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독인

저자
박홍규 지음
출판사
인물과사상사 | 2014-01-17 출간
카테고리
인문
책소개
책을 읽고 그 사람을 읽어라! “책은 어떻게 인간의 영혼과 만나...
가격비교 글쓴이 평점  


6. 독서가 무조건 좋은 것은 아니고 좀더 자유롭고 비판적인 독서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특히 권력자나 권력을 지향하는 자들이 그런 독서를 했으면 좋겠다. 제대로 독서를 하면 과연 권력을 지향할지 의문이지만 권력을 잡아도 조금은 다를 수 있으리라고 기대한다. 물론 나는 참된 독서인을 반권력자라고 본다.

23. 인간에 대한 경멸과 인간을 조종하는 방법에 관심이 컸던 나폴레옹에게 마키아벨리는 누구보다도 친숙한 스승이자 친구였다. 

53. 레닌을 비롯해 당대의 러시아 학생들은 <자본>을 읽었으나 우리 학생들은 <자본>을 읽지도 않고, 아니 읽지도 못하고 혁명가가 되었다. 그래서 쉽게 변절했을 리는 없겠지만, 사상적 뿌리가 깊지 못했음은 사실이다.

54. 독서가 혁명가를 만든다.
<자본>을 읽은 뒤 레닌은 광장 노동자들과 함께 공부 서클을 시작하면서 파업, 노동법, 벌금, 노동법원 등에 대한 소책자를 여럿 썼다. 그것은 이론과 실천을 연결하는 최초의 혁명가 훈련이었다.

56. 1900년의 최초 망명지인 스위스에서 레닌은 하루 15시간 동안 도서관에 처박혀 독서하고 집필을 했다. 특히 ‘불꽃’이라는 뜻의 신문 <이스크라Iskra>발행에 열중했다. 이어 1901년 독일 뮌헨도서관에서 <무엇을 할 것인가>를 썼다. 망명 생활은 바로 도서관 생활이었다. 1902년부터 체류하게 된 런던에서도 영국도서관의 방대한 서고와 연구 작업을 위한 편리한 시설에 매료되었다. 마르크스, 찰스 디킨스, 간디, 예이츠, 이사도라 덩컨, 오스카 와일드, 조지 버나드 쇼, 버지니아 울프 등이 드나든 곳이다. 특히 마르크스는 그곳에서 약 30년을 살았다. 그는 엥겔스를 만나러 맨체스터에 갔을 때에도 도서관에서 만났다. 사실 도서관만큼 만남의 장소로 멋진 곳이 다시 없다.

58. 그 뒤 파리로 갔으나 관료주의 탓에 불편해했다. 가령 시립도서관에서 책을 빌리려면 집주인의 보증이 있어야 했는데 집주인은 보증을 서려고 하지 않았다. 게다가 국립도서관은 거리가 멀어 연구가 불편했다. 레닌은 항상 자전거를 타고 도서관에 갔는데 제네바와 달리 파리에서 자전거를 타기란 위험했다. 또 도서관은 점심시간 뒤 문을 닫았고 책을 신청한 뒤 하루나 이틀이 지나야 책을 받을 수 있었다. 레닌은 국립도서곤에 불평을 쏟아냈고 더불어 파리까지 욕했다. 게다가 자전거를 도둑맞기도 했고 자동차와 부딪혀 완전히 망가뜨리고도 했다.

59. 긴 망명 생활은 가난하고 외로웠다. 그의 삶에서 가장 어려운 시절이었다. (…) 1913년에 사랑한 여인에게 남긴 편지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부르주아의 99퍼센트, 청산주의자들의 98퍼센트, 볼셰비키의 약 60~70퍼센트)은 생각한다는 것이 무엇인 줄 모르고, 단어만 암기할 뿐이야.” 

60. 남한에서 레닌은 무너진 동상 조각으로도 살아남지 못할 것 같았는데 한 세대도 지나가기 전에 다시 레닌이 등장하고 있다. 과거의 레닌처럼 우리 자신에 의한 것이 아니라 슬라보이 지제크 등의 유해하는 서양인의 입을 통해서 말이다. 그러나 지제크에게도 부서진 조각을 이어 붙여 새로운 동상을 세울 재주는 없는 듯하다. 애드벌룬처럼 잠시 띄우기는 할 수 있어도 지난 수십 년처럼 대지에 굳게 뿌리내리게 하기란 힘들 것 같다.

61. 혁명이 필요한 시기면 레닌은 혁명의 아이콘처럼 떠올랐다가 조만간 다시 사라지는 주기적 유행인 것 같다. 경기의 주기처럼 혁명 의식의 주기도 있는 것일까? 호경기와 불경기가 반복되는 것처럼 레닌과 비레닌이 번갈아가며 춤을 추는 것일까? 사상이 이런 식으로 유행하는 것이라면 그 사상은 제대로 된 고유한 가치를 갖는 것일까? 아니면 깨춤에 불과할까?

62. 엄청난 학식과 혁명가의 정열적 기질, 천부적인 전술적 재능과 위대한 통치능력을 한 몸에 갖춘 사람, 레닌은 당의 인정받는 지도자였다. 레닌은 자신의 설득력과 도덕적 권위 덕분에 당을 통솔한 것이며, 훗날 볼셰비즘의 특징적 요소가 된 기계적 원칙을 이용해서 지배한 것은 아니었다.
- 아이작 도이처 <미완의 혁명 : 러시아 1917-1967>

나는 여기에 레닌이 베토벤과 톨스토이의 작품을 평생 좋아했고 그림도 사랑했으며, 도서관에서 평생 살다시피 했고 그의 혁명은 도서관에서 나왔다고 덧붙이고 싶다. 레닌은 권력을 잡은 뒤 국가출판국에 고전을 저렴하게 재출간하라는 지시를 내렸고 광범위한 문화 활동을 지원했으며 특히 도서관을 대폭 확충했다.

레닌의 묘는 크렘린 앞 붉은 광장에 있지만 그의 영혼은 레닌도서관에 있다. 1970년 탄생 100주년을 맞아 중앙 열람실 앞쪽 위에 책 읽는 그의 좌상이 세워졌다. 배경 벽화에는 노동자, 농민, 지식인, 학자 등 다양한 인민의 그려져 있고 열람실 주위로 16인의 흉상이 있다. 푸시킨, 도스토옙스키, 톨스토이 등이다.

63. 도서관은 모든 사상의 산실이다. 특히 사회주의를 비롯한 모든 공공 사상의 실험실이다. 그리고 지식을 사유가 아닌 공유로 갖는 곳이다. 진정한 자유와 평등은 공유에 있지 사유에 있지 않다. 그래서 도서관은 아름답다. 외양이 화려해서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새로운 지식을 추구하는 사람이면 누구나 자유롭고 평등하게 지적 모험을 할 수 있는 곳이기에 아름답다.

65. 공포정치로 강철 권력을 만든 독재자. 이오시프 스탈린.

프랑수와 라블레가 텔렘 수도원 출입구에 붙인 ‘원하는 대로 행동하라’

74. 스탈린은 소련을 완전히 바꾸어 거대한 산업 군사 강국으로 만들고자 했다. 그러나 그의 꿈은 단순히 서양을 빨리 따라잡고자 한 것이 아니라 더욱 컸다. 즉, 소련의 새로운 현대가 러시아의 나쁜 옛 전통을 제거하고 서양에서는 유례가 없는 일을 하여 인류의 존재 조건을 한층 더 높은 단계로 끌어올리고자 했다. 이를 위해 그는 종교와 전통을 뿌리 뽑고 예술과 학문에 종사하는 지식인은 복종시키거나 없애야 했다. 이를 위해 과거와 철저히 단절된 젊은 공산주의자를 양성해 공산당의 이념을 퍼뜨리고자 했다.

76. 스탈린은 소탈한 혁명가이자 지칠 줄 모르는 의지로 끊임없이 노력하고 공부했으며, 겸손함과 친근함으로 경계심을 허물어뜨리는 허물없는 동지였다. 스탈린은 속마음을 드러낸 적이 없었다. 한순간도 긴장을 늦추지 않고 권력 경쟁의 모든 국면을 헤쳐나갔다. 최후의 순간까지 꿋꿋하게 기다리고 견디는 집념의 인간이었다.
 그의 지적 관심은 문학, 역사, 경제, 과학 등 광범위한 분야에 걸쳐 있었다. 제2차 세계대전 때에는 군사 전략에 관한 공부를 시작해 얼마 안 가 군사 전문가 못지않은 실력을 갖추었다. 주로 사회주의 이념을 다룬 저작을 써온 스탈린이 1950년에 러시아 민족의 언어를 다룬 <마르크스주의와 언어학의 문제>를 발표하자 사람들은 깜짝 놀랐다. 그의 경쟁자들은 인정하기 싫어했지만 스탈린은 글을 유려하고 논리적이고 사려 깊게 쓰는 지식인이었다.

83. 궁극의 독재자. 아돌프 히틀러.

나는 ‘한국적’이라는 개념 자체를 믿지 않지만 이 말은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간에 널리 사용되고, 그 내용도 서로 모순되는 것을 담고 있다.

83. 그런 주관적 견해를 주장하는 자들이 자기 견해를 객관적인 것이라고 하는 것이야말로 정말로 그로테스크하면서도 동시에 지극히 단순 소박하다는 점에서만 유일하게 의견의 일치를 보는 것 같다. 이런 현상은 문화만이 아니라 정치, 경제, 사회에서도 나타나는 듯하다. 가령 정치를 하는 자들은 모두 자기주장이 국민의 것이고 국민을 위하는 것이라고 하는데 그 주장은 언제나 극과 극, 흑과 백으로 철저히 나뉘어 무엇이 정말 국민의 주장인지 도저히 알 수가 없다. 결국은 권력을 잡기 위한 술수인 듯하다. 경제나 사회에서도 마찬가지다. 모두 돈을 벌기 위한 술수나 힘을 갖기 위한 야합에 불과하다. 흑과 백이라는 색의 차이가 있을 뿐 흑백 논리에 의해 좌우된다는 것은 마찬가지다. 보수니 진보니 하는 대립도 마찬가지다.

112. 자기가 놓여 있는 사회 현실을 제대로 모르고 한두 권의 책만을 맹목적으로 읽는 독서는 대단히 위험하다. 우리 주변에도 그런 비현실적이고 교조적인 독서로 사회주의자나 민족주의자가 되어 그것에만 파묻혀 사는 사람이 많다.

(…) 독서는 고독한 작업이 아니다. 타인과의 토론과 독서는 함께 가야 하고 이를 통해 다시 자신과의 토론이 필요하다. 어려서는 부모나 형제가 토론의 상대일 수 있다. 참된 비판적 독서는 자주적인 사고의 형성 뒤에야 가능하지만 비판적 독서가 자주성 확보에 도움이 될 수도 있다. 어느정도의 주체성이 확보되는 나이가 되면 독서삼매식의 몰주체적 독서에 빠져서는 안 된다. 물론 맹신적 독서는 오로지 비판을 위한 독서만큼 위험하다.

(…) 책 한 권에서 모든 것을 얻고자 기대해서는 안 된다. 몇 줄이라도 자신의 마음에 와닿는 구절이 있으면 충분하다. 단 한 권의 책만 읽는 사람은 경계해야 한다. 독서는 모든 것을 주지 않는다. 그것은 겨우 지식의 재료를 줄 뿐이고 그것을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것은 사색의 힘이다. 그 지식은 다양하면 다양할수록 좋다. 그것은 혼란을 줄 수도 있지만 자신의 힘으로 그 혼란을 정리할 수 있다면 새로운 창조를 가능하게 할 수도 있다.

113. 독서는 인간을 자유롭게 하는가
아우슈비츠를 운영한 독일인들은 매일 괴테와 니체와 릴케를 읽고 토론하며, 바흐와 베트벤과 슈베르트를 즐겨 들은 독서인이자 교양인이었다. 유신 시대를 지배한 자들도 원효나 이퇴계나 이율곡을 한문으로 줄줄 읽고, 바그너 음악을 악보와 함께 들으며 바이로이트에서 열리는 세계 최고의 바그너 음악제에 매년 참석하면서 동서양 문화의 원융회통 운운하는 이 시대 최고의 지식인들이었다. 이를 두고 그들이 제대로 이해하지도 못하고 지적인 허영이나 사치로 예술을 감상하거나 독서를 했을 뿐이라고 비웃는 것으로 독재는 다시 생기지 않을까? 히틀러나 그 주변의 인간들이 유식한 체했지만 사실은 무식했다고 비웃는 것으로 문제가 해결될까? 그렇게 비웃는 자들과 그들 사이에 어떤 차이가 있는 것일까? 그렇게 말하는 자들도 권력에 영합하는 자들이 수두룩함을 우리는 알고 있다.

 독서나 교양이 인간을 자유롭게 하는가? 그런 경우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참으로 드물다. 특히 독서나 교양을 직업적이고 전문적으로 하는 대학 교수 사회가 그렇다. 그들 중 능력 있는 자들은 정치, 경제, 사회, 문화적인 각종 변태의 출세 코스로 나가기 바쁘고, 나처럼 무능한 자들만이 대학에 남아서 이런 글이나 쓴다.

 소위 전문가나 전문적 제도는 오로지 집단 이익을 추구하고, 집단 이익을 위해 아주 쉽게 지배 체제와 공모하는 세상에 우리가 살고 있다. 가령 복음을 전하는 목사나 스님은 교회나 절에 돈을 내는 지배자와 부자의 세속적 목적에 봉사해왔다. 검찰과 경찰이 자기 이익을 위해서 다투고 의사회나 약사회가 자기 이익 때문에 훌륭한 의료를 제한하듯이 전문가 집단은 자기 이익의 증진에만 골몰하고 있다. 의학이나 법학 등 출세 지향적인 전문 교육이 치열하면 치열할수록 그 전문 직업인을 비양심적이고 불법적인 인간으로 만들고 있다.

115. 이런 현실에서 학문이나 예술은 인간을 고상하게 하고 자유롭게 하기는커녕 오로지 권력을 위해 봉사하는 것일 뿐이다. 고상이니 하는 것은 교양업자의 과대선전 광고일 뿐, 실질적인 의미를 갖는 것이 아니다.

154. 그 마지막 전쟁의 침략국이 미국과 한국이라는 사실, 한국군에게는 최초의 침략전쟁이었다는 역사적 사실을 나는 베트남에 있는 동안 계속 되뇌었다. 특히 그곳을 찾는 한국인의 터무니없는 무례나 나라 자랑 같은 것을 보면서 그러했다.

베트남의 거리에는 엄청 긴 직사각형 집이 늘어서 있다. 우리의 기와집 같은 것이 전통 가옥일 텐데 그런 것은 특별하게만 남아 있고 일반 가정 주택에는 흔적조차 없다. 아마도 전쟁 통에 다 타버렸고 전후에 다시 짓지도 않은 것 같다. 직사각형 집은 땅이 좁아 그렇게 지었다는 네덜란드 거리를 연상하게 하는데 네덜란드는 베트남과 아무 관련이 없고, 프랑스 식민지 시절 베트남 사람들을 감시하기 위해 그렇게 짓도록 강제한 것이 지금까지 전통처럼 남아 잇었다.

178. 문화대혁명과 마찬가지로 폴포트의 정책을 평등 이념 구현을 위한 인류 역사상 최대의 실험으로 평가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수많은 사람이 죽었고, 모든 것이 철저하게 파괴되었다. 그것은 사상 갈등이 아니라 권력 투쟁이었다. 사상이나 종교는 그 허울에 불과했다. 그러나 사상이나 종교도 폴 포트를 미친놈 취급할 것이 아니라 반성해야 한다. 사상이나 종교가 절대 복종을 요구한다면 그런 미친놈을 낳을 수도 있음을 반성해야 한다. 어떤 사상과 종교도 절대 복종을 요구해서는 안 된다. 그리고 그것은 절대로 폭력에 의해 실천될 수 없고 그렇게 실천되어서는 안 되는 것임을 말해야 한다. 그래서 사상과 종교에 순교한 간디가 그렇게도 비폭력을 외쳤음을 기억해야 한다. 같은 풍토에서 자란 폴 포트와 간디는 너무나도 달랐다. 폭력과 비폭력이라는 점에서 그렇다. 간디는 폭력이 제국주의적인 것이라고 하면서 거부했다. 반면 폴 포트는 제국주의가 낳은 괴물이었다. 마오쩌둥도 김일성도 그런 괴물이었다.

영원히 철들지 않는 삶의 혁명가, 카를 마르크스
186. 30여 년을 도서관에서 보내다.
독서의 대상은 교과서와 그것을 해설한 참고서다. 국가가 인정한 사서삼경 이래 교과서는 유일한 진리다. 그것을 벗어난 책은 책이 아니다. 그러니 진리는 분명하다. 진리에 대해 의문을 품는 것은 공부가 아니다. 누가 진리를 많이 외우느냐가 중요하다. 따라서 공부란 오직 암기다. 암기의 천재가 한국의 천재다. 그런 사람들이 한국을 지배한다. 중국의 사서삼경을 외운 자들이 조선을 지배하다가 결국은 망했다. 그 뒤에는 일본이 강요한 육법과 전법을 외운 자들이 지배해왔다. 그들을 벗어나기가 정말 어렵다. 그러나 그것을 벗어나지 않으면 한반도에는 희망이 없다. 그런 공부법이나 독서법에서 벗어나지 않는 한 희망은 없다.

188. 사실 마르크스는 그 거대한 독서실에서 그것이 상징하는 자본주의와 대결했다. 지독한 가난 속에서 살면서도 세계 최고로 화려하고 장엄하며 완벽한 독서실에서 하루의 반을 보내며 그는 행복했다. 아침 9시 문이 열리자마자 들어가서 저녁 7시 문을 닫기 직전에 나왔다. 하루 10시간 그는 그곳에서 책을 읽었다. 그는 거리의 혁명가가 아니라 독서실의 혁명가였다. 아니 정말로 열심히 책을 읽는 독서가였다. 이 세상에 그만큼 열심히 책을 읽은 사람이 또 있을까? 
 내가 마르크스를 독서가로만 말하는 것에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들이 있으리라. 특히 책과는 무관하게 사는 자칭 혁명가들이 그러리라. 나는 그와 같은 혁명가를 정말로 많이 보았다. 대한민국에는 책 한 줄 읽지 않는 혁명가가 왜 그리도 많은가? 교리문답서 같은 조잡한 암기물 몇 쪽 읽고서 혁명가가 되어 설치는 아이가 왜 이렇게도 많은가? 초중고를 그렇게 살았으니 대학에 들어가자마자 들어간 동문 서클에서 교리문답서를 외우게 한 선배의 권위에 짓눌려 혁명가가 된 아이들이 골프 서클이나 토익 서클의 아이들과 무엇이 다를까? 내게는 다 똑같은 우리의 천박한 독서실 출신으로 보인다.

189. 마르크스는 특히 정치를 하는 혁명가들과 무관했다. 혁명을 출세수단으로 팔아먹는 치들과는 더욱 무관했다. 평생 가난하고 고독하게 책을 읽으며 인류를 위한 혁명을 생각하며 산 마르크스야말로 진정한 혁명가였다. 여기서 혁명가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떼거리 우두머리와는 다르다. 마르크스는 데모도 음모도 한 적이 없다. 그는 오로지 독서실의 남자였다. 그러나 교과서나 교리문답을 외운 외굴수 바보는 아니었다. 
 그는 이 세상의 책을 다 읽고 싶어 한 진정한 독서인이었다. 그렇다고 저 흔해빠진 책벌레, 독서를 위한 독서인은 아니었다. 이 더러운 세상을 아름답게 바꾸기 위해 세상의 모든 책에 매달렸다. 모든 지혜를 알고자 했다.

196. 마르크스의 세 딸이 1860년대 중반 아버지에게 빅토리아 시대의 응접실 게임인 ‘고백’ 놀이를 한 적이 있다. 마르크스는 가장 좋아하는 좌우명이 “모든 것은 의심해 보아야 한다”이고 가장 좋아하는 경구가 “인간적인 것 가운데 나와 무관한 것은 없다”라고 했다. 그리고 가장 좋아하는 일이 ‘책에 파묻히기’이고 셰익스피어, 아이스킬로스, 괴테, 디드로를 가장 좋아한다고 했다. 또 제일 좋아하는 미덕이 단순함이고, 자신의 특징이 목적의 단일함이라고 답했다. 그리고 행복은 투쟁이고 불행은 굴복이며, 노예근성을 가장 싫어하고 스파르타쿠스를 가장 좋아한다고 했다.
 나는 새로운 마르크스를 대망한다. 그의 이름을 도용한 교리문답서가 아니라 그처럼 이 세상의 모든 지식을 비판적으로 회의하고 새로운 지를 탐구한 거인을 대망한다. 평행 하루의 반을 독서실에서 세상의 모든 책을 읽고자 한 마르크스를 대망한다. 10대나 20대만이 아니라 마르크스처럼 65세로 죽기까지, 아니 지금의 나이로 치면 90세 넘어 죽기까지 그렇게 살기를 바란다. 그렇게 늙어 죽기까지 철들지 않는 앎의 낭만객이자 삶의 혁명가이기를 바란다.

경쟁보다 협력을 설파한 아나키스트, 표트르 알렉세예비치 크로폿킨
202. 나는 무권력주의가 가능하다는 환상에서 아나키즘에 관심을 가진 것이 아니라, 강력한 권력주의를 극복하기 위해서 그것에 대한 최고의 극약 처방인 아나키즘에 관심을 가졌다. 그리고 그렇게 40년 이상 관심을 가진 결과 얻은 교훈은 기껏, 가능한 한 많은 사람이 자기가 속한 가정이나 학교, 직장이나 사회에서 조금이라도 반권력적으로 살면 권력주의가 조금씩은 약화되리라는 기대 정도를 갖게 되었을 뿐이다.
 따라서 나는 아나키즘이라는 무권력주의 자체를 믿는 자가 아니라 아나키즘을 지향하는 반권력주의자로 살고 있다. 그러나 사람도 세상도 그렇게 쉽게 바뀌지는 않는다. 솔직히 말해 아나키즘은 물론 그것을 향한 반권력주의에 대해서도 더욱 회의하게 되었다.

스스로 깨달은 실천적 아나키스트
221. 나는 톨스토이가 평생 유지한 기본 사상을 아나키즘으로 본다. 그의 아나키즘이 1880년의 참회 이후의 것이라든지 프루동을 비롯한 서유럽 아나키스트들의 책을 읽은 뒤에 생겼다고 보는 등 여러 견해가 있다. 하지만 나는 그가 타고난 아나키스트라고 할 정도로 본능적이고 직감적인 차원에서 자신의 아나키즘을 형성했다고 생각한다. 권위에 도전하는 반항은 책을 읽어서 깨닫거나 지적 훈련에 의해 형성되는 게 아니라 타고난 기질과 성향에 의한 것인지 모른다. 적어도 톨스토이는 분명히 그러했다 책이란 그런 본성을 때닫게 하는 보조일 뿐이다.

222. 공동 경제, 금욕 생활, 평화주의에 근거한 톨스토이 공동체는 범세계적으로 시도되었다. 그의 가장 분명한 성과는 인도의 간디를 통해 나타났다. 간디는 톨스토이와 함께 헨리 데이비드 소로와 표트르 크로폿킨을 읽고 자신의 사상을 형성했다. 그러나 톨스토이 자신은 ‘공산촌락’을 건설하는 것에 부정적이었다. 일반 사회와 떨어져 자신만을 깨끗하다고 하는 엘리트 순결주의에 빠진다는 이유에서 였다.
 따라서 톨스토이에게 더욱 중요한 것은 국가의 불합리한 명령을 거부하는 불복종운동이었다. 특히 그는 병역 거부자를 지원했고, 전쟁을 위한 세금 납부를 거부했다. 톨스토이가 지금 우리에게 주는 가장 중요한 교훈도 바로 그 점이리라. 

226. 간디는 1910년 톨스토이가 죽기 몇 달 전에도 그에게 편지를 썼다. 톨스토이가 <힌두 스와라지>를 긍정적으로 평가한 데 대한 보답의 편지였다. 그전에 간디는 요하네스버그 부근에 톨스토이 농장을 세우고 자신의 진실 관철 투쟁을 계속했다. 그러니 톨스토이는 간디를 통해 부활해 적어도 1948년 간디가 죽을 때까지 정신적 생명을 이어간 셈이다. 간디는 다시 킹으로 이어졌고 킹은 다시 최근의 세계화 반대 운동으로 이어지고 있다. 간디는 톨스토이에게 편지를 보내기 전부터 그의 책을 읽고 감동했고, 톨스토이의 영향 아래 <힌두 스와라지>를 썼으며, 이는 그의 평생을 지배한 이념이 되었다.
 (…) 톨스토이는 인도인들이 그들의 의식 속에서 ‘진실을 가로막는 산 같은 쓰레기 더미들’에서 해방되어야 한다고 썼다. 즉, 종교적 편견이나 온갖 미신에서 벗어나고 인도인을 노예화한 것이 영국인이 아니라 인도인 자신임을 깨달아야 한다고 했다.

창조적이며 실천적인 정치가, 마하트마 간디
232. 간디의 <간디 자서전>과 히틀러의 <나의 투쟁>이 각각 보여주는 두 사람의 삶은 그야말로 대조적이다. 간디는 사람들에게 자신의 진실 추구라는 개인적 경험을 들려주기 위해 쓴 반면 히틀러는 자신의 권력 추구라는 정치적 야망을 위해 썼기 때문이다.

243. 간디만큼 창조적이고 실천적이며 비판적인 독서를 한 사람은 없다. 마찬가지로 누구보다도 파괴적이고 선동적이며 선전적인 독서를 한 사람이 히틀러였다. 간디는 자신의 삶에 구체적으로 필요한 책들을 골라서 읽었고 그 책이 옳다고 생각하면 즉각 실천에 옮기고 대중들이 알기 쉽게 그들에게 알렸다. 그는 추상적이거나 신비적인 사념에 사로잡혀 책을 읽거나 무비판적으로 교조적인 교리에 따르는 독서를 하지 않았다. 그런 점에서 그는 관념적인 종교인이나 사상가가 아니었고 가장 현실적인 종교인이자 정치가였다.

불평등과 부자유의 사회를 비판한 자유인, 루쉰
246. 어릴 적 매일처럼 깨끗하게 갈아입어야 하는 한복을 준비하는 데 하루 종일 노예처럼 일하는 것을 보면서 평생 한복을 입지 않겠다고, 하루 세 끼 뜨거운 밥과 국을 준비하는 데 진종일 하녀처럼 일하는 것을 보면서 평생 한식을 먹지 않겠다고, 온돌방을 덥히기 위해 밤새 매운 연기에 눈물을 흘리며 군불을 때는 것을 보고 평생 한옥에 살지 않겠다고, 아침 저녁 세면과 목욕ㅇ르 위한 뜨거운 물을 데우기 위해 고생하던 모습을 보고 가능한 한 씻지 않겠다고 결심한 적이 있다. 그래서 지금까지 한식도, 한복도, 한옥도, 청결도 싫어하고 간편한 국수나 검은 옷을 좋아하고 잘 씻지 않게 되었다.

253. 전통 학문에서 벗어난 공부를 스스로 찾고 즐겼다는 것은 루쉰이 자신의 개성을 발전시키는 가능성을 보여준다. 지금도 그렇지만 교과서에 사로잡힌 아이가 그 나름의 개성을 가질 수는 결코 없다. 우리의 가정교육이나 학교 교육이 교과서르난 기계적 교육의 틀을 벗어나지 못하는 한 천재는 커녕 제대로 된 인간을 키워내기도 어렵다.

삶을 잉태한 혁명의 딸, 프리다 칼로
273. 그녀는 삶의 마지막에서 교사로 학생을 가르쳤다. 그러나 그녀는 아무것도 강요하지 않았다. 학생들이 보는 것, 보고싶은 것을 그리라고 했다. 그리고 학교에 갇혀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으니 거리로 나가서 거리의 삶을 그리라고 했다. 그녀는 그림 그리기가 아니라 살아가는 방식, 세상과 사람들과 예술을 바라보는 방식을 통해 학생들에게 감동을 주었다. 학생들은 모두 다르게 그렸고 나름 자기 길을 개척했다. 그리고 학생들에게 시집을 비롯하여 책을 많이 읽으라고 권했다. 또 인류학 박물관에서 콜럼버스 이전 시대의 조각상이나 미술관의 식민 시대 예술품을 스케치하면서 미술사를 익히라고 했다. 또 생명의 탄생을 비롯한 성교육을 강조했다. 그녀는 학생들과 함께 순수한 기쁨, 순수한 환희, 코요아칸 사람들을 위해 그곳 술집에 벽화를 그렸다. 그리고 이를 통해 멕시코적 비판 정신을 부활시키려고 했다.

274. 무사히 벗어났다. 나는 절대 물러서지 않겠다고 약속했고 그 약속을 지켰다. 디에고를 비롯해 나에게 도움을 준 이들에게 감사한다. 나 자신에게 감사하고, 나를 사랑하는 이들 사이에서 내가 사랑하는 이들을 위해 살고자 하는 나의 엄청난 의지에 감사한다. 즐거움 만세, 삶이여 만세(viva la vida) 
죽기 직전에 쓴 ‘일기’

275. 네 아이들이
영원의 고독에 대해 이야기하기 때문에
그 누구도 시간으로는 얻을 수 없는 그런 시대에 태어났다 해도

너는 영원히 생동하는 대지 위에 있으리라
너는 영원히 새벽빛 가득 머금은 반란이리라
너는 끊임없이 이어지는 새벽빛을 띤 영웅적인 꽃이리라.

자본주의와 싸우다 죽은 혁명가, 체 게바라
276. 차가운 학자적 태도로 극단적인 교조주의나 대중에 대한 소외에 함몰하지 않으려면 
늘 겸양과 정의와 진실에 대한 열망을 갖도록 하자.

281. 우리나라에 나온 게바라 전기 중 가장 방대한 책의 부제는 ‘혁명적 인간’이지만, 내가 보고자 하는 게바라는 ‘혁명적 인간’의 본질인 ‘자유로운 인간’, 즉 ‘독서하는 인간’이다. 독서가 인간을 자유롭게 한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다. 그 자유가 진정한 혁명이다. 부당한 궈력에 맞서 싸우는 자유가 진정한 혁명이다. 전체주의적으로 정해진 교육 체제를 벗어나 스스로 추구하는 독서야말로 진정한 자유, 따라서 혁명을 가능하게 한다. 독서하지 않는 혁명가는 없다. 평생 공부하지 않는 혁명가는 없다. 평생 반성과 성찰을 하지 않는 자는 혁명가일 수 없다.

 혁명가는 태어나면서부터 혁명가가 아니다. 혁명가는 어떤 두뇌, 성격, 체질, 체형, 기질, 유전 인자 따위의 산물이 아니다. 따라서 타고난 혁명가는 없다. 타고난 천재나 예술가도 없다. 도리어 우리가 아는 진정한 천재란 다윈처럼, 진정한 예술가란 빈센트 반 고흐처럼, 혁명가와 마찬가지로 평생 독서하는 사람이다. 그들만이 아니다. 누구나 최소한의 자기 혁명을 하기 위해 독서는 필요하다. 쿠바 혁명, 쿠바 교육의 시발점이 된 호세 훌리안 마르티의 말처럼 “인간은 교양을 갖춰야만 비로소 자유로워진다”. 반면 우리에게는 진정한 교양이 없다. 교조가 있을 뿐 교양은 없다. 출세용 과거나 시험을 위한 암기만 있고 혁명을 위한 교양은 없다.

282. 성찰과 반성을 일삼는 고행의 순교자.
태어나면서부터 평생 건강하지도, 강인하지도, 민첩하지도 못했기에 고통받는 사람들과의 공감이 가능하게 되었고 평생 그런 사람들처럼 살고자 했다. 청각과 시각에 장애가 있던 헬렌 켈러나 척추에 장애가 있던 안토니오 그람시가 사회주의자로 성장한 것과 같았다. 그런 건강 문제와 그로 인한 홈스쿨링이 그를 이타적 독서인과 혁명가로 만들었다. 부유하고 교양 있는 부모는 외국어와 고전 교육에 주력했다. 초등학교에 갓 들어간 8세에 스페인 내전에 참전한 사람들을 만나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관련된 책을 읽었다.

283. 젊은 마르크스가 그러했듯이 게바라도 철학과 문학에만 몰두했다.
 어려서부터 모든 고전에 통달했지만 특히 간디와 네루의 책을 가장 좋아했다. 대학을 마칠 무렵 남미 대륙을 오토바이로 일주하면서도 네루의 <인도의 발견>만을 가지고 다니며 열심히 읽었다. 네루는 그의 평생 스승이었다. 네루에 비해 간디를 상세히 말한 적은 없지만, 그의 혁명 사상은 다분히 간디의 사상을 닮기도 했다.

284. 게바라가 자신의 사상으로 주장한 이타주의에 입각한 숭고한 희생은 바로 간디의 사상이었다. 그는 간디처럼 물질주의와 이기주의에 철저히 반대하고 민중과 비전을 공유하는 리더였다. 간디가 인간성의 적으로 영국의 제국주의에 반대했듯이 게바라 역시 인간성을 파괴한다는 이유로 미국의 제국주의에 반대했다. 그들은 낭만적인 풍운아가 아니라 언제나 철저한 자기 성찰과 반성을 일삼는 고행의 순교자였다.

287. 게바라는 중앙은행과 산업부를 이끈 경험을 바탕으로 정치경제학 책을 썼지만 이는 그런 종류의 다른 책들과는 달랐다. 그는 경제사회적인 혁명만으로는 엄밀한 의미의 혁명이라고 할 수 없고, 새로운 인간을 생성하기 위한 인간 존재의 근본적인 변화가 필요하다고 했다. 
(…) 그리고 구시대인인 자본가를 대체하는 새로운 인간, 즉 이웃을 착취하려는 욕구를 갖지 않는 인간, 이윤을 행복의 잣대로 삼지 않는 새로운 인간을 추구했다. 이기가 아닌 이타, 물질이 아닌 정신을 중시하는 것이 그가 말한 새로운 인간이었다. 그러니 보통 사람으로서는 이룰 수 없는 초인 같은 것이 아니라 누구에게나 가능한 소박한 인간상이었다.
 진정한 혁명가는 사랑이라는 위대한 감성에 의해 인도된다고 한 그는 사랑이 결여된 혁명가를 상상할 수도 없었다. 민중에 대한 사랑은 냉정한 정신과 열정적인 정신을 조화시키는 것이라고 그는 말했다. “차가운 학자적 태도로 극단적인 교조주의나 대중에 대한 소외에 함몰하지 않으려면 늘 겸양과 정의와 진실에 대한 열망을 갖도록 하자.” 그가 추구한 새로운 사회는 민중의 필요와 열망 위에서, 또한 민중이 모든 결정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는 민주 사회였다. 그는 인간이 권력의 자비에 매달려 사는 사회가 아니라 공적인 생활의 중심에 있게 되는 새로운 사회를 열망했다.

290. 게바라의 아버지는 잘못된 세상에 대항해 싸워야 한다고 가르치며 갓 철든 게바라에게 네루다의 시집을 권했다. 게바라는 평생을 그런 아버지의 가르침대로 살았다. 지금 우리는 어떤가? 아이들에게 그렇게 가르치는가? 도리어 그 반대로 가르치지 않는가? 세상에 영합하라고, 강자에 복종하라고, 비겁하게 살라고 말이다. 그리고 아이들도 그렇게 사는 것이 아닌가? 게바라의 얼굴이 그려진 티셔츠를 입고 말이다.
 평생 자본주의와 싸우다 죽은 게바라를 명품 셔츠 그림으로 입다니 지하의 게바라가 참으로 통탄할 일이다. 사실 게바라가 문제인 것은 아니다. 지금 게바라가 이 땅에서 조금이라도 기억될 이유가 있는 것은, 이 세상 어디에서보다 더욱더 강해져가는 자본주의와의 싸움이 더욱 필요하고, 그 싸움이 이제는 불필요할 뿐 아니라 불가능하다는 상식 아닌 상식을 깨뜨릴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아니 물질에 대한 정신의 투쟁이 필요하고 이기가 아닌 이타가 가치 있다는 참된 상식을 되세우기 위해서다.

291. 혁명이란 나쁜 세상을 옳게 바꾸는 일이라는 것을 알고, 자신도 그런 깨달음을 갖게 된다면 더욱 다행이지 않는가? 세상은 언제나 나쁘기 마련이니 언제나 혁명가가 있을 수밖에 없다. 
 혁명가가 사라진 세상은 그야말로 말세다. 세상의 나쁜 점을 알고 분노하는 사람이 없음을 뜻하기 때문이다. 혁명가는 그런 분노에서 출발한다. 아주 어려서부터 나쁜 세상에 분개하여 죽을 때까지 그 분노를 버리지 않은 게바라가 그랬다. 세상을 나쁘게 만드는 근본악이 이기주의였다. 그래서 게바라는 이기주의와의 전쟁을 선포했다. 그것이 그의 혁명이었다. (…) 그런 혁명은 그의 자유롭고도 철저한 독서에 의한 교양과 체험, 특히 여행에서 나왔다. 그 반대로 암기로 익힌 혁명은 교조일 뿐이다. “인간은 교양을 갖춰야만 비로소 자유로워진다.”

자유를 향한 위대한 행진, 마틴 루터 킹
298. 라우션부시의 저서를 읽고 나서부터 인간의 영혼에 대해서만 관심을 쏟고 영혼을 손상시키는 사회경제 상태에 관심을 보이지 않는 종교는 무릇 정신적으로 쇠퇴한 종교이며 죽음만이 기다리는 종교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자유를 향한 위대한 행진>중 1958.

개인의 자유가 이런 식으로 무시되어선 안 된다. 나는 과거에도 그랬지만 지금도 인간은 신이 창조한 존재이므로 수단이 아니라 목적이라고 확신한다. 국가를 위해서 인간이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인간을 위해서 국가가 만들어진 것이다. 인간에게서 자유를 빼앗는 행위는 인간을 일개 사물의 지위로 떨어뜨리는 것이나 다름없다. 인간은 국가에 종속되는 수단으로 취급되어서는 안 되며 어떤 상황에서도 목적이어야 한다.
<자유를 향한 위대한 행진>중 1958.

302. 총이나 칼에서 나오는 힘은 아닐지라도 우리에게는 힘이 있습니다. 그 힘은 나사렛 예수의 지혜만큼이나 고전적이고, 마하트마 간디의 전술만큼이나 현대적인 것입니다. 인류의 진보를 위하는 사람은 반드시 간디의 사상을 숙지해야 합니다. 간디의 모든 삶과 사상과 투쟁은 평화와 조화의 세계를 향하여 전진하는 인류의 모습을 바탕으로 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간디를 모르고서는 우리의 운동도 제자리걸음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303. 킹은 흑백을 불문하고 인간이 자기 파괴에서 벗어날 수 잇는 데에 평생 관심을 기울였다. 그는 인간이 순수하게 태어난 뒤에 사악하게 변하지만 그 마음속에는 신의 모습이 깃들어 있고, 구제하고 갱생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리고 악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악을 저지른 인간이 아니라 인간에게 폭력을 야기한 악의 구조를 공격해야 하고 그것은 폭력에 우월하는 비폭력이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것이야말로 킹이 간디에게 배운 바였다.

자본주의적 삶에서 해방된 자유주의자, 스콧 니어링

자유와 정의를 위해 싸운 인권 투사, 넬슨 만델라
326. 만델라나 간디, 킹이 인권 투사일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는 그들이 살았던 곳의 재판이 최후의 양심 보루로 기능했기 때문이고, 그것이 우리와의 큰 차이라고…. (…) 간디나 만델라의 이야기 중에 그들이 훌륭한 법률가였지만 그들을 재판한 판사들도 훌륭했기 때문에 그들의 인권 운동이 가능했다는 점은 역사적으로도 중요한 의미를 갖는 것이다.

341. 교과서와 주류 언론 때문에 청소년의 사고는 철저히 단세포로 경직화된다. 학생들은 물론 교수나 언론인이 리포트, 논문, 기사를 표절하는 버릇에 젖어 잇음은 유리의 마비 이전에 교과서적 단세포 사고를 절대시하는 신앙에 젖어 표절이 왜 문제인지도 모르는 탓인지 모른다. 이제 교과서나 주류 언론은 국민에게 강요되는 유일한 지식의 근원이자 권위이고 권력이 되었다. 우리나라에 특유한 국정 검인정 교과서 제도는 역시 우리나라에 특유한 입시제도와 함께 획일적인 인간을 만드는 데 절대적으로 기여한다. 권력이 창조하는 지식을 상징하는 교과서는 절대적인 권위로 국민의 지성을 결정하고 관리하며 규제한다.
 대학은 물론 초중고 시절에 고전을 비롯하여 다양한 책을 읽고 생각하며 토론하는 교육으로 바뀌지 않으면 우리 국민이 책을 읽지 않는 습성은 더욱 강화될 것이다. 이는 단순히 책 읽는 문제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사고의 다양성과 민주성에 관련되는 문제다. 
 참된 교육을 받을 인권의 내용으로 국정 교과서 제도를 폐지하고 다양한 책읽기를 하자는 주장을 다시 강조하고 싶다. 다양성을 핵심으로 한다는 소위 21세기 인간상에 맞는 교육을 하기 위해서는 물론 사고의 다양성과 민주성을 위해서도 책읽기가 어려서부터 필요하다.

343. 무책임하게 게바라 같은 혁명가가 되리라고는 도저히 말할 수 없지만, 적어도 그와 같은 독서가는 되라고 말하고 싶다. 나쁜 세상은 독서가가 없는 세상이기도 하다. 이 책에서 계속 강조하듯이 진정한 혁명가는 진정한 독서가이기 때문이다. 적어도 히틀러나 스탈린, 폴 포트나 박정희가 아닌, 톨스토이나 마르크스나 간디나 게바라나 모두 그렇다. 물론 그 반대는 아니다. 즉, 독서가가 혁명가인 것은 아니다. 그러나 진정한 독서가는 혁명가다. 적어도 진정한 독서가는 혁명적이다. 독서는 바르게 살기위해 하는 것이다. 따라서 현실의 변화를 위한 것이다. 그 변화 앞에 비판이 있다. 현실에 대한 비판이 있다. 그 비판 앞에 스스로 생각할 줄 아는 사고능력이 있다. 

 독서는 생각하기 위한 것이다. 독서는 생각하는 사람을 만들기 위해 필요하다. 인간이 생각하는 존재라면 독서가 필요하다. 그처럼 참된 독서를 하면 혁명가가 된다. 제대로 된 책들은 현실을 혁명하라고 가르치기 때문이다. 그렇게 가르치지 않아도 책을 읽다보면 현실이 잘못되었음을 알기 마련이고 책은 잘못을 고치라고 말하기 때문이다. 게바라가 혁명과 독서를 함께한 것도 독서를 통해 혁명의 바른 길을 찾기 위해서였지 무슨 멋으로 한 것이 아니었다.



 커피로 유명한 에티오피아. 최초의 인류로 추정되는 루시가 발견됐고, 높은 수준의 문명이 존재했었던 나라. 북쪽에는 화산이 있는데 아직도 용암이 끓고 있다고. 바야흐로 한국을 떠난지 254일. 이집트를 떠나 에티오피아에 왔다. 수도인 아디스아바바에서 활화산 투어를 진행하는 여행사를 찾아다녔다. 이집트에서 비용을 알아봤었다. 활화산이라고 해봤자 결국 산일텐데, 그 비용이 2,000달러 정도가 필요하단다. 보통 외국에서 알아보는 가격이 현지에서 알아보는 가격보다 비싸기 때문에 이번에도 그러려니 하고 무작정 에티오피아에 왔다. 운이 좋게도 이곳에서 NGO 활동을 하는 일본인 친구를 알게됐다. 이 친구를 통해 또 현지인을 만났는데 그 친구가 또 여행사 사장을 소개해 주었다. 사장을 통해 결정된 최종 가격은 400달러. 활화산 그룹 투어는 3박 4일간 진행 됐다. 무슨 등산이 이렇게 비싼거야 했다. 에어컨 빵빵한 도요타 자동차와 운전기사, 영어가 유창한 가이드와 썩 괜찮은 파스타를 뚝딱뚝딱 만들어내는 요리사, 세계에서 가장 많이 생산됐다는 AK-47소총 세 자루와 보디가드들이 함께였다. 왜 비싼건지 의문이 풀렸다. 안전에 돈이 어쩔 수 없이 든다지만, 안전해질수록 어쩐지 빈곤, 아동범죄, 전쟁의 흔적 같은 그 나라의 진실과도 멀어졌다.


 투어를 하는 3박 4일 동안 매일 7시간씩 차를 탔다. 멀미가 스멀스멀 올라오는 비포장길, 때론 길 없는 길. 한낮의 온도 37도. 먼지가 허옇게 일어나는 길을 달렸다. 이틀째 화산에 도착했다. 캠프에서 용암이 있는 정상까지는 2시간을 걸어 올라가야 했다. 열기가 가라앉는 밤에 올라가고 해가 뜨는 아침 내려온다. 이른 저녁을 먹고 해가 지기를 기다렸다. 쉬다가 보디가드가 벽에 기대어 놓은 AK-47을 보았다. 직업군인 출신이지만 총은 역시 무섭다. 화산이 있는 지역은 분쟁지역이었다. 2011년 분쟁으로인해 유럽인 관광객들이 죽었다고 한다. 그때부터 이 지역 여행은 경찰, 군인, 사설경비를 포함해서 가야했다고.


 저 멀리 모래사막 너머로 해가 졌고 우리는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보이는 것은 앞사람의 검은 형체와 첩첩이 쌓인 바위와 어둠뿐. 시간이 지날수록 따끔따끔한 매캐한 향이 진해졌다. 무겁고 더디게 흐르는 시간. 이론에 따르면 시간 여행을 위해서는 일정한 조건이 필요하다고 한다. 여행을 한다는 건 언젠가 오래 전에 지나가버린 시간 속에 들어가는 것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절대반지를 파괴하기 위해 모르도르 화산을 올랐던 프로도와 샘이 생각났다. 


 전설에 따르면 절대반지는 현명함과 권력을 가져다주는 반지이다. 하지만 절대반지는 쓸수록 사용자의 몸을 점점 ‘소멸’시켜간다고 한다. 그러다가 결국에는 영원히 사라지게 된다고. 반지에 취한 영혼은 빛 없는 어둠 속을 헤매게 된다고. 혹 의지력이 강하거나 착한 사람이라도 그 시간이 다소 지연될 뿐, ‘소멸’을 막을 수는 없다고. 결국에는 악에 사로잡히고 만다고... 많은 유혹과 위험이 있었지만 프로도와 샘은 결국 반지를 파괴했다. 반지원정대에서 가장 약한 그들이 해냈다. 내가 프로도였더라면 반지를 용암 속에 던져버릴 수 있었을까. 또 나를 취하게 하고 '소멸'시키고 있는 반지는 무엇일까.


 여행은 여행자에게서 유머를 빼앗아간다는 말이 있다. 내게 여행은 유머뿐만 아니라 모든 걸 빼앗아가는 과정, 파도에 차츰차츰 허물어져가는 자신을 바라봐야 하는 과정이었다. 지금껏 몸 담고 있던 세상, 나를 알아주는 친구들, 나를 정의하고 있던 관념과 문화에서 벗어나자 나 자신이라 생각했던 껍데기들이 한꺼풀 한꺼풀 벗겨져가는 과정이었다. 껍데기 속의 나는 그다지 현명하지도, 유쾌하지도, 호방하지도 않은 사람이었다. 나약한 마음과 두려움 마음이 새어들어왔고, 여행의 파도는 무정히 들이쳤다. 마음을 깎아나갔고, 생기를 빼앗아갔다. 여행이 지날수록 난 녹이 슨 무기물로 변해갔다. 거짓 지혜와 힘을 주는 절대반지에 취한 자의 모습이 아닐까.


 산을 오르기 시작한지 2시간, 멀리 불이 보였다. 깊은 어둠에서 태어난, 아득하면서도 강한 불이었다. 출렁이는 붉은 용암, 그 위에서 녹아내리는 암석, 멀리까지 뿜어지는 열기, 냄새. 살아있기에 활화산이라고… 지구에게도 심장이 있다면 이런 모습이 아닐까. 피와 감각, 순환과 호흡, 소멸과 생성, 살아있음, 생명.


 미국의 철학자 랄프왈도 에머슨은 말했다. 세상은 거짓을 꿰뚫어 보는 자의 것이다. 에머슨의 말은 적어도 여행에 있어서 헛된 거짓을 버릴 때 인간은 진실로 자유로울 수 있다는 말이었다. 절대반지를 버려야 자유로워질 수 있다는 말이었다. 절대반지는 결국 세상의 거짓이었다. 


절대반지는 모르도르에 던져짐으로 파괴되었다. 한 인간의 허영과 거짓들도 불태워 버릴 수 있을까. 여행을 할때 사람은 그가 안다고 생각했던, 그 자신이라고 생각했던 것들이 무너짐을 느낄 것이다. 여행은 자신을 녹이고 불순물을 태우는 과정이므로. 인간이 자신의 온 존재를 태우고도 남을 것은 무엇일까. 사라지지도 않고 썩어 없어지지도 않을 것은 무엇일까. 인간이 온 생애를 다 바쳐도 아깝지 않을 궁극적인 목표와 목적은 분명 있다. 그 살아있음 속에 거짓을 불태우고, 꽃이 피어나듯 나날이 새로워질 수 있도록 해주는 힘이 있다. 그것이 심장을 가진, 살아있는 자의 권리이고 책임이 아닐까. 아침이 밝았다. 세상에 퍼져가는 햇빛과 함께 밟고 있는 땅이 보였다. 단단히 굳어가는 땅을 보았다. 새로운 하루가 시작되고 있었다. 

그래, 아직 아무것도 시작되지 않았다. 


에티오피아 활화산 용암 투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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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쿠버 다이빙이 하고 싶었다. 프랑스에서 터키로, 터키에서 이집트로 비행기를 탔다. 유럽 여행이 시작되었던 이스탄불, 그곳으로 4개월 만에 돌아왔고 그곳에서 유럽 여행이 마무리됐다. 4개월 전에는 영제가 함께였지만, 이번에는 영제가 없다. 새로운 여행이 다시 시작됐다. 카이로에서 다합으로 야간버스를 탔다. 새벽에 차례의 검문을 받았고 잠이 무작정 찾아간 바닷가. 다이빙 가게를 찾았다. 등록을 하고 교육을 받았다. 


 스쿠버 다이빙은 공기통을 갖고 바닷속에 들어가 탐험을 하는 것이다. 사실 나는 물이 무섭다. 인류가 제아무리 기술의 발전을 이룩했다지만 산소 없이 없는 변하지 않았으니까. 풍부한 공기와 든든한 땅을 벗어난다는 . 산소는 편리한 것이 아니라 생명의 조건이다. 공기 통만을 갖고 깊은 바다에 들어간다고? 두려웠다. 두려움을 사서 하는 , 스쿠버 다이빙이 아닐까.


 공기통을 메고, 벨트를 차고, 오리발을 끼고, 마스크를 쓰고, 입수. 5m, 10m… 20m… 30m….... - -, 호흡 소리와 공기 방울 소리만 보글보글 들린다. 숨소리를 들어본 적이 언제였던가. - -. 한정된 공기를 조금이라도 아끼기 위해 숨을 깊고 천천히 쉰다. 후ㅡ 하ㅡ. 불필요한 행동을 아낀다. 후ㅡ 하ㅡ. 일종의 명상과 같은 과정을 거쳐 다른 세계로 들어간다. 후ㅡ하ㅡ. 어릴 읽었던 동화, 인어공주가 생각난다. 인어공주는 친구들의 만류에도 세상에 가고 싶어 했다. 인어공주는 지상을 동경했을까? 인어공주가 살던 세상이 궁금했다. 


 바닷속은 지상과 다른 세계다. 보는 , 듣는 , 숨쉬는 , 온도, 모든 조건이 다른 세계. 가시광선은 빨간색부터 물속 깊게 다다르지 못한다. , , , 초의 따뜻한 순서로 물에 흡수되어 간다. 깊어질수록 세상은 파란색과 남색, 보라색 차가운 색들의 세계가 되어간다. 실제로 물도 차가워지고 손실이 높은 물에서는 체온이 빠르게 빼앗긴다. 36.5도를 유지하려는 투쟁이 몸에서 시작된다. 빛은 공기에서 물로 들어갈 속도가 느려진다. 속도가 느려지는 순간 빛은 굴절되고 모든 물체를 1/3 정도 크고 가까워 보이게 만든다. 소리는 수중에서 4 빠르게 전달된다. 어느 방향에서 소리가 들리는지 근원지가 어디인지 인간의 귀는 분간할 없다. 목소리도 자동으로, 꼬르륵꼬르륵 외계인 말로 변하기 때문에 수신호로 대화를 해야 한다.


 깊이가 어느 정도인지 가늠조차 되는 깊고 깊고 깊은 심연을 바라볼 때의 공포. 심연과 사이에 디딜 아무것도 없음에서 오는 두려움. 심연의 어둠으로 끌어당기는 땅의 힘과 빛으로 떠오르려는 공기의 , 중간 지점을 떠간다. 우주여행도 이렇게 부유하는 기분일까. 딛고 있는 땅이 없어서인지 균형을 잃을 때가 있는데, 어둠 속으로 떨어지는 같은 느낌이 든다. 가끔은 정말 가라앉고 있다. 그때의 섬뜩함. 가라앉는 것도 위험하지만 갑자기 떠오르는 위험하다. 30m 깊이의 고압에 맞춰진 몸이 갑자기 떠오름으로 인해 낮은 압력 상태가 된다. 안에 있던 공기들이 팽창을 하고 체내에서 바람직하지 못한 여러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수심 24m 부근에서는 질소 마취 현상으로 몽롱한 상태가 되기도 한다. 긴장을 늦출 없다.


 그럼에도 물속에 들어가는 바닷속 세상에는 모니터를 통해 보는 , 수족관에서 보는 너머의 감동이 있기 때문이다. 오색 찬란한 산호, 사이를 유유히 헤엄치는 물고기, 신기해하는 나를 오히려 신기한 쳐다보는 물고기, 일제히 방향을 바꾸는 물고기 떼의 번쩍임, 붉은색에서 모래색으로 바뀌는 찰나에 황홀한 색을 만드는 문어. 오랜 잠수 수면으로 나오는 바다거북의 호흡. 물속을 나는 느껴지는 4m 매가오리의 유영. 수족관이 아닌, 있어야 곳에 있는 생명만이 만들어내는 살아있음. 푹신한 소파가 아닌 아슬아슬함 속에서 만들어지는 살아있음. 살아있음은 아름다웠고, 전율마저 오는 감동이었다. 살아있음은 무엇이었을까. 생명은 자유 안에서만 빛나도록 태어난 걸까.


 스쿠버 다이빙 , 부력은 없어지고 중력만이 있는 세계로 돌아왔다. 땅을 디디며 점점 더해가는 무게, 살아있음의 무게를 느꼈다. 인어공주는 어째서 뭍으로 나오려 했을까. 지지 않아도 자신의 무게를 짊어지고 목소리를 잃으면서까지. 두렵지 않았을까. 뜨거운 공기와 눈부신 햇살이, 짊어져야 무게가. 모든 두려움을 감당하게 만든 것은 무엇이었을까.


 스쿠버 다이빙은 두려움을 이해해가는 과정이었다. 어찌해볼 없는 거대한 자연과 경이로운 세계를 이해해가는 과정. 두려움은 이해되는 만큼 아름다움을 허락했다. 두려움은 무지에서 왔고 두려움을 이해하는 곳에 아름다움이 있었다. 미지의 세계에서 느끼는 두려움과 기대, 공포와 설렘, 흥분과 감동. 삶의 아름다움은 경계를 넘어가는 과정에 있었고, 몸부림치는 그곳에 살아있음의 감동이 있었다.


 물속에서 느끼던 죽음의 공포는 햇빛의 찬란함과 따뜻함에 쫓겨 사라졌다. 마치 꿈을 꾸는 같았던 바닷속. 다시 돌아온 현실. 여전히 가혹하고 따분한 세상. 하지만 이제 세상조차 발로 딛고 뿌리를 내리는 기쁨이 있다. 오늘을 살고 내일을 있다는 기쁨. 숨을 쉬고 있다는 기쁨. 살아있음의 기쁨. 기쁨을 위해 여행자는 두려움과 설렘을 향해 떠나는 것이 아닐까. 후ㅡ 하ㅡ.


이집트 다합 스쿠버 다이빙바다의 소나무


이집트 다합 스쿠버 다이빙


앞일이란 정말 모를 일일까


 베트남에서 지낼 때 영제가 나시티를 샀다. 아디다스 로고가 박혀있는 짝퉁 티였다. 가격은 10만 동(약 5천 원). 사야되나 말아야되나 길고 긴 고민을 했더랬다. 겨우 5천 원 일뿐이지만 돈은 없고 시간은 많은 게 여행자. 고민과 토론, 흥정 끝에 사기로 했다. 하지만 영제는 먹을 것 외에 돈을 쓴다는 자괴감이 컸는지, 나도 옷을 사라고 부추겼다. ‘두고두고 입으면 되잖아~‘, ‘…음, 그렇지.' 졸지에 나도 추리닝 바지를 샀다. 


 영제가 나시티를 산 그날 밤, 나는 영제의 자연 그대로의 겨드랑이 숲과 만났고, 영제는 낮에 산 것과 똑같은 나시티를 야시장에서 더 싼값에 만났다. 가격은 6만 동(약 3천 원). 거 참, 5천 원도 싸다고 샀는데 어떻게 3천 원에 파는 걸까.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영제는 충격을 받았는지 '4만 동(약 2천 원)이나 싼 이 옷은 뭔가 흠이 있을 거다.’라고 말같지 않은 소리를 했다. 그리고 다음날, 이 무슨 운명의 장난인지, 우리는 10만 동에 반바지까지 주는 나시티를 봤다. 애써 밝은 척하는 영제가 안쓰러웠다. 그런 영제를 기리는 의미로 나는 10만 동에 반바지까지 주는 나시티를 샀다... 앞일이란 정말 모를 일일까


 지난 해 3월 31일, 동해항에서 출발해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로 향하는 이스턴드림호를 탔다. 279일의 여행이 시작된던 날이다. 점점 멀어져가는 한국의 모습을 갑판에 서서 담았다. 비장한 결의를 다지고 싶었는데 배가 고팠다. 새벽 5시에 일어나 서울을 거쳐 동해로, 동해항 터미널에서 입선 수속을, 2시가 되도록 밥을 못 먹었다. 결의는 좀 있다 다지기로. 식당에 갔다. 붉은 카펫이 깔리고 샹들리에가 달려 있는 고급 식당이었다. 메뉴판을 펼쳤다. 고급스런 외관이 자칫 손님들에게 부담을 줄까봐 걱정이 됐는지 메뉴는 어묵, 돈까스, 라면 등 고속도로 휴게소에 온 듯 친근한 것들이었다. 휴게소 정신까지 계승했는지 어묵, 돈까스, 라면은 비쌌다. 메뉴를 3번 정독해보았지만 적당(저렴)한 음식을 찾을 수 없었다.


라면 : 6,000 원


‘우와, 진짜 비싸다. 이런 가격에 팔고도 너희가 인간이냐.’ 하지만 오랫동안 한국을 떠나는 이 마당에 라면을 언제 다시 먹어보겠냐.는 지극히 나다운 생각이 들었다. 웨이터를 불렀다. 잠시후 독점 자본주의의 정수가 담겨있는 라면이 나왔다. 국물을 천천히 맛보았다. 한국을 떠난지 한 시간도 안 됐는데도 애틋한 맛이 느껴졌다. 


‘아, 이제 라면에 미련은 없다.’ 마지막 국물을 마시며 라면과의 이별의식을 마쳤다.


 러시아에서부터 몽골을 거쳐 베트남까지 두 달, 주구장창 라면을 먹었다. 그 라면이 또 한국산이라는 사실에 이 라면 이별의식을 더욱 민망하게 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그건 러시아나 몽골 시골의 작은 구멍가게조차에도 당연하다는 듯 한국 라면이 있다는 사실을 모른 것도 이유였지만, 당연하다는 듯 라면을 산 나도 원인이었다. 의식적이었든 무의식적이었든 두 달간 라면을 사먹은 건 나다. 그렇다 두 달간 라면을 열심히 사먹게 만든 건 그 전에도 라면을 먹었던 내 경험이다. 인간은 의지를 갖지 않는 한 그가 겪은 경험의 울타리를 벗어날 수 없다. 경험이 선택을 만들고 선택이 미래를 만든다. 그렇기에 내가 변하지 않는 한 앞일이란 모를 일이지만 예측은 할 수 있다. 사실 우리는 이미 앞일을 어느 정도 알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앞일의 선택지를 넓히는 건 경험의 깊이와 넓이가 아닐까. 경험의 울타리를 넓히는 일. 무엇이 있을까.



베트남 호치민 시장문제의 나시티. 바지 포함 10만 동.


베트남 호치민 시장배 아파할 영제를 생각하니 고소했다.


덧. 베트남 호치민 여행. 거 참, 풍요롭군. 로컬시장


황홀한 글감옥

저자
조정래 지음
출판사
시사IN북. | 2009-09-30 출간
카테고리
시/에세이
책소개
소설가 조정래 선생은 1970년 [현대문학] 6월호에 ‘누명’을...
가격비교 글쓴이 평점  


13. 소설이란 무엇인가 하는 물음에서부터 응답을 찾아야 되겠군요. 소설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인생이란 무엇인가 하는 물음에

20. 이렇듯 세계적인 고전의 반열에 오른 명작 거의가 그 민족과 그 땅의 삶을 총체적으로 그려내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작품들이 그들 민족만이 아닌 전 인류적 공감과 감동을 얻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요. 그 작품들은 자기네 민족에 국한하지 않고 전 인류의 이상과 행복, 인간다운 삶의 가치를 옹호하고 구현하는 보편적 미덕을 최소공배수와 최대공약수로 갖추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가장 민족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이라는 문학론이 고전적 정설로 자리 잡게 된 것입니다.

22. 작가가 민족과 연결되어 있는 고리는 끊을 수 없는 인연이되, 자기 민족에만 함몰되지 말고 전 인류의 인간다운 삶을 조명하는 데 의식이 열려 있어야 함은 필수 과제입니다.

32. 그러나 어떤 일을 하든지 그 본질과 근본의 가치를 망각하거나 경시해서는 안 된다는 것은 불변의 철칙입니다. 그 태도를 지켜내지 못하겠으면 곧바로 필을 꺾는 게 옳습니다. 배기가스나 소음만 공해가 아닙니다. 남겨져야 할 필연을 자각하지 못하고 씌어지는 글들은 영혼의 공해물질이기 쉽습니다.

모든 비인간적인 불의에 저항하고, 올바른 인간의 길을 옹호해야 하는 작가는 오로지 진실만을 말해야 하는 존재입니다. 그것은 인생을 총체적으로 탐구하는 작가에게 주어진 사회적 책무입니다. 그 책무를 달고 즐겁게 이행할 의지와 각오가 없다면 작가가 되기를 바라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헤밍웨이가 스페인 내전에 참전하고, 사르트르가 레지스탕스에 가담하고, 에밀 졸라가 드레퓌스 사건을 짊어지고 정부 권력에 도전 했던 것은 작품과 함께 해옹으로 진실을 지키고자 했던 본보기였습니다.

38. 그래서 일찍부터 문학의 정신을 휴머니즘이라 했고, 문학인을 휴머니스트라 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현실적으로 문학은 정치권력 앞에서 무력하기 짝이 없습니다. 또, 경제 위력 앞에서도 무능하기 그지없습니다. 문학은 현실 속에서 그 어떤 문제를 해결 할 수 있는 직접적인 수단이나 방법이 될 수 없습니다.
(정치력/경제력을 능가하는 그 어떤 것)
정치력/경제력이 현실적으로 발휘하는 위력 앞에서 문학의 힘은 더없이 미약하고 허약할 뿐입니다. 그러나 좋은 작품, 훌륭한 소설은 모든 것을 망각하게 하는 세월의 힘을 이겨내고 영생의 생명력을 발휘하게 됩니다.

45. (글 잘 쓰는 요령은 없다)
50여 년이 지났는데도 변함이 없습니다. 이런 게 인생사 아니던가요. 그런 현상은 ‘답보’가 아닙니다. ‘본질’의 문제이기 때문에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또 50년, 1백년이 지나도 그 질문은 계속될 것입니다. 그게 기계문명의 발달과 다른 인생 본연의 문제들 아닙니까.
결국 저는 그 사실 하나를 깨달으려고 대학 4년을 다닌 셈이었습니다. 그러나 대학 4년을 바쳐 그 사실 하나를 겨우 깨달았다고 해서 저는 서운해하거나 억울해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뿌듯했고 감사히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불교에서 말하는 ‘도통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어렴풋이 알 것 같은 생각이 들었고, 주제넘게도 열반의 기쁨이라는 것이 무엇인지도 헤아릴 수 있을 것 같기도 했습니다. 그만큼 저는 그 깨달음으로 제가 가야 할 문학의 길을 확실하고 분명하게 보게 된 것이었습니다.
 ‘돌은 단 두 개. 뒷돌을 앞으로 옮겨놓아가며 스스로, 혼자의 힘으로 강을 건너가야 한다. 그게 문학의 징검다리다.’

54. 물론 제가 이런 글을 써도 행정기관에서는 끄떡도 하지 않고, 세상도 들은 척도 안 한다는 것을 잘 압니다. 그러나 옳은 일, 바른 말은 열 번이고 스무 번이고 하고 하고 또 해야 하는 것이 지식인의 사명이고 책무입니다. 그 바보스러운 되풀이가 쌓이고 쌓여 결국에는 잘못된 세상사가 바로잡히고, 새로운 정책이 수립되고 합니다. 그것이 역사가 가르쳐주는 교훈입니다. 인류의 역사는 그런 우둔한 듯한 힘들이 뭉치고 커져서 변화하고 발전해왔습니다.

'모든 예술은 모방으로 시작하되, 그것을 넘어서야 한다.’
(…) 제가 앞에서 좋은 책을 많이 읽으라고 누누이 말한 것도 ‘창조적 모방’을 하라는 뜻일 수 있습니다.
 좋은 글을 읽고 감동하고, 그 감동에 자극되어 글을 쓰고 싶은 욕구가 샘솟을 때 그 글을 닮고 싶어 하는 건 너무나 자연스럽고 당연한 일입니다. 닮고 싶은 글이 있으면 서슴지 마시고 그 글을 흉내 내십시오. 그러나 여기서 필히 조심할 것이 있습니다. 한 작가의 작품에만 고정되거나 집착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다른 작가들을 보지 못하고 특정 작가에게만 빠져들다 보면 그 작가의 아류가 되고 맙니다. 그것은 자살의 올가미고 죽음의 늪입니다. 자기만의 창조적인 세계를 구축하지 못하고 아류로 끝나는 것처럼 비참한 실패는 없습니다. 
 여러 작가를 모방하되 끝내는 자기의 개성적인 세계를 창조해내야만 예술가로 입신할 수 있으니까 모방을 하되 ‘창조적 모방’이 되게 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방법은 효과와는 반대로 적잖은 위험을 안고 있기도 합니다. 옮겨 베끼기(필사)의 목적은 아류가 되자는 것이 아니고 보다 빠르고 효과적으로 자기의 본체를 확립하자는 것입니다. 그 누구도 흉내 내지 않은 자기만의 특색과 개성을 갖춘 문장, 그것을 문체라고 합니다. 앞에서 말한 ‘창조적 모방’이 바로 ‘자기만의 문체 확립’입니다.

그런 부끄러운 행위는 왜 발생할까요? 그 첫 번째 이유가, 모방을 넘어서 ‘창조적 모방’을 확실히 이루기 전에 작가가 된 때문이 아닌가 합니다. 곧 모방의 습관성의 연장이라는 뜻이지요. 두 번째는, 작가로서 빨리 입신하고 싶은 조급성 때문이지요. 세 번째는 세상이 모르겠거니 하는 비양심의 소행입니다. 이것이 가장 나쁜 동인입니다.

표절 : 남의 시가/문장 등의 글귀를 훔쳐서 자기 것인 것처럼 발표함.

국어사전의 해석입니다. 이 ‘훔쳐서’라는 말은 무슨 뜻인가요? 다름아니라 ‘도둑질’이라는 것입니다. ‘글 도둑질’이 곧 표절입니다. (…) 그런 행위를 하게 되는 건 능력 부족, 치열성 부족, 노력 부족, 양심 결여의 결과입니다.

모방으로부터 예술 행위를 시작하는 것은 아름다우나 끝내 모방 중독자가 되어버리는 것은 가장 비참하고 추한 모습입니다. 그 위험한 함정에 빠지지 않도록 조심하십시오. 그 방법이 뭐가 있느냐고요? 예, 아주 손쉬운 방법이 있습니다. 살 껍질이 닳아지고, 속살이 닳아지고, 뼈가 닳아질 때까지 ‘노력’하고 노력하십시오.

69. 위대한 천재들의 작품을 정신 집중해 차근차근 또박또박 읽어나가십시오. 그러면 당신은 무수한 봉우리를 넘고 골짜기를 건너며 온갖 모석을 줍게 될 것입니다. 작가마다 다른 다채로운 문체, 형형색색의 소재, 각양각색의 주제, 온갖 기발한 구상, 기기묘묘한 표현 기법, 무궁무진한 상상력, 세련된 대사 처리의 효과, 과감한 생략의 역효과, 뜻밖의 상징의 감동, 살아 생동하는 무수한 인물 군상…… 
그건 세계적인 천재들이 맘껏 펼치는 문학의 대향연이며, 언어의 대축제입니다. 그 잔치에서 맘껏 마시고, 취하고, 즐기십시오.

81. 왜 그렇게 그런 좋은 글을 쓰고 싶은 마음이 동하는 것인지 제 마음을 저도 모를 일이었습니다. 그걸 굳이 설명하자면 배고플 때 밥을 먹고 싶은 마음과 같은 것이라고 하면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글 말고, 이 세상 모든 일에 대해 각자가 하고 싶은 마음은 이런 식으로 절로 동해야 합니다. 그렇게 마음이 동하는 일이 있으면 망설임 없이 그 일을 직업으로 삼으면 실패가 없고, 후회가 없고, 그 생애는 행복합니다. 단, 사람에 따라서 그 발견의 시기가 다를 뿐, 누구나 한 가지 일에는 마음 동하게 되어 있습니다.

83. “말도 또록또록 잘허고, 시상 물정도 어런보담 더 초롱초롱 잘 암시로 워째 오짐을 싸고 요런다냐 와. 시상에 귀신이 곡헐 노릇이 따로 읎당께로.”
어머니가 제 머리통을 인정사정없이 쥐어박으며 쏟아놓는 전라도식 넋두리였습니다.

벌교는 그런 살벌함이 전혀 없이 아름다운 풍광에 평화로운 곳이었습니다. 하루에 두 차례씩 들고 나는 밀물과 썰물이 신비롭기 그지없었고, 포구의 풍성하고 기나긴 갈대밭이 한없이 아름답고 포근 했으며, 철따라 날아왔다가 떠나가는 기러기 떼의 그 정연한 비행과 청아한 울음소리는 또 얼마나 신기하고 마음 맑아지는 음아이었는지 모릅니다. 첨산의 신령스러움, 징광산의 우람함, 제석산의 의연함, 그리고 20리 방죽길의 길고 긴 아득함과 중도 들판의 풍성함, 갯내음 스민 개울가 논둑에 숨은 참게를 갈대꽃대로 살금살금 유인해 잡던 그 깨소금 맛, 설한풍 속에 피던 핏빛 동백의 처연한 아름다움, 겨울밤 대나무밭 참새 사냥의 설레임, 옛날이야기가 치렁치렁 이어졌던 겨울밤 머슴들 사랑방에서 생고구마 깎아 먹던 맛과 생두부에 김치를 감아 먹던 맛, 과부인 친구 어머니의 슬프고 외로운 소복 모습을 닮았던 하얀 치자꽃, 보리며 밀 서리를 하다가 쫓기던 재미, 비 쏟아지는 여름밤 발가벗고 감나무를 타고 올랐던 단감 서리의 아슬아슬함, 이런 벌교의 평화로움과 정다움이 저를 어루만지고 안정시켜 햑요 좋게 야뇨증을 치료해준 것입니다. 

87. 거기에 바로 제 눈을 사로잡는 그림이 끼워져 있었던 것입니다.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삼국지>의 으뜸 장수로 그 유명한 관우(관운장)가 힘센 말을 타고 긴 창을 휘두르며 적을 무찌르는 모습이었습니다. 부릅뜬 눈, 굳센 입, 준엄한 얼굴, 휘날리는 긴 수염, 전신에서 뻗쳐나는 힘, 긴 창을 꼬나 잡은 억센 두 팔, 그리고 전신의 근육이 울퉁불퉁 드러난 말의 역동적인 모습.
 그 생생히 살아 있는 모습은 충격적이고 감동적인 것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그림을 보고 제 가슴이 떨리도록 감동을 받은 것이 그때가 처음이었습니다. 저는 그 감동을 어찌할 수 없어 손수 그릴 욕심을 냈습니다.

그 즈음에 했던 또 하나 남다른 짓이 머슴방 밤 마실 돌기였습니다. 무한정 이어지는 옛날이야기를 듣는 맛에 홀렸던 것입니다. 옛날얘기 듣는 맛은 어찌 그리도 고소하고 달고 차지고 간드러졌던지요.

91. 초등학교 시절에 누구나 지긋지긋해한 방학숙제가 하나 있지 않습니까. 그건 그 야만적(?)인 ‘일기 쓰기’입니다. 그러나 저는 그 숙제를 가장 반겼습니다. 왜냐하면 날마다 쓸 거리가 무궁무진했기 때문입니다.
(…) 저는 전혀 달랐습니다. 썰매를 만들었으면 그 과정을 세세하게 써나갑니다. 그러다 보면 하루 일기가 대학노트 두 장도 되고, 석장도 되었습니다(그렇습니다. 저는 일기 숙제를 하기 위해 네모칸 큰 초등생용 공책을 쓰지 않고 처음부터 대학노트를 썼습니다. 쓸 것이 많다는 제 말에 아버지가 특별히 사주신 것이었습니다). 썰매를 타는 재미도, 얼음이 깨져 죽을 뻔한 일도 몇 장씩의 일기가 되었습니다. 뻘밭에서 한쪽 다리가 크고 빨간 농게를 잡다가 엎어지고 뒤집어지며 아이들과 싸운 일, 갈대꽃술 끝으로 참게를 까딱까딱 놀려 굴 밖으로 유인해낸 순간 재빨리 덮치다가 그만 손가락을 물려 소리소리 지르며 뺑뺑이를 치던 일들을 실컷 써나가다 보면 겨울방학 숙제와 여름방학 숙제는 대학노트 한 권으로는 모자라고는 했습니다.
 아버지는 새 대학노트를 사와 다 쓴 처음의 대학노트와 합본을 만들었습니다. 그건 먼저의 대학노트 뒷표지와 새 대학노트 앞표지를 실로 꿰매는 것이었습니다. 아버지는 평생에 걸쳐서 여자가 하는 일은 그 어떤 것도 손에 댄 일이 없습니다. 그런데 아버지는 대학노트 앞뒤 표지를 꿰매는 그 서툴고 어설픈 바느질을 손수 하셨습니다. 우리나라의 엄한 아버지가 거의 다 그렇듯 제 아버지도 자식들에게 ‘잘했다’는 그 간단한 칭찬 한마디를 한 일이 없습니다. 그런데 저는 아무 말 없이 대학노트 두 권을 합치고 있는 아버지의 손길이 제 머리를 쓰다듬는 것 같은 부드러움과 따스함을 느꼈습니다.

96. 회의가 없다면 사람일 수 없고, 발전도 있을 수 없겠지요. 그리고 그런 낙방들은 실패가 아니고 수련이고 단련입니다.
흔히 얘기하는 교훈 중에 대기만성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국어사전은 ‘큰 그릇을 만드는 데는 시간이 오래 걸린다는 뜻으로, 크게 될 사람은 늦게 이루어진다는 말’이라고 했습니다. 이 뜻풀이는 글자의 의미에 충실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만성’은 오래 걸린다는 뜻만이 아니라 ‘오래도록 노력해야만 한다’는 의미도 담고 있습니다. ‘크게 되려면 오래 노력해야 한다.’ 

102. ‘내가 지난 4년 동안 변화해온 것처럼 앞으로도 4년 단위로 그렇게 변해간다면 아마 40년쯤 후에는 나는 성인으로 변해 있을지도 모른다.’

104. ‘왜 그런 소재를 선택했을까.’
‘주제와 소재는 효과적으로 조화되어 있는가.’
‘주제의 형상화는 잘 이루어졌는가.’
‘사건 전개는 우연이나 조작적이지 않고 실감 있고 필연적인가.’
‘구성의 허술함이나 무리는 없는가.’
‘인물들의 개성과 생동감은 살아 있는가.’
‘문체의 특성은 무엇인가.’
‘감각과 묘사력은 특색이 있는가.’
‘결말 처리는 효과적이었는가.’
‘소설로서 성취도는 어느 정도인가.’

105. ‘아, 잘 썼다. 그치만 별것 아니네.’
 ‘나도 딴 방법으로 얼마든지 쓸 수 있어.’ 
당신이 소설을 쓸 수 있으려면 아무리 좋은 작품을 읽었더라도 당신의 독후감은 늘 이래야 합니다. 그것이 객기든, 만용이든, 오만이든, 오기든 다 좋습니다. 좋은 작품을 좋다고 인정하면서도 한 가닥 곤두서는 자신감. 그것이 당신의 영토이며, 당신이 차지할 ㅅ ㅜ있는 빈자리입니다. 수백, 수천 편의 좋은 작품을 읽었더라도 그 ‘빈자리’는 당신의 의식 속에 꼭 확보되어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섭섭하지만 작가 되기를 포기해야 할 것입니다. 기죽고 가위눌려서 뒤는 일은 없으니까요.

107. 인간과 인간 세상의 본질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인간은 혼자일 수 없고 서로서로 관계를 맺는 존재이며, 그 관계의 얽히고설킴이 사회고, 그 속에서 벌어지는 문제적 이야기들을 형상화하는 것이 소설입니다. 이 의식을 굳건히 세우고 있으면 어떤 방향으로 가야 하고, 어떤 소설을 써야 할지 그 길이 보일 것입니다.




작가 수업

저자
도러시아 브랜디 지음
출판사
공존 | 2010-08-15 출간
카테고리
인문
책소개
“현대의 모든 글쓰기 지침서의 어머니”, 즉 글쓰기 책의 원조라...
가격비교 글쓴이 평점  


17. 소설은 (…) 유일무이의 철학을 제시한다. 다시 말해 독자들은 소설을 통해 윤리적, 사회적, 물질적 기준을 확립한다. 독자들은 소설을 통해 편견을 굳히기도 하고, 그런가 하면 더 넓은 세상을 향해 마음을 활짝 열어젖히기도 한다. 널리 읽히는 책의 영향력은 지대하다. 그런 책이 선정적이거나 조잡하거나 저속하다면 우리의 삶은 그런 책이 퍼뜨리는 싸구려 이상 때문에 더욱 초라해진다.

41. (작가의 조건) 작가는 숨을 거두는 순간까지 자발성과 아이처럼 예민한 감수성과 화가 못지않게 ‘순수한 시각’을 유지하면서 새로운 환경에 참신하고 신속하게 반응할 뿐만 아니라, 기존의 환경도 마치 처음대하는 환경처럼 대한다. 그러한 특징과 개성은 그 즉시 케케묵은 범주 안에 분류되어 먼지를 뒤집어쓴 채 구석에 처박히는 것이 아니라 마치 신의 손을 통해 나날이 새롭게 주조되는 듯하다. 상황에 곧바로 예민하게 반응하는 만큼 작가에게 ‘진부하다’는 말은 통하지 않는다. 작가는 아리스토텔레스가 2천 년 전에 말한 ‘사물의 연관관계’에 늘 주목한다. 이런 신선한 시각이야말로 작가에게 반드시 필요한 재능이다.

42. 어른스러움과 분별력과 절제와 공폄함. 이런 특징은 예술가보다는 장인과 비평가의 모습에 가깝다. 예민한 감수성과 어린아이처럼 천진한 구석도 중요하지만 예술가가 방금 지적한 면모를 갖추지 못한다면 예술 작품은 탄생하지 못한다.

46. 이야기를 차분히 기획하는 단계에서는 이야기를 쓰는 데 필요한 거침없는 표현이 창 밖으로 마구 흘러나온다. 그러다 긴장을 놓는 순간 이야기는 갑자기 방향을 잃고 만다. 혹시 쓰는 이야기마다 모두 비슷하지는 않은지 두렵고, 이 이야기를 끝내고 나면 두 번 다시는 이만큼 마음에 드는 이야기를 쓰지 못할까 봐 불안하다. 그는 유명 작가들을 모방하면서 스스로를 괴롭히기 시작한다.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에게는 이 작가만 한 유머나 저 작가만 한 독창성이 없기 때문이다. 백 가지 이유를 대며 자신을 의심하는 사이 그의 자신감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만다. 자신을 격려해준 사람들이 너무 후하거나. 시장에서 너무 동떨어져 있어 성공하는 소설의 기준을 모르는 것은 아닌지 의심스럽다. 진짜 천재의 작품을 읽어보니 둘의 재능 차이가 그의 희망을 모조리 집어삼키고도 남을 만큼 커 보인다. 그런 상태에서 이따금 자신의 재능이 살아 요동치는 것을 느끼는 순간이면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다. 이런 기간은 몇 달 또는 몇 년 넘게 이어질 수도 있다.
 작가라면 누구나 이러한 낙담의 기간을 경험한다.

48. 의식과 무의식이라는 성격의 두 가지 측면이 서로 조화를 이루도록 얼마든지 훈련할 수 있으며, 그러한 훈련의 첫 번째 단계는 한 사람이 아니라 마치 두 사람을 교육하듯 자신을 교육하는 데서부터 출발한다.

49. 
할 말이 없을 때는 침묵하라.
진정한 열정이 솟아오르거든 할 말을 모두 하라.
정열적으로 말하라.
D.H. 로런스

경험이란 그저 자신에게 일어난 일이 아니라
그것에 관여하는 것이다.
올더스 헉슬리

53. 마음의 이 두 가지 기능을 가능한 한 서로 멀리 떨어뜨려놓는 법을 터득한다면, 이 둘을 동일한 마음의 두 측면이 아니라 서로 별개인 인격으로 바라보는 법을 터득한다면 일종의 모의 작업 상태에 이를 수 있다. 그럴 경우 실제로 일을 하든 하지 않든 우리 자신을 단련하는 데 말할 수 없이 큰 도움이 된다.

54. (작가 안의 두 사람) 따라서 한동안은 자신을 의식의 힘을 빌려서라도 한 사람 안에 있는 두 사람으로 생각할 필요가 있다. 우선, 일상의 문제들에 정면으로 맞서는 고리타분하고 현실적인 인물이 있을 것이다. 이 인물은 무신경을 상쇄하고도 남을 만큼 많은 장점을 가지고 있다. 이 인물의 경우 이지적인 비평 능력, 공평함, 끈기를 배워야 한다. 아울러 그와 동시에 이 인물의 최우선 임무는 예술가 자아에 바람직한 환경을 조성하는 것이라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반면 이중 인격의 또 다른 반쪽은 민감하고, 열정적이면서, 종잡을 수 없을 가능성이 높다. 이 인물이 그러한 특징을 일상 세계로 끌고나가게 해선 안 된다. 점잖은 측면이 이성이 필요한 상황에서 감정적으로 대처해 고초를 겪게 하거나, 엄격한 관찰자의 눈에 우스꽝스럽게 보이게 해서도 안 된다. 

54. 이중 인격을 통해 얻는 가장 큰 이익은 그대와 세상 사이에 투명한 장벽을 세우게 된다는 점이다. 이 장벽 뒤에서 그대는 자신의 속도에 맞게 예술가로 성숙해 나갈 수 있다.

58. 또 한 가지 이유는 작가의 글을 쓰는 자아는 본능과 감정에 치중하기 때문이다. 자칫 방심할 경우 작가는 자신의 재능을 끊임없이 채워놓고 자극하는 삶보다는 아무 고민 없이 그저 편하기만 한 삶에 빠져들기 쉽다. ‘예술가 기질’은 대개 공상 속에서 스스로를 연마하고 고독 속에서 즐길 때 완전하게 발현된다. 그런 가운데 어쩌다 가끔 글을 쓰고 싶다는 충동이 저절로 펴면으로 떠오른다. (…) 따라서 처음부터 자신은 행동의 변덕에 좌우되기 쉽다는 점을 직시하고 자신을 객관적으로 파악하는 것이 좋다.

59. 하지만 스스로에게 단지 엄격하고 근엄하기만 한 선배가 아닌 둘도 없이 절친한 친구가 되도록 신경 써야 한다. 자신에게 무엇이 가장 좋은 자극이고, 가장 좋은 즐거움이고, 가장 좋은 친구인지를 알 수 있는 사람은 자신밖에 없다.

63. 두 자아가 각기 자신의 위치를 찾아 자기한테 맞는 기능을 수행하게 되면 손을 맞잠고 밀어주고 끌어주면서 끊임없이 서로 응원하고 격려하고 다독인다. 그 결과 두 자아는 예전에 비해 몰라보게 균형 잡히고, 성숙하고, 활기 넘치고, 진득한 인격으로 통합된다.

79. 무의식의 비옥한 자양분이 주는 혜택을 온전히 누리려면 무의식이 기선을 잡았을 때 힘들이지 않고 쉽게 글을 쓰는 법을 배워야 한다.
 이러한 방법을 터득하려면 평소보다 30분이나 한 시간 일찍 일어나는 것이 가장 좋다. 일어나자마자 말을 하거나, 조간 신문을 읽거나, 전날 밤 치워두었던 책을 집어들지 말고 글을 쓰기 시작하라. 머릿속에 떠오르는 대로 아무 내용이나 쓰라. 기억할 수 있다면 간밤에 꾼 꿈도 좋고, 전날 했던 활동도 좋고, (실제든 상상의 산물이든) 대화도 좋고, 양심의 성찰도 좋다. 어떤 종류든 상관 없으니 이른 아침의 공상을 비판의 시각을 들이대지 않고 빨리 쓰는 것이 관건이다. 글의 우수성이나 궁극적인 가치는 아직 중요하지 않다.
(…) 이런 식으로 자신의 행동을 기록하면서 수면 상태와 깨어있는 상태의 중간 지대에서 쉽게 글을 쓸 수 있도록 훈련해야 한다. (…) 비는 시간만큼, 또는 충분히 썼다는 생각이 들 때까지 가능한 한 오래 쓰는 것이 좋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이 훈련이 결실을 거두기 시작하는 것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글쓰기가 더 이상 고역스럽거나 지루해 보이지 않으면서, 글로 옮겨 적은 공상을 통해 마음 뒤편에서 거의 말 없이 이루어지는 공상 못지않게 많은 것을 (실은 훨씬 더 많이)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눈을 뜨자마자 펜을 집어들고 거의 충동적으로 글을 쓰기 시작하면 다음 단계로 넘어갈 준비가 됐다는 뜻이다.
 다음 단계에서는 최대한 쉽고 자연스러워 보이게 이 아침 일과를 수행하는 것이 목표다. (하지만 처음에 시작했을 때보다 더 많이 쓸 수 있는 능력을 익히는 것도 중요하다.) 자신을 주의 깊게 지켜보라. 언제고 공상이 다시 게으름을 피운다 싶으면 채찍질을 해야 할 때라는 뜻이다. 글을 쓰다 보면 아무리 쉽게 쓰는 작가에게도 이따금 정신이 바싹 말라붙는 위기가 찾아오기 마련이다. 그런 위기가 찾아올 때마다 침대 옆 탁자에 연필과 종이를 갖다놓고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글을 쓰라.

85. 본인에게 그럴 의사만 있다면 바쁜 하루 중에서 15분도 내지 못할 만큼 얽매여 사는 임금 노예는 거의 없다. 글을 쓸 15분을 언제 내는 게 좋을지 정하라. 앞으로는 이 15분 안에 글을 쓰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칭찬도 비난도 하지 않는다. 인정할 따름이다. 
나는 만물의 기준이자 세상의 중심이다.
ㅡ 윌리엄 서머싯 몸

112. 독서를 통해 효과를 얻으려면 자신의 능력을 끌어올리는 데 어떤 부분이 도움이 될 수 있는지를 생각하며 책을 읽어야 한다.
비판력을 키우게 되면 아마추어 입장에서 책을 읽을 때보다 훨씬 더 깊은 즐거움을 맛볼 수 있다.

(두 번 읽어라)
작가 입장에서 책을 읽는 법을 터득하려면 처음에는 뭐든 두 번 읽는 길밖에 없다. 단편이든, 기사든, 소설이든 아무 부담 없이 책을 그저 즐겼을 때처럼 그 어떤 비판도 가하지 말고 빨리 읽어치우라. 다 읽었으면 당분간 책을 한쪽으로 치워두고 연필과 메모장을 꺼내라
(대강의 판단과 자세한 분석)
우선 방금 읽은 책의 개요를 짤막하게 작성하라. 마음에 들었는지 아닌지, 믿음이 갔는지 아닌지, 마음에 들었던 부분과 그렇지 않았던 부분은 무엇인지에 비추어 대강의 판단을 내려라. 
 진술 내용을 계속 늘려나가라. 책이 마음에 들었다면 그 이유는 무엇인가? 여기에 대한 대답이 처음에는 모호하더라도 기죽지 말라. 책을 다시 읽어보면 그러한 반응의 원인을 찾게 될 것이다. 책 내용 가운데 더러는 훌륭해 보였던 반면 나머지는 설득력이 부족해 보였다면 작가가 언제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되짚어보라. 등장인물들이 한결같은 솜씨로 그려졌는가. 형편없이 그려졌는가, 아니면 어쩌다 가끔만 일관성 있게 그려졌는가? 이렇게 느낀 이유를 알겠는가?
(두 번째 읽기) 개요를 작성해 자신의 질문에 답하고 나면 속 시원히 대답하지 못했거나, 자세히 파고든다면 답을 알 수 있었을 것 같은 질문이 무엇인지 확인해야 한다. 처음부터 꼼꼼하게 읽어나가면서 분명해 보이는 대답을 찾는 대로 메모장에 기록하라. 특별히 잘 처리된 구절을 발견하거나, 작가는 솜씨 있게 다루고 있지만 자신이 다루기에는 어려울 것 같은 소재가 눈에 띄면 표시해두라.
(중요한 점)
비판 어린 시선으로 책을 읽을 때 얻을 수 잇는 자극과 유익함은 끝이 없다. 온 신경을 집중하고 읽어야 한다. 작가가 강조하고자 하는 대목에서 책의 호흡이 빨라지는지 느려지는지에 주목하라. (…) 작가가 모든 일에 개입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가, 아니면 특정 등장인물의 의식을 따라가는 가운데 그 인물이 보기에 분명한 것만 말하면서 이야기를 전개해 나가는가? 아니면 처음에는 이 사람, 다음에는 저 사람, 그 다음에는 또다른 사람의 관점에서 글을 쓰는가?

좋은 소설은 주인공에 관한 진실을 들려주지만,
나쁜 소설은 작가에 관한 진실을 알려준다.
ㅡ 길버트 키스 체스터턴

121. (모방에 대하여) 모방이 효과를 지니려면 완전한 숙지와 인정을 통해 그 대상을 자기 것으로 만들었을 때 비로소 가능하다.

125. 마지막으로 자신의 글로 다시 돌아가 새로운 눈으로 읽어야 한다. 곧 출간을 앞두고 있다고 생각하며 읽어나가라. 여기저기 손볼 데가 보이지 않는가?

세상에 재미없는 주제는 없다. 무심한 인간이 존재할 뿐이다.
ㅡ 길버트 키스 체스터턴
예술가의 모든 작품은 자기 영혼의 모험이 표현되어야 한다.
ㅡ윌리엄 서머싯 몸

128. (순수한 시각 되찾기) 천재는 감수성이 예민한 아이가 자신의 세상을 넓혀 나가면서 느끼는 생생하고도 강렬한 흥미를 평생 잃지 않는다.

우리 모두가 별다른 저항 없이 순순히 받아들이는 권태는 작가에게 매우 위험하다. 권태로워지면 우리는 일상의 관랄력, 신선한 감감, 새로운 생각을 더 이상 스스로 끌어내지 못한다. 너나 할 것 없이 소재를 찾기 위해 인생의 똑같은 시기로 되돌아가 유년기나 청소년기의 감동을 끊임없이 쓰고 또 쓰는 경향을 보이는 이유는 바로 이 때문이다.

131. 바람직한 상태에 이르려면 매일 조금씩 시간을 따로 내서 아이처럼 ‘순수한 시각’을 되찾는 훈련을 해야 한다. 하루에 30분씩 눈을 크게 뜨고 매사에 호기심을 보였던 다섯 살 시절로 돌아가라. 한때는 숨쉬기처럼 자연스러웠던 일을 일부러 하려니 신경이 쓰이겠지만 얼마 지나지 않으면 새로운 소재를 마구 모아들일 수 있게 될 것이다.

132. 버스를 타거나 걸어서 거리를 지날 때 15분만 시간을 내서 눈에 띄는 사물 하나하나에 대해 다른 사람에게 설명하듯 자신에게 말해보라.

135. 천재의 재능이 마르지 않는 이유는 바로 이 때문이다. 천재는 자신에게 일어났던 일은 뭐든 활용한다. 천재에게 너무 깊숙이 가라앉아 되불러낼 수 없는 경험이란 없다. 천재는 어떤 상황을 막론하고 상상력에 기대 거기에 딱 맞는 이야기를 찾아낼 수 있다. 무관심과 권태의 나락에 빠져드는 것을 거부한다면 삶의 모든 측면을 글의 소재로 되살려낼 수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만사를 당연하게 여기는
거의 무한한 능력을 지니고 있다.
ㅡ 올더스 헉슬리

139. 편집자와 글쓰기 교사로 오랫동안 일하면서 얻은 중요한 교훈 한 가지가 있다면 상상력이 풍부한 작가는 본보기로 삼은 작품 안에서 자기한테 어울리는 특징을 찾아낸다는 점이다. 작가 지망생이 똑같은 옷본을 사용해 그럴 듯한 이야기를 만들어낼 수 있는 것은 그 때문이다. 하지만(…) 다른 사람의 옷본을 빌려 외투를 재단 할 경우 십중팔구 실패하기 마련이다. 독창성은 밖에서 오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작가가 세상에 기여할 수 있는 일은 한 가지뿐이다. 즉 세상에 대한 이해를 자신의 눈에 비치는 그 모습 그대로 공통된 경험 안에 담아낼 수 잇을 뿐이다. 작가는 글쓰기 인생에서 이 점을 되도록 빨리 깨닫는 것이 좋다. 

 겪는 경험도 저마다 다르고, 내리는 결정도 각기 다르다. 그대와 똑같은 가치관을 가지고 세상을 대하는 사람 또한 없다. 따라서 이런 조건에 익숙해 질 수 있다면 주어진 상황이나 특징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정확하게 말할 수 있다. 또한 세상 모든 사람 중에서 오로지 자신만이 아는 이야기를 풀어낼 수 있다면 당연히 독창적인 작품을 만들어낼 수 있다.
 매우 간단해 보이지만 보통의 작가는 할 수 없는 일이 바로 이것이다. 읽을 수 있는 능력을 터득한 뒤로 다른 사람의 글에 푹 빠져버리기 때문에 안타깝게도 다른 사람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기 십상이다. 물론 이따금 상상력이 풍부하고 사고가 유연한 작가가 꽤 훌륭한 작품을 써내면 우리는 독창적인 이야기에 가깝거나 모방한 티가 전혀 나지 않는 이야기를 접하게 된다. 하지만 대개 이해의 부족, 즉 자신의 소설 속 등장인물에 대한느닷없는 오해는 작가가 자신이 창조한 인물들을 다른 사람의 눈으로 바라보기 때문에 발생한다. 

(독착성은 모방에서 나오지 않는다) 그들은 세상을 자기만의 눈으로 바라보면서 자신의 눈에 비친 세상을 글로 옮겨놓는다. 그들의 작품이 솔직하고 활기가 넘치는 이유는 그 어떤 편향이나 왜곡 없이 개성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기 때문이다. (…) 어리석거나 영웅을 숭배하는 젊은 작가에게 이 점을 상기시키기가 너무나 어렵다.

143. (정직, 독창성의 근원) 그 동안의 경험을 들어 오늘의 신념이 내일의 신념이 되리라는 보장이 없다고 확신하며 자신을 송두리째 내던지길 망설이는 초보 작가가 너무나 흔하다. 이런 초보 작가는 일종의 주문 같은 것에 사로잡히게 된다. 그는 궁극적인 지혜가 저절로 모습을 드러내주길 기다리다가 그 시기가 너무 늦어지면 자신은 글을 쓰긴 글렀나 보다고 지레 판단해버린다. 이러한 기다림이 (가끔 그렇듯이) 단지 글쓰기를 막연히 미루는 신경과민성 핑계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진짜 어려움으로 작용할 경우 그는 전력투구하지 않고 건성으로 반쯤 이야기를 쓰다가 거기서 그치고 만다.
 이런 작가에게 정말 필요한 것은 혼자만 그런 일을 겪는게 아니라는 점을 깨닫는 것이다. 우리 모두는 계속 성장할 뿐만 아니라, 글을 쓰려면 우리의 현재 신념의 토대 위에서 글을 써야 한다. 마지못해 마음을 다잡고 글을 쓴다 해도 자신의 현재 상태를 보여주는 최종 관점에서 동떨어져 있다면 죽는 순간까지도 여전히 미완성인, 스무 살 시절 세상에 대해 가졌던 최종 확신과도 거리가 먼 세상에 머물러 있기 십상이다.

(자기 자신을 믿으라)
(…) 심금을 울리는 재주가 있어야 한다. 주인공이 어떻게 어려움에 대처하느냐, 그런 막다른 골목에 대해 작가 자신은 어떻게 생각하느냐, 이런 것들이 바로 작가의 이야기를 진정 작가만의 것으로 만들어준다. 이야기의 성패를 판가름하는 것은 작품을 통해 분명하게 드러나는 작가 자신의 개성이다. 그 자체로 진부한 상황은 없다고 나는 감히 말하고 싶다. 다만 무신경하거나, 상상력이 부족하거나, 속을 털어놓지 않는 작가가 있을 뿐이다. 인간은 동료 인간이 맞닥뜨린 궁지가 속속들이 묘사될 때 감동을 받는다. 

(그대의 분노와 나의 분노)
“그대의 사랑과 나의 사랑, 그대의 분노와 나의 분노는 똑같은 이름으로 불린다는 점에서 서로 매우 비슷하다. 하지만 우리의 경험과 이 세상 어느 두 사람의 경험에 비추어볼 때 그 둘은 완전히 똑같을 수 없다.”
아그네스 뮤어 매켄지, <문학의 과정>에서

사실 두 가지 기본 원칙이 있을 뿐이다. 첫째, 소설가는 자신의 팔이 미치는 범위 안에 있는 것만 다루어야 한다. 둘째, 주제의 가치는 작가가 그 안에서 무엇을 보고 또 그 안으로 얼마나 깊이 파고들 수 있느냐에 거의 전적으로 달려 있다. (…) 자신의 글에 최종 가치를 부여하는 것은 바로 자신의 통찰력이며, 선하고 맑고 정직한 마음이 있는 곳에선 진부함이 발붙일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될 테니.

148. “자신이 의견을 개진하고 싶을 만큼 생동감 있는 이야기라면 뭐든 써도 상관없다.”
 어떤 상황이 그 정도로 관심을 끈다면 그 상황은 충분히 의미가 있으며, 그 의미가 무엇인지를 찾아낼 수 잇다면 이야기의 토대는 이미 마련된 셈이다.

149. (양도할 수 없는 개성) 작가는 독자의 관심을 붙잡아두면서 독자가 작가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도록, 작가가 이끄는 대로 이 대목에서는 감동을 받고, 저 상황에서는 슬퍼하고, 또 다른 상황에서는 마음놓고 실컷 웃도록 유도한다. 그런 점에서 모든 소설은 설득력을 지닌다. 종류 여하를 막론하고 무릇 지어낸 이야기의 근저에는 작가의 확신이 자리한다. 
 따라서 작가는 마땅히 삶의 중요한 문제 대부분에 대해 자신이 진정으로 믿는 것은 무엇이며, 글의 소재로 사용하게 될 삶의 사소한 문제들에 대해선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정확하게 알고 있어야 한다.

150. 글의 토대가 되기에 충분하다고 확신할 수 있는 주제를 찾아야 한다. 훌륭한 작품은 흔들림 없는 확신에서 나오며, 그리하여 만인의 사랑을 받는다.

모든 좋은 말에는 그보다 좋은 침묵이 담겨 있다.
침묵은 영원처럼 깊고 말은 찰나처럼 얕다.
ㅡ 토머스 칼라일
침묵을 경청하는 것은 경이로운 일이다.
ㅡ 토머스 하디

154. (말 없는 여가 시간)
결론은 간단하다. 스스로 마음이 내켜서 글을 쓰고 싶다면 말 없이도 잘 지낼 수 있어야 한다. 극장에 가거나, 교향악단의 연주를 듣거나, 박물관에 들르기보다 혼자 장시간 산책에 나서거나, 혼자 버스를 타보라. 진지하게 계획을 세워 말하거나 읽는 것을 멀리한다면 큰 보상이 따를 것이다. 

정신을 깨어 있게 하는 것은 말 없는 활동

진정한 작가에게는 각각의 작품이
이룰 수 없는 것에 다시 도전하는 새로운 시작이다.
항상 작가는 한 번도 이루어진 적이 없거나
다른 이들이 도전했다가 실패한 것에 도전해야 한다.
그러고 나면 이따금 큰 운이 따라 성공하게 된다.
ㅡ 어니스트 헤밍웨이

162. (자신만의 문체를 찾으라) 무엇보다도 자신만의 문체, 자신만의 주제, 자신만의 어조를 찾는 것이 중요하다. 그래야 자신의 본성을 이루는 모든 요소가 그대가 참다운 작가로 성장하는 데 밑거름이 될 수 있다.

166. 본격적으로 글을 쓰기 시작하기 전에 이야기의 첫 번째와 마지막 문장을 정해두면 크게 도움이 될 수 있다. 그럴 경우 첫번째 문장은 이야기 속으로 풍덩 뛰어들 때 내딛는 발판으로, 마지막 문장은 앞으로 헤엄쳐 나갈 때 몸을 잘 뜨게 해주는 부낭으로 활용할 수 있다.
(…) 이야기를 일단 쓰기 시작했으면 그 날 끝내야 한다.

천재는 이상을 지닌 재능이다.
ㅡ윌리엄 서머싯 몸
천재란 그것을 지닌 자를 
온갖 고난에 빠뜨릴 만큼 탁월한 재능이다.
ㅡ 새뮤얼 버틀러

174. (천재의 뿌리) 천재(여기서 ‘천재’는 ‘비범한 사람’이 아니라 ‘하늘이 내린 재능’이라는 의미)의 뿌리는 의식이 아니라 무의식 안에 있다.

175. (더 높은 수준의 상상력) 무의식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높은 수준의 도움을 준다. 어떤 예술이든 무의식에 저장된 기억과 감정뿐만 아니사 상상력이라는 무의식의 알찬 내용물에 의지해야 한다. 재능을 타고난 사람은 이러한 자원을 끊임없이 활용하는 가운데 자신의 존재를 마음껏 펼치며 편안하게 살아간다. 그런 사람은 생명력과 활기가 무한정 넘쳐날뿐더러 저 먼 곳에서 들려오는 울림을 억누르는 법이 없다.

176. (무의식과 타협하라) 글을 잘 쓰려면 당면한 지식의 문지방 뒤에 자리하는 우리 본성의 거대하고 강력한 이 부분과 타협해야 한다. 
 진정한 천재는 자신이 어떻게 일하는지 미처 깨닫지 못한 채로 평생을 살아간다. 천재는 꿈꿀 때, 앉아서 빈둥댈 때 등 무슨 일이 있어도 혼자 있어야 할 때가 있다는 것만 알 뿐이다. 많은 경우 천재는 자신의 마음이 백지처럼 텅 비어 있다고 믿는다. 때로 우리는 ‘불모의’시기를 겪고 있다고 생각하며 절망의 늪에서 허우적거리는 천재의 이야기를 듣는다. 하지만 침묵의 시기는 언제 그랬냐는 듯 곧 지나가기 마련이고, 글을 써야 하는 시점이 도래한다.
 천재의 게으름은 단지 표면상의 침묵일 뿐이라는 것을 알아챌 만큼 영특한 관찰자들은 이 낯설고도 고립된 시기를 ‘예술적 혼수 상태’라고 불러왔다. 분명히 뭔가가 작용하고 있긴 하지만 너무 깊숙이 가라앉아 있어 생각을 구체화할 준비를 갖추기 전까지는 활동의 조짐이 거의 보이지 않는다. 천재에게 쏟아지는 괴팍하다느니 무례하다느니 하는 비난 뒤에는 대개 고독 속에, 한가로운 여가 속에, 오랜 침묵 속에 푹 잠기고 싶어하는 예술가의 절실한 욕구가 있다. 침묵의 기간이 인정받고 용인된다면 부작용이 생길 리 없다. 이따금 일상의 속박에서 벗어나 초탈의 시간을 갖는 것이 예술가의 특징이다. 
 한 발 뒤로 물러나 무신경하게 지내다 보면 이름 없는 기능이 저절로 모습을 드러내기 마련이지만 스스로의 통제 아래 그 시기를 어느 정도 앞당길 수 있다. 그러려면 더 높은 수준의 상상력을, 직관을, 무의식의 예술적 측면을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는 능력을 길러야 한다. 작가의 비법은 바로 거기서 나오며, 그런 능력이야말로 작가의 유일하고도 진정한 ‘비책’이다. 

기적의 가장 놀라운 점은 그것이 일어난다는 사실이다.
ㅡ 길버트 키스 체스터턴

180. 번득이는 통찰력과 날카로운 직관 그리고 상상력은 서로 협력해 평범한 경험을 ‘더 고귀한 현실이라는 현상’으로 바꾸어 놓는다. 그런 점에서 이 세 가지는 예술의 필수 요소다. 아니면 한 발 양보해 삶을 해석하는 데 반드시 필요한 요소들이다.
 이 모두는 우리가 통제할 수 있는 영역 밖에 위치한다. (…) 이 요소가 글쓰기에서 차지하는 중요성을 이해한다면, 이 요소의 활동을 가로막는 방해물을 제거해 자신의 작업 안으로 자유롭게 흘러들도록 하는 법을 터득한다면 작가로서 크게 성공할 수 있다.

(…)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타고난 재능을 더 늘리는 것이 아니라 활용하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시대와 인종을 초월해 위대한 사람들은, 마치 처음부터 불순물이 섞이지 않은 그야말로 순수한 재능을 타고나기라도 한 듯 너무나 위대해서 편의상 우리가 ‘천재’라고 부르는 사람들은, 삶과 예술 작업에서 나머지 인간들보다 그러한 기능을 좀더 자유롭게 발휘했을 뿐이다. 재능의 흔적을 아예 찾아볼 수 없을 만큼 보잘것없는 인간은 없다. 마찬가지로 처음부터 너무나 위대해 타고난 재능을 남김 없이 무한정 사용하는 인간 또한 없다. 

185. (주기, 단조로움, 침묵) 침묵의 시기가 찾아온다. 작가마다 매우 특이한 방식으로 그런 막간극에 몰입하기 때문에 이 기간에 적용할 수 있는 공통분모는 거의 찾아보기 어렵다. 승마, 뜨개질, 카드놀이, 산책, 조각 등 아주 다양하다. 물론 세 가지 형태의 공통분모가 있다고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즉 이 기간은 주기성을 띠고, 단조로우며, 말이 없다. 그것이 우리의 열쇠다.
(…) ‘생각을 품는 시기’를 짧게 줄여 더 좋은 작품을 내놓을 수 있는 방법은 분명히 있다. 그 방법이야말로 작가의 비법이다.

동료나 선배보다 나은 자가 되려고 애쓰지 말라.
자신보다 나은 자가 되려고 노력하라.
ㅡ 윌리엄 포크너

나는 세상을 바꾸고 싶었다. 
하지만 사람이 확실히 바꿀 수 있는 것은 자기 자신밖에 없다.
ㅡ 올더스 헉슬리

189. 작가의 비법 (마음을 가만히 놔두라) 간단히 말하면 이렇다. 즉 몸을 가만히 놔두듯 마음을 가만히 놔두는 법을 익히라.





페이스북 장사의 신

저자
김철환 지음
출판사
블로터앤미디어 | 2013-10-20 출간
카테고리
경제/경영
책소개
귀농 4년만에 100% 직거래를 달성한 소셜농부 장창현, 매출의...
가격비교 글쓴이 평점  


6. 전통적인 마케팅은 포장과 홍보의 기술입니다. 어떻게 하면 사업, 상품, 서비스를 매력적으로 포장해 그것을 더 많은 사람에게 전달할 수 있을까 고민합니다. 사실 저를 비롯한 많은 전문가는 그런 관점으로 페이스북을 바라봤습니다.
 하지만 이 책의 주인공들이 말하는 페이스북 마케팅은 달랐습니다. 그들은 비즈니스용 계정인 페이지보다 개인용 계정인 프로필이 마케팅에 더 효과적이라고 말합니다. 상품이나 서비스를 이야기하지 않아야 상품이 팔린다는 역설을 보여줍니다. 포장 대신 겸손의 중요성을, 일방적인 홍보 대신 경청과 소통의 중요성을 강조합니다. 어쩌면 그들이 말하는 페이스북 활용법은 마케팅이라기보다 사람들과 좀 더 잘 어울려 지내는 데 필요한 처세술에 가까웠습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대기업도 이루기 어려운 마케팅 성과를 냈습니다. 아마도 그들의 페이스북 활용이 사람, 어울림, 소통이라는 페이스북의 본질에 충실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저는 이 책의 주인공들 덕분에 페이스북 마케팅에 대한 인식을 바로잡을 수 있었고, 그러한 인식을 토대로 이 책을 썼습니다.

13. 그는 방법을 바꾸기로 했습니다. 우선 딱딱한 글에서 벗어나 감성이 물씬 풍기는 사진과 이미지 위주로 콘텐츠를 바꿔 올리기 시작했습니다. 사진에는 매일 달라지는 동강의 풍경, 차의 재료가 되는 야생화, 동강에서 살아가는 가족의 일상을 담았습니다. 소통도 적극적인 자세로 바꿨습니다. 친구의 방문을 기다리기보다 자신이 먼저 친구의 담벼락을 찾아다니며 인사를 건네고 댓글을 남겼습니다.

17. 따지고 보면 그가 전혀 상품 이야기를 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정용화님에게 야생화차는 상품이기 이전에 자연의 향기, 야생의 치유력과 생명력 그 자체이기 때문입니다. 
 그는 야생화가 자라는 동강의 청정함, 병으로 귀향한 젊은이를 소생시킨 동강의 치유력, 야생화로 살아가는 한 가족의 성실함과 소박함을 이야기했습니다. 그리고 그런 이야기가 그가 만드는 꽃차에 청정함, 치유력, 성실함 같은 이미지를 투영했던 겁니다.
 스타벅스가 감성마케팅으로 커피라는 상품의 범주를 문화로 확장했듯이, 그의 스토리텔링은 야생화차를 동강의 자연으로 확장시켰습니다. 그것이 ‘저절로’의 비결입니다. 사람들은 그에게서 동강의 자연을 사고 싶었던 것입니다.

35. 소셜미디어 시대의 상품은 생산자 그 자체

47. 거래는 사람을 보고 하는 것이지, 상품을 보고 하는 것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상품이 아무리 좋아도 친하지 않으면 관심을 갖지 않을 것이라는 얘기 입니다.

49. 개인 프로필에서 감자기 상품을 소개하면 친구들이 당황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뭘 팔지 고민하고, 좋은 상품과 생산자를 찾아 다니고, 상품을 개발하고 만드는 과정을 이야기한 후에 상품을 소개하면 친구들은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됩니다. 그 상품은 그가 페이스북에서 꾸준히 공유했던 일상과 고민의 자연스런 결과물이기 때문입니다.

53. (페이지를 활용해도 좋은 경우와 페이지 활용 방안)
 경우에 따라서는 페이지에 욕심을 내볼 수도 있습니다. 페이지를 그저 상품정보만 모아두는 공간이 아니라 잠재 고객을 모으는 공간으로 활용한다면 말입니다. 다만,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한 가지 전제조건이 충족되어야 합니다. 여러분이 특정 주제와 관련하여 질 높은 콘텐츠를 꾸준히 제공할 수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이 과일 농사를 짓고 있다고 가정해보겠습니다. 여러분에게 과일의 종류, 과일의 효능, 과일로 만들 수 있는 각종 음식과 요리법, 과일로 할 수 있는 미용법과 같은 과일 전문 콘텐츠가 풍부하다면 페이지를 만들어 볼 수 있습니다. 이 경우 프로필보다 더 맣은 잠재고객과 접점을 만들어낼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생산한 과일보다 과일과 관련된 정보에 관심을 가질 사람이 압도적으로 많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전문 미디어를 운영하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55. 소개 내용에 페이지를 만든 이유와 팬이 되면 좋은 이유까지 밝혀주면 좋습니다. 그래야만 페이지를 방문하고 팬이 될 가능성이 높아집니다. 무턱대고 부탁을 남발해서는 안됩니다. 

88. 홈페이지를 온라인 커뮤니티처럼 꾸몄다고 해서 회원이 저절로 늘어난 것은 아닙니다. 다른 이유도 있었습니다. 먼저 운영자인 윤광미님이 매일 꾸준히 글과 사진을 올렸습니다. 회원들이 ‘경빈마마가 오늘은 어떤 이야기를 올렸을까’하는 기대감을 갖고 사이트를 찾아오게 만든 겁니다.

96. (스토리텔링의 기술2 콘텐츠 규칙이 필요하다)
모든 미디어에는 무슨 일이 있어도 지켜야 하는 원칙이 있습니다. ‘마감’입니다. 1인미디어인 페이스북도 마찬가지입니다. 개인계정인 프로필이든, 기업계정인 페이지든 상관없습니다. 페이스북으로 성과를 내기 위해선 꾸준히 규칙적으로 콘텐츠를 올리는 것이 중요합니다. 
마감이라는 개념이 생소하다면 다른 것에 빗대어 각오를 다져도 좋습니다. 이 책의 주인공 장창현님은 페이스북을 ‘농장’이라고 말합니다. 윤광미님은 페이스북을 ‘가게’라고 생각합니다. 농부가 하루도 거르지 않고 농사를 짓고 상인이 매일 아침 가게 문을 여는 것처럼 페이스북 역시 단 하루도 게을리 하지 않겠다는 마음가짐이 필요합니다.

마음가짐이 준비됐다면 콘텐츠 규칙을 정해야 합니다. 콘텐츠 규칙에는 주제, 형식, 빈도, 발행스케줄, 콘텐츠의 출처, 댓글 정책 등이 포함됩니다.

주제는 콘텐츠의 커다란 줄기입니다. 주제를 정할 때는 상품이나 서비스를 홍보하려는 욕심을 버려야 합니다. 정용화님이 야생화꽃차가 아닌 야생화가 피어나는 동강을 큰 줄기로 삼고, 섬농부 박철한님이 고구마가 아닌 고구마밭을 비추는 안면도의 저녁 노을을 핵심 콘텐츠로 삼은 것처럼 여러분은 상품과 서비스를 포괄하는 더 큰 주제를 잡아야 합니다.

106. (입장을 바꾸어 생각한다) 페이스북을 사용해본 사람이라면 문장 하나를 쓰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압니다. 박지영님은 친구의 댓글도 그들이 담벼락에 쓴 글만큼이나 귀하게 여겼습니다.
‘높아지려는 자는 낮아지고, 낮아지려는 자는 높아지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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