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 철학은 질문에서 시작된다. 실용주의적 지식이란 현실에 순응해서 돈벌이하는 데에 도움이 되는 지식을 말하는 게 아니라, 인간이 처한 한계에 도전하면서 인간의 가능성을 확장하는 창조적 지식이다. 진정한 실용은 돈 몇 푼으로 가늠하는 것이 아니라 삶 전체에 대한 자기 가치의 인식과 창조로 이어지는 것이어야 한다. 이 내용에 동의한다면 철학이 지닌 실용적인 측면을 이해할 수 있다. 철학이야말로 자기 가치의 인식과 창조를 이루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는 학문이기 때문이다.
26. 무슨 질문을 던져야 하는가? 여러 물음이 있을 수 있겠지만 철학의 역사에서 자주 만날 수 있는 질문은 크게 서너 가지로 정리할 수 잇다. 첫째는 나는 누구인가, 어떻게 존재하는가이다. 둘째는 세상은 어떻게 만들어졌고 어디로 흘러가는가이다. 그리고 셋째는 나의 도덕적 자아를 어떻게 실현할 것인가이다. 넷째는 어떻게 인식할 것인가이다. 결국 압축하면 나와 세상의 관계에 대한 끊임없고 치열한 문제제기들이다.
(…) 마차를 끄는 것은 말이다. 마차가 말을 끌고 가는 걸 막는 게 철학 본연의 역할이다. 철학을 하면서 그런 주체성을 마련하지 못하면 사물의 종이 되거나 객체가 되어 수동적으로 살아간다. 아무리 돈이 많아도 돈을 끌고 가는 것이 사람이어야 한다. 돈이 사람을 끌고 가는 것을 막는 게 철학인 것이다.
36. 소크라테스는 상대주의의 폐해나 도덕적 타락을 직설적으로 비판하거나 절대주의를 노골적으로 주장하지는 않았다. 그가 선택한 방법은 스스로 깨닫게 하는 것이었다. 이는 대단히 중요한 지점이다. 강요하거나 가르치려 드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문제를 자각하게 하는 것, 이것이 바로 철학의 힘이다. 철학의 본질은 나와 세상의 문제를 ‘스스로’깨닫는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바로 철학의 힘을 제대로 보여준 최초의 철학자였다. 그리고 그 힘과 가치는 지금도 유효하다.
47. 의심에 의심을 거듭한 결과, 데카르트가 얻은 건 아주 사소한(?) 결론이었다. 모든 것을 의심하고 있다는 사실과 그 의심의 주체가 바로 나라는 사실에는 어떠한 의심도 허용되지 않았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는 짧은 문장 하나는 그렇게 ‘중세를 상대로 한 결별통보’가 되었다. 기도로 얻은 것도, 은총에 의한 것도 아니었다. 이것은 바로 ‘생각하는 나’에 의해 얻어진 진실이다. 교회의 권위가 개입할 수 없는 인식의 출발이었다. 그게 바로 확실성이다.
이렇게 데카라트에 의해 근대의 싹이 텄다. 근대정신의 독립선언과 같은 이 선언으로 ‘자유로운 개인’이라는 근대 및 현대 정신의 바탕이 마련되었다. 이 사유의 혁명은 외부로부터 주어진 것이 아니라 바로 나 자신이 이끈 것이기 때문이다.
47. 영국의 경험론이 이뤄낸 것. 생각의 혁명은 현실의 혁명으로 이어진다. 이전까지 눈치보며 묵묵히 순응해야만 했던 권위에 대해 사람들은 의심하기 시작했다. 비로소 ‘자아’의 의미와 가치를 획득한 사람들이 현실을 깨우치고 여전히 권력의 절대성에만 집착하는 기득 세력에 대해 온몸으로 저항하게 된 것이 프랑스 혁명이다. 물론 당시의 여러 정치적, 경제적 상황들이 작동되었지만 데카르트의 합리론에서 발아되고 계몽주의로 각성된 시민의 사유가 혁명의 간과할 수 없는 동인이다. 그러니 철학이 부재한 시대와 민중은 켤코 역사를 만들어내지 못한다.
51. 생각이, 철학이 혁명을 이끌어낸다는 것은 그저 선언적 구호가 아니다! 어떤 사상과 철학을 갖느냐 하는 것은 그래서 매우 중요하다.
(…) 현대철학이 다양해진 것은 그만큼 인간의 지성이 발달했기 때문이기도 하고 사회가 빠른 속도로 다변화되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더 이상 주류적 사상이란 무의미해졌기 때문이다. 혹은 하나의 사상으로 세상을 읽어내는 것이 불가능해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다양한 사상의 진화가 결국은 다양한 세상의 독법이다.
59. 익스트림 스포츠의 매력은 무엇일까? 남들이 보기에는 아찔하고 위험천만한데, 당사자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깎아지른 절벽을 맨손으로 오른다. 생명의 위험을 무릅쓸 만큼의 가치가 있을까? 익스트림 스포츠를 즐기는 사람들은 그 순간만큼은 전적으로 자신이 이 세상의 유일한 존재가 된다고 고백한다. 자연에 정면으로 맞서기도 하고 자연을 껴안기도 하면서 목적지를 향해 전진하는 주체적 자아를 만끽한다고 한다.
누구나 쉽고 편한 걸 원한다. 그러나 그 편안함과 편리함은 자신이 전적으로 주체가 되는 것을 막기도 한다. 익스트림 스포츠의 매력은 편안함을 거부함으로써 얻는 주체성이다. 그 짜릿함을 맛보기 위해 무모하고 힘겹게 도전하고 싸운다.
철학은 정신적 측면에서의 익스트림 스포츠라고 할 수 있다. 철학은 끊임없이 물음을 던지고 스스로 그 답을 찾아 나선다. 정답도 없고, 스승도 없다. 임제선사의 말처럼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나한을 만나면 나한을,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죽여야 하는’ 엄중한 승부다. 위대한 사상가가 암벽일 수 있고, 심오한 철학자가 태풍일 수 있으며, 해박한 스승이 무서운 파도일 수 있다. 철학은 그런 치열함을 통해 성장한다. 세상과 삶에 대한 탐구와 천착은 결국은 자아를 발견하고, 자아와 세상의 관계를 찾아내기 위함이다. 그러나 당장의 실익은 가져오지 않는다. 평생의 시간이 걸릴 수도 있다. 도대체 그런 무모한 일이 또 있을까. 그런데도 아주 오래전부터 사람들은 철학의 문제를 회피하거나 거부하지 않았다.
공자는 일찍이 <논어> 가인편에서 ‘아침에 도를 만나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고 확언했다. 흔히 도에 방점을 찍지만 정말 중요한 것은 ‘내가’ 만난다는 사실이다. 나를 대신해서 다른 사람이 만나주는 게 아니다. 그래서 기꺼이 목숨을 내놓는 일도 마다하지 않겠다는 확신을 다잡는다.
61. 철학의 있고 없음은 단순히 개인뿐 아니라 사회와 국가의 격을 나눈다. 그게 진정한 ‘국격’이다. 그러니 국격을 갖추려면 철학을 먼저 세워야 할 것이다. 기업 또한 기업철학부터 분명하게 정립해야 한다. 그래야 성공했을 때 길 헤매는 일 없이 경영자와 노동자가 모두 공생하는 발전모델을 이어나갈 수 있다.
철학은 관념이 아니라 실천적 삶의 방식이다. 또한 철학적 사유는 자아를 사회와 세계와 연대시킴으로써 이기적 자아에 스스로 갇히지 않고 보편적 존재로서 세계시민 의식을 실현하게 한다.
87. <종교> 신화는, 앞뒤 맥락을 살피고 당시의 상황을 고려해서 읽으면 역사와 사회, 인간관계가 총망라되어 있는 지혜의 보고다. 신화에는 사람들의 공통된 경험이 상징적인 의미로 담겨 있다. 이 경험은 인간의 근원적인 경험이기 때문에 상징을 걷어내고 신화를 읽으면 바로 우리 자신의 이야기가 된다.
88. 신화의 권위는 사람들이 그것을 통해 자신의 삶을 돌아보려는 태도를 지닐 때에야 비로소 가능하다.
178. <역사> 숙종이 막강한 권력을 행사하던 때였음에도 사관은 당당하게 기록했다. 역사를 기록하는 사람은 이런 기개가 있어야 한다. 또한 그런 기개를 받아들일 줄 아는 권력자의 도량과 그걸 보장하는 규범이 필요하다.
179. 두려워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조차 제대로 깨닫지 못하는 자들에게 펜을 쥐게 하면 칼 든 망나니보다 위험하다.
197. 역사의 가치는 인간이 무엇을 해왔는가, 그리고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를 반성함으로써 인간이란 무엇인가를 늘 깨어 있는 정신으로 스스로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프랑스가 잘났고 옳으며 우리가 못났고 틀렸다는 게 아니다. 다만 그 선택의 결과가 어땠는지를 통해 그게 얼마나 심각한 문제인지를 반성해야 한다는 뜻이다.
역사는 살아 있는 시간이며 그 속에서 살아 있는 인간의 좌표를 확인할 수 있다. 면면히 이어가야 하는 보편적 인간가치를 깨닫게 하는 역사는 그래서 인문학의 중요한 하나의 축이 된다.
거다 러너는 “역사를 아는 것이 당신 자신의 인생과 일에 의미를 부여하는 길이며, 자신의 과거에 무지한 사람들은 사회에서 어떤 대접을 받아도 아무런 저항을 하지 못한다”라고 강조했다.
199. 역사를 알아야 세계가 보인다. 그리스 경제위기와 우리 사회의 오해. 그리스 재정 위기가 이슈로 다뤄질 때, 우리나라 정치인과 경제인들은 그리스가 복지에 지나치게 돈을 퍼부어 경제위기를 자초했다고 진단했다. 특히 보수정당과 보수언론 그리고 재벌기업들이 앞다퉈 경제위기 진단에 매달렸다. 그러나 그리스는 유럽연합국 가운데 복지 수준이 매우 낮은 국가군에 속한다.
위기의 가장 큰 요인은 유로화 통일에 따른 통화가치 팽창의 위험성을 정치인이나 경제학자들이 제대로 경고하고 대책을 세우지 않고 오히려 그 거품에 빨대를 꽂아 자신들의 이익을 극대화했던 데에 있었다. 통화가치 팽창으로 인한 국부의 증가를 미래와 국력 증강을 위한 교육과 사회간접자본 등에 투자했어야 하는데 말이다. 결국 그리스 경제위기의 주범은 복지가 아니라 정치인과 경제인의 부패와 무능이었다. 그런데도 이 점을 제대로 지적하고 비판하는 기사가 이른바 보수언론에서 언급된 경우는 거의 없었다. 그러니 구독자들도 위기의 원인이 복지라고 받아들였을 것이다. 그리스와 대한민국을 오가는 무지와 사욕의 이중주다.
엄밀히 따지자면 그리스는 국가부채율이 100퍼센트가 넘어 유로존에 가입할 수 없었다. 그러나 골드만삭스로부터 자금을 지원받아 회계를 분식하고 파생상품을 조합해서 유로존에 가입했다. 유로화 도입을 고대하던 자산가들은 재산을 불렸지만, 국민 대부분은 밑바닥 하류생활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이른바 압정사회가 된 것이다. 압정처럼 대부분은 밑바닥을 구성하고 정치세력과 결탁한 소수 계층만이 엄청난 부를 독식했다. 그리고 부패는 독버섯처럼 자라났다. 세금을 징수해도 국고로 들어오는 돈이 일천했는데, 거둬들인 세금 중에서도 20퍼센트만 국고에 들어갈 정도로 부패가 만연했다. 그걸로 복지를 구현할 수 있었을까? 결코 아니다. 게다가 가계의 실질소득은 형편없었다. 그리스에는 사회적 도덕성이 부족했다.
202. 서로 다른 나라들이 연합하는 데에는 여러 가지 이유와 목적이 있다. 그러나 단순히 특정한 목적을 위해 연합하는 경우는 그 목적의 일부만 훼손되거나 흔들려도 쉽게 무너진다. 하지만 정신적 문화적 일치감은 그런 균열을 화학적으로 봉합해준다.
209. 애덤 스미스는 18세기 중반 당시의 중상주의 체제를 비판했다. 중상주의자들은 국내로 유입되는 재화의 총량을 극대화함으로써 국부를 신장해야 부강한 나라를 만들 수 있다고 주장했다. 자연스럽게 절대군주와 상공인들이 야합했다. 서로의 이익을 위해 담합한 것이다.
(…) 애덤 스미스가 비판한 것은 바로 상공업자의 이익과 국익을 동일시하는 사고방식이었다. 그가 <국부론>에서 주장하는 메시지의 핵심은 시장에 대한 정부의 간섭, 즉 약자를 억압하고 상공인들의 배를 불려서 국부를 증대시키려는 국가의 개입에 대한 비판이었다.
애덤 스미스는 아무리 재화의 총량이 증가한다 하더라도 시민의 삶이 나아지지 않는다면 아무 소용이 없다고 보았다. 다시 말해 그가 말하는 국부는 국민의 삶을 향상시키는, 그러니까 요즘 식으로 말하자면 국민 복지를 실질적으로 증대시키는 것이었다. 이 주장은 요즘의 경제민주화 개념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런데 기업과 상당수의 이른바 주류 경제학자들은 애덤 스미스를 내세우며 경제민주화에 반대하고 있다. 지금 신자유주의를 내결며 기업의 이익 수호에만 앞장서는 그들의 뻔뻔함과 무지함이 못내 씁쓸하다.
211. 사람들이 비난하는 것은 기업가들의 지나친 탐욕과 권력마저 돈의 힘으로 좌지우지하려는 무소불위의 야욕이지, 기업이 정당하게 이윤 추구하는 것을 비판하는 것이 아니다.
212. 스토아학파는 “인간은 스스로를 고립되고 분리된 존재가 아니라, 세계의 한 시민으로서 자연이라는 광활한 공동체의 한 구성으로서 간주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 거대한 공동체의 이익을 위해, 인간은 자기 자신의 작은 이익이 희생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언제나 기꺼이 받아들여야 한다”는 스토아학파의 가치에 대해 애덤 스미스는 사려분별이 자기이익 극대화를 뛰어넘어 ‘모든 덕목 중에서 개인에게 가장 도움이 되는’ 가치라고 보고 있다. 애덤 스미스는 분명하게 말한다. “인류애, 정의, 관대함, 공공정신은 다른 이들에게 가장 유용한 자질이다.”
213. 데이비드 리카도는 <정치경제학과 조세의 원리>에서 경제학의 핵심은 바로 소득 분배를 결정하는 요인에 대한 가장 적절한 해법을 찾아내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215. 제 집과 땅의 가격이 오를 때는 환호작약하다가 조금이라도 하락의 기미가 보이면 정부에 조처를 취하라고 압력을 넣는 사람들. 경제지들은 아예 그 선전장이다. 최대 광고주들 가운데 하나가 바로 건설 회사이기 때문이다. 왜 올랐는지, 그래서 어떤 이익을 취했는지, 왜 떨어지는지,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등을 분석하고 따지는 게 아니라 자산 계층의 이해관계에 휘둘린다.
216. 요즘 경제학을 주도하는 건 수학이다. 오로지 수학적으로 정교한 이론을 만드는 데에만 열중한다. 그런 수학이 경제학에서 맡는 역할은 주로 다양한 파생금융상품의 개발이다. 모든 것을 수학적 계산과 확률로 마른 수건 쥐어짜듯 조금이라도 더 이익을 내기 위해 금융 시장 바닥을 훑는다. 월스트리트를 점령한 건 그런 수학자들이고 그 수학자들을 고용해서 이익을 얻으려는 주주들이다. 경제학을 수학자들이 쥐고 흔드는 순간 경세제민으로서의 경제학은 사라진다. 거기에는 인간이 없기 때문이다. 그들은 결국 엄청난 금융위기를 불러왔고, 그 때문에 전 세계가 몸살을 앓고 있다. 경제학에서 인간에 대한 가치와 공공성이 증발했기 때문이다.
217. 당 태종은 구리로서 거울을 삼으면 의관을 바르게 할 수 있고, 일로써 거울을 삼으면 흥망의 원인을 알 수 있으며, 다른 사람을 거울로 삼으면 잃고 얻음을 밝힐 수 있다고 말하며 끊임없이 역사를 읽었다. 역사를 외면하는 군주는 폭군이나 무능한 임금이기 쉽다. 과거의 시간을 상실한 자는 현재와 미래를 읽을 수 없다.
역사는 과거의 시간과 현재의 시간의 연결이며 우리는 그것으로 미래의 시간으로 나아갈 수 있는 바탕을 얻는다. 이미 지나가버린 역사를 공부하는 까닭은 그 속에서 인간의 다양한 모습과 가치를 발견 할 수 있기 때문이며 그것이 나의 삶으로 내재화되어 나를 이끄는 힘이 되기 때문이다. 과거에 펼쳐진 역사적인 경험이 우리에게 지혜를 일깨우고 용기를 북돋워준다. 그러므로 역사를 공부하는 것은 과거의 사실을 바르게 이해함으로써 현재를 사는 나의 성장을 가능하게 해준다. 그리고 이는 곧 미래를 향한 바른 안목을 길러나가는 길이기도 하다. 과거는 현재로 이어지고, 현재는 다시 미래로 나아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크로체가 모든 역사는 현대사라고 했던 말은 의미심장하다.
“과거에 어떤 일이 이루어졌는지 모른다면 항상 어린아이처럼 지내는 셈이다. 과거의 노력을 무시한다면 세계는 늘 지식의 유아기에 머무를 것이다.” 로마의 정치가 키케로의 말이다.
역사는 거창한 것도 거대담론도 아니다. 역사는 바로 나의 인식의 바탕이며 내 삶의 모습이다. 헤겔은 정신의 자기발전으로서 단일하고 합법칙적인, 그 자신에 내재적인 과정으로서 역사를 설명했다. 그가 역사철학을 다룰 때, ‘개인의 자유’를 중심으로 일정한 법률이나 제도의 핵심을 찾으려 했던 것도 그런 까닭이다. 그래서 세계사를 관통하는 정신이 결국은 자기의식으로 귀환한다고 결론지었다. 그런 인식의 귀환은 놀랍게도 자신이 절대자와의 일치에 서 있다고 하는 절대적 확신이다. 따라서 그는 역사철학이 역사에서 살아가는 인간의 자기인식이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굳이 헤겔을 들먹이지 않아도 역사는 인간의 자기인식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나 자신을 아는 것이다. 그것은 나의 개인적 특수성을 넘어 인간으로서의 보편적 자기 본질을 안다는 것이고, 이를 통해 내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알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역사는 단순히 과거에 어떤 일이 있었는가를 기록하고 그 기록을 들춰보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무엇을 해왔는지, 인간이 무엇인지,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나의 삶 자체가 역사이며, 역사가 바로 나의 삶의 바탕이라는 인식이 없으면 우리는 부초처럼 또는 하루살이처럼 살아갈 뿐이다. 자기인식이 없는 내가 어떻게 주체적으로 능동적으로 살아갈 수 있겠는가. 그러니 역사를 외면한 나의 삶은 이미 파편화된 삶이다. 역사는 바로 나의 삶 그 자체다.
미국의 흑인작가 제임스 볼드윈은 역사를 이렇게 설명했다.
“역사는 단순히 과거에 관한 것이 아니다. 아니 과거와는 거의 상관이 없다. 사실 역사가 강력한 힘을 갖는 까닭은 우리 안에 역사가 있기 때문이고, 우리가 깨닫지 못하는 다양한 방식으로 우리를 지배하기 때문이며, 그리하여 말 그대로 우리가 하는 모든 일 안에 현존하기 때문이다.”
262. (과학) 과학은 그냥 관찰된 사실의 축적이 아니라 기존의 통념과 충돌하는 새로운 이론 체계이며 사실에 대한 의미화라고 할 수 있다. 발견된 사실과 기존의 이론 체계가 서로 충돌했을 때 과학은 비로소 진보한다. 다른 분야와는 달리 과학은 탄압이나 억제 등의 반시대적인 수단을 거부하고 객관적으로 우월한 체계를 따를 수 있다. 그것이 과학의 힘이다.
264. 과학이 이렇게 끊임없이 기존의 지식체계나 통념과 충돌하면서 유의미한 결실을 생산한다는 사실을 삶에 적용해보라.우리가 지식을 쌓아가는 것은 단순히 실용적 목적을 위해서가 아니다. 거기에 머물고 마는 것은 결국 또 다른 낡은 텍스트에 갇히는 것이다. 과학의 진정한 의미는 의심하고 도전하며 낡은 텍스트의 틀을 깨고 나오는 자유정신이다. 지식이 많을수록 오히려 더 편협해지고 남을 재단하고 평가할 뿐 아니라 상대방에게 자신의 지식을 강요한다면, 스스로 지식의 가치를 무너뜨리는 셈이다.
267. 나는 과학에서 중요한 것은 ‘무엇을 아는가’가 아니라 ‘어떻게 생각하는가’라고 본다. 그게 과학의 인문학적 요소이고, 인문학이 과학에 관심을 기울여야 하는 까닭이기도 하다. 과학은 왜 옳고, 어디까지 옳은지, 어디까지 믿어야 하는지를 인문학을 통해 탐색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358. 미술. 주문자의 눈이 아니라 ‘화가의 눈’으로 그림을 그리는 시대가 온 것이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자신의 눈으로 보고 느낀 것을 자기 방식으로 표현하는 것이지 기존의 법칙이 아니었다.
이렇게 해서 미적 판단의 기준은 ‘재현’이 아니라 ‘표현’으로 바뀌었다. 표현미의 시대가 온 것이다. 동시에 미적 판단이 객관에서 주관으로 변모했다. 이제는 ‘그리는 사람’이 주체가 된 것이다.
표현미에 가장 충실했던 그림들이 바로 ‘인상파 미술’이다.
(…) 19세기 후반의 서양미술은 현기증 날 만큼 빠른 속도로, 그리고 다양한 기법으로 확장되었다. 그 끝자락쯤에서 피카소, 마티스, 칸딘스키 등에 의해 대담한 화풍이 등장했다. 그들은 단순히 대상에 대한 느낌을 표현하거나 자신의 감정을 투사하는 것에 만족하지 않았다. 대담하게 자신과 세계를 대응시켰다. 이제 대상의 묘사는 그리 중요한 게 아니었다.
360. 해석은 반드시 감상자와 공유될 필요는 없다. 철저하게 자신의 해석일 뿐이다. 그러나 많이 공유될수록 많은 사람이 공감할 수 있을 터였고, 화가는 유명세를 누릴 가능성이 높았다. 그것은 현대서양정신이 ‘자유로운 개인’을 중심으로 발전했다는 점과도 무관하지 않다. 이런 상황에서 그림에 대한 미적 판단의 기준은 더 이상 재현미나 표현미가 아니라 인식미로 전환하게 된다. 이른바 현대미술이 인식미를 토대로 한다는 점을 깨닫지 못하는 한 추상화를 이해한다는 것은 정말 어려울 수밖에 없다.
결국 우리가 현대미술에서 당혹감을 느끼는 것은 구체적인 형태가 사라졌기 때문일 것이며, 때론 어떤 대상에 대해 우리가 일반적으로 지녔던 통상적 이해나 가치가 전도되는 당혹감 때문이다. 따지고 보면 별거 아니다. 그러나 제대로 알면 엄청나게 별거라는 것도 알 수 있다. 그림 하나를 통해 나와 세계의 관계 방식을 인식할 수 있고 게다가 나의 이성과 감성을 발동시킬 수 있다는 것은 아주 매력적인 일 아닌가? 표현미의 시대가 ‘화가의 눈’, 즉 그리는 사람을 주체로 세웠다면 인식미의 시대는 ‘관람자의 눈’으로 해석하면서 모든 개인이 각자 주체가 되었다는 점에서 획기적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도 관람자의 눈이 여전히 화가의 눈을 따라야 한다는 강박과 현대미술에 대한 이해 부족 때문에 우리는 여전히 현대미술을 어려워하는 것이 아닐까?
406. 음악. 베토벤이 자신의 생각을 음악에 담을 수 있었던 것은 그가 프랑스 혁명의 시기에 살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혁명정신의 전파와 함께 당시의 사회구조가 획기적으로 변하고 있었던 것도 그의 삶과 정신에 크게 영향을 끼쳤다. 또한 베토벤은 ‘자유로운 개인’이라는 시대정신을 선구적으로 받아들였다. 베토벤은 피아노 연주와 레슨 등으로 생계를 꾸려나갈 수밖에 없었지만 대신 자신의 음악세계를 구축할 수 있었다.
(…) 단순히 기질이나 기법의 차이가 아니라 그들이 발 담그고 있던 세상의 차이가 그들의 예술관과 태도를 서로 다르게 만들었던 셈이다.
445. 정치의 핵심은 권력을 얻고 유지하는 데 있지 않고 사람들 사이의 의견을 조율하고 갈등을 해결하는 데 있다. 그렇기에 정치는 관계 맺기다. 공자는 정치를 덕으로 하는 것이며, 진심의 문제이고, 백성의 신뢰를 얻는 것이라고 정의했다. 또한 정치는 그릇된 것을 바로잡는 것이며, 관료들이 솔선수범하는 것이고, 작은 허물을 용서해주며 현명한 인재를 등용하는 것이라고 했다. <논어-자로편>을 보면 초나라 대부 섭공이 정치가 무엇이냐고 묻자 공자가 “가까이 있는 사람을 기쁘게 하면 멀리 있는 사람이 찾아온다”고 대답했다고 한다. 정치의 궁극적 목표가 사람들에게 기쁨과 희망을 주는 데 있다는 평범한 진리를 강조한 셈이다.
465. <정치> 예전 잠수함에서는 남은 산소의 양을 측정할 수 없어서 토끼를 태웠다고 한다. 산소 결핍을 예민하게 느끼는 토끼가 반응하면 수면 위로 올라가야 했다. 게오르규는 예민한 감수성을 지닌 시인을 일컬어 ‘잠수함 속의 토끼’라고 비유하기도 했다. 이때 시인은 지식인으로 혹은 정치인으로 치환해도 무방하다. 사회적 불의를 경고하고 맞서 싸워야 할 사회적 의무를 지닌 사람들이다. 그러나 정의라는 관점에서 볼 때 토끼는 바로 사회의 약자들이다. 약자들의 고통을 외면하는 사회는 불의를 묵인하는 사회다.
467. 정의를 확립할 수 있는 가장 가시적이고 강력한 방안 가운데 하나는 바로 법이다. 법정신의 바탕은 바로 약자를 제도적으로 보호하는 것이다.
(…) 법은 힘센 자들의 폭력의 남용을 막는 것이다. 그것이 지켜지지 않으면 법은 존재의미가 없다. ‘무전유죄, 유전무죄’ 혹은 ‘집권무죄, 실권유죄’로 집행되는 법에 대해 우리가 분노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건 이미 국가로서의 존재 이유를 스스로 부인하는 꼴이다.
온전한 정의의 실현은 생각보다 쉽지 않다. 그러나 최소한 타인의 불행을 담보로 한 행복을 스스로 거부할 수 있다면 정의는 자발적으로 실행할 수 있다. 불의를 보고 침묵하는 것은 불의를 지지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곰팡이가 어둠과 습기를 좋아하듯 불의는 침묵 속에서 독버섯처럼 자라난다.
469. 정치는 정의를 수호하고 실현하며, 정의를 실천하려는 사람들을 돕는 일을 수행해야 한다. 정치가 정의를 수호하고 실천하는 체제를 견고하게 구축할 수 있어야만 시민은 모두 자유로운 개인으로서 자신의 인격적 삶을 실현할 수 있다.
473. 엄밀히 말하자면 한국 사회에서는 보수가 진정한 보수적 가치를 실천한 적도, 진보가 참된 진보적 가치를 실현한 적도 없다고 볼 수 있다. 미래의 한국 정치와 사회의 올바른 정립을 위해서라도 이 문제에 대한 정확한 인식과 이해는 필수적이다.
503. <경제> 자유방임은 그냥 내버려두라는 게 아니라 인간의 합리성을 토대로 최적화 가능성을 시장 스스로 실현할 수 있으므로 불필요한 간섭을 배제하라는 요구였다. 자유방임주의의 진정성은 바로 개별적 인간, 즉 자유로운 개인에 대한 신뢰와 권력의 비인격적이고 불합리한 억압과 간섭에 대한 저항이었다. 이전의 관행이던 왕권과 귀족의 업압과 독점의 폐단을 배격하라는 것이 이 문제의 핵심이었다. 그것을 보지 못하고 오로지 자신의 이익만을 극대화하기 위해 모든 규제와 간섭을 철폐해야 한다는 것은 자유방임의 뜻을 왜곡하는 것이고 실제로 그런 결과를 초래해왔다.
현실에서 보이지 않는 손은 바로 기업들의 로비와 그들의 대변자인 정부의 경제정책 담당자, 그리고 주류 경제학자들의 카르텔이다.
504. 어느 정도의 차이는 있을 수 있겠지만 본질적으로 인간의 합리성은 보편적이다. 그런데 그걸 무시하고 오로지 자신들만 그런 합리성을 가졌다고 주장하는 것은 자기 이익을 위한 궤변에 불과할 뿐이다. 애덤 스미스는 그런 편견에 대항하여 인간의 보편적 합리성을 강조했고 불필요한 간섭과 규제 따위를 제거하라고 요구했다. 정부도 그렇거니와 시장은 강자의 논리가 아니라 합리적 판단 능력을 가진 보편적 인간의 논리에 의해 결정된다는 것이다. 그게 애덤 스미스 사상의 철학적 바탕이다.
(…) 주류 경제학자들이나 기업가들이 요구하는 자유방임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기업의 이윤을 극대화할 수 있도록 보장하라는 것에 불과하다. 거기에는 기업의 책임은 개입하지 않는다. 이익에는 철저하게 집착하지만 책임은 무관심으로 일관한다. 그래서 이런 변종자본주의 혹은 천민자본주의는 이익은 사적으로 독점하고, 실패와 책임은 공적으로 분배한다는 비판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그게 과연 올바른 자유방임일 수 있는가? 그게 애덤 스미스가 요구한 자유방임의 철학과 동일한가? 20세기 초중엽 세계를 위기에 빠뜨린 대공항의 근본적인 원인은 바로 개인의 탐욕과 정부의 무방비에 있었다.
(…) 중요한 것은 시장이냐 정부냐의 이분법이 아니라 어떤 방법이 인간의 행복을 위해 더 필요한가 하는 인간 중심의 시각이다.
559. <환경> 자연의 질서는 인간 세상의 질서 그 이상의 것이다. 그리고 자연은 결코 불필요하게 낭비하는 법이 없다. 인간은 우주와 자연의 질서에서 인간 삶의 질서를 배운다. 인간은 자연의 일부일 뿐이다. 참 인간이 된다는 것은 자연의 질서 안에서 인간이 얼마나 다른 생물들과 서로 의존적인 존재인지를 깨닫는 데에 있다.
613. <젠더> “남자들은 세상을 제대로 보지 않는다. 그들 스스로 자신이 세상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버지니아 울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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