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저자
- 이원재 지음
- 출판사
- 한겨레출판사 | 2013-04-18 출간
- 카테고리
- 정치/사회
- 책소개
- ‘모두들 열심히 살고 있는데, 왜 현실은 불만스럽고 미래는 불안...
8. 나라는 늘 우리에게 설명했다. 한국은 열심히 일했고, 눈부신 성공을 거뒀고, 이미 선진국에 진입했다고. 열심히 일한 사람에게는 행복할 권리가 있고, 소박한 꿈은 이루어져야 한다. 그런데 왜 아직도 행복하지 않고, 소박한 꿈을 이루기는 더 어려워진 걸까? 사람들이 욕심을 부려서일까? 노력하지 않아서일까? 이해하기 어려웠다. 이 나라는 도대체 어떤 나라일까?
모두가 노력해도 모두가 행복할 수 없다면 이는 결국 나라를 운영하는 시스템과 정책의 문제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 정치의 문제이다.
9. 이 책은 미래 사회가 지금과는 어떻게 달라질 것이고, 우리는 무엇을 준비해야 하는지를 살펴보기 위해 집필되었다. 당장의 영리보다는 가치와 협력을 추구하는 경제가 주류로 떠오를 것이다. 삶과 더 가까워진 정치가 필요해질 것이다. 혁신적으로 경영되는 비영리기관이 사회변화의 동력이 될 것이다. 느리고 진지하면서도 새로운 미디어가 갈급해질 것이다. 이런 것들이 왜 필요하고, 어떻게 만들어가야 하는지를 뜯어봤다.
11. 하지만 궁극적으로 내가 할 일을 하지 않으면 변화는 일어나지 않는다. 소비도 투표다. 내가 어디로 쇼핑하러 가서 무엇을 사는지도 세상의 방향에 영향을 미친다. 주말에는 어디로 놀러 가는지, 여윳돈은 어디에 투자하는지, 어떤 회사에서 일하는지, 친구나 부모나 자녀와 어떤 대화를 나누는지도 모두 세상의 방향에 영향을 미친다. 결국은 그 모두가 정치다.
20. ‘먹고사니즘’ : 나에게 경제적으로 도움이 된다면 다른 고려는 하지 않는 이기적 이데올로기
24. 정치는 민의를 대변하는 것이라 했다. 그래서 국민이 원하는 변화를 이끌어내는 게 새로운 정치라고 했다. 그런데 국민이 정치에서 원하는 게 바로 이런 것이라면? 민의가 바로 욕망의 덩어리라면? 원론적으로 정치는 그 민의조차 충실하게 대변하는 게 본연의 임무일 텐데, 그 과정에서 정치가 삶을 더 나은 방향으로 변화시킬 수 있을까? 오히려 공항과 고속도로와 다리 건설을 향한 그 욕망이, 공동체 전체에 좀 더 장기적으로 도움이 되는 다른 무언가를 향한 욕망으로 바뀌고 나서야 정치가 바뀔 여지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정치가 삶을 바꾸는 게 아니라 삶이 정치를 바꾸는 게 아닐까?
30. 사실 중요한 것은 그다음이다. 민주화와 산업화가 훌륭하게 달성되었는데도 한국인들은 여전히 목이 마르다. 이유는 여러 가지로 진단되겠지만, 분명 더 나은 삶을 살고 싶어한다. 그 욕망이 현실에 대한 불만과 미래에 대한 불안으로 이어지고 있다. 현재에 만족스러워하거나 행복해하는 사람은 적고, 미래에 대한 불안 탓에 이미 가진 재산을 불리거나 가진 일자리를 지키는 데만 더 집착한다. 자유로운 삶을 꿈꾸면서도 결코 자유로워지지 못한다. 산업화되고 민주화되었지만, 이상하게도 대한민국은 여전히 불행하다.
31. 산업화와 민주화가 둘 다 성공적으로 이루어졌지만, 사람들은 여전히 만족하지 못한다. 현재에 대한 불만은 커지고 미래에 대한 불안이 영혼을 잠식하고 있다. 이런 문제는 세 가지 반응으로 나타난다. 산업화 과제에 대한 그리움, 민주화 과제에 대한 여전한 갈증, 그리고 새로운 과제에 대한 막연한 열망이다.
산업화와 민주화는 내용이 분명하지만, 새로운 과제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어떤 열망이 있는지 그 누구도 아직 비전을 그려내지 못했다. 그런 탓에 과거의 산업화와 민주와 논리가 담론 지형을 장악하고 있다. 새로운 과제를 비전으로 제시하는 리더가 없었던 것은 물론이고, 대중조차 스스로 무엇이 결핍되었고 무엇이 필요한지 구체화하지 못하고 있다.
35. 목마름은 있었지만 목마름을 달랠 물이 어떤 종류여야 했는지는, 물을 마실 사람도 물을 줄 사람도 알지 못했다. 그래서 그저 마시던 종류의 물만 계속 찾았던 셈이다. 거처를 찾지 못한 욕망은 엉뚱하게도 증오와 대립의 에너지로 이어졌다. 서로를 인정하지 않는 싸움이 됐다. 새로운 시대에 대한 열망은 산업화와 민주화라는 과거 구도 속에 묻혀버렸다.
39. 미래 비전을 놓고 다투는 경쟁이어야 할 선거가, 상대를 없애야 이기는 전쟁이 됐다. 미디어는 이를 증폭시키는 플랫폼이었다. 상대를 적으로 규정하고 전쟁을 벌이는 선거가 될 가능성이 가장 높은 51대 49의 대결 상황에서, 미디어가 오히려 증오와 갈등을 키운 것이다.
47. “우리의 논쟁은 너무 극단적으로 대립되고 있다. 우리의 토론이 상처를 치유하는 방식인지, 더 상처를 주는 것인지 확인하기 위해 잠시 토론을 중지하는 것도 필요하다. 이번 사건을 정치적으로 이용해 상대를 비난하지 말고, 상대방의 이야기를 더 신중히 듣고 대안을 찾으며 도덕적 지혜를 기르자. 이 비극은 현재 우리의 시민의식이 부족하다는 사실이 아니라 더 높은 시민의식이 부족하다는 사실이 아니라 더 높은 시민의식과 공공담론을 갖춘다면 아무리 어려운 난관도 극복할 수 있다는 사실을 가르쳐준다.” 버락 오바마
51. 결국 그 행위가 무엇이냐보다는 누가 그 행위를 했느냐가 판단의 근거가 된다. 이게 바로 절반으로 나뉜 51대 49 사회의 중요한 특징이다. 다양한 의견을 정치적으로 표출하고 토론할 길은 없다. 정치세력은 단순히 두 개로만 나뉘어 있다. 그러니 증오가 판치는 것이다.
(…) 증오의 정치는 이렇듯 증오의 사회로 확대재생산된다.
56. 우리 사회의 갈등과 대립이 비단 정책 때문만은 아니라는 것이 더 명확해진다. 나와 맞서는 상대편이기 때문에 증오할 뿐 그들이 펼친 구체적 정책이나 국가의 운영방향 때문에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는 이야기다. 다시 말해 ‘산업화’란 특정한 정책 아이디어나 비전이 될 수 없다. 과거를 떠올리며 한 집단 사람들을 뭉치게 하는 신화일 뿐이다. 사실 산업화 세력에게 ‘산업화’는 의미가 없다. ‘세력’만이 의미 있을 뿐이다.
69. 벌어먹고 사는 일에만 가치를 부여하는 사회에서는 벌어먹고 사는 일에만 가치를 부여하는 정치가 나올 수밖에 없다. 우리 일상을 지배하는 이념이 ‘먹고사니즘’이라면 정치이념도 거기에 수렴할 수밖에 없다.
선거기간 동안 후보들은 정치를 바꿔 삶을 바꾸겠다고 말했다. 많은 사람이 그 말을 믿고 지지했다. 하지만 근본적으로 말하자면 삶이 바뀌지 않으면, 즉 사회가 바뀌지 않으면 정치도 바뀌기 어렵다. 정치혁신을 원한다면 사회혁신을 함께 고민해야 한다.
생각의 근본주의, 실천의 점진주의
근본주의(radicalism)는 사회문제 해결을 추구할 때 궁극적이고 근본적인 해결책을 모색하는 사회디자인 방법이다. 단기적인 문제를 해결하는 것보다는 장기적이고 지속적인 성과를 추구하는 방법이다. 문제의 표피적 해결보다는 뿌리를 뽑아내는 과감한 해결을 지향하는 방법론이다.
점진주의(incrementalism)란 가장 이성적인 결정이 아니라 가장 알맞은 결정을 지향하는 사회디자인 방법이다. 즉 여러 이해 관계자들의 의견을 반영하고 다양한 분야에 미치는 영향을 고려하면서 충분한 시간을 가지고 변화를 추구하는 것이다. 또한 다양한 경로가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면서 한 가지 경로에서 실패하면 다른 경로로 목표를 추진하는 방법이다.
목표는 근본주의적으로 세워야 한다. 근본적으로 우리 삶을 성찰해서, 궁극적으로 우리가 지향하는 사회가 무엇인지를 찾아내야 한다. 거기에 근거해 목표를 세워야 한다. 반대로 그 목표를 실현하는 방법은 점진주의적이어야 한다. 외부환경은 수시로 변한다. 모든 실험에는 실패가 따르기 마련이다. 따라서 단 한 가지 방법만이 문제를 해결해주리라는 기대는 버리는 게 옳다. 어떤 방법이든 일단 점진적으로 시도해보고, 성과가 나타나면 좀 더 시도해보고, 실패하면 한 걸음 물러나 다시 방법을 연구하는 실용적인 태도가 필요하다.
지금 한국정치가 던져야 할 올바른 질문은 무엇일까? 산업화, 민화를 달성한 우리 시대의 새로운 과제는 무엇일까? 바로 이런 게 아닐까?
“우리는 다음 세대에게 어떤 사회를 물려줄 것인가? 궁극적으로 그런 사회를 만들려면 지금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며, 그런 삶을 사는 데 필요한 법과 제도와 문화는 어떤 것일까?”
생각의 근본주의, 실천의 점진주의는 이런 올바른 질문을 던짐으로써만 가능하다. 이 질문으로부터 한국사회가 민주화와 산업화 이후 어떤 새로운 과제를 설정해야 하는지도 찾아 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과연 우리 사회와 우리 정치는 이런 질문을 던질 수 있을까? 쉬운 일은 아니다. 이런 질문을 제대로 던지려면 우선 삶에 대한 꼼꼼한 관찰과 진지한 성찰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말해 매우 높은 성숙도가 요구된다.
그 가능성을 탐지하기 위해, 먼저 우리의 고민거리인 ‘먹고사니즘’에 대한 성찰부터 시작해보자.
77. 우리는 왜 여전히 불행한가
사실은 산업화 과제가 모두 달성되었지만, 우리에게 채워지지 않는 어떤 종류의 허기가 남아 있다는 판단이 더 합리적이다. 1인당 국민소득이 1만 달러를 넘으면 부자나라가 되는 것처럼 이야기하던 때도 있었는데, 지금은 2만 달러를 훌쩍 넘은 상태다. 이제는 소득을 더 높이는 게 문제가 아니라, 소득 이외에 다른 어떤 것이 필요한지를 찾아내는 게 과제다. 무엇이 우리를 행복하게 할 수 있는지 우리의 구체적인 삶에 대한 진지한 성찰이 필요한 때인 것이다.
그 ‘다른 어떤 것’이 바로 새로운 시대의 과제가 되어야 한다. 물론 나라는 산업화되고 민주화되었지만, 그 혜택이 국민 전체에게 고르게 돌아가지는 않았을 것이다. 사회에서 상대적으로 느끼는 자신의 경제적 신분이 30년 전과 다를 바 없거나 더 악화됐을 수도 있다. 한 개인의 소득은 여전히 30년 전과 같을 수도 있다. 그에게는 산업화가 이뤄지지 않은 셈이다. 한 개인이 아무리 선거권을 행사했어도 사회가 별반 달라지지 않았다면 그 개인은 정치에 참여할 길이 전혀 없다고 느낄 수 있다. 그에게 민주화는 없었던 셈이다. 이런 이들에게는 여전히 ‘먹고사니즘’이 강력한 이데올로기가 될 수 있다.
하지만 여기서 다시 의문이 생긴다. ‘먹고사니즘’을 충실히 따라 개인의 소득이 높아지더라도, 결국 이 질문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소득은 늘었는데 왜 여전히 불행할까?”
문제를 근본적으로 다시 생각해봐야 한다. 1인당 월평균 20만 원을 벌던 사회에서 월평균 200만 원을 버는 사회로 바뀌었는데도 여전히 불행한 이유는 무엇일까? 아직도 뭔가 부족한 것일까, 아니면 뭔가 지나치고 넘치는 것일까? 우리가 정말 원하는 삶이 어떤 것인지를 정의하고 나서야 지금 무엇을 바꿔야 더욱 행복해질지 알아낼 수 있을 것이다. 그 삶이 좀 멀리 있더라도 궁극적인 목표를 알고 나면 당장의 실천에도 힘이 실린다.
대형마트 이야기부터 시작해보자.
80. 대형마트는 이미 우리 삶의 일부가 됐다. 집에서는 휴일이면 “마트가자”하는 이야기가 “공원 가자”하는 이야기처럼 자연스레 흘러나온다.
(…) 한 번쯤 근본적으로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내 삶에서 대형마트는 도대체 무엇일까? 이게 없던 시절의 삶은 어떻게 달랐을까? 한국경제에 또는 나와 우리 가족의 경제에 대형마트란 무엇일까?
한국경제에서 대형마트가 어떻게 성장해왔는지 한번 살펴보자. 한국에 본격적으로 대형마트가 생긴 것은 1993년이었다. 이마트는 그해에 첫 점포를 서울 창동에 냈다. 그리고 그 대형마트는 2000년 전국 171개로 늘었고, 2010년 437개까지 급증했다. 매출액도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다. 2000년 총 10조 6,000억 원이던 대형마트 총매출은 2011년 36조 6,000억 원까지 늘어났다. 1위인 이마트의 매출은 10조 9,390억 원(2012), 2위인 홈플러스는 9조 9,301억 원(2011)이 됐다.
이렇게 커지다보니 자연스럽게 비판도 터져 나왔다.
1) 우선 수수료율 문제가 있다. 대형소매업체 판매수수료율이 너무 높아 생산자들은 남는 게 없다. 판매수수료율은 2011년 정부 조사에서 25~40퍼센트에 이르는 것으로 나타났다. 1만 원짜리 물건을 하나 팔 때 대형마트에서 4,000원을 뗀다면 생산자에게 돌아오는 이윤은 사실상 매우 적다.
2) 대형마트는 대량구매를 하기 때문에 규모가 작은 가게들보다 월등히 높은 협상력을 갖는다. 이 협상력을 이용해 지나치게 가격을 낮춘다는 게 비판의 핵심이다.
3) 또 농산물 생산자의 생태계가 파괴된다. 대형마트와 거래하려면 엄청나게 많은 물량을 한꺼번에 공급해야 하기 때문에 중소 규모의 농민들은 감당할 수가 없게 되고, 중소 규모의 농민들은 감당할 수가 없게 되고, 그래서 소수의 기업형 부농만 살아남는다는 이야기다. 부익부 빈익빈의 생산자 생태계가 조성되고 만다는 것이다.
물론 대형마트도 할 말은 있다. 무엇보다 덩치를 키우는 만큼 일자리를 창출한다는 반론이다. 대형마트가 일자리를 늘린다는, 논리적으로 납득하기 매우 어려운 이야기를 이렇게 당당하게 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사실에 나는 자주 놀란다.
대형마트가 성장해 경쟁자들이 대거 몰락하면 일자리가 사라진다. 시장경영진흥원의 조사 결과에 따르면 대형마트가 창출하는 일자리보다 전통시장에서 없어지는 일자리가 더 많다. 2007년부터 2012년까지 문을 닫은 전통시장만 500개가 넘고 거기에서 생계를 꾸려나가던 상인들은 10만 명이 넘을 것이라는 추산도 있다. 기업형 슈퍼마켓 때문에 문을 닫은 동네 슈퍼마켓의 경우는 포함하지 않은 수치다.
기업형 슈퍼마켓 자체가 일자리를 크게 늘리지 않는다는 통계도 있다. 2001년부터 2006년까지 기업이 운영하는 소매업체들의 고용이 어떻게 변했는지를 살펴보니 오히려 2퍼센트가 줄었다. 대형마트의 화려한 성장 속에 정작 기업형 유통업의 고용은 준 것이다.
(…) 어떻게 따지든 ‘대형마트 일자리 창출론’은 말이 안 된다. 그런데도 대형마트 입점 때마다 지역 유지와 관공서 관계자들이 나와서는 요란하게 ‘일자리 창출 업무 협약식’을 하고, 기업에서는 자랑스럽게 언론에 홍보한다. 기가 막힐 노릇이다.
89. 그래도 여전히 한국인들은 대형마트를 찾는다. 대형마트가 일자리를 창출하는 것도 아니고 가격을 할인해주는 것도 아닌데도 주말이면 습관처럼 마트에서 시간을 보낸다. 대형마트는 여전히 일자리 창출을 자랑하고 입점하는 지역의 유지들이 앞장서서 그 점을 칭찬하고 나서기 일쑤다.
왜 그럴까? 이런 사실을 사람들이 정말 몰라서일까?
한국인들은 바보가 아니다. 잠시 내 마음속 욕망을 들여다보고는 나 역시 고개를 끄덕이게 됐다. 분명한 이유가 있었다. 누구도 드러내놓고 말하지 못하는, 우리 마음속 욕망에서 우러난 이유였다.
우선 일자리 문제와 연관해서 이야기해보자. 대형마트 직원들은 유니폼을 입고 일한다. 대부분 대기업 로고가 선명하게 찍힌 유니폼이다. 보수가 얼마든, 고용혀태가 정규직이든 비정규직이든, 업무가 고되든 그렇지 않든, 일단 자랑스러운 직장이다. 하루 종일 서 있어야 해도, 보수가 낮아서 불만이 있어도, 일단 최소한의 자존심은 지켜주는 직장인 것이다.
그 대형마트가 들어서면서 문을 닫아야 했을 슈퍼마켓 주인과 점원은 어땠을까? 일단 점원의 경우 아무리 대형마트보다 보수를 더 받는다 해도 그 자부심의 크기는 비할 수 없이 작았을 것이다. 허름한 청바지를 입고 점원과 함께 물건을 나르며 정리하는 주인의 경우도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또 소비자는 이들을 어떻게 어떻게 보았을까? 대형마트에서 유니폼을 입고 일하는 이들이 뭔가 좀 더 나은 여건에서 일하는 것 같다는 인상을 받고 이들이 다루는 상품이 더 깨끗할 것 같다는 선입견을 갖지 않을까? 내 자식이 만약 동네 슈퍼마켓 점원으로 일하는 것과 대형마트 점원으로 일하는 것 사이에서 고민한다면, 혹 동네 슈퍼마켓의 보수가 더 높더라도 대형마트 취업을 권하지 않겠는가?
“대형마트가 일자리를 창출한다”는 이야기가 사실이 아님에도 수긍하는 사람이 많은 이유는 우리 마음속에 이런 욕망이 숨어 있어서다. 이 욕망은 집단적으로 내면화되어 있다.
또 다른 측면을 살펴보자. 대형마트는 많은 가정에서 주말의 엔터테인먼트가 되어버렸다. 어린 자녀를 둔 부모에게 주말은 바쁜 때다. 아이와도 함께 시간을 보내야 하고 일주일 동안의 먹거리도 장만해야 한다. 동시에 약간의 휴식도 필요하다. 하지만 시간은 한정되어 있다. 이 모든 것을 한꺼번에 해결하고 싶다는 욕망을 갖는 건 자연스럽다. 대형마트는 이 모든 것을 한꺼번에 해결해준다는 장점이 있다.
대형마트는 이미 우리 삶의 일부가 된 것이다. 어찌 보면 우리 중 상당수는 가족과의 시간, 아이들에게 줄 선물, 나만의 취미생활 같은 것을 대형마트에 맡겨버렸는지도 모른다. 사실 이들 하나하나는 매우 비경제적 활동에 속하는데, 평일에는 노동에 시달리느라 시간과 에너지가 부족하다는 핑계로 이 모든 것을 통째로 아웃소싱하고 잇는 게 바로 한국인의 모습이다. 이런 상황이니 가격이 좀 비싸다거나 환경을 좀 파괴하는 일쯤은 힐끗 넘겨버리게 된다. 한국사회는 대형마트에 사실상 중독된 상태다.
이렇듯 문제는 소비자다. 그런데 이게 간단치 않다. 이들의 욕망을 탓할 수만은 없는 것이다. 소비자도 어려운 상황에서 한 선택이기 때문이다. 바쁜 소비자들은 동네 가게에서 두부와 콩나물을 매일 살 시간이 없다. 맞벌이라면 더욱 그렇다.
92. 이에 대해 1년짜리 답변보다는 10년짜리 답변을 한번 생각해보자.
“시장 경제를 가진(having a market economy) 시대에서 시장사회를 이룬(being a market society) 시대로 휩쓸려왔다” 마이클 샌델
원래 사회에는 경제 이외에도 다른 여러 요소가 있고 시장은 이 가운데 일부인 경제만을 규율하는 질서였는데, 지금은 사회 전체가 시장원리에 따라 움직이는 방향으로 바뀌고 있다는 점을 비판적으로 지적한 것이다.
샌델식으로 보자면 우리는 대형마트라는 매개물을 통해 삶속에 시장을 깊숙이 들여놓은 셈이다. 가족과의 오붓한 시간이나 주말의 취미생활까지 대형마트에 맡겨버렸으니 말이다.
현실적인 답은 우리가 우리 사회의 미래를 어떻게 설계할지 생각해보면서 찾아볼 수 있겠다. 우선 근본적인 질문을 몇 개 던져보자. 10년 뒤에도 우리는 지금처럼 구매하고 소비하며 살기를 바라는가? 지금 우리의 구매와 소비는 합리적이고 상식적인가? 다음 세대까지 이런 형태가 이어지는 것이 바람직한가? 이 소비행태는 오래 지속될 수 있는가? 대형마트가 상징하는 과잉생산과 과잉소비의 사회를 정말 계속 이어갈 것인가?
95. 대형마트 문제는 그저 경쟁 상인들의 문제에 그치지 않는다. 대량소비와 자본주의적 시장거래 같은 요소들이 소비자의 삶 속에 깊숙이 들어온 데 근본적인 문제가 있다. 긴 노동시간과 짧은 휴식시간 그리고 다양하지 못한 여가시간 등의 문제가 겹쳐 있다. 당장 출점을 금지하고 의무휴무일을 지정한다고 해서 대형마트 문제가 풀리지 않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대형마트 문제는 사실상 현대인이 어떻게 소비하고 어떻게 쇼핑하는가에 관한 문제다. 우리 모두의 생활패턴과 관련된 문제다. 삶의 패러다임 전반을 근본적으로 성찰하는 좋은 계기가 될 수도 있는 문제다. 근본적인 고민이 필요하다.
어떤 대안을 찾을 수 있을까? 결국 동네 가게나 생활협동조합 등 공동체형 유통을 키우는 방법이 중장기적 대안이 된다. 먹거리는 집에서 가까운 곳에서 사되 가능하면 조합원으로 직접 가입한 곳, 협동조합처럼 공동체 가치를 실현하고자 노력하는 곳에서 사는 게 현실적인 실천방안이다.
소비자들만 바뀌면 될까? 그렇지 않다. 적저한 규제가 필요하다. 기업의 자유로운 영업활동을 보장해야 한다면서 규제를 반대하는 목소리가 대형마트 쪽에서 나온다. 하지만 이는 문제가 있는 주장이다. 규제란 우리가 정부를 구성해 법과 규칙을 만들며 살아가는 한 어차피 존재하는 것이다. 그게 누구에게 유리하느냐가 이슈가 될 뿐이다. 대형마트 매출은 20년만에 0원에서 30조 원 이상으로 늘어났고, 매장 수가 1개에서 430개 이상으로 늘었다. 결과만 놓고 봐도 지금의 규제 틀은 대형마트에 훨씬 유리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동안 한국의 사회시스템은 대형마트를 키우는 쪽으로 작동했던 게 분명한 사실이다.
이를 바로잡는 노력이 필요하다. 대기업과 대형마트와 주식회사 형태의 유통업체에 일방적으로 유리한 규제를 조정해야 한다. 마을공동체의 사업자, 협동조합, 사회적기업 등이 유통에서 좀 더 자유롭고 다양하게 활동할 수 있도록 규제의 틀을 바꿔나갈 필요가 있다.
대기업과 대형마트 같은 영리 주식회사들은 운동장의 높은 쪽에서 낮은 쪽으로 공을 차고, 골목의 자영업자나 비영리적 성격의 사회적기업 및 협동조합 등은 낮은 쪽에서 높은 쪽으로 공을 차는 축구 경기를 하고 있는 셈이다.
우리 사회 시스템 전체를 뜯어보기 위해, 냉장고 이야기를 해보자.
97. 코끼리를 냉장고에 넣는 법은 무엇일까? 아마도 경제학자의 답은 이러지 않을까? “냉장고 관련 규제를 철폐한다. 그러면 경쟁에 의해 코끼리를 넣을 수 있는 냉장고가 반드시 등장한다.”
어쩌면 이 농담은 생각보다 빨리 현실이 될지 모르겠다. 삼성전자와 LG전자가 냉장고 크기를 두고 이미 경쟁에 돌입했으니 말이다. LG전자가 사상 최대 용량인 910리터 냉장고를 내놓겠다고 12년 8월에 발표했다. 삼성전자가 그 며칠 전인 7월 4일에 당시로서는 세계 최대 용량인 900리터짜리를 내놓은 다음이었다. 한국 기업들끼리 ‘세계 최대’냉장고 기록을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경신한 셈이다.
‘큰 냉장고’가 왜이렇게 중요해진 것일까? 기업들 뜻대로 큰 냉장고는 점점 더 많이 팔린다. 1995년 600리터 이상 대용량 냉장고 판매율은 전체의 3퍼센트에 지나지 않았는데 2009년에는 41퍼센트가 됐다.
게다가 가구당 냉장고 개수도 늘어나는 추세다. 우리 집에는 냉장고가 몇 개 있는가? 원래 사용하던 냉장고 이외에 김치냉장고를 사용하는 집이 많을 것이다.
약 30년 전을 떠올려보자. 그 시절에도 대다수 가정에 냉장고는 있었다. 그러나 250~300리터의 단문형이 주류였다. 요즘은 500리터 이하짜리 냉장고를 가진 집이 많지 않을 것이다. 여기에 김치 냉장고까지 있다면 1,000리터짜리를 보유한 셈이다. 물을 기준으로 무게를 따지면 1톤 이상 담을 수 있는 냉장고를 다들 들여놓고 사는 것이다. 삶의 패턴이 이렇게 극적으로 변화했다.
가구당 가족수는 거꾸로 점점 줄고 있다. 그런데 냉장고는 점점 대형화하고 가구당 개수도 늘어난다. 1인당 냉장고 면적은 최근 20여년 동안 세 배 이상 늘었을 것 같다.
왜 이렇게 냉장 또는 냉동해두는 음식물과 식재료가 많아졌을까? 사람이 먹는 식사량이 몇 배로 늘었을 리는 없다. 결국 음식물과 식재료의 가정 내 보관기간이 늘어난 것이다. 냉장고가 커지면서 오히려 덜 신선한 음식을 먹게 됐다는 이야기다.
내 집 안의 물류창고.
다들 기를 쓰고 용량 큰 냉장고를 사들이지만 그런다고 해서 삶이 윤택해진다고 믿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동네 정육점과 구멍가게에서 고기와 채소를 사던 1990년대 초중반까지 대형냉장고는 사치품이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많은 가계가 당일 산 재료를 당일 조리해 식사하는 소비생활패턴을 유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주말에 대형마트에 가서 일주일치 먹거리를 대거 구입하는 2012년, 대형냉장고는 필수품이 됐다. 최소한 일주일치는 저장해둬야 하기 때문이다. 골목상권 붕괴와 냉장고는 이렇게 만난다.
그렇다면 우리는 유통업체들의 물류창고 역할을 떠맡고 잇는 것 아닌가? 과거에는 동네마다 구멍가게가 있었고 그 가게에 있으면 충분할 냉장고를 가정에 들여놓고 있는 꼴 아닌가?
이걸 산업과 연결지어 생각해보자. 대형마트와 동네 구멍가게의 산업적 차이는 재고비용을 누가 어떤 식으로 분담하느냐에 달려 있다. 재고비용은 단순히 말하면 물건을 저장해 놓는 비용이다. 과거에는 동네마다 구멍가게가 있었으니 어찌 보면 상당히 많은 저장공간을 두고 있었던 셈이다. 반면 식재료가 각 가정에서 저장되는 시간은 굉장히 짧았다. 식재료를 다량으로 사지 않기 때문에 저장에 따른 재고비용을 유통업체가 분담하는 구조였다.
그런데 지금은 대형마트에서 대량구매를 해오기 때문에 그 재고비용을 소비자가 떠안는 셈이다. 냉장고가 놓인 자리(집)를 마련하는 비용도, 냉장고에 들어가는 전기료도 모두 소비자 부담이다. 대기업의 냉장고를 사들여 식품을 저장함으로써 대형마트의 비용을 절감해 주고 있는 셈이다. 왜 국민소득이 늘어나도 우리 살림은 계속 팍팍한지가 눈에 훤히 보인다.
실제로 대형냉장고가 본격 사용되기 시작한 시기는 대형마트가 급성장하는 시기와 맞물린다.
에너지 문제까지 함께 이야기하자면, 최근 나오는 대형냉장고는 여러 가지 절전기술이 적용된 덕분에 어떤 경우에는 작은 크기의 구형냉장고보다도 전기료 부담이 적다. 뒤집어 말하면 소형냉장고의 에너지 효율을 높이려는 노력은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는 이야기다.
한국은 구조적으로 에너지 다소비국이다. 인구는 5,000만 명으로 세계에서 25위인데 석유소비는 세계에서 8위, 전력소비는 세계 9위다. 1인당 에너지소비는 일본과 비슷한 수준인데, 소득은 일본이 두 배 많다. 줄일 수 있는 에너지 소비를 줄이지 않는 데 그 원인이 있다. 1인당 냉장고 면적 증는 이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104. 자본주의는 위대하다. 냉장고 사느라 쓴 돈을 메우느라 과로한 사람들이, 주말이면 대형마트에서 신용카드를 흔들며 냉장고에 넣을 물건을 사들이며 그 피로를 푼다. 그리고 그 카드 값을 메우느라 다시 과로를 한다. 과로해도 매우지 못한 그 만큼을 채워 넣기 위해 사람들은 다시 재테크에 몰두하고, 그들이 재테크를 위해 은행예금과 펀드에 넣은 돈은 다시 냉장고 만든 기업과 대형마트를 운영하는 기업에 투자되고 대출된다. 이 모든 것을 가능하게 만드는 것이 자본주의다.
잇따른 ‘세계 최대 냉장고’발표 즈음 조간신문에는 냉장고 전면광고가 집중적으로 게재됐다. 냉장고 용량 늘리기 경쟁이 기술발전으로 미화되며 대대적으로 보도되는 시기와 같다. 아마도 각 언론사에는 주요 광고주인 대기업들의 입김이 직간접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그 광고비는 어디서 나왔을까? 기업에 투자한 주주들의 돈이나, 기업에 돈을 빌려준 은행예금자들의 돈 또는 냉장고를 판 돈에서 나왔을 것이다. 금융과 소비가 기업에 자원을 공급한다.
그럼 이 고리를 끊고 작은 냉장고를 사용하는 생활로 돌아가려면 무엇이 어떻게 바뀌어야 할까? 우선 동네에서 식료품을 매일 사다 먹을 수 있어야 한다. 그러려면 골목상권이 살아나야 한다. 작은 가게가 살아남을 수 있는 제도적 여건이 마련되어야 한다.
또 동네에서 쇼핑하려면 매일 조금씩이라도 시간을 내야 하니 일찍 퇴근하는 직장문화가 정책돼야 한다. OECD 내 최고 수준을 자랑하는 평균근로시간을 개선해야 하는 이슈가 여기서 걸린다. 이렇듯 냉장고는 우리 경제가 안고 있는 많은 문제를 함축해서 보여준다.
106. 마트와 냉장고, 자동차 뒤의 대기업들
대형마트, 대형냉장고와 함께 빠르게 성장하며 우리 삶에 뿌리내린 또 하나의 제품은 자동차다. 특히 중대형차가 차지하는 비중이 빠르게 늘어났다. 국내 휘발유 소비량의 90퍼센트 이상을 자가용 승용차가 차지하니, 기름을 점점 더 많이 태우고 있는 셈이다.
대형마트, 냉장고, 자동차가 엮여 성장하는 과정에서 주목할 만한 ‘선수’들은 바로 대기업들이다. 그들은 끊임없이 성장하는 이 소비의 고리를 연결하면서 스스로도 덩치를 키우고 있다.
이 모두가 소비자의 선택이니 결국 소비자가 이 고리를 만든 것 아니냐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소개해주고 싶은 사람이 있다. 프랑스의 경제학자 장 바티스트 세(Jean-Baptiste Say)다. “공급이 수요를 창출한다”는 말을 남긴 사람이다. 기업이 공급하고자 하고 정부가 제도를 지원해주기만 하면 소비자는 쉽게 따라오게 된다고 풀이할 수 있다.
118. 회사는 무엇으로 사는가
어쩌면 사람들은 다들 거품 속에 살고 싶어하고, 정의로운 사회의 빈자보다는 불의한 사회의 부자가 되기를 원하며, 동료가 해고되더라도 내 연봉이 오르기를 기대하는지 모른다. 자본주의는 그런 욕망을 ‘공장하게’ 채워주는, 놀랄 만큼 효율적인 시스템인지도 모른다.
과정의 공정함을 되찾은 시장이 결과의 정의로움과 평화로움까지 가지려면 결국 시장참여자들이 변해야 한다. 탐욕의 동물처럼 묘사되는 월스트리트 투자은행가들이 나타난 배경에는 결국 자본주의가 요구하는 대로 더 넓은 집과 더 큰 차와 더 많은 냉장고와 더 비싼 휴대전화를 소유하는 데서 삶의 기쁨을 찾는 개인들이 있다.
금융위기의 원인이 됐던 MBS(주택저당담보부증권,주택담보대출)는 우리의 자산과 욕망에 지렛대를 대준다. 즉 가진 것을 더 부풀려 소비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이다. 이게 현재 금융이 수행하고 있는 기능이다. 지렛대 자체가 나쁘지는 않다. 그것은 단순한 기구일 뿐이다. 무엇을 떠받치느냐가 중요하다. 탐욕을 떠받칠 것인가, 아니면 선의와 이타심을 떠받칠 것인가에 따라 그 결과는 달라진다.
119. 전태일은 1970년 서울 평화시장에서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라고 쓴 피켓을 들고 시위를 벌이려다가 분신했다. 그 시절 노동자는 저임금에 장시간 부릴 수 있는 기계처럼 취급됐다.
한국인은 오래 일한다. OECD 국가 가운데 가장 긴 노동시간을 자랑한다. 고용된 사람의 연간 노동시간은 2011년 통계로 2,090시간이다. 이보다 많이 일하는 나라는 멕시코밖에 없다. OECD 평균은 1,770시간 수준이고 독일은 1,400시간가량 일한다. 중세 유럽에서 영주를 위해 일하던 농노의 연간 노동시간이 1,620시간가량이었다고 하니, 참으로 오랜 시간 일하는 셈이다.
왜 이렇게 오래 일할까? 기업에서 고용을 늘리기보다는 일을 더 시킴으로써 효율화를 꾀하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자발적으로 더 오래 일하려는 경우도 많다. 한 푼이라도 더 벌어두기 위해서다.
‘한 푼이라도 더 벌어두자’는 절박함은 격차와 불안정성에서 나온다. 한국 노동시장의 가장 큰 특징이 격차다.
IMF 구제금융 체제에서 ‘정리해고’가 도입된다. 정리해고는 회사가 경영상의 사유로 일방적으로 근로계약을 해지하는 것을 가능하게 했다. 해고가 더 쉬워진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회사에서 나가 낙하하면 떠받쳐줄 그물이 없는데, 이제 타의에 의해 회사를 그만둬야 하는 상황이 언제 닥칠지 모르게 됐다. 지금 있는 곳에 더 충성하고 매달리는 것은 당연하다.
전태일의 외침이 무색하게, 회사원은 여전히 기계다.
127. 2010년 전체 소상공인 가운데 월 매출 400만원 이하인 곳이 58퍼센트였다. 여기서 임대료를 빼고 순이익을 따지면 149만원이다. 순이익이 100만 원 이하인 업체도 절반이나 된다. 게다가 이들은 대체로 무급의 가족종사자와 같이 일한다. 배우자나 자식이 돈을 받지 않고 함께 일하는 것이다. 가족인건비까지 감안한다면 매우 열악한 상황이다. 여기서 한 발짝만 더 내려가면 도저히 버틸 수 없을 것이다.
이토록 어려운 상황인데도 사람들은 왜 자꾸 자영업에 뛰어들까?
한국의 자영업 비율이 30퍼센트를 넘는다. OECD국가 중 가장 높은 수준이다. 이유는 분명하다. 다른 일자리가 마땅치 않기 때문이다. 앞서 이야기한 대로, 좋은 일자리는 잘 늘지 않는다. 안정된 직장에서 밀려나기는 쉽지만, 나오고 나면 사회적 보호장치가 없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다들 자영업에 뛰어든다. 특히 직장을 그만두고 나오는 50대가 문제라고들 한다. 그렇지 않아도 그 수가 많은 베이비붐 세대인데, 나와서 괜찮은 일자리를 구하지 못하니 자영업에 뛰어들어 상황을 더 어렵게 만든다는 것이다.
결국 높은 자영업자 비중이 문제라는 이야기다. 자영업에 포진한 생활경제 영역의 생산성이 오르지 않고, 이들의 삶이 자꾸 어려워지기만 한다는 것이다. 한국사회의 부담이라는 말까지 나온다.
하지만 나는 조금 다른 면을 본다. 실업을 맞거나 퇴직을 해도 쉬지 않고 일하겠다고 나서는 사람들이 이렇게 많다는 사실은 어쩌면 한국사회에 축복이다. 그러므로 이들이 맡은 영역에는 거대자본 같은 외적 요인이 파고들어 생존기반을 파괴하지 못하도록 장벽을 쳐줄 필요가 있다. 여기에서 골목상권 보호라는 이슈가 등장한다.
이런 장벽이 만들어질 경우 제품만 괜찮다면 적절한 경제적 성과를 내며 사업을 오래 이어가는 것이 가능해질 수 있다. 여기에 책임 있는 경영을 하고 삶의 보람을 균형 있게 추구하는 기업가 정신을 북돋우면, 이들은 한국사회의 부담이 아니라 안전망이 될지도 모른다.
자기만의 빵과 자기만의 서점을 갖고 싶은 자영업자들의 욕망에 진지하게 귀 기울일 필요가 있다. 대형 프랜차이즈에 들어가지 않는 선택을 할 수 있는 이들은 당장 돈을 많이 버는 것과는 조금 다른 욕구를 가진 것일 수 있다. 돈 때문에 경영하는 게 아니라 나만의 제품을 만들기 위해 경영하는 것. 돈 때문에 경영하는 게 아니라 일하는 사람들이 행복을 느끼게 해주기 위해 경영하는 것. 고객과 지역사회를 위해 경영하는 것. 돈은 그런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여기는 것. 그게 바로 영혼이 있는 경영이다. 이런 경영을 하는 기업이 착한 기업이다. 글로벌 기업들이 지향한다는 이런 목표를 동네 가게라고 못할 것은 없다.
131. 위험 없는 이익 노리는 재벌
한편 골목상권과 맞물려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게 바로 재벌 이슈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때 자주 모습을 드러낸 재벌총수 일가와 대기업들의 골목상권 업종 진출을 보자. 이 시기 재벌총수 일가나 재벌 계열 대기업이 진출한 업종을 나열해보면 이렇다. 빵집, 물티슈, 의류, 구내식당, 떡볶이, 순대…… 주로 먹거리 관련 업종이나 서비스업이다. 서민 자영업자들이 맡고 있던 이런 업종에 재벌 일가와 대기업까지 진출하는 현상은, 아무래도 위험성이 낮고 손쉬운 사업인지라 뛰어들었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1년 동안 한국 사람들이 먹는 순대와 떡볶이의 양은 거의 정해졌다고 봐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위험요소가 거의 없는 셈이다. 결국 이렇게 수요가 정해진 사업에서는 결국 누가 얼마나 시장을 나눠 갖느냐의 싸움이 벌어진다. 따라서 힘있는 기업이 뛰어들어 초기에 약간의 손해를 감수하더라도 끝내 시장을 장악하고자 하면, 별 위험부담 없이 성공을 거둘 수 있다.
빵, 순대, 떡볶이는 한국인이 반드시 소비하는 제품이다. PCS나 삐삐처럼 한순간에 사라져버리는 제품이 아니다. 망하지 않는다. 경쟁자는 취약한 자영업자들이다. 100퍼센트 이긴다. 당신이 재벌이라면 어떻겠는가. 이런 사업을 자식에게 권하겠는가, 아니면 언제 시장이 악화되어 투자자들과 채권자들의 소송에 시달리게 될지 모르는 첨단기술 기업을 자식에게 권하겠는가?
한국경제는 지금 엄청나게 성장한 상태다. 산업화에 성공한 것이다. 기업이 성장했다면 일단 투자를 많이 해야 한다. 그래야 경제에 새로운 성장동력이 생긴다. 자본주의 시장경제를 원론적으로 충실하게 대변하는 입장에서 이야기해도 그렇다.
그런데 수치를 보면 기업의 투자는 현저히 떨어지는 추세다. 1970년대 한국의 고정자산투자 성장률은 17퍼센트 이상이었다. 그런데 2011년에는 1퍼센트대였다. 기업들이 공장이나 설비에 투자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대규모 설비투자가 급격히 줄고 있다. 이런 현상을 빵집이나 떡볶이 사업 진출과 연결지어 해석해볼 수 있다.
기업들은 이제 대규모 투자나 위험한 투자는 새로 하지 않는다. 위험한 데에 투자해 사업을 할 수는 없고, 그렇다고 사업을 안 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계속 돈을 벌어 개인의 자산은 늘려야겠기에 손쉬운 데 투자를 하게 되는 것이다. 자영업자 영역을 침범하는 건 그런 위미에서 자연스러운 귀결이다.
가끔 이런 반론을 접하기도 한다. 자영업자들도 경쟁력을 키우면 되지 않는가? 소비자들이 좋아하는 빵을 만들면 대기업 빵집도 물리칠 수 있지 않겠는가?
답은 명확하다. 그렇지 않다. 주식회사, 특히 금융시장에서 이미 검증받은 대기업이 자영업자들이 주로 하고 있는 업종에 뛰어들면, 자영업자들은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다. 자본의 ‘레버리지’효과 때문이다.
금융시장이 바로 이런 일을 가능하게 해준다. 기업들은 주식시장에서 투자자들에게 주식을 발행해줘 자금을 끌어 모을 수 있고 은행에서 대출도 받을 수 있다. 즉 작은 자기자본으로 큰 투자를 유치할 수 있고, 사업을 시작하기 전에 계획만으로도 자금을 만들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주식시장과 은행에서 돈을 끌어 모을 능력이 있는 기업이 시장에서 절대적으로 유리하다. 대기업이 자영업자와 싸워 이길 수밖에 없는 이유다. 예를 들어 대기업이 떡볶이 집에 진출할 경우 사업이 성공해 돈을 벌기도 전에 미리 투자를 할 수 있다. 또 가격을 깎아주거나 제품의 질을 높여 손해를 보면서 팔 수도 있다. 실제로 유통이나 외식업에 막 진출한 대기업 상당수는 한동안 계속해서 손해를 본다. 그러다가 기존의 경쟁자들이 사라지고 나서야 그 손해를 만회하기 시작한다.
자영업자들 입장에서는 그렇지 않아도 경쟁이 심한데 답답한 노릇이다. 이미 한계상황에서 운영하고 있는데 대기업 진입으로 추가로 투자를 해야 한다거나 가격을 낮춰야 한다면 버티기가 더 어렵다. 품질경쟁만으로는 싸움에서 이길 수 없는 이유다.
138. 재벌에 대한 경외의 시선을 넘어.
많은 이들의 마음속에는 여전히 빵집도 순댓집도 ‘대기업이 하면 더 잘할 것’이라는 생각이 자리 잡고 있다. 중소기업 브랜드 제품에는 손이 잘 가지 않고, 좀 비싸도 대기업 브랜드를 선호한다. 재벌 대기업에 대한 경외의 시선이다.
그런데 정말 그럴까? 빵집의 예를 좀 더 들여다보자. 재벌 계열의 프렌차이즈 빵집을 연 이들 중 상당수가 재벌 일가의 자식들이다. 이들에게 빵은 취미이자 재테크다. 지분을 부풀려 상속받겠다는 생각으로 빵집을 경여한다. 하지만 동네 자영업자에게 빵은 생존이고 삶이다. 동네에 사는 단 한사람의 입맛이라도 더 사로잡으려는 간절한 소망으로 빵을 굽는다.
과연 어느 빵집 주인이 그 동네 소비자들에게, 그리고 이 나라 경제에 더 도움이 될까?
생존을 위해 빵을 굽는 사람은 언제나처럼 새벽이면 빵반죽을 오븐에 넣을 것이고, 새로운 빵을 매대에 진열하기도 할 것이며, 너무 답답하면 머리띠를 두르고 인근 대형마트 앞에서 울분을 토로할 것이다. 그 어떤 경우라도 재테크나 취미를 위해 빵집을 소유한 사람들보다는 간절한 마음으로 일할 것이다.
물론 대기업이 지렛대 효과를 누리는 동안, 즉 금융시장에서 자본을 조달하고 대규모 투자로 양질의 빵을 더 싸게 공급하는 동안은, 그 빵집이 더 나아 보일 것이다. 하지만 그 또한 언젠가 회수해갈 잉여일 뿐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오래 지속될 성격의 경쟁력은 아니다.
139. 기업의 경제적 성과는 대체로 세 가지 경로를 통해 사회 전체에 긍정적 영향을 미친다. 첫째 고용창출과 임금을 통한 분배다. 둘째 주가의 차익 및 배당을 통한 분배다. 셋째 재투자를 통한 기술혁신이다.
1) 고용창출 효과 : 한국의 2,000대 기업은 지난 10년 동안 매출액이 815조 원에서 1,711조 원으로 늘었다. 그 동안 일자리는 156만 개에서 161만 개로 2.8퍼센트가 늘었다.
2) 주가 상승과 배당을 통한 분배 : 외국인 투자자와 재벌 일가가 대부분의 주식 보유하고 있다.
3) 기술혁신
: 대기업들의 현금 보유가 사상 최고라는 뉴스는 대기업들이 이 문제에 어떻게 대처하고 있는지를 짐작하게 해준다. 번 돈은 쌓여가고 있고 새로운 투자처는 찾지 못하고 있다. 그 대신에 일가 소유 기업에 투자하고 일감을 몰아주며 지분을 부풀려 재산을 늘리려는 유혹만 커져가는 형국이다. 재벌 대기업에 모험적 기업가 정신마저 사라지고 있는 것이다.
요즘 대기업들, 특히 3세 승계 이후의 대기업들 모습을 보면 오너 일가를 중심으로 두려움에 떨고 있는 듯 보인다. 가진 것을 지키지 못할지 모른다는, 즉 경영권 세습이 안 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다.
모험적 투자가 이뤄지지 않는다. 기업이 실패하면 물려줄 수도 없기 때문이다. 위험감수와 투자라는, 자본주의 시장경제에서 기업이 갖는 최소한의 임무도 수행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대형마트가 골목상권까지 진출하고 전통시장 영역까지 침범하면서 위험 없는 이익을 편리하게 늘린다. 반면 신기술이나 고정자산투자는 위험하므로 회피한다. 자본주의 기업 본연의 ‘자본축적’임무조차 내려놓은 셈이다.
149. 싸움터에서 함께 탈출하기
“외국은 더 심하다. 글로벌 경쟁에서 이기려면 이보다 더 열심히 해야 한다. 늘 잘하던 사람도 한번 실패하면 재기불능이 될 수 있다. 실패한다면 그 원인은 당신의 게으름과 무능이다.” 카이스트 대학당국이 학생들에게 반복해썬 이 메시지는 사실 우리에게도 익숙하다. 한번 뒤처지면 그저 뒤처지기만 하는 게 아니라 바닥없는 나락으로 끝없이 추락하게 된다는 공포다.
세상은 있는 이에게나 없는 이에게나 삶은 전쟁이다. 회사생활은 늘 동료 혹은 경쟁사와 싸워야 하는 전쟁이다. 아이들 교육도 마찬가지로 죽기 살기로 덤비는 전쟁이다.
현재 우리가 겪고 있는 전쟁을 몇 가지만 꼽아보자.
우선 비즈니스가 전쟁이다. 대기업은 글로벌 기업과 경쟁하느라 힘들다. 자동차 회사는 더 많은 자동차를 팔아야 하고, 전자 회사는 더 나은 스마트폰을 먼저 만들어내야 하고, 대형마트는 더 싼 피자를 더 많이 매장이 가져다 놓고 팔아야 한다. 1초라도 빠르고 1원이라도 값싼 제품만이 살아남고 나머지는 모두 죽는다는 메시지를 모두가 되뇌며 살아간다.
협력업체들은 더 힘들다. 대기업은 납기일을 당기고 가격은 낮추라 한다. 경쟁사는 점점 더 늘어난다. 그러니 밤새워 기술을 개발해도 실상 남는 게 없다. 인생만 더 힘들어진다. 당연히 직원들 월급 올려줄 여유도 없다.
그래서 괜찮은 청년들은 이제 중소기업에서 일자리를 찾니 않는다. 악순환이다. 협력업체에 납품하는 2차, 3차 협력업체는 당연히 더 힘들다. 대형마트와 경쟁해서 살아남아야 하는 슈퍼마켓들도 비슷하다.
힘들게 살다보니 어려운 사람들끼리도 서로 더 강퍅해진다. 정규직 노동자는 비정규직 노동자에게 너그럽기 어렵다. 자기가 다니는 회사도 늘 불안한 줄 위에서 곡예 중이고 자기 미래 또한 불안한데 왜 비정규직 이웃까지 챙겨야 하느냐는 생각이 들 법하다. 비정규직 노동자가 실업자에게 너그럽기는 더 어려울 것이다. 동네 슈퍼마켓과 편의점 주인이 점원과 청년 아르바이트 생에게 너그럽기 어려운 것과 마찬가지다. 정말 속 터지는 일은, 이미 우리 경제는 산업화에 성공했고 대기업들은 태극기 휘날리며 영광의 시대를 누리고 있다는 사실이다. 경제학은 효용, 즉 마음속 행복을 경제의 궁극적 산출물로 본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우리 경제는 이만큼이나 성장했는데도 행복과 평안을 가져다주지 못하고 있다.
모두 이기려 들지만 결국 누구도 이기지 못하는 악마의 게임에 빠져든 것은 아닐까? 이 게임이 바로 현재의 대한민국을 지배하는 이념, ‘먹고사니즘’의 게임이다.
아무리 싸워도 공포는 사라지지 않는다. 이기고 또 이겨도 불안하다. 당연하다. 이런 종류의 공포나 불안은 원래 혼자 살아남는다고 없어지지 않는다. 다들 아무리 열심히 공부부해서 1등을 하더라도 문제는 해결되지 않는다.
스스로 목숨을 끊을 정도로 절망하는 사람이 생기지 않는 사회는 모두가 1등을 하는 사회가 아니다. 1등을 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가치가 있는 사회, 즉 경쟁과 생존이 아닌 신념과 보람이 삶의 동기인 사회가 되어야 한다. 1등을 하는 것, 뒤처지지 않는 것, 생존하는 것이 최고의 가치인 한 ‘먹고사니즘’이 지배적 이데올리기일 수밖에 없다. 모두가 생존을 덜 고민하는 사회로 한 걸음 나아가는 것이 오히려 우리 시대의 지보다.
새로운 가치와 동기를 발견하는 일이 지금 우리에게 가장 절실한 일이다.
157.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변화
대안은 뭘까? 그 핵심에는 ‘지속가능성(sustainability)’이라는 개념이 있다. 경제/사회/환경이 균형 있게 발전하는 새로운 모델을 만드는 것이다.
지속가능성이란 경제/사회/환경의 세 영역을 균형 있게 발전시키는 새로운 성장모델이다. 실제로 우리 삶은 이 세 가지 영역의 균형 아래 지속된다. 경제적 수입도 물론 중요하다. 하지만 아무리 경제적으로 부유해도 빈부격차, 인권침해, 부패 등의 문제 때문에 사회적으로 지속가능하지 않게 된다면 우리 삶은 성장할 수도 계속될 수도 없다. 또 지구환경이 파괴되어 우리가 살고 있는 공간이 사라진다면 당연히 우리 모두의 삶은 종말을 맞는다.
문제는 이 세 가지 영역 사이에 존재하는 긴장이다. 그 긴장과 갈등을 균형있게 조정하면서, 세 영역 중 어느 것도 파괴되지 않으면서 전체가 진보하도록 조율하는 것이 정치와 시민사회의 역할이다.
158. 어렵게 생각할 필요가 전혀 없다.
평일이면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일하고 주말이면 대형차를 몰고 대형마트에 가서 평일에 번 돈을 엄청난 양의 쇼핑으로 쓰는 삶을, 다른 어떤 것으로 바꾸면 된다. 경제 수준에서의 지속가능성이 사회환경 가치와 균형 있게 발전하는 새로운 성장모델이라면, 개인의 삶 수준의 지속가능성은 덜 일하고 덜 쓰더라도 더 여유 있고 더 의미 있게 사는 새로운 삶의 모델이다. 선진국 국민의 삶이 바로 이렇다고 생각하면 된다.
그렇게 되려면 사회 전체가 장기적 관점에서 좀 더 유연하게 운영되어야 하며, 권한과 책임은 좀 더 각 지역으로 분산되어야 한다. 세상을 개인의 이익을 극대화하려 싸우는 단기적 제로섬 게임의 장으로 보는 관점에서 벗어나야 한다. 함께 장기적 계획을 세움으로써 공동의 이익을 키우고 더 오래 지속 시킬 수 잇다는 관점을 채택해야 한다.
160. 이제 ‘지속가능성’이라는 새로운 패러다임을 고민할 때가 됐다. ‘먹고사니즘’의 문제를 넘어서면서, 산업화와 민주화 이후 한국사회가 함께 추진할 수 있는 의제가 바로 지속가능성이다.
그럼 우리 삶의 지속가능성과 사회의 지속가능성을 동시에 높이려면 무엇을 해야 할까? 그 방법으로 나는 사회혁신을 제시한다. 사회혁신이란 사회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새로운 방법을 뜻한다. 영역이나 사회적 맥락에 따라 그 내용은 다양할 것이다. 지속가능성이 한국사회가 가야 할 방향이라면, 사회혁신은 그 방향으로 한 걸은 내딛는 방법이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지금 한국사회에서 지속가능성을 높이기위해 필요한 혁신은 무엇일까? 기업, 비영리단체, 교육, 미디어 등 사회 각 분야에서 필요한 새로운 변화와 그 가능성을 짚어보자.
162. 경제민주화.
경제민주화는 지금의 경제시스템을 근본적이고 구조적으로 바꾸자는 이야기다. 그 방향은 두 갈래로 정리해볼 수 있다. 재벌개혁 전문가들이 말하는 경제민주화의 핵심은 재벌 대기업의 지배구조를 바꾸는 것이다.
기업은 원래 사회적 존재다. 기업을 경영할 때는 대주주뿐 아니라 소액주주/노동자/지역사회 등 다양한 이해관계자의 의견을 균형 있게 반영해야 한다. 그런데 재벌기업 총수 개인은 작은 지분으로 대기업집단 전체를 지배하면서, 본인의 이익과 기업의 이익을 구분하지 않으며 전횡을 저지르고 있다는 게 재벌 비판의 요지다.
한편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를 공동집필한 장하준 케임브리지대 교수는 ‘기업의 사명’이라는 문제를 제기한다. 원래 기업은 한 사회의 생산과 1차 분배 기능을 해야 한다. 새로운 제품과 서비스를 생산해서 소비자의 편익을 늘리고, 거기서 생긴 과실을 임금을 통해 분배하는 것이다. 그런데 주주의 단기이윤을 극대화하는 데만 골몰해 고용을 통한 1차 분배에는 소홀히 하게 되고 혁신조차 사라지고 있다는 이야기다.
경제민주화의 두 가지 방법.
1) 한 사람이 폐쇄적으로 경영하는 기업을 다양한 이해관계자가 참여하며 투명하게 경영하는 기업으로 바꾸는 방법.
2) 기업의 사명을 넓히는 방법. 단기적 주주이익에 매몰된 기업들이 원래의 목적인 고용과 혁신, 사회적 책임 등을 되새기도록 한다.
기업 이사회 구조의 개혁, 대기업집단 통제구조 구축과 순환 출자 규제 강화, 연기금 사회책임투자, 공시제도 강화등이 이를 이루는 수단이 될 수 잇을 것이다.
164. 사회적 경제에서 찾는 희망
사명과 지배구조의 변화라는 두 가지 핵심이 처음부터 반영된 사회적 경제조직을 주목해보자. 대기업을 구조적으로 개혁해 덜 탐욕스럽고 더 투명하게 만드는 게 경제민주화의 출발점이었다면, 이때 생긴 공간에 처음부터 사회적 사명과 민주적 운영원리를 가진 기업들이 들어서게 하는 것은 사실상 경제민주화의 결승점이어야 한다.
사회적 기업은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넘어서서 사회문제 해결을 사명으로 삼는 조직이다. 처음에는 이윤극대화를 추구하다가 나중에야 필요에 따라 사회에 기여하겠다며 나서는 기업을 일컫는 말이 아니다. 출발부터 그 목적 자체가 사회문제 해결이고, 그 방법 중 하나로 사업활동을 선택하는 곳을 사회적기업이라 부른다.
경제면 경제지, 웬 사회적 경제냐고? 경제는 원래부터 ‘사회적’이었다. 먹고사는 문제란 원래는 공동체 안에서 여러 사람 사이의 관계를 통해 해결되는 것이기 때문에 그렇다. 시장이나 거래 역시 사람들 사이의 관계 맺는 방식을 규정하는 것이다. 사회적 경제는 결국 원래 목적에 충실한 경제다. 원래 경제의 목적은 돈이 아니라 실물이다. 화폐는 실물을 표현하고 거래하기 위한 수단으로 등장했을 뿐이다. 그런데 그 수단이 점점 권력을 얻어 목적처럼 여겨지는 왜곡이 일어나고 있다. 화폐를 더 많이 얻는 것이 경제적으로 성공하는 것처럼 여겨지는 풍토가 그것이다. 화폐보다는 실물이 더 중요한데도 그렇다는 이야기다.
또다시 빵집의 예를 들어보자. 빵집이 동네에 있는 이유는 빵을 원하는 동네 사람들이 쉽게 먹을 수 있게 해주기 위해서다. 동네 사람들이 원하는 빵을 적시에 공급하는 게 빵 생산자가 맡은 본래의 사회적 기능이다. 그런데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빵 생산자의 동기가 다양한 빵의 공급이 아니라 이윤극대화다. 특히 현재 자본주의 사회의 지배적 경제조직인 주식회사라면 더욱 그렇다. 이윤이 더 많이 남는 빵을 집중적으로 만들어 파는 게 합리적이다. 그 빵이 동네 사람들의 입맛이나 건강상태에 잘 맞느냐는 나중 문제다.
하지만 원래 목적대로 동네 사람들이 좋아하는 빵을 적절히 공급하는 것이 목적인 빵집이 있다면, 그 빵집은 조금 다르게 운영될 것이다. 동네의 필요에 따라 저가의 빵도 만들고 이가 좋지 않은 어르신들을 위해서는 ‘부드러운 빵’을 공급하고자 노력할 것이다.
그리고 이윤극대화는 필요 없다. 적정한 수준으로 빵집을 유지할 수 있기만 하면 될 것이다. 빵집 주인과 함께 일하는 이들이 벌어먹고 살 정도의 수준을 목표로 운영할 것이다. 이런 빵집은 주식회사와는 조직이 운영되는 논리가 다르다. 이윤극대화 동기가 아닌 또 다른 동기로 움직이는 조직이 바로 사회적 경제조직이다.
167. 가끔 사회적 경제도 경제인데 왜 정부가 지원하느냐고 묻는 사람이 있다. 또 정부가 지원하는 사회적기업은 의존적이라 희망이 없다는 이야기도 나온다. 이런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에게 나는 한국 정부가 그동안 펼친 산업정책이 어떤 것이었는지 한번 떠올려보라고 이야기하고 싶다.
우리나라에서 정부 지원을 가장 많이 받은 사업체는 다른 어느 곳도 아닌 재벌 대기업이다.
(…) 과거 한국에서는 미래에 필요하다고 판단되는 산업에 세금을 투입하는 방식으로 산업정책을 펼쳤다. 50여 년 전 재벌 대기업은 대부분 정부 의존적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들 대부분이 글로벌 대기업으로 성장했다. 정부가 지원한다고 해서 무조건 의존적이고 나쁘다는 생각은 최근 시장만능주의와 함께 우리 머릿속에 입력된 잘못된 신화일 뿐이다.
사회적 경제는 기존 기업들과 같은 출발선에 서 있지 않다. 생산 능력이나 상품의 질 때문이 아니다. 시스템 때문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금융시스템에 대한 접근권이 승부를 가른다. 물론 확보한 자금을 효율적으로 써야만 궁극적으로 경쟁에서 이길 수 있겠지만, 어쨌든 출발선 자체가 매우 다른 게임이다.
사회적 경제조직들도 다른 출발선에 서 있다. 이윤극대화가 절대적 목표가 아니기 때문에 투자자들에 대한 접근권은 현저히 떨어질 수밖에 없다. 따라서 이런 출발선을 메워주는 적절한 지원정책이 꼭 뒤따라야 한다. 사회적 경제에 맞는 금융이 필요한 것은 물론이다.
170. 현재 자본주의가 비판받는 것은 경제성장과 부의 양적 증대는 달성했지만 그 부가 1퍼센트의 성 안 사람들 사이에서만 맴돌기 때문이다. 그 부는 99퍼센트의 성 밖 사람들에게는 흘러나오지 않는다. 또한 성 밖 사람들이 성벽을 넘어 성 안으로 진입하기가 거의 불가능하다. 실제로 ‘삶의 질’은 기업의 경쟁력과 상충된다. 더 많은 임금과 더 높은 인권수준은 효율성을 떨어뜨린다. 자본주의의 딜레마다.
‘사명이 다른 기업’에 희망이 있다. 그런데 지금 성 안에 있는 글로벌 기업들은 어느 정도 변화는 가능하겠지만 근본적으로 변할 가능성은 희박하다. 희망은 사회적 경제조직들처럼 애초 사명 자체가 다른 조직에서 구현될 가능성이 높다. 말하자면 성밖에서 경제활동을 펼치는 것이다. 한국경제의 미래의 싹을 만들어내기 위한 혁신은 성 밖의 사회적 경제로부터 먼저 나올지 모른다.
171. 착한 소비의 욕구
사회적 경제에 필수적인 또 하나의 요소는 ‘착한 소비자’다. 이들은 물건을 살 때 좀 더 사회적으로 책임 있는 기업의 물건을 먼저 고르는 소비자들이다. 값이 비슷하다면, 또는 좀 비싸더라도, 공정무역이나 저탄소 제품처럼 환경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의미 있는 제품을 고르는 것이다. 대형마트에서 쇼핑하는 대신 동네 생활협동조합에서 물건을 사고, 사회적기업 제품을 일부러라도 사보는 것이다.
이런 능동적 소비자들의 행위를 일컬어 “소비는 투표”라고 이야기하고도 한다. ‘윤리적 소비’나 '사회책임 소비’라는 용어로 설명하기도 한다. 소비자가 선택하는 물건의 속성과 그것을 만든 기업에 따라 세상이 바뀐다는 이야기다.
그런데 환경을 보호하고 사회적 약자를 존중하는 ‘착한 제품’을 쓰는 소비를 두고 이야기하다 보면 꼭 돌아오는 반문이 있다. 왜 자꾸 자연스러운 인간의 욕망을 억누르라고 하느냐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반론 역시 놓치는 게 있다. 사람의 욕망은 매우 다채롭다는 사실이다.
결국 문제는 우리 사회가 매우 제한된 욕망만 충족시키도록 허용하거나 강제한다는 점이다. ‘착한 소비’를 하자는 이야기는 소비자의 욕구를 억누르자는 이야기가 아니다. 오히려 다양한 소비자의 욕구가 충족될 수 있도록 시스템을 갖추자는 말이고, 그런 시스템이 갖춰지도록 하려면 소비자의 적극적 행동이 필요하다는 이야기다.
173. 대형마트에서 쇼핑을 하고 싶고 고가의 스마트폰을 사서 게임을 하고 싶은 게 소비자의 욕구라면, 아이에게 건강한 먹거리를 사주고 가능하면 착한 기업에서 만든 제품을 사고 싶은 것도 소비자의 욕구다. 선한 욕구다. 그렇다면 이런 욕구를 실현할 수단이 공평하게 주어지지 않는다는 게 문제다. 스마트폰과 대형마트 홍보물은 어디를 가나 넘친다. 그러나 사회적기업이 만든 제품과 생활협동조합 매장은 찾기조차 힘들다. 개별 제품의 경쟁력 문제가 결코 아니다. 앞서 지적한 대로, 금융을 포함한 시스템의 문제다.
173. 과거의 “잘살아보세”라는 구호는 더 많이 벌고 더 많이 쓰고 싶다는 양적 성장 시대의 욕망을 대변한다. 그 후 시대가 크게 바뀌었지만 제도는 여전히 그 안에 갇혀 있다. 더 많이 수출하고 더 많은 이익을 남기려는 대기업의 욕망은 여전히 우리 사회가 매우 강력히 권장하는 욕망이다. 미디어도 금융도 이런 욕망을 강하게 지지한다.
174. 지속가능한 사회로 가는 길은 욕망의 다양성을 인정하는 과정일지 모른다. 사회적기업이나 협동조합을 적극 보호하고 지원하는 제도가 필요한 이유도 여기 있다. 스마트폰을 갖고 싶은 욕망만큼이나, 유기농산물과 ‘착한 제품’을 소비하고 싶은 욕망 또한 실현할 기회가 충분히 주어져야 한다. 그런 다양한 욕망을 채워줄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들어가는 일 역시 사회혁신이다.
178. NGO와 MBA가 만난다면
경영능력이란 무엇일까?
첫 번째는 ‘일의 우선순위 정하기’다.
“성공한 경영자들을 많인 만나봤는데, 그들은 부지런하기도 해꼬, 게으르기도 했고, 똑똑하기도 했고, 단순하기도 했고, 술을 잘 마시기도 했고 아니기도 했다. (…) 단 한가지 공통점이 있다면 바로 ‘해야 할 일을 정확히 찾아내는 능력(do the right thing)’ 을 갖추고 있었다는 것이다.
피터 드러커, <자기경영노트>
더구나 착한 일을 하겠다고 나서는 경영자라면 적은 자원으로 일을 시작해야 할 경우가 많을 것이다. 이런 경우일수록 우선순위를 명확히 하고 조직의 역량을 중요한 일에 집중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래야만 조직이 성공이든 실패든 한 방향으로 굴러갈 수 있다.
두 번째는 ‘실행하기’다.
대부분의 지식노동이 그렇듯이 경영은 아이디어와 기획에서 시작된다. 그래서 많은 경영자가 사업 아이디어를 만드는 데 힘을 쏟는다. 하지만 사실 경영자의 일은 아이디어를 현실화하는 것이다. 사업 아이디어도 물론 중요하다. 아이디어 하나가 기업 하나가 될 수 잇으니 말이다. 그런데 이를 뒤집어보면, 기업 하나를 만드는 데는 딱 하나의 아이디어면 된다는 이야기다. 그 아이디어가 실행되어 사업이 성공하기까지는 지루하고 재미없고 때로는 고통스러운 과정이 기다리고 잇는 것이다. 그 과정을 스스로 견뎌내고, 주변 사람들도 잘 견뎌내도록 이끄는 것이 경영자의 역할이다.
세 번째는 ‘지속하기’다.
처음 먹은 생각을 끝까지 지키는 것은 이토록 중요하다. 시간은 오래 지속된다. 우선순위를 정해서 실행하고 처음의 계획을 꾸준히 실천해도 실패할 수 있다. 경영은 그만큼 불확실한 것이다. 하지만 그러지 않는다면 분명한 실패조차 해보지 못한 채 사업이 끝날 가능성이 높다.
경영능력을 갖춘 경영자를 키우는 것은 비영리부문에 매우 중요한 과제다. 그래서 비영리조직을 이끌 경영자를 키우는 교육도 필요하다.
경영학이 원래 속도와 크기만 중시하는 효율성(efficiency)이 아니라 문제의 진정한 해결을 중시하는 효과성(effectiveness)을 추구하는 학문임을 생각하면 당연한 이야기다. NGO와 MBA, 과거에는 어색해 보였을지 모르는 이 두 단어를 만나게 해야 할 필요성이 점점 더 커지고 있다.
지금 우리 사회의 중요한 문제는 무엇인가? 이윤동기가 그 문제를 해결하는 데 더 필요한가, 아니면 사명이 더 중요한가?
사명이 더 중요한 상황이라면, 비영리조직처럼 사회문제 해결을 사명으로 여기는 조직을 키우고 활용하는 것이 맞다. 그들이 더 세련되고 효과적인 사회를 만들 수 있을 것이다. 이윤을 노리고 외부에서 들어온 거액의 투자가 반드시 우리를 행복하게 해주지는 않는다. 밑바닥부터 촘촘히 짜인 경제가 우리를 더 행복하게 해줄 수 있다. 그게 더 지속가능한 길일 수 있다.
216. 변화를 이루려면 우리 스스로 물어야 할 질문이 있다. 우리는 정말 덜 성장하고 덜 소비하면서 살 수 있을까? 이는 우리 삶에서 매우 본질적인 질문이다. 돌려 말하면 “나는 퇴근 후 조금 덜 쓰고 덜 누리는 것을 감숳고라도 일터에서 주인답게 일하고 싶은 회사원인가?” 같은 질문이다.
좀 더 직설적으로 이야기해보자. 우리는 이제 대박 없는 시대를 살아야 한다. 펀드가 두 배가 되고 투자한 주식이 열 배가 되고 내가 산 아파트값이 세 배로 오르는 일은 이제 없다. 아무리 아등바등 모아도 노후에 10억 원을 가질 수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한다.
그 대신 공공서비스가 늘어나 우리가 살아가는 데 비용을 덜 들일 수 있고, 연금이 확충되어 노후에 그걸로 살 수 있게 되어야 한다. 우리 스스로 자원봉사를 하고, 또 자원봉사 서비스의 수혜자가 되기도 한다. 최신 스마트폰은 가격할인이 별로 안 되겠지만, 도서관이나 대학이나 병원 같은 사회서비스는 상당 부분 무상 혹은 저렴한 비용으로 이용할 수 있게 된다. 노동시간이 줄 것이고 평일 저녁과 주말 휴식은 보장받겠지만, 주말쇼핑이나 밤샘유흥은 포기해야 할지 모른다. 이게 바로 지속가능한 삶의 모습이다.
우리는 이런 삶을 원하는가?
교사와 청소/경비 노동자 사이의 소득 차이는 지금보다 훨씬 줄어도 괜찮은가? 대학교수와 택시운전사 사이의 신분격차가 사라져도 괜찮은가? 대기업 프랜차이즈는 거의 사라지고, 빵이나 커피나 식료품은 동네에서 생활협동조합 방식으로 사다 먹게 되어도 괜찮은가?
만일 그런 삶을 받아들일 수 있다면 우리의 선택지는 분명히 커지는 것이다. 근본적으로 생각하자면, 새로운 사회를 만들어가는 일은 가능하기도 하고 이미 시작되었다고도 할 수 있다. 점진적이더라도 분명한 실천이 필요할 뿐이다.
* 4장 무엇을 할 것인가
226. 북유럽 모델은 우리에게 여러 가지 생각거리를 던져준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메시지는 한 사회는 아주 많은 요소의 다양한 조합으로 이뤄진다는 것, 어찌 보면 당연한 사실이다.
한국사회에서 사회 전체의 디자인을 놓고 벌어진 논쟁은 기껏 미국식 시장만능주의와 과거 대륙유럽식 복지국가 모델정도일 것이다. ‘시장에서 경쟁을 통해 모든 것을 결정하는 나라’와 ‘국가가 모든 것을 계획하고 책임지는 나라’ 정도의 거친 구분법이 활개를 친다. 보수진영에서는 기업과 시장에 모든 것을 맡겨야 하며 해고가 자유로워져야 일자리가 늘어난다고 외친다. 진보진영에서는 기업과 시장이 개인의 삶을 파괴하지 않도록 국가가 역할을 키워야 하며 해고는 살인이라고 외친다.
하지만 세상은 그리 단순하지 않다. 지금 북유럽 모델만 놓고 따져봐도 그렇다. 이들 국가는 복지만 놓고 보면 진보적이다. 비중이 낮아지고는 있지만 여전히 공공지출이 높고 공공부문에서도 많은 인력을 유지하고 있다.
노동 분야만 놓고 보면 보수적인 듯 보인다. 이른바 미국식 ‘신자유주의’ 모델로 보이기까지 한다. 해고가 쉽다는 점에서 그렇다. 그러나 실업자 재교육 등 적극적 노동시장 정책에 상당한 재원을 투입하며 해고자를 보호하고 재취업시키려 노력한다는 점에서는 진보적 태도를 보인다.
교육은 보수적이면서 동시에 진보적이다. 학교 간 경쟁을 허용한다는 점에서는 보수적이지만, 일관된 가치보다는 다양한 가치를 학생들에게 가르치려 한다는 점에서는 진보적이다.
재정건전성측면에서는 보수적이다. 균형재정을 달성하며 적자를 피하고 국가부채를 줄이려 노력하고 있다. 국제관계는 진보적으로 보인다. 인권/민주주의/환경보존 등 진보적 가치를 지지하는 목소리를 적극적으로 내는 편이다.
얼핏 보면 보수적인 것도 진보적인 것도 아닌 좀 이상해 보이는 조합이지만, 북유럽 모델은 상당한 수준의 내적 합리성을 갖고 있다. 보편적 복지를 지향하면서도 노동시장에서는 대체로 유연성과 역동성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228. 사회가 보장하는 ‘사회임금’이 높아지면서 고용주가 제공하는 ‘사적 임금’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여지가 생기는 것이다. (…) 부자들과 기업들은 상대적으로 높은 세율을 감당하며 복지제도를 떠받친다. 그 대신 인력조정을 상대적으로 자유롭게 하며 외부환경에 유연하게 대처할 수 있다는 이점을 얻는다.
모든 사람이 한 직장에서 정규직으로 오래 일하는 것이 이상적이라고 여긴다면, 그들의 복지는 직장을 통해 실현되리라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고용주가 제공하는 ‘사적 임금’ 비중이 높아지는 것이다. 이게 과거의 평생직장 개념이다. 이렇게 되면 국가 복지서비스의 양과 질을 높이지 않고도 사회를 유지할 여력이 커진다.
한국식으로 질문을 던져보자. 이런 북유럽 국가들은 좌파 국가인가 우파 국가인가? 또는 진보적 정책을 채택한 나라인가 보수적 정책을 채택한 나라인가? 대답하기가 쉽지 않다. 다만 그 나라들이 채택한 조합이 있을 뿐이다. 그리고 그 조합이 대표하는 삶이 있는 것이다.
229. 변화의 시작을 위한 장치들
앞서 지적한 대로, 한국사회에서도 산업화와 민주화 시대를 넘어서는 새로운 조합, 새로운 사회디자인에 대한 논의가 시급하다. 예를들면 북유럽 모델 같은 새로운 사회모델의 상을 그리고 공유해야 한다. 그래야 산업화와 민주화 과정을 거치면서 엄청나게 성장했지만 행복하지 않은 한국사회의 딜레마에서 탈출해 미래로 걸어갈 수 있다.
하지만 현재 환경은 좋지 않다. 정치는 양쪽으로 나뉘어 단단한 요새를 쌓은 채 새로운 정책적 상상력을 오히려 가로막고 있다. 민간 영역의 정책 생산능력은 기업과 관료 조직에 편중되어 있는데, 이들은 견고하게 과거 질서를 옹호한다. 혁신적 아이디어를 만들고 실험적으로 실천해야 할 NGO들은 점점 더 가난해지고 있으며 인재가 말라가고 있다. 새로운 아이디어를 소개하고 공론의 장에서 진지하게 검증되어야 할 미디어는 초단기적 시각의 보도로 클릭 수를 올리는 데만 열을 올리고 있다. 국민 상당수는 포털사이트에 뜨는 선정적 뉴스만을 우리 사회에 대한 지식으로 공유한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사회가 그려야 할 큰 그림에 대한 논의가 일어나고 공론화되려면 무엇이 필요할까? 결국 가장 중요한 문제는 정치가 제 기능을 회복하는 것이다. 이때 ‘정치’란 여의도 국회에서 벌어지는 일을 중심으로 한 좁은 의미가 아니다. 정당은 물론 정책지식을 생산하는 민간 전문가들을 그리고 대중에게 지식을 공급하는 미디어를 포괄하는 넓은 의미다. 이 모두가 함께 변화하지 않고는 미래 한국사회의 큰 그림에 대한 토론은 한 발짝도 진전되기 어려울 것이다.
막힌 물꼬를 트고 대화가 시작되려면 우선 필요한 네 가지 장치가 있다.
230. 첫째, 독립적 싱크탱크가 생겨나고 제 역할을 해야 한다. 독립적 싱크탱크는 정책 토론의 발화점을 제공한다. 사회를 보는 새로운 관점과 구체적 대안을 지속적으로 제공해 정치인과 시민이 정책 입안과 토론에 활용할 수 있도록 해준다.
둘째, 시민사회를 지원하는 민간 재단법인의 역할이 커져야 한다. 민간 재단법인은 이런 싱크탱크 활동을 포함해 NGO영역에서 혁신적 아이디어를 내고 실천하는 사람들이 성장할 수 있는 재정적 기반을 제공한다.
셋째, 새로운 아이디어가 유입될 수 있도록 정치제도가 변화해야 한다. 정당과 선거제도가 변화해야 이런 새로운 아이디어가 현실정치에 유입될 수 있다. 또 세대 협치는 먼 미래에 대한 관심이 더 높을 수밖에 없는 젊은 세대의 생각을 현실정치에 반영할 수 잇는 체계다.
넷째, 느리지만 깊이 있고 정확한 미디어가 성장해야 한다.
결국 이런 아이디어가 시민들에게 확산되어야 하는 사회 전체가 바뀌며 정치도 변화할 여지를 얻게 되는데, 이를 위해서는 느리지만 진지한 미디어가 만들어지고 성장해야 한다.
223. 싱크탱크, 혁신적 정책 생산의 산실
미국과 한국은 무엇일 달랐던 것일까. 사람과 가치 가운데 어느 것이 먼저였느냐에 그 차이가 있다. 레이건이 먼저 있고 시장만능주의가 있었던 게 아니다. 보수주의가 먼저 있었고, 그 가치를 담는 그릇으로서의 독립적 싱크탱크가 있었으며, 그러고 나서 레이건이 있었다. 오바마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그들은 외로워 보이지 않는다. 그들이 사라져도 그 가치는 사라지지 않으리라는 믿음이 든다.
(…) 싱크탱크들은 정치인 개인을 보좌하는 역할을 하는 게 아니라, 특정한 가치를 뒷받침하는 정책 아이디어를 만들어내고 옹호하는 역할을 한다. 보수주의, 자유주의, 진보주의 등 다양한 가치에 맞는 싱크탱크가 다양하게 존재한다. 각 싱크탱크 연구원들은 의원들에게 연구보고서를 전달해 입법화에 기여하며, 의회 청문회에서 증언함으로써 자신의 아이디어를 전파한다. 나라를 지탱하는 가치에 대해, 또 그 가치를 구현하기 위한 분야별 정책조합에 대해 활발한 토린이 일어나는 배경이 여기 있다.
이들은 자신의 가치에 맞는 정치인이 집권하면, 적극적으로 백악관과 의회에 보좌진으로 진출해 자신의 생각을 실천에 옮긴다. 그러다가도 정권을 잃고 나면 다시 싱크탱크로 돌아와 연구활동을 이어가며 실력을 키운다. 이른바 ‘회전문 인사’의 긍정적 버전이다.
독립적 싱크탱크는 비영리 부문의 중요한 축으로 역할하면서 정치와 사회를 잇는 역할을 할 수 있다. 그리고 정치부문과 비영리부문에 끊임없이 새로운 아이디어와 사람을 공급하는 저수지 역할을 할 수 있다. 이곳을 통해 정책전문가가 육성되고, 다음 정부의 정책보좌진이 선발되고 검증된다.
한국의 경우 어떤 가치를 지향할지 마음 깊이 품은 대통령이 선거를 통해 당선되었다 하더라도 어떤 정책조합이 이런 가치를 지탱해줄 수 있을지 명확히 하지 않은 채 집권했을 것이다. 이런 생각을 명확하고 상세하고 만들어줄 싱크탱크가 없기 때문이다. 선거와 정치가 정책 중심이 되려면 새로운 가치와 생각을 담는 그릇으로서의 싱크탱크가 반드시 필요하다.
재단법인, 지적 실험의 서포터
241. 전통사회에서는 흉년이 들면 부자가 곳간을 열어 마을 주민들을 먹였다. 하지만 현대사회에서 구휼은 가진 자의 몫이 아니다. 국가의 몫이다. 아무리 큰 부자라도 사회 전체의 빈곤을 사재로 해결하지는 못한다. 그러니 제도로 해결해야 한다.
민간기부가 더 필요한 곳은 따로 있다. 사회문제 해결을 위한 지적 실험에 기부되어야 하는 것이다. 누군가는 미래 사회의 그림을 계속 그리고 실험해야 하는데, 여기에는 독립적 재원이 필요하다. 그런 곳에는 정부가 기여하기 힘들다. 세금을 실험에 쏟아붓기가 쉽지 않을뿐더러, 정부 돈을 받은 실험이 정말 실험적이기도 어려운 법이다. 한국의 현재 상황은 매우 척박하다. 사실상 재원이 전혀 없다.
(…) 한국에 데대로 된 정책토론이 이뤄지고 사회혁식이 일어나려면 새로운 기부재원이 필요하다. 그런 기부에 나설 혁신적 기부자도 필요하다. 새로운 기부자들이 해야 할 일은 고기를 잡아주는 일이 아니다. 고기 잡는 법을 가르치는 일도 넘어서야 한다. 어업 자체를 혁신하는 지적 실험이 바로 그들이 관심을 가져야 할 일이다.
새로운 정치의 가능성
243. 정치가 알아서 사회를 바꿔주리라 생각하는 정치만능주의는 틀린 생각이다. 선거 때면 사람들은 유행처럼 정치만능주의에 빠져든다. 그래서 자신이 지지하는 이의 당선에 어마어마한 강도의 감정이입을 한다. 대통령 선거 전후 나라는 정확하게 둘로 갈라진다. 사람들은 누구에게 투표하느냐로 자신과 타인의 정체성을 확인한다. 정체성이 다른 이들에게는 가차없는 증오를 보여준다. 그리고 한 표를 행사하고는 많은 일을 했다고 생각한다. 자신이 지지한 후보가 당선되지 않으면 심각한 심리적 좌절에 빠져든다.
(…) 자신이 찍은 사람이 이겼다면 나의 가치와 이익을 잘 지켜주는지 가만히 지켜보다가 이내 실망하고 손가락질한다. 순수성을 조금이라도 훼손하는 모습을 보이면 아무리 지지했던 정치인이라도 증오의 대상이 되는 것은 순식간이다.
그리고 오래지 않아 정치는 아무것도 해결해주지 못한다며 정치인 전체를 조롱하고 질타한다. 정치인이 하는 행위는 모두 사악하고 혐오스러운 것으로 치부한다. 정치만능주의는 곧 정치무능주의로 연결된다.
24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