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홍성에 내려와 처음 느낀 건 불안이었다.
'이대로 그냥 늙어버릴 수도 있겠는걸’ 이 느낌은 막연했지만 분명한 증거가 있었다. 몇 가지 가능성일 뿐이지만 증거는 눈앞에 분명하게 존재했다. 이 모습이 내 미래가 되지 말라는 법은 없었다. 내 스스로를 납득 시킬만한 변명은 없었다. 믿을건 내 신념뿐이었다. 저임금의 생활, 늘어날 것 같지 않은 수입. 사회적경제, 돈이 아닌 사람이 남는 경제. 이곳에서 사람을 남기지 않는 다면 무슨 의미가 있는가. 어쩌면 제대로 된 집 하나 갖지 못하고 살수 있겠구나. 터전을 전전하며 현실로부터 겉돌다 늙을 수 있겠구나. 아무것도 아닌 인생을 살수 있겠구나. 내세울건 허울뿐인 우물 안 개구리가 될 수 있겠구나. 이 불안이 공명심 때문이라 하더라도, 주류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욕심이라 해도 두려웠다. 내 자신이 얼마나 순진했는지, 얼마나 어렸는지 깨닫는다. 사람들의 냉소가 조금은 이해된다.

시카고 빈민가의 오염된 공장지역. 이곳에서 풀뿌리 조직운동을 시작한 버락 오바마. 스물두 살의 오바마에게 세상은 말했다.
“젊음을 낭비하지 마라. 언젠가 아침에 눈을 떴을 때, 늙은이가 되어 있을 거야. 지친 늙은이가 되어 있을 거야. 더 보여줄 게 아무것도 없어질 때가 올거야.”

어느 일이든 그러하지 않겠느냐마는 이 불안은 경고였다. 긴장을 놓지 말라는 내 마음이 말하는 경고였다. 배우고 성장해라. 도망가지도 안주하지도 마라. 그래, 새로운 이야기가 이제 시작되고 있다.

기대와 실망, 희망과 불안, 즐거움. 모든 걸 함께 주는 인생은 역시 공평하다. 홍성에서의 한 달. 돈을 포기하고 선택한 귀촌. 돈의 빈자리. 이 빈자리에 무엇이 채워질까. 다른 길은 분명 있다. 돈이 아니라 사람이 남는 경제. 사람을 남기는 인생. 그런 삶을 나는 살아갈 수 있을까. 이 신념을 감당할 수 있을까.

오늘의 나와 현실을 살피고,

어제의 나로부터 오늘 한걸음 나아간다.

홍성 귀촌 충남 불안늙어버린 내 뒷모습을 보았다




홍성으로 귀촌했다는 소식에 친구들이 물었다. “농사 잘 짓고 있냐?”
“엇, 나 농사 안짓는데” 기대와 다른(?) 답변에 친구들은 당황한다. “뭐야 그럼 거기 왜 있어?” 그래, 강원도 횡성보다 생소한 충남 홍성. 이곳에서 나는 뭘 하고 있는거지?

여행을 다녀온 후, 나는 지역 활동가가 되기로 결심했다.
사실 이 결심과 관련해서 구체적인 계획은 딱히 없었다. 주변에 지역 활동가로 사는 사람도 없었다. 홍성으로 내려오기 전, 부모님은 지역 활동가가 어떤 사람을 말하는 거냐고 물었다. 두 분이 고개를 끄덕일 정도로 분명하게 설명을 하지도 못했다. 생태적인 삶, 주체성이 있는 삶, 지속가능한 삶, 그런 삶이 가능한 사회. 어렴풋한 이 개념을, 체화해보지 않은 생각을 말로 담아내기에 내 삶이 부족하다. 

 하지만 이건 분명하게 말할 수 있다. 우리에게는 변화가 필요하다. 진실을 감추는 사회,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 사회에 변화가 필요하다. 인간이 상품이 되어야 하는 사회에 변화가 필요하며, 소모적인 삶에 변화가 필요하다. 변화는 저절로 오지 않는다. 변화는 풀뿌리로부터 나온다. 풀뿌리가 자랄 수 있는 곳, 지역이 아닐까. 

- 홍성 생활 1주째에 셋집을 구했다. 
 1주일 동안, 10여 곳의 집을 돌아보았다. 방 2개, 부엌 1개의 집을 계약했다. 화장실도 집 안에 있다. 이삿짐은 몸뚱이와 이불 뿐이었다. 살림이 필요하구나. 살림을 사지 않고, 채워 넣어 볼 수 있지 않을까? 사람들과의 관계를 통해 채워나가 볼 수 있지 않을까? 돈이 아닌 관계로 살림살이들을 얼만큼 채워볼 수 있을까. 물론 돈이 없어서 이러는 게 아니다. 절대 그런 것이 아니다. 난 그런 놈이 아니다. 돈 없이도 살 수 있던 시대가 있었으니까. 시간이 걸리더라도, 불편하더라도 기다려보자. 홍성 시장 사랑방에 ‘총각네 없는 물건들’ 목록을 붙였다. 태국 마사지를 해드리겠습니다. 만나는 사람들마다 살림 채우기 프로젝트를 이야기했다. 의자를 얻었다. 냄비, 후라이팬, 접시, 그릇 식기 셋트를 얻었다. 전기난로를 얻었다. 이불을 얻었다. 전기밥솥을 얻었다. 말 그대로 아는 사람이 늘어갈수록 살림이 채워져 갔다. 홍성 생활 26일, 어느덧 사람 사는 구색을 갖췄다.

- 셋집을 계약하던 날, 주인집 어머니가 말했다. “시골 집이 원래 불편혀. 불편해도 좀 참고 살어~” 
집에서 산지 3주. ‘원래’라는 단어 안에 함축된 것들. 이것들을 풀어보기로 한다.

- 쥐 친구
 우리집은 옛날에 지어진 가옥이다. 집 뒤로는 작은 대나무 숲까지 있어 살짝 스산한 기운이 돈다. 입주한지 몇 일 안 된 어느 날 밤, 샤워 중. 천장으로부터 소리가 들려왔다. ‘우두두두두’ …뭐지? 잠시, 상황파악. 28년 내 모든 경험을 총동원해 상황을 분석해보았다. '…쥐구나!' 시간은 바야흐로 자정. 집에 살림도 없어 아직은 흉가스런 분위기. 귀신이 나와 밥을 지어줘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 이거 식은 땀이 나려는데. 정신을 차리기로 했다. 아니야, 쥐귀신 이야기는 들어본 적이 없는 걸. 그러고보니 그러네. 다행이다. 쥐는 무서운 동물이 아니구나. 안심. 

- Mr. 돈벌레
 퇴근을 하고 집에 들어와 불을 켰다. 벽에 뭔가 붙어있었다. 끼약! 다리가 백만 개는 넘어보이는 돈벌레가 나를 반겨주었다. 온몸의 털이 쭈뼛섰다. 0.3초 고민. 무시할까. 잡을까. 무시하자. 아냐, 잡자. 아냐, 무시하…하...기에는 내가 도망갈 곳이 없다. 망할. 그래도 고무장갑이 있어 다행이다. 고무장갑을 끼고 신문지를 들었다. 기합을 외쳤다. ‘아즈아~’ 요란하게 잡아야 벌레 잡는 느낌을 느낄 틈이 없다. 최소의 느낌은 최소의 정신 데미지. 신문을 얼른 구겨 쓰레기 봉투에 넣었다. ‘하, 수명이 단축되는 기분이야.’ 다음날, 불을 켰다. 돈벌레 세 마리가 나를 반겨주었다. '잘 부탁해'

넵, 잘 부탁드립니다.

… to be continued

충남 홍성 대교리우리집



ㅡ 바람이 부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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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스탄불에서 아테네까지 1,149Km 자전거를 타던 시간의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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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자전거 여행은 자전거를 탄 날 16일에 쉰 날 4일을 더해 총 20일이 걸렸다. 아침, 밥을 먹고, 길을 달린다. 점심, 달리고, 달린다. 저녁, 숙소를 찾는다. 잠을 자고, 일어난다. 매일의 순환. 먹고, 달린다로 정리되는 단순한 과정. 하지만 ‘달린다' 안에는 평상시와는 차원이 다른 시간이 담겨 있었다. 시간의 농밀함. 그건 마치 어머니가 떠주시는 꿀과 같았다. 페달을 밟을 때 시간은 한없이 길어졌고 한없이 천천히 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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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을 견디는 것’. 그래, 이게 자전거 여행의 요체였다. 여행을 떠나기 전, 군인이었던 시절. 한 가득한 마음이 터질 것 같은데 쏟아낼 곳을 찾지 못했던 시절. 답할 수 없는 질문으로 가득했던 시절. 아무것도 아닌 인간이 되는 게 아닐까 두려웠던 시절. 화분에 못박힌듯 했던 시절. 그런 시절이 있었다. 한마디로 나는 흐르는 세월을 견딜 만큼 강한 몸을 갖지 못했다. 페달을 밟는 시간, 이 농밀함을 나는 견딜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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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전거를 탄지 11일째 되던 날, 달린 거리가 660킬로미터를 넘어섰다. 목적지인 아테네까지 대략 500킬로미터가 남았다. 여정의 반을 지나고 있었다. 시작이 반이라는 말대로 그제야 자전거 여행을 시작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라, 아테네까지 진짜로 갈 수 있겠는 걸?’ 어쩌면 완주할지도 모르겠다는 느낌이 그때야 들었다. 이스탄불에서 아테네까지의 거리, 1,149킬로미터. 자전거를 사고 나서야 알게된 거리. 끝이 보이지 않는 앞날. 과연? 호기심 반, 의심 반. 자신이 없었다. 자전거를 사고 이틀 후, 못을 박듯 여행을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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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주할 수 있을까? 자신할 수 없었다. 우선 조금만 지루해져도 '내가 왜 이걸?’ 이름의 싹이 쑥쑥 돋아나는 스스로를 믿을 수 없었다. 자전거 녀석에게도 책임이 있었다. 문제 없는 날보다 문제 있는 날이 더 많은 자전거였다. 내일은 나아지겠지. 그런 내일은 오지 않았다. 펑크는 일상이었다. 페달고정 볼트, 핸들고정 볼트 같은 중요 부품이 빠져버렸다. '나는 이제 틀렸네. 나를 버리고 가시게’라고 말하듯 했다. 내 의지보다 허약한 녀석이 이 우주에 존재한다니. 사실 십만 원 짜리 자전거는 묵묵히, 충실히 제값을 수행하고 있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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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자전거 여행이 어느새 중반을 넘어서고 있었다. 하루 주행을 마치고 침대에 누워 눈을 감았다. 눈을 뜨니 아침이었다. 마술 같은 시간의 흐름이었다. 정신을 차리면 도로 위에 있었고, 점심을 먹고 있었다. 아침, 도로, 펑크, 침대 사이를 반복하다 보니 660킬로미터 지점에 온 것이다. 어느새, 실로 위대한 단어였다. 그제야 자전거 여행의 실감이 왔고, '왜 자전거를 타고 있는 거지?' 의문이 생겼다. 그래, 우리는 왜 자전거를 타고 있는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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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전거 타고 가도 재밌겠다” 빈 깡통 둘이 만나면 메아리가 쉽게 생기기 때문일까. 빈 머리가 요란하기 때문일까. 장난스레 주고 받은 말. 그 다음 날 바로 자전거를 산걸 보면 빈 깡통 탓일 수도 있겠다. 그렇지만 여지껏 끈덕지게 이어진걸 보면, 우리 자전거 여행이 단순히 머리로부터 시작된 건 아닐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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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고등학교 3학년 여름방학, 자전거를 타고 제주도를 돌았다. 인터넷에서 만난 두 대학생 형들과 함께. 그 당시 나는 스스로 뭘 모르는지도 모르는, 다 컸다고 생각하는 고등학생이었다. 두 대학생 형들은 입대를 한 달 앞둔, 마치 세상의 종말을 기다리고 있는 듯한 형들이었다. 세상의 종말을 앞둔 두 사람과 봄날 망아지 한 마리, 각기 배경은 달랐으나 우리는 열심히 제주도를 돌았다. 한여름 뜨거운 햇볕이 작열하는 제주도를, 생명이 넘치는 제주도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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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은 그때나 지금이나 나와 연이 없었다. 한솥도시락으로 연명하고, 중간중간 주유소에 들러 물을 얻어 마시는 궁색한 여행이었다. 어느 밤, 고기가 너무 먹고 싶었다. 식당 갈 돈은 없어 슈퍼에서 삼겹살을 사왔다. 민박집 마당에서 고기를 구워먹었다. 기름 구멍이 없는 후라이팬. 고기 기름이 마구 튀겼다. 기름이 마구 튀던 후라이팬처럼 티격태격 분란이 멈추지 않는 여행이었다. 자전거 타기도 바쁠텐데 틈틈이 싸우고 삐쳤다. 한 바퀴 다 돌고 나서야 알게 됐다. 한낮의 열기를 피해 달려야 했다는 걸. 서늘한 아침, 오후 시간에만 자전거를 타야 했다는 걸. 몸으로도 교훈을 얻지 못한 미련한 여행이었다. 멜라닌 생성을 막는답시고 바른 선크림. 방수 선크림은 위대했다. 눈에 들어간 선크림은 눈물에도 지워지지 않았다. 흐르는 눈물을 닦으며 달렸다. 보기에도 안쓰러운 여행이었다.
도시락 가게에 들어선 그들. 핼쑥한 얼굴, 부어있는 두 눈, 땀에 절은 옷. 반팔 티 밖으로 나온 두 팔은 벌겠고 한쪽 쪼리는 끈이 떨어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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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랬던 8년 전 제주도 여행에서도 ‘어느새' 마법은 일어났다. 섬을 한 바퀴 돈 것이다. 첫날 출발했던 제주항 앞에 섰다. 대학생 형들은 가슴 벅차 기념사진을 찍는가 싶더니 '이게 다 무슨 소용인가’, 본연의 세상 종말 회색빛으로 돌아갔다. 나도 완주했던 날의 기억이 딱히 없는 걸로 보아 큰 감동이 없었나 보다. 굳이 교훈을 꼽자면, 자동차는 인류의 위대한 발명품이랄까. 섬을 한바퀴를 돌고 얻은 교훈이란 게 고작 렌터카 회사 아저씨가 말해 줄 법한 배움이었다. 이따위 교훈 자전거를 3박 4일이나 타지 않아도 아는 거 아닌가. 별수 없었다. 이미 돌았는 걸. 그리스에서 자전거를 타며 그 여름날이 생각났다. 그건 단순히 자전거 여행이라는 연관성 때문이었을까. 아니 그것만은 아닐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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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인이었던 시절, 어느 것, 어느 곳에도 마음을 두지 못했던 시절. 바닷물을 마신듯 무엇으로도 갈증이 채워지지 않았던 시절. 가슴 속 바람은 이곳에서 저곳으로, 저곳에서 또 다른 곳으로 나를 떠밀었다. 현재와 미래 사이 어딘가를 떠돌았다. 민들레 씨앗은 어느 곳에도 내려앉지 못했다. 전역을 결정했다. 가슴속 바람을 따라 돛을 펴기로 했다. 하지만 이 바람이 그저 젊은 날의 혈기라면, 젊음과 함께 홀연히 사라져 버리는 바람이라면. 그대로 주저앉게 된다면. 두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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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였을까 이 바람은. 모든 걸 버리게 한 이 바람은. 지구 반대편까지 오게 한 이 바람은. 어느 곳에도 뿌리를 내리지 못하게 했던 이 바람은. 자전거 여행을 생각했을 때, 불었던 이 바람은 무엇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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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년이 지나서 이어진 자전거 여행. 렌터카 아저씨의 교훈으로부터 한걸음 더 나아갔을까. 어줍잖게 깨달은 깜냥이 있다. 언덕을 오를 때, 우리는 그 순간에 집중을 해야 한다. 뒷바퀴에서부터 시선이 향하는 전방 2m. 그곳만이 나의 세계, 나의 우주다. 그 세계에 들어가는 순간 나란 사람은 잊혔다. 나와 너를 나누는 울타리가 사라졌다. 편견, 허영, 자만심, 나를 얽매는 껍데기 따위, 걱정, 불안 모두 사라졌다. 페달을 통해 전해지는 땅의 굳건함. 대지에 맞서 팽팽해지는 근육. 관념이 아닌 몸이 살아나는 세계. 그곳의 나는 존재하면서 존재하지 않았다. 언덕 하나에 두려움을, 언덕 하나에 의심을, 언덕 하나에 나를 넘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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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덕의 끝, 내리막이 열리는 곳. 지나온 길을 본다. 지난 시절 나를 채워주었던 조각, 잃어버렸던 조각. 깊이 잠겨있던 조각들이 떠오른다. 나의 속좁음에 놓쳐버린 인연들, 오늘의 나를 있게해준 고마운 사람들, 어린시절 꾸었던 꿈이. 페달을 밟았다. 내리막을 내달린다. 바람이 불었다. 나는 왜 자전거가 타고 싶었을까, 제주도로부터 이어진 기억은 왜 오늘을 기다려왔을까? 삶은 내게 무엇을 말해주고 싶었던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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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스 뮐러는 말했다. 인간 존재의 밑바탕을 이루는 것을 사랑이다. 천체가 서로 끌어당기고 상대를 향하며 만유인력의 법칙에 따라 서로 모여들 듯, 세상의 영혼들도 서로 끌어당기고 상대를 향하며 사랑의 법칙에 따라 서로 융화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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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왜 살아가는 걸까, 왜 누군가를 사랑하는 걸까? 그건 우리 안에서 바람이 불어오기 때문이다. 설렘이라는 이름의 바람이 불기 때문이다. 영혼의 끌림을 향해 나아갈 때, 서로를 바라보고 융화할 때, 우리 가슴에 바람이 불기 때문이다. 바람이 우리를 삶으로, 사랑으로 이끌기 때문이다. 그대 가슴에 바람이 부는가. 돛을 펼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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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 오늘도 굳건히 언덕을 오르길
담대히 내리막을 가르길.
존재하는 삶, 사랑하는 삶 우리 그 삶을 향해
함께 나아가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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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전거 여행 비디오

그리스 아테네 터키 이스탄불 자전거 여행 터키-그리스 국경을 넘으며



세계여행 몽골 유목 체험 중유목 체험 사흘째, 집에 가고 싶슴다


올 한 해 토해내듯 여행기를 썼다.
"이것도 여행이라고"라는 이름이었다.
글쓰기는 한약을 짓는 과정과 같았다.
재료를 모으고, 숙성 시키고, 시간을 들여 달이는 과정.
특히 책상에 앉아 글을 쓸 때
한약을 짤 때의 느낌이 난다.
허준 형처럼 고상한 느낌이 아니고
짜여지는 한약재의 느낌에 가까웠다.
마지막에서 마지막 한방울까지 쥐어짜고,
결국엔 한약 찌꺼기가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글을 쓴다는 건 참 매력적인 일이었다.
경험의 재경험.
누구에게나 유한한 인생을 한 번 더 사는 기분.
더 깊이있게 담겨지는 시간.

로버트 맥기는 글쓰기를 이렇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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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이에게는 영감을 주는 일이 다른 이에게도 같은 역할을 하는 것은 아니다. 어떤 이의 내부에서 기다리고 있던 어떤 것, 가슴속에 맹아로 자리 잡은 확신이나 세계관을 일깨운다. 그동안 축적되어 온 모든 경험은 바로 이순간을 위해서 준비되어 온 것이며, 인간은 오직 그만의 방식으로 이 자극에 대답한다. 여기에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글쓰기의 전 과정을 통해 인간은 해석하고 선택하고 판단을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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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 그 자체는 혼란스러운 경험으로 남아있을 뿐이지만 예술(글쓰기)은 우리가 아는 것, 느끼는 것들에 질서를 부여해서 이 세계 속에서 우리의 위치를 정확하게 이해하게 만들어 준다. 단순히 말해 이야기는 우리가 인생 자체에서는 얻을 수 없는 것을 우리에게 쥐어준다.

<시나리오 어떻게 쓸 것인가>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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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읽어본 여행기는 어설프고 방정맞다.
애초 느꼈던 생각이 담기지 않았던 글
읽는 이로 하여금 숨가쁘게 하는 글도 있었다.
토해냈던 여행기를 다시 쓰기로 했다.
<이것도 여행이라고>를 통해 결국 모든 것이 여행이었다.
를 말하고 싶었다. 다른 여행을 말하고 싶었다.
다시 쓰는 <여행에게 묻다 여행이 묻다>는 주제를 분명히 하기로 한다.
내게 여행은 질문하고 답을 얻는 과정이었다.


그러니까 새로운 이야기의 시작이랄까.

 한번 사는 인생 주인으로서 살고 싶었다. 재미나게, 의미있게 살고 싶었다. '재미'란 무엇일까. ‘의미'는 무엇이며, '인생'이란 무엇일까. 감사하게도 인생의 기점마다 좋은 스승을 만났다. <지행>, 아는 대로 행하는 것, 모든 갈림길의 시작이었다. 어떤 <질문>을 품고 살아갈 것인가. 나를 벗어나 바깥으로 나가볼 수 있었다. 기록과 <글쓰기>. 글을 통해 경험을 경험할 수 있었다.

 성장은 인생을 살아가는 맛이었다. 더 배우고 싶었다. 야간 대학에 갔다. 7년 의무복무가 끝났다. 제대냐 군인이냐 선택 앞에 섰다. 먼 훗날, ‘나도 예전에 그런 생각을 했는데 말이야... 하지 않았어. 왜냐면…’ 따위의 변명을 하기 위해 살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가슴이 말하는 것에 응답하겠다. 머나먼 초원과 쏟아지는 비바람, 느낌이 다른 햇살. 새로운 만남과 배움, 새로운 삶에 대한 막연하지만 분명한 바람에 돛을 펴기로 했다. 전역을 했다. 한달 후, 배낭을 맸다. 279일의 여행, 무엇을 보았을까.

어렸을 때 이런 말이 유행했다. "세계화 시대를 맞이하는 우리는 영어를 배워야 합니다.” ‘세계화'가 뭔지도 모르면서 우리는 왜 ‘세계화’라는 프레임을 받아들이기로 했을까. 영어를 열심히 공부해서 우리 삶의 질은 좋아졌을까? 리처드 도킨스라는 진화생물학자가 있었다. 1976년에 그는 <이기적 유전자>라는 책을 통해 '밈(Meme)’을 이야기했다. 밈은 '사회적 진화’를 뜻한다. 생명이 없는 것들도 생명체처럼 진화해나간다는 말이다. 기술의 진화가, 사회와 문화의 진화가 밈이라고. 하지만 생명체의 진화가 그렇듯, 비생명체의 진화도 항상 옳은 방향으로 나아가진 않는다.

기술의 진화는 대량살상 무기, 원자력 발전소 같은 문제를 만들었다. 자본 또한 그런게 아닐까. 인간의 편의를 위해 만들어졌으나, 이젠 스스로 절대적인 힘을 갖게 되었다. 실체없는 유령이 되어 돈이 될 것 같으면 무엇이든 블랙홀 마냥 먹어치운다. 인간은 그앞에 상품이 되고 있다. 예뻐져야 하고, 스펙을 쌓아야 한다. 돈을 얼마나 벌수 있느냐, 이게 한 인간의 됨됨이를 말해주는 시대에 살고 있다.

 여행을 다녀온 지금, 지역화라는 물음 앞에 섰다. 지역화는 인간의 존엄성을 존중하겠다는 뜻이며, 인간을 효율성의 틀에 끼어넣지 않겠다는 말이다. 신영복 교수의 말처럼 변방을 찾아가는 과정이다. 그래, 지역화가 좋은 거라 치자. 그런데 너에게 지역화가 왜 중요한건데?라는 물음에 아직은 답할 수 없다. 왜 여행을 갔어야 했는지, 왜 경영을 공부하고 싶었는지, 왜 문화에 관심을 갖게 됐는지. 이 질문들을 지나쳐 왔듯, 이 또한 인생이 내게 주는 '벽'이자, 넘어서야 할 '문’이니까.

내 ‘개인'의 즐겁고 의미 있는 삶을 지속하려면. 이게 시작이었다면, 함께 지속 가능한 삶을 살려면. 이게 지금 서있는 지점이다. 무엇을 해볼 수 있을까. "너는 나처럼 살지 말아라” 자식에게 자기 삶을 부정하는 부모가 없는 사회. 150만원을 벌어도 걱정 없이 살 수 있는 사회. 인간 영혼의 양분인 문화와 교육을 함께 고민하는 사회. 생명의 존엄성과 주체성을 지키며 살 수 있는 사회. 자유로우나 책임을 실천하는 사회. 가정이 바로서는 사회. 지속가능한 발전을 하는 사회. 우리나라도 가능할까. 분명한건 불평과 비판으로 세상은 변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우리 젊은 세대는 있는 그대로의 현실에서 변화를 만드는 법을 배워야 한다.

- 충청남도 홍성군으로.
'홍성 협동사회경제 네트워크’라는 단체에서 일을 시작하게 됐다. 홍성군 안에 있는 협동조합, 사회적기업, 마을기업 같은 사회적 경제 단체들과 복지기관 등이 모여 만든 단체이다. 지역내 사회경제 단체들의 연대와 협력을 도모하고, 지역 순환경제망 확대를 목표한다. ‘언젠가…’의 지역활동을 급작스럽게 시작하게 되었다. 오랫동안 떠들었던 독일행은 일단 접는다. 손바닥 뒤집듯 뒤집었다지만, 지금 아니면 못갈 것 같은 조바심은 여전히 남아있다. 그렇지만 현실에서 멀리 떨어져 현실을 올바르게 인식하지 못하는 뜬구름이 되고 싶지 않다. 로맨티스트냐 리얼리스트냐가 선택지라면 답은 정해져 있다. 

미국의 사회운동가 알린스키는 이렇게 말했다.
"옳은지 그른지에 대한 판단 앞에서 깊이 고민하는 것, 그것이 인간의 깊이를 갖는 사람의 자세이다. 인간의 정신은 과연 우리가 옳은지를 살펴보는 내적 의심이라는 작은 불빛을 통해서만 빛날 수 있다. 그럴 때에 우리는 비로소 냉소주의나 환멸 속으로 무너져 내리지 않을 것이다. 환상에 의지하지 않기 때문이다. …… 우리가 최우선적으로 알아야 하는 것은 우리 자신이다. 자신을 아는 사람은 자신의 바깥으로 걸어 나갈 수 있으며, 자기 자신의 반응을 마치 관찰자처럼 살펴볼 수 있다.”

28번째 가을을 지나고 있다. 전역을 결심했을 때와 또 다른 바람이 분다. 나무의 냄새와 지나온 길의 냄새를 맡는다. 만추의 낙엽이 진다. 환상에 의지하지 않겠다. 현실을 우회하지 않겠다.

앞으로 새로운 만남과 배움, 새로운 삶. 앞으로 홍성에서의 이야기를 적어보려 한다.


충남 홍성 화성매일 지나던 우리 동네 길




홍성 읍내 촛불 세월호

아무 것도 뵈지 않는 암흑속에서
쪼그만 읊조림은 커다란 빛




홍성 전통시장 안에는 지역자활센터에서
운영 중인 재사용 의류 판매 가게가 있습니다.
수원에서 내려온 총각이 아들 같다고
막내아들 삼아주신 녹색가게 어머니.
그리고 어머니께서 특별히 챙겨주신 밥솥.
"모로가도 밥만 해먹을 수 있으면 돼요, 어머니~"
아니, 이렇게 좋은 밥솥을 챙겨주실 줄이야.
만능찜/백미쾌속/무쇠솥밥/누룽지 기능을
과연 쓸런지 모르겠네요...
어쨌든 밥을 해먹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꺄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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