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적을 이룬 나라 기쁨을 잃은 나라

저자
다니엘 튜더 지음
출판사
문학동네 | 2013-07-31 출간
카테고리
정치/사회
책소개
불가능의 기적을 이룬 나라 아직도 불가능한 희생을 요구하는 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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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나는 불평만 늘어놓고 아무것도 안 하는 사람이 되고 싶지는 않다. 만약 세상에 뭔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당신이 그것을 만들 힘을 갖고 있다면, 그것을 만들어내는 것은 당신의 임무인 것이다.
 또한 나는 한국을 알리고 싶었다. 특히 영화, 음악, 음식, 그리고 내가 이곳에서 느꼈던 즐거운 느낌을 다른 사람들에게도 알려주고 싶었다. 한국 정부가 그 방면의 일을 아주 잘해왔다고 생각하지는 않기 때문에, 나는 내 나름의 소소한 방식으로 그걸 시도해보고자 했다. 만약 누군가 “당신의 책을 읽고 서울로 가는 비행기표를 끊었습니다”라고 말하는 걸 들을 수 있다면 정말 멋진 일 아니겠는가.

한국이 경쟁에 집착하는 나라라는 것을 지적한 사람은 물론 내가 처음이 아니며, 분명 내가 마지막이 되지도 않을 것이다. 그것은 심지어 이제 다소 상투적인 주제가 되어가고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외부자의 시선’에서 봤을 때 그런 끝없는 경쟁이 얼마나 부자연스럽고 건강하지 않을 수 있는지에 대해, 단 한 사람이라도 공감해주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스스로 ‘성공’이라고 여겨왔던 것의 가치를 한번 되돌아봐줄 사람이 한 명이라도 생긴다면 그 역시 매우 기쁜 일일 것이다.

19. 동성애에 대한 이 책의 내용이 공개적으로 드러난 주류 사회를 반영하지는 않지만, 나는 인간의 역사만큼이나 오래된 무언가에 대해 논의하고 있는 것이라고 말이다. 더군다나 한국에 대해 영어로 글을 쓴 필자 중 그 문제를 거론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 누군가는 그 일을 해야만 하는 시점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동성애를 제대로 다루었는지 확언하기는 힘들지만, 그런 시도를 했다는 데 의의를 두고 싶다.
(…) 몇 분간 소리를 지르고 나서 그분은 내게 다가와, 내가 “완전히 틀렸”으며, 내가 “한국에 대해 더 공부해야” 한다고 말했다(분명 나는 한국에 대해 더 공부해야 하지만, 그런 이유 때문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많은 사람들이 자기가 세상에서 제일 잘 알고, 남들은 바보라고 생각한다. 
이 책에서 내가 사실관계에 대해 오류를 범한 것이 있다면, 나는 기꺼이 사과하고 그에 대한 책임을 지겠다. 하지만 나의 입장과 해석에 대해서라면, 모든 사람에게는 자신의 관점을 가질 권리가 있으며, 나 또한 그렇다는 말을 하고 싶다. 만약 당신이 영국에 와서 책을 쓴다면 나는 당신의 의견을 환영할 것이다. 남의 해석을 가로막는 것만큼 반민주적인 것도 없을 테니까…….

29. 그러나 ‘불가능한 나라’라는 말에는 좀더 부정적인 이유가 있다. 이는 앞으로 자세히 살펴보겠지만, 한국인은 물질적 성공과 안정에도 불구하고 진실된 만족감을 크게 잃어가고 있다. 한국은 교육, 명예, 외모, 직업적 성취에서 스스로를 불가능한 기준에 획일적으로 맞추도록 너무 큰 압박을 가하는 나라인 것이다. 한국의 자살률은 리투아니아에 이어 세계 두번째다. 이 문제는 나아질 기미가 없이 오히려 악화되고 있다. 1989년에서 2009년 사이, 자살률은 다섯 배가량 증가했다. 한국은 정치와 경제 면에서 이룩한 놀라운 성취뿐 아니라, 이룰 수 없는 목표를 요구한다는 점에서도 ‘불가능한’ 나라인 것이다.
 “나는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가장 부강한 나라가 되기를 원하는 것은 아니다. (…) 우리의 부력은 우리의 생활을 풍족히 할 만하면 족하다”라고, 독립투사 백범 김구는 말했다. 대신 그는 한국이 자국민과 외국인에게 행복을 주는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라”가 되기를 바랐다. 만약 김구가 살아 있었더라면 그는 지금 한국의 모습에 조금 실망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설령 김구라 해도, 이 불가능한 나라가 먼 길을 걸어왔다는 사실만은 수긍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180. 강남은 오늘날 한국의 과잉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곳이다. 강남은 영어 공부의 중심지일 뿐 아니라 경쟁의 장이며, 과시적 소비의 현장이기도 하다. 청담동이나 압구정동 같은 강남 일부 지역에서는 여성들이 당연하다는 듯이 2백만 원도 넘는 핸드백을 들고 다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강남 학생들은 SKY나 미국 아이비리그에 들어가야 한다는 기대를 짊어지게 되며, 여기에 실패할 경우 본인과 부모는 모두 깊은 실망감에 빠져든다. 단적으로 말해, 강남은 서울 인구 중 5.5퍼센트만이 살지만 전체 성형외과의 70퍼센트가 밀집한 지역이다.

195. 이미 백 권 넘는 책을 출간한 시의 대가 고은은, 자신이 독보적인 작품들을 내놓을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로 흥을 꼽는다. 그에게 시란 축제와도 같다. (…) 고은은 자신의 작업이 일이라기 보다는 차라리 유희에 더 가깝고, 이제 칠순을 넘어 팔순을 바라보고 있지만 멈출 생각이 전혀 없다고 말했다.



최재천 스타일

저자
최재천 지음
출판사
명진출판사 | 2012-07-12 출간
카테고리
인문
책소개
알며 사랑하며 공감하는 지적생활인 최재천의 특별한 삶의 비결!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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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적생활인의 공감

공감이란 알며 사랑하는 것이다.
나는 애정 담은 관찰로 동물과 공감하고
의미 담긴 책으로 사람과 공감한다.

내가 끊임없이 책을 읽고 
사람들에게 책 이야기를 즐겨 하는 이유는
그것이 세상과 대화하는 가장 매력적인 
방법이기 때문이다.
모두가 공감으로 진화하는 세상,
책 읽기와 글쓰기는 내 삶의 스타일이다.

23. 나는 학생들에게 방황하되 방탕하지 말며, 방황하면서도 자신이 뭘 하면 좋을까 찾고 뒤져보고 읽어보는 ‘아름다운 방황’을 하라고 권한다. 그리고 이렇게 말한다. ‘남이 가라는 길로 가지 말고 스스로 길을 찾아라. 그러다가 자기만의 길이 보이면 달려가라.’

25. 과학자 하면 대부분이 떠올리는 흰 가운을 입고 복잡한 기계를 만지는 사람이라는 고정관념을 깨기 위해서 마음먹고 하는 사뭇 계산된 행동이다. 과학은 우리가 만들어놓은 건물 안 실험실뿐 아니라 저 자연이 마련해놓은 야외 실험실에서도 활발하게 벌어진다.

28. "Consilience는 한마디로 ‘지식의 통일성’을 의미한다. 이것은 옛날 어느 교수가 과학과 그 방법론에 관하여 가졌던 철학을 한마디로 표현한 말이다. 그는 자기 동료들이 과학을 이용하여 모든 것을 지극히 작은 단위로 쪼개는 데 여념이 없어 전체를 보지 못하게 되는 것을 걱정했다. 그는 이 세상 모든 것은 다른 것과 조화를 이루며 통합되어 있으며 문맥을 고려하지 않은 채 그들을 분리하면 그들만의 고유한 존재 이유가 손상될 수밖에 없다고 설명했다. 그는 과학자들에게 이 같은 관점을 잃지 말라고 호소했다. 그래야 모든 과학이 개념적으로 통합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는 상당히 무거운 주제이긴 하지만 와인에는 더할 수 없이 어울리는 말이며 우리 네 사람의 뜻을 완벽하게 표현하는 단어다. 와인은 바로 우주와 인간의 통일을 의미하며 와인을 만드는 사람은 이를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 

30. 춤, 가슴 깊이 숨겨놓은 스무 살의 댄스 본능. 
망설이지 말고 즐겨라.

34. 음악이란 과연 무엇인가? 우리의 가슴에 크고 작은 감동의 파장을 일으키고 일상을 초월하는 경험을 하게 하며 때로는 황홀경에 빠져 가상의 시간을 넘나들게 하는 소리의 현상인 음악은 과연 어떤 존재인가? 훌륭한 음악이란 정말 어떤 음악을 말하는 것인가? 음악이 우리의 품성을 함양할 수 있는가? 음악은 정말 우리의 지적 능력을 높여주는가? 음악은 우리 삶에 어떤 의미가 있는가?

42. ‘모르는 게 약’인 시절은 지났다. 당연히 아는 것이 힘이다. 그리고 내가 늘 떠들고 다니는 말이지만, 알아야 할 수 있다.

47. <다이고로야 고마워>에서 기형 원숭이의 삶에 대해 많이 알게 되며 점점 더 깊은 사랑에 빠져버린 오타니 가족을 보며 나는 다시 한 번 다짐했다. 인간을 비롯한 이 세상 모든 생명에 대한 앎의 추구를 게을리 하지 않겠노라고.

51. 이 드넓은 우주 속에서 우리가 사는 지구는 그저 먼지처럼 작은 존재라고 한다. 그러나 이곳은 아직 그 어느 별에서도 발견되지 않은 ‘생명’이 화려하게 꽃을 피운 참으로 귀한 행성이다. 태초의 바닷속에서 우연히 탄생한 생명은 지금 이 순간에도 모든 생명체의 몸 안에서 살아 숨 쉬고 있다.

(…) 상대가 누구든 그들에 대해 더 많이 알면 알수록 저절로 사랑할 수밖에 없는 게 우리네 심정이기 때문이다.

95. 학문의 역사를 통틀어 다윈의 이론만큼 많은 공격을 받은 이론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150년의 혹독한 담금질 덕택에 이제 다윈의 이론은 가장 막강한 이론 중의 하나로 인정받고 있다. 가장 최근에 실시한 설문 조사에 의하면 이제 영국인들은 자국을 대표하는 지성으로 뉴턴이 아니라 다윈을 꼽는다고 한다.

112. 식물이 가진 고민은 꽃가루를 어떻게 다른 꽃으로 전달할 것인가에 그치지 않는다. 천신만고 끝에 꽃가루를 다른 꽃에 잘 전달하여 씨를 맺고 나면, 이번엔 그 씨들을 어떻게 더 안전한 곳에 안주시키는가가 문제이다. 귀한 자식일수록 멀리 보내라 했던가. 부모 곁은 결코 좋은 자리가 못 된다. 부모의 발밑에 떨어진 씨앗은 부모의 그늘에 가려 제대로 자라지 못한다. 부모 역시 자식이 바로 코밑에 있으면 어쩔 수 없이 경쟁해야 한다. 이 무슨 애꿎은 운명의 장난이란 말인가. 그래서 식물들은 자식을 떠나보내는 방법을 여러 가지로 개발했다.

113. 어떤 식물의 씨앗은 동물의 장을 통과하며 강한 산성 물질에 씻기지 않으면 발아조차 하지 않는 것도 있다. 그런데 씨앗이 산성 물질 속에서 지나치게 오래 있어서 좋을 리가 없기에 어떤 식물은 열매 속에 설사약을 슬쩍 섞기도 한다. 
 하지만 식물과 동물의 공진화가 늘 상호 협조적으로 일어나는 것은 아니다. 식물은 항상 다른 많은 동물, 그중에서도 특히 곤충들에게 먹히지 않으려고 온갖 방어 무기를 개발했다. 몸을 단단하게 만들어 곤충이 잘 씹지 못하게 하는 것은 온갖 화확 물질로 중무장하여 그들의 공격을 퇴치한다. 고추나 마늘을 비롯한 각종 양념은 다 식물이 동물을 상대로 개발한 생화학 무기이다. 이른바 이차대사물질이라고 부르는 이 화학 물질은 식물의 성장에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식물들도 어쩔 수 없이 적지 않은 예산을 국방비로 배정할 수밖에 없었던 것 같다. 페니실린도 곰팡이가 세균을 상대로 만들어놓은 생화학 무기를 우리 인간이 빌려 쓰는 것이다.

114. 동물을 겨냥한 식물의 이런 전략들이 인간과 마주치면 그 규모나 영향력이 상상을 초월하는 수준으로 승화한다. 불과 1만 년 전만 해도 저 들판 한구석에서 말없이 피고 지던 잡초들이었던 벼, 밀, 보리 등이 오늘날 이 지구에서 가장 막강한 식물들이 된 배경이 무엇인가? 오로지 우리 인간의 눈에 들었기 때문이 아니던가. 사과, 튤립, 그리고 마리화나도 마찬가지다. 감자는 이제 우리의 두뇌까지 이용하여 스스로 유전자마저 갈아치운다. 몬산토의 생명과학자들이 개발한 유전적으로 전혀 새로운 감자들이 또다시 이 지구를 점령하기 시작했다. ‘움직이지도 못하는’ 식물이 움직이는 동물을 조종하고 있다. 인간도 그 손아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아마도 랠프 왈도 에머슨은 심지어 잡초를 가리켜 ‘아직 그 능력이 제대로 평가되지 않은 식물’이라 했던 모양이다.

193. 책 <텔링 라이즈>는 거짓말이 인간 행동의 근본적인 유형 중의 하나라는 전제를 깔고 있다. 인간을 비롯한 동물의 의사소통 메커니즘을 연구하는 학자들은 오랫동안 의사소통이란 ‘서로에게 유리한’ 느낌. 생각 따위의 정보를 주고받는 행위라고 생각했다. 이 같은 관점은 1980년대로 접어들며 일군의 행동생태학자들에 의해 확실하게 뒤집힌다. 의사소통은 서로에게 이익이 되는 관계가 아니라 본질적으로 자기에게 유리하도록 상대를 조종하는 행위라는 게 이들이 내놓은 새로운 관점이었다. 신호를 보내는 쪽이 뭔가 얻을 게 있기 때문에 그런 행위를 시도한다고 보는 것이 훨씬 타당하다는 설명이다. 현대 동물행동학은 이제 철저하게 이러한 관점에서 동물들의 의사소통 행동을 연구하고 있다. 

197. 소통이 성숙한 학문을 만든다. 
관점이 다르다고 해서 소통 자체를 거부하는 것은 지식인이 취할 태도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204. 지금까지 늘 그래 왔듯이 DNA는 어떤 방법으로든 계속 자기복제의 길을 걸을 것이다. DNA가 이룩한 가장 괄목할 만한 성과 중 하나가 인간의 두뇌를 만들어낸 일이다.
(…) 그 뇌가 이제는 섹스 없이도 유전자를 다량으로 복제할 수 있는 기술을 개발한 것이다. DNA는 지금 그토록 오랫동안 이루고자 했던 꿈이 기대 이상으로 아름답게 펼쳐지고 있는 걸 바라보며 미소를 짓고 있을 것이다.

207. 복제인간이란 사실 출산 시간이 좀 많이 벌어진 쌍둥이에 불과하다. 몇 초 간격으로 태어난 쌍둥이 형제들의 경우처럼 복제 기술로 태어난 내 늦둥이 쌍둥이 동생도 나와는 다른 인간으로 성장한다. 몸은 복제할 수 있지만 영혼은 복제되지 않는다.

222. ‘아름답다’라는 말이 원래 ‘안다’라는 말에서 파생되어 나왔다는 사실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이겠는가. 알아야 아름다움도 느낄 수 있는 법이다.

249. 인류 역사에서 볼 때 사실 남성시대는 오래된 것이 아니다. 인류가 시작되고 25만 년 동안 남성시대를 꼽아보면 1만 년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수렵/채집 시대에도 남성들은 힘을 쓰기 위해 밖으로 나갔겠지만, 사냥은 근육 사용과 비교할 때 효율성이 떨어졌다. 대부분 허탕 치고 집에 돌아와 여자가 차려주는 저녁 밥상을 받으면 어디 큰소리나 칠 수 있었을까. 노동 집약적인 농경 사회가 되면서 부를 축적하고 곳간을 채우면서 비로소 남성의 위치를 확보하게 된 것이다. 나머지 24만 년은 평등하거나 오히려 밥상 권력을 쥔 여성의 눈치를 보고 살았을 것이다. 
 그리고 오늘날 다시 근육의 힘으로 돈을 벌지 않는 시대로 돌아왔다.

250. 시대의 변화에 맞춰 ‘남성성’의 개념에 대해 다시 생각해야 한다.
 남자다운 것이 도대체 뭘까. 남자아이는 남자답게 키워야 한다? 우리는 그동안 지나치게 ‘남자다워야 한다.’라는 강박에 시달려왔다. 여성성이 필요한 시대에 남성이 여성화되면 오히려 사회에 도움이 돼쓰면 됐지 손해될 것은 없다. 전쟁으로 국가를 점령해야 하는 것도 아닌데 스파르타식으로 굳이 남성성을 유지해야 할 필요가 있을까. 이젠 오히려 남성의 여성성이 사회를 원활하게 굴러가게 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257. 아트 마크먼은 요즘 스마트해 보이는 사람들이 흔히 하고 있는 다중작업multi-tasking일랑 컴퓨터에게 맡기고 우리는 새로운 정보를 습득하는 일에 매진해야 한다고 말한다.
 스마트 시대를 위한 일종의 ‘마음 사용 설명서’인 이 책에서 저자가 제시하는 지침을 간단히 정리하면 결국 두 가지이다. 첫째, 고품질의 지식을 습득하고 필요할 때 그걸 쓸 줄 알아야 한다. 둘째, 그러기 위해 훌륭한 습관을 길러야 한다. 인터넷에 널려 있는 값싼 정보들 말고 진짜 유용한 지식을 얻는 일을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한다는 지적은 우리 사회에 특별히 값진 가르침이라고 생각한다. 인터넷 강국이라고 우쭐대지만 정작 남들이 만들어낸 정보를 신속하게 뒤지며 즐기는 일만 잘하는 게 우리의 참모습이 아닌가?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라는 말은 널려 있는 구슬을 꿸 줄 알아야 한다고 가르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일단 구슬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지금 남의 구슬을 돈 주며 가져다가 열심히 꿰기만 하고 있다. 너도나도 열심히 인터넷 서핑에만 정신 팔린 이 시점에 진실한 연구와 공부를 하라는 지침이 더 할수 없이 싱그럽다.



사랑과 연애의 달인 호모 에로스

저자
고미숙 지음
출판사
북드라망 | 2012-08-31 출간
카테고리
인문
책소개
사랑과 연애에 대한 인문학적 접근으로, 많은 공감을 불러일으켰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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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그런데 이 복수혈전의 멜로적 공식구에는 치명적인 함정이 하나 있다. 복수의 씨앗인 그 사랑과 헌신이 자신이 ‘원해서’ 한 짓이라는 사실, 누가 시켜서, 혹은 누가 강요해서 한 짓이 아니란 사실이 결락되어 있다는 점이다. 아무리 심한(?) 배신을 당했다 할지라도 애초 모든 사건이 자신으로부터 비롯했음을 망각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자신이 원인이 될 때, 사랑은 그 자체로 축복이다. 열심히 사랑한 다음, 그 대가로 천국에 가는 게 아니라, 사랑하는 행위 자체가 천국인 것. 거기에는 배신과 복수 따위가 들어설 자리가 없다. 따라서 복수혈전이 펼쳐진다는 건 그 사랑의 원인이 내가 아니라, 상대로부터 비롯되었음을 전제하고 있는 셈이다. 나는 별로 원하지 않았는데 상대의 유혹에 의해 엮인 것이라고 하는. 그리고 역시 상대한테 속아서 억지로 희생과 헌신을 강요당했다고 하는. 요컨대, 원인이 모조리 상대에게 있는 것이다.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그 사랑은 보상과 대가가 필요하다. 내가 해준 만큼, 아니 그 이상으로 보답을 받아야 한다. 희생과 복수의 공식구가 등장하는 건 바로 이 대목이다. 그런데 만약 그렇게 모든 원인이 상대한테 있다면, 그걸 사랑이라고 이름할 수 있을까? 그건 사랑이라기보다 노동이나 거래라고 해야 맞지 않을까. 그런 점에서 우리시대 멜로드라마에는 사랑이 없다!

이렇듯, 사람들은 사랑을 언제나 대상의 문제로 환원한다. 한마디로 대상만 잘 고르면 만사형통이라 여기는 것이다. 사랑에 실패한 건 대상을 잘못 골랐기 때문이고, 아직까지 사랑을 제대로 못해 본 건 ‘이상형’이 나타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식으로. 참으로 신기한 인과론이다. 모든 것이 다 갖춰져 있는 판에 나는 몸만 쏙! 들어가면 되는가? 실패한 다음엔 다시 몸만 쏙! 빠져나와 복수극을 펼치면 되고? 이렇게 지독한 이기주의가 또 있을까? 상대를 잘못 만나 인생을 망쳤다면, 그런 상대를 선택한 ‘나’라는 조재는 대체 뭔가?
 상식적인 말이지만, 사랑 따로 대상 따로 나 따로가 아니라, 나와 사랑과 대상이 하나로 어우러질 때 사랑이라는 사건이 발생한다. 각자 따로 존재하다 서로 플러스된다면, 그건 사랑이 아니다. 작업이거나 게임이지. 그러므로 작업이나 게임이 아닌 제대로 된 사랑을 꿈꾼다면, 반드시 환기해야 한다. 사랑과 대상과 나 사이는 결코 분리될 수 없다는 것, 나아가 사랑하는 대상, 그것은 바로 ‘나’자신이라는 것을. 

테제 2: “실연은 행운이다!”

자본의 코드, 상품의 고스로부터 탈주해야 비로소 운명적 사랑을 만날 수 있다.
 내 욕망을 자본의 프레임에 구겨 넣으려는 상대와는 가차 없이 결별해야 한다. (…) 죽기 위해 사랑을 하는 인간은 없다. 살기 위해, 더 충만하게 살기 위해 하는 것이다. 그럼, 산다는 건 뭔가? 존재의 자유와 해방을 향한 여정이다. 이 여정을 가로막는 상대라면, 그 대가로 주어지는 것은 성적 쾌락과 소비의 충만함일 터, 그건 ‘죽음충동’에 다름 아니다. (…) 그러므로 연애와 존재가 충돌하면 당연히 존재를 택해야 한다. 

16. 인생 또한 끊임없이 변곡점을 통과해야 한다. 한 번 변곡점을 통과할 때마다 인생은 전혀 다른 길로 접어들게 되어 있다. 그때 케케묵은 인연에 발목이 잡힌다면 참으로 난감한 일이다. 그러니 그 이전에 나를 버리고 떠나 준다면 그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그리고 또하나. 차는 것과 차이는 건 동일한 사건이다. +-방향만 다를 뿐, 일종의 어긋남을 겪어야 한다는 점에선 다를 게 없다. 단지 역할만 다른 셈이다. 그리고 결별의 진짜 이유는 아무도 알지 못한다. 사랑할 때 아무 이유가 없었듯이, 헤어질 때 역시 마찬가지다. 멜로드라마에서처럼 선악과 시비, 인과가 그렇게 선명하게 갈라지는 경우는 거의 없다. 굳이 원인을 찾는다면, 시절인연이 어긋난 탓이라고 밖에는. 봄이 가면 여름이 오고, 여름이 지나면 가을이 오듯이 말이다. 사랑도, 삶도 마찬가지다. 시절인연이 바뀌면 서로 헤어져야 한다. 심하게 말하면 어떤 사건들 때문에 헤어진다기보다 헤어질 때가 되어서 그런 사건들이 일어난다고 하는 게 더 정확하다.

테제 3: “에로스는 쿵푸다!”

사랑은 몸의 화학적 변이를 수반한다. 사랑에 빠진다는 건 신체가 전혀 다른 화학적 조성을 갖게 된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 화학적 변이를 동력 삼아서 존재는 전혀 다른 궤도 속으로 들어가게 된다. 만약 그런 변이와 전이를 체험하지 못했다면, 아직 사랑하지 않은 것이다! 그건 사랑이 아니라, 쾌락이요 소유의 환락일 뿐이다. 사랑이 이 쾌락의 함정에 빠지지 않으려면? 방법은 오직 하나! 공부를 해야 한다. ‘사랑도 공부를 해야 하나?’가 아니라, 사랑이야말로 공부가 필요하다.
 앎의 크기가 내 존재의 크기를 결정한다. 그러므로 앎의 열정이 없는 존재가 운명적 사랑을 한다는 건 우주적 이치상 불가능하다. 주류적 척도로부터 벗어나 자유의 새로운 공간을 확보하고자 하는 열정, 자본과 권력의 외부를 향해 과감하게 발을 내디딜 수 있는 내공. 공부는 무엇보다 이 열정과 내공을 쌓아 가는 과정이다. 이런 공부는 머리가 아니라 몸으로 해야 한다. 그래서 쿵푸다. 쿵푸를 해야 사랑이 도래하고 그때 사랑은 스쳐 지나가는 바람이 아니라 ‘운명을 건 도약’이 된다.

18. ‘모든 관계는 훈련의 한 형태이며 모든 관계는 움직임입니다. 정지되어 있는 관계는 없습니다. 모든 관계가 저마다 새로운 배움을 필요로 합니다. 설사 결혼한 지 40년이나 되었고, 부부간에 늘 편안하고 늘 한결같고 품위 있는 관계를 이루어 놓았다 해도 그 관계가 이미 하나의 패턴으로 자리 잡는 순간 더 이상 배우지 못합니다.'
ㅡ 배움과 지식에 대하여, 크리슈나무르티

그에 따르면, 사람들은 아주 오래된 이미지, 상징, 관념 같은 것들에 의존하여 서로 관계를 맺는다. 그리고 그걸 사랑이요 배려라고 착각한다. 하지만, “그것은 아무런 생기도 없고 아무런 생명력도 없고 열정도 없이, 죽은 것, 정체된 관계를 만들” 따름이다. 그러므로 그는 단언한다. “오직 배우는 마음만이 열정이 넘칩니다.”
 덧붙이면, 사랑은 절대 사적인 것이 아니다. 흔히 평생 가슴속에 은밀히 담아 두는 것이라 생각하지만, 그거야말로 무지의 소치다. 사랑을 야기하고 실천하는 욕망 자체가 사회적 배치의 산물이자 우주적 본능의 발현인데, 어찌 그럴 수 있단 말인가. 그렇게 협소한 영역에 가둬 두는 한 절대 상처와 연민, 동정 등의 미망에서 헤어날 수 없다. 상처로부터 떠나고 싶다면, 동정과 연민의 늪에서 벗어나고 싶다면, 마땅히 공공연히 배우고 익혀야 한다. 사랑 혹은 에로스적 본능이란 단지 둘 사이의 문제가 아니라, 존재가 외부와 맺는 모든 관계를 포함한다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

23. “무서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붓다의 유명한 가르침이다. 그 무엇에도 기대지 말고, 혼자의 힘으로 가라는 뜻이다. 왜? 우리 자신이 바로 붓다니까. 따라서 깨달음의 여정에는 어떤 우상도, 의지처도 용납되지 않는다. 중생을 구제하는 자비와 지혜도 그때 비로소 가능하다. 혼자 갈 수 있어야 무리와 접속할 수 있다는 이 도저한 역설! 만약 이 가르침을 사랑의 기술로 활용한다면? 사랑을 꿈꾸는 자 또한 그러하다.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야 한다. 홀로 갈 수 없다면, 절대 타자를 사랑할 수 없다. 그때 사랑이란 의존과 예속의 다른 이름일 뿐이다. 그리고 혼자 갈 수 있으려면 무엇보다 가벼워야 한다. 무거운 자들은 길을 나설 수도, 떠날 수도 없기 때문이다. 가장 먼저 사랑에 관한 망상과 싸워야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망상은 무겁다. 갖가지 오만과 편견으로 존재를 한없이 무겁게 얽어맨다. 그 그물망을 벗어던져야만 비로소 떠날 수 있다. 요컨대, 홀로 가기 위해선 먼저 가벼워져야 한다. 다시 붓다의 말을 빌리면, “오직 날개의 무게로만 가는 새처럼 가라!”

35. 수없이 우리를 불행에 빠뜨리고 있음에도 절대 그에 대해 질문을 던지지 않는다. 다시 말해, 그 이상을, 그 외부를 사유하려 하지 않는다. 우리의 존재와 생을 잠식하는 오만과 편견들! 오만과 편견은 나란히 간다. 오만하기 때문에 편견에 휩싸이고, 그 편견이 또다른 오만을 부른다. 이 오만과 편견이야말로 우리를 미망에서 헤어나지 못하게 만드는 중력장이다.
 그러므로 호모 에로스가 되기 위해 가장 먼저 터득해야 할 제 1초식은? 오만과 편견으로 가득 찬 망상기제를 낱낱이 파악할 것!

40. 박태원의 <소설가 구보씨의 하루>에 나오는 그 구보다. 1930년대에 출현한 유형이다. 자기만의 글쓰기 안에 갇혀 연애는 커녕 여자랑 수작하는 것조차 힘들어하는 ‘자의식의 화신’이다. 그의 연애는 썰렁하기 이를 데 없다. 그렇다고 순진한 건 절대 아니다. 생각은 억수로 많다. 하지만, 그 생각이란 게 상대 여성에 대한 감정이 아니라, 오직 감정에 대한 분석뿐이다. 구체적인 행동이라곤 ‘곁눈질’ 말곤 거의 없다. 근데, 마치 무슨 대단한 연애경험이나 한듯 주절주절 늘어놓고 있다. 즉, 행위로서의 연애는 없고, 연애에 대한 담론(썰)만이 난무하고 있다. 자의식의 줄에 꽁꽁 묶인 도시인의 전형. 이 또한 우리에게 너무나 익숙한 캐릭터다. 
일본 근대 문학의 거장 나쓰메 소세키는 이 자의식에 대해 이렇게 진단한 바 있다. “자의식이라는 것은, 문명이 진보함에 따라 점점 더 예민해지는 것이기 때문에 나중에는 일거수일투족도 자연스럽게 할 수 없게 되지. …… 앉으나 서나 ‘나’, 자나 깨나 ‘나’가 항상 따라다니기 때문에 인간의 언행이나 행위가 공산품처럼 자질구레해지고, 저절로 옹색해지고, 세상이 괴로워질 뿐이어서 아침부터 밤까지 마치 맞선 보는 젊은 남녀처럼 잔뜩 긴장한 상태로 지내지 않으면 안 되는 거거든. …… 사시사철 두리번두리번 살금살금하면서, 무덤에 들어가기 직전까지 잠시도 안심할 수 없는 게 현대인이 안고 있는 마음의 병이야. 문명의 저주인 거지.” <나는 고양이로소이다.>

그의 말대로 이 자의식은 문명의 저주다. 타자와의 소통을 가로막는 장벽이기 때문이다. 신경쇠약과 우울증 및 각종 질병의 원인이기도 하다. (…) 봉구와 구보씨. 열렬히 타오르거나 썰렁하게 가라앉거나. 이 두 유형이 근대 초기에 구축된 가장 보편적인 이분법이다.

42. 냉소의 벡터는 그 반대다. 자기 안에 웅크리고 있으면서 절대 일정한 선 이상을 허용하지 않는다. 선을 넘는 순간, 바로 밀쳐 낸다. 그 경계선을 어떻게 아냐고? 그러니 그거 계산하느라 머리가 깨진다. 겉으로야 지적이고 냉철한 듯 보이지만, 그런 건 지성이 아니라, 잔머리다. 그리고그렇게 머리를 굴려 대는 이유는 지극히 간단하다. 자의식을 침범당하는 게 두려워서다. 자신을 온전히 내보이는 게 겁이 나서다. 그렇다고 내면에 대단한 무엇이 있느냐? 하면 그것도 아니다. 그래서 더 완강하다. 그 두려움의 표현형식이 바로 냉소다.

44. 충동과 열정은 전혀 다른 개념이다. 충동이란 무엇인가? 내가 통제할 수 없는, 그래서 늘 중독적 상태로 치닫는 힘이다. 나에게 엄청난 쾌락을 주긴 하지만, 그 원인은 늘 외부에 있다. 그러므로 강도가 높아지면 높아질수록 나는 노예적으로 끄달리게 된다. 따라서 필연적으로 죽음충동과 마주칠 수밖에 없다. 알코올과 마약, 게임, 도박 같은 걸 떠올리면 된다. 열정은 정확히 그 반대의 벡터를 지닌다. 즉, 아무리 뜨겁게 솟구친다 해도 삶의 의지와 연동되어 있다. 그러므로 절대 중독되지 않는다. 충동이 존재 전체를 불안으로 요동치게 한다면, 열정은 ‘유래 없는 평온’을 선사한다. 수백 도의 열속에서 도자기가 단단히 구워지는 것과 같은 이치다.
 에리히 프롬에 따르면, 대개의 연인들은 “사랑을 ‘하게 되는’ 최초의 경험과 사랑하고 ‘있는’ 지속적 상태” 혹은 “사랑에 ‘머물러’ 있는 상태”를 혼동한다. 그래서 “강렬한 열중, 곧 서로 ‘미쳐 버리는’ 것을 열정적인 사랑의 증거로 생각하지만, 이것은 기껏해야 그들이 서로 만나기 전에 얼마나 외로웠는가를 입증할 뿐이다.” 물론 초기의 격정엔 충동과 열정이 섞여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이 둘 사이의 균형추가 어디로 기우느냐에 따라 사랑의 행로가 결정된다. 분명한 건 충동이 잦아들어야만 열정이 순연히 타오를 수 잇다는 점. 그렇지 못할 경우, 둘 중 하나의 코스를 밟는다. 순식간에 냉각되거나 아니면 중독되거나. 쿨하거나 미치거나! 결국 순정과 냉소가 한통속이었듯, 선수와 스토커 역시 한끝 차이인 셈이다.

47. 사랑과 섹스 사이엔 만리장성이 가로놓여 있다. 대체 왜? 성욕이 개입할수록 사랑은 타락해 버린다는 전제 때문이다.

50. 사랑이 둘만의 역학적 배치를 만들어 내는 건 맞다. 또 열정의 차이에 따라 권력관계가 형성되는 것도 맞다. 헌데, 가장 중요한 건 시절인연이다. 말하자면, 대상이 누구냐보다 언제 어디서 만났느냐가 더 결정적이다. 즉, 어떤 특별한 ‘시공간적 배치’ 속에서 사랑이라는 특별한 감정이 생기고 관계가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따라서 만약 그 관계에 균열이 일어났다면, 즉 누군가 먼저 결별을 선언하게 되었다면, 그것은 일단 둘의 인생행로에 커다란 ‘시공간적 격차’가 생겼다는 걸 의미한다. 그리고 그 점에선 가해자, 피해자가 있을 수 없다. 둘 다 그 간극만큼의 번뇌를 감당해야 하는 까닭이다. 소위 ‘차는 쪽’도 그 어긋남이 가져오는 번뇌에서 절대 자유로울 수 없다. 그 역시 감정의 온전한 교감에 있어 실패한 건 마찬가지니까. 그리고 그 또한 자신의 감정과 행위가 그런 식의 굴절을 겪는 것에 대해 충분히 통찰할 능력이 없다. 그것을 일러 무명 혹은 무능력이라 이른다. 어리석음과 무능력은 폭력과 짝한다. 상대에게 치명적인 상처를 입히는 건 바로 그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은 자신에게도 고스란히 적용된다. 왜냐면, 폭력은 그만큼의 반작용을 불러오기 때문이다. 작용과 반작용의 법칙! 따라서 그때 당시가 아니라면 이후에라도 반드시 대가를 치르게 되어 있다. 여기엔 어떤 예외도 없다. 
 만약 그런 경우가 아니라, 상대방이 비열한 사기꾼이거나 변덕스런 바람둥이였다면, 상대를 비난하고 복수의 칼을 갈기 이전에 그런 상대한테 꽂힌 자기 자신에 대해 더 심각하게 질문을 던져야 한다. 대체 나의 어떤 성향이 그런 대상을 욕망하도록 유도했는지, 그런 식의 시절인연이 인생 전체의 리듬에서 어떤 의미가 있는지 등등. 이 과정을 통과하지 않으면 이후에도 반드시 동일한 상황을 반복하게 마련이다. 자신을 망가뜨리는 상대한테만 끌리는 경우는 참으로 흔하다. 이걸 단지 상대의 도덕성의 문제로만 환원할 수 있을까? 요컨대, 어떤 경우건 만남과 헤어짐이라는 사건에는 두 사람의 성향 및 행로를 포함하여 시공간적 흐름이 깊이 관여하고 있다.

52. 사랑과 우정의 차이. 차이가 대체 뭐지? 배타적 소유가 바로 그것이다. 사랑은 존재를 ‘통째로’차지하는 것인 데 반해, 우정은 그런 식의 독점을 지향하지 않는다는 것. 그래서 결국은 ‘모 아니면 도’식으로 승부를 걸게 된다. 
 그렇게 되면 결국 모든 연애는 ‘차거나 차이거나’하는 양분법적 굴레를 벗어나기 어렵다.
(…) 사랑이 정말 소중하다면, 또 진실로 누군가를 사랑한다면, 그 사랑이 어떤 조건하에서 어긋나게 될 경우, 우정을 통해 그 열망을 지속시키려는 생각은 왜 하지 않는가? 아니, 그 이전에 사랑과 우정 사이를 가르는 이 지독한 이분법이 삶의 행복이라는 측면에서 볼 때 과연 유용한 전략인가?

57. ‘반쪽’은 없다.
자신에게 딱맞는 반쪽이란 있을 수가 없다. 그건 마치 비틀거리며 걷는 사람끼리 나랑 반대로 비틀거리는 인간을 찾는 것과 같다. (…) 중요한 건 반쪽을 향한 무한도전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 함께 걸어갈 수 있는 짝을 찾는 일이다.
 그래서 시절인연이 아주 중요하다. 시절인연이란 서로 다른 길을 가던 두 사람이 어떤 강한 촉발에 의해 공통의 리듬을 구성하게된 특정한 시간대를 뜻한다. 일종의 매트릭스 같은 것이다. 사랑은 대상이 아니라, 나 자신의 문제다. 어떤 대상을 만나느냐가 아니라, 내 안에 잠재하고 있던 욕망이 표면으로 솟구칠 때 사랑이라는 사건이 일어난다. 그런데, 이 욕망이 솟아오르려면 시절을 타야 한다. 시절을 타게 되면 아주 작은 촉발만으로도 사랑에 빠지게 된다. 봄이 오면 겨우내 잠자고 있던 씨앗들이 순식간에 땅을 뚫고 나오는 것과 같은 이치다. 서로 눈이 맞는다는 건 상대방 역시 같은 흐름을 탔다는 의미다.

75. 유치할수록 진실하다는 편견이다. 남들에게 절대 보여 줄 수 없는 치졸함, 인간적 나약함, 어리광 따위를 주고받는 것을 연애라고 간주하는 것이다. 이런 식이니, 사랑에 관한 한 성숙해진다는 관념이 들어설 여지가 없다. 10대의 풋사랑이건 중년의 일탈이건 로맨스 그레이건 수준이 다 똑같다. 사랑이 지배와 예속관계를 반복하는 것도 이런 구조와 무관하지 않다. 

126. 동안이 아니어도 언제나 젊음을 구가하는 길이 있다. 어슬프게 청년들을 모방하는 것이 아니라, 삶 자체를 싱싱하게 만들면 된다. “젊음이란 20대 청년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자기 연령에 걸맞는 청춘을 매번 새롭게 ‘창조하는’ 것이다.” 들뢰즈의 말이다.

마음이 성욕과 야망과 투쟁과 적대감과 온갖 욕망의 전쟁을 치르고 나서, 자신 속으로 돌아가 자신과 산다는 것이 얼마나 대단한 일인가! 그리고 마음이 연구와 학문에서 영양분을 섭취할 수 있다면, 노년보다 더 즐거운 것은 아무것도 없을 것이네. <노년에 관하여> 키케로

“키케로가 말하는 노년이란 더 이상 젊음의 열정을 탐하지 않기에 자유로운 시기요, 헛된 쾌락에서 벗어나 철학에 전념할 수 있는 새로운 호기다. 나이가 들수록 무능력하거나 탐욕스러워진다면, 그건 늙음 때문이 아니라 개인의 어리석음과 집착 때문이다. 학문을 닦고 미덕을 실천하며 집착과 미망을 놓아 버리는 법을 훈련하는 이들에게는 늙어 감이야말로 지복이다.” <고전에서 길찾기> 채운

141. “괴물과 싸우는 자는 자신이 그 괴물이 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니체)는 말이 있다. 치열하게 싸우되 적대와 증오에 머무르지 말고 삶의 창조를 향해 나아가라는 뜻이다. 이질성의 범람 속에서 아주 낯선 타자들과 조우하는 것, 그리고 자본과 상품에 의해 박탈당한 사랑의 능력을 되찾는 것, 이것이야말로 이 거대한 저항을 승리로 이끄는 길이자 광장의 진정한 ‘용법’이 아닐까.

159. “네 안에 너를 멸망시킬 태풍이 있는가?”
인연의 형성 자체가 자신의 몸이 불러오는 것임을 환기할 필요가 있다. 뇌파에서 일어나는 헛된 망상, 상체의 허열이 가져오는 변덕과 동요, 이런 것을 넘어 자신의 몸 깊숙한 곳, 이른바 배꼽 아래 ‘하단전’에서 열정이 솟구쳐야만 비로소 사랑이라는 사건 속으로 진입하게 된다. 그 순간 존재는 엄청난 변이를 경험하게 된다. 그 열기는 자아를 송두리째 뒤엎을 정도로 강력하다.
 니체는 말했다. “네 안에 너를 멸망시킬 태풍이 있는가?” 나를 멸망시킨다는 건 바로 지금까지의 나, 자아 혹은 자의식의 성채를 무너뜨리는 힘의 노래를 의미한다.

누구나 일생에 한두 번은 이런 심연의 폭풍을 경험한다. 문제는 그 절호의 찬스를 그냥 흘려보낸다는 거다. 사랑이라는 걸 대상의 문제로만 접근하기 때문이다. 상대방이 나를 어떻게 받아 주는가, 어떻게 하면 상대방을 사로잡을 수 있을까 등등에만 골몰하는 것이다. 요컨대, 오직 최종적 결과(결혼을 할 수 있을까, 없을까? 영원히 소유할 수 있을까, 없을까?)에만 집착한다. 따라서 거기에선 존재의 전이가 일어나기 어렵다. 존재가 뒤바뀌는 체험을 하려면 폭풍 자체를 충분히 음미할 수 있어야 한다. 

160. 그런 점에서 이것은 미쳐 날뛰는 광기나 변덕스런 충동과는 전혀 다른 것이다. 광기나 충동은 절대 폭풍을 일으키지 못한다. 그저 대지의 표면을 휩쓸고 지나가는 바람일 뿐. 심연의 폭풍과 스쳐 지나가는 바람은 천지 차이다. 둘을 구별하는 방법은 아주 간단하다. 기존의 나로부터 떠날 수 있다면, 다시 말해 나의 세계관과 습속의 배치를 바꾸어 준다면, 그것은 폭풍이다. 그렇지 않다면, 아무리 강하게 불어닥친다 한들 그건 그저 스쳐 지나가는 바람(변덕)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진정, 운명적인 사랑을 하고 싶은가? 그렇다면 먼저 자신에게 이렇게 물어야 한다. “나는 나를 멸망시킬 용기가 있는가?”

163. “턱에는 교만심이, 가슴에는 자긍심이 있다. 배꼽에는 벌심이 있고 배에는 과장하려는 마음이 있다. 머리에는 약탈하려는 마음이 있고, 어깨에는 사치하는 마음이, 허리에는 게으른 마음이 있으며, 엉덩이에는 훔치고자 하는 마음, 곧 노력 이상으로 챙기는 마음이 있다.” 사상의학을 체계화한 동무 이제마의 말이다. 이건 절대 비유도, 과장도 아니다. 있는 그대로다. 즉, 게으름이나 교만심, 벌심 등을 고치려면 그 부위(?)에 해당하는 신체적 흐름을 바꾸면 된다.
이제마는 이 사특한 마음을 이겨 내면 바로 그곳에 삶의 지혜가 샘솟는다고 했다. 그렇다면, 우리 몸 전체가 각종 마음들의 전쟁터인셈이다. 그러니 이 격전지를 버려 두고 대체 어디서 ‘나’를 찾으며, ‘나의 사랑’을 찾는단 말인가. 당연한 말이지만, 내 몸과 소통하는 힘에 비례하여 상대에 대해서도 알아차릴 수가 있다. 고로, 사랑의 힘과 통찰력은 분리불가능하다. 상상하는 연애에서 관찰하는 연애로!

178. 사랑 자체를 “실체화”하지 않는 것이다. 그것을 절대화하는 만큼 결별의 고통과 번뇌는 엄청나게 증폭된다. 이미 언급했듯이, 사랑이라는 사건에서 가장 중요한 건 ‘시절인연’이다. 시절인연이란 내 몸과 천지의 기운이 딱 상응하는 그 타이밍을 말한다. 여기에 나이를 비롯하여, 계절이나 절기, 그리고 둘을 둘러싼 사회적 조건 등이 두루 망라된다. 이것들이 한데 어우러져서 사랑이라는 사건을 발생시키는 것이다. 부연하면, 사람들은 저마다 고유의 리듬과 강도를 지니고 태어난다(시른바 사주팔자가 바로 그것이다). 그런데 그 리듬과 강도는 어떤 외부적 조건을 만나느냐에 따라 아주 다른 양상으로 펼쳐진다. 이런 시간적 흐름 속에서 어떤 특별한 배치가 형성되면, 그때 누군가를 만나고 사랑에 빠지는 것이다. 흔히 생각하듯이 이상형을 찾아 헤매다 누군가를 만나고 누군가를 만나서 사랑에 빠지는 것이 아니라, 때가 무르익으면 누군가가 ‘만나지는’ 것이다. 머릿속의 이상형과는 전혀 다른 상대한테 필이 꽂히는 것도 그 때문이다. 물론 그때는 상대가 이상형처럼 보인다. 둘 사이에 강력한 인력이 작용하기 때문이다(시쳇말로는 눈이 먼다고 말한다^^).
 같은 이치로 이 인연의 배치가 달라지면 아무리 노력을 해도 그 인연의 고리는 해체될 수밖에 없다. 갑자기 아주 사소한 사건으로 운명이 엇갈리기도 한다. 그러면 원인을 찾기 위해 안간힘을 쓰다가 번뇌가 눈덩이처럼 불거지거나 아니면 평생 원한을 품고 살아가기도 한다. 그게 바로 무명이다. 시절인연이라는 이 단순한 인연법을 간과한 데서 오는 무명! 좀더 극단적으로 말하면, 불화나 배신 때문에 결별했다기보다 헤어질 때가 되어서 그런 사건이 일어났다고 봐야 맞다. 사랑을 둘러싼 ‘인연법’에 있어 우리가 헤아릴 수 있는 인과의 법칙들은 정말 새발의 피에 불과하다. 그걸 넘어서서 더 넓은 인연의 장을 통찰하고자 하지 않으면 만남과 헤어짐의 과정에 담긴 의미들을 파악하기란 결코 쉽지 않다. 하지만 사람들은 대개 통찰 대신 미련과 원한의 굴레 속으로 몸을 던져 버린다. 니체는 이 원한의 정신이야말로 약자요 노예의 정신이라고 했다. 무엇보다 모든 원인을 남의 탓, 세상 탓으로 돌리기 때문이다. 내 운명을 망친 것, 나를 비극으로 몰아넣은 것, 그 모든 것이 다 타자라면, 당연히 나는 내 운명의 주인공이 아니다. 그래서 노예라고 하는 것이다.

180. “만날 때에 미리 떠날 것을 염려하고 경계하지 아니한 것은 아니지만, 이별은 뜻밖의 일이 되고 놀란 가슴은 새로운 슬픔”을 불러온다. <님의 침묵>

181. 병은 내 모든 습속을 바꿀 권리를 나에게 부여했다. 병은 나에게 망각을 허용했고 또 그것을을 명령했다. 병은 나에게 조용히 누워 있을 것을, 여가를 가질 것과 기다림과 인내가 필요함을 일깨워 주었다. <이 사람을 보라> 니체

마음의 병 역시 절대 위로와 연민으로 다스려서는 안 된다. 진통제가 몸을 나약하게 만들 듯, 동정과 위안 역시 존재의 능력을 한없이 떨어뜨린다. 사랑의 고통 역시 마찬가지다. 어설픈 위안을 꾀하지 말고 차라리 아플 만큼 충분히! 아픈 게 훨씬 낫다. 아플 수 있는 것 또한 존재의 능력이자 권리다.

189. 자신감/ 무엇보다 자시에 대한 믿음, 사랑을 위해 자신의 존재를 걸 수 있다고 확신했기에 가능한 일이다.

190. 진정으로 발원을 할 수만 있다면, 짝사랑이건 배신이건 두려워할 게 없다. 왜냐? 발원이란 존재를 거는 것이고, 그 순간 이미 나는 그 장면을 구현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그 순간, 사랑은 이미 내게 현존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물리적 이치상 어떤 방식으로건 인연조건을 만들어 내게 되어 있다. 평생 동안, 전심으로 누군가를 바라본다고 생각해 보라. 내가 어떤 대상을 향해 엄청난 인력을 쏘고 있다면, 어떤 식으로든 인연이 만들어지지 않을리가 있겠는가. 인디언들은 가뭄이 들면 비를 내려 달라고 제의를 지낸다. 그러면, 비가 온다. 왜? 올 때까지 하니까. 그 발원의 형식도 아주 재미있다. 비가 내리는 동작을 그대로 묘사한다. 스스로 비가 되는 것이다. ‘비-되기’. 가뭄이란 천지의 기운이 꽉 막힌 것인데, 그런 식의 발원을 통해 인간과 자연 사이의 교감을 시도하는 것이다.
 짝사랑도 이렇게 하면 된다. 일단 인연이 교차하기 시작하면, 수많은 변곡점들이 생기게 되면서 그러다 보면 시절인연을 만나게 된다. 이를테면, 나의 생명력과 시공간적 조건 사이의 강렬한 마주침, 그것이 곧 시절인연이다. 시절인연을 만나면 구체적인 행동방식은 저절로 결정된다. 매뉴얼 따위는 전혀 필요 없다. 그런 점에서 원초적으로 짝사랑이란 없다! 더 중요한 건 그 과정에서 전혀 다른 삶을 살게 된다는 것. 아주 낯선 세계 속으로 들어가게 된다는 것. 그리고 그것이야말로 사랑의 진정한 결실이다. 그러니 간절히 발원하라.

228. 사랑한다면, 삶을 창조하라!
루쉰과 쉬광핀에겐 사랑이라는 단어를 동원하지 않고도 서로 나눌 이야기들이 너무나 많았다. 시대에 관하여, 문학에 관하여, 일상에 관하여. 친구들에 관하여, 적들에 관하여, 또 그 무언가에 관하여. 쉽게 말하면, 그들은 삶 전체를 “통째로” 주고받았던 것이다. 그들은 사랑을 확인하고 확인 받는 일보다 삶을 함께 만들어 가는 일에 더 골몰하였다. 보통은 사랑을 확인하고 난 다음, 무엇을 함께 할까를 고민하는 수순을 밟지만, 이들은 사랑의 시작과 더불어 즉각 서로의 삶을 서로에게 “선사”한 것이다. 하여, 굳이 상대의 감정을 확인하기 위해 밀고 당기고 하는 식으로 힘을 소모할 필요가 없었다.

232. 그러므로 사랑을 원한다면 혹은 지금 운좋게 사랑을 하고 있다면, 무엇보다 서사의 능력을 키우도록 하라. 다시 말하지만, 서사는 화술이 아니라, 나의 삶과 외부가 맺는 관계성의 문제다. 따라서 서사의 능력을 키우기 위해선 대략 두 가지 전략이 필요하다. 하나는 지금까지와는 아주 다른 삶의 영역을 개척하는 것. 다른 하나는 자신의 평범한 일상에 생생한 힘과 활력을 불어넣는 것. 물론 이 두 가지는 함께 맞물려 있다.

233. 니체는 차라투스트라의 입을 빌려 이렇게 말했다. 좋은 결혼이란 “더욱 높은 신체를 창조하는, 창조하는 자를 창조하는 것”이라고 표현했다(‘아이와 결혼에 대하여’). 역시 핵심은 몸이다. 창조는 몸을 통해서만 자신을 표현한다. 따라서 삶을 창조한다는 건 구체적으로 새로운 몸을 창조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럼, 어떻게 새로운 신체를 창조할 것인가? 원리는 간단하다. 리듬과 강도. 우리 몸은 이미 어떤 종류의 리듬과 강도로 세팅되어 있다. 
(…) 리듬과 강도란 우리 몸이 만들어 내는 에너지장 정도로 이해하면 되겠다.
(…) 요컨대, 삶의 창조란 거창한 추상적 이념이 아니라, 바로 이 ‘지금, 여기’를 구성하고 있는 내 몸의 리듬과 강도를 바꾸는 것을 의미한다. 거꾸로 말하면, 이 리듬과 강도를 바꿀 수만 있다면, 인생 역전도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뜻이다.
 평소, 우리의 리듬과 강도는 엄청 산만하다. 한마디로 멍~하게 지낸다는 뜻이다. 그게 바로 무명이다. 그 무명 속에서 ‘탐진치’가 자라난다. 뭔가 큰 촉발이 일어날 때라야 이 무명의 상태에서 깨어나는데, 주로 분노하거나 쾌락에 빠지거나 둘 중의 하나인 경우가 많다. 쾌락과 분노는 다 몸에 해롭다. 따라서 그냥 멍한 상태로 살면 분노와 쾌락 사이를 오가느라 점점 더 리듬과 강도가 낮아질 수밖에 없다. 이런 상태론 뭘 해도 열정과 끈기가 따라붙지 않는다. 그렇다면, 가장 먼저 이 멍하고 산만한 상태에서 벗어나야 한다. 리듬의 거품을 빼면 강도는 절로 확보된다. 인류의 위대한 스승들, 인생의 대가들은 이 점에서 아주 탁월하다. 매일매일의 일상은 물론이려니와 단 한순간, 아니, 단 하나의 호흡도 쓸데없이 낭비하지 않는다. 그렇게 되면, 몸과 마음, 말과 행위 사이에 완벽하게 상응을 이루게 된다. 이런 것을 일러 삶의 진정성이라 할 터. 사랑이란 그런 진정성을 확보할 수 있는 절호의 찬스에 해당한다.
 사랑은 내 안에 잠자고 있던 태풍이 몰아쳐 나로 하여금 뭔가에 강렬하게 집중하도록 하는 일대 사건이다. 그때 일어나는 집중력은 실로 놀라운 수준이어서, 그 정도의 힘이라면 내 몸에 쌓인 낡은 흔적들을 일거에 몰아낼 수 있다. 만약, 그 정도가 아니라면, 그건 사랑이라고 할 수도 없다. 예컨대, 사랑을 하고 있는데, 자신의 몸과 일상에 어떤 변화도 일어나지 않았다면, 단언컨대! 사랑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니 사랑을 하고 잇따면, 사랑을 꿈꾸고 있다면 먼저 동선을 바꾸라.
동선을 바꾼다는 건 일상의 차서를 재배치하는 것이다. ‘차’란 시간적 순서, ‘서’란 공간적 질서를 뜻한다. 차서를 재배치한다는 건 중요한 것과 중요하지 않은 순서를 바꾸고 하루의 활동들을 시공간적으로 다르게 안배한다는 뜻이다. 삶은 몸의 에너지들이 서로 교호하는 물리적 장이다. 내가 리듬과 강도를 바꾸면 당연히 내 주변에 이전과는 다른 물리적 장이 형성된다. 인연조건이 달라진다는 뜻. 그렇게 되면 그걸 바탕으로 새로운 관계와 활동 속으로 들어갈 수 있다. 그게 바로 새로운 신체의 창조며 삶의 창조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사랑은 어떤 경우에도 절대 대상을 위해 나를 희생하는 것이 아니다. 일차적으로는 내가 사랑하는 대상과, 더 넓게는 이 세계와의 공존을 기획하는 일이다. 이 공존에서 가장 필요한 건 바로 자신이 원인이 되는 것이다. 사랑을 통한 삶의 창조, 그것은 그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나의 영역이다.
 “우리는 욕망들을 지닌 채, 욕망들을 통해서 성을 이해해야 하며, 새로운 형식적 관계, 새로운 형식의 사랑, 새로운 형식의 창조를 진행해야 한다. 성은 숙명이 아니다. 성은 창조적인 삶을 위한 가능성이다.”<성, 권력, 정체성의 정치학> 푸코

240. 만일 내가 참으로 한 사람을 사랑한다면, 나는 모든 사람을 사랑하고 세계를 사랑하고 삶을 사랑하게 된다. 만일 내가 어떤 사람에게 “나는 당신을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다면 “나는 당신을 통해 모든 사람을 사랑하고 당신을 통해 세계를 사랑하고 당신을 통해 나 자신도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사랑의 기술> 에리히 프롬

241. 사랑 또한 그러하다. 사랑의 창조, 그 궁극적 지점은 다름 아닌 자신을 사랑하는 것이다. 자신의 삶의 현장, 곧 ‘지금, 여기에 있음’자체를 사랑하는 것이다. 지나간 것에도, 도래할 것에도 끄달리지 않는, 자신의 현존성에 대한 절대적 긍정! 그렇게 될 수 있다면 사랑은 그 자체로 창조의 여정이 될 수 있지 않을까.



그리스 아테네 자전거 일주


프랑스의 사상가 장 자크 루소는
<사회계약론>에서 이렇게 말했다.

"약자와 강자 사이에서는
자유가 억압이며 법이 해방이다."

도로 위의 자전거는 약자다.
자전거를 자동차들과
같은 차선에서 달리라고 한다면,
그건 가끔 길에서 보
동물 사체처럼 죽으라는 말이다.

다행히 우리에겐 갓길이 있었다.
양육강식의 세계 같아 보이지만
강자에겐 강자의 길이
약자에겐 약자의 길이 있는 것이다.

가끔 갓길이 없어져
도로를 달릴 때도 있다.
그렇지만 강자들은 약자를 깔보지 않는다.
그들의 경적은 우리의 경종을
울려주는 용도일뿐
그들의 힘을 과시하는데
이용되진 않는다.

가끔 듣는 경적이 있다.
그건 창밖으로 손까지 꺼내
약자를 응원하는 격려.

100Km의 속도로 달리던
10Km의 속도로 달리던
우린 결국 같은 인간이니까.

법과 제도 아래에서
그들의 속도도 있고 나의 속도도 있는,
이런 것이 공생하는 사회일까.


 이슬람교에는 극단적인 종교 단체가 있을 뿐, 보통의 이슬람교 사람들은 배타적이지도 공격적이지도 않다. 어쩌면 3%도 안되는 소금이 바다를 짜게 만드는 것과 같은 현상일 수도 있다. 어쩌면 짠 부분만 보여주는 미디어 탓일 수도 있다. 이슬람교는 기본적으로 개인의 구원만을 추구하는 종교가 아니라 세계가 어떻게 굴러가야 하는가에 대한 사회적인 계획을 말하는 종교이다. 다시 말해, 공동체가 어떠해야 한다는 교리를 말하는 종교다. 그래서 전통적으로 종교지도자가 사회지도자였고 여전히 몇몇 국가에서는 전통이 유지되고 있다. 그렇지 않더라도 여전히 강한 영향력을 갖고있다. 

 이슬람교는 예언자 무함마드에 의해 설파되었다. 그가 설파한 말이 적힌 책이 코란이다. 이슬람교에서는 무함마드가 코란의 첫 번째 경구를 계시 받은 날을 축일로 여긴다. 매년 이 축일을 앞둔 한 달동안 금식을 한다. 이 한 달을 라마단이라고 한다. ‘라마단’은 이슬람력으로 아홉 번째 달을 뜻한다. 라마단 기간에는 음식, 음료, 흡연, 성행위가 모두 금지된다. 금지 사항들은 전통적으로 햇살이 보이기 시작하는 순간부터 해가 저물 때까지 지켜진다. 라마단 기간 중에는 이슬람 신자가 아닌 외국인이라도 금식하는 사람들 앞에서 먹거나 마시는 것은 예의에 어긋나므로 외국인들이 먹거나 마시려면 금식하는 사람들에게서 떨어져야 한다. 

저렴한 물가의 이란. 하지만 라마단 기간, 해가 떠있는 시간에는 대부분의 식당이 문을 열지 않았다. 식당을 찾으려면 30분을 물어물어 가야했다.

햇볕이 내리쬐고 건조한 날씨탓인지 안구에 체감되는 색이 모래색인 이란. 그 모래속에 사막의 꽃처럼 피어나 있는 신전, 모스크. 그 찬란한 푸른색과 웅장함 앞에 입이 벌어졌다. 

하지만 금강산도 식후경.
끼니는 때가 되면 어김없이 찾아왔다. 이전에 지나간 끼니는 다가오는 끼니 앞에서 소용이 없는 법. 또다시 식당을 찾아 나설 때가 온 것이다. 

 이란 소녀 네긴과는 식당 가는 길을 묻다가 만났다. 검은 차도르를 쓰고 있었고 차도르보다 진한 눈썹을 가진 아가씨였다. 25살쯤 됐으려나...... 16살이었다. 네긴은 영어를 유창하게 했다. 그러고보니 이란 사람들은 연로한 세대도 젊은 세대도 영어를 잘했다. 네긴이 식당을 데려다주겠다고 했다. 네긴은 자발적 안내자이지만 성격이 까탈스러웠다. 내 말이 느리다고 놀려서 그렇게 생각하는 게 아니다. 무슨 말을 해도 꼬박꼬박 틱틱거리며 말을 했다. 네긴이 안내해준 곳은 경양식집. 이란에 와서 매일 양고기 케밥(꼬치구이)을 먹었다. 양고기는 먹을 수록 비렸다. 그러던 중 오랜만에 피자가 있는 식당. 콜라부터 시켰다. 이란의 덥고 건조한 날씨는 설탕물이 절로 생각나게 했다. 콜라 한 모금. 흐허~. 밥을 주문했다. 그런데 이 16살 아가씨는 왜 같은 테이블에 계속 앉아 있는 거지? 꽃뱀인가. 단순히 우리랑 같이 밥을 먹으려는 건가. 하지만 네긴은 음식을 주문하지는 않았다. 그래 아무리 덩치가 크다 해도 설마 고등학생 숙녀가 남자 셋을 어찌하겠냐. 고 스스로를 안심 시켰지만, 나보다 큰 주먹을 갖고 있는 네긴은 나보다는 셀 것 같았다. 핸드폰으로 어디를 전화하는가 싶더니 자기 아빠를 불렀다고 한다. 잠시후 정말로 어떤 아저씨가 왔다. 어린 여자아이를 데리고. 네긴의 아버지 알리와 네긴보다 3살 어린 동생 아진이었다. 세 명의 한국인과 세 명의 이란인. 세 명의 한국인은 식사를 시작했다. 세 명의 이란인은 먹지 않았다. 알리는 우리가 먹는 모습을 그윽히 바라봤다. 식사가 끝났다. 알리는 우리를 자기 집에 초대하고 싶다고 했다.

 그렇게 네긴의 집에 가게 됐다. 겉보기에는 평범한 빌라였는데 내부는 드라마에 나오는 부잣집 같았다. 넓은 집, 양탄자, 샹들리에, 피아노, 가죽소파, 양변기가 있는 화장실. 네긴의 어머니 바틀리가 우리를 맞이해 주었다. 바틀리는 학교 영어 선생님이라고. 저녁을 다시 먹었다. 저녁을 먹고나서도 먹을 걸 계속 주었다. 계속 먹으며 여러 이야기를 했다. 이란 대부분의 여자들은 차도르를 쓰기 싫어한다는 거나, 한국인들은 왜 면도를 하는지, 
알리가 물었다. "자네 ‘소서노’ 본적 있나?" 이미 많은 이란 아저씨들에게 들어온 소서노. 그녀는 한국 드라마 ‘주몽’에 나왔던 배우 한혜진을 말하는 것이다. “저도 보고 싶네요.”  

 아저씨가 술을 꺼내왔다. 술이 금지된 이란, 집마다 밀주가 있다던데 사실이군요. 다음날, 네긴의 삼촌이 4살 아들과 한국인들을 구경하러 왔다. 같이 X-BOX 게임을 했다. 댄스댄스 레볼루션. 같이 한국드라마을 봤다. 시티헌터. 

 헤어질 때, 우리는 서로서로 한국에 오면 꼭 연락달라고, 다시 이란에 오거든 연락하자고 말했다. 다시 만나자고. 불가에는 시절인연이라는 말이 있다. 어떤 사람과의 만남도, 어떤 사건과의 만남도, 유형이던 무형이던 모든 만남은 모두 때가 있는 법이라고 한다. 때론 그때가 또 다시 올 수 있을까, 다시 만날 수 있을까 싶은 날이 있다. 그리고 궁금하다. 혹시 다시 만날 수 없다면, 잠자리와 식사를 그리고 마음을 나눠준 그 만남은 아무 의미 없는 것일까? 만나고 헤어지고. 이 과정은 스마트폰에 단순히 애플리케이션을 깔았다 지워나가는 과정인 걸까?

그렇지 않다. 우리의 만남은 지나고 나면 잊혀지고 아무것도 아닌 과정이 아니다. 만남은 밥을 먹는 과정과 같다. 때가 되면 어김없이 찾아오는 끼니. 그 끼니를 채워가는 과정 같은 게 아닐까. 다가오는 끼니 앞에 지나가버린 모든 끼니들은 무위하게 보인다. 하지만 지나온 끼니가 있기에 우리는 다가오는 끼니를 맞이할 수 있고 살아간다. 설혹 우리가 다시 만날 수 없다고 하더라도, 때론 뒤를 돌아보게 되더라도, 그 만남은 우리 영혼의 일부가되어 우리 안에 남는 게 아닐까. 우리 삶은 그렇게 성숙되어 가는 게 아닐까.

이란 이스파한 가정집왼쪽부터 네긴,영제, 바틀리, 아진, 알리, 종혁 형님

인연은 정말 갈대밭을 건너는 바람일까.


덧. 이란 여행 이야기...이런의 첫느낌


이란 이스파한 초대밀주를 따라주고 있다


이란 이스파한 초대숙부같은 알리


이란 이스파한 초대


이란 이스파한 초대

드디어 이란에 도착. 무스카트를 경유해서 이틀 간의 여정. 비행기 경유를 처음해봤다. 우리는 짐이 중간에는 우리 손에 들어오지 않는 다는 것을 몰랐고, 침낭이고 옷이고 수하물로 부쳐버렸다. 그리고 공항에서 춥고 추운 밤을 보냈다.

어쨌든 이란의 처음으로 느낀 건, 지금까지(아시아)와는 또 다른 사람들. 우리 두 사람은 어디를 가든 주목을 받았다. 사람들이 먼저 다가와 우리에게 인사를 한다. 관심은 감사하지만, 뭐랄까, 너무 적극적이다. 

이란 테헤란 전철역

함께 사진을 찍자고 한 테헤란 전철역 아저씨

이란 테헤란


이란의 은행…
수십 개를 찾아다니며 ATM에서 인출을 시도 해보았다. 
VISA와 MASTER카드는 이용할 수 없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달러를 환전해야 이란 돈을 가질 수 있다
(다행히 영제가 달러를 무지무지 많이 갖고 있었다). 
환전은 암시장에서 심심찮게 하고 있다. 

이란 테헤란 거리의 길 안내자

호텔이 어디있는지 물어보았다.

20분간 직접 길 안내를 해준 아저씨

이란 테헤란 거리의 길 안내자2


수퍼마켓이 어디있는지를 물어보았다. 
길 안내를 해준 동네 꼬마.

거리의 안내자들
아직 이들의 문화에 대한 마음의 준비가 안돼있는 걸까. 
과하다고까지 느껴지는 이란 사람들의 길안내.


이란 테헤란 동네 수퍼마켓



수퍼마켓.
왼쪽에 흰색 옷을 입은 아저씨. 다른 사람들 장보는 걸 
도와주고 우리가 물건 사는 걸 친절히 도와주길래 가게 아저씨인줄알았다. 
음료수를 사러 온 동네 형이었다.


반미 국가인 이란에도 들어온 코카콜라와 환타의 저력.

이란 테헤란

이란에서의 첫 저녁 밥
본 제품은 상기 이미지와 다를 수 있습니다.
야, 심하게 다르잖아…


인도 캘커타 고아원개님

그러고보니 생각난 이야기.

일주일간 머문 캘커타의 아실람 고아원에는
송아지만한 셰퍼트가 있었다.

보안에 철저한 이 친구는 이방인에게
쉽게 마음을 열지 않았다.
우리를 보면 아주 그냥
세상 떠나갈듯 짖어댔고
물리면 아픔 너머의 것이
보일 듯한 이빨을 보여줬다.

하지만 다행인건 고아원의 총무이자
큰 언니 '디디'가 그의
목줄을 잡고있기에 안전.

그래도 갑자기 나타나는
그에게 깜짝깜짝 놀라고
피해서 돌아다니길 사흘.

그런데 어느날인가
마당 한가운데에서 마주친 그.
왠지 목줄이 없다.
수호천사 디디도 없다.

이건 또 워째서인지
나와 그는 단둘이 마주하고 있다.
'…'
아, 간이 쪼그라들 것 같다.

정적과 긴장… 하지만
곧 정신을 차리고 자세를 잡았다.
'좋아, 덤벼 봐라.
너의 점심으로 내 발차기를 먹여주마.'

하지만 그는 그냥 지나쳐갔다.

앗? 왜?
(이거슨 ... 개무시?)

고아원을 떠난지 열흘 째
돌이켜 생각해보니 그도
나만큼 당황했던 것 같다.
아무도 말려줄 수 없는 그 상황이.

어쩐지 그의 표정도
내 눈치를 살폈던 것 같다.

진실은 알 수 없다.
하, 신비로운 동물의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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