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은 밥이다

저자
김경집 지음
출판사
알에이치코리아 | 2013-10-11 출간
카테고리
인문
책소개
배움이 실력이 되는 세상, 인문학하라!우리 시대를 대표하는 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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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인문학은 지하수와 같다. 지하수는 지표에서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지하수가 없으면 수많은 생물의 생존이 위협받는다. 인문학에 대한 투자도 지하수의 수맥을 관리하고 개발하듯 해야 한다. 당장 눈앞의 이익만 생각하고 투기 대상으로 바라본다면, 인문학이라는 지하수는 말라버리고 만다.

25. 철학은 질문에서 시작된다. 실용주의적 지식이란 현실에 순응해서 돈벌이하는 데에 도움이 되는 지식을 말하는 게 아니라, 인간이 처한 한계에 도전하면서 인간의 가능성을 확장하는 창조적 지식이다. 진정한 실용은 돈 몇 푼으로 가늠하는 것이 아니라 삶 전체에 대한 자기 가치의 인식과 창조로 이어지는 것이어야 한다. 이 내용에 동의한다면 철학이 지닌 실용적인 측면을 이해할 수 있다. 철학이야말로 자기 가치의 인식과 창조를 이루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는 학문이기 때문이다.

26. 무슨 질문을 던져야 하는가? 여러 물음이 있을 수 있겠지만 철학의 역사에서 자주 만날 수 있는 질문은 크게 서너 가지로 정리할 수 잇다. 첫째는 나는 누구인가, 어떻게 존재하는가이다. 둘째는 세상은 어떻게 만들어졌고 어디로 흘러가는가이다. 그리고 셋째는 나의 도덕적 자아를 어떻게 실현할 것인가이다. 넷째는 어떻게 인식할 것인가이다. 결국 압축하면 나와 세상의 관계에 대한 끊임없고 치열한 문제제기들이다.
(…) 마차를 끄는 것은 말이다. 마차가 말을 끌고 가는 걸 막는 게 철학 본연의 역할이다. 철학을 하면서 그런 주체성을 마련하지 못하면 사물의 종이 되거나 객체가 되어 수동적으로 살아간다. 아무리 돈이 많아도 돈을 끌고 가는 것이 사람이어야 한다. 돈이 사람을 끌고 가는 것을 막는 게 철학인 것이다.

36. 소크라테스는 상대주의의 폐해나 도덕적 타락을 직설적으로 비판하거나 절대주의를 노골적으로 주장하지는 않았다. 그가 선택한 방법은 스스로 깨닫게 하는 것이었다. 이는 대단히 중요한 지점이다. 강요하거나 가르치려 드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문제를 자각하게 하는 것, 이것이 바로 철학의 힘이다. 철학의 본질은 나와 세상의 문제를 ‘스스로’깨닫는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바로 철학의 힘을 제대로 보여준 최초의 철학자였다. 그리고 그 힘과 가치는 지금도 유효하다.

47. 의심에 의심을 거듭한 결과, 데카르트가 얻은 건 아주 사소한(?) 결론이었다. 모든 것을 의심하고 있다는 사실과 그 의심의 주체가 바로 나라는 사실에는 어떠한 의심도 허용되지 않았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는 짧은 문장 하나는 그렇게 ‘중세를 상대로 한 결별통보’가 되었다. 기도로 얻은 것도, 은총에 의한 것도 아니었다. 이것은 바로 ‘생각하는 나’에 의해 얻어진 진실이다. 교회의 권위가 개입할 수 없는 인식의 출발이었다. 그게 바로 확실성이다. 
 이렇게 데카라트에 의해 근대의 싹이 텄다. 근대정신의 독립선언과 같은 이 선언으로 ‘자유로운 개인’이라는 근대 및 현대 정신의 바탕이 마련되었다. 이 사유의 혁명은 외부로부터 주어진 것이 아니라 바로 나 자신이 이끈 것이기 때문이다.

47. 영국의 경험론이 이뤄낸 것. 생각의 혁명은 현실의 혁명으로 이어진다. 이전까지 눈치보며 묵묵히 순응해야만 했던 권위에 대해 사람들은 의심하기 시작했다. 비로소 ‘자아’의 의미와 가치를 획득한 사람들이 현실을 깨우치고 여전히 권력의 절대성에만 집착하는 기득 세력에 대해 온몸으로 저항하게 된 것이 프랑스 혁명이다. 물론 당시의 여러 정치적, 경제적 상황들이 작동되었지만 데카르트의 합리론에서 발아되고 계몽주의로 각성된 시민의 사유가 혁명의 간과할 수 없는 동인이다. 그러니 철학이 부재한 시대와 민중은 켤코 역사를 만들어내지 못한다.

51. 생각이, 철학이 혁명을 이끌어낸다는 것은 그저 선언적 구호가 아니다! 어떤 사상과 철학을 갖느냐 하는 것은 그래서 매우 중요하다. 
(…) 현대철학이 다양해진 것은 그만큼 인간의 지성이 발달했기 때문이기도 하고 사회가 빠른 속도로 다변화되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더 이상 주류적 사상이란 무의미해졌기 때문이다. 혹은 하나의 사상으로 세상을 읽어내는 것이 불가능해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다양한 사상의 진화가 결국은 다양한 세상의 독법이다. 

59. 익스트림 스포츠의 매력은 무엇일까? 남들이 보기에는 아찔하고 위험천만한데, 당사자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깎아지른 절벽을 맨손으로 오른다. 생명의 위험을 무릅쓸 만큼의 가치가 있을까? 익스트림 스포츠를 즐기는 사람들은 그 순간만큼은 전적으로 자신이 이 세상의 유일한 존재가 된다고 고백한다. 자연에 정면으로 맞서기도 하고 자연을 껴안기도 하면서 목적지를 향해 전진하는 주체적 자아를 만끽한다고 한다.
 누구나 쉽고 편한 걸 원한다. 그러나 그 편안함과 편리함은 자신이 전적으로 주체가 되는 것을 막기도 한다. 익스트림 스포츠의 매력은 편안함을 거부함으로써 얻는 주체성이다. 그 짜릿함을 맛보기 위해 무모하고 힘겹게 도전하고 싸운다.
철학은 정신적 측면에서의 익스트림 스포츠라고 할 수 있다. 철학은 끊임없이 물음을 던지고 스스로 그 답을 찾아 나선다. 정답도 없고, 스승도 없다. 임제선사의 말처럼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나한을 만나면 나한을,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죽여야 하는’ 엄중한 승부다. 위대한 사상가가 암벽일 수 있고, 심오한 철학자가 태풍일 수 있으며, 해박한 스승이 무서운 파도일 수 있다. 철학은 그런 치열함을 통해 성장한다. 세상과 삶에 대한 탐구와 천착은 결국은 자아를 발견하고, 자아와 세상의 관계를 찾아내기 위함이다. 그러나 당장의 실익은 가져오지 않는다. 평생의 시간이 걸릴 수도 있다. 도대체 그런 무모한 일이 또 있을까. 그런데도 아주 오래전부터 사람들은 철학의 문제를 회피하거나 거부하지 않았다.
 공자는 일찍이 <논어> 가인편에서 ‘아침에 도를 만나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고 확언했다. 흔히 도에 방점을 찍지만 정말 중요한 것은 ‘내가’ 만난다는 사실이다. 나를 대신해서 다른 사람이 만나주는 게 아니다. 그래서 기꺼이 목숨을 내놓는 일도 마다하지 않겠다는 확신을 다잡는다.

61. 철학의 있고 없음은 단순히 개인뿐 아니라 사회와 국가의 격을 나눈다. 그게 진정한 ‘국격’이다. 그러니 국격을 갖추려면 철학을 먼저 세워야 할 것이다. 기업 또한 기업철학부터 분명하게 정립해야 한다. 그래야 성공했을 때 길 헤매는 일 없이 경영자와 노동자가 모두 공생하는 발전모델을 이어나갈 수 있다.
 철학은 관념이 아니라 실천적 삶의 방식이다. 또한 철학적 사유는 자아를 사회와 세계와 연대시킴으로써 이기적 자아에 스스로 갇히지 않고 보편적 존재로서 세계시민 의식을 실현하게 한다.

87. <종교> 신화는, 앞뒤 맥락을 살피고 당시의 상황을 고려해서 읽으면 역사와 사회, 인간관계가 총망라되어 있는 지혜의 보고다. 신화에는 사람들의 공통된 경험이 상징적인 의미로 담겨 있다. 이 경험은 인간의 근원적인 경험이기 때문에 상징을 걷어내고 신화를 읽으면 바로 우리 자신의 이야기가 된다. 

88. 신화의 권위는 사람들이 그것을 통해 자신의 삶을 돌아보려는 태도를 지닐 때에야 비로소 가능하다.

178. <역사> 숙종이 막강한 권력을 행사하던 때였음에도 사관은 당당하게 기록했다. 역사를 기록하는 사람은 이런 기개가 있어야 한다. 또한 그런 기개를 받아들일 줄 아는 권력자의 도량과 그걸 보장하는 규범이 필요하다.

179. 두려워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조차 제대로 깨닫지 못하는 자들에게 펜을 쥐게 하면 칼 든 망나니보다 위험하다.

197. 역사의 가치는 인간이 무엇을 해왔는가, 그리고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를 반성함으로써 인간이란 무엇인가를 늘 깨어 있는 정신으로 스스로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프랑스가 잘났고 옳으며 우리가 못났고 틀렸다는 게 아니다. 다만 그 선택의 결과가 어땠는지를 통해 그게 얼마나 심각한 문제인지를 반성해야 한다는 뜻이다.
 역사는 살아 있는 시간이며 그 속에서 살아 있는 인간의 좌표를 확인할 수 있다. 면면히 이어가야 하는 보편적 인간가치를 깨닫게 하는 역사는 그래서 인문학의 중요한 하나의 축이 된다.
 거다 러너는 “역사를 아는 것이 당신 자신의 인생과 일에 의미를 부여하는 길이며, 자신의 과거에 무지한 사람들은 사회에서 어떤 대접을 받아도 아무런 저항을 하지 못한다”라고 강조했다. 

199. 역사를 알아야 세계가 보인다. 그리스 경제위기와 우리 사회의 오해. 그리스 재정 위기가 이슈로 다뤄질 때, 우리나라 정치인과 경제인들은 그리스가 복지에 지나치게 돈을 퍼부어 경제위기를 자초했다고 진단했다. 특히 보수정당과 보수언론 그리고 재벌기업들이 앞다퉈 경제위기 진단에 매달렸다. 그러나 그리스는 유럽연합국 가운데 복지 수준이 매우 낮은 국가군에 속한다. 
 위기의 가장 큰 요인은 유로화 통일에 따른 통화가치 팽창의 위험성을 정치인이나 경제학자들이 제대로 경고하고 대책을 세우지 않고 오히려 그 거품에 빨대를 꽂아 자신들의 이익을 극대화했던 데에 있었다. 통화가치 팽창으로 인한 국부의 증가를 미래와 국력 증강을 위한 교육과 사회간접자본 등에 투자했어야 하는데 말이다. 결국 그리스 경제위기의 주범은 복지가 아니라 정치인과 경제인의 부패와 무능이었다. 그런데도 이 점을 제대로 지적하고 비판하는 기사가 이른바 보수언론에서 언급된 경우는 거의 없었다. 그러니 구독자들도 위기의 원인이 복지라고 받아들였을 것이다. 그리스와 대한민국을 오가는 무지와 사욕의 이중주다.
 
 엄밀히 따지자면 그리스는 국가부채율이 100퍼센트가 넘어 유로존에 가입할 수 없었다. 그러나 골드만삭스로부터 자금을 지원받아 회계를 분식하고 파생상품을 조합해서 유로존에 가입했다. 유로화 도입을 고대하던 자산가들은 재산을 불렸지만, 국민 대부분은 밑바닥 하류생활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이른바 압정사회가 된 것이다. 압정처럼 대부분은 밑바닥을 구성하고 정치세력과 결탁한 소수 계층만이 엄청난 부를 독식했다. 그리고 부패는 독버섯처럼 자라났다. 세금을 징수해도 국고로 들어오는 돈이 일천했는데, 거둬들인 세금 중에서도 20퍼센트만 국고에 들어갈 정도로 부패가 만연했다. 그걸로 복지를 구현할 수 있었을까? 결코 아니다. 게다가 가계의 실질소득은 형편없었다. 그리스에는 사회적 도덕성이 부족했다.

202. 서로 다른 나라들이 연합하는 데에는 여러 가지 이유와 목적이 있다. 그러나 단순히 특정한 목적을 위해 연합하는 경우는 그 목적의 일부만 훼손되거나 흔들려도 쉽게 무너진다. 하지만 정신적 문화적 일치감은 그런 균열을 화학적으로 봉합해준다. 

209. 애덤 스미스는 18세기 중반 당시의 중상주의 체제를 비판했다. 중상주의자들은 국내로 유입되는 재화의 총량을 극대화함으로써 국부를 신장해야 부강한 나라를 만들 수 있다고 주장했다. 자연스럽게 절대군주와 상공인들이 야합했다. 서로의 이익을 위해 담합한 것이다. 

(…) 애덤 스미스가 비판한 것은 바로 상공업자의 이익과 국익을 동일시하는 사고방식이었다. 그가 <국부론>에서 주장하는 메시지의 핵심은 시장에 대한 정부의 간섭, 즉 약자를 억압하고 상공인들의 배를 불려서 국부를 증대시키려는 국가의 개입에 대한 비판이었다.
 애덤 스미스는 아무리 재화의 총량이 증가한다 하더라도 시민의 삶이 나아지지 않는다면 아무 소용이 없다고 보았다. 다시 말해 그가 말하는 국부는 국민의 삶을 향상시키는, 그러니까 요즘 식으로 말하자면 국민 복지를 실질적으로 증대시키는 것이었다. 이 주장은 요즘의 경제민주화 개념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런데 기업과 상당수의 이른바 주류 경제학자들은 애덤 스미스를 내세우며 경제민주화에 반대하고 있다. 지금 신자유주의를 내결며 기업의 이익 수호에만 앞장서는 그들의 뻔뻔함과 무지함이 못내 씁쓸하다.

211. 사람들이 비난하는 것은 기업가들의 지나친 탐욕과 권력마저 돈의 힘으로 좌지우지하려는 무소불위의 야욕이지, 기업이 정당하게 이윤 추구하는 것을 비판하는 것이 아니다.

212. 스토아학파는 “인간은 스스로를 고립되고 분리된 존재가 아니라, 세계의 한 시민으로서 자연이라는 광활한 공동체의 한 구성으로서 간주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 거대한 공동체의 이익을 위해, 인간은 자기 자신의 작은 이익이 희생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언제나 기꺼이 받아들여야 한다”는 스토아학파의 가치에 대해 애덤 스미스는 사려분별이 자기이익 극대화를 뛰어넘어 ‘모든 덕목 중에서 개인에게 가장 도움이 되는’ 가치라고 보고 있다. 애덤 스미스는 분명하게 말한다. “인류애, 정의, 관대함, 공공정신은 다른 이들에게 가장 유용한 자질이다.”

213. 데이비드 리카도는 <정치경제학과 조세의 원리>에서 경제학의 핵심은 바로 소득 분배를 결정하는 요인에 대한 가장 적절한 해법을 찾아내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215. 제 집과 땅의 가격이 오를 때는 환호작약하다가 조금이라도 하락의 기미가 보이면 정부에 조처를 취하라고 압력을 넣는 사람들. 경제지들은 아예 그 선전장이다. 최대 광고주들 가운데 하나가 바로 건설 회사이기 때문이다. 왜 올랐는지, 그래서 어떤 이익을 취했는지, 왜 떨어지는지,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등을 분석하고 따지는 게 아니라 자산 계층의 이해관계에 휘둘린다.

216. 요즘 경제학을 주도하는 건 수학이다. 오로지 수학적으로 정교한 이론을 만드는 데에만 열중한다. 그런 수학이 경제학에서 맡는 역할은 주로 다양한 파생금융상품의 개발이다. 모든 것을 수학적 계산과 확률로 마른 수건 쥐어짜듯 조금이라도 더 이익을 내기 위해 금융 시장 바닥을 훑는다. 월스트리트를 점령한 건 그런 수학자들이고 그 수학자들을 고용해서 이익을 얻으려는 주주들이다. 경제학을 수학자들이 쥐고 흔드는 순간 경세제민으로서의 경제학은 사라진다. 거기에는 인간이 없기 때문이다. 그들은 결국 엄청난 금융위기를 불러왔고, 그 때문에 전 세계가 몸살을 앓고 있다. 경제학에서 인간에 대한 가치와 공공성이 증발했기 때문이다.

217. 당 태종은 구리로서 거울을 삼으면 의관을 바르게 할 수 있고, 일로써 거울을 삼으면 흥망의 원인을 알 수 있으며, 다른 사람을 거울로 삼으면 잃고 얻음을 밝힐 수 있다고 말하며 끊임없이 역사를 읽었다. 역사를 외면하는 군주는 폭군이나 무능한 임금이기 쉽다. 과거의 시간을 상실한 자는 현재와 미래를 읽을 수 없다. 
 역사는 과거의 시간과 현재의 시간의 연결이며 우리는 그것으로 미래의 시간으로 나아갈 수 있는 바탕을 얻는다. 이미 지나가버린 역사를 공부하는 까닭은 그 속에서 인간의 다양한 모습과 가치를 발견 할 수 있기 때문이며 그것이 나의 삶으로 내재화되어 나를 이끄는 힘이 되기 때문이다. 과거에 펼쳐진 역사적인 경험이 우리에게 지혜를 일깨우고 용기를 북돋워준다. 그러므로 역사를 공부하는 것은 과거의 사실을 바르게 이해함으로써 현재를 사는 나의 성장을 가능하게 해준다. 그리고 이는 곧 미래를 향한 바른 안목을 길러나가는 길이기도 하다. 과거는 현재로 이어지고, 현재는 다시 미래로 나아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크로체가 모든 역사는 현대사라고 했던 말은 의미심장하다. 
 “과거에 어떤 일이 이루어졌는지 모른다면 항상 어린아이처럼 지내는 셈이다. 과거의 노력을 무시한다면 세계는 늘 지식의 유아기에 머무를 것이다.” 로마의 정치가 키케로의 말이다.
 역사는 거창한 것도 거대담론도 아니다. 역사는 바로 나의 인식의 바탕이며 내 삶의 모습이다. 헤겔은 정신의 자기발전으로서 단일하고 합법칙적인, 그 자신에 내재적인 과정으로서 역사를 설명했다. 그가 역사철학을 다룰 때, ‘개인의 자유’를 중심으로 일정한 법률이나 제도의 핵심을 찾으려 했던 것도 그런 까닭이다. 그래서 세계사를 관통하는 정신이 결국은 자기의식으로 귀환한다고 결론지었다. 그런 인식의 귀환은 놀랍게도 자신이 절대자와의 일치에 서 있다고 하는 절대적 확신이다. 따라서 그는 역사철학이 역사에서 살아가는 인간의 자기인식이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굳이 헤겔을 들먹이지 않아도 역사는 인간의 자기인식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나 자신을 아는 것이다. 그것은 나의 개인적 특수성을 넘어 인간으로서의 보편적 자기 본질을 안다는 것이고, 이를 통해 내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알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역사는 단순히 과거에 어떤 일이 있었는가를 기록하고 그 기록을 들춰보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무엇을 해왔는지, 인간이 무엇인지,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나의 삶 자체가 역사이며, 역사가 바로 나의 삶의 바탕이라는 인식이 없으면 우리는 부초처럼 또는 하루살이처럼 살아갈 뿐이다. 자기인식이 없는 내가 어떻게 주체적으로 능동적으로 살아갈 수 있겠는가. 그러니 역사를 외면한 나의 삶은 이미 파편화된 삶이다. 역사는 바로 나의 삶 그 자체다.
미국의 흑인작가 제임스 볼드윈은 역사를 이렇게 설명했다.
 “역사는 단순히 과거에 관한 것이 아니다. 아니 과거와는 거의 상관이 없다. 사실 역사가 강력한 힘을 갖는 까닭은 우리 안에 역사가 있기 때문이고, 우리가 깨닫지 못하는 다양한 방식으로 우리를 지배하기 때문이며, 그리하여 말 그대로 우리가 하는 모든 일 안에 현존하기 때문이다.” 

262. (과학) 과학은 그냥 관찰된 사실의 축적이 아니라 기존의 통념과 충돌하는 새로운 이론 체계이며 사실에 대한 의미화라고 할 수 있다. 발견된 사실과 기존의 이론 체계가 서로 충돌했을 때 과학은 비로소 진보한다. 다른 분야와는 달리 과학은 탄압이나 억제 등의 반시대적인 수단을 거부하고 객관적으로 우월한 체계를 따를 수 있다. 그것이 과학의 힘이다. 

264. 과학이 이렇게 끊임없이 기존의 지식체계나 통념과 충돌하면서 유의미한 결실을 생산한다는 사실을 삶에 적용해보라.우리가 지식을 쌓아가는 것은 단순히 실용적 목적을 위해서가 아니다. 거기에 머물고 마는 것은 결국 또 다른 낡은 텍스트에 갇히는 것이다. 과학의 진정한 의미는 의심하고 도전하며 낡은 텍스트의 틀을 깨고 나오는 자유정신이다. 지식이 많을수록 오히려 더 편협해지고 남을 재단하고 평가할 뿐 아니라 상대방에게 자신의 지식을 강요한다면, 스스로 지식의 가치를 무너뜨리는 셈이다.

267. 나는 과학에서 중요한 것은 ‘무엇을 아는가’가 아니라 ‘어떻게 생각하는가’라고 본다. 그게 과학의 인문학적 요소이고, 인문학이 과학에 관심을 기울여야 하는 까닭이기도 하다. 과학은 왜 옳고, 어디까지 옳은지, 어디까지 믿어야 하는지를 인문학을 통해 탐색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358. 미술. 주문자의 눈이 아니라 ‘화가의 눈’으로 그림을 그리는 시대가 온 것이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자신의 눈으로 보고 느낀 것을 자기 방식으로 표현하는 것이지 기존의 법칙이 아니었다.
 이렇게 해서 미적 판단의 기준은 ‘재현’이 아니라 ‘표현’으로 바뀌었다. 표현미의 시대가 온 것이다. 동시에 미적 판단이 객관에서 주관으로 변모했다. 이제는 ‘그리는 사람’이 주체가 된 것이다.
표현미에 가장 충실했던 그림들이 바로 ‘인상파 미술’이다.
(…) 19세기 후반의 서양미술은 현기증 날 만큼 빠른 속도로, 그리고 다양한 기법으로 확장되었다. 그 끝자락쯤에서 피카소, 마티스, 칸딘스키 등에 의해 대담한 화풍이 등장했다. 그들은 단순히 대상에 대한 느낌을 표현하거나 자신의 감정을 투사하는 것에 만족하지 않았다. 대담하게 자신과 세계를 대응시켰다. 이제 대상의 묘사는 그리 중요한 게 아니었다.

360. 해석은 반드시 감상자와 공유될 필요는 없다. 철저하게 자신의 해석일 뿐이다. 그러나 많이 공유될수록 많은 사람이 공감할 수 있을 터였고, 화가는 유명세를 누릴 가능성이 높았다. 그것은 현대서양정신이 ‘자유로운 개인’을 중심으로 발전했다는 점과도 무관하지 않다. 이런 상황에서 그림에 대한 미적 판단의 기준은 더 이상 재현미나 표현미가 아니라 인식미로 전환하게 된다. 이른바 현대미술이 인식미를 토대로 한다는 점을 깨닫지 못하는 한 추상화를 이해한다는 것은 정말 어려울 수밖에 없다.
 결국 우리가 현대미술에서 당혹감을 느끼는 것은 구체적인 형태가 사라졌기 때문일 것이며, 때론 어떤 대상에 대해 우리가 일반적으로 지녔던 통상적 이해나 가치가 전도되는 당혹감 때문이다. 따지고 보면 별거 아니다. 그러나 제대로 알면 엄청나게 별거라는 것도 알 수 있다. 그림 하나를 통해 나와 세계의 관계 방식을 인식할 수 있고 게다가 나의 이성과 감성을 발동시킬 수 있다는 것은 아주 매력적인 일 아닌가? 표현미의 시대가 ‘화가의 눈’, 즉 그리는 사람을 주체로 세웠다면 인식미의 시대는 ‘관람자의 눈’으로 해석하면서 모든 개인이 각자 주체가 되었다는 점에서 획기적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도 관람자의 눈이 여전히 화가의 눈을 따라야 한다는 강박과 현대미술에 대한 이해 부족 때문에 우리는 여전히 현대미술을 어려워하는 것이 아닐까?

406. 음악. 베토벤이 자신의 생각을 음악에 담을 수 있었던 것은 그가 프랑스 혁명의 시기에 살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혁명정신의 전파와 함께 당시의 사회구조가 획기적으로 변하고 있었던 것도 그의 삶과 정신에 크게 영향을 끼쳤다. 또한 베토벤은 ‘자유로운 개인’이라는 시대정신을 선구적으로 받아들였다. 베토벤은 피아노 연주와 레슨 등으로 생계를 꾸려나갈 수밖에 없었지만 대신 자신의 음악세계를 구축할 수 있었다.

(…) 단순히 기질이나 기법의 차이가 아니라 그들이 발 담그고 있던 세상의 차이가 그들의 예술관과 태도를 서로 다르게 만들었던 셈이다.

445. 정치의 핵심은 권력을 얻고 유지하는 데 있지 않고 사람들 사이의 의견을 조율하고 갈등을 해결하는 데 있다. 그렇기에 정치는 관계 맺기다. 공자는 정치를 덕으로 하는 것이며, 진심의 문제이고, 백성의 신뢰를 얻는 것이라고 정의했다. 또한 정치는 그릇된 것을 바로잡는 것이며, 관료들이 솔선수범하는 것이고, 작은 허물을 용서해주며 현명한 인재를 등용하는 것이라고 했다. <논어-자로편>을 보면 초나라 대부 섭공이 정치가 무엇이냐고 묻자 공자가 “가까이 있는 사람을 기쁘게 하면 멀리 있는 사람이 찾아온다”고 대답했다고 한다. 정치의 궁극적 목표가 사람들에게 기쁨과 희망을 주는 데 있다는 평범한 진리를 강조한 셈이다.

465. <정치> 예전 잠수함에서는 남은 산소의 양을 측정할 수 없어서 토끼를 태웠다고 한다. 산소 결핍을 예민하게 느끼는 토끼가 반응하면 수면 위로 올라가야 했다. 게오르규는 예민한 감수성을 지닌 시인을 일컬어 ‘잠수함 속의 토끼’라고 비유하기도 했다. 이때 시인은 지식인으로 혹은 정치인으로 치환해도 무방하다. 사회적 불의를 경고하고 맞서 싸워야 할 사회적 의무를 지닌 사람들이다. 그러나 정의라는 관점에서 볼 때 토끼는 바로 사회의 약자들이다. 약자들의 고통을 외면하는 사회는 불의를 묵인하는 사회다. 

467. 정의를 확립할 수 있는 가장 가시적이고 강력한 방안 가운데 하나는 바로 법이다. 법정신의 바탕은 바로 약자를 제도적으로 보호하는 것이다.
(…) 법은 힘센 자들의 폭력의 남용을 막는 것이다. 그것이 지켜지지 않으면 법은 존재의미가 없다. ‘무전유죄, 유전무죄’ 혹은 ‘집권무죄, 실권유죄’로 집행되는 법에 대해 우리가 분노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건 이미 국가로서의 존재 이유를 스스로 부인하는 꼴이다.
 온전한 정의의 실현은 생각보다 쉽지 않다. 그러나 최소한 타인의 불행을 담보로 한 행복을 스스로 거부할 수 있다면 정의는 자발적으로 실행할 수 있다. 불의를 보고 침묵하는 것은 불의를 지지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곰팡이가 어둠과 습기를 좋아하듯 불의는 침묵 속에서 독버섯처럼 자라난다. 

469. 정치는 정의를 수호하고 실현하며, 정의를 실천하려는 사람들을 돕는 일을 수행해야 한다. 정치가 정의를 수호하고 실천하는 체제를 견고하게 구축할 수 있어야만 시민은 모두 자유로운 개인으로서 자신의 인격적 삶을 실현할 수 있다.

473. 엄밀히 말하자면 한국 사회에서는 보수가 진정한 보수적 가치를 실천한 적도, 진보가 참된 진보적 가치를 실현한 적도 없다고 볼 수 있다. 미래의 한국 정치와 사회의 올바른 정립을 위해서라도 이 문제에 대한 정확한 인식과 이해는 필수적이다.

503. <경제> 자유방임은 그냥 내버려두라는 게 아니라 인간의 합리성을 토대로 최적화 가능성을 시장 스스로 실현할 수 있으므로 불필요한 간섭을 배제하라는 요구였다. 자유방임주의의 진정성은 바로 개별적 인간, 즉 자유로운 개인에 대한 신뢰와 권력의 비인격적이고 불합리한 억압과 간섭에 대한 저항이었다. 이전의 관행이던 왕권과 귀족의 업압과 독점의 폐단을 배격하라는 것이 이 문제의 핵심이었다. 그것을 보지 못하고 오로지 자신의 이익만을 극대화하기 위해 모든 규제와 간섭을 철폐해야 한다는 것은 자유방임의 뜻을 왜곡하는 것이고 실제로 그런 결과를 초래해왔다.
 현실에서 보이지 않는 손은 바로 기업들의 로비와 그들의 대변자인 정부의 경제정책 담당자, 그리고 주류 경제학자들의 카르텔이다.

504. 어느 정도의 차이는 있을 수 있겠지만 본질적으로 인간의 합리성은 보편적이다. 그런데 그걸 무시하고 오로지 자신들만 그런 합리성을 가졌다고 주장하는 것은 자기 이익을 위한 궤변에 불과할 뿐이다. 애덤 스미스는 그런 편견에 대항하여 인간의 보편적 합리성을 강조했고 불필요한 간섭과 규제 따위를 제거하라고 요구했다. 정부도 그렇거니와 시장은 강자의 논리가 아니라 합리적 판단 능력을 가진 보편적 인간의 논리에 의해 결정된다는 것이다. 그게 애덤 스미스 사상의 철학적 바탕이다.

(…) 주류 경제학자들이나 기업가들이 요구하는 자유방임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기업의 이윤을 극대화할 수 있도록 보장하라는 것에 불과하다. 거기에는 기업의 책임은 개입하지 않는다. 이익에는 철저하게 집착하지만 책임은 무관심으로 일관한다. 그래서 이런 변종자본주의 혹은 천민자본주의는 이익은 사적으로 독점하고, 실패와 책임은 공적으로 분배한다는 비판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그게 과연 올바른 자유방임일 수 있는가? 그게 애덤 스미스가 요구한 자유방임의 철학과 동일한가? 20세기 초중엽 세계를 위기에 빠뜨린 대공항의 근본적인 원인은 바로 개인의 탐욕과 정부의 무방비에 있었다. 

(…) 중요한 것은 시장이냐 정부냐의 이분법이 아니라 어떤 방법이 인간의 행복을 위해 더 필요한가 하는 인간 중심의 시각이다.

559. <환경> 자연의 질서는 인간 세상의 질서 그 이상의 것이다. 그리고 자연은 결코 불필요하게 낭비하는 법이 없다. 인간은 우주와 자연의 질서에서 인간 삶의 질서를 배운다. 인간은 자연의 일부일 뿐이다. 참 인간이 된다는 것은 자연의 질서 안에서 인간이 얼마나 다른 생물들과 서로 의존적인 존재인지를 깨닫는 데에 있다.

613. <젠더> “남자들은 세상을 제대로 보지 않는다. 그들 스스로 자신이 세상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버지니아 울프





미국에서 태어난 게 잘못이야

저자
토머스 게이건 지음
출판사
부키 | 2011-10-19 출간
카테고리
정치/사회
책소개
무한경쟁 미국 vs 여유만만 유럽 어디가 우리의 모델이 될 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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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그때 나는 어느 누구와도 말 한마디 하지 못한 채 무작정 돌아다녔다. 아는 유럽인이 한 사람도 없다는 것을 깨달아 가는 과정이기도 했다. “오, 파리라고? 거기 굉장히 멋진 곳 아냐?” 맞다. 멋진 곳이다. 하지만 이틀 동안 말 한마디 못하고 지내 봐라. 나중에는 참다 못해 온갖 욕 같은 게 저절로 입 밖으로 튀어나올 지경이 된다.

25.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종이 위에 숫자로 표현된 1인당 GDP가 아니다. 누구나 골고루 잘 산다는 사실이 더 중요하다. 세계에서 잘 산다고 꼽히는 나라들은 대체로 좌파 성향이 강하다. 이 말은 사회민주주의 국가에서는 누구나 ‘돈’을 갖고 있다는 얘기다. 특별히 내세울 게 없는 오래된 도시 쾰른에서는 곳곳에서 그 이름 그대로 향수(cologne) 냄새가 났다. 반면에 미국에서는 제일 괜찮다는 도시라 해도 공원에 오줌 냄새가 진동을 한다.

32. 내가 만약 더 오래 일해서 돈을 더 많이 벌어들이면 좋을까? 그렇지 않다. 내 생활의 많은 부분이 그만큼 희생됨으로써 ‘기회비용’도 더 커지게 된다. 이를테면 돈을 벌 욕심에 노동시간을 늘리고 취리히 여행을 포기하는 것이다. 다른 예를 들어 보자. 임금이 올랐어도 내 생활은 더 나빠질 수 있다. 주변 사람들과 소득 차이가 더 벌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게 무슨 대수냐고? 내가 많은 소득을 올릴수록 상대적인 빈곤을 심화시키는 결과를 낳을지 모른다. 내가 속한 공동체를 살기 팍팍한 곳으로 만들 수도 있다. 
 보수파 싱크탱크인 카토연구소의 연구원들은 “미국에서 못살겠다고 하는 사람도 1인당 GDP상으로는 그렇지 않다. 뭐가 문제인가?”라며 입에 침 튀기며 떠들어 댈 것이다. 그러도록 내버려 둬라. 논쟁을 해서 이길 생각은 없다. 하지만 그들이 다 떠들고 나면 밖에 데리고 나가서 주변을 한번 둘러보게 할 참이다.
 돈을 더 많이 벌려고 애쓸수록 우리의 삶의 질은 하락한다. 유럽의 연평균 노동시간은 1500시간 정도이다. 이에 비해 미국의 연평균 노동시간은 1800시간이다. 하지만 실상을 따져 보면 대부분의 노동자들이 2300시간 이상을 일한다. 이렇게 2300시간 이상을 일해서 1인당 GDP가 상승하고 나면 다음과 같은 상황에 맞닥뜨리게 된다. 
6주의 휴가가 없다. 사무실 이외의 장소에서 커피 한잔 마음 놓고 마실 시간 여유가 없다. 제비꽃이 만발한 강둑을 거닐면서 한가롭게 맑은 공기를 마실 수 있는 도시가 없다.

겉으로 드러난 것만 보면 미국은 엄청난 선진국처럼 보인다. 그러나 좋아하지 마라. GDP 증가분의 3분의 2 이상이 부자에게 돌아갔다. 예를 들어 2005년 미국 생산직 노동자의 시간당 실질임금은 1973년에 비해 약 8퍼센트 하락한 반면 시간당 산출량은 55퍼센트 상승했다. 따라서 1989년 이후 미국인 대부분의 실질구매력이 단 한 푼이라도 늘었는지 모르겠다. 미국의 1인당 GDP가 유럽보다 높다 해도 실제로는 속빈 강정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반면에 유럽 각국의 경우 미국보다 1인당  GDP 수준이 낮지만 ‘중산층’은 교육, 의료보험, 제비꽃이 만발한 도시 등 공공재를 무료로 향유할 수 있다. 이런 것까지 집어넣어 순구매력 기준 1인당 GDP를 따져 보면 어떻게 될까? 실질적으로 유럽이 높다고 해도 반박할 사람이 없을 것이다.

미국에는 노동시간이 천차만별이기 때문에 이 ‘평균’에 담긴 의미를 주의해서 생각해야 한다. 나 같은 변호사나 맥도널드 매장에서 3교대로 일하는 청소년 등 빠듯하게 살아가는 미국인들은 사실 ‘평균’보다 훨씬 더 오래 일한다. 또 평균 이하로 일하면서 천문학적인 돈을 버는 사람들도 부지기수이다. 솔직히 말해서 미국에 널려 있는 수많은 ‘사장님’의 힘이 어디에서 나오겠는가? 1년에 2300시간 가까이 죽도록 일하는 사람들에게서 나오는 것 아닌가? 
유럽은 어떨까? 결코 이런 일이 있을 수 없다. 노동조합이 장시간 노동을 가만히 내버려 두지 않기 때문이다.

38. 나는 유럽이 ‘조세 피난처’라고 생각한다. (…) 바꿔 말하면 미국인은 세금을 덜낸 것에 훨씬 못 미치는 혜택을 받지만, 유럽인은 세금을 더 낸 것 이상의 복지 혜택을 돌려받는다.

45. (첫 프랑스 여행) 1977년 5월 일주일 동안 짐과 함께 난생처음 프랑스로 여행을 갔다. 혼자 외롭게 배낭여행을 하다 글래스고에서 포기하고 어머니가 공항에 마중 나왔던 그 짐 말이다. 그렇게 생고생을 했는데 짐은 왜 또다시 유럽여행을 떠났느냐고? 나와 함께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외롭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우리는 같은 밧줄에 묶인 산악 등반가였다. 함께 다니면 공항으로 각자의 어머니가 마중 나오는 불상사는 막을 수 있을 듯했다.
 하지만 파리 여행 첫날에 짐은 어떤 여자를 만난 뒤 나를 팽개쳤다. 지금도 그애가 눈에 선하다. 미국인이고 출판사 집안의 딸이었으며 무언극을 공부하러 그해 여름 파리로 왔다고 했다. 무언극을 배우는 게 프랑스어를 공부해야 하는 부담감에서 벗어나는 그녀만의 방법이 아니었을까.

48. 파리는 어떨까? 물론 파리에서는 우리 시대의 뛰어난 성과라고 할 만한 일이 진행되고 있다. 즉 생활수준이 향상하고, 인간 역사의 그 어떤 시대보다 더 사람들이 존엄성을 유지하며 장수를 누리게 되었다. 그러나 이런 것은 기사거리가 되지 못한다. 그림물감이 마르는 과정을 지켜보는 것과 같다. 설령 그 그림이 루브르 박물관에 전시된다고 해도 누가 마를 때까지 지켜보겠는가?

51. 헤밍웨이는 이런 광경을 보지 못하고 죽었다.나도 무척 아쉬움이 남는다. 내가 만약 지금 스물일곱이라면 프랑스인을 사귈 수 있을 텐데. 프랑스에 간다 해도 대화에서 소외되지는 않을 텐데. 하지만 이제 나는 너무 늙었다. 아! 27세로 되돌아가 다시 파리에 갈 수 있다면! 프랑스인을 만날 기회가 한 번만 더 있다면! 혼자 밖에 나가 <이동하는 축제>의 페이지를 휙휙 넘기며 “파리는 항상 나와 함께할 거야.”라고 중얼거리지 않을 텐데. 아무튼 헤밍웨이도 그렇고 나도 그렇고 프랑스인을 사귀지 못했다.

55.  “미국의 경우 가난한 사람이 많으므로, 결혼을 고민하는 여자라면 남자의 소득을 물어봐야 한다. 자식을 굶기지 않으려면 그렇게 해야 한다. 전체 아동 중 빈곤 아동의 수가 4분의 1 가까이 되는 현실에서는 그러는 게 정상이 아닌가?”
 그러나 정부에 가정을 꾸리는 본능을 충족시켜 달라고 당당하게 요구할 수 있는 프랑스 여성은 미래의 남편이 돈을 얼마나 버는지 신경을 곤두세울 필요가 별로 없다. 최소한 록 음악 평론가와 만나 데이트를 할 여유는 있다. 왜냐고? 자녀 양육비를 지원받을 수 있으니까. 보육 시설도 더 좋으니까. 교육비? 당연히 무료니까.

60. (…) 나는 미국 여자와 이야기를 나눌 수 잇었다. 우리 네 사람은 합석하기로 했다. 하느님, 감사합니다@ 해냈어요! 드디어 인간과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습니다!
이제 어머니는 나를 데리러 공항으로 나오시지 않아도 되리라.

63. 1980년에서 2000년, 혹은 1990년에서 2000년, 이런 식으로 10년, 20년 단위로 살펴보면 프랑스를 비롯한 유럽 각국의 정부는 재정 지원 항목을 꾸준히 늘려 왔고, 기존 항목에 대한 지원 역시 확장시켜 왔음을 알 수 있다.

64. 미국에서는 우리가 낸 세금의 일부만이 되돌아온다. 그 대부분은 민간부문으로 흘러간다. 사악한 민간 보험회사와 제약 회사, 그리고 응급 병원의 의사와 경영진의 수중에 들어가는 것이다. 이들은 모두 공공재가 되어야 하는 것을 중간에서 가로채 폭리를 취한다. 유럽인은 단순히 돈을 더 쓰는 게 아니다. 미국인과 달리 그들은 효과적으로 돈 쓰는 방법을 안다. 비효율적이라고 평가받는 독일의 의료보험도 관련 총비용이 GDP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11퍼센트에 지나지 않는다. 반면에 미국의 의료보험 관련 총비용은 GDP의 17퍼센트나 되지만 보험에 가입하지 않은 사람은 물론 보험에 가입한 중산층도 종종 혜택을 받지 못한다.
 유럽의 시스템을 사회민주주의라고 부르는 것은 이처럼 공공재를 효율적으로 분배하기 때문이다.

69. 미국인은 힙합에는 관심이 많아도 헤겔 철학에는 관심이 없다고 하는 게 더 정확한 표현일 수도 있다. 헤겔 철학으로 무엇을 해야 하는지 모르는 탓이다. 이것은 영어를 말하는 것과 비슷하다. 우리는 언어를 사용한다. 그러나 오로지 영어 하나밖에는 모른다.

70. 아! 내가 만약 프랑스에서 살았다면, 아니 꼭 살지는 않아도 유럽인 친구가 있어서 빈번하게 오갔다면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아마 <리베라시옹>을 읽고 휴일을 꼬박꼬박 찾아 썼을 것이다. 여유를 누리면서 한결 느긋하게 살았을 것이다. 디처럼 책을 쓰는 데 열중했을지도 모른다. 또 일에 매달려 허우적대기보다는 일할 때와 일하지 않을 때를 가리는 법을 익혔을 수도 있다. 아무튼 파리에서 살았다면 나의 시간 개념은 지금과 상당히 달랐을 것이다. 헤겔과 힘합에 대해서도 깊게 따져 보았을 테고.

72. “진짜예요. 그런데 지금 살고 있는 아처 앤드 할스테드 근처에는 아무도 없어요. 노크를 하지 않고 내 방에 함부로 들어올 사람이 없는 거지요.”
 누군가 총을 쏴서 문짝을 부수는 것으로 노크를 대신하지 않을까 심히 걱정되었다.

76. 유럽이 ‘헌법적으로’ 통합되고 값싸고 편리한 교통수단 덕분에 자유롭게 왕래하는 반면, 미국은 ‘헌법적으로’ 해체되는 중이다. 어느 도시건 교통 체증에 시달리지 않는 곳이 없다. 국가의 힘이 약해지고 구체적인 토지 이용 계획 같은 게 없으면 마치 바스티유 감옥에 갇힌 것처럼 답답하기 짝이 없는 미국인의 삶은 더욱 악화되기 마련이다. 시카고에는 저 멀리 미시시피강 상류 끝자락에서부터 출퇴근하는 사람들도 있다. 매일 시카고 순환도로까지 편도 2시간 30분이 걸리는 길을 운전한다. 왜 그럴까? “아이들을 위해서지요.”
 이것은 미국의 사회 기반 시설이 붕괴되었음을 보여주는 징표이다. 시카고 도심에서 가까운 교외 지역, 특히 시카고 남부와 서부의 공립학교는 한마디로 난장판이다. 부모로서는 먼 곳으로 이사할 수밖에 없다. 자녀들이 대학에 가서 대출을 받기라도 하면 더 먼 곳으로 이사한다.

82. 도시계획과 사회 기반 시설이 부족한 탓에 미국인은 낭비하고 또 낭비한다. 바버라는 자가용으로 출퇴근하는 데 매일 두 시간을 꼬박 바친다. 왜냐고? 세금을 덜 내는 탓이다. 세금을 덜 낼수록 학교가 사라진다. 그래서 더 멀리까지 오가야 한다. 그곳의 학교마저 문을 닫으면 더더욱 멀리 오가야 한다. 낮은 세금 때문에 미국인은 계획이 사라진 혼돈의 삶에 빠져들지만 그 대신에 GDP는 마냥 올라간다. (…) 교통정체로 인해 GDP가 상승할수록 바버라의 삶은 열악해지지만 명목상의 1인당 GDP는 이사벨보다 높아진다.

84. 결국 한마디로 말해서 1인당 GDP를 상승시키는 동력이 삶을 즐기는 데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생명을 부지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데서 나온다고 할 수 있다. 

(최상위층 중심의 경제 구조)
미국의 경제적, 사회적 불평등이 심각하다는 것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지만 바버라에게 불평등은 다른 방식으로 부과되는 세금과도 같다. 무엇보다 바버라에게 ‘가장 이득이 되는 상품’이 거래되는 시장을 위축시킨다. 누구든 자기와 소득수준이 비슷한 사람들이 많을수록 구매 조건이 더 유리해지는 법이다.
 예컨대 유럽에서는 미국보다 이용료가 저렴하면서도 시설이 뒤처지지 않는 세련된 호텔을 찾기가 쉽다. 바버라처럼 교육 수준이 높고 먹고 살만한 사람들이 두터운 수요층을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유럽에는 하룻밤에 500달러나 쓸 수 있는 부자가 별로 없지만, 단돈 5달러도 아까워서 벌벌 떠는 밑바딱 계층도 찾아보기 힘들다. 유럽이 어느 면을 보든 미국보다 더 낫다고 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단적으로 말해서 유럽 제품을 보라. 조잡한 게 있는가? 유럽에서는 이사벨처럼 품질을 앞세우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에 제품 수준이 높다.
 그러나 바버라가 이사벨처럼 자기 취향을 살리며 미국 땅에서 살아가려면 돈이 훨씬 더 많이 든다. 왜 그런가? 미국은 유럽과 달리 최상위 부자 중심으로 생산 및 소비구조가 짜여 있다. 바버라가 자기 취향에 어울리는 부르주아적 생활 방식을 추구하려면 그들을 따라할 수밖에 없다. 규모의 경제를 실현하기 어려워 가격 대비 품질이 뛰어난 제품이 시장에 나오지 않기 때문이다. 이뿐이 아니다. 최상위 부자들은 자기들보다 못사는 사람들의 자식이 다니는 것을 막으려 유명 사립고등학교나 사립 대학교의 수업료가 치솟게 만든다. 그래서 바버라가 자녀를 좋은 학교에 보내려면 엄청난 학비를 부담해야 한다.
 미국 모델에서 빈곤층은 물론 바버라와 같은 최상위 부자 밑의 계층이 감수해야 하는 손해는 이것만이 아니다. 최상위 부자는 부유하기에 알게 모르게 누리는 혜택이 많고 자기들만의 다양한 모임에서 양질의 정보를 주고받을 수 있다. 결국 그들이 돈 벌 기회를 독점하게 되는데, 그 피해는 고스란히 바버라 같은 그 밑의 계층이 떠안는다. 전문직에 종사하는 바버라 역시 나름대로는 상류층에 속하나 시간이 지날수록 최상위 부자와는 멀어진다. 불평등이 심화되는 것이다. 이런 식의 불평등은 미국 모델에서 우연히 나타나는 측면이 아니라 본질적인 측면이다. 미국 모델에서는 바버라와 같은 엘리트도 온갖 불이익을 감수해야 한다. 바버라의 1인당 GDP 수준이 높다고 하지만 황폐해지는 사회 기반 시설, 교도서 경비원, 경찰관, 민간 경호원처럼 곳곳에 널린 상비군, 점차 심해지는 빈부 격차 등에서 기인하는 ‘악성 GDP’가 그녀의 삶에 장애물로 작용한다. 악화가 양화를 구축하듯이 바버라가 미국에서 쌓아올린 ‘악성 GDP’는 이사벨이 사회민주주의 사회에서 누리는 양성 GDP’ 또는 ‘즐거운GDP’를 구축한다.

86. (도박이냐 장시간 노동이냐) 더 안 좋은 것은 미국의 GDP가 월스트리트의 다양한 금융업, 각종 투기업 등의 도박에서 창출되고 있다는 점이다.

95. (국가가 책임지는 유럽, 개인이 책임지는 미국)
이사벨은 바버라보다 소비자로서 더 나은 삶을 사는데 그 이유를 정리하면 이렇다. 첫째, 세금을 많이 낸다. 둘째, 국가가 그녀의 지출을 관리해준다. 이사벨은 바버라보다 세금을 더 많이 내기 때문에 돈을 더 아낄 수 있다. 역설적으로 들리겠지만 사실이다. 유럽식 사회민주주의는 일정한 방식으로 개인의 소비지출 방향을 안내한다. 국가는 이사벨에게서 세금을 거둬들인 후 그녀가 정말로 필요한 것을 제공하는 데 사용한다. 국가는 이사벨을 위해 무엇을 ‘구입’해 줄까? 퇴직연금, 의료보험, 교육, 대중교통, 보육.
 국가는 이사벨에게 이런 공공재를 대량으로, 그리고 대단히 효율적인 방식으로 구입해 준다. 세금을 내면 상당 부분 걱정이 덜어지므로, 이사벨은 남은 돈을 여유 있게 쓸 수 있다.

103. 이것이 사회계약이고 유럽식 거래이다. 이사벨처럼 부유한 사람들은 공적 연금, 무료 의료보험이 원활히 굴러갈 수 있도록 많은 세금을 납부하고 그 아래 계층의 다수의 유럽인 이사벨이 오페라를 관람하는 비용을 얼마간 보조해 준다.
 말하자면 이런 논리이다. “당신이 여가를 즐겁게 보내게 해 줄 테니 당신도 우리가 여가를 즐겁게 보낼 수 있게 해 줘.” 독일 금속노동조합의 조합원은 오페라를 관람하고 사회 엘리트층은 헤비메탈이나 록 음악 공연을 감상하는 데에도 다 논리적 근거가 있다. 유럽에서는 결국 사회 구성원 모두 자기가 원하는 유형의 사회정의를 누리는 셈이다.
 경제사학자 니얼 퍼거슨은 이렇게 묻는다. “사람들은 왜 자기가 하고 싶은 것에 자기 돈을 쓰는 대신 서로 교차 보조하는 것일까?” 이론적으로 볼 때 이 스코틀랜드 경제사학자에게 교차 보조란 말이 안 되는 일이다. 그러나 그것은 일종의 방위조약과 같이 사람들을 하나로 결속한다. 

104. 유럽인은 예술을 공공재로 여긴다.
(…)사회민주주의 사회에서는 록 음악을 하는 예술가조차 사회 안전망 안에서 안심하고 활동할 수 있는 것이다.

108. 그렇다면 유럽의 일자리 사정이 미국보다 훨씬 나은데도 왜 유럽의 똑똑한 젊은이들이 맨해튼은 물론 캠브리지와 팰러앨토에 몰려올까?
 위험을 무릅쓰기 좋아하는 알파형 인간은 미국 사회의 고위험 고수익에 매력을 느끼기 때문이다. 미국은 유럽에서 살아가는 게 따분하다고 생각하는 저돌적이고 출세 지향적인 사람들을 빨아들이는 마력 같은 게 있다. 달리 말해서 부와 욕망을 추구하기에 안성맞춤인 곳이다. 미국은 재벌을 꿈꾸는 사람들과 그들의 BMW를 실은 화물차를 얼마든지 받아들일 수 있다. 전 세계의 부 사냥꾼을 빨아들이는 것이다. 그와 동시에 그 먹잇감이 되기에 딱 좋은 사람들도 빨아들인다.
 하지만 바로 이런 현상 덕분에 이사벨의 삶의 질이 더 나아질 수 있다. 부 사냥꾼이 미국으로 몰려드는 한 독일과 프랑스는 유화적이고 관대한 삶의 방식이 지배하는 나라가 된다. 이사벨이 더 안전하게 잘 살 수 있는 이유를 알겠는가?

133. 고비용 구조인 오늘날의 독일이 어떻게 국제적으로 경쟁력 잇는 제품을 그렇게 많이 생산할 수 있는 것일까? 노동비용 절감 경쟁이 치열하게 벌어지는 ‘평평한 세계’에서 독일 경제는 왜 전보다 더 잘나가는 것일까?

134. 다시 한 번 묻겠다. 독일 경제가 경쟁력을 유지하는 비결은 무엇인가? 독일 기업은 미국 기업과 달리 비용 경쟁에서 이기겠다는 헛된 생각을 품고 있지 않았기에 경쟁력을 더 높일 수 있었다.(그래서 유로화가 상승해도 버틸 수 있다.) 또 미국식으로 노동조합을 분쇄해야 중국 등과의 경쟁에서 이길 수 있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 스웨덴, 프랑스, 독일 등 고임금 구조를 유지하는 사회민주주의 국가가 미국이나 영국보다 산업 경쟁력이 더 앞선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영국과 미국, 신자유주의자, 그리고 <이코노미스트> 등 대부분의 언론은 1970년대에서 90년대에 이르는 동안 유럽의 사회민주주의자들을 조롱했다. “노동조합을 파괴하는 게 좋을 거야. 그래야 산업을 살릴 수 잇으니까.” 미국과 영국이 바로 그렇게 했다. 비용 면에서 경쟁력을 지녀야 한다면서 노동조합을 파괴했다. 그 결과 어떻게 됐냐고? 단기간 내에 산업 기반이 완전히 무너지고 말았다.
 그러나 독일, 스웨덴, 프랑스는 그들의 충고를 귀담아 듣지 않았다. 노동조합을 무력화하지도 않았다. 대신에 높은 노동비용의 부담을 이겨내기 위해 ‘고부가가치’ 제품 중심으로 산업구조를 재편해 나갔다. 독일은 어느 부문에서 경쟁력이 있을까? 최고 수준의 기술을 보유한 기술자가 만드는 첨단 정밀기계 제품에 강점이 있다. 미국인은 독일 이야기가 나오면 “실업률이 어떻지?”라고 묻는다. 아무도 “노동력이 얼마나 부족하지?”라고 묻지 않는다. 사실 2008년 금융 위기가 시작될 시점에도 ‘세계화’의 열풍에 힘입어 독일은 고숙련, 고임금 일자리를 채울 유능한 엔지니어가 심각할 정도로 부족했다. 이와는 정반대로 미국에서는 제아무리 실력 있는 엔지니어도 일자리를 찾지 못해 아우성치다가 결국에는 영업탓에 엔지니어가 마음 놓고 일할 일자리를 창출해 낼 능력이 없다. 그 때문에 역설적인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 노동비용이 높은 독일은 제조업 경쟁력이 더 강화되는 반면 노동비용이 너무 낮은 영국과 미국은 제조업을 버리고 말았다.




인생 따위 엿이나 먹어라

저자
마루야마 겐지 지음
출판사
바다출판사 | 2013-10-30 출간
카테고리
시/에세이
책소개
한 치 앞은 어둠이고 빛이기도 하다. 어둠에 내던져질지, 빛으로...
가격비교 글쓴이 평점  



10. 생각한들 어떻게 되는 것이 아니니 그냥 내버려 둘 수밖에 없다는, 지금까지 대부분 사람을 지배해 왔던 체념에 그대로 주저 앉아도 좋은가.
정말 그래도 좋은가.
모순에 찬 세상을 살아가기 위한 기본 중의 기본인 이 문제를 회피하고서는 아무리 고뇌해 본들 별다른 소용이 없다. 온갖 쾌락에 젖는다 해도 고뇌를 떨쳐 버릴 수 없다.
 동서고금의 천재적인 철학가들이 이것도 아니고 저곳도 아니라며 머리를 쥐어짜고도 명확한 해답을 얻지 못했는데, 우리 같은 보통 사람에게서 무슨 결론이 나겠느냐는 흔하디흔한 단정도 좋지 않다.
 왜냐하면 얼토당토않은 명제에 명확한 결론을 내리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이 문제를 똑바로 인식하고 자기 나름으로 생각해 보는 데 의의가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해 보느냐 마느냐에 따라, 이후의 마음가짐과 인생이 전혀 다른 모습으로 전개되기 때문이다.
(…) 이 무겁고 성가시고, 다소 우스꽝스러운 문제를 새삼 생각하려면, 뜬구름 잡듯 할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실마리를 찾아 최대한 현실적으로 고민하는 편이 좋을 것이다. 그래야 이 허접한 세상을 대하는 자세가 바뀔 확률이 커진다.

12. 이 기회에 부모가 있기에 나도 있다는, 너무도 감정적이고 국가 권력이 두 손 들고 반가워할 도덕적인 규범에서도 벗어나기로 하자.

16. 아무 배경 없는 자신으로 돌아가 처음부터 다시 생각해야 한다. 부모의 기대를 저버리는 일에 두려움을 느끼거나 주저함이 있다면, 그것은 어렸을 때부터 부모를 포함한 가정 환경에 세뇌되어서다. 그런 생각 안에는 진정한 자신이 존재한다고 볼 수 없다. 그 때문에 자아가 없는 인생을 보내게 되는 것이다. 

20. 오로지 자식을 어엿한 성인으로 키우는 것만이 목적인 부모는 너무도 적다. 더 나아가 이제 어른이 되었으니 앞으로는 네 힘으로 살아가라고 진지하게 가르치고, 자신들은 어떻게든 살아갈 테니 네 인생에만 집중하라고 충고하고 또 그렇게 되기를 진심으로 바라는 부모는 더욱 적다.

24. 어딘지 모르게 음울한 분위기가 감도는 사람들에게 이 세상은 무의미한 사건들로 가득하고, 놀고먹다 보면 지나가는 것에 불과하다. 그들의 가슴을 무겁게 짓누르고 있는 것의 정체가 부모와 자식 간의 비정상적인 연대라는 것을 알았을 때는, 이미 다 늙어 꼬부라진 후이다. 
집을 떠난다는 것은 제2의 탄생을 뜻한다.
(…) 요컨대 집을 떠나는 것이 성인식인 셈이다.

25. 이렇게 양쪽이 진정한 부모 자식 관계가 무엇인지를 깨우치고, 서로 돕고 사는 것이 인간의 도리라는 안이한 근성을 버려야 타인이 아닌 오직 자신을 의지해 사는 올바른 삶을 살 수 있는 것이다.

31. 올바른 행동의 규범이 되는 정신을 기대할 수 없는 자는 인간의 꼴을 하고 있을 뿐, 고뇌하면서도 다시 정신을 가다듬고 살아가는 참인간이라 할 수 없다.

33. (가족은 일시적인 결속일 뿐이다) 언젠가 부모는 부모의 세계로, 자식은 자식의 세계로 돌아가야 하는 것이다. 각자의 세계로 돌아가는 것이야말로 자연스럽고 건전한 숙명이다. 동물은 모두 그렇게 함으로써 삶의 건강함을 유지하고 있다.
(…) 요컨대 인간이 되느냐 되지 못하느냐는 부모와 집에서 얼마나 빨리 벗어나느냐에 달려 있다.
일단은 부모를 버린다. 집을 버린다.
이후 세상 풍파를 겪으면서 그런대로 쓸만한 인간이 되었을 때, 경제적으로 약간의 여유도 생겼을 때, 집과 부모를 돌아보고 어떤 관계를 맺는 것이 옳은지를 생각한다.

34. (부모를 버려라) 부모들이 그 나이가 되도록 살아온 것은, 징징거리며 우는 소리로 자식 인생을 망치기 위함은 아니었을 터이다. 
그들은 자기 힘으로 자기 하나 어쩌지 못하는 경박한 인간이 되려고 경험과 체험을 쌓았다는 말인가.
그들은 지금까지 대체 무슨 생각을 하며 살아온 것인가.
그렇게 태연하게 이기적인 투정을 부리는 부모는 그저 부모라는 의미밖에 없는 거짓 존재일 뿐, 오래 산 가치가 있는 참된 부모와는 다른 생물이다.
(…) 자식을 소유물로 간주한다. 자신을 위해 존재하고, 또 자신을 위해 이것저것 보살피는 편리한 가정부라 착각한다. 이 때문에 학교며 직장이며 결혼 상대며, 하나에서 열까지 모든 것이 자신이 깔아 놓은 레일 위를 달려야 마땅하다고 믿는 것이다. 이렇게 진저리가 나도록 뻔뻔한 부모는 아무리 타당한 논리를 내세워도 통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할 말은 분명히 해야 한다. 하고 싶은 말이 있는데 입을 꾹 다물고 있으면, 그들의 태도를 더욱 조장하고 부모 입장이 절대적이라는 자세를 더욱 굳건하게 하는 결과를 낳는다.
 합리적인 말이 합리적으로 통하는 부모 자식 사이가 되기를 바란다면, 진심을 털어놓고 부딪쳐야 한다. 핵심을 건드리지 않는 것은 가족을 남으로 취급하는 행위이고, 그것은 오히려 냉정하 처신이다.
상대에게 상처를 주고 싶지 않다, 나 역시 상처를 받고 싶지 않다는 이유로 속을 내비치지 않는 것은 배려 따위가 아니다. 비겁한 것일 뿐이다.
(…) 남남끼리라면 몰라도 적어도 부모 자식 간에는, 울분을 터트리는 신경질적인 말투가 아니라 날씨 얘기라도 하듯이 가볍고 밝게 서로 하고 싶은 말을 나눌 필요가 잇다. 욕설이나 고함으로 속내를 털어놓는 것은 어린아이들이나 하는 짓이다.

36. “그러면 서로에게 좋지 않습니다. 자기 인생은 있는 힘껏 혼자서 사는 게 좋아요.” 
37. 흐르는 시간이 언젠가는 가르쳐 줄 것이다.

38. (자신을 직시하고, 뜯어고쳐라) 자식은 우선 자신이 어떻게 키워졌는지를 정확하게 파악해야 한다. 그래서 성격이 어떠한지를 분명하게 인식할 필요가 있다. 이 기본적인 사항을 파악하려 하지 않거나 게으름을 피우고 외면하려 한다면, 이후에는 어떤 것도 설계할 수 없다. 그뿐만 아니라 마음에 생긴 균열이 점점 커져 종국에는 와르르 무너지고 정신도 잃을 수 있다.
다만 여기에서 문제는, 정확한 자기 인식이 가능한지 가능하지 않은지 그것이다. 냉정하게 자기라는 인간을 직시할 수 있는 눈을 가지고 있는지, 그것이다.
(…) 집 밖으로 나서면 우글거리는 불안 요소를 일일이 따져서는 그 썩어 빠진 근성을 평생 안고 살 수밖에 없다.

40. 버스나 기차를 타고, 아니면 자전거나 오토바이를 타고 밤을 새워 최대한 멀리까지 몸을 옮겨 놓는다. 돌아갈 교통비가 없어질 만큼 먼 곳이 좋다. 홀로 선 사람만이 느끼는 두려움과 기대감, 긴장감을 동반한 설렘이 자유로 가는 입구다.
일단 그 입구를 통과하기만 하면, 부모에게 기대 얻는 안정따위는 하잘것없어진다. 또 집에 틀어박혀 즐기는 암울한 취미와는 비교가 되지 않는, 참되고도 신선한 감동을 만끽하게 된다. 그렇군, 사람이란 이 때문에 사는 것이로군, 하는 삶의 흔들림 없는 해답에 육박해 가는 감동이야말로 자신이 마음속으로 추구했던 것임을 확신하게 된다. 

41. 부모에게 신세지지 않고는 살 수 없는 몸이라면, 무슨 일을 하고 무슨 도전을 하든 어차피 어린애 장난의 연장에 지나지 않는다. 예술을 하든 학자의 길을 걷든, 자신에 대한 인식 없이 부모의 도움으로 쌓아 올린 것은 언젠가는 허물어지게 되어 있다. 평생을 거기에 몸 받친다 해도 결과는 꺼데기뿐, 획기적인 공적은 남길 수 없다.
 또 인터넷을 통해 제아무리 그럴싸한 의견을 피력해 봐도 공론이나 다름없다. ‘빌붙어 사는 자식이 말은 번지르르하군.’ 하는 한마디에 된통 깨지고 마는 것이 고작이다.
그렇다. 자기 힘으로 먹고살지 않는 자에게는 주장할 권리가 없다. 조금은 있을지 모르나, 그 한심한 행각이 세상에 들통 나버리면, 진지하게 귀 기울이는 자라고 해 봐야 처지가 같은 자들 정도다.

42. 남자는 어머니에게 응석을 부리다 결혼해서는 아내에게 부린다. 그러다 아내가 포기하고 떠나가면, 이번에는 강해 보이는 남자를 찾아 응석을 부린다. 평생 응석을 부리며 사는 이 나라 남자들, 정말 한심하다. 그들 탓에 나라까지 한심해진다.

43. (내 배는 내 힘으로 채우자) 제 손으로 일해 먹고살아야 비로소 집과 부모를 떠난 의미가 있는 것이다. 그래야 독립한 인간이다. 
그렇다면, 일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수렵 채취 시대와 마찬가지로 살아 있음을 뜻하는 필연적인 행위다.
내 배를 내 힘으로 채운다는 것은 지금도 변함없는 일의 근본 철학이다.
살아가는 데 가장 중요하고 절대 빼놓을 수 없는 행위에는 반드시 본능적인 기쁨이 따른다. 
그런데 아쉽게도 문명의 발달이 일의 가치를 심하게 변질시키고 말았다. 삶의 기쁨을 누리기는커녕 오히려 고통을 강요하는 부자연스러운 것으로 바꿔 놓은 것이다.
과거 인간은 다른 야생동물과 마찬가지로 비록 수명은 짧고 위험이 가득한 환경에 살았지만, 살아 있는 것만으로도 충만감을 얻을 수 있는 행복한 존재였다.
 그런데 문명의 발달이 가져다준 편리함과 복잡함이 일의 대부분을 불쾌하고 고통을 수반하는 것으로 변질시켰고, 이는 비관적인 인생관과 불행의 원천이 되었다.

44. (직장인은 노예다) 어떤 일을 하며 먹고사느냐에 따라, 진정으로 자립할 수 있는지 진정한 인생을 살 수 있는지가 결정된다. 
일은 크게 어딘가에 소속되어 근무를 하는 것과 자영업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학교에서 공부하는 주 이유는 대개 전자를 지향하기 때문이다.
조금이라도 좋은 위치, 즉 높은 연봉에 안정적이고 남에게도 좋아 보이는 직업을 얻기 위함이다. 그러기 위해 배운 것에 불과하니, 충분히 학문을 익히지 않았다 한들 큰 문제는 없다. 고용주가, 단순히 사회적인 값어치를 매기는 데 목적이 있는 학력을 그렇게나 중시하는 까닭은 오로지 순종할 인물인지 아닌지를 확인하기 위해서다. 세상의 가치관에 어디까지 순종적일 수 있는지, 그 어처구니없는 입시 전쟁에 얼마나 투신한 인간인지를 판단하고 싶기 때문이다.
그런데 애당초 그들은 왜 직장인을 지향한 것일까.
그것이 문제다. 아주 큰 문제다.
이 넓은 세상에는 다양한 직종이 있고, 저마다 다른 삶의 모습이 있다. 그렇게 폭넓은 세상에 살면서 왜 처음부터, 어린 시절부터 회사에 취직하는 것에 목표를 두고 살아왔는가. 
 마치 다른 길은 없는 것처럼 제대로 고민해 보지도 않고, 또다른 직종은 쳐다봐서도 안 되는 것처럼 다짜고짜 직장인이 되기로 결심한 근거는 무엇인가.

46. 직장인이 되기 위해 태어났는가.
직장인의 처지란 노예 그 자체라는 것을 모르는가.
누가 강제로 끌어가는 것도 아니고, 법률로 정해져 있는 것도 아닌데 왜 스스로 노예의 길을 선택하는가. 
제정신인가.
직장인의 세계를 제대로 알고 있기는 한가.
마음 편하고 안정적이며, 먹고살 걱정은 없는 무난한 곳이라고 정말 믿는가.
만약 그렇다면, 왜 그렇게까지 느긋한 인생에 매료되는가.
자기 안에 다양한 능력과 가능성이 숨어 있을지도 모르는데, 왜 처음부터 그렇게 매가리 없는 생활을 추구하는 것인가. 
정말 이 세상을 살고 싶기나 한 것인가.
사실은 죽고 싶어 하는 것은 아닌가.
아직 아무것도 시작되지 않았고 있는 힘을 다해 도전해 보지도 않았는데, 모든 것을 내던지다 못해 목숨까지 내던진 것은 아닌가.
세상이 재미있어 보이지 않아도, 그렇기에 재미있게 하기 위해 이렇게도 저렇게도 시도해 보자는 생각은 하지 않는가. 
세상을 사는 확실한 의미 따위가 존재한다면 또 그 의미의 노예가 될 뿐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강제적인 의미가 없다는 것은 자유로운 의지로 나만의 인생을 살 수 있다는 뜻이라고는 생각지 않는가.
남에게 고용되는 처지를 선택하는 것은 자유의 9할을 스스로 방기하는 일이다. 인생 전부를 남의 손에 빼앗기는 것이다.

51. 그 어떤 국가도 불특정 다수의 것이 아니다. 듣기 좋은 그 어떤 말로 둘러대 본들 결국은 특정 소수의 것이다. 이 엄연한 진실을 무시하고 그 위에 이상적인 세계를 구축하려 해 봐야 헛수고다.

52. (국가는 당신을 모른다) 만약 특정 소수가 진심으로 국가와 국민을 위하는 길이 무엇인지를 생각하고, 또 진심으로 국가와 국민을 위할 수 있기를 바란다면 그렇게 일상을 적당히 보내지는 않을 것이다. 죽을 힘을 다해도 다 처리할 수 없는 일들에 시달려 하루가 다르게 말라 갈 것이다.
 게다가 그렇게 풍족하게 생활하지도 않을 것이다. 진지하게 국민의 행복을 바라는 행정가라면 적어도 생활수준을 평균 정도로 낮추었을 것이고, 좀 더 마음 있는 자라면 저소득층 생활에 맞추었을 것이다. 
수치심 때문에라도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국가를 통솔하는 자로서 자기 위치를 자각하고 책임감도 강했다면 국민 한 사람이라도 비참한 처지에 있을 때에는 도저히 참을 수 없었으리라.

53. 이것만 봐서도 그들이 어떤 목적으로, 무엇을 노리고 그 위치를 지향하고 또 차지하고 있는지를 알 수 있다. 입을 벌렸다 하면 ‘국가를 위하고, 국민을 위해서’라고 줄기차게 외치지만 실상은 그들 자신을 위함이다. 결코 다른 이유가 있어서가 아니다. 그들은 원래 돈과 지위 상승에 대한 욕망밖에 없는, 그 누구보다 심성이 비천한 이들이다. 보통 국민의 몇 배나 되는 풍족한 생활과 높은 지위를 그럴싸한 말과 엉터리 연극만으로도 간단히 거머쥐며, 이것들을 대대로 아니 영원히 누릴 수 있기를 바란다.

54. 막상 선거 철이 되면, 갓난아기는 물론 강아지에게까지 애교를 떤다. 온갖 사람과 악수를 하고 엉터리 노래까지 부르는가 하면 무릎 꿇고 울면서 애원하는 짓까지 거리낌 없이 해댄다. 이런 작자들이 그 대가로 국가와 국민에 대한 순수한 봉사라는 명예만을 바랄 리가 없지 않은가. 그런 고귀한 이념을 위해 그 굴욕적이고 수치스러운 선거전을 펼쳤을 리가 없다. 
이들의 가장 큰 목적은 필요 이상의 ‘풍족한 생활’이지 그 외에는 아무것도 없다.
욕망은 크나 능력은 부족한 작자들, 그저 튀고 싶거나 아버지가 닦아 놓은 기반을 고스란히 물려받으려는 작자들, 또는 지금까지 해 오던 일이 순조롭지 않거나 실력이 없어서 실패한 작자들, 세상에 이름을 알려 뭔가를 해 보려는 작자들, 그런 자들만 우글거리는 곳이 바로 정치판이다. 정상적인 인간이 발을 들여 놓을 곳이 아니다.

55. 양쪽이 똑같은 셈이다. 인간적인 수준이 너무도 낮은 탓에 그런 정부가 생겨난 것이다. 고매한 인간이 저열한 인간을 택할리 없지 않은가. 
그런 추악한 관계를 최대한 이용해서 국민의 대표 나부랭이가 된 작자들은 자신들에게 더러운 한 표를 던진 국민은 상상도 못할 막강한 자리에 올라서는 고작, 국가를 지배하는 실체인 대기업의 수하가 되어 이권과 금권에 들러붙는다.

56. 자신들에게 위협적이거나, 자신들의 방식이 잘못되었다고 외치고 공공연하게 반대하고 나서는 자들에게는 눈에 띄지 않는, 겉으로는 폭력이라는 것을 알 수 없는 더 음흉한 수법으로 채찍을 휘두른다. 그 자의 인생을 본인하고, 가능하면 암매장해 버리려 끈질기게 획책한다. 출세를 방해하거나 직장에서 쫓아내는가 하면, 아예 직장을 갖지 못하게 하는 등 사회적인 음지로 내쫓아 해가 없는 인간으로 만들어 버리는 것이다. 

57. 선택된 자나 선택한 자나 국가를 배신하는 악행을 저지른 것이다. 두 부류를 똑같이 부정하고, 철저하게 거부하고, 최대의 적이라 간주해야 한다. 혹시라도 같은 국민이라고 여겨서는 안 된다. 
세금을 포탈하거나 가로채려는 탐욕스러운 자들도 그렇지만, 그런 잡배를 자신들의 대표랍시고 국회로 보낸 자들 역시 국가의 적인 것이다.
(…) 인간으로서 질적 수준이 낮은 국민이 국가를 정의와 이상에서 점점 멀어지게 하는 최대 주범이다. 

60. (영웅 따위는 없다) 애당초 국가를 전적으로 책임지고, 국가를 위해 전심전력을 다할 고매한 저신과 능력의 소유자는 없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어쩌면 존재할지 모른다는 환상조차 단 한순간도 품지마라.
(…) 유사 이래 나라를 궁지에서 구한 영웅 중의 영웅으로 전승되는 이들도 그들에 얽힌 신화의 껍질을 냉정하게 하나하나 벗겨 내면 속물근성을 지닌 평범한 인간이었을 뿐이다.

61. 인간은 왜 영웅과 지배자와 강자를 원하는가.
인간은 모두 지배받고 싶어 하는 약자이기 때문이다.
한시도 안심할 수 없는 이 세상을 자신의 판단과 결단과 실천으로 살아가기 괴로워하는 것이 바로 인간이다. 그래서 가능하면 그 고통을 누군가 대신 없애 주었으면 하고 바란다.
 초식동물의 흔적인 그런 겁 많은 특질이 모여 불필요한 집단과 조직을 만들고, 사회와 나라를 이룬다. 그리고 그 세계를 반듯하게 관리할 능력이 있을 법한 인물을 추대해서는, 그를 따르고 충성할 것을 맹세함으로써 한순간이나마 안심하려 한다. 
(…) 강자와 영웅을 원하는 유치한 소망과 그들에게 무턱대고 의존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하기 짝이 없는 사태를 초래하는지 충분히 인식해야 할 것이다.
 권력이나 권위에 무조건 굴복하는 것이 얼마나 큰 비극을 불러오는지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64. (분노하지 않는 자는 죽은 것이다) 허호아된 이미지나 좇게 하는 인터넷 세계를 전부라 여기고, 아주 적은 돈으로 살 수 있는 당장 눈앞에 보이는 즐거움으로 뻥뚫린 마음을 메우려 몸부림치는 젊은이들의 허망하고 기이한 나날들.
 피할 수 없고, 피해서도 안 되는 싸움을 피하면서 잇달아 밀려오는 불안을 어떻게든 외면하려는 그들의 무의미한 생활.
(…) 정해진 운명이라는 인식밖에 없고, 절망적인 체념밖에 하지 못하는 젊은이들이 늘어 국가는 크게 안도하고 있다.
왜냐하면 더 바랄 나위 없는 국민이 되어 주었기 때문이다.
절대 반란을 일으키지 않는 모범적인 노예가 되어 주었기 때문이다. 
요컨대 국가가 바라는 대로 된 것이다.

66. 젊음의 상징인 분노의 정신은 죄 잃어버리고, 국가의 질서를 따르고 사회의 상식에 발맞추면서 어떻게 하면 이 세상을 무난히 헤엄쳐 나갈 수 있을지만 궁리하는 젊은이가 늘고 있다. 중장기적으로 보면 이 나라를 파멸로 이끌 파국의 씨앗이다.

68. 나는 모르겠다는 태도로 일관하면서 자기 일이 아니면 돌아보지 않는 삶의 태도를 근본적으로 바꾸지 않고 만화영화에나 나오는 강자를 기다리다가는, 정신이 들었을 때는 독재자에게 굴복해 소총을 들고 군가를 흥얼거리며 행진하고 있는 허울뿐인 자신을 발견하게 될지 모른다. 총알받이의 하나로 최전선에 배치되어 희생을 강요당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74. (머리는 폼으로 달고 다니나) 게임이나 그와 유사한, 너무도 내향적이고 유치한 가상현실 놀이에 푹 빠져 마음이 파괴되고 인격이 붕괴된 성격 파탄자가 될 것인가, 아니면 세상의 모순과 국가의 악을 일일이 날카롭게 지적하고, 정의란 이념을 드높이며 마침내 하나가 되어 봉기하는 젊은이가 될 것인가. 

76. 어리석은 자가 될 것인가 아니면 현명한 자가 될 것인가. 이는 지능지수나 학력차로 결정되지 않는다. 신문 사회면을 떠들썩하게 하는 강도나 살인 같은 명명백백한 악이 아니라 눈을 부릅뜨고 잘 봐야 알아볼 수 있는, 언뜻 선처럼 보이지만 정의의 옷을 걸쳤을 뿐인 악을 간파할 수 있느냐 없느냐로 결정되는 것이다.
 간파하는 것을 넘어 평소에도 그 속셈에 넘어가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덫을 설치하려는 자들을 멸시하고 혐오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통쾌하게 한 방을 날릴 각오와 실천력을 갖고 잇지 않으면 진짜 현명한 사람이라고는 하기 어렵다. 

76. (머리가 좋다는 것은 홀로 살아가려는 의지가 강하다는 것이다) 정말 좋은 머리에 관해 운운할 때에는, 가장 먼저 의지가 얼머나 강한지를 문제 삼아야 한다. 오로지 자기 힘만으로 살아가려는 의지 여부에 따라 머리의 좋고 나쁨이 갈린다.
그러니 자립의 정도가 그것을 결정하는 셈이다. 자립에 반하는 삶의 방식은 곧 명석함이 부족하다는 것을 뜻한다. 자립이란 인간이 약한 존재라는 사실을 충분히 곱씹은 후, 강한 인간을 지향하면서 과감하게 분투하지 않으면 가능하지 않다.
독서와 우애, 교양만으로는 그 왕도를 터득할 수 없다. 혼자 힘으로 이 가혹한 세상을 끝까지 살아 보겠다는 마음가짐이 얼마나 강하고 굳은지에 모든 것이 달려 있다.

102. 안정은 언제나 겉보기에 불과할 뿐, 한 치 앞에는 칠흑 같은 어둠이 기다리고 있다. 안정은 망상이거나 환상에 지나지 않는다. 안정은 아버지의 무사안일주읭에서 태어나고, 어머니가 심어 준 신기루에 불과하다. 아무리 좇아 가도 멀어지기만 하지, 손에 잡히는 일은 없다.
 설사 안정된 생활이 실제로 존재한다 쳐도, 그런 생활이 대체 뭐가 재미있다는 것인가.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 인생, 내일 또는 미래의 자신이 어떻게 변해 있을지 짐작도 할 수 없는 두근거림과 설렘의 연속 속에서 진정한 충만감을 추구하는 것이야말로 의미 있는 삶이 아닌가.

105. 자유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가.
하루 세 끼를 먹고, 그럭저럭 남과 같은 생활을 하고 있는데도, 왠지 하루하루가 밋밋하고, 살아 있음을 진심으로 즐거워하는 일도 없고, 새 아침을 맞아 본들 마음에서 우울함이 떠나지 않는 원인을 찾아본 일이 있는가.
그 이유를 알고 있는가.
인생이란 그저 그런것이라고 믿는 것은 아닌가.
동물원의 동물이나 애완동물이 아닌, 즉 야생에 사는 동물들이 그렇게 가혹하고 불안정한 환경에서도 어떻게 그렇게 생기 발랄할 수 있는지 생각해 본 적이 있는가.
 그들은 태어난 순간부터 죽음이 찾아오는 순간까지 끊임없이 위험에 노출되어 있지만, 수많은 위험과 정면으로 맞서는 데서 오는 충만감으로 삶을 이어 간다. 긴장으로 점철된 하루하루를 즐기는 것이 몸에 배어, 비록 수명은 인간보다 훨씬 짧아도 삶의 충만감은 인간과 비교할 수 없다. 이런 충만감이야말로 이 세상을 사는 자로서 누려야 마땅한 진정한 행복이라는 것을 온몸과 오감으로 확신하고 있는 것이다.

107. (자유를 방기한 사람은 산송장이다)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자유 안에서만 빛나도록 생겨 먹었다는 철칙을, 그 우선권을 가벼이 여겨서는 안 된다. 
 어떻게 살든 본인 멋대로라는, 자유와 함께하는 삶만이 존재의 기반이라는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109. 마음을 갉아먹고, 정신을 썩게 하고, 생기를 빼앗아 간다. 그러다 끝내는 혼에도 녹이 슬어 비인간적인 존재로, 자신에게도 반발하지 못하는 로봇 같은 무기물로 기울어 간다.

119. (신 따위, 개나 줘라) 그렇다. 현실을 직시하지 못하는 소심하고 게으른 자들은 그럴싸해 보이는 자들에게 지속적으로 속고 싶어 한다. 도취 상태로 평생을 지내고 싶어 하는 알코올 의존증자들과 유사한 길을 걷고자 한다.

129. (당신 안의 힘을 믿어라) 자기 신뢰의 습관을 터득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가장 큰 수확은 전 생애에 걸친 목적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이다. 자기만의 흔들림 없는 목적이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자립의 정도를 판단할 수 있다.
 살아가는 자기만의 목적을 구체적으로 갖고 있고, 그 목적을 향해 하루하루 매진하면서 충만감을 느끼느냐 아니냐는 독립한 인간이 되었는지 아닌지를 판단하는 중요한 기준이다. 그리고 그럴 만한 목적이 생겨야 비로소 인간으로 살고 있다 할 수 있는 것이다.

162. 진심으로 상대를 배려하는 마음이 딱 일치하는, 연애의 핵심이며 기본 중의 기본인 것을 싹 무시하고, 자신이 혹 불이익을 당하지는 않았을까 노심초사하는 연애 놀이는 몇 번을 한들 행복이라는 종착역과는 한참 거리가 멀다. 그런 연애는 분노와 절망만 남기는 어리석은 행위의 반복에 불과하다.

164. 정신을 바짝 차리고 이성과 지성을 무기로 싸우면 활기차게 살 수 있는 남자가 본능과 직결된 연애를 인생 최고의 목적으로 삼다니, 너무도 한심한 일 아닌가.
 남자의 정욕은 욕망 중에서 겨우 한 부분에 불과하다. 젊음이 넘쳐 나는 청춘 시절에는 그것이 전부인 한때가 있다. 하지만 오래 지속되지는 않는다.
 정상적인 성장 과정을 거쳐 어엿한 어른이 된 남자의 두뇌와 근육은 대부분 이 세상을 헤쳐 나가는 일과, 몸을 써서 처자식을 지키는 일에 무게를 두도록 만들어져 있다. 한마디로 남자는 일을 무엇보다 우선시한다. 늘 가족 전체를 배려하고, 주변을 경계하면서 닥쳐오는 이런저런 위험에 대처하고, 그런 일들에 몰두함으로써 생의 보람과 충만감, 쾌락 등을 느끼는 체질인 것이다.

166. 동물에게 있어 이성을 고르는 것은 지상 최대의 과제이다. 특히 수컷에게 중대한 일이다. 인생의 반려를 제 손으로 선택할 수 없다거나 그럴 마음이 전혀 일지 않는다면, 생물로서 치명적인 결함을 지녔다 하지 않을 수 없다.
 그 목표를 실현할 수 있는 힘을 지닌 시기는 기껏해야 서른 살까지다. 이성에 대한 순수한 관심이 정점을 찍는 시기, 뭐가 뭔지 모른 채 반이성적인 감정과 충동이 거듭 활화산처럼 폭발하면서 연애를 하고 주변의 반대를 무릅쓰고 결혼도 했다면, 훗날 땅을 치며 후회한다 해도 그것이야말로 진정하고 순수한 사랑이었으니, 

171. (청춘, 인생은 멋대로 살아도 좋은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잠재적인 다양한 능력을 갖고 있다. 이를 스스로 발견하는 것은 자기 인생을 충실하게 하기 위해 빼놓을 수 없는 필수 조건이다. 발견을 할 수 있느냐 없느냐, 또는 그것을 찾아낼 마음이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삶을 위한 삶인지 죽음을 위한 삶인지가 뚜렷하게 갈린다.

172. (생각 좀 하고 살아라) 약한 인간에게 유일무이하고 강력한 무기인 그 훌륭한 뇌를 그냥 썩히며 평생을 사는 자는 안이든 밖의 위기든 이겨 낼 수 없다.

175. 자신을 스스로 단정하면 단정할수록 정답에서 멀어질뿐, 무슨 일이든 직접 부딪쳐 보지 않고는 알 수 없다는 얘기다.

175. 다 도전해 보라고 젊음이 있는 것이다.

180. 두개골 안에 꽉 들어차 있는 것은 과연 무엇인가.
곰팡이가 피어 버릴 수밖에 없는 된장인가.
더 멋지게, 더 인간답게 살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지혜의 샘이 바로 뇌라는 것을 잊었는가.
아무리 애써도 다 쓸 수 없는 양의 뇌를 갖고 있는 이유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있는가.
사람은 생각하기 위해 태어나고, 생각함으로써 생명을 불태우고, 생각하기에 존재 의의가 있다. 이 확고하고 엄연한 진리를 묵살할 작정인가.

181. (인간이라면 생각하고 생각해 재능을 찾아야 한다)무적의 무기인 원대한 목적을 품으려 하지 않고, 누구도 사랑도 미워도 하지 않으며, 비굴한 신조와 영악한 사려분별에 매달리고, 눈앞의 야욕만 보며 사는 자는 자신의 수명을 손가락으로 꼽을 뿐인 인생을 보낼 수밖에 없다.
 생애를 다 바쳐도 좋을 만큼의 궁극적인 목표와 목적은 환영 따위가 절대 아니다. 차분히 기다리고 말없이 시시각각 관찰하는 끈질김만 잃지 않는다면, 반드시 찾을 수 있고 언젠가 만날 수 있는 현실 자체이다.
 전심전력으로 노력할 가치가 있는 목적을 향해 길 아닌 길을 걸어가는 자에게 온갖 장소는 보고일 수 있다.
 또한 목표 중의 목표, 목적 중의 목적은 온 정력과 인생을 쏟아 부어도 발전과 진보가 멈추지 않을 만큼 심오한 것이어야 한다. 게다가 아무도 발을 내딛지 않은 미지의 세계와 통하는 것이어야 한다.
 한 번 그것을 발견하고 그 길에 발을 디딘 자는 거짓 삶과 진정한 삶을 구별할 수 있다. 나아가 수많은 사람이 혈안이 되어 추구하는 행복, 즉 단순히 본능을 만족시키기 위한 공허한 충만감 따위는 상대하지 않게 된다.
(…) 그리고 목표와 목적을 찾기 위한 재능을 스스로 긴장을 늦추지 않는 각고의 노력으로 갈고닦는다. 더 몰두해 핵심에 가까이 다가갔음을 자각했을 때, 그렇게 집요하게 따라다니며 사람을 꼼짝 못하게 하던 고독에 증오심을 품지 않게 된다. 더없는 환희의 샘을 얻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고독이야말로 친애하는 친구였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185. (인생은 멋대로 살아도 좋은 것이다) 진정한 목적을 지닌 자는 타인과 교류하는 것을 성가셔 한다. 
투신할 만한 가치가 있는 목표가 생긴 순간 시간이 귀중해져 인간관계를 꼭 필요한 범위로 좁힌다.
(…) 만약 태어나기 이전에 태어날 확고한 의미와 흔들림 없는 목적이 마련되어 있었다면, 사람은 그 의미와 목적의 노예가 되어 오히려 그것들을 잃고 말 것이다. 
 의미도 목적도 주어지지 않는다는 것은 즉, 스스로 찾을 수 있다는 의지의 자유로움이 존중된다는 뜻이며, 의지의 세계에는 정해진 것이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요컨대 스스로 그것들을 발견하면서 멋대로 사는 것이 좋다는 영원한 암시인 동시에, 그렇게 하지 않으면 사는 의미가 없다는 경고이기도 하다.

195. 생이 부동의 것이 되고, 생명이 전제적인 지배력을 아낌없이 발휘하여 우위를 점한다. 죽을 몸이라는 생각도 청춘의 찬란함과 다망함에 쫓겨 거의 사라진다. 나아가 자신이 두발로 짓밟고 있는 따분하면서도 가혹한 현실을 나름대로 즐기는 자로 세상에 뿌리를 내리게 되면 인생에 대한 부정적인 생각은 꼬리를 감추고, 오늘을 살고 또 내일을 살 수 있다는 기쁨을 발견하게 된다. 

196. 부끄러운 것들을 끊임없이 불태워 버리고, 도덕적인 악인 부정을 한 꺼풀씩 벗겨 내고, 꽃이 흐드러지게 핀 초원에 섰을 때처럼 가볍게 나날이 새로워질 수 있는 것도, 무미건조한 세상에 안주하면서 변화 없는 일상에서 감동과 감명거리를 찾아낼 수 있는 것도 모두 살아 있기에 가능하다.

201. 나는 칠십 가까이 살면서 절체절명, 고립무원, 사면초가 등의 궁지에야말로 명실상부한 삶의 핵심이 숨겨져 있음을 느꼈다. 그 안에서 필사적으로 몸부림치는 과정에야말로 진정한 삶의 감동이 있다고 확신했다.
 한 번 그 맛을 알고 나면 이성으로 자신을 계몽하면서 나아간다. 갖은 고난과 역경을 굳이 배척하려 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그런 상황에 단호하게 대항하는 것에 삶의 참된 가치가 있음을 깨닫고 ‘자기 의존’이야말로 궁극의 목적이라는 것도 알게 된다.
 마음의 나태를 가벼이 여기고 행동으로 이어지지 않는 지식을 열심히 쌓아 올리는 것은 지성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다.

202. 영원히 살아남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어차피 죽을 몸인데, 왜 그렇게까지 겁을 내고 위축되고 주저해야 하는가.
자신의 인생을 사는 데 누구를 거리낄 필요가 있는가.
그렇게 새로운 마음가짐과 태도를 무기로, 애당초 도리에 맞지 않고 모순투성이인 이 세상을 마음껏 사는 참맛을 충분히 만끽해라.



42. 리비아와 같은 제1국인 나라 역시 상대적으로 싼 가격에 원하는 공사를 발주할 수 있었으니, ‘제3국’ 노동자의 보이지 않는 희생의 수혜자다. 문제는 값싼 노동력에 기반한 경제성장 패턴에 안주하던 제1국의 정치 및 경제 분야의 파워 엘리트에게 있었다. 아시아 노동자가 저임금의 3D업종에 종사함으로써 해당 국가와 기업이 얻은 이익은 자국의 산업구조를 고도화하고 더 나은 일자리를 자국민에게 제공하는 데 쓰이는 것이 마땅하지만, 이익은 엉뚱한 방향으로 흘러갔다.

94. 독일과 프랑스/스웨덴/스위스 교육제도의 공통점은 우선 교육이 사회의 책임이고, 모든 인력은 국가의 자산이라는 확고한 인식이 있다는 것이다. 국가는 각 인력의 생산성을 최고로 높이고, 모두가 보람을 느끼며 기여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역할을 맡고 있다.

114. 현상을 뒤쫓아가며 허공에 팔을 허우적거리는 결과를 낳았다.

123. (한국인 기자는) 의견을 물어보면 입을 꼭 다문 채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틀릴까 봐 두려워서다.

128. 그래서 파이를 키울 게 아니라 피자를 만들어야 한다. 두께를 얇게 하되 공간을 넓혀 그 안에 더 많은 사람의 일자리와 소득을 담아내야 한다. (…) 그러려면 우선 기업이 채용 규모를 확대해 안정적인 일자리를 늘려야 할 것이다. 쓰고 버리는 일회용 인턴이 아니라 중장기적으로 고용이 보장되는 ‘좋은 일자리’를 늘려야 근로자가 안정적 소득에 기반을 둔 계획적인 소비를 할 수 있고, 이것이 다시 경기를 활성화하는 선순환 구조를 만든다.
 피자의 면적을 넓히려면 정규직의 양보 역시 필요하다. 급여가 다소 줄더라도 근무시간을 단축하고 더 많은 정규직 신규 채용이 일어나도록 해야 한다. 비정규직이 40~45퍼센트를 차지하고 인턴 채용이 버젓이 고용 통계에 잡히는 현실에는 담을 쌓은 채 정규직인 자신의 연봉을 올려봤자 그 돈은 백수인 자식의 끝없는 스펙 쌓기와 신형 스마트폰 구입비로 들어갈 뿐이다. 그러다가 은퇴할 나이가 됐는데도 자식이 여전히 아비의 지갑만 쳐다보고 있으면 그땐 어떡할 텐가. 방향이 전환되면 청년들뿐만 아니라 노인도 더 활발하게 피자 만들기에 참여할 수 있다. 스위스 국민의 2011년 현재, 평균 기대 수명은 82.2세로 세계 2위인데 은퇴 연령도 경제협력개발기구 회원국 평균보다 늦다. 더 오래 살고 늦게까지 일한다는 뜻이다.

129. 피자처럼 면을 넓혀서 그 위에 갖은 재료를 풍요롭게 얹고 익혀낸 뒤 공정하게 나누는 것이 해법이다. 하향 평준화하자는 얘기가 아니다. 성실하고 평범한 서민이 적정한 소비를 할 수 있어야 경제 성장이 가능하고, 그럴 때 부자 역시 사회로부터 존중받고 재산을 안전하게 지킬 수 있다. 가장 안전한 경비 업체는 사회 안전망이다.

132. 공존 사회는 생각만으로 실현될 수 없다. 첨단 건물을 지을 때처럼 정교한 설계도가 필요하다. 공존 사회를 설계할 때 으뜸이 되는 원칙은 사람을 중심에 두는 일이다. 국내총생산 성장률 수치나 고층 건물의 층수 따위가 아니라 함께 호흡하는 동시대인과 미래 세대를 위해 어떤 제도를 갖출 것인지, 어떤 환경을 조성해나갈 것인지가 핵심이 돼야 한다.
 또한 공존의 기술을 적용하는 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다면적 사고다. 상대적으로 취약한 산업부문이나 약자 계층이 사회의 다른 구성원에게 부담이 되는 존재라고 생각할 것이 아니라, 그런 부문이나 계층 역시 전체의 가치를 높이고 활력을 불어넣는 원천이 될 수 잇음을 인정하고 존중해야 한다. 예를 들어 농업은 농축산물을 생산하는 1차 산업인 동시에 관광업이며, 복지와 치유의 공간으로도 활용될 수 있다. 각 부분이 갖는 다면적 가치에 주목할 때 한층 더 섬세하고 유기적인 설계도를 그려낼 수 있다.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전쟁터에서든 정치 현장에서든 한 가지 목표만을 놓고 전략을 세운 적이 없었다고 한다. 그래서 늘 상대보다 앞설 수 있었고 승리할 수 있었다는 게 <로마인 이야기>의 저자 시오노 나나미의 분석이다. 카이사르가 했던 것처럼 정책을 세울 때도 반드시 복합적인 효과를 두루 고려해야 한다. 공존을 완성하기 위해서는 구성원이 각자의 몫을 감당해야 한다. 그 몫이란 이를 테면 지역 현안에 관한 주민 투표에 적극 참여하거나 자전거를 안전하게 이용하기 위해서 사전 교육을 받는 일, 애완 동물을 입양했을 때 세금을 내는 일 같은 것이다.

137. 스위스에서 농업정책을 설계하는 정부 담당자는 국토라는 큰 화폭에 조화로운 그림을 그리는 화가나 넓은 공원에 다양한 꽃과 나무를 심는 정원사와 같다.

147. 잠들지 않는 노동과 소비의 피해자는 바로 우리다. 쉴 새 없이 돌아가는 소비구조 속에서 소비되는 것은 상품이 아니라 바로 인간, 우리 자신이다. 할인점 영업시간에 대한 통제가 필요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한국, 특히 서울의 현실을 감안하더라도 밤 9시나 10시쯤으로 제한하는 게 옳다.
 또 대형 할인점이 유통시장을 전면적으로 장악하게 되면 고용 시장 전반을 악화시킨다. 대형 할인점은 불안정한 비정규직 고용을 창출하는 대신, 일자리의 주된 원천 중 하나인 자영업을 무너뜨리고 재래시장 유통 및 연관 산업의 일자리를 줄인다. 가령 신세계 이마트의 한 코너에서 피자를 구워 팔면서 5명의 직원을 채용하는 경우 가게 당 3명씩 채용할 수 잇는 동네 피자 가게 5곳이 문을 닫는다고 하자. 15명이 만드는 피자를 5명이 만들 수 있다면 더 효율적인가? 그렇다. 하지만 그 효율은 누구를 위한 것인가? 이런 식의 효율에는 일하면서 살아갈 인간의 존엄한 권리 따윈 끼어들 틈이 없지 않은가?
 이마트 피자의 등장을 계기로 한국 사회에서는 윤리적 소비를 둘러싼 논쟁이 벌어졌다. 윤리적 소비라 하면, 뭔가 어렵고 부담스러운 것을 도덕적인 이유로 마지못해 하는 느낌을 준다. 하지만 윤리적 소비야말로 일자리 확보와 노동조건의 개선, 연관 산업의 생존까지를 고려한 합리적이고도 전략적인 소비다. 시혜적 관점에서 소상인을 보호하기 위한 것만은 아니라는 얘기다. 
 자본의 효율이 시민의 행복은 아니다. ‘합리적 소비’라는 말은 지금까지 ‘싸게 산다’는 말과 같은 말이었다. 하지만 저가 유통이 산업구조를 어떻게 왜곡시키고 경제 전체에 장기적으로 어떤 폐해를 가져오는지를 설명하는 데는 긴말이 필요치 않다. 저가의 중국 제품으로 시장을 석권한 월 마트가 미국의 자영업과 중급의 소비재 관련 산업을 어떻게 망쳐놓았는지를 보면 답이 나온다. 효율을 최우선 가치로 믿으며 일할 공간을 압착해나가는 방식으로는 온전한 성장을 바랄 수 없는 시대다.

148. 숨막힐 것 같은 신자유주의의 철학을 부수는 간단한 방법은 ‘서로가 서로를 돌보는 것’이다. 제네바 시민이 대형 마트 노동자의 권리를 존중한 것처럼, 평범한 시민과 학생이 홍익대 미화 노동자를 감싸 안은 것처럼 서로를 챙겨야 한다.

153. 서방 선진국이 ‘힘의 이동’이라는 용어를 내세워 신흥 경제국을 향해 성장에 걸맞게 핵임 있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고 강조하는 것이 결국은 더 많은 시장 개방과 금융 규제 완화를 요구하는 ‘압력’의 다른 표현임을 중국은 너무나 잘 알기 때문이다.

160. 서울 도심에서는 지금 이 시간에도 여러 곳에서 재개발 사업이 이뤄지고 있고, 소중한 전통 공간과 ‘맛집’이 사라져가고 있다. 정확한 통계를 찾기는 어렵지만, 아마 한국전쟁 때 포탄에 파괴된 건물보다 토건족의 굴삭기에 무너져간 건물이 더 많지 않을까 싶다. 서울 시내에서 재개발이 이루어지게 되면 그곳에 살던 원주민은 인근 경기도의 위성도시로 밀려나야 한다. 위성도시의 인구가 증가하면 그곳에 또 건축 붐이 인다. 사람이 한곳에 정주하지 못하고 토건 자본의 장기판에서 이리저리 밀려다니는 ‘졸’ 취급을 받고 있는 셈이다.




따뜻한 경쟁

저자
맹찬형 지음
출판사
서해문집 | 2012-02-10 출간
카테고리
정치/사회
책소개
공존하는 경쟁, 경쟁하는 공존의 나라 스위스에서 배운다‘스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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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에게 보낸 편지

저자
앙드레 고르 지음
출판사
학고재 | 2007-11-27 출간
카테고리
시/에세이
책소개
세상은 텅 비었고, 나는 더 살지 않으려네. 우리는 둘 다, 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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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난 알게 되었습니다. 심각하게 구는 것, 권위에 순종하는 것 따위는 당신에게 늘 다른 세상의 일이겠구나 하는 것을요.
 하지만 이런 모든 것들로도 우리가 처음부터 하나로 묶여 있다고 느낀 그 보이지 않는 인연을 설명할 수는 없습니다. 아무리 우리가 뼛속 깊이 서로 다른 존재라 해도, 뭔가 근본적인 것을 공유하고 있다고 난 느꼈습니다. 뭐랄까, 원초적 상처라고 할까요. 앞에서 말한 ‘근본적인 경험’, 즉 불안의 경험 말입니다. 우리둘의 경험의 성격이 똑같은 건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상관없었어요. 그 경험의 의미는 당신이나 나나 우리가 이 세상에서 확실한 자리를 갖고 있지 않았다는 뜻이었으니까요. 그 자리는 오직 우리가 앞으로 만들어가야 하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자율성을 받아들이며 살아야 했고, 나중에 나는 알았습니다. 그런 일에는 나보다 당신이 더 잘 준비된 사람이었다는 것을.

30. 당신은 내가 몸과 마음 모두를 사랑할 수 있고 함께 있으면 깊은 공명을 느끼는 최초의 여자였습니다. 한마디로 당신은 나의 진정한 첫사랑이었던 것입니다. 만약 내가 당신을 진정으로 사랑할 수 없다면, 나는 결코 세상 어느 누구도 사랑할 수 없을 것입니다. 예전에는 입밖에 낼 줄 몰랐던 말들을 나는 찾아냈습니다. 우리가 영원히 함께했으면 한다는 마음을 당신에게 전할 수있는 말들을.

40. 그때는 내 기분이 왜 그리 침울했는지, 그 이유를 당신에게 결코 말해주지 않았습니다. 아마도 부끄러웠던 것이겠지요. 당신의 흔들림 없는 의연함, 미래를 신뢰하는 당신의 믿음, 주어지는 행복의 순간을 포착할 줄 아는 당신의 능력, 그런 것이 감탄스러웠습니다. 어느 날인가 당신이 베티와 생제르맹 광장의 어느 작은 공원에서 커다란 버찌 아이스크림 하나로 점심을 때울 수 있었던 것, 그것도 나는 좋았습니다. 당신은 나보다 친구가 더 많았습니다.

55. 그 책의 출간으로 내 상황은 바뀌었습니다. 세상에 내가 있을 자리 하나를 그 책이 준 것이지요. 그 책은 내가 생각했던 것에 현실성을 부여했습니다. 그 현실성으로 말미암아 나는 스스로를 다시 규정하고 끊임없이 스스로를 넘어서야 했습니다. 타인들이 나에 대해 만든 이미지의 포로가 되지 않고, 또 객관적 현실에 의해 나와 다른 존재가 되어버린 산물(책)의 포로가 되지 않기 위해서 말입니다.

(…) 즉 나 자신의 의지로 할 수 있는 것보다 더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것, 나 자신에게 질문하는 것, 내가 혼자서는 규정하지 못했던 목적을 추구하는 것을 말입니다.

57. 끝났음을 받아들여야 한다. 즉 여기에 있음으로써 다른 아무 곳에도 없음을, 이것을 함으로써 다른 것을 하지 않음을 받아들여야 한다. ‘지금’이지, ‘결코’나 ‘항상’이 아님을 받아들여야 한다. (…) 오직 이 생밖에 없음을 받아들여야 한다. <늙어간다는 것>에서

59. <배반자>를 쓰면서 나는 ‘책 한 권을 쓰는’ 것이 아니기를 바랐습니다. 연구 결과를 내놓고 싶었던 것이 아니라 진행중인 연구 자체를, 무언가가 갓 태어나는 상태를 발견하고, 그러다 망치기도 하고, 잘못된 길로 들어서기도 하면서, 완성되지 않은 하나의 방법을 더듬더듬 모색하며 만들어가는 연구 자체를 쓰고 싶었던 것입니다. “모든 것을 다 말하고 난 뒤에도 여전히 모든 것은 아직 말해져야 하는 상태로 남아 있다. 언제나 모든 것은 아직 말해져야 하는 상태로 남을 것이다.” 다시 말해 중요한 것은 ‘말하는 행위’이지 ‘말한 내용’이 아니었기에, 나는 내가 이미 쓴 것보다 앞으로 이러서 쓸 수 있는 것에 훨씬 더 관심이 많았습니다. 글쟁이 혹은 작가라면 누구나 그럴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72. 당신은 내게 삶의 풍부함을 알게 해주었고, 나는 당신을 통해 삶을 사랑했습니다. 아니, 삶을 통해 당신을 사랑한 건지도 모르겠군요.

74. 낭비, 스모그, 케첩 바른 감자튀김과 코카콜라, 거칠고 지옥 같은 리듬의 도시생활로 대표되는 미국 문명을 혐오했었지요. 그러나 머지않아 이 모든 것이 파리에도 예외 없이 들이닥치리라는 것을 우리는 미처 짐작하지 못했습니다.

85. 당신은 ‘다른 세상’을 보고 온 사람입니다. 한 번 가면 아무도 못 돌아오는 나라에서 돌아온 사람입니다. 그 때문에 당신의 눈빛이 달라졌습니다. 우리는 약속이나 한듯 똑같은 결정을 내렸습니다. 낭만적 영어로 하면 이렇게 요약되지요. 
There is no wealth but life. 
삶이 없는 한 풍요도 없다. (존 러스킨)

87. 내게 본질적인 단 하나의 일은, 당신과 함께 있는 것이라고 썼지요. 당신이 본질이니 그 본질이 없으면 나머지는, 당신이 있기에 중요해 보였던 것들마저도, 모두 의미와 중요성을 잃어버립니다.

89. 당신은 이제 막 여든두 살이 되었습니다. 그래도 당신은 여전히 탐스럽고 우아하고 아름답습니다. 함께 살아온 지 쉰여덟 해가 되었지만, 그 어느 때보다도 더,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요즘 들어 나는 당신과 또다시 사랑에 빠졌습니다. 내 가슴 깊은 곳에 다시금 애타는 빈자리가 생겼습니다. 내 몸을 꼭 안아주는 당신 몸의 온기만이 채울 수 있는 자리입니다. 

(…) 세상은 텅 비었고, 나는 더 살지 않으려네.(캐슬린 페리어의 노래)






151. 마을카페와 같은 공동체 경제의 핵심은 매출이 아니라고 강조했다. 마을카페를 통해 마을 사람들 사이의 관계망을 만들고, 마을 내에서 돈이 순환될 수 있다면 이는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무형의 자산이 된다는 것이다.




적게 일하고 더 행복하기

저자
후지무라 야스유키 지음
출판사
북센스 | 2012-09-24 출간
카테고리
정치/사회
책소개
3만엔 비즈니스, 상생을 추구하는 나눔의 비즈니스[3만엔 비즈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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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화를 실천하기 위한 방법

- 돈과 자원과 아이디어, 사람이, 삶이 뿌리내리는 지역에서 순환하는 경제
- 적절한 가격 책정하기 : 먼저 가치(고객에게 창출되는)를 정해봅니다. 자기 마음대로 정하는 것이 아니라 소비자 입장에서 정합니다. 그런 뒤 가치보다 낮은 가격을 붙입니다. 그리고 원가와 경비를 가격보다 충분히 낮출 수 있도록 만들 수 있는 사람과 판매하는 사람이 머리를 맞대고 노력합니다.
- 자급자족, 생태마을, 오락이 되는 공동생산
- 지역 순환형 경제 시스템

70. 지금 지방은 두 부류로 나뉘어져 있습니다. 날로 존재감을 잃어가면서도 어떻게든 중앙 집권 시스템 안에서의 생존을 도모하는 곳과, 자립형 및 지속형 시스템을 다시 회복하려고 하는 곳입니다.
 전자는 기업과 토건사업 유치, 관광사업 및 지역 특산품 판매 촉진 등을 위해 노력하지만 대부분 좋은 결과를 얻지 못합니다. 실속 없고 단기적 이익에만 치중하는 '거품'일으키기에 여념이 없다보니, 중앙이나 지방 모두 후유증에 몸살을 앓고 키우려는 파이는 작아지기만 합니다. 후자는 아이디어 부족, 자금 부족, 시장 부족, 인재 부족, 설비 부족, 주민 이해 부족으로 진전이 더딥니다. 어느 쪽이든 지방의 고용문제 해결은 요원하기만 한 것 같습니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려면 일본 경제 시스템이 중앙 집권 시스템에서 지방 분권형이나 지역 순환형으로 되돌아가는 것만이 정답이라고 생각합니다.  새로운 시스템 안에서만 지방에 질 높은 일자리를 만들 수 있습니다. 이러한 전환은 GDP의 감소, 이권의 상실, 일시적인 고융의 축소 등 '아픔'도 동반할 것입니다. 때문에 현재 시스템이 '막장'에 이르고 경제 파탄이 일어난 후에나 이루어지지 않을까 하는 걱정도 듭니다. 문제는 그날이 올 때까지 과도기에도 지방에서 일자리를 만들어 나갈 수 있을까 하는 것입니다. 미리 준비를 해두면 파국을 맞더라도 출구를 찾아가는 훌륭한 이정표 역할을 할 수 있습니다.
 과도기에는 변화가 여러 지점에서 조금씩 다양하게 일어납니다. 이를 달리 해석하면 작지만 수많은 기회가 생긴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결국 장소와 테마를 폭넓게 선택하면 비즈니스 기회는 그만큼 많아집니다. 변화의 방향은 변화를 추구하는 이들에게만 보입니다. 변화의 시기에는 그 변화를 따르거나 변화를 일으키는 비즈니스가 유망하다는 걸 염두에 두시기 바랍니다.

83. (지역화의 조건) 
1) 기존 이권은 가능하면 침해하지 않는다. 
2) 소비자의 이점이 월등히 많아지도록 한다.
3) 새로운 고용을 창출한다.
4) 사회성이 높아지게 한다.
5) 비즈니스가 성립되도록 한다.
6) 작게 시작한다.

- 지역화를 추진하는 비즈니스 모임
85. (에너지 지역화와 바이오 매스) 
바이오매스 에너지(biomass energy, 재생에너지의 일종으로 살아있거나 최근에 죽은 생물 물질을 원료로 이를 연소하여 그 열을 이용하거나, 알코올이나 메탄가스와 같은 다른 화학물질로 변환시켜 연료로 사용하는 것)를 사용하는 건 환경에 좋은 일입니다. (...) 에너지를 지역화 하는 게 중요합니다. 지역 자원을 사용하고, 지역 고용을 창출하고, 지속성을 가지도록 해야 합니다.
86. 폐플라스틱이 석유로 ?
87. (현대사회는 의존사회) 자급자족이 선택이 아니라 필수였던 궁핍의 시대에서 벗어나, 지금은 과거와 비할 수없을 정도로 물질적 풍요를 누리고 있습니다. 자급률은 경제 성장률에 반비례해서 현저하게 낮아졌습니다. 관점을 바꾸어 보면, 의존도를 높이는 식으로 경제 규모를 키워왔다고 할 수도 있습니다. 의존성이 지나치면 여러 가지 문제가 발생한다는 건 상식입니다. 푸드 마일리지가 그 중 하나입니다.
 일본인은 평균적으로 지구를 1/4바퀴를 돌아서 온 음식을 먹는 걸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렇게 생산자와 소비자가 멀어지면, 생산지를 속이거나 농약의 과다 사용 같은 문제들이 필연적으로 생겨납니다. 또 의존성이 심해지면 스스로 생각하고 문제를 해결하면서 살아가는 능력이 줄어듭니다. 우울증, 면역력 감퇴, 성인병 증가도 당연한 일입니다. 이게 자급률을 높이는 일이 선택이 아니라 필수인 이유입니다.

93. '지출이 적은 라이프스타일'은 지방에서 일자리를 만들 때 가장 중요합니다. 지출을 줄이는 것은 가정의 자급률을 높이는 것과 직결됩니다. 특히 식량과 에너지는 가능하면 스스로 확보하도록 합니다. 중요한 점은 이런 과정을 즐길 수 있어야 한다는 겁니다. 자급 생활이 초라하거나 비참하다고 느끼면 절대로 지속할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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