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 잡담, 이야기, 농담, 소문, 역사적인 그림, 종교 신화, 제품, 문화의 다른 잔재들이 무역상과 여행자, 정복자들과 함께 흘러 다녔다. 그리하여 무역과 여행 경로는 문명의 혈액을 운반하는 모세혈관 역할을 했다. 이 모세혈관의 네트워크가 스며든 여러 사회의 사람들을 누가 좋은 놈이고 나쁜 놈인가에 대한 견해는 다르더라도 서로의 내러티브에서 등장인물이 되곤 했다.

41. 정복, 합병, 확장, 퇴락, 정복. 이게 바로 그 패턴이었다. 14세기에 위대한 무슬림 역사가 이븐 할둔이 그가 사는 세계를 관찰해서 이렇게 정리했는데, 그는 자기가 찾아낸 패턴을 역사와 근저에 깔린 맥박이라고 여겼다.

105. 정복자 우마르가 이슬람의 영토 확장을 지휘하는 동안, 영적 지도자 우마르는 이슬람 교리의 통합을 지휘하며 이슬람식 삶의 방식을 정의해나갔다. 아부 바크르는 이슬람이 단지 공동체에 대한 이상이 아니라 세계를 바꿀 운명을 지닌 실제 공동체라는 점을 정립했다. 이를 우마르가 새로운 달력을 공표해 공식화했는데, 그 달력은 무함마드가 태어난 날이나 첫 번째 계시를 받은 날이 아니라 무슬림들이 메디나로 이주한 사건인 히즈라를 기원으로 삼았다. 우마르의 달력은 이슬람이 단지 개인의 구원을 추구하는 계획이 아니라 세계가 어떻게 굴러가야 하는가에 대한 사회적인 계획이라는 신념을 고스란히 표현한 것이었다. 많은 종교가 그 종교를 따르는 사람들에게 “세상이 부패했지만 너는 탈출할 수 있다”고 말한다. 하지만 이슬람은 이렇게 말한다. 세상이 부패했지만 네가 변화시킬 수 있다." 이는 무함마드가 설교를 하던 초기부터 내재된 사상이었을 테지만, 우마르는 이슬람의 이러한 방향을 확고하게 다져서 철통같은 궤도에 올려놓았다. 

26. (스테판 에셀)아는 것이 행동이 되려면 이보다 조금 더 앞서가는 무언가가 필요합니다. 그 ‘무언가’는 성하께서 ‘연민’이라고 적절하게 말씀하신 바로 그것입니다. 우리는 머리로 생각만 해서는 안 되고, 동시에 연민심으로 행동을 해야 합니다. 어떤 일을 할 때 그것이 좋은 일이건 나쁜 일이건 혼자서만 하는 게 아니라는 것을, 남들과 함께, 남들을 위해 그런 일을 한다는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부디 남이 잘됐으면 하는 배려로 우리 모두가 연결된다면 그때 우리는 함께 앞으로 나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달라이 라마) 연민, 그렇습니다. 그건 책임감이기도 합니다. (…) 자신이 의식할 때, 그때 남들의 의식이 따라오고 행동이 따릅니다. 책임감은 의식하는 데서 나옵니다. 책임감은 믿음에서가 아니라 분석에서 나옵니다. 현존 교육체계는 그 본질상 물질적 가치 쪽을 지향합니다. 마음의 체계를 세워주고 가르쳐주는 내용은 거의 없지요.

31. (스) 자살의 책임이 분신하는 사람들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계속 삶을 이어가지 모샇게 만든 사람들에게 있다고 할 수는 없을까요?

35. 큰 ‘우리’ (스) 세상은 우리가 바라는 것만큼 그리 쉽게 바뀌지는 않습니다만, 그래도 어쨌든 바뀌고 있습니다. 성하의 메시지는 믿음과 용기의 메시지입니다. 저도 제한된 방도를 통해서나마 젊은이들에게 어떻게든 이를 표현하려고 노력합니다. 저는 그들에게 말합니다. “상황이 좋지 않다. 하지만 믿음과 신뢰를 갖고 용기를 보여라. 그러면 세상이 차츰, 또는 문득 달라질 것이다”라고요. 단 혼자 행동할 것이 아니라 남들과 함께 행동하라고요.

37. 우리는 이러한 연기법 실천을 널리 펴서, 지구 전체를 포괄하는 크나큰 ‘우리’를 발전시킬 수 있습니다. 이는 큰 ‘전체’라기보다는 큰 ‘우리’입니다. 하지만 지금 우리는 아직 ‘우리’와 ‘그들’의 구분이 지배하는 체계 속에 살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구분이 우리 정신 속에 깊이 각인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개인적 이해관계와 갈등속에 매몰되는 것이며, 때로는 이웃을 착취하고 위협하고 싶은 마음이 생기는 것입니다. 또 그래서 폭력이 생기고 전쟁이 터지는 것입니다. 그렇기는 하지만 여러분이 보편적 박애 정신을 지닌다면, 그때 여러분의 마음은 자연스럽게 활짝 열릴 것입니다. 여러분은 겉과 속이 다르지 않은 투명성과 진실 속에서 움직이게 될 것이며, 그로써 내적인 힘, 나와 남에 대한 믿음이 생길 것입니다.

39. 마음의 과학 (스) 그렇게 많은 문제들이 산적해 있는데 어떻게 마음의 평화를 지켜내시는지요?
(달) 저는 사람들에게 두 가지를 이야기합니다. 첫째, 자신의 지성을 올바로 쓰라고 합니다. 어떤 상황이든 여러 각도에서 볼 수 있습니다. 제 경우를 생각해보면, 이렇게 말할 수 있지요. “나는 조국을 잃었고, 인생의 대부분을 타지에서 망명객 신세로 보냈다.” 그러나 또 한편 이렇게도 말할 수 있습니다. “그 덕분에 나는 온세상을 알게 되었고, 특별한 의전 없이도 다른 사람들과 직접 접촉할 수 있게 되었다. 만약 내가 티베트 라싸의 포탈라궁에 그대로 살았더라면, 현실적으로 별 소용 없는 번거로운 의식 속에 매몰된 삶이었겠지.”
 둘째로 제가 이야기하는 것은 마음의 따스한 온기입니다. 지금 우리는 여전히 ‘우리’와 ‘그들’의 이분법이 지배하는 체계 속에 살고 있습니다. 이 구분선은 항상 우리 마음 속에 각인되어, 우리를 보편적 박애 정신과 갈라놓습니다. 

66. 정보를 다루는 기술이 뛰어난 - 그러한 지의 존재방식과 관계되어서인지, 나는 정보기술에 능통한 젊은이들 중에 이상하게 폭삭 늙어버린 이미지를 가진 사람이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모든 것을 정열적으로 탐구하지 않는다고 할까, 아무 생각도 없고 호기심도 갖지 않는다고 할까, 또는 처음부터 갈 곳을 예상하고 더 이상 생각하지 않으려고 한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요? 그 또한 모든 것의 원인과 결과의 몇가지 유형(이렇게 하면 이렇게 된다)을 ‘정보’로 축적하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 괴테의 <파우스트>에 “악마는 늙은이다. 따라서 늙은이가 되지 않으면 악마의 말을 알 수 없어”라는 말이 나오는데 매우 의미가 깊은 말입니다. 젊은이의 얕은 지혜는 노인의 성숙한 지혜를 넘어설 수 없겠지요.

9. 주체. 새로운 사회를 열 주체의 문제를 짚어보자는 데 연구원 상근자 누구도 이의가 없었다. 새로운 사회를 여는 상상력에서 ‘상상력’을 누가 떼어버릴 것인가, 누가 새로운 사회를 현실로 만들어갈 것인가의 문제는 우리 연구의 고갱이일 수밖에 없다. 그렇다. 주체야말로 새로운 사회를 여는 ‘희망의 조건’이 아닌가.

14. 새사연(새로운 사회 연구소)이 독자들에게 내놓은 세번째 신서인 이 책은, 진정 세계화 시대에 우리 국민이 어디서 미래의 희망을 발견할 것이며, 누가 그 희망을 현실로 만들어갈 것인지 하는 물음에 답하고자 쓰였다. 글로벌 시대의 대안은 역설적으로 세계 속에서가 아닌 우리 국민의 구체적이고 생동하는 삶과 생활 안에 잠재해 있다는 것이 새사연의 대답이다. 150만 대기업 노동자와 1,300만 중소기업 노동자, 860만 비정규직 노동자를 아우르는 1500만 노동자에게서, 300만 농민과 300만 대학생, 그리고 600만 도시 자영업인들에게서 나아가 30만 중소기업인들의 사회적 처지와 삶 속에서 우리 국민이 살아가야 할 미래를 발견해 보고자 했다.

27. 1980년대 국민적 운동의 중추적 역할을 담당했던 제조업 생산직 노동자와 농민, 학생은 외환위기와 21세기를 맞이하면서 이처럼 변했다. 우리는 이 기초 위에서 새로운 운동의 동력과 주체를 고민해야 한다.

35. 분명 우리 사회에서 진보운동의 대중적 기반이 1990년대 이후 축소되어온 것은 사실이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사회운동에 차여할 주체들의 삶에 대한 구체적 검토, 즉 그들이 경제 활동을 하는 방식, 직장생활 공간인 기업구조의 변화와 노동조직의 변화, 노동을 수행하는 방식과 그에 따른 생활방식 등 전반적인 의식과 지향을 깊이 이해하지 못한 것이 가장 큰 원인이다.

43. 그렇다면 이러한 우리 사회구조에서 사회변화 주체의 폭과 범위는 어떻게 설정할 수 있을까? 한마디로 주주자본주의에 반대하고, 민족 구성원을 위해 분단구조 해체에 동의하며,기존 관료주의와 엘리트주의를 극복하려는 공동의 목표와 대안을 가지고 사회운동에 참여할 수 있는 대안주체들이다.

57. 더욱이 기존 전통 제조업과 기계제 대공장은 점점 축소되거나 자동화 시스템으로 전환되고 있고 새로 등장하는 산업들이 주로 지식기반 산업이라는 것이 추세라면, 미래 생산력의 열쇠를 쥔 이들 지식 노동자들을 노동운동 대열에 적극적으로 합류시키는 것이 진보가 가져야 할 바른 관점이다.

58. 따라서 지식기반 경제로의 이행에 따른 지식 노동자의 특성과 조건을 잘 이해햐여 이들을 적극적으로 노동자 주체로 바로 세우는 것은 21세기 노동운동의 핵심적인 과제 가운데 하나다.

61. 이처럼 국민의 구체적 삶을 규정하고 잇는 다양한 측면에서 주체의 내부 구성을 이해하고 그들의 처지와 조건에 맞게 사회운동에 참여시킬 방안이 도출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고 획일적으로 추상적인 반신자유주의 운동에 참여 할 것을 요구하거나 지나치게 각 주체 내부 차이를 확대 해석한다면, 신자유주의를 무너뜨릴 거대한 국민운동은 요원해진다.

83. 한국 경제의 지배구조와 양극화


84. 최근 몇 년간 한쪽은 외국 투기자본을 규제한다면서 재벌의 역할을 과도하게 설정하는 주장이, 다른 한쪽에서는 재벌 그룹의 총수일가 지배체제를 견제해야 한다면서 사실상 외국 금융주주 자본과 한 짝으로 움직이는 주장이 나누어져왔던 것도 이런 맥락 아래 있다. 누구도 중소기업이나 국민과 함께 외국 금융주주 자본과 재벌을 견제하려는 적극적인 시도를 하지 않았다. 진동추처럼 외국 금융주주 자본과 국내 재벌 대기업 사이를 방황하며 나오지 않는 답을 구하려 했던 것이 그간의 모습이었다.

138. 결국 영세한 중소기업이 늘어나면서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생산성 격차가 확대되고 이것이 곧 노동자들의 임금 격차를 확대시키며 이는 중소기업에서 일하는 노동의 질을 떨어뜨려 혁신능력을 약화시키는 악순환이 계속되고 있다.

157. 주목되는 것은 생산에서 제조업 비중은 꾸준히 증가하고 있는데 반해 고용은 줄어들고 있고, 반대로 서비스업은 생산 비중이 실질적으로 감소하고 있는데 반해 고용 비중은 거꾸로 늘어나고 있다는 사실이다. 생산 규모가 정체되면서도 노동 유입이 계속된 결과 서비스업의 노동생산성은 떨어진다.

158. 우리나라 서비스산업의 생산성이 선진국의 절반 수준에 불과할 정도로 절대적으로 낮다는 사실에서도 알 수 있다.

159. 낮은 생산성과 영세성에도 불구하고 취업자가 서비스업에 몰리는 이유는 외환위기 이후 대기업을 중심으로 한 신자유주의적 구조조정과 노동배제 정책 때문에 제조업에서 대규모로 노동자들이 떨어져 나가고 이들이 주로 부가가치 창출력이 낮은 생계형 자영업으로 몰렸기 때문이다. 대부분 서비스업종으로 구성되어 있는 자영업에 대한 실증적 분석 결과, 외환위기 이후 이들이 자발적으로 자영업을 선택한 것이 아니라 경기 상황이 악화되고 실업자로 전락하면서 비자발적으로 자영업으로 몰렸음이 확인된다.

161. 앞서 말한 것처럼, 서비스산업이 발전하려면 기본적으로 생산자 서비스가 주도해야 하고, 국민의 복지와 삶의 질 향상을 위해서 사회 서비스를 늘려야 한다. 우리나라는 정반대의 구조다. 한마디로 경제의 생산성과 사회 복지에 큰 영향을 주는 부문은 고용이 적고, 생산성이 낮은 도소매업이나 숙박업, 음식점 등에 사람들이 몰려 있는 것이다.

 생산자 서비스는 다른 경제 주체의 중간 수요를 충족시키는 서비스로서 비즈니스 및 전문직 서비스, 금융 서비스, 보헙 서비스, 부동산 서비스 등을 포함한다. 특히 생산자 서비스는 높은 부가가치 창출력을 가지고 경제 성장과 제조업의 생산성 향상에 결정적 역할을 한다. 지식기반 서비스의 핵심 부분도 생산자 서비스에 있다.

163. 결론적으로, 생산성도 낮으며 이미 넘쳐나고 있는 개인 서비스를 줄이고 경제 성장에 기여하는 생산자 서비스를 확대하는 한편, 국민을 위한 사회복지 확충에 기여할 사회 서비스를 늘리는 방향으로 서비스 산업의 구조를 전환해야 한다.

185. 성장잠재력 약화가 설비 투자 부진 때문이라면, 왜 설비 투자를 하지 않는가? 국내 산업을 선도하는 주요 기업들이 설비 투자를 꺼리는 주요 이유는, 설비 투자보다는 유동성 확보와 단기 수익성 위주의 경영 압박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국내의 핵심 산업과 기업을 잠식한 주주자본주의는 장기적 전망아래 설비 투자를 하는 것보다는 자본 투자에 대한 단기 수익률과 주식 가치 극대화를 요구했다. 여기에 맞출 수밖에 없는 경영구조는 설비 투자를 꺼리게 만들고, 연관기업이나 하청기업에게까지 수익성 압박을 전가했다. 그러나 잠재성장률 약화에는 동의하면서도 여기까지는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199. 그런데 이런 경영정책은 ‘지식기반산업과 첨단 혁신산업’으로의 전환과 정면으로 모순될 수 있다. 왜냐하면 이들 전환은 누구나 공인하듯이 고급 인적자원의 지속적인 공급과 질적 향상을 전제로 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고급 인적 자원의 대부분은 대학이나 학교 교육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일하는 현장에서 무수히 배태되는 창조-확산-활용-공유의 과정을 통해 자란다. 그러나 신자유주의는 이러한 인적 자원 육성의 기본 원리와 정면으로 배치되는 노동정책을 펴고 있다.

200. 그러나 상황을 정확하게 보면 구인난과 구직난이 동시에 발생하고 있다. 우리나라는 현재 기술인력의 원활한 공급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현상이 심화되고 있다.

201. 이런 현상은 왜 일어나고 있는가. 그동안은 주로 대기업에서 신입사원을 대량으로 선발하여 실무적응 능력을 높이는 비용을 부담해 왔으나 최근에는 대기업들이 단기 수익성에 대해 압박을 받으면서 자체 인력 양성을 기피하고 경력직 채용 위주로 인력 관리를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미 준비된 고급 인력을 대기업이 독점하는 구조를 푸는 것이 우선이다.

203. (규제완화와 규모화로 경쟁력을 높일 수 있을까?) 영세한 중소기업과 서비스산업의 경쟁력 향상을 위해서는 규제완화와 대규모화가 필수라는 인식이 지배적이다. 규제는 풀어야 할 것도 있지만 강화해야 할 것도 있다. 무조건 규제를 완화해야 한다는 주장은 시장의 실패를 전혀 인정하지 않고 오직 시장에만 맡기자는 주장이다.

혁신이나 첨단화가 오직 규모화를 통해서만 달성되는가도 살펴봐야 한다. 그렇지 않다. 오히려 대규모화는, 양적인 측면보다는 질적인 측면을 발전시켜야 하는 현대 산업구조 전환 추세에 맞지 않는 면이 있다. 더욱이 미국과 중국, 일본에 맞서 규모로 승부를 보겠다는 것은 무모한 생각이다. 한국 실정에서는 통합과 집적에 의한 규모화보다는 견고한 네트워크와 클러스터에 의한 협력 구도로 경쟁력을 만드는 것이 유리하다.

208. 산업구조의 근본적 개편과 발전 전략은 단지 미래의 기술적 추세를 예측하고 기술적으로 유망한 어떤 산업 분야에 역량을 투입할 것인지에 대해 설계도를 짜는 것만이 아니다. 그런 설계도에 누가 어떤 동기와 의지로 참여할 수 있게 할 것인지에 대한 방법과 전략이 없다면 그것은 단지 기술 예측 시나리오에 불과할 뿐 산업정책이라고 할 수 없다. 

281. 정보산업의 초기 등장기인 현재는 정신노동에만 종사하는 종사자와 육체노동에만 종사하는 노동자들이 분리되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이는 초기 현상일 뿐이다. 정보산업을 필두로 한 신사업의 발전은 필연적으로 육체노동과 정신노동의 통합 현상을 가속화할 것이다.

 유효성 있는 정보가 책상머리에 앉아서만 나올 수 없다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1960년대 후반만 해도 운전 기술은 대단히 전문 기술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대중 기술이다. 이제 컴퓨터 작동 기술은 날이 갈수록 편리해지고 있으며 대중 기술로 전환되고 있다. 이런 기술 발전은 정보 생산의 주동력을 전문가에서 대중에게로 옮겨가게 하고 있다. 네이버 지식in의 성공, 미국 구글의 성공, 그리고 근래에 등장하고 있는 UCC, 블로그 현상 등은 정보 생산의 주체를 전문가에서 대중 자신에게 돌려주는 정보 대중 생산주의의 성공 사례들이다.

282. 신사업의 발전은 필연적으로 지식 생산의 주체를 점차 전문가에서 대중 생산자에게로 돌리게 될 것이다. 즉, 육체 노동자들이 직접적인 정보 생산자가 되어 정신노동을 동시에 수행하는 추세로 갈 것이다. 이러한 과정에서 육체노동의 비율이 점차 감소하고 정신노동의 비중이 높아지면서 창조적 지능노동이 노동의 주된 형태가 되고, 그야말로 정신과 육체 활동 모두의 주체인 창조적 지능 노동자를 출현시키게 될 것이다.

이것이 육체 노동자들이 정신노동과 통합되는 변화 과정이라면 이런 변화는 역으로 정신노동 영역에서도 일어날 수밖에 없다. 근래에는 연구실과 산업현장을 연결시키는 것이 기본 추세다. 흔히 말하는 산학 클러스터가 그것이다.  대학교 연구실이 현장과 동떨어진 연구만 해서는 현실 산업 발전에 별다른 도움이 안 되기 때문에 현장과 결합된 연구를 진행시키는 것이다. 이는 정신노동 전반에 통용되는 이야기다. 고도 기초과학 분야 같은 정신노동이 아니라면 정신노동에 따른 정보산업은 현장으로 가야만 유효성 있는 성과가 나게 마련이다. 그러므로 정신노동은 자체 발전의 요구로 육체노동과 긴밀하게 소통할 수밖에 없다.
 결국 이런 변화는 장기적으로 육체노동과 정신노동의 경계를 허물어 창조적 지능노동으로 통합되는 양상을 보일 것이다. 창조적 지능노동의 출현은 육체노동과 정신노동의 통합을 통하여 보다 완전한 노동자로 태어나는 과정이며 노동에서 소외된 노동자들이 바로 노동의 주인이 되는 첫걸음이다. 

284. 앞서 지적한 대로 자본이 정신노동을 착취하는 방식은 육체를 시간 단위의 노동 상품으로 정신노동의 결과물을 노동자로부터 분리하여 상품으로 구입하는 방식이다. 그리고 구압한 정신노동의 산물은 한계 생산비가 제로에 가깝기 때문에 마치 생산수단과도 같은 역할을 한다.

286. 비록 벤처 열풍이 버블로 끝나고 생존한 몇 개의 벤처도 대자본에 종속 내지는 포섭되는 결과로 끝났지만 이는 정보산업 태동의 초기 현상일 뿐이다. 정확히는 신산업 태동 1세대의 현상이다. 시간이 흐르면서 정보산업의 권력자는 전문가가 아니라 대중으로 전환되고 있다. 지식 생산의 주체가 대중으로 전환되는 시기로 접어 들어가고 있기에 우리는 불완전한 벤처 열풍이 아니라 합리적으로 등장하는 창조적 지능노동이 주도할 경제양식을 가까운 시간 안에 목격할 수 있을 것이다.

경제권력을 대자본에서 창조적 지능 노동자에게 돌려내는것, 이것이 경제발전의 속도를 결정하는 시대에 들어서고 있다. 창조적 지능 노동자의 등장이 바로 자본을 우습게 아는 노동의 출현이며 이들이 바로 자본주의의 무덤을 파는 군대가 될 것이다. 우리는 더 나은 국가 발전, 인류 발전을 위하여 창조적 지능 노동에 더 많은 경제권력을 주어야 한다. 이러한 자연스러운 역사 전개를 막고 지능노동을 독점하여 자본의 이익을 확보하려 안간힘을 쓰고 있는 퇴행적 체제가 바로 현재의 신자유주의다.

289. 모든 노동자들은 창조적 정신노동을 수행할 능력이 있으며 현장 경험도 있다. 그들의 아까운 능력과 경험을 사장시키고 있는 것은 다름 아니라 노동유연화에 기초하여 노동의 발전을 가로막고 있는 주주자본주의다. 대부분의 노동자를 창조적 지능 노동자로 성장하도록 보장하는 것은 시대의 추세며 미룰 수 없는 국민적 과제다.

(모든 노동자를 지식 노동자로)
창조적 지능노동을 대중화하는 과정에서 필수인 건 전 노동자를 지식 노동자화하는 것이다. 창조적 지능노동은 비단 지난 시기의 현장 경험만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자신의 경험에 기초하되 최신의 정보와 세계 각국의 경험을 흡수하여 새롭게 질적 비약을 일으키는 창조의 과정이 따라야 한다. 그러자면 각 노동자들은 정보통신에 정통해야 하며 해당 업무 분야에 대해 전문적인 지식이 축적되어야 한다. 이 과정에 노동자들이 해당 분야의 전문가 수준의 소양을 가질 수 있도록 하는 교육 과정이 반드시 동반되어야 한다.

창조적 지능노동의 생산성은 (노동)시간으로 대체되는 것이 불가능하며 창의적이고 생기 있는 정신 활동을 보장하는 것을 통하여 결정된다.
 그러자면 유족한 경제 보장은 기본이며 노동시간을 더욱 축소하고 풍부한 문화생활을 보장해야 한다. 풍부한 문화생활은 정신 활동의 원천이 되며 곧 생산을 창의적 노동으로 전환시키는 원동력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기본 생계 보장과 노동시간 단축은 지식기반 경제를 발전시키는 데서 필수조건이지 선택요소가 아니다.

292. 지식정보산업은 질적인 경제이며 만들어야 할 지식정보 체계는 생산 과정 전체에 대한 이해와 소비자의 요구까지 파악한 가운데서 생성된다. 그러므로 매개 생산자는 전체의 부분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자신 역시 전체를 대신하는 구조를 가져야 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조직은 수직적이기보다는 팀단위로 일차적 완결성과 자율성을 가지며 수평적으로 협력하는 체계가 기본 양식이어야 한다.

이러한 수평적 자율적 조직이 역동성과 창의성을 최대한 발휘하기 위해서는 전체적인 생산과 기업의 정보가 공유돼야 한다. 정보가 항상 책임성 있게 공유돼야 하기에 노동자의 경영 참여는 당연히 보장돼야 한다.

293. (정보 독점은 막고 공유는 확대) 창조적 지능노동은 앞서 생산되 정보와 지식을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을 때 빠르게 발전할 수 있다. 그러나 앞서 말한 대로 자본의 지적재산권 강화와 특허 기간 연장에 따른 지식과 정보의 독점은 지능노동의 발전과 이에 기반한 경제 발전을 가로막는 걸림돌이다. 

 자본은 지식과 정보를 요란하게 떠들지만, 정작 그 주체인 노동을 소모하기만 하여 지식기반 경제 본연의 발전을 가로막는다. 지식기반 경제를 속도 있게 발전시킬 주인공은 오직 창조적 지능노동뿐이다. 또 지식기반 경제로의 전환은 실은 노동의 힘찬 성장 과정이며 정신노동과 육체노동을 통합한 신노동을 등장시켜 자본주의 이후 사회를 준비하게 할 것이다.

295. 지식은 암묵지와 형식지라는 두 가지 지식의 끊임없는 복합상승 작용을 통해 창출된다. 인간의 지식을 암묵지와 형식지로 나누어 설명한 사람은 인식론 학자인 마이클 폴라니다. 그에 따르면 형식지는 언어, 문장으로 표현이 가능한 객관적이고 이성적인 지식이다. 이에 반해 암묵지는 언어, 문장으로 표현하기 어려운 주관적이고 개인적인 지식이며 반복된 경험등을 통해 습득하고 노하우로 체화된다. 개별적이고 주관적인 지식인 암묵지는 다른 사람에게 전달되는 사회화 과정과 객관화 과정인 표출화를 거쳐 형식지로 변한다. 또 형식지는 개인에게 받아들여져 새로운 암묵지를 형성하는 내면화 과정을 낳는다. 이렇게 지식이란 그 자체로 인간의 주체적이고 창조적인 활동 그리고 사회적 관계 속에서 형성되는 것이라는 점에서 지식의 사유화와 독점, 상품화를 추구하는 것은 지식기반 경제 추세와 근본적으로 대립된다.

304. 수적으로나 질적으로나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우리 사회의 주도세력으로 성장 변화해온 것은 다름 아닌 노동자다. 이들이 자신의 삶을 적극적으로 개선하는 데 나서는 것은 물론, 노동자를 포함한 절대 다수의 생활을 압박하는 신자유주의의 문제를 구조적으로, 정치적으로 풀어나갈 핵심 주도세력이 되어야 함은 더 이상 당위가 아니라 당연한 현실이다.

노동자 수의 증가와는 달리 노동조합으로 단결해온 노동자의 비율은 정체하거나 줄어들기조차 했다.

 왜 이렇게 됐을까? 이를 설명해주는 여러 요인이 있겠지만 무엇보다도 1997년 외환위기로 전면화한 한국 경제의 신자유주의화에 노동운동이 효과적으로 대처하지 못한 점을 꼽아야 할 것이다. 신자유주의는 노동자의 삶의 구조와 처지를 과거와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악화시켰고, 노동운동은 이를 제대로 방어하는 데 오랜 시간이 걸렸다. 현재 한국 사회의 핵심 문제인 실질적 민주화의 후퇴, 즉 경제 민주화의 후퇴와 사회 양극화의 심화, 노동 강도의 강화, 비정규직 양산과 극심한 고용 불안은 신자유주의에 대한적절한 대처부족의 산물이다.

350. 그렇다면 누가 어떤 의제를 반신자유주의 국민적 의제로 제기하고 이끌어나갈 것인가? 현재 한국 사회에서 ‘사회적 공동 의제’를 주도할 세력은 노동자 밖에는 없다. 노동자 중심사회로, 완전한 도시형 사회로 전환된 한국 사회에서 노동자는 양적으로나 질적으로 전체 국민을 대변하는 가장 중심적인 역할을 부여받고 있다.

391. 따라서 농촌 지역의 공공 서비스 수준을 높여서 농촌 지역 사회를 유지하겠다는 것은 단편적인 처방에 불과하다. 농촌 지역을 유지시키는 핵심, 즉 물질적 부를 직접 생산하거나 외부로부터 물질적 부를 직접 가져올 수 있는 산업이나 업종 혹은 영역을 개발하고 제대로 확보하는 것이 근원적인 처방이며, 근원적인 처방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현재 농촌 공동체를 유지하고 있는 근간인 농업과 농민을 제대로 확보하는 것이다.


411. 농민운동 조직이 농민 문제만의 해결사나 권익단체로 기능하는 것이 아니라 국민들 삶에서 핵심적으로 중요한 식량, 생태, 환경, 지역의 문제를 담당하고 고민하고 제안하는 조직으로 부상할 때 농민운동은 변화된 시대적 역할을 감당하게 될 것이다.

417. 셋째, 전 국민적인 먹을거리 공동체 형성이다. 농업은 본질적으로 시장과 양립할 수 없다. 농업 생산 활동은 상품인 농산물 생산 외에도 다양한 기능을 수행하지만 시장은 그러한 다원적 가치를 평가해주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먹을거리를 전적으로 시장에 맡기면 심각한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우리는 보다 싼 가격에 쌀을 수입해서 먹을 수 있지만 논농사가 수행하는 다원적 기능까지 함께 수입할 수는 없다. 그래서 먹을거리는 생산에서 유통, 소비 전 과정을 생산자와 연대하여 함께 책임지는 방향으로 가야 한다.

419. 국민농업은 농민이 농업의 사회적 기능을 충실히 수행하고 사회가 농민의 생활을 책임지는 관계다. 이러한 국민농업이 실현될 때 농업의 가치는 재평가되고 그에 따라 농업에 진출하고자 하는 사람들 또한 늘어날 것이다. 현재 우리 농업이 살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이것뿐이다.

439. 오늘의 대학생이 1980년대 대학생과 다른 이유는 오늘의 대학이 1980년대의 대학과 근본적으로 다르기 때문이다. 우리가 대학의 구조 변화라는 측면에 주목하지 않으면 오늘날 대학생의 정치적 보수화나 학생운동의 위기를 온전히 설명할 수 없을뿐더러 이를 극복할 제대로 된 대안도 마련할 수 없다. 이제 우리는 대학 공간이 어떻게 달라졌는지, 대학생의 사회적 지위는 어떻게 변했는지를 구체적으로 살펴볼 것이다.

사회학자들은 중산층을 단순히 경제적 처지만으로 볼 수 없으며 소득 수준, 이념 성향, 정치 철학, 교육 수준 등 모든 분야에서 그 사회의 특성을 대표할 수 있는 계층이라고 규정한다.

578. 자영업인 조직이 지역의 풀뿌리조직과 연계하여 지역 공동체에 기여하는 사회적 활동을 한다면 고객은 지역 공동체를 구성하는 동료가 되는 것이다. 대기업과의 경쟁은 사실 지역 주민이라는 소중한 지원군이 없으면 이기기 힘들다. 자영업인들이 같은 지역에서 주거환경, 교육 등과 관련된 문제들을 고객이자 협력자인 지역 주민과 함께 한다면 이보다 긴밀한 연대 활동도 없다.

결론적으로 고도로 발전한 도시형 사회로 바뀐 한국 사회에서, 자영업인은 신자유주의에 대항하는 도시연대(노동자, 자영업, 학생 등)의 주요한 구성 주체로서 잠재력을 충분히 가지고 있다. 자영업인들 스스로의 노력과 기존의 풀뿌리운동 단체, 교육, 복지, 환경 등을 의제로 삼고 활동해온 시민사회단체들의 적극적인 연대가 절실하다.

571. 대형 유통매장은 문화상품도 겸하는 경우가 일반적인데, 지역 주민들의 생활 문화가 대자본이 만들어낸 영화나 놀이 시설로 편협해지고 지역 사회의 다양한 향토 문화, 공동체 문화를 질식시킨다. 그러므로 대자본으로부터 지역 경제, 영세자영업 시장을 보호하는 일은 다양한 가치를 보존하는 일이자 지역 사회가 불필요하게 지불해야 할 비용을 절감하는 일이기도 하다.

588. 지역화폐 공동체에서는 100퍼센트 현금 거래는 하지 않는다. 품앗이의 의미가 없어지기 때문이다. 비싼 것은 10~50퍼센트만 지역화폐로 처리하고 나머지는 현금으로 내면 된다.

17. (살아남기 위해 일탈하는 아이들) 살아남기 위해 병드는 아이들이 있는가 하면, 살아남기 위해 일탈행동을 하는 아이들도 있다.

19. 아이들에게 공부는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이유를 불문하고 그냥 해야 하는 의무 같은 것이다. 미래의 행복한 삶을 위한 것이라 하지만 그건 부모의 이야기다. 중요한 것은 현재 아이들에게는 재미도 없고 의미도 없는 그 공부 때문에 다른 모든 것을 포기해야 하는 고통일 뿐이라는 점이다. 그런 공부를 ‘해내고’ ‘해드리기’위해서 아이들에게는 일탈이 필요한 것이다. 연애를 하고, 성관계를 맺고, 게임을 하고, 술을 마시면서 그 힘든 삶을 이겨내고 견뎌낸다. 그래서 일탈은 공부와 경쟁의 삶에서 살아남기 위한 수단이자 오아시스다.

29. 무기력은 통제감을 잃어버리는 데서 온다. 아무리 노력해도 자신이 뭔가를 변화시킬 수 없고 어느 것에도 영향력을 미칠 수 없다고 느끼면 사람은 무기력해진다. 상담실에 오는 많은 아이들은 무기력하다. 요즘 중고등학교에서는 수업시간에 자는 아이들이 부지기수이고, 심지어 유치원에서도 피곤하다며 잠을 자려는 아이들이 많아지고 있다고 한다. 공부를 ‘해드리고’ 학원에 ‘가드리며’ 몸은 엄마의 뜻에 따라 움직이고 있지만, 아이들의 눈빛은 공허하고 시도 때도 없이 졸음이 밀려오고 틈만 나면 자고 싶다. 의미나 목적 없이 학교와 학원을 쳇바퀴 돌며 열등감을 키우는 아이들에게 무기력은 자살하지 않고 살아남기 위한 유일한 선택이자 부모에게 할 수 있는 마지막 남은 보복이다. 즉 자신의 감정과 신념, 자신의 삶과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 자들에 대한 보복인 것이다.
 아이들은 원래부터 무기력한 것이 아니라 무기력을 ‘선택’한 것이다. 이들이 언제 그 선택을 철회하고 활력을 찾을지는 아이들 자신 말고는 아무도 모른다. 확실한 것은 무기력한 아이를 잡고 흔들면 흔들수록 아이는 더 무기력해지리라는 점이다. 그 어떤 칭찬이나 제안이나 훈계나 질책도 이 아이들을 일으킬 수 없다. 부모가 말한 대로 열심히 살지 않아야만 자신의 존재를 보존하고 살 수 있다는 것을 일찌감치 깨달았기 때문이다. 아이들은 무기력으로 부모가 원하는 삶을 살기를 거부하고 있다.
 부모는 아이에게 묻는다. 그렇다면 너희는 어떻게 살기를 원하느냐고. 그것을 알려 하기 전에 부모가 먼저 알아야 할 게 있다. 아이는 지금 어느 때보다 강하게 자신의 의사표시를 하고 있다는 것이다. 아무것도 안 하는 것이 아니라 아무것도 안 하겠다는 의사를 표시하는 것이다. 아이를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고 묻는 부모는 먼저 자기 자신에게 물어야 한다.
 ‘무기력은 살아남고 싶은 아이가 보여주는 강력한 거부의 의사표시다. 이것이 무슨 말인지 나는 이해할 수 있는가?’

35. 물론 대학에 교무실이 없어서 등록을 포기하는 아이는 매우 소수일 것이다. 그러나 많은 상위권 아이들은 그와 유사한 경험을 한다. 노는 일이나 친구 사귀는 일과 공부는 절대 병립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아니, 그렇게 생각하도록 훈련받았다. 그래서 둘 가운데 하나만을 선택해야 한다고 믿는다. 공부를 선택하고 나머지는 대학 가서 하면 된다고 생각한다. 교우관계는 공부하는 데 방해가 되지 않는 정도여야 한다. 아이들은 어떤 인간관계도 공부에 우선할 수 없다고 배웠다. 관계와 정서적 경험을 경시한 대가로 여러 증상이 나타나지만 대학 가면 다 나아질 것이라 믿고 무시해버린다. 하지만 대학에 가도 증상은 나아지지 않는다.

42. 어른을 경험하지 못한 아이들 (부모를 안티하는 아이들) 인터넷에 ‘부모안티카페’라는 검색어를 치면 아이들이 만든 카페가 나온다. 이곳에 한번 방문해보기를 권한다. 게시판에 올라온 글을 읽다보면 아이들이 부모에게 느끼는 분노가 너무 적나라해 섬뜩하기까지 하다.

 아이들의 분노가 왜 이리 극단적일까? 아이들이 왜 이토록 적의에 차 있을까? 아이들이 올린 글을 살펴보면, 자신을 노예로 만들려는 엄마에 대한 분노, 부모자신도 안 하는 일을 자기에게 강요하는 데 대한 분노, 공부를 몬한다고 성정이 떨어졌다고 멸시당하는 데 대한 분노 때문이다. 무엇보다 아이들은 모든 것을 공부와 연결시켜 공부라는 말을 통하지 않고서는 아예 아이와 대면하려 하지 않는 천박한 부모들에게 분노하고 있다.

47. (집 밖에서야 어른다운 어른을 만나는 아이들) … 엄마와의 대화도 마찬가지였다. 공부해라. 공부했니? 공부하니? 언제 공부할거니? 이런 말 말고는 나눌 이야기가 없었다. 어쩌다 대화를 시작하면 이야기는 늘 공부로 끝났다. 좋아하는 가수 이야기로 시작해도, 같은 반 아이가 축구하다 다친 이야기를 해도, 담임 선생님 이야기를 해도, 교장 선생님이 새로 오셨다는 이야기를 해도 엄마는 항상 공부를 열심히 해야 한다는 결론으로 끝맺을 수 있는 위대한 능력을 갖고 있었다.

51. 어른이라면 아이가 기댈 수 있어야 한다. 기대도 무너지지 않을 것 같아야 하고, 기대라고 억지로 잡아당기지 않는 사람이어야 한다. 그런 존재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든든하고 다시 스스로 일어설 수 있는 힘이 난다. 아이와 같은 수준에서 싸우고, 아이에게 자신도 옳지 않다고 생각하는 거짓 삶을 강요하고, 아이가 말을 안 들어준다고 토라지고, 아이의 고민을 묵살하고, 아이의 고통을 다 안다는 듯 우습게 여기는 것이 부모의 권리일까? 그것이 어른다운 모습일까? 그런 부모는 아이들의 분노만 키울 뿐이다. 그래서 아이들은 부모를 싫어하고 우습게 여기기까지 한다. 그리고 우리나라 부모들은 이처럼 어른스럽지 못하다.

63. 테러리스트가 되려는 아이들이 점점 많아지고 있다. 학교에 가스통을 가져와 폭파해 버리고 싶다는 아이, 학교에 불을 지르고 싶다는 아이, 학교 급식에 독극물을 넣어 다 죽인 뒤 자신도 죽었으면 좋겠다는 아이…… 경쟁에서 도태되는 친구들에 대한 미안함이 부채감, 죄책감으로 자리 잡은 아이들. 이 아이들은 학교와 사회를 버리다 못해 아예 없애려 하고 있었다. 떠나고 버리는 것만으로는 부족해서 아예 없애려고 하는데 도대체 무엇을 없애야 이 거대한 학력생산 공장이 멈추게 될지 몰라 화염병을 들고 그냥 그 자리에서 눈물만 흘리고 있다.

64. 속이 텅 빈 아이들 (무기력보다 더 큰 문제) 요즘 아이들에게 자기 이야기를 해보라 하면 알 수 없는 침묵에 빠지는 경우가 많다.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같은 질문 자체를 생소하게 여기는 것이다. 부모가 자기에게 원하느 ㄴ것, 부모가 싫어하는 것은 부모 자신보다 더 잘 아는데 자신의 생각이나 자신이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은 정작 잘 모른다. 어쩌면 무기력보다 더 심각한 요즘 아이들의 증상이 아닐 수 없다.

71. 사육당하는 아이들은 자신의 내면이 텅 비어가는 줄은 모른 채, 오로지 사육사가 오늘은 밥을 적게 주나 많이 주나, 오늘은 채찍을 휘두르나 안 휘두르나, 훈련을 많이 시키나 적게 시키나, 어려운 훈련이 얼마나 있나 이런 것만을 걱정하고 있다.

(자신의 삶을 상상하지 못하는 아이) 
지금의 아이들은 자신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상상하는 일조차 귀찮아한다. 자신의 욕구가 현실에서 이루어지지 못하리라는 무력감 때문이기도 하지만, 더 근본적인 이유는 아이들에게 상상하고 싶은 자기 삶에 대한 욕망이 없기 때문이다. 부모만 쳐다보고 있으니 자신을 쳐다볼 시간이 없는 것이다.

73. ‘엄마에 의해 주도된 자기주도학습’을 하는 상위권 아이들이나 공부를 억지로 ‘비주도적으로 해드리는’ 아이들이나 속이 텅 비어 있는 것은 마찬가지다. 자신의 삶을 주도하지 못하고 공부 스케줄만 주도하고 있는데 어떻게 자신의 삶에 대한 욕망이 생기겠는가. 자신의 삶에 대해서 상상하지 못하기는 마찬가지다.

77. 이제 대한민국 아이들은 두 분류로 나뉘는 것 같다. 이미 증상이 나타난 아이들과 아직은 증상이 나타나지 않은 아이들. 이렇게까지 단순화하여 주장하는 근거는 아이들이 보이는 증상의 유형과 정도가 다양함에도 그 원인과 기능이 유사하기 때문이다. 아이들의 병은 개별 가정의 문제가 아니다. 아이들이 보이는 증상의 원인을 들여다보면 결국은 하나다. 자신의 삶을 누릴 자유가 없다는 것, 삶에 대한 감각을 상실해버렸다는 것이다.

(좀비처럼 살아가는 아이들)
자신의 감각으로 느끼고, 상상하고, 욕망하고, 그 욕망을 현실에서 표현할 수 있을 때 우리는 살아 있는 존재라고 느낀다. 삶에 대한 자유와 감각을 잃어버리도록 강요당하는 상황에서 아이들은 스스로 살아 있음을 확인할 수도 없다. 어디까지가 나의 생각이고 나의 느낌인지 경계가 희미할 뿐 아니라, 자신에 대한 인식조차 희박할 수밖에 없다. 감각 기능마저 마비돼 마치 좀비처럼 살아가는 아이들에게 인간다운 존재로 성장하기를 기대하기는 어렵다.
 어디에서도 자신을 확인할 수 없는 아이는 결국 자신을 신뢰하지 못한다. 성적이 상위권인 아이들조차 문제가 생길 때마다 누군가에게 물어보고, 누군가 알려주지 않으면 자신의 생각과 느낌을 믿을 수 없어서 불안해하고 초조해한다. 자신을 믿지 못하는 아이들은 부모와 사회의 요구에 더욱 맹목적으로 순종한다. 비대해진 머리를 지탱하는 자신의 가냘프고 병든 몸은 그렇게 하면 안 된다고 경고하지만 감각이 마비돼가는 아이들에게는 다른 대안이 없다. 이렇게 대한민국 아이들은 산 채로 죽어간다.
 이것은 대한민국 부모와 사회의 증상이 만들어낸 고통을 아이들에게 전가한 결과다. 태어나기 위해, 잉태되기도 전에 부모와 일방적 계약을 맺은 아이를 상상할 수 있는가? 불행히도 대한민국 아이들은 자신의 의사와는 무관하게 그렇게 태어나고 길러진다. 이것이 아이들을 구하기 위해 대한민국 부모들이 가진 증상을 들여다볼 수밖에 없는 이유다. 상담실을 찾는 아이들의 증상은 결국 일그러진 대한민국 부모의 자화상이기 때문이다.

237. 중요한 것은 진단이 아니라 원인일 것이다. 규형씨 부부가 섹스리스인 것은 서로가 더이상 성적으로 매력적이지 않아서, 또는 규형씨가 너무 힘들고 지쳐서일 수 있다. 하지만 대한민국 남편에게 아내는 하나의 ‘부담’인 경우가 많다. 규형씨가 ‘식구’라고 표현하는, 가장으로서 부양해야 할 책임의 대상들, 집에 오면 그 ‘살아 있는 책임들’이 떡 하니 버티고 앉아 왜 더 많이 잘해주지 않느냐고 한다. 한마디로 가족은 ‘끊임없이 요구’하는 존재다.
 ‘끊임없는 요구’. 그 요구의 대부분은 교육과 관련되어 있다. 사교육, 공교육, 예체능교육. 그런데 그렇게 많은 교육을 받으면서 애들은 왜 저렇게 예의가 없을까? 자발적으로 자기 인생의 대부분을 아이들 교육에 희생하면서 왜 아내는 자기 삶이 없음을 한탄하며 이 어려움을 해결할 수 있는 방법으로 더 많은 수입만을 요구할까? 가족이 식구가 되고, 식구가 요구가 된 가정. 이런 상황에서 ‘살아 있는 책임’과 섹스가 가능하다면 그편이 더 이상한 거다. 누가 아버지들을 이 요구로부터 해방시켜줄 수 있을까? 누가 남편이 성을 건강하게 발산할 수 있도록 해줄까?

239. 공간이 하나의 상징적 권력을 나타낸다면, 옛날 아버지의 권력은 집 전체였지만 지금 아버지의 권력은 집 어디에도 없다. 사생활은 없고 회사생활과 가정생활만 있는 한국의 아버지들에게, 한 뼘의 공간도 사적으로 점유할 수 없는 그들에게 이제 더이상의 요구는 무리다. 그 요구의 대부분이 투자에 비해 보장은 터무니없는 ‘대학’ ‘교육’이라는 허울 때문에 발생한다는 것이 이 시대 아버지들이 겪는 발기불능의 비극이다.

255. 한 번도 공교육이 무엇이며 어떠해야 하는지, 아니 교육이란 무엇이며 어떠해야 하는지 고민해본 적 없는 엄마들과, 사랑이 무엇인지, 관계가 무엇인지 한 번도 제대로 고민해보지 않고 자신이 무엇을 해야하는지 성찰해본 적 없는 아내들. 그들이 만들어가고 유지해가고 ‘지켜가는’ 이 한국 사회의 가정과 교육은 오늘날 ‘외도’로써만 가능하게 되었다. 그래서 그들의 아이들 역시 무단결석도 하고, 폭력이라는 의식도 없이 폭력을 저지르고, 일탈을 감행하며 의미 없는 등교행위를 지속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268. 관계에서 상대방을 심리적으로 위축시키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다. 먼저 어떤 것을 요구한다. 요구는 은밀하거나 요구의 티가 나지 않는 것일수록 좋다. 그런 다음 상대가 그것을 해주면 만족스럽지 못하다고 한다. 물론 이것도 티가 나게 하면 안 된다. 가능하면 약간은 만족하지만 완전히 만족스럽지 않다는 메시지를 전달하면 된다. 문제가 큰 것이면 대놓고 무시해도 된다. 아니면 은근히 두고두고 불만을 표시하면 된다. 그러면 상대는 위축되고 미안해지고 자기 능력에 대해 불신이 들면서 급기야 주눅이 들 것이다.
 또 하나는 상대의 노력을 기본적으로 누구나 다 하는 것으로 만들어 버리는 것이다. 남편들이 자신의 어려움, 가족을 위해 노력하고 있는 일들을 이야기하면, 아내들은 “제발 생색 좀 내지마. 그건 남자들이면 다 하는 거야”라든지, “누구네 아빠는 돈도 잘 벌고 애들하고 잘 놀아주면서 여행도 잘 다니던데, 당신은 그중에 하나도 제대로 못하냐?”라든지, “야, 요즘 그런 것도 안 하고 사는 남자들이 어딨냐? 당신만 잘난거 아니니까 제발 잘난 척 좀 하지마”하고 말한다. 이런 말을 한두 달에 한 번 정도만 날려주면 남편 주눅 들게 하는 건 3년이면 충분하다. 
 아내들이 결국에는 이겨내고 마는 방법 중 또 하나, 가장 흔하고 잘 먹히고 부작용이 없는 방법이 있다. 자기를 피해자로 만드는 것이다. “당신이 나한테 해준 게 뭐가 있는데?” 이런 말은 애교에 속한다. 남편이 행패를 부리거나 비상식적인 행동을 하면 그것으로 비극을 한 편 쓰면 된다. 자기 인생을 나락으로 빠뜨린 사람이 남편이라고, 모든 책임을 남편에게로 돌리고 자신은 불가항력적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노라고, 자기 삶의 모든 고통은 남편에게서 비롯되었다고 하면 된다. 이렇게 자신을 비극의 주인공으로 만들고, 그럼에도 “이 엄마는 너희들만 믿고 산다. 너희들을 위해서라면 이 고통도 다 감내하며 살 것이다”라고 하면, 아이들은 피해자인 어머니의 숭고한 희생정신에 미안해하고 어머니의 삶을 불쌍하게 여겨 아버지를 배척하고 어머니의 편에 설 것이 분명하다. 게다가 아버지는 돈 버느라 바빠서 아이들과 정서적 동맹을 맺을 틈도 없으니 아이들이 엄마 편이 되기란 아주 쉽다.

(…) 아이가 달라져야 한다고? 남편이 달라져야 한다고? 선생님이 달라져야 한다고? 맞다. 하지만 ‘아내’도 달라져야 한다. 남편의 정서는 돌보려 하지 않는 아내가 아이들을 제대로 키울 수 있을까? 아이들을 아바타로 만들어 자신의 삶을 만회하려 하고, 남편을 가해자로 만들어 자신을 비극의 주인공으로 만드는 아내의 희생자 코스프레는 이제 막장드라마만큼이나 지겹다.

273. (어른이 되지 못한 오누이 부부) 대한민국 부부들은 아직 어른이 되지 못한 것 같다. 자신의 상처를 돌보는 데 몰두해 자기 자신에게만 집착하는 것 같다. 아내나 남편이나 자신은 희생하고 고통을 감내하고 있는데 상대방이 그것을 알아주지 않는다고 어린아이처럼 투정부리고 억울해한다. 하지만 과연 누구를 위해, 무엇 때문에 그 고통을 감내하고 있는지 정작 자신은 모르고 있다. 배우자나 자식 때문에 고민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모두 자기 안에 있는 결핍과 공허함으로 고통받고 있는데도 말이다.

결국 아내들이 경험하는 가장 큰 고통은 자기 내면이 공허하다는 것이다. 비슷한 문제로 상담실을 찾는 중년 여성들에게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이야기해보라고 하면 머리가 하얗게 비고, 시커먼 동굴처럼 끝이 보이지 않는 두려움이 먼저 가슴에 밀려온다고 말한다. 자기 안에 무엇이 있는지, 자기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도무지 알지 못한다. 생각해보면 자신의 삶을 어떻게 채울지 제대로 고민해본 적도 없다. 그러니 결국 붙잡을 것은 아이들밖에 없다. 남편을 위로해주고 싶지 않은 것도, 자식에게 지나치게 집착하는 것도, 결국 자기 안의 결핍 때문이라는 것을 모르지 않는다. 그저 그런 자신을 들여다보고 싶지 않을 뿐이다.

(문제는 관계의 결핍이 아니다) 
상담에서 많은 부부들이 어떻게 부부관계를 회복할 수 있는지를 묻는다. 그러면 이런 이야기를 들려준다. “먼저 자신이 상대에게 무엇을 요구하고 있는지를 보세요. 상대에게 요구하는 그것이 바로 당신 자신에게 결핍된 것이고, 그것은 당신 스스로 채워야 합니다. 자신의 결핍을 상대를 통해 채우려는 어리석은 욕망을 뭄추어야 합니다. 모든 문제는 관계의 결핍이 아니라 자신의 결핍에서 와요. 자신이 타인의 지옥이 될 수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지금 대한민국 가정에서 ‘교육’의 이름으로, ‘교육’을 위해 행해지는 일은 정치와 자본의 음모로서, 그들이 만들어낸 제도와 시스템이 우리에게 유령처럼 스며들어 우리 삶을 송두리째 불안 속으로 밀어넣고 있기에 가능한 일이다. 이제 그 연결고리를 밝히려 한다. 그것은 제도와 시스템을 유지하기 위해 희생해온 우리의 삶을 변화시키고, 그 제도와 시스템을 우리의 삶을 위한 것으로 되돌려놓기 위한 시작이다.

한국 사회에서 높은 대학진학률은 성숙한 시민의 등장을 나타내는 지표가 아니라 주류를 향한 모방적인 경쟁의 악순환을 나타낼 뿐이다. 대학은 모방경쟁 대열에 합류 하지 않는 사람들을 손쉽게 비주류, 주변부로 몰아내는 천박한 선별 기준으로도 기능한다.
… ‘대졸자 주류’는 한국 사회에서 다양한 삶의 방식을 주변화하면서 주류적 가치와 소비를 주도하는 보수적인 집단으로 기능하고 있을 뿐이다.
… 이들이 ‘정상’이라고 느끼는 감각은 ‘남들’과 비교해 뒤치지지 않는 삶이다. 남들이 누리는 것을 누리지 못하는 삶은 뭔가 문제가 있는 삶이며 주류에서 밀려난 삶과 동이시된다. 정상-비정상, 주류-비주류의 기준은 늘 내가 아닌 남에게 있다. 그래서 그토록 남들 다 가는 대학, 남들 다 사는 아파트, 남들 다 타는 차에 집착하고, 끊임없이 남들을 모방하며, 모방하기 위해 경쟁한다. 그러나 그런 자신이 특별히 욕심이 많다거나 대단한 것을 바라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저 대한민국에 사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가지는, 평범하고 소박한 소망일 뿐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것은 아이들을 죽이고 미치게 만드는 ‘잔혹하게 소박한’ 소망이다.

사실 어느 사회든 주류와 비주류는 있기 마련이다. 그러나 한국처럼 ‘대졸자 주류’가 만들어낸 욕망에 의해 압살되는 사회는 어디에도 없다. 물론 대졸자 주류가 그 사회에 좋은 가치를 제시하고 모범이 된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을 것이다. 그러나 대학을 졸업하고도 제대로 된 전공 지식은 고사하고 시민으로서 갖춰야 할 기본적인 교양조차 갖추지 못한 사람이 태반인 상황이라면 문제는 달라진다.
 사실 자신에게 진정으로 가치 있고 의미 잇는 것은 무엇이며 그 가치를 따르는 삶은 어떠한 것인지 제대로 생각해본 적도, 경험해본 적도 없는 대학 신봉자들. 이들은 분열된 자신의 삶에 눈감은 채 시스템의 중력에 몸을 싣고 놀라울 정도로 무책임하게 자신의 아이들을 희생시키면서까지 시스템의 재생산에 기여하고 있다. 자신들이 기대고 있는 사회의 시스템에 휘둘리면서 그 시스템이 안겨다주는 어떤 치욕도 참아내면서 주류의 삶에서 밀려나지 않겠다는 일념으로 하루하루를 버티고 있다. 그 대가로 얻은 것은 무엇이고 잃은 것은 무엇인지 돌아보려 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제는 직시할 때가 되었다.

… 앞서 대학은 진짜 문제가 아니라고 했다. 그렇다면 무엇이 문제일까? 난파선에서 구명조끼를 얻었다며 모두들 환호하는 사이 누군가는 쾌속선을 타고 이미 그 상황에서 빠져나갈 수 있었던 것처럼, 다들 무언가에 홀린 듯 앞뒤 보지 않고 그저 살아남겠다는 생각으로 악다구니를 쓸 때 진짜 문제는 다른 곳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경제학자 장하준은 <그들이 말하지 않는 23가지>라는 책에서 자본주의 사회의 경제적 불평등 문제를 이야기하며 ‘기회의 평등’뿐 아니라 ‘결과의 평등’을 보장 할 수 없다면 그 사회는 실질적인 의미의 평등을 보장하지 못하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구명조끼라고 생각했던 ‘대학’은 난파해가는 삶을 직면하는 것을 유예해주는 낡은 뗏목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무엇이 우리를 이런 상황으로 이끌었는지 제대로 바라볼 수 없도록 우리의 눈과 귀를 가린 시스템의 거짓말이었던 것이다. 현재 한국의 교육은 내용은 텅 비어 있고 절차라는 껍데기만 남아 있을 뿐이다.

게다가 문제는 그 두려움과 공포를 더 강화한 곳이 다름 아닌 학교였다는 사실이다. 인도의 사상가 비노바 바베는 교육의 목적은 ‘두려움으로부터의 자유’라고 했다. 그러나 적어도 한국에서 학교교육은 두려움을 더욱더 내면화하는 과정에 지나지 않는다. 인생에서 가장 꾸밈없고 자유로워야 할 시간을 우울하고 억압적인 환경에 얽매여 있어야 한다.

생각해보면 학교는 ‘가상현실’이 등장하는 영화를 틀어주는 극장 같은 곳이었다. 정치철학자 슬라보예 지젝은 카페인 없는 커피, 알코올 없는 맥주처럼 핵심적인 것이 빠진 현실을 ‘가상현실’이라고 말한다. 학교가 우리에게 보여준 것은 자유 없는 자유, 평등 없는 평등이라는 일종의 가상현실이 아니었던가. 그러나 영화가 끝나고 극장을 나서는 순간 현실은 밀려오고 우린 제도의 폭력과 맞닥뜨린다.

(대학은 생계형 보험? 보험비 버느라 파괴된 가정)
아이의 미래에 대한 불안처럼 보이지만 실은 부모 자신의 노후에 대한 불안이기도 한 것이다. 비빌 언덕이 없는 대한민국 부모들이 믿는 유일한 보험은 교육이다. … 누구도 자식의 미래, 자신의 노후를 보장해주지 않기 때문이다.

부모는 아이를 위해 야간 대리운전과 노래방 도우미도 불사했지만 가족은 산산조각이 났다. 어쩌면 이 순간에도 또다른 야간 대리운전 기사 아빠와 노래방 도우미 엄마는 아이의 학원비를 벌기 위해 열심히 ‘부모 노릇’을 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해서라도 아무도 보호해주지 않는 사회 안에서 자신과 아이들이 살아남으려 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 믿음은 결국 파멸과 불행만 낳았을 뿐이다.

이제 누가 우리를 지켜줄 것인가? 대학은 이제 출세와 신분 상승을 위한 교두보가 아니라 신분 하락을 막아줄 마지노선인 것이다. 대학마저 나오지 못한다면 이 험한 세상에서 무엇 하나 믿을 것이 없으니 아이들의 앞날이 캄캄하다. 더 나아가 30, 40대 가장이 되어서도 제 앞가림을 못하는 자식들을 돌보아야 할 자신의 노후가 암담하고 공포스럽다. 그래서 대한민국 부모들은 이렇게 또다시 무지한 종속적 삶의 방식을 고수한다. 구명조끼를 다른 말로 바꿔보면, 대학은 생존을 위한 최소한의 보험이 된다. 투자에 비해 아무것도 보장되지 않거나 터무니없이 보잘것없는 보상만이 주어지는 보험이지만 그나마 잡지 않으면 아무런 미래도 없을 것 같아서 대학이라는 보험을 구명조끼를 놓지 못한다.

복지나 사회적 안전망이 갖추어지지 않은 상황에서 교육과 학력은 서민들에게는 생존을 위한 생계형 보험으로 받아들여진다. 그 보험마저 없다면 미래가 너무나 공포스럽다. 비빌 언덕이 없는 부모들이 선택한 유일한 보험인 교육, 그런데 그것은 과연 우리에게 무엇을 보장해주고 있는가? 불안과 공포를 보장해주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대한민국의 부모들은 사회와 제도에 대한 의심이 자기 삶에 대한 공포로 확장되는 것을 서둘러 차단하기 위해, 자신도 완전히 수긍할 수 없는 그 제도에 순응한다. 하지만 그것이 결국 우리 아이들과 가족에게는 붕괴의 길이 되고 만다. 아이들을 더욱 극악해지는 경쟁적인 삶으로 내몰고 숨통을 조이면서 ‘포기하는 것은 너무 억울하다. 우리 아이만큼은 해낼 수 있을 거야’라며 스스로를 희망고문하고 있을 뿐이다.

(우리가 불행한 이유)
결국 부모들이 필사적으로 틀어막으며 직면하고 싶어하지 않는 진짜 이야기는 따로 있다. 현실은 학력, 재산, 인맥으로 견고하게 짜인 ‘그들만의 리그’이며 계층 간의 차별과 격차를 넘는 것이 쉽지 않다는 사실 말이다. 복지나 사회적 안전망이 갖추어지지 않은 상황에서 교육과 학력은 서민들에게 생존을 위한 보험일 수밖에 없다. 그 보험마저 없다면 미래가 너무나 공포스럽다. 중상층이나 중산층 부모들에겐 사회적 지위와 권력을 유지할 수 있는 최소한의 자격요건이다. 교육은 일종의 절차가 되어버려 그것을 통과하지 않으면 최소한의 안정적인 직업 선택과 삶의 기회마저 주어지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많은 부모들이 주문을 외우듯 일단 대학만 가면 다 해결된다며 아이들을 닦달한다.

(무엇에 대한 불안인가)
진짜 문제는 문제 자체가 잘못되었다는 사실이다. 그런데도 부모들은 정답이 없는, 답할 수 없는 문제에 꾸역꾸역 애써 답을 만들었다. 애초 문제가 잘못되었다고 항의하지 못하고 그저 어떻게라도 답을 만들려 한 것이다. 정작 문제를 낸 사람은 답을 내놓지 않고 있는데 말이다. 그러나 엿까지 고아가며 정답을 만들어온 부모들을 어리석다고 비난할 자격이 과연 우리에게 있을까? 제도가 원하는 정답을 만들어온 부모들은 사교육에 살림이 거덜나고, 가정이 파괴되는 한이 있어도 아이를 명문대에 입학시키려는 우리와 실은 다르지 않다. 잘못된 제도를 그대로 둔 채 그저 자신의 아이만은 그 제도의 선택을 받기 바랄 뿐이니 말이다.
 제도의 불합리함과 문제점을 알고 그 때문에 고통받으면서도 우리는 왜 그것을 고치려 하지 않는가? 어차피 강요된 선택인데 왜 그것을 누구보다 충실히 이행하는가? 잘못된 질문을 던지며 정답을 만들어 오라는 어처구니없는 요구에 대해 오직 “예”라고 주억거릴 뿐 왜 저항하지 못하는가? 이것이 자신의 삶에 대한 자발적인 고문이 아니고 무엇일까? 자포자기와 같은 행위에서 우리는 무엇을 즐기고 있나? 이 제도와 시스템은 우리의 고통을 먹고 사는 것이 분명한데 말이다. 이런 세상에서는 살기 싫다며 몸을 던지는 아이들의 외침에 우리는 왜 귀를 막고 있는가? 우리는 아이들의 미래를 담보로 시스템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과 우리가 할 수 있는 것 사이의 간극을 메우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한국 교육 문제의 핵심은 ‘불안’이라고들 말한다. 부모들은 움직이는 동력은 다름 아닌 불안감이라는 것이다. 내 자식이 남보다 못할까봐, 남에게 뒤처질까봐, 사회에서 낙오자가 될까봐 무보들은 전전긍긍한다. 사실 불안만큼 확실한 겁박은 없다. 부모의 불안은 자식의 미래보다. 아니 지금 눈앞에 있는 아이보다 더 확실하다. 불안으로부터 면제되는 사람은 없다. 그런데 부모들의 불안에는 좀더 근본적인 원인이 있는 것 같다.
 우리는 실은 시스템 자체가 불안한 것이다. 시스템이 자신을 보호해줄 것이라고 믿지 못할 뿐더러, 시스템의 문제해결 능력도 믿을 수가 없기 때문에 불안한 것이다. 제도와 시스템이 자신을 보호해주리라는 확신이 들고 그것에 기댈 수 있을 때 사람들은 그 안에서 뭔가해볼 마음을 먹는다. 그런데 우리 사회는 시스템에 대한 신뢰가 제로에 가깝다. 그런 상황에서 사람들은 결코 시스템을 바꾸거나 제도적인 변화를 위해 노력을 기울이며 자신의 미래를 걸지 않는다. 시스템을 향해 자신의 요구를 호소하지 않는다. 그나마 시스템이 유지되는 것은 그것이 제대로 굴러가고 있다고 믿고 싶은 사람들의 희생과 노력 때문인지도 모른다.

경험적으로 우리는 이 사회가 시스템으로 굴러가는 것이 아니라 돈과 빽으로 움직인다는 것을 안다. 제도나 시스템이 있지만 허울뿐이거나 현실을 가리는 하나의 연막에 지나지 않고, 세상은 돈과 빽에 의해 움직인다고 생각한다. 그러니 겉으로는 제도와 시스템을 따르지만, 제도와 시스템의 변화에 노력을 기울이는 대신 각자 알아서 돈과 빽의 세상에 다가갈 수 있는 동아줄을 잡는 일에 고군분투할 수밖에 없다. 시스템에 대한 불안을 반동적이고 투기적인 방식으로 해결하려는 것이다. 여기에 불안과 공포는 투기적인 삶을 더욱 조장하는 기폭제가 될 뿐이다. 결국 누군가의 말처럼 한국에서 교육은 “판돈이 크게 걸린 아슬아슬한 도박”에 지나지 않는지 모른다.
 그런데 썩은 동아줄이라도 붙잡겠다며 악다구니 쓰는 사람들은 그 바람을 이룰 수 있을까? 안타깝게도 그들은 ‘헛똑똑이’에 지나지 않는다. 잘못된 제도와 시스템은 점점 그들을 옥죄어올 것이다. 현재 우리가 고통받고 있는 것은 잘못된 제도와 시스템을 그대로 방치한 우리의 책임이 크다. 그 고통은 이제 우리 아이들을 옥죄고 있다. 이제 시스템의 문제를 외면하고는 지금 우리가 처한 곤경으로부터 한 걸음도 나아갈 수 없다.

<아이는 부모의 성찰을 물려받는다>
부모 노릇도 전문가와 매뉴얼로부터 배우는 부모들. … 그래서 그런지 아이가 문제가 아니라 부모가 문제라는 말을 부모 자신의 입으로도 서슴없이 한다. 그런데도 점점 더 많은 부모들이 부모 노릇이 막막하다고 한다. 부모가 문제라는 것도 알고, 어떻게 양육해야 하는지를 책에서도 텔레비전에서도 보는데 왜 부모 노릇은 점점 더 막막하기만 할까?

진짜 불안은 부모 자신도 확신할 수 없는 삶의 가치. 가뜩이나 불안함으로 쩔쩔매는 부모들에게 이것이 진짜 정답이라고 소리치면서 이 프로그램을 따르지 않으면 크게 후회할 것이라며 부모를 더 불안하게 하는 ‘자칭 전문가’들이 너무 많다. 그들은 모두 학원 원장과 다름없는 교육시장의 하이에나들이다. 단호히 말하지만 아이의 미래는 매뉴얼이나 부모교육 프로그램으로는 얻을 수 없다.
 아이의 미래는 부모가 물려주는 무언가로 그 일부를 채울 것이다. 그러나 아이에게 물려줄 수 있는 것은 오직 부모 자신이 확신할 수 있는 것이어야 할 터이다. 그것이 없으니 불안할 수밖에 없다. 부모들이 불안한 것은 의사소통 기술을 잘 활용하지 못해서가 아니라 사실은 사회적 성공 말고는 자녀에게 물려줄 가치라는 것이 아예 없기 때문인지 모른다.

부모인 내가 유예했던 것은 내가 옳다고 믿는 가치를 나의 삶으로 받아들여, 그것을 삶 속에서 구현해내는 일이었다. 인간됨이 돈과 권력과 학력에 의해 유린당하고 파괴되는 세상의 가치를 생각으로만 거부하면서 술자리에서 침 튀기며 욕하는 데 그치지 않고 실제 그 가치대로 사는 행동을 유예한 것이다. 다른 사람의 삶에 관심을 가지고 다른 사람을 위해 내 삶을 열어놓아야 함을 알면서도, 개인과 사회가 분리될 수 없음을 알면서도 실행에 옮기지 않았다. 결국 사회 속에서 정치적 개인으로 살아가는 공동체적 삶을 유예한 것이다. 그렇게 나는 아이에게 유예를 대물림하였고 아이는 바로 유예하는 삶의 방식을 대물림받았다.
 이제 막막해하는 아이에게 부모인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부모로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이제부터라도 나의 삶의 가치에 확신을 가지고 그 가치대로 사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리라. 대물림된 나의 유예를 거두어들일 수 있는 방법은 내가 더이상 그 유예를 허용하지 않는 것이다.

부모의 책임은 사회가 함께 나누어야 한다. 옳다고 믿는 가치를 삶 속에서 실현하는 것이 왜 그토록 힘들고 어렵고 막막했을까? 아이가 학교에서 교육이라는 이름으로 교육자에 의해 행해지는 반인권적이고 폭력적인 언사와 행동과 규칙들을 겪어내는 동안 왜 그러한 일을 더 적극적으로 항의하지 못하고 중단할 것을 요청하지 못했을까? 왜 결국 그러한 상황을 아무 말 하지 않고 견뎌내는 것으로 수용할 수밖에 없었을까?
 일차적으로 부모인 나 자신이 확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확신이 없었던 것이 과연 내 개인만의 문제였을까? 나는 함께할 누군가가 필요했다. 학교가 잘못되고 있다면 그것을 누구에게 어떻게 항의할 수 있으며 그 절차를 누구와 의논하고 누구와 연대할 수 있는지 부모인 나에게 어떤 권리가 법적으로 보장되어 있고 그것이 어떤 절차로 실행되고 있는지, 그 속에서 부당함을 고발하는 나와 내 아이는 어떻게 보호될 수 있는지……. 그러나 이에 대한 충분한 정보와 이를 지원하는 제도적인 도움을 얻지 못했다.
 독일에서는 전문계 학교를 다니는 고등학생들이 산업체에 실습새으로 나가면 회사에서는 가장 먼저 안전교육과 더불어 학생들이 어떤 권리를 가지고 있는가를 설명한다. 휴식시간, 임금, 노동시간, 안전수칙 등과 관련해서 학생들이 어떤 권리를 가지고 있고 회사가 이를 어길 경우 어디에 어떻게 항의할 수 있는지를 알려준다.
 내가 일해야 하는 회사에서 제일 먼저 내가 어떤 권리를 가지고 있고 만약 부당한 대접을 받을 경우 어떻게 대응할 수 있는지 가르쳐준다면, 그 회사는 얼마나 믿을 만한 회사이며 그런 기업이 있는 사회는 얼마나 든든한 사회인가. 마찬가지다. 우리 사회에서 집단이나 조직에서 개인이 느끼는 부당함에 대해 개인의 권리는 어떻게 보장되어야 하고 개인은 어떻게 보호받아야 하는지 제도적인 장치가 마련되어 있다면, 개인이 희생되거나 문제를 회피하지 않아도 될 것이며 집단과 사회의 문제도 해결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한 제도와 시스템을 같이 연대해서 고민하고 만들어내 그것이 정당한 방식으로 움직이도록 지켜내야 한다. 이것이 문제를 제기한 개인이 더 큰 불이익을 당하거나 조직의 부당함을 말하면 제거당하지 않고 우리 사회를 바로잡을 수 있는 가장 올바른 방법일 것이다.

 결국 부모 노릇이 막막한 것은 우리가 매뉴얼을 모르기 때문이 아니라 부모 개인에게만 부모 노릇의 책임이 부여되기 때문이다. 우린 지금 내가 겪고 잇는 문제가 결국 나만의 문제가 아닌 우리 모두의 문제이며, 우리 사회가 더 나은 방향으로 변화하는 데 기여할 수 있는 문제임을 지지해주는 가치와 시스템이 필요하다. 부당한 가치를 강요하는 사회에서 자기만의 삶의 방식과 가치를 지켜내려는 부모들이 보호받고 연대할 수 있는 제도와 시스템이 필요하다. 현재의 교육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하는 부모들이 얼마나 많은가. 하지만 어디서부터 어떻게 변화해야 할지, 달리 노력해볼 수 있는 제도적인 지원과 연대의 물꼬를 찾지 못해 주저하는 것이다. 

 이제 부모가 부모 노릇을 제대로 하기 위해서는 개인의 자각도 필요하지만 이를 지원할 수 있는 사회 시스템이 필요하다. 그 시스템은 양육과 교육이 부모 개인만이 아닌 사회 공동체의 과제가 되어야 한다는 가치를 지지하는 시스템이다. 적어도 미래 세대를 키워내는 양육과 교육과 보건은 사회와 국가가 지원하는 공공의 영역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한 인간을 키우는 것이 부모만의 염려와 책임이 아니어야 한다. 
 유럽의 경우 이 같은 제안이 민주적인 절차와 토론, 제도적인 뒷받침을 통해 사회의 공동체적 가치로 받아들여지는 과정을 거쳤지만 우린 아직도 제대로 된 논의조차 못 하고 있다. 이를 테면 여전히 논란이 일고 있는 무상급식의 경우 왜 부자인 아이가 똑같이 돈을 내지 않고 밥을 먹어야 하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공교육은 국민의 세금으로 국가가 책임져야 할 영역이라는, 하나의 가치를 채택하는 문제다. 다시 말하면 우리 사회가 공동체적 가치를 추구하는 방향으로 나아갈 중요한 기로에 서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선택은 바로 부모인 우리 자신의 선택인 것이다.

서민들은 죽도록 서로 싸우고, 가진 자들은 그냥 세습한다. 여기에는 부화뇌동한 우리 자신의 책임이 분명히 있다. 황새가 되고 싶어 안달난 뱁새부모들. 그들의 계층 상승을 향한 욕망, 신분 상승을 향한 대열에서 탈락할지 모른다는 불안이, 아이들만 죽이는 것이 아니라 그들 자신을 죽이고 있다. 뱁새를 부정하고 황새가 되려고 전전긍긍할 것이 아니라 뱁새라는 것이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 당당한 삶을 지켜내면 되는데 말이다.

(부모의 자기부정. 나처럼 살지 마라) 언젠가부터 한국의 부모들은 자식들에게 ‘나처럼 살지 말라’고 말하기 시작했다. 근대화라는 급격한 단절을 겪으면서 한국의 자식들은 ‘부모처럼 살지 말아야 한다’는 신념을 가져야 했다. ‘부모처럼 살지 말라’는 말은 곧 가난하게 살아서는 안 된다는 말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부모처럼 살겠다는 생각은 품어서는 안 될 불효였다. 바로 부모를 부정해야만 효도가 되는 비극의 시작이었다.

(부모가 먼저 자신의 삶과 마자하라) 상담을 하면서 가끔 아이들에게 부모님이 행복해 보이는지 묻곤 한다. 그러면 대부분의 아이들은 별로 행복해 보이지 않는다고 답한다. 왜 그렇게 생각하느냐는 물음에 아이들이 내놓는 대답이 날카롭다. 부모님은 늘 “너는 나처럼 살지 말아라”라고 말한다는 것이다. 나 같은 직업을 가지면 안 된다, 나 같은 결혼을 하면 안 된다, 나 같이 공부하면 안된다, 나 같은 성경을 가지면 안 된다 등등.
 아이들은 부모에게서 실패를 했든, 어려움을 겪었든, 상처를 지녔든 그것이 다 삶에 의미가 있다는 이야기를 한 번도 들어보지 못했다. 자신의 삶을 부정하면서 아이가 실패하지 않기를 바라는 부모의 모습에서 아이들이 배우는 것은 역설적이게도 ‘더 나은 사람’이 되려는 희망이 아니라 자신의 존재에 대한 부정이다. 부모가 자신의 삶을 부정하고 있는데 아이가 자기 존재를 온전히 받아들일 수 있을까? 자기는 못 누리고 못 가진 것을 모두 누리고 가진 아이들이 왜 자신을 소중히 여기지 않는지 답답해하기 전에, 아이한테 그렇게 누리고 갖게 하고 싶은 부모의 결핍이 무엇인지를 먼저 느껴야 한다. 그리고 결국 그 결핍을 채워야 할 대상은 아이가 아니라 자기 자신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요즘 아이 교육의 핵심 키워드로 통하는 아이의 ‘자존감’이란 것도 결국 부모 자신의 자존감에서 비롯된다. 아이에게 자존감을 갖게 한답시고 전문가들을 찾아다니며 온갖 코칭과 매뉴얼을 배우기 전에 부모 자신을 먼저 돌아보고 살필 일이다. 자신의 삶을 긍정할 수 없고, 삶의 과정과 자신이 찾은 삶의 의미를 당당하게 자식에게 전할 수 없는 부모들이 자식의 행복을 볼모로 자신의 삶을 되찾으려고 한다는 것을 말이다. 자신의 삶을 받아들이지 않는 부모를 보면서 어떻게 아이들이 자신의 미래의 행복을 기대할 수 있겠는가. 부모의 현재는 곧 아이들의 미래다. 아이들은 부모의 삶에서 자신들의 미래를 본다.

(자식으로부터 독립하라) 아들과 이혼해라. 그리고 제발 독립해라. 성인이 되어야한다. 자기 삶을 자신이 책임지고, 누구에게도 의존하려 하지 말아야 한다. 성인식이 없어져서 성인이 되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성인이 되고자 하는 과정이 없어졌기 때문에 성인식이 사라진 것은 아닐까? 성인식이 없고 통과의례가 없는 한국사회에서 어른들이 먼저 제대로 된 어른이 되어 아이들을 제대로 된 어른으로 성장시켜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 스스로 두렵고 불안하고 거부하고 싶은 ‘책임’이라는 과업을 수행하고, ‘독립적 인간됨’이라는 자기성장의 경험을 먼저 거쳐야 한다.

그런데 (성장) 과정을 지켜보는 나는 부모로서 불안과 두려움을 참고 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아이가 어른이 되기 위해 거쳐야 할 이 과정을 견디는 것뿐이다. 아이가 어른이 되는 과정이기 전에 내가 어른이 되는 과정이며, 아이에게 어른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 부모가 되는 과정이다. 개인적으로는 고통스럽고 흔들리는 경험이다. 그러면서 아이의 불안한 성장을 지켜보며 감내해야 하는 것이 나 자신이 어른으로 성장하는 마지막 과정이 아닐까 생각하게 되었다. 내가 가장 집착할 수 밖에 없는 대상인 아이에게서 독립하는 것. 아이가 나에게서 독립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아이에게서 독립하는 것, 이것이야말로 핵심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동료들과 생각을 나누고 서로에게 기여하지 못하는 아이의 사고력이나 지식은 별로 의미가 없다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너희가 몹시 떠들어서 내가 더이상 말을 계속할 수 없었다. 그래서 말을 중단했는데 내 뜻을 알아차리고 조용히 해주니 고맙구나. 지금까지 너희는 초등학생이었고, 이젠 김나지움 학생이 된다. 김나지움 학생이 된다는 것은 여러 가지 의미가 있다. 더 재미있는 공부와 활동을 하게 되고, 더 많은 지식을 배우게 되고, 같이 먼 여행도 가게 된다. 하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이렇게 많은 학생과 교사들이 어떻게 서로를 이해하고 도와가면서 같이 협력하고 생활하는지를 배우게 될 거라는 점이다. 아무리 공부를 잘해도 다른 사람과 함께 살아갈 수 없다면 그건 외롭고 재미없는 일이다. 너희가 다녔던 초등학교는 이 학교보다 훨씬 작은 학교이고, 그에 비해 이 학교는 훨씬 크다. 그래서 우리가 더 많은 차이와 갈등을 겪게 될 것이고, 그것을 잘 조정하고 서로를 배려하는 것이 필요하다. 지금 너희가 내가 목이 아프게 소리 지르지 않아도 되도록 내 뜻을 알아차리고 조용히 해준 것처럼 말이다. 오늘 너희의 행동을 보니 벌써 김나지움 학생이 된 것 같다.”

중요한 것은 자신의 삶의 방향과 원칙을 스스로 세우고 지킬 수 있는 자율이다. 더 적게 가진 사람에게 좀더 나눠주는 평등이 아니라 그 사람과 함께 살아갈 수 있는 연대의식이다. 내가 좀더 불편하고 손해를 본다 하더라도 그 길이 우리 중 누구도 아주 불행하고 힘들지 않게 살 수 있는 길이라면, 그래서 결국 조금 느리지만 다 같이 성장할 수 있는 길이라면 기꺼이 그 길을 선택하려는 공동체 의식 말이다.

뉴질랜드에는 있지만 한국에는 없는 제도를 별로 본 적이 없다. 한국에도 있을건 다 있다는 말이다. 내가 느끼는 가장 큰 문제는, 법과 제도도 잘 갖추어져야 하지만 결국 그것을 지켜야 할 우리들일 그것을 제대로 경험할 기회가 없었다는 것이다. 한국에도 좋은 제도는 있지만 그것을 제대로 지켜낼 시민, 성숙한 시민으로 길러낼 교육이 부재하다.
 사실 우리는 시민으로서 어떻게 생각하고 행동해야 하는지 제대로 교육을 받은 적이 없고 그런 사회를 우리의 힘으로 만들어본 경험도 없다. 여기에서 우리가 실은 제대로 교육받지 못했다는 사실과 우리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교육이 무엇인지가 극명하게 드러난다. 독일이나 뉴질랜드와 한국의 차이는 경제력의 차이라기보다는 공동체를 지키고 시민을 길러내는 교육의 차이다. 공동체의 가치를 지키며 서로를 배려하는 교양 있는 사람을 키우는 교육이야말로 교육다운 교육이 아닌가.

(다시 태어나기 위해, 이제 무엇을 해야 할까) 대한민국이 살 만한 곳이라고 믿는 사람들이 얼마나 될까? 이렇게 힘든 삶이 지속된다면 언젠가는 파국에 이를지도 모른다. 그 사실을 외면하기 위해 가능한 한 눈과 귀를 닫고 살기에 마음 깊은 곳에 우울함이 자리 잡고 있다. 그 우울함조차 애써 외면하며, 갈수록 복잡하고 견고해지는 경쟁체제 속에서 모두가 노력과 성공의 신화에 취해 스스로를 착취하고 있다는 사실조차 미처 깨닫지 못하고 있다. 오로지 살기 위해, 살아남기 위해 삶의 가치를 외면하고 삶의 의미를 반납하게 되었다.

30. 오늘날 가정의 이미지는 더 이상 ‘보금자리(nest)’가 아니라 단순한 ‘버스정류장(bus-stop)'으로 변하고 있다. 가정은 노동에 종속되어 노도의 긴 여정을 다니기 위한 간이정류장으로 변했다. 아이들도 노동하는 어른들과 둘러앉아 삶의 의미와 행복을 나누는 시간을 함께 갖기 어렵다. 다만 그 간이정류장에 간간이 들러 냉장고 문을 열고 먹을 것만 챙겨 먹고 바삐 떠난다. 차라리 학원에서 또는 독서실에서 공부하는 척이라도 하면 마음이 좀 편한 듯하지만, 여전히 내면은 불안하고 공허하다. 어른들은 삶이 고달플수록 그 고통을 잊기 위해 일에 더 매진하는 병적 경향도 있다. 가시적 성과를 올리면 다소 마음이 편해지기 때문이다. 이렇게 어른들, 아이들 모두 일중독으로 내몰리고 있다.

31. 요컨대 오늘날 우리가 일에 대해 일정한 지향성을 갖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일이 우리에 대해 일정한 지향성을 강제하는 셈이다. 겉으로는 우리가 일에 대한 가치관을 자유로이 선택할 수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우리가 일에 대한 가치관을 강요받는다. 필요에 따라 일하기보다는 거꾸로 일의 필요에 따라 우리가 끌려 다니며 일한다. 그 와중에 굳이 우리가 일에 대해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면, 그것은 일이 우리 내면의 고통이나 두려움을 회피할 수 있는 ‘도피처’내지 ‘망각제’ 역할을 한다는 점이다.

35. 이제 돈의 논리가 삶의 논리를 대신하고, 마침내 삶 그 자체를 지배하게 된다. 그리하여 경제가 사회를 압도하고 병합해버린다. 이것을 범지구적으로 추진하는 움직임이 바로 신자유주의 세계화요, WTO요, FTA다. 안타깝게도 소수의 지배 엘리트들과 그를 추종하는 대다수 대중들은 “대세를 거스를 수 없다”고 하며 현실에 적응하기만을 강조한다.
 이렇게 전도된 현실을 우리가 바로잡고자 한다면, 사유와 노동의 이분법, 인간과 자연의 이분법, 경제와 사회의 이분법을 과감히 넘어서야 한다. 

한마디로 노동을 더 이상 신성시하지 않아야 하는데 사람들은 여전히 이를 ‘신성시’하며, 나아가 고통스런 현실적 삶의 도피처(쉼터)로 삼는 것이 문제라는 것이다. 피비린내까지 풍기는 ‘신성한 쉼터’로서의 노동, 이것이 일중독 시대에 우리 대다수가 내면화해버린 노동관이다.

38. 한국인들은 ‘노는 것’에 대해 일종의 죄책감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그리 놀랄 일도 아니다. 그것이 P. 부르디외가 말한 아비투스(습속)로 굳어지다 보니, 이제는 잘 ‘놀 줄’도 모르는 사람들이 되고 말았다. 반면에 일이 돈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는 것은 일이 일종의 마약, 즉 현실적 고통에 대한 진정제가 되거나 아니면 가슴을 들뜨게 하는 흥분제로 작용했음을 암시한다. 이것이 일중독 사회 속에 사는 우리의 솔직한 모습이다.

43. 어른들은 어린 시절의 좌절감을 보상받기 위해, 또는 그러한 내면의 불안감과 두려움을 은폐하기 위해, 일이라는 일종의 중독물에 빠져듦으로써 견디기 어려운 심적 고통을 피해가고자 한다. 그 결과 사람들은 일의 결과가 얼마나 좋은가와는 무관하게, 오로지 일 속에서 삶의 의미를 찾으려고 하는 ‘자기강제’를 하게 되고 자연히 실 노동시간도 길어질 수밖에 없다. 이 모든 현실은 경제와 사회가 이분법적으로 분리되었을 뿐만 아니라 마침내 사회가 경제 속에 합벽된 결과, (돈이나 일에의해, 즉 자본에 의해) ‘삶의 식민화’가 고도로 진척되었음을 말해준다.

44. 사유와 노동의 이분법을 넘는다는 것은 너도 나도 삶의 문제 해결에 이론가이자 실천가로 적극 나서야 함을 뜻한다. 더 이상 가정과 학교에서 “땅 파고 살지 않으려거든 공부해라”라고 강요하지 않는 사회를 만드는 것이다. 모든 이가 땅을 파면서도 땅의 철학자가 되는 감동적인 사회, 이것이 돌파구다. 그것은 지금의 수직적 사다리 질서를 수평적 원탁의 질서로 바꾸어야 가능하다. 그 출발점은 우리 마음속의 사다리 질서부터 걷어내는 일이다.
 인간과 자연의 이분법을 넘는다는 것은 한편으로 인간이 자연속으로 겸손하게 회귀함을 뜻하며, 다른 한편으로 ‘자연의 노동’을 적극 인정함을 뜻한다. 인간이 자연으로 회귀한다는 것은 자연의 순환고리 중 일부로 동참하는 것이며 따라서 그 순환에 들어가지 못하는 ‘쓰레기’를 더 이상 만들지 않음을 말한다. 자연의 노동을 적극 인정한다는 것은, 햇볕의 노동, 바람의 노동, 물의 노동, 흙의 노동, 미생물의 노동, 풀의 노동, 밀알의 노동, 나무의 노동을 인간의 노동과 동등하게 보는 것이다.

별들이 온 힘으로 굴러서 해는 떠오르고
화분에 작은 싹 하나도
매순간 심호흡으로 자기 생을 밀어 올린다.
조향미, 그 나무가 나에게 팔을 벌렸다

경제와 사회의 이분법을 넘는다는 것은 돈벌이 그 자체를 목적이 아니라 살림살이의 수단으로 되돌린다는 말이다. 아이들을 점수나 등수로 판단해서는 안 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한 사람을 직업이나 소득, 지위로 판단해서는 안 된다. 모든 사람을 사람 그 자체로 인정하며 살갑게 더불어 살 때, 비로소 경제 사회 이분법이 극복된다.
 다시 물어보자. 사유와 노동의 이분법, 인간과 자연의 이분법, 경제와 사회의 이분법을 과감히 넘어가는 길의 입구는 어디에 있을까? 그것은 아마도 우리 자신 안에서 분리된 내면과 외면을 다시금 통일하는 데 있다. 참된 자아와 다시 접촉하는 것이다. 내가 살아 있다는 것이 무엇인가, 내 내면에서 꿈틀거리는 것이 무엇인가, 무엇이 나의 참된 행복인가, 무엇이 삶의 기쁨이요, 존재의 기쁨인가? 이런 질문에 답하려면 결국 외피에 가려진 내면의 진실을 찾아야 한다.
 그런데 참된 자아는 과연 독립적으로 존재할까? 그렇지 않다. 우리는 나 홀로 가면서도 더불어 가는 존재다. 또 더불어 가면서도 나 홀로 가기도 한다.
 ‘같이 또 따로, 따로 또 같이’ 존재하는 것이 우리의 실존이 아닐까? 소유양식이 아닌 존재양식의 삶을 강조한 에리히 프롬, 라다크 마을이나 남태평양 아누타 섬, 그리고 북미 원주민들이 가졌던 ‘확장된 자아’의 삶, 사람을 관계적 존재로 보자는 신영복 선생의 시각도 바로 이런 점에서 일맥상통한다. 

59. 진리를 위한 경쟁이 아닌 타자를 누르기 위한 생존경쟁, 즉 세계시장을 둘러싼 상품경쟁은 어떤 상품이 승리하는가와 무관하게 자본주의 세계체제의 지배를 존속시키는 조건이 된다. 내가 시장경쟁에 참여하는 순간, 그 승패와 무관하게 경쟁의 희생자가 된다. 나아가 그것을 넘어 (우리 모두를 지배하는) 자본의 지배력을 강화시켜주게 된다. 바로 이 점을 명확히 인식하는 것이 자본주의 경쟁의 본질을 꿰뚫어보는 것이다.

60. 마찬가지로 노동자들이 서로 자기 노동력을 팔기 위해 유혈적 경쟁(경매)을 하지 않고, 모두가 일어나서 “왜 우리끼리 피터지게 경쟁하나?”라며 한꺼번에 단결하여 몰려 나간다면 그것은 자본에 치명적이다. 그 자본은 이윤추구를 포기하든지 인간답게 살고자 하는 노동자의 요구를 억지로 들어주든지, 이 둘 중 ‘양자택일’을 해야 한다.

61. 따라서 유일한 대안은 그 기업이 가는 곳마다 모든 노동자들과 연대하여 통일된 조건을 요구하는 것이다. 경쟁을 그만두는 것, 이것이 ‘노동조합’의 원초적 존재이유다. 즉 ‘경쟁과 분열’을 통해 지배와 착취를 강요하는 자본에 맞설 수 있는 것은 노동자 간 ‘경쟁의 지양’을 통한 단결과 연대뿐이다. 이것만이 노동자의 유일한 무기다. 이런 본질을 모든 노동자들이 꿰뚫어보고 실천하지 못한다면 노사간 힘겨루기는 결과가 뻔하다.

66. 그렇다면 대부분의 사회구성원이 문제제기조차 않고 굳게 내면화화한 ‘경쟁 이데올리기’에 제대로 맞서는 방법은 무엇인가? 그것은 일차적으로 ‘탈경쟁’이 자아내는 모중의 두려움을 정면으로 꿰뚫으면서 넘어가는 것이며, 다음에는 ‘연대의 실천을 통해 그 두려움의 축소와 에너지의 분출을 직접 경험하는 것이다.

72. 경쟁이 낳는 비극 중 하나는, 타자의 불행을 자기 행복의 기초로 삼는 일이다. 경쟁이 최대 비극은, 서로 경쟁하는 가운데 모두 공멸한다는 점이다. 스스로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80. 라이벌 기업, 경쟁 회사가 죽어야만 내가 살아나는 그런 게임이다. 그 말은 거꾸로, 우리 회사가 패배해야만 경쟁사가 살아남는다는 말이기도 하다. 그렇게 치열한 생존게임을 하는 가운데, 우수한 회사는 우수한 대로 좀 못한 회사는 좀 못한 대로 자기가 부리는 노동력을 효과적으로 지배한다. 전체적으로 보면 경쟁 원리를 통해 1등부터 꼴찌 회사까지 자본의 지배를 별 저항 없이 잘 받아들이게 만들 수 있다. 이게 바로 경쟁의 본질이다. 즉 경쟁이란 자본의 지배를 위한 수단이다. 

81. 현실 자본주의 경제가 돌아가는 원리가 이러하니, 갈수록 사람들이 피곤해지고 삶이 무의미하게 느껴질 수밖에 없다. 그런데도 우리는 ‘경쟁은 필연이고 좋은 것이니 해야만 한다’고 말한다. 이제부터 이런 생각은 버려야 한다. 그런 생각은 결국 자본과 그 대리인들, 대리 조직들이 만들어낸 것에 불과하다. 원래 사람이 살아가는 원리는 경쟁이 아니라 협동이다. 서로 돕고 나누는 가운데 온갖 역경도 이겨내며 같이 살아온 것이 인류의 생존방식이었다.

82. (생존)경쟁은 필연이 아니라 자본이 자신의 필요에 따라 만들어낸 것이다. 나아가 일단 자본이 요구하는 경쟁에 빨려들다 보면 처음엔 공정 경쟁으로 출발하는 것 같지만 결국은 불공정 경쟁으로 갈 수밖에 없다. 그리고 처음엔 적절한 경쟁으로 가는 것 같지만 나중에 지나친 경쟁으로 가게 되어 있다. 심지어 둘 다 죽을 듯 내달리다가 살기 위해선 먼저 무릎을 꿇고 피하라는 식의 공멸적인 ‘치킨 게임’으로 치닫기도 한다. 이처럼 지금의 경쟁은 상생의 경쟁이 아니라 공멸의 경쟁이다.

124. 니묄러 목사의 고백은 한 개인의 양심과 철학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지적하기도 하지만, 사실은 소통과 연대의 중요성을 특별히 강조하고 있다. 당장 내 일이 아니라고 타자의 고통을 외면하는 순간 우리는 탈연대를 실천하는 셈이다. 그렇게 우리는 상호 고립되고 원자화한다. 그렇게 될수록 지배자들의 힘은 더욱 강해진다. 반면 아무리 작은 일이라도 타자의 고통이 나의 고통임을 느끼면서 소통하고 연대하는 순간, 우리의 힘은 두 배 이상으로 커진다.

그러면 여기서 이런 질문이 필요하다. 사태의 본질이 이러한데도 왜 우리는 대개 소통과 연대를 하지 않고 경쟁과 분열에 빠지고 마는가? 그것은 앞서도 말했지만 우리가 기존 시스템, 즉 기득권 경쟁을 강제하는 사회경제 구조 자체를 바꾸려 하기보다는 그 속에서 좀 더 높은 자리를 차지하는 것을 인생의 목표로 삼기 때문이다. 왜 그렇게 될까? 그것은 우리가 ‘어떻게 감히 내가 이 구조를 바꿀 수 있단 말인가?’하고 아예 처음부터 체념하기 때문이다. 또한 그것은 우리가 ‘나도 저 위의 높은 사람들처럼 강자가 되어 기득권을 맘껏 누려야지’라고 욕망하며 ‘강자 동일시’ 태도를 취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왜 우리는 변화를 꿈꾸기보다 이런 강자 동일시의 태도를 갖게 될까? 그것은 한편으로 변화를 꿈꾸던 사람들조차 좌절하거나 핍박을 받고 상처를 받는 것을 보았기 때문에, 그리고 다른 한편으론 그저 주어진 현실 구조에 잘 적응하여 상부(권력자)로부터 인정받고 출세한 사람을 보면서 ‘나도 (저 사람처럼)할 수 있다’는 꿈을 꾸기 때문이다. 요컨대 저항과 억압에 대한 두려움, 그리고 성공한 자에 대한 부러움이 한데 섞인 결과, 우리는 ‘강자 동일시’ 심리를 강하게 내면화한다. 

149. 초중고 학생들이 단지 아직 어른이 아니라는 뜻에서 미숙한 학생이 아니라, ‘나날이 자라는 과정에 있는 하나의 인격체’임을 가르치지 않는다. 아이들을 미숙아로 보는 관점은 아이들을 통제의 대상으로 만든다. 그러나 아이들을 성숙과정에 있는 인격체로 보는 관점은 아이들이 스스로 책임성 있고 자율성 있는 삶의 주체로 성장하도록 곁에서 도와주게 한다. 두발 단속이나 복장 단속, 지각 단속, 술 담배 무조건 금지 등과 같은 각종 통제는 아이들을 삶의 주체로 보는 거시 아니라 불신과 감시의 대상으로 보는 것이다. 단속이나 통제를 우선시하기 전에 아이들이 스스로 토론하고 현실의 문제점을 정리해 스스로 대안이나 해결책을 찾아가도록 조언하는 방식이 옳다.

152. 심지어 생활환경을 정리하고 청소하는 일마저 벌칙의 일부로 만듦으로써, 그것이 마치 죄인들이 하는 일인 양 가르치고 만다.

155. 사실 학교란 이래야 한다. 그것은 참된 배움의 과정을 체험하면서 이 세상에 살아 있다는 것이 얼마나 좋은지, 친구들과 함께 아무 걱정 없이 어울려 논다는 것이 얼마나 신나는 일인지, 수업 시간에 사회와 자연과 언어나 수학을 하나씩 알아가는 것이 얼마나 기쁜지 느끼면서도 내가 무얼 잘하고 무얼 하고 싶은지 서서히 깨달아가는 것이다. 자아발견과 시민 소양, 바로 이것이 교육의 기본 방향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자아발견이란 내가 좋아하는 것, 내가 잘할 수 있는 것, 내가 의미를 발견하는 것을 찾으며 나도 이세상에서 뭔가 보람을 느끼며 살 수 있는 소중한 존재임을 깨닫는 것이다.

156. 사회와 역사는 어떻게 생겼으며 윤리와 도덕은 무엇인지, 이 사회에서 더불어 살아가는데 필요한 것은 무엇인지를 알아가는 것이다. 나중에는 공동체를 위해 뭔가 작은 기여라도 할 수 있게 역량과 태도를 길러가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159. 오컨대 꿈의 발견, 실력 증진, 사회헌신, 바로 이 세 가지 내용을 갖고 아이들과 함께 행복하게 인생 여행을 하는 것, 이것이 곧 건강한 교육이요 배움이다.

167. 이런 뒤틀린 사랑은 삶을 과정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결과로만 보기 때문에 생긴다. 날마다 아이들의 성장이나 변화를 자상하게 보면서 서로 아기자기한 대화와 소통을 통해 매 순간 삶의 기쁨, 존재의 기쁨, 관계의 기쁨을 누리는 것이 아이와 어른이 모두 행복해지는 길이다.

180. 반면 꿈의 길을 가는 자는 어떠한가? 꿈의 길을 가는 이는 다른 사람의 평가나 시선에 맞추어 살지 않는다. 자신이 좋아하거나 잘하는 일, 아니면 사명감을 느끼는 일에 일관되게 매진한다. 혹시 부모가 경제적으로 뒷받침을 못해준다 하더라도 마음의 지지만 있다면 얼마든지 용기 있게 달려 나간다. 혹시 마음의 지지가 없더라도 내가 갈 길은 꼭 간다. 꿈이 확실하다면 당장은 힘들지만 나중엔 부모조차 그 일관된 마음에 감동하고 마침내 지지의 눈물을 흘릴 때가 온다. 자신의 꿈을 이루고자 하는 이는 자신의 실력을 키우기 위해 막노동도 마다 않는다. 부모가 밀어준다면 더욱 좋지만 그렇지 않아도 즐겁다. 막노동을 하면서 몸은 힘들지만 마음은 기쁘다. 자신이 어디로 가야 할지 방향을 알고 어떤 선생님을 찾아 배워야 할지 알기 때문이다. 남들이 말하는 일류대가 아니라도 좋다. 내 꿈을 이루는 데 도움을 주는 훌륭한 선생님이라면 서울이나 지방, 국내나 해외를 가리지 않고 달려갈 자세가 되어 있다. 그렇게 고생해서 목표를 갖고 찾아간 선생님에게 배우는 학생은 일 분 일 초라도 아깝고 소중하다. 선생님의 말씀이 귀에 쏙쏙 들어온다. 실력이 갈수록 향상되며 새로운 배움을 얻는 기쁨을 누린다. 꿈의 길을 걷는 이는 꿈을 꿀 때부터 그리고 그 길을 걷는 모든 발걸음이 즐겁다. 나중에 꼭 성공해야 기쁜 게 아니다. 결과나 속도가 아니라 과정이고 느낌이다. 이렇게 열심히 가다 보니 실력은 증진되고 어느새 선생님이 “자네 실력을 보아 하니, 이제 내 조교로 따라 다녀도 되겠군”이라 하고 새 길이 열린다. 이 사람은 비록 날마다 호화판 뷔페 음식을 먹지는 않지만 된장찌개에 김치를 먹더라도 행복하다. 비록 세계적 유명인사가 되지 않더라도 자신의 마을이나 지역에서 이웃에게 유익한 일을 하면서 자신의 꿈을 실현할 수 있다. 이게 사회 헌신이다.

202. 기엄들은 그 ‘기업의 사회적 책임’도 경쟁력이나 이미지 향상에 도움이 되는 만큼만 숭행할 수밖에 없는 근원적 한계를 갖고 있다.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지려고 하는 양심적 기업이 물불을 가리지 않고 생산성을 높여 경쟁력을 확보하는 기업을 이길 가능성은 낮기 때문이다. 따라서 ‘기업의 사회적 책임’조차 일부 기득권층에 속하는 기업들의 배부른 소리에 지나지 않는 사침품인지도 모른다.

중요한 것은 사람들이 ‘두려움’으로 인하여 서로 살벌하게 경쟁하는 것만이 유일한 삶의 전략이라 믿고 따른다는 점이다. 서로가 서로에게 경쟁자로 행위하고 또 그러한 경쟁을 당연시하는 것, 이것이야말로 지배적 시스템에 ‘모두’ 지배당하게 되는 근본원리다.

그러면서도 소수의 기득권층은 사치와 향락에 젖어 세상이 얼마나 병들어 가는지 눈치 채지도 못하는 것, 바로 이것이야말로 자본주의 기업체제의 근원적 무책임성이 아니고 무엇인가.

219. 한편 독일 베를린에 있는 ‘제너시스 연구소’의 설립자 페터 슈피겔은 <더 나은 세상을 여는 대안 경영>에서 ‘기업의 사회적 책임 2.0’을 이야기한다. 그것은 기업들이 이윤 추구 과정에서는 별 짓을 다하다가도 느닷없이 사회적 책임을 다한다는 이름 아래 온갖 예쁜 짓만 하는 척하는 자기기만을 그만두고 아예 처음부터 ‘사회혁신적 사업’을 성공적으로 수행함으로써 경제와 사회의 조화를 일관되게 추구하자는 것이다. 일례로 가장 가난한 농촌 여성들에게 무담보 소액대출을 해주어 자립할 수 있게 도와준 ‘그라민 은행’, 전기가 잘 들어가지 않아 비싼 에너지 비용을 내야 했던 오지의 시골 마을에 친환경적이고도 값싼 태양관 셀을 높은 장대 위에 달아 문제를 해결한 ‘그라민 샥티’ 사업 같은 것을 들 수 있다.

기후위기, 사회위기, 금융위기, 경제위기, 정치위기 등 각종 위기가 우리 삶을 위협하는 오늘날, 경제 문제나 사회 문제, 나아가 생태 문제를 분리해 보아서는 올바른 해답을 찾을 수 없다. 이것은 마치 빛의 3원색인 푸른색, 붉은색, 초록색이 하나로 잘 섞여 흰색의 밝은 전망을 만들어내듯 경제, 사회 생태가 조화와 균형으로 통합되어 참된 희망을 만들자는 말이기도 하다. 이러한 사회 혁신의 밑바탕에는 사람이나 자연을 더 이상 돈벌이의 수단으로 보지 않고 삶의 주체, 즉 소중한 생명체로 바라보는 근본적 시각 전환이 깔려 있다. 시각이 바뀌고 개념이 바뀌면 길이 보인다.

233. 문제는 죽어간 노동자만이 아니다. ‘아직’잘리지 않거나 ‘아직’ 살아 있는 노동자들은 과연 행복하게 살고 있는가? 혹시라도 일중독에 빠져 몸은 살아 있되 정신은 죽은 거나 다름없는 ‘좀비’가 아닌가? 나아가 그 노동자들이 만든 휴대폰과 컴퓨터, 자동차를 별 생각 없이 잘 쓰는 소비자들은 어떠한가? 혹시라도 ‘돈이면 안 될게 없다’거나 ‘어디, 공짜 폰이 없나?’라며 소비중독에 빠진 건 아닐까? 돈벌이 경제가 번창하는 원리는 이렇다. 소비자들이 소비중독에 빠질수록 노동자들은 일중독에 빠져들어야 하고, 노동자들이 일중독에 빠져들수록 소비자들이 소비중독에 빠져야 한다. 과연 우리는 노동자의 고통과 죽음을 외면한 채 소비세계 속의 편리만 추구하며 살 것인가.

238. 그렇다면 노동자와 노조를 무시하거나 파괴할 것이 아니라 그들의 목소리에, 그들의 고통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파괴할 것은 노동조합이 아니라 독점재벌 체제이며, 이윤을 위해 사람과 자연을 파괴하는 자본이다.

335. 일리치 선생에 따르면 평화에는 두 가지 정의가 있다. 하나는 가진 자, 위로부터의 정의이고 다른 하나는 기층 민중, 아래로부터의 정의다. 전자는 ‘평화의 유지’를 강조한다. 즉 온 세상이 자기들 뜻대로 굴러가는 것, 아무도 기존질서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고 잘 따르는 상태, 바로 이것이 위로부터의 평화 개념이다. 후자는 ‘평화로이 내버려두어져 있기’를 평화로 보는 것이다. 즉 세상 살림살이를 민중이 스스로 만들어가는 그대로 제발 그냥 놔두라는 것이다. 풀뿌리 민중의 삶의 자율성, 바로 이것이 아래로부터의 평화다.

그중엔 물론 엉터리도 있고 시행착오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국가가 나서서 일제고사니 평가제도니 하면서 ‘간섭’하지 않기만 하면 풀뿌리 민중은 진정 올바른 교육의 길을 토론하고 모색하여 만들어나갈 것이라 확신한다. 이것이 바로 교육에서 참된 평화가 아닐까. 

339. 내가 나 자신을 발견하는 것은 그대의 눈에서 비롯한다는 것을 말입니다. (…) 나라는 존재가 당신에게 선물이 되게 하는 것은 당신인 것입니다. (…)나의 존재가 누군가에게 선물이 되지 못하면 나는 온전한 인간에 이르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ㅡ 이반일리치

그렇게 형성되는 관계, 즉 선물의 관계가 바로 ‘공동체’다.

342. 일리치 선생에게 우정과 환대는 하나다. 우정, 공동체적 인간관계, 환대, 이것은 인간다운 삶, 즉 인간성의 핵심 요소다. “사람을 환대한다는 것, 즉 다른 곳에서 온 그 누군가를 기꺼이 받아들여서 우리 집 문지방의 이쪽으로, 여기 이 침상으로 안내하는 것은 인류학자들이 확인한 여러 특성들 가운데 가장 보편적인 것 중 하나로 보입니다.”

345. 우리들의 모든 삶의 과정이 ‘상품화’한 것이 바로 오늘날 ‘서비스 경제’라 불리는 것이 아닌가. 다시 말해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친밀함과 우정, 환대, 사랑의 관계를 만들고 확인하고 나누던 행위가 오늘날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모두 ‘서비스 경제’라는 이름으로 돈벌이 수단이 되고 있다. 예컨대 아이를 잉태하거나 낳는 행위(정자/난자 은행, 산부인과 병원), 아이를 키우는 행위(유아원, 놀이방, 학교, 학원), 식의주 등 살림살이 행위(식당, 세탁소 주택 시장), 어려울 때 돕기(금융, 사채, 보증, 보험), 문화 향유(콘서트, 콩쿠르), 여가(여행, 관광, 엔터테인먼트), 소통(정보통신, 전화, 인터넷), 그리고 심지어 사랑 행위(성매매, 전화방, 섹스 쇼)까지도 온통 ‘서비스 경제’속으로 편입되고 말았다. 그 결과 서비스는 있되 참된 봉사는 없고, 학교는 있되 참교육은 없다. 또 고급 아파트는 있되 참살림은 없고, 레스토랑은 있되 참 먹을거리는 없다. 사실이 이럼에도 오늘날 주류 경제학에서는 서비스 경제, 즉 3차산업이 발절할수록 ‘선진국’이라는 잘못된 관념이 지배하며 현실 삶을 피폐하게 한다. 따라서 지금부터라도 이런 환상에서 탈피하여 삶의 자율성, 삶의 친밀성, 삶의 직접성을 복원해야 한다.

삶의 기쁨은 돈 주고 간편하게 해결하는 데서 오는 것이 아니라 좀 귀찮더라도 스스로 만들어가는 과정 속에 있다는 것, 이 또한 일리치 선생이 우리에게 준 소중한 가르침과 일치하지 않는가? 나는 올해도 작은 텃밭에서 손수 일군 감자를 직접 캐고 삶아서 사랑하는 친구, 이웃과 함께 내가 직접 구운 소금에 찍어 맛있게 먹을 것이다.

355. ‘뿌리 뽑힌’ 삶을 사는 고르에게 존재의 정체성 문제는 늘 고통이었다.

357. 질문하고, 놀라고 의심하고 분노하는 것(인간적 감수성)은 삶의 원동력이자 마음의 문을 여는 길이다. 앙드레 고르

359. 도린이 암에 걸렸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 사실을 ‘인정’한 고르는 도린을 성심껏 돌보고자 함께 ‘생계노동’을 하던 파리를 떠나 시골로 간다. 도린이 없으면 “다른 모든 것이 무의미하고 무가치”하기에, 고르는 “본질적인 것에 집중하기 위해 비본질적인 모든 것을 포기”해야 했다. 그리하여 “삶을 미래로 자꾸 미루지 말고” 가능한 한 “매순간마다 완전한 삶을 살기 위해” 고르는 초심으로 돌아간다. 이제 검소한 살림, 유기농 자급자족, 여유로운 시간, 나무 가꾸기, 진솔한 대화, 저술 활동, 친교 활동, 이런 것이 그들의 삶을 재구성했다. 생태주의는 그들에게 삶의 방식이자 일상적 실천이 되었다. 
‘삶이 최고의 부’이기 때문이다. 결국 그들에게 사랑과 죽음은 같은 것이었다. 마치 사랑(L’amour)과 죽음(La mort)의 불어 발음이 같듯 말이다. 거기서 고르는 도린을 사랑으로 돌보았고, 또 서로 사랑을 느끼며 죽을 때까지 왕성한 글쓰기를 했다.
하지만 ‘기술의 과잉 속에 인간적 결핍’이 나오듯 ‘이론의 과잉 속에 인간적 결핍’이 생기지 않도록 늘 유의했다. 그들에게 사랑과 저작, 생활, 죽음은 모두 같은 뜻이었다.

368. 더 이상 ‘일류대학’이나 ‘일류직장’을 목표로 삼아선 안 된다. 우리가 진정 추구할 것은 ‘일류인생’이다. 그것은 꿈의 발견, 실력 증진, 사회 헌신의 3요소로 구성된다. 일류대학이나 일류직장은 소수만 성공하지만 일류인생은 누구나 할 수 있다. 나는 내 아이가 경쟁의 승자가 아니라 사랑의 주체가 되기를 바란다.





바람이 불기 시작한 시대

애니메이션이 없었다면 그림 같은 걸 그리지 않았을 사람이 애니메이션을 하고 있는 시대가 지금입니다. 서브컬쳐는 다시 서브컬처를 낳습니다. 그렇게 이차적인 것을 낳을 때 2분의 1이 되고, 다시 4분의 1, 8분의 1이 되며 점점 엷어집니다. 그것이 지금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이 세계를 어떤 식으로든 받아들일 때, 자신의 눈으로 실물을 직시하지 않고 간단히 ‘뭐 사진으로 됐잖아’ 해버리는 거죠. 사진도 색이나 음영을 얼마든지 바꿀 수 있으니, 자기 좋을 대로 만들어냅니다. 그러다보니 정말 자신의 눈이 어떻게 느끼는지 멈춰서 바라보지 않습니다.


 고화질 텔레비전은 인간의 눈에 보이지 않는 것까지 보여줄 수 있습니다. 그렇게 거짓에 거짓을 더해 뭉쳐놓으니 세계가 인간에게 미치는 충격은 점점 엷어져 16분의 1이 되고, 64부의 1이 되고, 끔찍한 결과에 다다른 느낌입니다.전기가 끊기고 영상이 사라지고 정보가 막히면, 모두 불안하고 병에 걸려 죽어버릴지도 모릅니다. 그래도 세계는 존재하겠지요.



 바람이 불기 시작했습니다.최근 20년 동안, 일본에서는 경제 이야기만 해왔습니다. 마치 터질 만큼 물이 가득 찬 풍선처럼, 꼼짝도 할 수 없었습니다. 언제 터질까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영상과 게임과 소비에 빠져들면서, 개를 키우고 건강과 연금 걱정을 하고 조바심을 내면서, 결국 경제 이야기만 해왔습니다. 불안만큼은 착착 부풀어 올라 스무 살 젊은이와 예순 살 늙은이가 다르지 않게 되었습니다.


 ‘바람이 불기 시작한 시대’의 바람이란 상쾌한 바람이 아닙니다. 무섭고 요란하게 지나가는 바람입니다. 죽음을 안고 독을 품은 바람입니다. 인생을 뿌리째 뽑으려는 바람입니다.


 우리는 시험을 치르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정말 21세기의 막이 올랐습니다. 역사의 수레바퀴가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살아가기 어려운 시대의 막이 오른 것입니다. 저는 거기에서 눈을 돌리지 않으려고 애쓰는 게 고작입니다. 


...


 요즘 정치가 어떻다느니 사회 상황이 어떻다느니 대중매체가 어떻다느니 세상 전체만 논할 게 아니라, 자신이 할 수 있는 범위에서 무엇을 할 수 있을까를 생각하면 된다고 봅니다. 그러면 상당히 여러 가지 것들이 변하지 않을까요?


책으로 가는 문, 


철학이 있는 이야기를 들려주는 할아버지

미야자키 하야오(Miyazaki Hayao)





훗날 피핀은 그 눈에 대한 첫인상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그 눈의 안쪽에는 여러 시대에 걸친 기억과 오랫동안 꾸준히 사고로 가득 찬 거대한 샘이 있는 것 같았다. 그러나 눈동자는 거대한 나무의 바깥쪽 잎새에 부딪히는 햇살처럼, 또는 아주 깊은 호수의 잔물결처럼 현재의 빛을 내뿜고 있었다. 잘은 모르지만 그것은 마치 지상에서 자라는 어떤 것, 잠들어 있다고도 할 수 있고 또는 자신을 뿌리와 나뭇잎 사이나 깊은 대지와 하늘 사이의 어떤 것으로 느끼는 그것이 갑자기 깨어나서는, 무한한 세월에 걸쳐 자기 내면의 일에 쏟아온 바로 그 느긋한 관심의 눈길로 지금 우리를 살펴보는 것 같았다.’

난 내가 안다고 생각하던 많은 것을 잊어버렸다가 다시 배웠지. 멀리 떨어진 많은 것들은 볼 수 있었지만 바로 가까이 있는 많은 사실들은 볼 수가 없었어. 

그것들은 산 위에 내리는 비처럼, 초원을 스치는 바람처럼 지나가 버렸네. 
그 시절은 구릉지대 뒤 서편으로 기울어 그림자 속으로 사라졌네.
누가 불타는 죽은 숲의 연기를 거둘 것인가.

대개는 그 목소리를 듣는 것이 즐거웠다는 사실만을 기억할 뿐이었다. 그 목소리가 하는 말은 모두 합당하고 현명하게 들렸으며, 따라서 자신들도 그렇게 현명해 보이기 위해 당장 그에 동의하고 싶은 욕망에 사로잡혔다. 다른 사람들의 말은 그 목소리와 대조되어 더욱 투박하고 귀에 거슬리게 들렸다. 만일 그 목소리를 거부하는 자들이 있으면, 주문에 걸려든 사람들의 마음에 분노의 불길이 일어났다. 어떤 이에겐 그 목소리의 주문이 그들 자신에게 말하는 동안에만 마법이 지속되기 때문에, 다른 이들이 그 목소리를 듣고 취하는 동안에는 마법사의 계략을 환히 들여다본 것처럼 빙그레 웃는 경우도 있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목소리에 매혹되고 말았다. 그 목소리의 주문에 정복당한 사람들은 그 목소리와 멀리 떨어져 있을 때도 마법이 지속되어 그 부드러운 소리가 자신에게 속삭이며 재촉하는 것을 들을 수 있었다.
 그 목소리를 듣고도 동요되지 않는 사람은 없었다. 정신과 의지를 갖고 노력하지 않으면, 그 목소리의 지배자가 통제하는 한 누구라도 그 목소리가 간청하고 명령하는 바를 물리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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