경제위기, 정치위기 등 각종 위기가 우리 삶을 위협하는 오늘날, 경제 문제나 사회 문제, 나아가 생태 문제를 분리해 보아서는 올바른 해답을 찾을 수 없다. 이것은 마치 빛의 3원색인 푸른색, 붉은색, 초록색이 하나로 잘 섞여 흰색의 밝은 전망을 만들어내듯 경제, 사회 생태가 조화와 균형으로 통합되어 참된 희망을 만들자는 말이기도 하다. 이러한 사회 혁신의 밑바탕에는 사람이나 자연을 더 이상 돈벌이의 수단으로 보지 않고 삶의 주체, 즉 소중한 생명체로 바라보는 근본적 시각 전환이 깔려 있다. 시각이 바뀌고 개념이 바뀌면 길이 보인다.
233. 문제는 죽어간 노동자만이 아니다. ‘아직’잘리지 않거나 ‘아직’ 살아 있는 노동자들은 과연 행복하게 살고 있는가? 혹시라도 일중독에 빠져 몸은 살아 있되 정신은 죽은 거나 다름없는 ‘좀비’가 아닌가? 나아가 그 노동자들이 만든 휴대폰과 컴퓨터, 자동차를 별 생각 없이 잘 쓰는 소비자들은 어떠한가? 혹시라도 ‘돈이면 안 될게 없다’거나 ‘어디, 공짜 폰이 없나?’라며 소비중독에 빠진 건 아닐까? 돈벌이 경제가 번창하는 원리는 이렇다. 소비자들이 소비중독에 빠질수록 노동자들은 일중독에 빠져들어야 하고, 노동자들이 일중독에 빠져들수록 소비자들이 소비중독에 빠져야 한다. 과연 우리는 노동자의 고통과 죽음을 외면한 채 소비세계 속의 편리만 추구하며 살 것인가.
238. 그렇다면 노동자와 노조를 무시하거나 파괴할 것이 아니라 그들의 목소리에, 그들의 고통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파괴할 것은 노동조합이 아니라 독점재벌 체제이며, 이윤을 위해 사람과 자연을 파괴하는 자본이다.
335. 일리치 선생에 따르면 평화에는 두 가지 정의가 있다. 하나는 가진 자, 위로부터의 정의이고 다른 하나는 기층 민중, 아래로부터의 정의다. 전자는 ‘평화의 유지’를 강조한다. 즉 온 세상이 자기들 뜻대로 굴러가는 것, 아무도 기존질서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고 잘 따르는 상태, 바로 이것이 위로부터의 평화 개념이다. 후자는 ‘평화로이 내버려두어져 있기’를 평화로 보는 것이다. 즉 세상 살림살이를 민중이 스스로 만들어가는 그대로 제발 그냥 놔두라는 것이다. 풀뿌리 민중의 삶의 자율성, 바로 이것이 아래로부터의 평화다.
그중엔 물론 엉터리도 있고 시행착오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국가가 나서서 일제고사니 평가제도니 하면서 ‘간섭’하지 않기만 하면 풀뿌리 민중은 진정 올바른 교육의 길을 토론하고 모색하여 만들어나갈 것이라 확신한다. 이것이 바로 교육에서 참된 평화가 아닐까.
339. 내가 나 자신을 발견하는 것은 그대의 눈에서 비롯한다는 것을 말입니다. (…) 나라는 존재가 당신에게 선물이 되게 하는 것은 당신인 것입니다. (…)나의 존재가 누군가에게 선물이 되지 못하면 나는 온전한 인간에 이르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ㅡ 이반일리치
그렇게 형성되는 관계, 즉 선물의 관계가 바로 ‘공동체’다.
342. 일리치 선생에게 우정과 환대는 하나다. 우정, 공동체적 인간관계, 환대, 이것은 인간다운 삶, 즉 인간성의 핵심 요소다. “사람을 환대한다는 것, 즉 다른 곳에서 온 그 누군가를 기꺼이 받아들여서 우리 집 문지방의 이쪽으로, 여기 이 침상으로 안내하는 것은 인류학자들이 확인한 여러 특성들 가운데 가장 보편적인 것 중 하나로 보입니다.”
345. 우리들의 모든 삶의 과정이 ‘상품화’한 것이 바로 오늘날 ‘서비스 경제’라 불리는 것이 아닌가. 다시 말해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친밀함과 우정, 환대, 사랑의 관계를 만들고 확인하고 나누던 행위가 오늘날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모두 ‘서비스 경제’라는 이름으로 돈벌이 수단이 되고 있다. 예컨대 아이를 잉태하거나 낳는 행위(정자/난자 은행, 산부인과 병원), 아이를 키우는 행위(유아원, 놀이방, 학교, 학원), 식의주 등 살림살이 행위(식당, 세탁소 주택 시장), 어려울 때 돕기(금융, 사채, 보증, 보험), 문화 향유(콘서트, 콩쿠르), 여가(여행, 관광, 엔터테인먼트), 소통(정보통신, 전화, 인터넷), 그리고 심지어 사랑 행위(성매매, 전화방, 섹스 쇼)까지도 온통 ‘서비스 경제’속으로 편입되고 말았다. 그 결과 서비스는 있되 참된 봉사는 없고, 학교는 있되 참교육은 없다. 또 고급 아파트는 있되 참살림은 없고, 레스토랑은 있되 참 먹을거리는 없다. 사실이 이럼에도 오늘날 주류 경제학에서는 서비스 경제, 즉 3차산업이 발절할수록 ‘선진국’이라는 잘못된 관념이 지배하며 현실 삶을 피폐하게 한다. 따라서 지금부터라도 이런 환상에서 탈피하여 삶의 자율성, 삶의 친밀성, 삶의 직접성을 복원해야 한다.
삶의 기쁨은 돈 주고 간편하게 해결하는 데서 오는 것이 아니라 좀 귀찮더라도 스스로 만들어가는 과정 속에 있다는 것, 이 또한 일리치 선생이 우리에게 준 소중한 가르침과 일치하지 않는가? 나는 올해도 작은 텃밭에서 손수 일군 감자를 직접 캐고 삶아서 사랑하는 친구, 이웃과 함께 내가 직접 구운 소금에 찍어 맛있게 먹을 것이다.
355. ‘뿌리 뽑힌’ 삶을 사는 고르에게 존재의 정체성 문제는 늘 고통이었다.
357. 질문하고, 놀라고 의심하고 분노하는 것(인간적 감수성)은 삶의 원동력이자 마음의 문을 여는 길이다. 앙드레 고르
359. 도린이 암에 걸렸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 사실을 ‘인정’한 고르는 도린을 성심껏 돌보고자 함께 ‘생계노동’을 하던 파리를 떠나 시골로 간다. 도린이 없으면 “다른 모든 것이 무의미하고 무가치”하기에, 고르는 “본질적인 것에 집중하기 위해 비본질적인 모든 것을 포기”해야 했다. 그리하여 “삶을 미래로 자꾸 미루지 말고” 가능한 한 “매순간마다 완전한 삶을 살기 위해” 고르는 초심으로 돌아간다. 이제 검소한 살림, 유기농 자급자족, 여유로운 시간, 나무 가꾸기, 진솔한 대화, 저술 활동, 친교 활동, 이런 것이 그들의 삶을 재구성했다. 생태주의는 그들에게 삶의 방식이자 일상적 실천이 되었다.
‘삶이 최고의 부’이기 때문이다. 결국 그들에게 사랑과 죽음은 같은 것이었다. 마치 사랑(L’amour)과 죽음(La mort)의 불어 발음이 같듯 말이다. 거기서 고르는 도린을 사랑으로 돌보았고, 또 서로 사랑을 느끼며 죽을 때까지 왕성한 글쓰기를 했다.
하지만 ‘기술의 과잉 속에 인간적 결핍’이 나오듯 ‘이론의 과잉 속에 인간적 결핍’이 생기지 않도록 늘 유의했다. 그들에게 사랑과 저작, 생활, 죽음은 모두 같은 뜻이었다.
368. 더 이상 ‘일류대학’이나 ‘일류직장’을 목표로 삼아선 안 된다. 우리가 진정 추구할 것은 ‘일류인생’이다. 그것은 꿈의 발견, 실력 증진, 사회 헌신의 3요소로 구성된다. 일류대학이나 일류직장은 소수만 성공하지만 일류인생은 누구나 할 수 있다. 나는 내 아이가 경쟁의 승자가 아니라 사랑의 주체가 되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