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이로에서 에티오피아 비자를 받기란 쉽습니다.

대사관도 시내 중심에 있어서 찾기 쉽고,
비자도 신청서만 작성하면, 다음날 받아볼 수 있습니다.

저 같은 경우,
신청서를 작성하고 제출 하니 다음날 1시에 오라고 하더군요.
그래서 다음날 1시에 문제 없이 비자를 받을 수 있었습니다.

* 준비 사항
1. 신청서 1부(에티오피아 대사관에서 받음)
2. 여권 사진 1
3. 비자 수수료 30$ 


* 에티오피아 비자 받기


먼저 지하철을 타고 ‘도키(Dokki)역에서 하차하신 후,
에티오피아 대사관까지 걸어갑니다. (약 5~10분 소요)



카이로에 있는 에티오피아 대사관 위치


골목길을 따가 올라가면 오른편에 사진과 같이 에티오피아 대사관이 있습니다.
녹색 대문 오른쪽에 벨이 있고 그 벨을 눌러 비자를 받고 싶다고 하면, 신청서를 줍니다.


에티오피아 대사관 모습


아래와 같이 신청서를 작성하고
비자 수수료, 사진과 같이 제출하면 다음날 1시에 오라고 합니다.

신변에 큰 문제가 없는 한, 다음날 무난히 비자를 받을 수 있습니다.


신청서 작성 양식


이건 몽골에서 유목민들과 일주일을 지낼 때의 이야기(1)

몽골, 그곳은 시간이 아닌 바람이 흐르고 모래가 물결치는 곳. 유목체험 사흘째이던 날, 영제와 나는 게르 안에서 밥을 먹고 있었으니, 숟가락과 그릇이 부딪치는 소리, 난로 안에서는 제 몸을 열심히 태우는 소똥의 군불 소리만이 들리는 점심시간이었더랬다.
‘아, 정말 맛없다.’ 군대 짬밥 10년, 웬만한 음식 섭취 가능 능력을 얻었지만, 사흘 동안 아무 반찬 없이 비린 양고기향 칼국수를 8끼니 콤보로 먹었더니 신경성 식욕 부진증이 올 것 같았다. 이걸 앞으로 12끼를 더 먹어야 한다니… 눈앞이 깜깜했다. 그런 생각을 하며 깨작거리고 있는데 집안의 제일 어르신, 아르크자 할머니가 우리에게 웬 상자를 건네주었다. 이게 뭘까. 상자 안에는 컵라면 6개가 있었다. 몽골 땅에서 한국의 컵라면을 만나게 되다니. 할머니는 밥을 잘 못 먹는 우리를 위해 차로 30분은 나가야 하는 촌락에 가서 이 컵라면을 사온 것이다. 아아, 감동의 쓰나미. 콱 이곳에서 평생을 몸 바쳐 일하고 싶다. 진심 감개무량.

고작 컵라면이잖아 싶으시겠지만, 그 나름의 사연이 있었으니, 그 사연은 이러하다.

5일 전, 몽골의 수도 울란바토르, 우리가 묶었던 게스트 하우스는 몽골 투어 서비스도 겸하는 여행사였다. 낙타 투어, 승마 트래킹, 칭기즈칸 투어, 여러 가지 설명을 주인아주머니한테 들었지만, 썩 내키는 게 없었다. 체험에 그치는 관광 너머의 여행을 하고 싶었다. 미적미적 결정을 못 내리고 있던 중, 같은 숙소에 있는 미국인 친구가 유목민 집에서 유목생활을 하며 3주를 지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건 돈 주고 일하는 거다. 고생하지 말고 사막에서 낙타를 타라.” 유목민 출신 주인아주머니는 말했다. 하지만 나는 생각했다. 투어를 보내 돈을 벌려는 속셈이겠지. "괜찮다. 우리는 유목을 해보고 싶다. 유목민 가족을 소개해달라.” 아주머니의 말이 유경험자의 진심 어린 충고였다는 걸 깨닫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정보에 의하면, 몽골은 국민의 30%가 유목민이다. 10명 중 3명이 양을 친다는 말인데, 이건 몽골인이라면 주변 사람 중에 적어도 한 명 이상은 유목을 한다는 얘기. 즉, 이런 식으로 소개받기가 어렵지 않다는 말.)

출발하던 날 새벽, 눈이 왔다. 버스는 눈이 쌓인 고속도로를 달렸다. 광대한 평원에 쌓인 하얀 눈. 하늘도 하얗고 땅도 하얬다. 나무 한 그루 없는 평원, 하늘과 땅의 경계가 사라진 그 평원을 달렸다. 그리고 곧 길마저 사라졌다. 아무것도 없는 대지 위를 우리의 낡은 버스는 달렸다. 길을 달리고 있다기보다는 길을 개척하고 있는 모양. 모래와 바람, 눈과 하늘의 시간. 그건 마치 인간의 지식도, 욕심도 없는 새하얀 무위의 세계를 향해 가는 길 같았다.

유목민의 집, 게르에 도착했다. 게르는 다큐멘터리에서 자주 보던 천막이었다. 평지 위에 나무 울타리를 설치하고 그 위와 내부에 융단을 덮고 가운데에 화로를 설치. 간단한 살림살이만 채워넣으면 끝. 우리를 받아준 가족은 40대의 바이에르 뭉크와 이르크자 부부, 갓난아기, 이르크자의 엄마 아르크자 할머니, 어떤 관계인지 끝내 이해하지 못한 또 한 명의 할머니, 바이에르 뭉크의 동생 맘으로 이루어진 가족이었다. 유목민들은 보통 5명 정도가 한 가족을 이뤄 5킬로미터 정도씩 떨어져 지내는 것 같았다. 보건소, 은행, 잡화점 등이 모여있는 촌락이 차로 30분 떨어진 곳에 있었는데, 아이들은 평일에 그곳에서 지내며 학교에 다녔다. 바이에르 뭉크에게는 5남매의 아이들이 있었는데, 갓난아기를 빼고 4남매도 촌락에서 유학을 했다. 말은 통하지 않았다.

양은 카카오 초콜렛 같은 똥을 쌌다. 걸어가며 까맣고 동글동글한 똥을 후두둑 싸는 모습을 보노라면 어릴적 먹었던 카카오 초콜렛이 생각났는데, 맛은 역시 다르겠지. 양떼를 이동시킬 때는 그 뒤를 맴돌며 원하는 방향으로 모은다. 갈지자를 그리며 왔다리갔다리 가면 됐는데, 직선거리 2~3킬로미터를 그런 방식으로 걸으면, 가는데만 2시간이 걸렸다. 발이 푹푹 빠지는 모래 길을 2시간 걸어 풀이 많은 곳에 도착할 때쯤, 저 멀리서 바이에르 뭉크가 오토바이를 타고 나타났다. 그건 마치 액션 영화에서 주인공이 죽을 고비를 넘기며 사건을 다 처리하니까 슬렁슬렁 나타나는 경찰과 같은 타이밍이었다. 먼 곳에서 그의 후다다닥 거리는 오토바이 소리가 들려왔다. 유목 체험을 오기 전, ‘기마 민족인 그들과 함께 생활하면 나도 말을 타보겠지?' 싶었는데, 몽골 평원에는 오토바이의 시대가 한창이었다. 

바이에르 뭉크는 내 앞에 섰다. 그는 동물 가죽이 멋지게 장식된 오토바이에서 내렸다. 담배에 불을 붙였고 숨을 한 번 내쉬었다. 양이 먹을 풀을 둘러봤다. 망원경을 꺼내 주변을 둘러봤다. 그는 양떼가 적당한 위치에 왔다고 판단되면 때가 왔다는 듯 낮잠을 잤다. 바람이 굉장히 옴팡져서 그냥 누워서 자기에는 좀 그랬는지 그는 엎드려서 잤다. 풀을 뜯고 있는 양떼 속에서 엎드려 자고 있는 그 모습을 보노라면, 그가 죽은건 아닐까, 죽는건 아닐까, 양들이 멀리 멀리 떠나가버리는 건 아닐까 걱정이 됐는데, 그는 참 편안하게 잘도 잤다. 

놀라울 것 없이 당연한 말이겠지만 게르에는 상수도, 하수도가 없다. 우물을 길어서 물을 썼다. 개인마다 전용 수도꼭지가 있긴했다. 친환경으로. 그 수도꼭지는 물을 입 안에 머금고 쪼르르 뱉으면서 사용했다. 설치비용 따로 없고, 약간의 숙련으로 수량도 조절 할 수 있었다. 입을 먹는데, 말하는데 말고도 쓸 곳이 있다니 새로운 배움. 하지만 머리를 감기에는 굉장한 시간이 걸리고, 다른 사람 수도꼭지로 씻으려면 극기의 정신력이 필요하다는 단점이 있었다. 역시 세상에 완벽한 건 없었다.

사실 양치기 일도 씻는 것도 이것 앞에서는 굼벵이 구르는 재롱이었다. 그건 바로 밥먹기. 게르에 있는 식재료라고는 밀가루와 양고기 뿐이었지만, 매끼니마다 새로운 조합이 나왔다. 과연 오늘은 뭐가 나올까. 수제비스러운 뭔가와 칼국수스러운 뭔가가 양고기와 함께 조리되었다. 양머리를 귀한 요리로 친다던데, 어느날은 떡하니 양머리가 나왔다. 바이에르 뭉크가 친절히 가장 맛있는 부분을 칼로 잘라주었다. 양의 턱 주변 살이었다. 그래, 이럴 땐 정신줄을 놓고 얼른 삼켜버리는 게 정신 건강에 좋다. 빨리 삼켜버려야지. 그런데 계획과 달리 요 고기가 씹어도 씹어도 탄력을 잃지 않는 고무고무 고기였다. 아, 후추를 구하기 위해 목숨을 걸고 대서양을 건넌 서양인들의 마음을 이해할 것 같다. 무엇보다 가장 힘들었던 점은 채소가 없다는 점이었다. 매끼 밀가루와 고기, 개운한 맛이 필요했다. 어느날부터 나도 양 옆에서 풀을 뽑아 먹었다. 

추위에 떨며 하루 5시간을 걷고, 양들과 씨름하며 생고생을 했다. 하지만 누군가 내게 가장 기억에 남는 나라가 어디냐고 묻는다면 나는 몽골이라고 답할 것이다. 문명과 가장 멀었던 곳. 시간이 아닌 바람이 흐르는 곳. 하얀 세계를 지나가서야 만날 수 있었던 그 세계. 친환경 수도꼭지로 세수를 하고, 양이랑 풀을 뜯어먹었던 그 시간. 살아오면서 많은 눈과 마주쳤다. 그리고 그 수많은 눈 중엔 마음을 끄는 눈들이 있었다. 바깥 세상에 나온 아이의 눈, 새벽 추위를 뚫고 떠오르는 따뜻함을 맞이하는 길냥이의 눈, 배움을 시작하는 학생의 눈. 내 여행에도 그런 눈을 가졌던 때가 있다면 그 일주일이 아닐까 생각이 든다. 그런 눈으로 세상을 본다면 없으면 죽을 것 같은 지식도 욕심도 무위의 것이 된다는 걸, 그전과 다른 세계를 볼 수 있다는 걸, 여행을 준비하는데 그 눈만 있다면 된다는 걸, 깨달은 시간이었다는 걸 이제사 깨닫는다.

* 몽골 비디오 보기(영제 편)
- 몽골 여행기, 몽골 유목 민족을 아시나요? 
http://www.youtube.com/watch?v=9Nppep0RFRg


감동의 도시락 ㅜㅜ


카카오 쪼꼬렛이 생각난다...


비리다. 심하게


우적우적





얕은 깜냥으로 배운게 있다면,

경험 없는 철학은 모래 위에 쌓은 관념이라는 것. 

앞으로 4개월, 
어떤 과정이 있을까.
어떤 사람이 되어 있을까.
모래성은 무너뜨리겠음다.

렛츠고.




점심을 먹는다고 책상에 신문을 깔던 중

우연히 발견한 시


'가난은 내 직업이지만' ...

박애의 근간은 가난이라 했다.

가진 것을 나눌 수록 사랑은 실현된다.

가난해질 수록, 비참한 사람이 될 수록.

그래서 박애를 말하는 소설 <레 미제라블>의 뜻이

'비참한 사람들' 이라나.


우리가 가난해져야 한다는 걸 말하는 건 아니다.

하지만

백성일을 한다는 정치꾼들이

사랑을 외치는 종교꾼들이나

일반 국민의 평균이상 부를 갖고 있다는 건

우스운 현실.



독서가 부족했다.



* 지난 1개월

- 희망제작소 인턴 지원.

- 여행기 5회 작성(지금까지 총 9회).

- 바른가치미덕학교에서 오전 아르바이트.


* 앞으로 1개월

- 여행기 7회 작성

- 지리산 여행


말로만 들어온 희망제작소를 면접으로 만나게 될 줄이야.


누군가의 변화를 본다는 것, 이제와 느끼는 살아가는 맛.


 끝났음을 받아들여야 한다. 즉 여기에 있음으로써 다른 아무 곳에도 없음을, 이것을 함으로써 다른 것을 하지 않음을 받아들여야 한다. ‘지금’이지, ‘결코’나 ‘항상’이 아님을 받아들여야 한다. 

(…) 오직 이 생밖에 없음을 받아들여야 한다. 


<늙어간다는 것>에서



2014년 10대 뉴스인 희망제작소 인턴 활동



이건 희망제작소* 인턴 지원기.

(* 2006년 박원순 변호사 (현 서울특별시장)를 중심으로 한 시민, 시민사회 활동가, 사회 각 분야의 전문가들이 출범 했다. '21세기 新실학운동'이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창립된 희망제작소는 한국사회의 크고 작은 의제들에 대해 정책적 대안을 연구하고 실천하는 독립 민간연구소이다.)

경력, 지원동기, 자기소개 3개 질문의
지원서 작성에 3주가 걸렸다.
하지만 어쩌면 그동안 걸어왔던 길이 
이 지원서를 쓰기 위한 과정이 아니었을까 싶은 
마음이 들었다.

1차로 지원했던 ‘뿌리센터’는
서류전형에서 떨어졌다.
2차로 지원했던 부서와 면접.
면접 내내 ‘뿌리센터’ 얘기만 한 결과 낙방.

내가 떨어진 건 (당연한 사실이겠지만) 
나보다 대단한 사람이 있다는 뜻이기에 
감사했다.

하지만 후회는 남기고 싶지 않았다.
월요일에 찾아가 봉사라도 시켜달라고 했다.
화요일, 아무 연락이 없었다.
수요일인 어제 연락이 왔고 
'뿌리센터' 면접을 봤다.

지금 막 받은 합격 전화.
다음주 부터 시작될 인턴생활 4개월.

통장에는 30만원이 남았다.
군대에서 받은 돈을 거의 다 썼으니
이제 정말 새로운 시작이 아닐까 생각이 든다.

탐험가 루이스와 클라크는 이런 말을 했다.
"거기에 도달해서 무엇을 발견할지 우린 모른다.
하지만 우리가 돌아올 때에는 당신에게 확실하게 이야기해 줄 수 있을 것이다."

전역하고 1년이 지난 오늘, 나는 희망제작소 인턴이 됐다. 
조금은 우리 사회에 도움이 되는 사람이 되었을까?

* '요즘 뭐하고 지내남'

사람들이 살아가는 삶의 양식을 문화라 한다. 우리 문화가 뭔가 잘못되어가고 있다는 건 굳이 말하지 않아도 이미 일반화된 사실이다. 가정, 세대 간의 소통, 양극화, 교육, 인권 문제들이 폭력, 자살, 우울증 등 여러 모습으로 표출되고 있으니까. 지금 우리 국민의 삶은 하루하루 소모되고 있는 삶, 소유와 소비로써만 살아있음을 느끼도록 강요받는 삶, 에너지 음료를 마셔야만 버틸 수 있는 삶으로 변해가고 있다. 성형, 대출, 게임, 병원(디스크, 치질 등 피로 관련 질환) 등이 주를 이루고 있는 전철 광고만 봐도 알 수 있는 대한민국의 모습이다.

나는 휴식 문화가 문화를 올바른 방향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 첫 단추라고 생각했다. 문화를 바꾸는 건 사람이니까. 술, 혹은 비싼 돈을 들여야만 즐길 수 있는 취미, TV, 유흥업소 따위의 소모적인 여가가 아니라, 활력을 충전해주는 휴식 문화를 만들고 싶다고 생각했다. 변화된 한 사람, 한 사람의 빛이 우리 사회에서 공동 선을 이뤄나갈 수 있을거라 생각했다.

7년의 군 생활. 나는 전역을 했고, 배낭여행을 시작했다. 생각지 못한 삶의 모습은 생각의 울타리 너머에 있다고 생각했다. 다른 사람의 삶을 보고 싶었다.

* 279일의 세계

- 나마스떼(내 안의 빛이 당신 안의 빛에 인사한다는 뜻의 힌두 인사). 답은 모두에게 있었다.
그렇게 떠난 여행. 그 울타리 밖에서 내가 가장 먼저 본 것은 오만한 내 모습이었다. 개발도상국이라는 단어를 떠올리면 후진국이라는 단어와 함께 내게는 자연스럽게 이런 생각들이 떠올랐다. '가난한 사람들', ‘불쌍한 사람들’, ‘의식 수준이 부족한 사람들'. 나도 모르게 그들을 도와줘야 할 대상, 가르쳐줘야 할 대상이라는, 그 사람들 위에 서려는 그릇된 연민이 잠재되어 있던 것이다. 

그들보다 잘난 사람이라고 나는 착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내게는 그들 삶에 그림자를 드리울 자격이, 아니 누구에게도 그럴 자격은 없었다. 그들에겐 그들의 빛이 있었다. 빛을 일구며 살아가고 있었다. GDP라는 둥, 돈이라는 둥, 자본주의가 만들어준 기준에 눈이 어두워진 내 모습을 보았다. 우리가 진실로 누군가를 돕고자 할 때, 우리가 해야할 일은 우리의 빛을 그들에게 비추는 게 아니라 그들이 가진 빛을 키워주는 일이라는 걸 느꼈다. 우리의 빛은 그들에게 그림자를 만들 수 있을테니.

- 돈이라는 이름의 잣대. 희망은 지역에 있었다.
 몇 년 전, 서점가에는 '나는 세계일주로 자본주의를 만났다'는 책이 흥행했다. 나도 세계여행을 하며 자본주의를 만났다. 세계화는 효율과 수익률이라는 기준으로 세상을 재단하고 있었다. 고유의 색을 잃고 비슷한 모습으로 변하고 있는 도시들. 스타벅스, 맥도날드, 피자헛 등 프랜차이즈가 세계를 단순화 해가는 모습.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나이키와 아디다스의 화려한 광고. 서로를 ATM(현금 자동 인출기)으로 바라보는 사람들. 

IT 혁명으로 국가 간 경계가 허물어진 세계, 무한경쟁의 시대를 예고한 책 <세계는 평평하다>의 말처럼, 암이 몸을 잠식해가듯 가히 세계화는 그렇게 진행되고 있었다. 그나마 지방에서 그 나라의 고유문화를 만날 수 있었다. 빈약한 여행에서나마 추억이라는 이름의 기억들은 스타벅스 매장에 있지 않았다. 다른 이를 치유한다는 철학의 태국 마사지 속에, 밤이면 온 가족이 모여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던 몽골 양치기의 집 안에, 실크로드의 길목이라는 이란의 오랜 바자르(시장) 안에 있었다. 우리가 나아가야 할 방향이 공멸이 아닌 지속가능성과 다양성이라는 가치에 있다면, 답은 지역에 있다고 생각했다.

- 문제는 사회 시스템이 아닐까
유대인, 독일인, 프랑스인 친구들을 만났을 때 우리와 크게 다르지 않다는 느낌을 받았다(물론 내가 그 친구들과 나눈 시간은 정말 작은 일 편일 뿐이지만). 선진국의 친구들도 개개인으로 봤을 땐 우리와 크게 다르지 않은 사람이었다. 

프랑스 친구 집에서 머물 때의 일이다. 친구는 독립했었지만 지금은 남자친구와 함께 다시 부모님과 살고 있었다. 신기했던 건 남자친구의 모습이다. 모든 가족이 늦잠을 잤지만, 특히 더(10시까지) 늦잠을 잤던 남자친구, 하릴없이 하루를 보내거나 컴퓨터를 하던 남자친구, 어느 날 동네 병원에 면접을 보러 가던 남자친구. 상상해 보았다. 딸의 남편이 되고 싶다는 사람이 비정규직이라면, 우리나라 부모님들은 뭐라고 말할까.
에티오피아에서 함께 여행했던 독일 친구, 면직물 회사에 다니는 그 친구는 휴가를 온 거라 했다. 일이 재밌느냐 했더니 그냥 다닌다고 했다. 속으로 '독일 사람은 모두 자기 꿈의 직장을 다닐 줄 알았는데 꼭 그렇지는 않군.’ 생각이 들었다. 그 친구는 업무 후 여가생활, 연 6주 휴가를 통해 삶의 행복을 찾는다고 했다.
프랑스 리옹에서 일하던 친구의 하숙집에 놀러 갔다. 하숙집 아주머니는 집 1층에서 환자를 받는 의사였다. 그정도면 프랑스 사회에서도 중산층 이상은 되지 않을까 생각됐다. 어느 날 시간관리라는 개념을 설명해주게 됐는데 'Unbelievable'을 외치며 한국사람들은 이런 걸 모두 아냐고 내게 물었다. 난 아주머니가 시간관리 개념을 모른다는 사실에 더 놀랐다. 물론 내가 자기 개발을 '해야만' 하는 사회에서 자랐기 때문일 수도 있다. 하지만 자기 개발의 의미가 여가생활에 있는 사회. 당장 직장이 없더라도 불안하지 않은 사회. 문제는 사회가 아닐까 생각이 들었다.

런던에는 어디에나 공간이 있다. 공원, 광장, 박물관, 미술관, 거리. 그곳들은 모두 사람들에게 열린 공간. 미술전을 열 수도 있고, 광장에 나가 노래를 부르거나, 가진 게 아무것도 없다면 분필로 땅바닥에 그림을 그릴 수도 있다. 누구도 제재하지 않는다. 다른 이에게 피해가 없다면. 이런 공간이 있기에 서로가 만나 이해할 수 있고 섞일 수 있는 게 아닐까 생각이 든다. 그리스 광장에서 서양철학이 시작된 것처럼, 강대한 로마제국과 민주주의가 시작된 것처럼. 사람은 환경에 지배를 받을 수밖에 없다는 말처럼, 우리 사회의 문제도 사람을 만드는 환경(시스템)의 문제가 아닐까.

*맛을 잃은 소금, 존재 가치를 잃은 자본
불신 사회, 경쟁 사회, 황금만능 사회. 우리 사회는 왜 가치를 잃게 되었을까. 왜 우리는 돈이 제일 우선 가치인 사회를 살아가고 있을까. 문제가 돈이지만 원인도 돈(자본)이라고 생각한다. 자본주의에서 돈은 피와 같다. 피가 순환되지 못하면 죽게 된다. 순환되지 않는 돈이 있기 때문에 우리가 나눠 가질 수 있는 파이는 점점 작아지고 있다. 돈을 가진자들은 그들만의 세계를 살고 있지만, 그외 절대 다수는 돈 때문에 서로를 속이고, 내가 살아야한다는 핑계로 다른 사람을 밟아야만 하는 삶을 살고 있다. 중국산을 국내산이라 속여서 판매하는 이웃만 탓할게 아니라 그렇게 되도록 만든 체계를 돌아봐야 한다. 또 우리가 생활 서비스(의, 식, 주, 에너지, 건강, 교육, 정보, 교통, 오락)를 과도하게 외부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인간의 삶이 기업의 생산물을 소비하기 위해 존재하는, 기업의 물건을 만들어주기 위해 존재하는 인간인, 과거 식민의 삶이 되고 있는게 아닐까 느낌을 받는다.

하지만 또 해법은 돈에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돈을 벌기 위한 돈이 아니라, 사회적 가치를 실현하는 돈, 먹고 살 걱정을 덜어주는 돈, 사회적 안전망을 만드는 돈, 지역 순환 형 경제 체제(지역화)를 만드는 돈이 우리 문화를 바꾸는 바탕이 될거라 믿는다. 그 단초인 마을기업을 공부해보고 싶었다. 그래서 18개월로 계획한 여행 중 9개월째에 돌아올 결심을 했다. 세계는 넓었지만 내가 살아가고 싶은 세계가 생겼으니까. 올 봄 마을기업을 직접 보자는 요량으로 3개월 전국일주를 계획했다. 계획 중에 희망제작소 마을기업 부문(뿌리센터) 인턴 공지를 보았고 감사하게도 합격됐다.

이제 한걸음 딛고 있을 뿐이지만, 나름의 속도로 나아가고 있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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