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리와는 거리가 멀었던 내가 요리를 시작한 건, 그리스를 여행 할 때부터였다. 매일 먹은 삶은 계란과 콘푸로스트, 빵과 잼의 식단을 웨스턴 식이라고 위안하기도 질렸을 때였다. 가장 처음 했던 요리는 카르보나라 파스타였다. 이건 사실 요리라기보다는 라면 정도의 수준이었다. 수프를 넣고 되는 대로 끓였더니 완성이 돼버렸다. 맛있게 먹는 영제를 보며 어쩌면 나라는 인간의 쓸모는 요리에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음날 1kg 당 1,000원에 파는 감자와 양파를 보았다. 좋아, 오늘은 감자 볶음이다. 엄마가 대충 이렇게 요리했었더랬지……? 서걱서걱 자르고 슥삭슥삭 볶아보았다. 방금 막 외계에서 불시착한 듯한 으깬 감자 ‘덩어리’가 완성됐다. 그래도 영제는 맛있게 먹어주었다. 영제는 참으로 대단한 남자였다. 맛있게 먹는 영제를 보며 나는 그만 요리에 재미를 붙여버렸다. 하지만 내 요리는 만드는 족족 처음 목표와는 다른 무언가를 만드는 과정이었다. 프랑스에서는 오징어 볶음 만드는 법에 따라 요리를 했는데 라볶이쯤 되는 것이, 숙주나물 볶음을 만들려 했는데 태국의 볶음국수 팟타이 비슷한 것이 만들어졌다. 굳이 맛을 표현하자면 ‘이게 뭡니까’ 맛. 이름으로 담을 수 없는 요리들. 요리는 진정한 의미에서 창조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느 날 공자가 제자 자공에게 물었다고 한다. “내가 많이 배우고 그것을 다 기억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느냐”, 자공은 반문했다. “그렇지 않습니까?” 공자는 말했다. “자공아, 나는 단지 하나의 이치로 모든 것을 꿰뚫을 뿐이다.”


 공자 선생이 자공에게 약을 판 건 아닐 테지만 나는 때때로 궁금하다. 세상의 모든 것이 정말 하나의 이치로 꿰뚫어질까. 공자의 이 대화가 떠오를 때마다 생각나는 사람들이 있다. 여행을 다니며 만난 사람들이다. 한 사람은 인도에서 만난 누님이고, 다른 한 사람은 몽골에서 만난 아저씨다.


 북인도의 맥그로드 간즈, 이곳은 티베트 사람들이 중국의 강제 합병을 피해 망명 온 마을이다. 우리가 상해에 임시정부를 세웠던 것처럼 이곳에도 티베트 임시 정부가 있고, 티베트인들의 정신적 지주 달라이 라마가 있다. 그곳은 작은 산촌이라, 길이 많지않아 오가며 한국 사람도 이따금 마주칠 수 있었다. 그 누님과도 이곳에서 만났다. 위인전을 읽다 보면 자주 나오는 말이 있다.  누님은 ‘그놈 참 장군감’이라는 말이 절로 생각나는, 드센 사람이었다. 그 장군감 기운을 누님은 말을 하는데 쓰는 듯 했다. 도무지 쉬지를 않고 말을 쏟아냈다. 누님 일행은 우리 옆 방에 묵었고 그 방에는 매 끼니 한국 음식이 출몰했다. 김치찌개, 햇반, 참치 통조림, 3분 카레, 소주. 한식의 유혹과 맞서야 했다. 누님은 '인도여행'에 대해서 모르는 게 없어 보였다. 어디 이름을 꺼내면, 어떻게 가는지, 어디를 봐야 하는지, 언제 가야 좋다든지 등등이 방언 터지듯 다다다닷 쏟아졌다. 인도여행 2주, 인도를 어서 빨리 벗어나고 싶은 게 나의 제 1 소원이었다. 그런 내 눈에 인도를 수없이 왔다고 말하고 있는 그 누님은 해탈의 빛이 나는 존재였다. 만약 인도 여행학 학위라는 게 있고, 그걸 받아야 한다면 그 누님과는 면접관으로 다시 만나지 않을까는 생각도 들었다.


 며칠 오가며 누님의 여행에는 정해진 범위가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인도 여행은 잘 알지 모르겠지만, 정작 인도는 없었다. 함께 다니던 일행도 자기 통제 범위 안에 있는 사람들, 먹는 음식도 이미 익숙한 것들, 여행경로도 이미 경험한 장소. 범위 안에서 오가는 여행. 확인을 위한 여행. 


 또 다른 사람인 아저씨와는 몽골 게스트하우스에 머물 때 만났다. 밤 9시를 넘어가고 있을 때 두 아저씨가 체크인했다. 한국인 아저씨들이었다. 오랜만에 만난 한국 사람. 안녕하세요. 몽골에서 코이카 활동 중인 아저씨와, 이 아저씨를 만날 겸 몽골 여행을 온 아저씨였다. 코이카 아저씨는 대화의 대부분을 본인의 이야기로 채웠다. 그리고 아저씨는 굳이 ‘나 게스트하우스에 왔다'는 말을 여러 번 반복했다. 평상시에는 호텔에 다니는 데 호텔이 다 차서 게스트하우스에 어쩔 수 없이 왔다. 게스트하우스에 오니 여행자 느낌도 느껴보고 좋다. 아, 이거 참 같은 방에 주무셔 주셔서 감사하네요. 같은 송구스런 마음마저 들었다. 한참이 지난 후에야 아저씨는 우리가 여행 중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어디 어디 가는데?” 우리는 말했다. “중국이랑요,”(음, 가봤지), ”베트남에 가구요.”(음, 거기도 가봤어), “태국이요.”(아, 거긴 별로야) 평가를 바라고 말을 한건 아닌데, 친절한 아저씨였다. 그리고는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듯 또 본인의 이야기를 시작했다.


 사실 이 두 만남을 통해 만난 건 내 모습일 것이다. 나라는 사람도 결국 내 경험만으로 세상을 보고 해석하는 부류니까.


 우리는 경험을 하며 살아간다. 경험하는 것, 그 자체가 인간의 삶일지도 모르겠다. 경험이란 무엇일까.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를 더 깊게 이해하기 위해, 우리의 세계를 넓혀가기 위한 도구가 아닐까. 하지만 그 도구는 때로 자신을 가두는 상자와 틀이 돼버리기도 한다. ‘외국인 노동자’라는 말을 듣는 즉시 그 사람의 대부분을 알게 됐다고 판단하는 것처럼 말이다.


 안다는 건 모른다는 걸 알아가는 거다. 아는 것이 없음. 무지의 상태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진공의 상태. 알아간다는 것은 우리 안에 진공을 만들어가는 게 아닐까 생각이 든다. 자연은 진공을 싫어하 듯, 진공을 만들어지는 순간 우리는 그 공간을 향해 빨려간다. 물이 높은 곳에서 낮은 곳을 향해 흘러가듯, 바람이 많은 곳에서 적은 곳을 향해 불어가듯, 자연에 속한 우리도 자연의 법칙에 따라 그 공간을 향해 나아가는 게 아닐까. 그 힘을 활력이라 말하는 게 아닐까. 살아 움직이는 힘. 


 나는 공자가 말한 이치를 알지 못한다. 얻고 싶지 않다. 한 가지로 만 가지를 꿰뚫어볼 수 있다는 게 과연 행복일까. 나를 뒤흔들고 공간을 만들어 가는 과정, 이전까지 알아왔던 세계, 그 울타리 너머의 어둠을 밝히고 넓혀가는 과정. 진공을 채워가는 과정, 삶에 대한 탐구. 창조. 이건 뭡니까 맛 파스타를 만들어가는 것, 살아있다는 건 이런 게 아닐까.

 


태국 마사지도 배웠겠다. 팟타이(태국식 쌀국수)도 신나게 먹었겠다. 우리는 태국 여행을 마무리 하기로 했다. 다음 나라는 인도. 비자 발급에는 1주일이 걸렸다. 태국에서 1주일이라는 시간이 우리에게 또 생겼다. 방콕에서 버스로 2시간, 파타야에 갔다. 동양의 하와이라 불리우는 파타야. 여행을 시작하고 처음으로 바다에 갔다. 

사실 나는 바다에 가고 싶지 않았다. 바다는 바다, 거기서 거기 일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틈만나면 바다를 가자고 주문을 외운건 영제였다. 어쩌면 수중촬영을 위해 샀다는 아이폰용 방수팩을 써보고 싶어서 바다를 가고 싶어했는지 모르겠다. 그건 그렇고 때는 6월, 태국은 우기였다. 물의 나라에서의 장마는 어떤 모습일지 상상이 되는가. 나는 잠깐 미래의 모습을 그려보았다. 파타야의 비취 빛 바다, 열대 과일 주스, 부드러운 모래, 그리고 쏟아지는 비....... 아무도 없는 바닷가에서 남자 둘이 비를 맞으며 수영을 하고 있는 모습. 아마 그건 물놀이라기보다는 체련에 가까운 활동이 아닐까. 그곳이 아무리 파타야라해도 비를 맞으며 체련을 한다면 그곳은 실미도와 다를바가 없다.

어쨌든 우리는 파타야에 갔다. 그리고 나는 드디어 영제의 '아이폰용 방수팩’과 첫 대면을 했다. 여행 출발 때부터 영제가 그렇게 자랑했던 녀석이다. 비닐 팩에 핸드폰을 넣고 지퍼를 잠근다. 간단한 사용법. '너무 간단하다. 이 녀석 믿어도 되는 걸까?’ 의문이 들었다. 화장실에서 살짝 시험 해본 결과 비닐팩의 성능은 완벽 그 자체. 와우, 파타야 여행 비디오는 수중촬영이다! 우리는 바다로 뛰어갔다. 그런데 깜빡 잊은 게 있었다. 그 물건을 쓰는 인간의 상태……. 대부분 신혼 여행을 오는 파타야에서 남자 둘은 철저히 고립된 부류였다. 비가 안와서 사람이 바글바글 해도 우리 둘에게 파타야가 실미도라는 건, 비겁한 변명처럼 들리겠지만 사실이었다. 물에 빠뜨리기 게임을 남자 둘이 하기에는 부적합하다고 판단되서였을까(상상해보시라 물속에서 서로 엉켜 버둥대고 있는 원숭이 두 마리를). 영제는 아이폰이라도 바닷물 맛을 보여주고 싶었나보다. 영제는 방수팩의 지퍼를 잠그지 않았다. 무서븐 녀석.

아이폰은 물을 너무 많이 마셨는지 한여름에 동면을 시작했다. 생명을 넘어 기계에게까지 사랑을 주는 영제의 모습에 나는 감동.

파타야에 사흘간 머물면서 우리는 스노쿨링을 했다. 산호섬의 바닷속, 처음 보는 세계의 아름다움과 경이로움. 하지만 그 대신 우리는 조개 껍질에 베이고 긁혀야 했다. 멍게에 쏘였(다기 보다는 우리가 밟은 거지만)을 때 발끝에서 느껴지던 아련한 고통…

파타야를 떠나던 날, 우리는 빠른 도시적응(신발 신고 다니기)을 위해 '빨간약'을 발랐다. 빨간약을 그때껏 들고 다녔지만, 바를 일이 없어 거의 식초가 되지 않았을까 했던 즈음이다.

영제가 먼저 발랐다.
오른손잡이가 보통 그러듯 영제는 왼손으로 빨간약병을 들었다. 뚜껑을 열었다. 잠시 뚜껑에 달린 막대가 빨간약을 충분히 머금고 있는지 확인했다. 상처를 자세히 보기위해 왼손바닥을 눈 앞으로 가져갔고 약을 바르기 시작했다. 
‘슥슥-’ 
(주르륵 주르륵 주르륵)
영제는 마치 자신의 정성으로 상처가 낫고 있다는 듯, 약을 열심히 발랐다.
(주르륵 주르륵 주르륵)
"어? 이거뭐야?” 영제가 말했다. 빨간약이 새고 있었다. "약병이 새나?”
영제는 상황파악을 위한 시간을 잠깐 가졌다.
“……앗.”
왼손에 약을 바르느라 왼손에 들고 있던 병도 같이 뉘웠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영제는 마지막 빨간약을 마저 뱉어내고 있던 약병을 바로 세웠다. 
“……"
영제는 빨간약을 한방에 다 써버렸다. 내 상처는 침바르고 나으라는 뜻일까. 아프니까 청춘이니까, 약 따위에 의지하지 말고 더 강해지라는 뜻일까. 나는 또다시 감동.

여러모로 파타야 여행은 우리에게 상처뿐인 여행이었다. 그 상처들은 우리에게 여러 흔적을 남겼다. 영제의 아이폰은 결국 한국으로 조기 귀국했고, 나는 강해지기 보다는 상처가 낫길 기다리는 쪽을 선택했다. 또 그 흔적들은 우리에게 여러 영향을 미쳤다. 영제는 아이폰의 자리를 아이패드로 대신했고, 아이패드는 영제에게 전자책이라는 신세계를 열어주었다. 나의 도시적응은 샌들로 변질됐고, 내 패션은 아저씨가 됐다. 일주일 전과 일주일 후, 우리는 변해 있었다.

체 게바라의 남미 여행 이야기를 다룬 영화 
<모터싸이클 다이어리>의 마지막에는 이런 말이 나온다. 
“이번 여행은 생각 이상으로 많은 것을 변화시켰다. 난… 더 이상 내가 아니다. 적어도 이전의 나는 아니다.”
여행 후에 모두가 체 게바라처럼 혁명가가 되는건 아니다. 하지만, 여행이라는 불꽃은 누구에게나 흔적을 남기는 듯 하다. 멍게에 대한 트라우마가 생긴다던가, 겨울에도 샌들을 신고 다닌다던가의 식으로. 물론 흔적이라는 건 언젠가 사라질 수도 있고, 영원히 남겨질 수도 있다. 그리고 개중에는 의지를 태우는 신념이 되는 흔적도 있다. 이러한 상처는 18대 1로 싸웠다는 흔적처럼 분명하게 보이지는 않는다. 하지만 분명 인생의 상처는 어떤 식으로든 흔적을 남긴다. 그렇게 사람은 변해간다. 현재의 우리는 그저 그런 변화를 짐작할 수 있을 뿐, 정확히 알 수 없다. 언젠가 더듬더듬 짐작해 볼 수 있겠지. 그게 인생의 맛이니까. 오늘의 상처는 또 어떤 흔적이 될까. 기대해본다.










황홀한 글감옥

저자
조정래 지음
출판사
시사IN북. | 2009-09-30 출간
카테고리
시/에세이
책소개
소설가 조정래 선생은 1970년 [현대문학] 6월호에 ‘누명’을...
가격비교 글쓴이 평점  


* 황홀한 글감옥


-1. 지난 주 실천사항 

1) 보물지도 만들기 : 뚜둔!

2) 아침 조깅 30분 하기 5회(건강한 신체, 건강한 정신, 내면을 깨끗이)

2번 했습니다. 예비군 훈련 가는 사흘을 생각하지 못했네요...

3) 아침 '모닝페이지' 작성 6회(하숙집을 바꿀 수 없으니 제 자신을 바꾸는 걸로)

6회 작성.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노트북을 켜고 머릿속에 있는 것을 쏟아붓기입니다. 머리도 맑아지고 재미있습니다.


-2. 책 요약 
-3. 느낌 

작년에 읽고 두 번째 읽었습니다. 처음 읽었을 때만큼 큰 울림은 없었지만(그건 처음에 책을 읽어보기 전에는 세상을 보던 눈이 지금과 달랐기 때문이라고 생각됩니다), 여전히 경종을 울려주는 책이었습니다. 마음씨 좋은 할아버지랑 대화하는 기분이었습니다.
-4. 마음에 드는 구절 

13. 소설이란 무엇인가 하는 물음에서부터 응답을 찾아야 되겠군요. 소설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인생이란 무엇인가 하는 물음에

20. 이렇듯 세계적인 고전의 반열에 오른 명작 거의가 그 민족과 그 땅의 삶을 총체적으로 그려내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작품들이 그들 민족만이 아닌 전 인류적 공감과 감동을 얻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요. 그 작품들은 자기네 민족에 국한하지 않고 전 인류의 이상과 행복, 인간다운 삶의 가치를 옹호하고 구현하는 보편적 미덕을 최소공배수와 최대공약수로 갖추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가장 민족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이라는 문학론이 고전적 정설로 자리 잡게 된 것입니다.

22. 작가가 민족과 연결되어 있는 고리는 끊을 수 없는 인연이되, 자기 민족에만 함몰되지 말고 전 인류의 인간다운 삶을 조명하는 데 의식이 열려 있어야 함은 필수 과제입니다.

32. 그러나 어떤 일을 하든지 그 본질과 근본의 가치를 망각하거나 경시해서는 안 된다는 것은 불변의 철칙입니다. 그 태도를 지켜내지 못하겠으면 곧바로 필을 꺾는 게 옳습니다. 배기가스나 소음만 공해가 아닙니다. 남겨져야 할 필연을 자각하지 못하고 씌어지는 글들은 영혼의 공해물질이기 쉽습니다.

모든 비인간적인 불의에 저항하고, 올바른 인간의 길을 옹호해야 하는 작가는 오로지 진실만을 말해야 하는 존재입니다. 그것은 인생을 총체적으로 탐구하는 작가에게 주어진 사회적 책무입니다. 그 책무를 달고 즐겁게 이행할 의지와 각오가 없다면 작가가 되기를 바라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헤밍웨이가 스페인 내전에 참전하고, 사르트르가 레지스탕스에 가담하고, 에밀 졸라가 드레퓌스 사건을 짊어지고 정부 권력에 도전 했던 것은 작품과 함께 해옹으로 진실을 지키고자 했던 본보기였습니다.

38. 그래서 일찍부터 문학의 정신을 휴머니즘이라 했고, 문학인을 휴머니스트라 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현실적으로 문학은 정치권력 앞에서 무력하기 짝이 없습니다. 또, 경제 위력 앞에서도 무능하기 그지없습니다. 문학은 현실 속에서 그 어떤 문제를 해결 할 수 있는 직접적인 수단이나 방법이 될 수 없습니다.
(정치력/경제력을 능가하는 그 어떤 것)
정치력/경제력이 현실적으로 발휘하는 위력 앞에서 문학의 힘은 더없이 미약하고 허약할 뿐입니다. 그러나 좋은 작품, 훌륭한 소설은 모든 것을 망각하게 하는 세월의 힘을 이겨내고 영생의 생명력을 발휘하게 됩니다.

45. (글 잘 쓰는 요령은 없다)
50여 년이 지났는데도 변함이 없습니다. 이런 게 인생사 아니던가요. 그런 현상은 ‘답보’가 아닙니다. ‘본질’의 문제이기 때문에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또 50년, 1백년이 지나도 그 질문은 계속될 것입니다. 그게 기계문명의 발달과 다른 인생 본연의 문제들 아닙니까.
결국 저는 그 사실 하나를 깨달으려고 대학 4년을 다닌 셈이었습니다. 그러나 대학 4년을 바쳐 그 사실 하나를 겨우 깨달았다고 해서 저는 서운해하거나 억울해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뿌듯했고 감사히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불교에서 말하는 ‘도통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어렴풋이 알 것 같은 생각이 들었고, 주제넘게도 열반의 기쁨이라는 것이 무엇인지도 헤아릴 수 있을 것 같기도 했습니다. 그만큼 저는 그 깨달음으로 제가 가야 할 문학의 길을 확실하고 분명하게 보게 된 것이었습니다.
 ‘돌은 단 두 개. 뒷돌을 앞으로 옮겨놓아가며 스스로, 혼자의 힘으로 강을 건너가야 한다. 그게 문학의 징검다리다.’

54. 물론 제가 이런 글을 써도 행정기관에서는 끄떡도 하지 않고, 세상도 들은 척도 안 한다는 것을 잘 압니다. 그러나 옳은 일, 바른 말은 열 번이고 스무 번이고 하고 하고 또 해야 하는 것이 지식인의 사명이고 책무입니다. 그 바보스러운 되풀이가 쌓이고 쌓여 결국에는 잘못된 세상사가 바로잡히고, 새로운 정책이 수립되고 합니다. 그것이 역사가 가르쳐주는 교훈입니다. 인류의 역사는 그런 우둔한 듯한 힘들이 뭉치고 커져서 변화하고 발전해왔습니다.

'모든 예술은 모방으로 시작하되, 그것을 넘어서야 한다.’
(…) 제가 앞에서 좋은 책을 많이 읽으라고 누누이 말한 것도 ‘창조적 모방’을 하라는 뜻일 수 있습니다.
 좋은 글을 읽고 감동하고, 그 감동에 자극되어 글을 쓰고 싶은 욕구가 샘솟을 때 그 글을 닮고 싶어 하는 건 너무나 자연스럽고 당연한 일입니다. 닮고 싶은 글이 있으면 서슴지 마시고 그 글을 흉내 내십시오. 그러나 여기서 필히 조심할 것이 있습니다. 한 작가의 작품에만 고정되거나 집착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다른 작가들을 보지 못하고 특정 작가에게만 빠져들다 보면 그 작가의 아류가 되고 맙니다. 그것은 자살의 올가미고 죽음의 늪입니다. 자기만의 창조적인 세계를 구축하지 못하고 아류로 끝나는 것처럼 비참한 실패는 없습니다. 
 여러 작가를 모방하되 끝내는 자기의 개성적인 세계를 창조해내야만 예술가로 입신할 수 있으니까 모방을 하되 ‘창조적 모방’이 되게 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방법은 효과와는 반대로 적잖은 위험을 안고 있기도 합니다. 옮겨 베끼기(필사)의 목적은 아류가 되자는 것이 아니고 보다 빠르고 효과적으로 자기의 본체를 확립하자는 것입니다. 그 누구도 흉내 내지 않은 자기만의 특색과 개성을 갖춘 문장, 그것을 문체라고 합니다. 앞에서 말한 ‘창조적 모방’이 바로 ‘자기만의 문체 확립’입니다.

그런 부끄러운 행위는 왜 발생할까요? 그 첫 번째 이유가, 모방을 넘어서 ‘창조적 모방’을 확실히 이루기 전에 작가가 된 때문이 아닌가 합니다. 곧 모방의 습관성의 연장이라는 뜻이지요. 두 번째는, 작가로서 빨리 입신하고 싶은 조급성 때문이지요. 세 번째는 세상이 모르겠거니 하는 비양심의 소행입니다. 이것이 가장 나쁜 동인입니다.

표절 : 남의 시가/문장 등의 글귀를 훔쳐서 자기 것인 것처럼 발표함.

국어사전의 해석입니다. 이 ‘훔쳐서’라는 말은 무슨 뜻인가요? 다름아니라 ‘도둑질’이라는 것입니다. ‘글 도둑질’이 곧 표절입니다. (…) 그런 행위를 하게 되는 건 능력 부족, 치열성 부족, 노력 부족, 양심 결여의 결과입니다.

모방으로부터 예술 행위를 시작하는 것은 아름다우나 끝내 모방 중독자가 되어버리는 것은 가장 비참하고 추한 모습입니다. 그 위험한 함정에 빠지지 않도록 조심하십시오. 그 방법이 뭐가 있느냐고요? 예, 아주 손쉬운 방법이 있습니다. 살 껍질이 닳아지고, 속살이 닳아지고, 뼈가 닳아질 때까지 ‘노력’하고 노력하십시오.

69. 위대한 천재들의 작품을 정신 집중해 차근차근 또박또박 읽어나가십시오. 그러면 당신은 무수한 봉우리를 넘고 골짜기를 건너며 온갖 모석을 줍게 될 것입니다. 작가마다 다른 다채로운 문체, 형형색색의 소재, 각양각색의 주제, 온갖 기발한 구상, 기기묘묘한 표현 기법, 무궁무진한 상상력, 세련된 대사 처리의 효과, 과감한 생략의 역효과, 뜻밖의 상징의 감동, 살아 생동하는 무수한 인물 군상…… 
그건 세계적인 천재들이 맘껏 펼치는 문학의 대향연이며, 언어의 대축제입니다. 그 잔치에서 맘껏 마시고, 취하고, 즐기십시오.

81. 왜 그렇게 그런 좋은 글을 쓰고 싶은 마음이 동하는 것인지 제 마음을 저도 모를 일이었습니다. 그걸 굳이 설명하자면 배고플 때 밥을 먹고 싶은 마음과 같은 것이라고 하면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글 말고, 이 세상 모든 일에 대해 각자가 하고 싶은 마음은 이런 식으로 절로 동해야 합니다. 그렇게 마음이 동하는 일이 있으면 망설임 없이 그 일을 직업으로 삼으면 실패가 없고, 후회가 없고, 그 생애는 행복합니다. 단, 사람에 따라서 그 발견의 시기가 다를 뿐, 누구나 한 가지 일에는 마음 동하게 되어 있습니다.

83. “말도 또록또록 잘허고, 시상 물정도 어런보담 더 초롱초롱 잘 암시로 워째 오짐을 싸고 요런다냐 와. 시상에 귀신이 곡헐 노릇이 따로 읎당께로.”
어머니가 제 머리통을 인정사정없이 쥐어박으며 쏟아놓는 전라도식 넋두리였습니다.

벌교는 그런 살벌함이 전혀 없이 아름다운 풍광에 평화로운 곳이었습니다. 하루에 두 차례씩 들고 나는 밀물과 썰물이 신비롭기 그지없었고, 포구의 풍성하고 기나긴 갈대밭이 한없이 아름답고 포근 했으며, 철따라 날아왔다가 떠나가는 기러기 떼의 그 정연한 비행과 청아한 울음소리는 또 얼마나 신기하고 마음 맑아지는 음아이었는지 모릅니다. 첨산의 신령스러움, 징광산의 우람함, 제석산의 의연함, 그리고 20리 방죽길의 길고 긴 아득함과 중도 들판의 풍성함, 갯내음 스민 개울가 논둑에 숨은 참게를 갈대꽃대로 살금살금 유인해 잡던 그 깨소금 맛, 설한풍 속에 피던 핏빛 동백의 처연한 아름다움, 겨울밤 대나무밭 참새 사냥의 설레임, 옛날이야기가 치렁치렁 이어졌던 겨울밤 머슴들 사랑방에서 생고구마 깎아 먹던 맛과 생두부에 김치를 감아 먹던 맛, 과부인 친구 어머니의 슬프고 외로운 소복 모습을 닮았던 하얀 치자꽃, 보리며 밀 서리를 하다가 쫓기던 재미, 비 쏟아지는 여름밤 발가벗고 감나무를 타고 올랐던 단감 서리의 아슬아슬함, 이런 벌교의 평화로움과 정다움이 저를 어루만지고 안정시켜 햑요 좋게 야뇨증을 치료해준 것입니다. 

87. 거기에 바로 제 눈을 사로잡는 그림이 끼워져 있었던 것입니다.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삼국지>의 으뜸 장수로 그 유명한 관우(관운장)가 힘센 말을 타고 긴 창을 휘두르며 적을 무찌르는 모습이었습니다. 부릅뜬 눈, 굳센 입, 준엄한 얼굴, 휘날리는 긴 수염, 전신에서 뻗쳐나는 힘, 긴 창을 꼬나 잡은 억센 두 팔, 그리고 전신의 근육이 울퉁불퉁 드러난 말의 역동적인 모습.
 그 생생히 살아 있는 모습은 충격적이고 감동적인 것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그림을 보고 제 가슴이 떨리도록 감동을 받은 것이 그때가 처음이었습니다. 저는 그 감동을 어찌할 수 없어 손수 그릴 욕심을 냈습니다.

그 즈음에 했던 또 하나 남다른 짓이 머슴방 밤 마실 돌기였습니다. 무한정 이어지는 옛날이야기를 듣는 맛에 홀렸던 것입니다. 옛날얘기 듣는 맛은 어찌 그리도 고소하고 달고 차지고 간드러졌던지요.

91. 초등학교 시절에 누구나 지긋지긋해한 방학숙제가 하나 있지 않습니까. 그건 그 야만적(?)인 ‘일기 쓰기’입니다. 그러나 저는 그 숙제를 가장 반겼습니다. 왜냐하면 날마다 쓸 거리가 무궁무진했기 때문입니다.
(…) 저는 전혀 달랐습니다. 썰매를 만들었으면 그 과정을 세세하게 써나갑니다. 그러다 보면 하루 일기가 대학노트 두 장도 되고, 석장도 되었습니다(그렇습니다. 저는 일기 숙제를 하기 위해 네모칸 큰 초등생용 공책을 쓰지 않고 처음부터 대학노트를 썼습니다. 쓸 것이 많다는 제 말에 아버지가 특별히 사주신 것이었습니다). 썰매를 타는 재미도, 얼음이 깨져 죽을 뻔한 일도 몇 장씩의 일기가 되었습니다. 뻘밭에서 한쪽 다리가 크고 빨간 농게를 잡다가 엎어지고 뒤집어지며 아이들과 싸운 일, 갈대꽃술 끝으로 참게를 까딱까딱 놀려 굴 밖으로 유인해낸 순간 재빨리 덮치다가 그만 손가락을 물려 소리소리 지르며 뺑뺑이를 치던 일들을 실컷 써나가다 보면 겨울방학 숙제와 여름방학 숙제는 대학노트 한 권으로는 모자라고는 했습니다.
 아버지는 새 대학노트를 사와 다 쓴 처음의 대학노트와 합본을 만들었습니다. 그건 먼저의 대학노트 뒷표지와 새 대학노트 앞표지를 실로 꿰매는 것이었습니다. 아버지는 평생에 걸쳐서 여자가 하는 일은 그 어떤 것도 손에 댄 일이 없습니다. 그런데 아버지는 대학노트 앞뒤 표지를 꿰매는 그 서툴고 어설픈 바느질을 손수 하셨습니다. 우리나라의 엄한 아버지가 거의 다 그렇듯 제 아버지도 자식들에게 ‘잘했다’는 그 간단한 칭찬 한마디를 한 일이 없습니다. 그런데 저는 아무 말 없이 대학노트 두 권을 합치고 있는 아버지의 손길이 제 머리를 쓰다듬는 것 같은 부드러움과 따스함을 느꼈습니다.

96. 회의가 없다면 사람일 수 없고, 발전도 있을 수 없겠지요. 그리고 그런 낙방들은 실패가 아니고 수련이고 단련입니다.
흔히 얘기하는 교훈 중에 대기만성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국어사전은 ‘큰 그릇을 만드는 데는 시간이 오래 걸린다는 뜻으로, 크게 될 사람은 늦게 이루어진다는 말’이라고 했습니다. 이 뜻풀이는 글자의 의미에 충실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만성’은 오래 걸린다는 뜻만이 아니라 ‘오래도록 노력해야만 한다’는 의미도 담고 있습니다. ‘크게 되려면 오래 노력해야 한다.’ 

102. ‘내가 지난 4년 동안 변화해온 것처럼 앞으로도 4년 단위로 그렇게 변해간다면 아마 40년쯤 후에는 나는 성인으로 변해 있을지도 모른다.’

104. ‘왜 그런 소재를 선택했을까.’
‘주제와 소재는 효과적으로 조화되어 있는가.’
‘주제의 형상화는 잘 이루어졌는가.’
‘사건 전개는 우연이나 조작적이지 않고 실감 있고 필연적인가.’
‘구성의 허술함이나 무리는 없는가.’
‘인물들의 개성과 생동감은 살아 있는가.’
‘문체의 특성은 무엇인가.’
‘감각과 묘사력은 특색이 있는가.’
‘결말 처리는 효과적이었는가.’
‘소설로서 성취도는 어느 정도인가.’

105. ‘아, 잘 썼다. 그치만 별것 아니네.’
 ‘나도 딴 방법으로 얼마든지 쓸 수 있어.’ 
당신이 소설을 쓸 수 있으려면 아무리 좋은 작품을 읽었더라도 당신의 독후감은 늘 이래야 합니다. 그것이 객기든, 만용이든, 오만이든, 오기든 다 좋습니다. 좋은 작품을 좋다고 인정하면서도 한 가닥 곤두서는 자신감. 그것이 당신의 영토이며, 당신이 차지할 수 있는 빈자리입니다. 수백, 수천 편의 좋은 작품을 읽었더라도 그 ‘빈자리’는 당신의 의식 속에 꼭 확보되어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섭섭하지만 작가 되기를 포기해야 할 것입니다. 기죽고 가위눌려서 뒤는 일은 없으니까요.

107. 인간과 인간 세상의 본질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인간은 혼자일 수 없고 서로서로 관계를 맺는 존재이며, 그 관계의 얽히고설킴이 사회고, 그 속에서 벌어지는 문제적 이야기들을 형상화하는 것이 소설입니다. 이 의식을 굳건히 세우고 있으면 어떤 방향으로 가야 하고, 어떤 소설을 써야 할지 그 길이 보일 것입니다.

-5. 책을 읽고 실천해 볼 3가지.


1) 이번주는 약속 더 이상 추가하지 않기(삶의 재배치)


2) 이번 주 여행기 쓰고 스스로 평가해보기(책 104페이지 물음에 따라)

‘왜 그런 소재를 선택했을까.’
‘주제와 소재는 효과적으로 조화되어 있는가.’
‘주제의 형상화는 잘 이루어졌는가.’
‘사건 전개는 우연이나 조작적이지 않고 실감 있고 필연적인가.’
‘구성의 허술함이나 무리는 없는가.’
‘인물들의 개성과 생동감은 살아 있는가.’
‘문체의 특성은 무엇인가.’
‘감각과 묘사력은 특색이 있는가.’
‘결말 처리는 효과적이었는가.’
‘소설로서 성취도는 어느 정도인가.’


3) 아침 30분 조깅 5번(체력관리)





 인도의 혼란과 번잡함을 피해 갔던 북인도, 맥그로드 간즈. 

그곳에는 해발 2875m의 산이 있었다. 우리는 그 산을 올랐다. 


‘올라가는데 3시간 정도 걸려요. 별로 어렵지 않습니다.’라는 어느 블로거의 말. 그 말만 믿고 가벼운 마음으로 올라갔다. 어쩐 일인지 3시간이 지나도 걷고 걷는, 3시간은 3시간 전에 지나갔는뎁쇼…? 8시간. 가히 지리산 뺨치는 산행. 3시간에 주파한 그 블로거는 어쩌면 엄홍길 아저씨……. 무엇보다 언제끝날지 모르는 상태로 계속 오른다는 게 더 힘들었다. 모든 힘을 쥐어짰다. 마지막 남은 내용물까지 짜여지는 치약의 기분. 모든 진이 빠져나가버린 느낌. 자신의 간을 집에다 두고 왔다는 거짓말로 살아남은 토끼처럼, 아니면 차두리형의 말대로 나도 모든 걸 간 탓으로 돌리고 돌아가고 싶었다. 하지만 내겐 그 산행을 포기할 수 없는 이유가 있었다.


'산 정상 매점에 '메기 라면’이 있다고 하던데…?'


‘메기 라면? 그건 혹시 … 메…메기 매운탕 라면?’ 라면 그것은 무엇인가. 나는 이를 악물었다. 외국에서 처음 먹는 매운탕이구나. 포기할 수 없었다. 메기와 나는 만고 끝에 정상에서 만났다. 내 앞에는 물고기 메기 라면이 아닌 매기 라면이 있었다. 라면 이름이 매기(Maggi)였다. 메기와 매기, 점 하나였지만 그건 한 인간에겐 천국과 지옥이었다. 해발 2875m, 구름 속에 앉아 김이 모락모락나는 매기라면을 바라봤다. 다시 한번 다짐했다. 다시는 속지 말아야지.


 누군가 내게 등산의 매력이 무어냐 물어본다면, 나는 ‘돌아봄'이라 말하고 싶다. 지나온 길을 돌아보는 맛. 오를 땐 몰랐으나 그 곳이 얼마나 멋진 곳이었는지 깨닫는 맛. 힘든 산일수록 그 맛은 깊은 듯 하다.


 독일의 대문호 괴테. 그의 인생을 전과 후로 나눈 이탈리아 여행. 그 길 위에서 그는 그가 썼던 작품들의 사람들을 만났다고 했다. 그날 트리운드산을 오르며 나는 한국에 있는 사람들, 내 마음에 있던 사람들을 보았다. 내 마음에 있으나 볼 수 없는 사람들. 그립고 그립고 그리웠다. 여행이라는 산은 뒤를 돌아볼 때 열망이 느껴질 때가 많은 산이었다. 보고 싶다는 열망. 포기하고 산을 내려가고 싶었던 날들이 많았다. 그 옛날 글 공부를 중단하고 집으로 돌아온 한석봉. 그건 사실 공부가 충분한 것 같다는 그의 자만이 아니라 어머니가 보고 싶었던 그리움이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길 위에서 나는 내 모습도 보았다.


 어느 곳에도 얽매이고 싶지 않았던, 그저 물이 흘러가듯 살아보고 싶었던, 아직 개울조차 벗어나보지 못했다고 생각했던 내 자신을 보았다. 나는 내 자신이 미래에 어떤 사람이 되어 나를 기다리고 있을지 만나보고 싶었다. 이 여행이라는 산 너머에 내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지금 그 곳을 향해, 지금 만나러 가고있는 것이다고 생각을 한다. 하루하루 지날수록 한국으로부터 멀어지고 있었지만 그건 오히려 ‘만날 날'에 가까워지고 있는 것이었다. 우리는 현재에 살지만 미래를 향해 나아가는 존재이므로.


 '꿈을 꾸어라'는 말이 있다. 그건 우리가 미래의 우리에게서 꿈을 꿔(Borrow)온다는 말이 아닐까. 하루하루 충실히 빚을 갚아 나간다면 우리는 미래의 우리를 만날 수 있다는 말이 아닐까. 여행에 다녀온 나는 나를 만났을까? 물론. 그리고 새롭게 갚아야 할 빚이 생겼다. 넘어야 할 산도 생겼다. 만나고 싶은 내가 있다. 나는 여전히 나를 만나러 가고 있다. 미래의 나와 지인들, 또 어떤 모습일지 궁금하다. 지금 만나러 가고 있다.




인도 아쉬람 고아원에서 지낼 때의 일이다.

그날은 고아원의 오랜 숙원 사업이었던 모래 운동장이 만들어진 날이었다. 고아원에는 넓은 공터가 있었다. 그곳이 운동장 구실을 해왔지만, 흙으로 돼있어서 물이 잘 빠지지 않았다. 콜카타는 비가 자주 오기 때문에 운동장은 진흙 탕이 되기 일쑤였다. 그래서 선교사님은 이 사업을 오랫동안 구상해 왔던 것이다. 

‘이게 강가에서만 구할 수 있는 모래인데, 건축용으로는 못 쓰일 정도로 입자가 너무 고운 거야. 그래서 물이 잘 빠지지. 내가 이걸 구하려고 …’ 로 시작하는 일련의 설교를 매일 들었다. 그래서 그 모래가 일반 모래랑 뭐가 다른 건지 난 도통 모르겠는데, 마침내 그 모래가 운동장에 깔린 것이다.

운동장 단장 기념으로 그날 고아원의 모든 아이들이 멀리뛰기, 땅따먹기 등의 게임을 했다. 그리고 이내 우리는 축구를 하게 되었다. 축구! 어린시절이 아련하게 떠오른다. 피구왕 통키 시절 동네에서 똥볼 좀 찼던 내가 아니던가. 볼만 있어서 외로웠던 내가 아니던가. 잊고 있었던 어린 시절이 떠올랐다. 한편 현란한 축구 실력으로 아이들 속에서 빛나는 영웅이 된 내 모습도 그려졌다. 내 실력을 보여주마……. 

하지만 난 곧 이성을 되찾았다. 나는 어른이 아니던가. 그러고는 내가 봐도 어른스런 생각을 했다. 꼬맹이들 사이에 나(=어른)라는 불균형을 만들 수 없지. 나는 심판을 보기로 했다.

아이들은 생각보다 훨씬 잘했다. 냅다 차고 냅다 뛰는 동네 축구가 아니었다. 주고받는 패스가 있는 팀플레이 축구를 구사했다. 어느새 한쪽 팀이 18 대 8점이라는 농구 경기에서나 볼 법한 점수 차로 지고 있었다. 지는 팀 아이들에게 안쓰러운 마음이 들었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 이 녀석들 내가 섞어준 팀이 아니라 자기들 마음대로 팀을 바꿔서 경기를 하고 있었다. 그래서 실력 차이가 크게 났던 것이다. 이 괘씸한 녀석들. 나는 불의를 바로잡겠다는 마음이 들었고, 지고 있는 팀 선수로 들어갔다.

20분 후. 21 대 8…. 나(=어른?)는 애초에 이 경기에서 불균형의 요인이 전혀 될 수 없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분하다. 지고 있어 분하기도 했지만, 이런 와중에도 그만 쉬고 싶다고 생각하는 나 자신에게도 분했다. 그런데 아까부터 자꾸 내 앞에서 깐족깐족 까불거리는 꼬맹이가 또 깐족이는 게 보였다. 만화나 영화를 보면 주인공들은 대게 분노를 통해 더 강해지는 양상을 보인다. 내게 분노는 성장이라기보다는 진심으로 그 꼬맹이 얼굴에 궁서체 총알 슛을 날려주고 싶다는 마음이 들게 했다. 경기는 끝이났고 나는 그날 밤 방에 누워 생각했다. 나는 언제 어른이 되는걸까...

어느새 일주일이 지났고 고아원을 떠날 시간이 되었다. 헤어지던 날 아침, 영제는 결국 아이들을 울렸다. 

고아원에서 지내며 많은 일이 있었다. 손을 잡아주고, 안아주고, 미소 지어주고, 웃어주고, 바라봐주고, 함께 춤춰주고……아이들은 우리에게 많은 선물을 주었다. 고아원에 가서야 깨달은 사실은 베푸는 일은 내가 아니라 아이들이 해준 일이라는 것이다. 나라는 존재도 사랑이라는 걸 할 수 있다는 걸 깨달았다. 하지만 그 수많은 아이들을 지켜보고, 잡아주기에는 내 두 손과 두 눈은 부족하다는 것도 배웠다. 사랑 앞에 나는 작은 존재였다. 그렇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작은 것에서부터 사랑을 실천해야 한다는 걸 배웠다. 실천하는 사랑이야말로 진정한 사랑이다.

사람은 언제 성숙해지는 걸까. 단순히 나이를 먹는다고 성숙해지는 게 아니라는 것쯤은 나도 이제 안다. 실천하는 사랑을 통해, 나를 낮추고 깊어짐으로써 우리는 성숙을 더 해가는 게 아닐까. 어렸을 땐 ‘나'만 알던 아이가 ‘우리'라는 것을 알게 되듯, 인간은 ‘우리'라는 울타리를 넓혀감으로 더 큰 어른이 되는 게 아닐까. 그러므로 세상은 밝아지는 게 아닐까 생각이 든다.

위대한 사랑을 실천한 마더 테레사의 시 한 편을 붙인다.

한번에 한 사람씩

난 결코 대중을 구원하려고 하지 않는다.
다만 한 개인을 바라볼 뿐이다.
나는 한번에 단지 한 사람만을 사랑할 수 있다.
한번에 단지 한 사람만을 껴안을 수 있다.
단지 한 사람, 한 사람, 한 사람씩만…

따라서 당신도 시작하고
나도 시작하는 것이다.
난 한 사람을 붙잡는다.
만일 내가 그 사람을 붙잡지 않는다면
난 4만 2천 명을 붙잡지 못했을 것이다.

모든 노력은 단지 바다에 붓는 한 방울, 물과 같다.
하지만 내가 그 한 방울의 물을 붓지 않았다면
바다는 그 한 방울만큼 줄어들 것이다.
단지 시작하는 것이다.
한번에 한 사람씩


* 여행 비디오 보기
: 가슴과 가슴에 닿는 길-인도 고아원
http://www.youtube.com/watch?v=k2KijKQKTPA




박진균 선교사님




 



철학의 나라로 불리는 인도에서는 그 명성에 걸맞게 소유와 존재에 대해 생각해 볼 일이 간간이 발생했다. 

인도 콜카타에서 운이 좋게도 영제와 내게 고아원에서 일주일간 지낼 기회가 생겼다. 아쉬람 고아원은 한국인 선교사님이 운영 중인 고아원이다. 오전에는 고아원 보수 작업을 돕고, 오후에는 학교에 다녀온 아이들과 놀다 보면 하루가 뉘엿뉘엿 저물었다. 

하루의 마무리가 샤워에서 오는 나는 알고 보면 깔끔한 면도 있는 남자다. 내게 샤워는 하루를 마무리하는 의식(촛불 켜고 하는 건 아니니 오해는 마시라). 의식이라 생각한다면 장소도 나름 중요할텐데 고아원의 샤워장은 '몸을 씻는다'는 본질적 철학은 공유하고 있으나 보통의 상상과는 다른 ‘장’이 눈앞에 펼쳐졌다.

그 샤워장은 세 개의 콘크리트벽과 한 개의 수도꼭지를 의미했다. 명도 30%의 흐릿한 조명은 반경 1미터 너머로는 어둑하게 보이는, 그래서인지 뒤에 뭔가 서있는 건 아닌가 싶은 은근한 분위기를 연출해주었다. 수도꼭지는 허리 정도 높이에 있어 무릎을 꿇고 샤워를 했는데, 그 덕인지 왠지 경건해지는 기분도 들었다.

어쨌든 그날도 평소와 같이 샤워를 마치고 몸의 물기를 닦고 있을 때였더랬다. 오늘 하루도 지나가는구나. 고생했다. 따위의 생각을 하다가 문득 위를 쳐다봤다. 머리 위에서 거미 두 마리가 신 나는 댄스파티를 열고 있었다. 영역 다툼인지 짝짓기를 위한 매력발산인지는 모르겠지만, 거미들은 엄지손가락 마디만 한 덩치로 점핑을 하고 있었다. 그 결에 거미줄도 출렁출렁. 정적 속에 펼쳐지는 무반주 바운스. 나는 곤충을 잘 모른다. 다행히 그 친구들은 한국에서도 흔히 보던 친구들이었다. 남성이라는 게 상대적인 개념은 아니겠지만, 나의 남성성은 주변에 여성이 없다면 굳이 흔적을 보이지 않는 예의바른 친구다. 나는 잠시 그들을 바라보고 서 있었다.

그래 냉정하자. 나는야 마초남. 이 거미들한테는 내가 오히려 공포의 대상(일 것)이다. 최소한 독은 없(을 것이)다. 마음을 추스르고 자기최면을 걸고 싶었다. 갑자기 어디서 온 건지 알 수 없는 또 한 마리 거미가 나타났다. 댄스파티 현장은 순식간에 아쉬람 샤워장배 댄스 배틀이 되었다. 고요했던 바운스 현장. 뭉크의 <절규>가 떠오른다. 무너져가는 자아의 자락을 붙잡으며 나는 생각했다.

왜 내 옷은 이 거미들 옆에 걸려있는가. 옷이란 무엇인가. 사람은 옷을 꼭 입어야 하는가.
아, 인도는 역시 철학의 나라.

고아원에 들어가면서 일주일간 한국과 연락이 끊겼다. 그때 부모님은 내가 쓴 유서를 보셨다.

여행을 준비하면서 여러 가지 물건들을 샀다. 노트북, 카메라, 신발 등. 물건들을 사면서 어차피 잃어버릴 물건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 번쯤 강도를 당하지 않을까? 강도를 당할 때까지 내가 잠시 맡아서 사용할 뿐, 내 물건이 아니라고, 연연하지 말자고 생각했다.

그렇게 물건을 사던 중, 그러고 보니 여행 중에 나도 죽을 수 있는 거 아닌가? 라는 생각에 이르렀다. 고등학생 때 땡볕에서 구보를 뛰다가 탈수증이 온 적이 있었다. 그때 ‘아, 사람이 이렇게 죽는구나’라고 생각했던 적 이후로 죽음이 이렇게 진지하게 다가온 건 처음인 것 같다.

울컥하는 마음에 부모님께 유서를 썼다. ‘두 분이 이 글을 읽으실 때쯤이면 저는 지금… ’ 으로 시작되는 편지. 비장한 마음으로 공책을 펼쳐 끄적거렸다. 눈물이 찔끔. 운이 썩 좋았던 인생이었구나 라는 생각.

하지만 결국 그 유서는 미완성에 그쳤다. 유서를 깔끔하게 편지지에 옮겨 적어 집에 있는 짐 속에 넣는다. 행여 내게 무슨 일이 생기면 짐을 정리하던 부모님이 그 유서를 발견한다.는 게 원래 계획이었다. 그런데 그만 그 북받쳤던 마음이 너무나 급속히 시들해져버렸고, 결국 쓰는 게 중단된 그 유서의 존재조차 나는 까먹어버렸다.

나는 그 유서가 되다만 문장이 적힌 공책과 함께 여행을 다녔다. 공책은 태국쯤에서 다 쓰여졌고 먼저 한국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썼다는 것도 까먹고 있었던 그 편지가 마치 고대 유적이 발견되듯 부모님의 손에 발굴이 된 것이다. 그러니까 그 유서는 애당초 읽혀서는 안돼는 유서였던 것이다. 연락 두절 상태에서, ‘두 분이 이 편지를 읽으실 때쯤이면 저는 지금…’으로 시작되는 유서를 부모님이 받았으니 매우 놀란 건 당연한 반응일 것이다.

살아오면서 썼던 편지 중 생각만 해도 찢어버리고 싶은 편지가 있다. 짝사랑했던 여자애에게 썼던 편지, 훈련소에서 친구들에게 썼던 편지. 그리고 그 유서. 하지만 여행을 나오기 전에는 그랬다. 죽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만약 길 위에서 죽게 된다면 내 명은 그곳까지인 것으로 생각하기로 했다. 

한국에 돌아오고 얼마 뒤 어느 모임에 나갔다가 '세상에 무엇을 남기고 싶은가'라는 질문을 받았다. 치킨을 먹던 중이었다. 치킨 앞에서 입을 먹는 데 외에 쓰는 건 죄악이다. 나는 대답을 얼버무렸다. 집에 돌아오는 길, 치킨 맛은 잊혀졌지만, 질문은 잊히지가 않았다. 나는 세상에 무엇을 남기고 싶을까.

나라는 사람이 이 세상에 있다는 건 이 우주 어딘가 나라는 조각으로 채워질 시간과 공간이 있기 때문이지 않을까는 생각을 한다. 그렇다고 그게 죽기 전까지 뭔가 완성된 결과물을 이 세상에 남겨야 된다는 뜻은 아닐 것 같다. 인간이 살아야 하는 확실한 목적 따위가 존재한다면 인간은 또 그 목적의 노예가 될 테니까. 강제적인 의미에 의해서가 아니라 나는 내 자유 의지로 내 인생을 살고 싶다. 하루하루가 충만하다면 무언가 남기지 않더라도 삶은 그것만으로도 충분하지 않을까.

처음 여행기를 쓰자고 결심한 이유는 사실 여행을 통해 얻은 결과를 남기고 싶어서였다. 지금은 아니다. 여행이라는 과정 자체를, 마음에서 돋아나는 무언가를 발견하고, 망치기도 하고, 하나의 생각을 더듬더듬 짚어가고, 길을 찾아가는 과정 자체를 쓰고 싶다. 여행이란 무엇이다라고 정해져 있는 게 아니라, 각자의 삶에서 울타리를 벗어나보는 과정이므로. 그렇기에 세상에 똑같은 여행 따위는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결국 말하고 싶은 건 ‘여행의 과정’이지, ‘여행의 방법’이 아니다.

오스트리아 출신의 사상가 앙드레 고르는 인생 말년에 이런 말을 했다. "모든 것을 다 말한 뒤에도 여전히 모든 것은 아직 말해져야 하는 상태로 남아있다. 언제나 모든 것은 아직 말해져야 하는 상태로 남을 것이다." 내가 지나온 모든 시간과 공간들을 다 말할 수 있을까? 아마 그럴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해해주길. 우리는 이미 지나간 시간보다 앞으로 다가올 시간에 마음이 끌리는 존재이므로. 우리에게는 오늘이라는 시간이, 다시 시작해야 할 과정들이 있으므로. 모든 것은 여전히 말해져야 하는 상태에 남아있을 것이므로.








* 지난 1개월

- 희망제작소 인턴 시작 & 기장

- 여행기 4회 작성(지금까지 총 13회).

- 노점 사업 결정 & 진행

- 자동차 도장(현석이 형)/인테리어 공사(김광석 장로님) 도움. 인맥의 중요성

- 세연/송현과 봄나들이

- 다양한 사람/새로운 사람을 만나다


* 앞으로 1개월

- 여행기 6회 작성

- 리더를 세우는 리더(인턴생활)

- 남자의 소세지 런칭

- 아침 조깅 21회 이상

- 예비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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