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 행복학교

저자
공지영 지음
출판사
오픈하우스 | 2013-11-02 출간
카테고리
시/에세이
책소개
소망이 두려움을 넘어설 때 우리는 지리산 행복학교로 간다.어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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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지영 작가를 이제야 알게된 건 불행이면서 다행이다.

111. 꽃은 피어 민들레 김치 위로 날리고 뽀얗게 재첩국은 우러난다. 갓 쪄낸 인절미처럼 말캉한 강아지들이 아이들과 뛰노는데 이보다 더 좋을 수 없는 봄날이 그렇게 가고 있었다.

117. 구례와 하동 들판에 다른 집 논은 다 새로 이발한 듯 깨끗이 추수가 끝났는데 여기저기 아직 추수 못한 논들이 부스럼 딱지처럼 남아 있었다. 그게 거긔 귀농자들의 논이었다. 다른 사람들의 논에서 탈곡한 벼 이삭들이 도로 가장자리에서 노릇노릇 말라가고 있는데 귀농자들의 논의 벼들은 하는 수 없지 않겠냐는 듯 우두커니들 서 있었다. 

228. 사내는 할 말이 없었다. 그는 무작정 산으로 갔다. 하늘이 있다면, 산신이 있다면, 아니 귀신이라는 게 있다면 자신을 돌보아주어야 한다고 그는 맘속으로 절규했다. 그리고 모든 죄 없고 가난한 사람들이 그렇듯 “잘못한 게 많았다, 참회한다”고 외쳤고, 소박하고 경건한 사람이 그렇듯 “낫게만 해주시면 열심히 살겠다”고 수없이 머리를 조아리며 맹세했다. 산은 그에게 오솔길을 터주었고 그는 좁은 길들을 따라 사람의 발자취가 거의 닿지 않은 곳으로 더 높이 더 깊이 들어섰다. 언젠가 귀동냥으로 들은 적이 있는 온갖 약초와 버섯을 캐다가 저녁이면 풍로를 피워 그것을 손수 달였다. 그리고 그것을 아내에게 먹였다. 그가 줄 것은 지리산이 주는 그것 밖에 없었다.

328. “아주 작은 것이라도 제가 학교와 낙시인을 후원할 수 있다면 그렇게 하고 싶습니다.”
 고알피엠의 머릿속으로 그 순간 수많은 영화/드라마/소설/연극/콩트가 지나갔다. 목소리의 주인공은 70대 후반, 병실에 앉아 죽음을 기다리는 늙은 백만장자, 아니 꼭 백만장자는 아니더라도 나름 자수성가한 상당한 재산가. 그는 실은 지리산의 빨치산 출신임을 숨기고 평생을 살아온 인물이다. 그에게는 혈육이 없다. 그는 거기서 모든 것을 잃었기 때문이다. 그는 신문이나 꽁지 작가의 글을 통해 낙장불입 시인의 내력을 파악했고 이제 죽기 전에 아직 밝혀지지 않은 지리산 마지막 전투의 비밀 몇 개를 털어놓고 낙시인에게 그 글을 부탁한 후 전 재산을 빨치산의 아들이며 지금은 지리산을 지키는 낙시인에게 물려주려 그를 애타게 찾고 있는 것이다. 아!

330. 지청구를 주지만 마음 깊은 곳에서 나는 알고 있다. 그곳은 사람이 사는 곳. 설사 내가 모든 것에 실패한다 해도, 설사 내가 모든 사람으로부터 외면받는다 해도, 설사 어느 날 내 인생이 이게 뭐야 마음속으로부터 절규가 불길처럼 뿜어져 나온다 해도, 외양간은 텅 비고 과일나무는 쓰러지고 산야가 불타버린다 해도, 그곳을 생각하면 세상에 무서운 게 없고 흐뭇해지는 것과 같은 이치일 것이다.
 “50만 원만 있으면 될 거야. 그러면 1년치 집세를 내서 집을 얻고 그리고 젓가락이 있으면 돼.”

331. “바람도 아닌 것에 흔들리고 뒤척이기 싫어 나는 도시를 떠났다.” 내 등으로 전율이 다 지나가기 전에 버들치의 반주가 시작되었다.

338. 그의 아름다운 사진이 더 알려지고 그가 좋은 가정을 꾸미기를, 하는 수 없이 기원해본다.





커뮤니티 디자인

저자
야마자키 료 지음
출판사
안그라픽스 | 2012-11-12 출간
카테고리
예술/대중문화
책소개
지금 우리 앞에 놓인 수많은 과제는 당연하게도 혼자만의 힘으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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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 공원을 지속적으로 즐길 수 있는 장소로 만들기 위해서는 세심한 공간 디자인 만으로는 안된다고 느꼈다. 입장객을 맞이하고 함께 즐기는 프로그램을 제공하는 커뮤니티가 필요하다. 

같다는 걸 경험한 후에 다른 점을 아는것.

74. 팀원이 바뀌듯 리더도 바뀌고, 새로운 리더가 탄생하면서 퍼실리테이터의 역할도 조금씩 변한다. 조직에 젊은 에너지가 끊임없이 더해지고 순환하면서 참가자는 항상 참신한 역할을 담당하게 된다. 이는 비영리 커뮤니티를 지속적으로 운영하기 위한 매우 중요한 요소이다.

79. 좋은 경치란 마을에 사는 사람들의 삶과 생활이 쌓여 형성되는 것이기에 풍경을 디자인 하기 위해서는 생활에서부터 접근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82. 환호 지구의 생활자들은 걸을 시간이 없는 것일까. '생활시간'을 조사해 보았다. (...) 분명히 걸을 수 있는 시간은 있다. 걷기 위한 동기가 없을 뿐이다. 

89. 마을에 조금이라도 즐거운 기운을 줄 수 있는 커뮤니티를 현지에 만들 수 있다면, 그 사람들은 스스로 즐기면서 그리고 동료들간의 신뢰를 형성하면서 마을을 조금씩 바꾸어 나갈 것이다.

94. 이런 사람들(공공 공간을 자신의 것처럼 사용하면서 주변에 좋은 영향을 전파하는 사람들)이 마을에 존재한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면 공공 장소 디자인도 '있거나 만들어 주는 것'이 아니라 주민들이 차츰 참여할 수 있는 공간으로 디잔해야 하는 것은 아닐까. (...) 실외 공간을 사용하는 사람들, 공간을 재미있게 사용하는 방법을 소개함으로써 몇몇 사람들이 실외 공간ㅇ르 사용하는 계기가 되면 결과적으로 새로운 풍경이 등장하지 않을까라고 생각했다.
 

113. 가장 먼저 지도한 것이 커뮤니케이션의 중요성이다. 커뮤니케이션 능력이 마을 만들기에서 가장 중요하다. 졸업 연구를 위해 마을 만들기의 잘 알려진 사례를 조사하고 그 특징을 정리하고 그 방법으로 마을 만들기를 제안하는 것은 커뮤니티 디자인을 위한 훈련이 아니다. 생면부지의 땅에 들어가 발군의 미소와 커뮤니케이션 능력으로 마을 사람들과 대화해서 그 마을의 과제를 알아내는 것이 더 중요하다.

139. (커뮤니티의 자리) 이에시마 지역에서 체험한 것은 헤아릴 수 없이 많다. 마을 만들기 워크숍 운영, 지역을 이해하기 위한 현지답사, 외부 시점에서 지역의 매력을 발굴하는 ‘탐색되는 섬’ 프로젝트, 주민 참여로 이루어진 종합진흥계획 수립, 마을 만들기 기금 설립, 특산품 개발과 지역 공익산업, 외국인을 지역으로 불러들이는 빈집 활용 게스트하우스 프로젝트, 관광 코디네이터 육성 등을 추진했다. 이런 프로젝트는 지역 주민을 조직하고, 스스로의 힘으로 운영할 수 있는 방법과 재원을 만드는 방식을 검토하여 다른 지역과 제휴 체제를 확립한다. 그 결과가 커뮤니티의 자립과 발전으로 이어진다. 개인적인 추측이지만 그 기간은 대략 5년이면 될 것이다. 5년이 지나면 우리들은 그 지역에서 떠난다.
… 서서히 관광 거점을 만들고, 관광 가이드를 육성하는 노력으로 손님을 대접하는 마음을 마을 사람들과 익혀 나간다. 방문객이 서서히 늘어나면, 서둘러 대응하기 위해 빚을 내어 설비 투자를 하거나 급히 사람을 고용할 필요도 없다. 관광지를 천천히 조성하는 데는 그 나름의 의미가 있다. 느린 속도는 시행착오를 되풀이하면서 주민 스스로가 프로젝트를 견고히 하고 그 과정에서 주체성을 찾을 수 있는 중요한 시간을 확보하게 한다. 커뮤니티 디자인에서 ‘천천히’는 매우 중요하다.




감정수업

저자
강신주 지음
출판사
민음사 | 2013-11-20 출간
카테고리
인문
책소개
철학자 강신주가 읽어주는 욕망의 인문학 “자신의 감정을 지켜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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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한번이라도 자신과 타인을 제대로 응시했다면, 누구나 인간이 이성적이기보다는 감정적이라는 사실을 쉽게 알 수 있다. 사실 이성이 감정보다 먼저 일어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심지어 이성은 감정을 통제하기 위해 발명된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렇지만 이성이 감정을 적대시한다면 언젠가 감정의 참혹한 복수 앞에서 자신의 무기력을 인정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감정에 무조건적으로 적대적이었던 칸트의 이성과는 다른 종류의 이성이 필요하든 것을 직감하게 된다. 감정의 쓰나미를 무모하게 막아서는 이성이 아니라, 감정을 긍정하고 지혜롭게 발휘하는 스피노자의 이성 말이다.

28. 이 완벽한 자궁 안에서 그림자는 더 이상 떨리지 않으니, 
생동감 넘치는 빛으로도 동요되지 않는다. 
완벽한 자궁은 닫혀 있는 한 세계로서,
어둠의 질료들이 상호 작용하는 우주적 동굴이다.
ㅡ 가스통 바슐라르, <대지 그리고 휴식의 몽상>에서

33. ‘슬픔’은 어떤 타자가 나의 삶의 의지를 꺾으려고 할 때 발생하는 감정이다. 여지주가 주인으로서의 삶을 부정할 때, 게라심이 느꼈던 것도 바로 이 슬픔이다. 이런 슬픔이 반복되면 누구나 비루함에 빠져들게 될 것이다.

46. 누군가 나를 사랑한다는 단순한 사실 하나만으로 우리는 금방 자긍심을 회복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내 자신이 충분히 소중하고 매력적인 존재가 아니고서는, 어떻게 타인이 나를 사랑한다는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나겠는가.

48. 사랑은 경탄과 함께 시작되고, 경탄과 함께 유지되는 법이다. 결국 내 마음속에 애인에 대한 경탄이 없어졌다면, 사랑은 이미 덧없는 옛이야기가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어떻게 하면 우리의 사랑을 ‘오래오래’ 지속할 수 있을까?

49. 그녀의 검은 눈에서 금빛 광채가 반짝거렸다. 희로애락의 그 어떤 감정으로도 결코 꺼뜨리지 못할 장난기였다. 가브리엘은 전율을 느꼈다. 그는 여자를 잘 몰랐다. 아내가 있긴 하지만, 누구나 아는 바와 같이 아내라는 존재는 청혼에 응하는 그 운명적인 순간부터 여자라는 종에서 벗어나 별도의 잡종이 된다. 요컨대 가브리엘은 40년을 살도록 아직 이렇게 장난기 가득한 여왕 스타일은 만나 본 적이 없다. (‘오래오래’에서)

51. (기존의 세계에) 거리를 두게 하고, 심지어 자신을 기존의 모든 관계로부터 벗어나도록 만드는…
‘경탄이란 어떤 사물에 대한 관념으로, 이 특수한 관념은 다른 관념과는 아무런 연결도 갖지 않기 때문에 정신은 그 관념 안에서 확고하게 머문다.’ ㅡ 스피노자, <에티카>에서
 다른 관념과 아무런 연결도 갖지 않는 특수한 관념, 그것은 한마디로 말해서 다른 것과 비교 불가능한 관념을 말한다. 지금까지 실물로 본 적이 없는 거대한 폭포 앞에 서는 순간, 우리는 입만 바보처럼 벌리고 경탄하게 된다. 다른 것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압도적인 풍경이기 때문이다.
(…) 
“혼위의 사랑은 결혼 생활과 달라요. 게으르게 마냥 똑같은 모습으로 남아 있을 수가 없죠. 끊임없이 온갖 것을 파악해서 범상함을 초월해야 해요. 아니면 차츰차츰 너절한 타성에 빠져들어 그저 생리적인 욕구나 채우려고 만나는 관계가 되는 거예요.”('오래오래’에서)

엘리자베트의 말처럼 관계가 “범상함을 초월하려는” 노력이 사라지는 순간, 다시 말해 “너절한 타성에 빠져 그저 생리적인 욕구나 채우려고 만나는 관계”가 되는 순간, 우리는 더 이상 서로에 대해 경탄의 존재로 남을 수 없게 된다. 

엘리자베트는 가브리엘의 “마음속 깊은 곳에 들어앉은 태양” 같은 존재였다. 그렇게 가브리엘에게 항상 ‘경탄’의 대상으로 남아 있기 위해, 현명한 엘리자베트는 ‘범상한 관계’를 초월하려고 노력했다. 오직 그럴 때에만 사랑은 지속될 수 있으니까.

76. 야심은 아카시아 나무와도 같다. 너무나 생명력이 강하고 뿌리가 깊어서 주변의 다른 나무들을 모조리 파괴하는 아카시아나무 말이다. 그렇지만 아카시아 꽃향기는 어찌나 매혹적인지! 야심은, 적절히 통제해야만 한다. 그럴 때에만 우리의 마음 속에 다른 수많은 감정들도 자기 결을 따라 제대로 자라날 수 있고, 그러면 우리는 그만큼 더 행복에 다가갈 수 있을 테니 말이다.

93. 사랑이 죽으면 대담함이라는 감정, 온갖 불의와 억압에도 당당할 수 있었던 가장 인간적인 감정도 맥없이 사라지기 마련이다. 이것이 바로 <1984>에서 작가가 우리에게 말하고자 했던 것 아닌가. 사랑을 지켜라, 그러지 못하면 인간의 모든 고귀한 가치들, 그리고 인간으로서의 자긍심도 무기력해질 테니까.

96. 이 점이 중요하다. 용기와 비겁은 불변하는 성격과도 같은 것이 아니다. 그러니까 나는 원래 비겁하거나 원래 대담하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 오직 위기를 감내하려고 할 때에만 용기와 대담함은 빛을 발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아무도 모를 일이다. 내가 번지점프대에 서는 것과 같은 위기 상황에서 앞으로 발을 내딛을지, 뒤로 물러날지 말이다. 분명한 것은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면 앞으로 발을 내딛을 가능성이 더 커진다는 사실뿐이다.

106. (탐욕) 돈에 대한 갈망에서 빠져나올 방법은 있을까? 그것은 나름대로 최적생계비를 생각하며 돈을 버는 것이다. 돈을 목적의 자리가 아니라 원래 자리, 그러니까 수단의 자리로 만들려면 이 방법밖에 없다. 돈은 여행을 가려고, 맛난 음식을 먹으려고, 혹은 멋진 옷을 사기 위한 수단이다. 그리고 돈은 또한 사랑하는 사람들 사이의 관계를 부드럽게 해주는 윤활유다. 바로 이것이다. 돈에 대한 갈망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방법은 있다. 최적생계비를 계산하고, 그것을 삶에 관철하는 것이다. “됐어. 이 정도면 됐어. 이제 삶과 사랑을 향유해야지.” 갈망에서 자유로워지는 첫걸음은 이렇게 내딛는 것이다.

116. (반감) 자신이 싫어했던 사람의 모습을 새로 만난 다른 사람에게서 다시 발견하게 되는 것은 섬뜩한 일이다. 이경우 우리는 그 새로 만난 사람을 싫어할 수 밖에 없다. (…) 이처럼 반감에 쉽게 사로잡히는 사람들은 과거 망령에 사로잡혀 살아가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현재의 행복과 미래의 행복을 모두 기대한다면, 비록 쉽지 않은 일이겠지만 이 망령을 쫓아내야만 하지 않을까?

123. (박애. 공동체 의식을 가능하게 만드는 원동력)내 삶이 가장 비참해질 때, 인생이 바닥까지 떨어질 때, 그만큼 모든 사람을 품어 줄 수 있는 역량을 기르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좌절하지 말고 그 바닥을 차고 올라오는 데 성공한다면 우리는 마침내 박애의 감수성을 배우게 되니까 말이다.
(…) 자신이 가진 전부를 내어줄 수 있을 때 박애라는 감정은 그 빛을 발하게 된다. 그렇지만 이 순간 박애의 주체는 동시에 비참한 신세로 전락하게 되겠지만, 동시에 제대로 사랑했다는 행복감을 만끽하게 될 것이다. ‘자발적인 가난’, 이것이 바로 박애가 드러나는 행동 양식이다. 비참한 사람들보다 더 비참해지려는 결의, 그들보다 더 피곤하려는 결의, 그들보다 더 가난해지려는 결의다. 그래서 한 번이라도 비참한 삶을 경험했던 사람이 박애의 감정을 갖기 더 용이한 법이다. 물론 비참함이라는 삶의 바닥을 박차고 일어나는 경험은 불가피하지만 말이다. 비참한 삶을 겪어내는 사람은 마침내 박애라는 숭고한 정신을 배울 수 있지만, 그런 경험이 전혀 없는 사람에게 박애는 막연한 미사여구에 지나지 않을 수 있다.

125. “‘평등’은 민사적으로는 모든 능력들이 동등한 기회를 갖는 것이고, 정치적으로는 모든 투표들이 동등한 무게를 갖는 것이고, 종교적으로는 모든 양심들이 동등한 권리를 갖는 것이오. (……) 여러분, 19세기는 위대하지만, 20세기는 행복할 것이오.” ㅡ 빅토르 위고

126. 사적인 차원에 국한되어 있든 공적인 차원으로 확장하든 간에, 사랑의 원리는 소유의 원리와 달리 무소유의 원리를 토대로 한다는 것만은 확실하다. 겨울의 찬바람에 애인이 떨고 있다면, 누구나 기꺼이 추위를 무릅쓰더라도 자신의 옷을 벗어 줄 것이다. 이럴 때 두 사람은 최소한 하나의 공동체를 형성하게 된다. 이렇게 공동체의 범위는 우리가 자신이 가진 것을 어디까지 나누어 주느냐에 의해 측정될 수 있다. 아무리 같은 마을이나 아파트 단지, 같은 도시나 같은 국가에 살고 있다고 할지라도, 그것만으로는 공동체가 저절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사랑의 원리가 관철되지 않는다면, 공동체라는 것은 아무런 의미도 없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지금은 커플 사이에도 무소유의 원칙, 사랑의 원리가 희석되고 있는 불행한 시대다. 합리적인 것처럼 쿨하게 더치페이를 외치고, 여자도 남자와 동등하게 일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그 바닥에는 자기 것을 지키겠다는 강한 소유 의지가 깔려 있기 때문이다. 커플이나 부부 사이에도 사랑의 원리가 훼손되어 있는데, 지역이나 국가 공동체의 경우는 어떻겠는가? 이런 시대에 전체 인류로 확장되는 사랑의 원리, 즉 박애의 정신이 어떻게 제대로 평가될 수 있겠는가. 연애에서부터라도 차근차근 사랑 연습을 하자. 상대방에게 아낌없이 자신이 가진 가장 소중한 것을 나누어주는 것, 이것도 연습이 필요한 시대니까.

130. (연민) 불행히도 연민은 결코 사랑을 바뀔 수 없다. 왜 그럴까? 타자의 불행을 감지했을 때 출현하는 감정이기에, 연민의 밑바닥에는 다행히 자기는 그런 불행을 겪지 않았다는 것, 나아가 불행한 타자를 도울 수 있는 자신에 대한 자부심이 깔려 있기 때문이다.
 약자를 도울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 발생하는, 강자가 되었다는 자부심, 혹은 누군가에게 필요한 존재가 되었다는 존재감, 이것이야말로 연민의 감정 뒤에 숨겨진 이면의 정체다.

143. (회한) 바로 여기에 당시 클라망스가 느꼈던 무력감, 다시 말해 위기에 처한 사람을 구하려한 실마리가 있다. 자신의 무력감이 적나라하게 드ㅓ나는 슬픔만큼 비참한 경험이 또 있을까? 스피노자에 따르면 기쁨이란 자신의 힘이 증진되었다는 느낌에서 오는 감정이라면, 슬픔은 이와는 반대로 처절한 무력감에서 유래하는 감정이다. 그러니 회한이라는 감정은 얼마나 무서운가? 위기 상황에 이르면 타인을 구원하기는커녕 항상 무력감을 느낄 것 같은 예감이 드는데 어떻게 우정이나 사랑과 같은 소망스러운 감정에 빠져들 수 있겠는가. 센 강에서 느낀 무력감에 대한 회한이 클라망스의 내면을 어찌나 무겁게 짓누르고 있는지, 그는 배에서 쓰레기가 버려지는 장면마저도 누군가가 물에 뛰어드는 것으로 보일 정도였다.

158. (당황. 멘탈붕괴와 함께하는 두려움) 한마디로 나도 내가 누구인지 모르겠다는 느낌, 혹은 나 자신을 믿지 못할 것 같다는 느낌이 바로 당황이라는 감정의 정체다. 그러니까 당황의 감정은 라캉의 표현을 빌리자면 “이런 사람일거야.”라고 생각했던 나와 실제로 살아서 욕망하는 나 사이의 간극을 확인할 때 발생한다. 어쩌면 당황의 감정에 빠진 사람은 행운아라고 할 수 있다. 당황의 감정을 통해 우리는 진정한 자신, 혹은 자기의 맨얼굴을 찾을 수 있을 테니 말이다. 그러니까 가면의 욕망과 맨얼굴의 욕망이 우리 내면에서 격렬하게 충돌한다면, 당황의 감정에 사로잡힌 것이다. 그러니 당황에 빠질 때 걱정할 것ㄴ 없다. 무조건 맨얼굴의 욕망, 즉 내가 이런 사람이었나 하고 경이롭게 생각하는 욕망이 이길 수밖에 없기때문이다. 물론 아주 여린 사람들은 맨얼굴의 욕망을 거부할 수도 있다. (…) 뭐, 할 수 있을 때까지 자신에게 저항해 보라. 맨얼굴의 욕망을 부정하고 가면의 욕망을 추구하면 할수록, 낯빛은 피폐해지고 삶은 무기력해질 테니까.

162. (경멸. 자신마저 파괴할 수 있는 서글픔) 경멸이란 정신이 어떤 사물의 현존에 의하여 그 사물 자체 안에 있는 것보다 오히려 그 사물 자체 안에 없는 것을 상상하게끔 움직여질 정도로 정신을 거의 동요시키지 못하는 어떤 사물에 대한 상상이다. ㅡ 스피노자, <에티카>에서

167. 오스먼드는 변한 것이 없었다. 그는 구혼을 할 무렵에도 그녀에게 보닛ㅁ을 감추지 않았다. 그러나 이사벨은 그의 본성의 반쪽만을 보았으며, 그것은 마치 지구의 그늘 때문에 일부가 가려진 달의 표면을 본 것과도 같았다. 그러나 지금 그녀는 만월, 즉 인간 전체를 보게 된 것이다.

누군가를 앞에 두고서 다른 사람을 생각하는 것, 혹은 다른 사람을 생각하려고 하는 것, 이것이 바로 경멸이다.

184. 그렇지만 뭐 어떠한가! 하루라도 자신이 진정으로 욕망하는 것을 행하고 죽는 것, 그것이 더 커다란 행복이니 말이다. 기쁘면 기쁘다고 표현하고, 슬프면 슬프다고 표현하자. 그것이 바로 욕망을 긍정하는, 쉽지만 녹록치 않은 방식이다. 이러한 이유에서 자신의 욕망을 긍정하는 사람은 자신의 감정에 솔직한 사람인 것이다. 자신의 감정에 충실하기! 그것이야말로 우리가 자신의 욕망을 긍정하고 복원하는 유일한 방법이다.

“그 갈정은 단지 성적 욕망만이 아니라, 낭만과 모험, 죄악, 광기, 야수성 같은 금지된 모든 것에 대한 억제할 수 없는 욕망이었다.” (프랑스 중위의 여자 에서)

(욕망이 내 욕망인지 남의 욕망인지 알아보는 방법)출발의 설렘이 있다면, 과거 우리의 욕망은 나만의 욕망이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반면 완성의 허무함이 있다면, 과거 우리의 욕망은 불행히도 타인의 욕망을 반복했던 것임이 밝혀지는 것이다.

208. (멸시) 예를 들어 사랑의 감정에 빠져 들었다면, 우리는 상대방에게서 그 원인을 찾는다. 사랑의 감정을 일으킨 원인을 나 자신이 아니라 전적으로 상대에게 돌리니, 과대평가는 불가피한 일이다. 반대로 미움의 감정이 발생할 때도 우리는 전적으로 상대방에게서만 그 원인을 찾는 경향이 있다. 당연히 상대방은 미움을 가져다 준 사람이라고 저주받게 될 처지에 놓인다. 여기서 멸시라는 감정이 시작된다. 멸시라는 신호를 보냄으로써 우리는 상대방이 관계를 끊어주기를 바라는 것이다. 자신이 직접 미움의 관계를 단호히 청산하지 못하는 사람일수록, 그는 멸시를 통해 상대방을 막다른 궁지에 몰아넣으려고 한다. 관계의 시작과 끝에서 자신은 어떤 책임도 없다는 듯이.

232. (과대평가. 사랑의 찬란한 아우라) 사랑은 두 사람을 삶의 주인공으로 만드는 감정이다. (…) 그러니까 과대평가가 사랑에 빠진 사람들에게는 부수 효과가 아니라 본질적인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스스로 사랑에 빠져 있는지 확인하는 방법은 의외로 쉽다. 상대방을 지나치게 크게 평가한다면, 우리는 분명 그릴 사랑하고 있는 것이니까. 어쩌면 과대평가야말로 어떤 사람이 사랑에 빠져 있다는 것을 보여 주는 가장 강력한 증거라고 할 수 있다. 

245. (호의) “내가 아는 거라고는 기즈키의 죽음으로 인해 내 젊음의 기능 일부가 완전하고도 영원히 망가져 버린 것 같다는 것뿐이었다. 나는 그것을 뚜렷이 느끼고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고 어떤 결과를 가져다줄 것인지, 그것은 나의 이해 범위를 넘어선 일이엇다.”

(노르웨이의 숲에서)나오코의 요양원 룸메이트는 도피의 세계를 찾는 영혼들에 대해 이렇게 설명한다.

우리는 분명 자신의 뒤틀린 부분에 잘 적응하지 못하는 건지도 몰라. 그래서 그 뒤틀림이 불러일으키는 현실적인 아픔이나 고뇌를 자기 내면에서 정리하지 못하고, 그런 것들로부터 멀어지기 위해 여기 들어온 거야. 여기 있는 한 우리는 남을 아프게 하지 않아도 되고, 남에게 아픔을 당하지 않아도 돼. 왜냐하면 우리 모두 스스로에게 ‘뒤틀림’이 있다는 사실을 아니까. 이런 점에서 외부 세계와 이곳은 완전히 달라. 외부 세계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스스로가 뒤틀렸음을 의식하지 않고 지내. 그러나 우리의 이 작은 세계에서는 뒤틀림이야말로 존재의 조건이야. 인디언이 머리에 자기 부족을 상징하는 깃털ㅇ르 꽂듯이 우리는 뒤틀림을 끌어안고 있어. 그리고 서로에게 상처를 주지 않으려고 조용히 사는 거야.

262. (영광. 모든이의 선망으로 타오르는 위엄) 그렇지만 영광을 추구하는 이면에는 다른 사람에게 당할 멸시나 경멸에 대한 원초적인 두려움이 전제되어 있다는 것을 잊지 말자. 권력이나 자본이 항상 상벌의 논리로 우리를 유혹할 수 있는것도 우리에게 영광을 추구하고 치욕을 멀리하려는 욕망이 있기 때문이다.

지나치게 영광에 집착하는 사람들은 스스로 기꺼이 고독을 감내해야만 한다. 영광에 집착하는 사람은 사랑과 유대의 가치를 망각하고 타인을 경쟁 상대로만 생각하기 때문이다. 인간적인 유대와 사랑을 원하는가? 공존과 공생을 원하는가? 그렇다면 영광을 멀리하고 치욕을 기꺼이 감내할 일이다. 이럴 때 우리에게는 전혀 다른 세상이 펼쳐지게 될 것이다.

274. (감사.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을 품고 친절을 베풀 수밖에 없는 서러움) 감사의 감정에는 분명 사랑이라는 열정적인 감정이 함축되어 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감사의 표현은 상대방에 대한 사랑의 열정ㅇ르 식힐 수 있다. 아니, 정확히 말해 식히려고 노력할 때, 우리는 서둘러 상대방에게 감사의 말을 전하는지도 모른다.

278.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 존재할까? 물론 존재한다. 그렇지만 … 이루어질 수 있는 사랑이 있고, 반대로 그럴 수 없는 사랑이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오히려 사랑을 이룰 수 없는 우리 자신이 문제일 것이다. 그러니까 사랑을 우리가 감당하지 못할 때, 그것은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 된다. 사랑이 어떻게 쉬운 감정이겠는가. 하나를 잡으면 다른 하나를 놓아야 하는 법인데! (…) 약한 사람에게 사랑은 삶을 뿌리째 뽑아 버릴 수도 있는 폭풍우로 느껴지기도 한다. 약하디 약한 존재가 바로 인간 아니겠는가. 두려워하는 것이 많아 이것저것 따지는 존재가 바로 인간이다. 고뇌와 고민은 항상 약자의 몫이다. 그렇지만 사랑 앞에서 복잡해져만 가는 생각 끝에 우리가 선택하는 것은 사랑이 가져다주는 불확실성이 아니라 익숙한 일상이기 쉽다. 어쩌면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사랑 앞에서 고뇌하는 것 자체가 이미 사랑에 몸을 던지기에는 우리가 너무 약하다는 증거니까 말이다. (…) 불행히도 더 이상 사랑을 감당할 수 없다는 것이 문제가 될 때, 우리는 상대방에게 감사의 마음을 가지게 된다.


287. (겸손. 진정한 사랑을 위한 자기희생) 

드니즈는 아름다운 만큼 지혜로웠다. 그녀의 지혜로움은 그녀가 지닌 가장 고귀한 것들로부터 비롯되었다. 대부분이 하층민 출신인 백화점 판매원들이 점차 갈라져 떨어져 나가는 매니큐어처럼 피상적인 교육밖에는 받지 못한 반면, 드니즈는 가식적인 우아함과는 거리가 먼, 깊은 내면에서 우러나오는 매력과 멋을 지니고 있었다.  
<여인들의 행복 백화점>에서

288. 겸손하게 되었을 때 우리는 자신을 지배하던 해묵은 편견, 허영, 그리고 자만심으로부터 자유로워진다. 색안경을 벗고 자신이나 세계, 그리고 타인들을 있는 그대로 보게 되었다고나 할까. 그러니까 자신의 무능력과 약함을 직시할 때, 우리는 자신이 무엇을 할 수 있고 무엇을 할 수 없는지를 정확히 알게 된다. 과거에는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이제 할 수 없는 것이 있다는 것을 안 것이다. 따라서 겸손해진 사람은 이 할 수 없는 것에 대해 무능력과 약함을 느꼈을 뿐이다. 이것은 반대로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에 대해서는 더 진지하고 성숙해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한마디로 성숙해진 것이다.

298. (분노. 수치심이 잔인한 행동이 될 때까지) 체제에 돌려야 할 분노를 인간에게 돌리고는 전전긍긍하는 개인, 그래서 한 없이 자본주의의 냉혹함에 무기력해지는 인간. 더 냉정하게 자본주의를 들여다보지 못하고, 자본주의에 대한 분노를 전당포 노파에게 혹은 자신에게 돌리는 것.

297. 표도르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은 작가 스스로 “범죄에 대한 심리학적 보고서”라고 밝혔듯이 ‘라스콜리니코프’라는 고뇌하는 청년의 대명사를 창조하여 죄와 속죄를 둘러싼 다양한 인식들을 탐구했다. 주인공 로쟈는 자신의 논문에서 “인간이 자연의 법칙에 따라 대체로 두 부류로 나뉜다.”고 주장한다.

“하나는 하급 부류(평범한 사람들), 오로지 자신과 비슷한 자들을 생산하는 데만 기여하는, 말하자면 재료이며, 다른 하나는 본질적으로 자신이 속한 무리에서 새로운 말을 할 수 있는 천부적 재능이나 능력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 첫번째 부류, 즉 재료는 대체적으로 말해 그 본성상 보수적이고 점잖은 데다가 순종하며 살고 또 순종하는 것을 좋아합니다. 제 생각으로는, 그들은 순종할 의무가 있는데, 그것이 그들의 사명이며 그렇다고 해서 굴욕감을 느낄 이유도 전혀 없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 부류는 전부 법률을 넘어서는 자들, 그 능력에 따라 파괴자이거나 그런 경향이 있는 자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의 범죄는 물론 상대적이며 그 종류도 다양합니다. 그들은 극히 다양한 성명을 통해 보다 더 나은 것의 이름으로 현재의 것을 파괴하길 요구합니다. (……)  첫 번째 부류는 항상 현재의 주인이며, 두 번째 부류는 미래의 주인입니다. 전자는 세계를 보존하고 수적으로 증대시킵니다. 후자는 세계를 움직이고 목표를 향해 이끌고 나갑니다.”

306. (질투. 사랑이 드리우는 짙은 그림자) 질투의 바닥에는 스스로가 주인공이 되고 싶은 감정이 똬리를 틀고 있었던 셈이다. 질투는 나를 주인공으로 만들어 줄 수 있는 사람이 그렇게 하지 않을 때 드는 감정이니까.




자기혁명

저자
박경철 지음
출판사
리더스북 | 2011-10-05 출간
카테고리
자기계발
책소개
대한민국의 지성, 실천하는 비판가, 열정적 독서광, 청춘의 멘토...
가격비교 글쓴이 평점  




246. 진리를 마음에서 구하지 않기 때문에 어리석고 깨달음이 없게 된다. 배운 것을 익히지 않기 때문에 위험하고 불안하게 된다. (중략) 널리 배우고 깊이 묻고 신중하게 생각하고 분명하게 판단하고 독실하게 행하는 것.이 다섯 가지중에 한 가지라도 없다면 그것은 학문이 아니다. - 주희, 사서집주

247. 아무리 많은 책을 읽었어도 읽은 것을 흡수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단지 놀이에 불과할 뿐이다. 그러니 이 질문은 "당신이 읽은 책 중에서 당신에게 영향을 미친 책은 몇권입니까?"로 바뀌어야 한다.

255.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은 것이 독서다. … 독서는 타인의 지식을 빌리는 것이라고 할 수 있는데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이 지식의 변별력이다. 소위 공통의 교육과정에서는 성과의 높낮이, 즉 차이만 강조된다. 그러나 독서는 완전히 차별적인 성과의 잣대를 제공한다. 더구나 독서는 간접체험을 통해 정규교육에서 얻을 수 없는 지혜를 연마하게 해주고, 다른 사람의 생각을 읽고 이해하는 능력을 키워주며, 다양한 분야를 통섭하는 방법을 알려준다.
 그 뿐만 아니다. 독서를 통해 사람들이 각자 다르게 생각하는 언어와 많은 언어를 배우고, 내 생각의 지평을 넓힐 수 있다. 이 점은 대단히 중요하다. 사람의 생각은 언어로 고정되어 있고, 언어는 맥락이 있어야만 뜻이 형성된다. 언어, 즉 어휘가 부족하면 생각이 풍부할 수 없고 언어를 맥락화할 수 없다면 체계적인 생각을 할 수 없다는 말과 같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사유'란 맥락화된 생각을 가리킨다. 그래서 독서는 사유를 배우는 제1의 수단이며 창의력의 보고라고 할 수 있다.
독서가 이렇게 방대한 기회를 주는데도 독서를 통해 발전을 이루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이는 독서의 대상이 편협하거나 생각을 읽지 않고 문자에만 의존하는 기계적인 독서를 하거나 저자의 논점을 이해하지 못하고 단순히 사건이나 이야기에만 몰입하는 나쁜 독서습관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독서는 먼저 문자(텍스트)를 읽고 거기에 담긴 저자의 생각과 사상과 지식을 이해해야 한다. 그러고 나서 이해한 것들을 기반으로 나를 변화시키는 내면화의 과정을 거쳐야 한다.
덕서에서 우리가 제일 먼저 만나는 난관은 텍스트를 대하는 자세다. 생각을 모두 말로 옮길 수 없고 말은 문자로 고스란히 드러나지 않는다. 그래서 독서를 할 때 단순히 문자를 읽어 나가는 것이 아니라, 문자가 지시하는 저자의 진짜 생각을 해석하는 과정이 필요한 것이다.

257. 하지만 대개 우리가 어떤 책을 읽고 해석한 결과는 비슷하다. 왜냐하면 독자들의 해석은 당시의 억압적인 질서에 따르기 때문이다. 좀 어려운 이야기지만 텍스트를 해석하는 방식은 무의식적으로 그 시대의 주류 해석을 따라 간다는 뜻이다. … 때문에 텍스트를 대할 때 지배적 해석에 매몰되면 독서를 통해 나의 사상을 발전시키는 것이 불가능해진다.

263. 인간은 언어로 사고하고 언어로 의사를 표현한다. 때문에 다른 사람의 언어와 표현법을 많이 익히고 활용하면 궁극적으로 내 사고의 지평을 넓힐 수 있다.

필자가 제시하는 독서의 원칙은 다음과 같다.
- 독서 1 : 좋은 책을 읽는 것보다 나쁜 책을 읽지 않는 것이 더 중요하다.
- 독서 2 : 지금 읽기에 편안한 책은 오락에 불과하다. 항상 지금 읽기에 조금 버겁고 힘든 책을 고르는 것이 좋다.
- 독서 3 : 저자의 논리에 매몰되지 말 것! 한 권의 책에 매료되면 가능한한 그 반대 논리를 주장하는 책도 함께 읽도록 노력해야 한다. 그러지 않을 경우 '독서로 인한 편협성'에 빠지기 쉽다.
- 독서 4 : 늘 새로운 것에 선의를 가질 것! 모르는 장르, 익숙하지 않은 분야의 책을 읽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전공공부가 아닌 이상 익숙한 것의 포로가 되면 독서에 의한 자기발전은 기대하기 어렵다.
- 독서 5 : 완독, 다독보다 중요한 것은 독서 후의 사유다. 한 권의 책을 읽으면 그 책을 읽는 데 투자한 시간 이상 책에 대해 생각하는 것이 중요하다. 독서는 지식을 체화하고 사유의 폭을 넓히는 수단이다. 성찰의 실마리를 던져주지 못한 책은 시간을 파먹는 좀벌레에 불과하다.
- 독서 10 : 돌아가신 분의 책을 읽어라. 선택의 여지없이 좋은 책이다.

272. 글을 쓸 때는 먼저 말하고자 하는 대상에 대해 충분한 숙고를 거쳐야 한다. 우리가 글을 쓴다고 할 때 가장 먼저 범하는오류 중 하나가 일단 '나는 …'이라고 무조건 시작해놓고 보는 습관이다. 무언가 글을 써야 한다는 강박에 떠밀려 글의 주제와 줄거리에서 멀어지는 것이다.
반드시 기승전결의 얼개를 미리 머릿속에 그리고 시작해야 한다. 글을 쓰기 전에 '시선'을 먼저 가다듬는 것이다. 어떤 글을 쓸 것인지, 무엇을 말할 것인지, 어떤 형식으로 쓸 것인지를 생각해 결정한다. 나의 시선이 분해한 프리즘의 색깔을 명료하게 정리하는 작업이 필요한 것이다.

288. 결국 해법(시대의 희망부재와 우울)은 사회다. 사회가 발달하면서 일정 부분 우뇌형 개인화가 이루어지는 것은 어쩔 수 없고, 지금과 같은 고도산업사회에서 농경시대처럼 이웃의 숟가락까지 꿰고 있을 수도 없는 노릇이다. 하지만 우리가 들판에 홀로선 존재가 아니라는 격려와 위안을 사회가 줄 수 있어야 한다. 지금 우리 사회의 화두는 welfare(복지)가 되고 있지만, 진정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정치적으로 논쟁하는 복지보다는 wellbeing(참살이)에 대한 근본적 인식이다. 이때 wellbeing은 단순히 유기농 음식을 먹고 피톤치드를 마시며 숲길을 걷는 개인화된 것이 아니라, 정신적 위안과 연대의 회복과 같은 사회적 wellbeing에 대한 자각을 말한다.

292. 운명의 신은 여신이므로 그녀를 내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가끔은 쓰러뜨리거나 제압할 필요가 있다. 운명은 거리를 두고 망설이는 사람보다 이런 사람들에게 승자의 면류관을 씌워준다. 즉 운명은 여자와 같아서 젊은 청년의 편이다. 왜냐하면 혈기 왕성한 청년은 좌고우면하지 않고, 민첩하고 과감하게 여자를 지배하기 때문이다. 마키아벨리, 군주론

303. SNS에서 오고가는 담론은 서로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유통되고 소비되며, 한 가지 견해를 두고 모두가 옳다고 착각하는 '무오류성의 함정'에 빠지기 쉽다. 만약 정치인이라면 자신의 정책이 절대적 지지를 받고 있다고 착각할 것이고 언론사라면 자사의 논조가 대중의 중심을 대표한다고 오해하게 될 것이다. 개인도 마찬가지다. 못마땅한 사람은 입을 다물고 동의하는 사람은 적극적으로 맞장구를 친다. 그래서 SNS상의 의견들은 비판에 민감하고 그래서 비판은 암암리에 위축된다.

304. 사람은 누군가 자신의 말을 들어주기를 바라지만, 내 말을 하려면 상대의 말도 들어줘야 한다. 이것이 바로 소통이다. 하지만 지금은 누구도 진심을 말하려 하지 않고 들으려고도 하지 않는다. 이익이 우선인 사회에서는 가능하면 자신의 본심은 숨긴 채 상대의 본심을 간파해야 하기 때문이다. 도박사들이 포커페이스로 자신의 패를 감추고 상대의 패를 읽어내야 돈을 딸 수 있는 것과 같은 이치가 사회 전반에 작동하는 것이다. 그렇다 보니 우리는 모두 각자 고립되어 있다. 도심 속의 섬처럼 각자 외롭게 누에고치를 짓고 상대를 경계하며 마음의 문을 닫아건 것이다.

308. 지금 우리 사회에 불어닥친 SNS열풍은 사람이 부가가치의 핵심이 되는 시대에 사람의 만남, 그 플랫폼이 갖는 잠재력을 보여주는 상징이자 증거다. SNS를 그저 단순한 오락으로 여기지 않고 그것에 내포된 상징성에 주목한다면, 거기에 펼쳐진 새로운 패러다임의 한 장면이 뚜렷하게 보일 것이다. 

313. 타인의 자존감에 대한 인정, 내가 아닌 그의 관점에서 이해하고 같은 눈높이에서 상대의 마음이 되어 진심을 보이는 것, 이것이 empathy다. 영향력은 바로 이런 마음에서 행사되어야 하고 이를 가리켜 '선한 영향력'이라고 부른다.

314. 이때 선한 영향력은 단순히 '착해빠진', '바보 같은'이라는 말이 지시하는 의미를 가리키지 않는다. 단지 분노를 억제하고 권리를 포기하며 대항할 의지를 삭임으로써 '착하다'는 평가를 받는 수동적 태도를 가리키는 것도 아니다. 적극적인 자유의지와 강한 자존감을 바탕으로 나의 그것만큼 타인의 자존감도 중요하다는 것을 인식할 수 있는 능력, 그것이 empathy다. 우리 모두가 독존이 아닌 공존의 방향으로 나아가게 하는 힘이 바로 empathy인 것이다.

324. 지금 청년들에게는, 지금까지 없던 것을 새로 창조하는 천재성이 아닌 기존의 것들을 통합해서 재조합하는 통섭의 능력과 안목을 키우고, 인문학적 상상력을 통해 자신의 세계관을 확대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과제가 되었다.

326. 변화에는 수동적인 변화와 능동적인 변화가 있다. 수동적인 변화는 죽음에 이르는 길이지만, 능동적인 변화는 나를 실존케 하는 증거이자 내 삶의 면류관이다.

327. 문제는 그 안목을 기르는 노력이다. 변화의 본질을 이해하기 위해 중요한 것은 스스로 변화하는 것이다. 가만히 서서 지나가는 KTX를 보면, 마치 야구공이 지나간 것처럼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신발을 벗어들고 같은 방향으로 달리면 객차가 보이고 자전거를 타고 따라가면 사람이 보인다. 하지만 그 안에 누가 타고 있는지를 알려면 KTX에 직접 올라타야 한다.
 변화는 스스로 변화하는 사람에게만 모습을 드러내는 무지개와 같다. 매일 스스로 변화해 어제와 다른 오늘, 오늘과 다른 내일, 아침과 다른 저녁을 맞는 사람에게 변화하는 패러다임 혹은 세상은, 속속들이 들여다보이는 느린 장면이 된다. 하지만 모니터 앞에 앉아 습관처럼 연예기사나 살피면서 무의미한 논쟁을 벌이고, 매일 갖는 술자리에서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한탄만 늘어놓는 사람에게는 '번쩍!'하고 지나가버리는 번갯불처럼 실체를 보여주지 않는다.
 청년기는 변화의 시기다. 육체적/정신적으로 가장 빨리 성숙하는 청년기에 마른 스펀지가 물을 흠뻑 빨아들이듯 귀중한 것들, 놓치지 말아야 할 것들을 가득 흡수해야 한다. 

330. 우리 시대는 대변환을 요구하고 있다. 햇볕 한 줌 들지 않는 컴컴한 동굴에 앉아 쥐구멍에도 볕이 들기를 기다리는 소극적인 '역'과, 동굴을 파고 쥐구멍을 부숴 볕을 끌어들이는 적극적인 '역' 모두 간절하게 요구되고 있는 것이다.

궁하면 변하고 변하면 통하며 통하면 영원하다. 주역은 '막히면 변하라'고 서슴없이 말한다. 즉, 스스로 변하는 것이 해법이라는 뜻이다.

332. 이런 국면의 전환기를 알기 위해서는 주류권력의 관점에서 바라본 패러다임의 변화를 넘어 사회구조적 변환기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334. 누군가 개척한 성공의 길을 따라가다가 성과를 가로채며 앞서 달려나가도 그저 달린다는 사실 자체가 중요했던 시대다. 그 결과 오늘날 드디어 선두그룹에 진입했다. 최소한 처음에 내세운 어젠더대로 일류기업, 글로벌기업, GDP순위 등에서는 더 이상 추격할 대상이 없는 선두 그룹의 일원이 된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바로 드러났다. 추격을 끝내자 목표가 사라진 것이다. 무조건적으로 선두, 일등, 일류를 외치며 달려왔지만 막상 선두가 되자 국가적/사회적 가치관의 부재와 혼재의 시대를 만나게 되었다. 남의 것을 모방하고 추격하는 데에만 길들여져온 우리의 문화가 제일 앞줄에 서면서 길을 잃어버린 것이다.

선두의 역할은 추격이 아니라 길을 찾는 것이다. 당대성과 시대성의 관점에서 보면, 이것이 바로 지금 우리 사회 분열의 핵심이다. 보릿고개를 넘던 시절, 오로지 잘살면 된다는 최우선 명제의 관점에서는 적당히 부패하고 부정하며 외면하고 짓밟는 것을 불가피한 선택이라고 판단했을 수 있다. 이것이 우리 기성세대들의 논지의 핵심이다. 하지만 시대성의 관점에서 보면 문제는 단순하지 않다.

335. 어떤 논리가 시대성을 갖기 위해서는 당대를 넘어 다음 시대에도 받아들여져야 하기 때문이다. 

338. 자원고갈과 폐기물의 문제에서 자유로우며 무한한 부가가치를 창출할 수 있는 생산수단이 곧 사람이다. 대표적인 사례로 엔터테인먼트, 레저, 에듀케이션, 헬스케어, 바이오 등을 들 수 있다. 이런 영역은 기존에 없던 것을 새롭게 창조하는 것이 아니라, 산발적으로 흩어져 있던 것을 재조합함으로써 시너지를 창출하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340. 핵심은 기계가 아닌 사람이다. 그간 인류가 생산한 기계문명의 산물은 최소 수십 년간 추가적 발전 없이도 인류의 삶에 별 영향을 미치지 않을 만큼 앞서나갔다. 하지만 그렇게 달려온 인류가 정작 필요로 하는 것은 휴식과 위로, 그리고 생존을 보장할 수 있는 환경이다. 따라서 레저와 엔터테인먼트를 통해 위로받고, 그간 산발적으로 성장해온 과학기술의 이면에 뒤처진 인문학과 예술 등의 지적콘텐츠에 주력하는 새로운 교육이 확장되고, 삶의 질과 수명연장의 꿈이 중심으로 들어오게 될 것이다. 이는 코스메틱, 성형, 스파 등의 산업이 최근 급격한 성장을 보이는 배경이기도 하다.

341. 공공의식을 가진 공감형 리더십의 요구. 
아리스토텔레스는 오늘날 우리가 '윤리'라고 부르는 선량함의 규율에 대해 "행복은 어떤 행위의 결과가 아니라 행위 그 자체에 있다."고 선언했다. 따라서 우리가 추구하는 행복을 누리기 위해서는 결과물에 대한 집착이 아닌 '선한 습관'혹은 '선한 행위'를 내 삶의 일부로 만들어야 하고, 이런 태도를 익히기 위해 인간과 사회의 선량한 규범을 만들어 강제력을 행사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즉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선함은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국가나 사회 시스템이 추구해야 할 가치이며, 국가/사회 시스템은 선한 규범하에 선량한 강제력을 행사하게 하는 제도라고 여겼던 것이다.

그가 주창한 윤리학은 인간의 '선량한 에토스(성격)를 어떤 행위규범의 틀에 담는가(윤리)의 문제이며, 이런 체제를 만들기 위해 고민하고 방법을 찾는 것이 바로 정치'라는 영역으로 확장된 것이다. 따라서 윤리나 도덕, 국가경영등은 별개의 문제가 아니다. 이 모든 것은 궁극적으로 '선'을 추구하고, 그 가치를 바탕으로 '행복'을 구현하는 하나의 틀이기 때문이다. 그 결과 '인간은 본성적으로 정치적 동물이다'라는 명제가 탄생한 것이다.

사회는 그 자체의 건강성을 유지하기 위해 극한의 노력을 다하고, 개인은 그에 귀속되는 헌신을 다하는 것이 선함 혹은 행복의 근원이라는 지적인 셈이다. 우리는 보통 이런 헌신성을 가리켜 '공공의식'이라 부른다.

344. 온전히 자기가 경험한 만큼이 자신의 세계다. 

345. 모든 교육은, 또 모든 리더십의 자격은 공공의식이 가장 중요한 기준이 되어야 한다. 권력은 개인을 위해서가 아니라 공공을 위해 행사되어야 하고, 교육은 특정 계층의 자녀가 아닌 전국민의 아이들에게 고른 기회를 줘야 한다.  그것만이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사회의 건강성을 유지하는 유일한 방법인 것이다. 하지만 지금 우리 사회는 이런 공공의식이 실종된 상태다. 
'시대의 요구는 시대의 과잉이 아닌 결핍과 일치'하며, 그 결핍은 다음 세대의 필수 덕목이 된다는 사실이다. … 무모한 스펙전쟁이 아니라 대표적 결핍인 공공성을 갖추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사회적 건강성에 헌신함으로써 차세대 리더에게 요구되는 리더십을 획들할 수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즉 과거에는 잘난 사람의 리더십이 중요했지만, 지금은 대중의 팔로십이 중요한 시대다.
 국가지도자건 사회지도자건 '팔로 미'가 아닌 '위드 미'를 말하는 사람, 함께 가고 헌신하며 먼저 실천하는 사람이 리더로서 인정을 받는 시기가 도래하고 있는 것이다.

351. 그 점에서 새로운 시대의 주인공이 될 청년들의 어깨가 무겁다. 가난을 대물림하기 싫어 대를 끊겠다는 비탄보다는, 문제를 알았으니 반드시 해결하겠다는 결의와 공분이 필요하다. 바로 그 지점을 정확히 간파하고 대열의 전면에 서는 청년이 바로 새로운 시대의 리더가 될 수 있다. 혹시라도 자신이 여건상 유리한 고지에 있다면, 그럴수록 더 사회의 이면을 바라봐야 하고, 소외되고 약한 사람들을 이해하는 공감력을 키워야 한다. 그것이 바로 청년들이 미래의 새로운 패러다임에서 주인공이 될 수 있는 길이다.

355. 청년들에게 목표가 무엇이냐고 물으면 바로 대답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그들의 머릿속에는 외부 요인들이 가득해서 좋아 보이는 것, 기발하고 멋져 보이는 목표들만 가득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것들은 나의 좌표를 설정하는 데 오히려 방해가 된다. 나의 강점과 재능이 무엇인지 파악하고 그 바탕 위에서 내가 잘할 수 있는 것을 찾아야 하는데, 나를 소외시키고 남들에게 성공한 사람으로 보일 수 있는 추상적인 망상만 가득한 셈이다.
 목표를 세울 때는 반드시 나를 먼저 들여다봐야 한다. 의식을 집중해서 무의식을 가만히 탐색하고, 나의 장점과 단점을 잘 비교한 다음, 최소한 장점 항목이 단점을 능가할 때, 장점들을 잘 모아서 시너지를 일으킬 수 있는 재능을 파악한다. 그리고 그 재능을 발휘할 수 있는 분야를 결정한 다음, 그 분야에서 가장 가능성이 있는 것을 찾아 그것을 나의 목표로 삼아야 하는 것이다. 

356. (좋은 습관을 갖기보다 나쁜 습관을 버려라) … 정말 버려야 하는 대상은 장기적 인내가 필요한 것들이어야 한다. 잠을 참아내거나 담배를 참아내거나 술을 참아내는 것처럼, 지속적으로 늘 그것과 투쟁해야 하는 것들을 버리기로 결심해야 하는 것이다.
 그렇게 긴 투쟁을 이겨나가면 그것이 곧 새로운 습관으로 이어지고, 의식은 명료해진다. 의식이 본능을 통제하고 극복하면서 필요한 일을 행하는 인내로 이어졌다면, 이미 의식의 통제상태에 들어간 것이다. 이제 그것을 습관화함으로써 강고한 자아를 구축하라.
 그로써 우리는 단단한 사람이 될 수 있다. 그 다음 우리가 단단한 바탕을 딛고 자신의 길을 심장이 터질 만큼 힘차게 달려나갈 때, 우리는 다른 사람이 갖지 못한 특별한 아우라를 획들할 수 있다. 
 이런 삶은 불행하지 않다. 우울의 여지도 없다. '긍정적으로 생각하라'는 달콤한 말에 현혹될 필요도 없다. 무조건 긍정적으로 생각하라는 것은 무의식의 노예가 되라는 뜻이다. 긍정은 당의정이 아니다. 긍정의 태도를 몸에 익히고 그것을 실천함으로써 느껴지는 자존감이 바로 긍정의 힘을 발휘한다. 
 이 길에서는 무언가 이루는 것이 목표가 아니라, 열심히 살아가는 모습, 최선을 다하는 삶 그 자체가 중요하다. … 그래서 '지난 20년간 나는 정말 최선을 다해서 살았어'라고 말할 준비를 해나가야 한다. 그것이 내가 주인이 되는 삶, 결과를 돌아보지 않고 과정을 중시하는 긍정적 삶의 뿌리다. 
 주어진 상황에서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최악/차악뿐이다. 하지만 내가 만든 상황에서 던지는 주사위에는 최선/차선의 선택이 있다. 기다린다고 상황이 명료해지는 것은 절대 아니다. 밤안개는 시간이 지날수록 짙어진다.
 다만, 상황을 만들기 위해서는 그만큼의 노력이 필요하다.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일에 최선을다하면서 새로운 것을 준비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두 마리의 토끼를 좇지 말라는 것은 패배자의 논리다. 지금 만약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다면 두 마리의 토끼를 좇아라. 지금 어려운 상황을 돌파하기 위해 현재에 최선을 다하면서, 미래에 대한 준비를 병행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 경우 그만큼 다른 것을 포기해야 한다. 불필요한 순서대로 나에게 붙어 있는 나쁜 습관의 찌꺼기를 떼어내고, 시간을 압축해서 밀도를 높이고, 코피가 터지고 엉덩이가 짓무르도록 집중해가면서 준비를 해야 하는 것이다.

인생은 정직한 것이다. 묵묵히 걸어가라. 결과를 두려워할 필요도 없다.





여가와 풍요의 역설

저자
남해경, 김영래 지음
출판사
한울 | 2012-06-18 출간
카테고리
정치/사회
책소개
자유롭고 즐겁고 행복한 여가를 위하여!“결국 ‘여가와 풍요의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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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하게 된다. 여가와 풍요의 시대에 우리는 행복한가? 혹은 여가와 풍요를 행복과 등가화하지는 않더라도, 여가를 통해 충분한 자유와 즐거움을 느끼고 있는가? 이 질문에 대해 확신을 갖고 대답하기는 어렵다. ‘여가와 풍요의 시대에 대한 확신만큼 여가를 통한 자유, 즐거움, 그리고 행복에 대해 확신하기가 어렵다는 것이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이다.
 초기산업사회부터 최근의 후기산업사회에 이르기까지 경제/사회/정치/문화/기술적 진보가 대중의 여가를 위한 잠재 가용 시간과 자원의 총량을 증가시켰으며, 그로 인해 여가에서 선택의 양과 폭이 예전과 다르게 확산된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문제는 근대 이후 이런 일련의 여가 환경의 양적/질적 변화에 비례해서, 여가가 본질적으로 추구하는 자유, 즐거움, 그리고 행복 역시 긍정적인 방향으로 진보했다고 볼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 오히려 많은 사람들이 옛 시절을 그리워하는 것을 종종 목도한다. 과거의 여가는 시간도 여건도 부족했지만 안락함과 편안함이 있옸고, 심지어 일을 통한 보람과 충족감도 적지 않았다. 반면 오늘날의 여가는 시간도 많고 여건도 풍요롭지만 과거의 안락함과 편안함, 그리고 그로 인한 뿌듯함은 희석되고, 오히려 삶의 팍팍함마저 느껴진다. 자유롭고 즐겁고 그래서 행복해야 하는 여가가 여가답지 못하고, 심지어 피곤한 상황을 만들어내는 ‘여가의 역설’현상이 심화되고 있는 것이다. ‘자유 없는 여가’, ‘여가 없는 여가’, 참으로 왜곡된 여가사회의 단면이다. 
 바쁜 일 때문에 가족과 함께 시간을 보내지 못하는 현대의 가장은 자신의 휴식과 즐거움을 위해서라기보다는 가장으로서 ‘의무화된 여가’를 보내느라 주말에 정작 쉬지 못한다. 그리고 여가 장소로 오가는 도중은 물론, 여가 장소에서도 가족을 배려하느라 늘 피곤한 상태이다. 이처럼 여가가 그 자체로 즐거움이나 자유로움을 추구하기 보다 어떤 목적을 이루기 위한 도구적 수단이나 일시적인 스트레스를 풀기 위한 ‘탈출형/재충전형’으로 전락되고 있다. 또한 가용 시간은 늘었지만 오히려 이 시간을 활용하여 부수적인 수입을 얻기 위한 대체 수단으로서의 역할이 증대되고 있다. 심지어 실업자나 조기 은퇴자의 경우처럼 객관적인 여가시간은 늘었지만 그 속에 진정한 자유가 없는 ‘강요된, 강제된 여가’를 보내는 이들도 눈에 띄게 증가하고 있다.

14. 여가와 풍요의 시대에 대한 우리의 생각은 마치 거대한 난류와 한류가 교차하듯 심한 혼란에 빠져 있는 상황이라고 할 수 있다. 물질적/제도적 진보를 바탕으로 마침내 달성된 ‘여가와 풍요의 시대’에 여전히 채워지지 않은 자유, 즐거움, 그리고 행복에 대한 이 갈증의 정체는 무엇일까? 여가의 대중적 확산에도 불구하고 ‘자유 없는 여가’, ‘여가 없는 여가’를 생산하는 사회구조적 조건과 힘은 무엇일까? 그리고 이러한 물음에 대답하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할까? 이 책은 이러한 질문들에 답하기 위한 작은 시도이다.

15. 우리는 이 문제를 풀기 위해서 여가를 중심에 놓고 세상을 해석하는 방법을 택하고자 한다. 사실 오늘날의 여가 이해는 근대적 생산을 중심으로 새로운 사회질서가 강요되는 가운데 노동과 여가가 분리되면서 노동 이해의 결과로서 얻은 것이라고 생각된다. 생산의 중심성과 그 연장선상에서, 노동의 중심성은 산업자본주의의 주된 생산력이 바로 노동이었기 때문에 필연적이었다. 생산 패러다임 혹은 노동 패러다임은 근대적 여가 이해의 중핵이 되었다. 
 이러한 노동 패러다임하에서의 여가는 기껏해야 노동의 주변적 지위로서 그 의미가 있을 뿐, 여가를 삶 차원에서 보다 넓고 깊게 이해하고 해석하는 데는 분명한 한계를 보인다. 

16. 이런 폐해를 방지하기 위해 우리는 여가를 중심에 놓고 세상과 삶을 바라보는 여가중심적 접근을 시도한다. 이러한 접근은 여가를 해석의 대상이 아니라 세계와 삶을 이해하는 중심적 거점으로 이해하는 방식이다.
 
 여가중심성이라는 지평 위에서 드러나기 시작하는 여가의 현실과 이상을 이해하려면 우선 여가가 이뤄지는 역사적/현재적 지평, 그리고 여가가 무엇인지에 대한 가치 기준이 온당하게 평가되어야 한다.

17. 자본주의적 여가의 삶 속에는 불가피한 부분과 정상적인 부분, 그리고 비정상적인 부분이 모두 녹아 있을 것이다. 이들을 가려내가 불가피한 부분과 비정상적인 부분에 대해 살펴볼 수 있을 것이다.

 결국 ‘여가와 풍요의 시대’에 우리는 왜 여유롭고 자유스러운, 그래서 행복한 삶과 여가를 구현하지 못하고 있는가에 대한 대답은, 여가를 중심에 놓고 세상을 해석하는 가운데 현재의 여가가 어느 정도 왜곡되어 받아들여지고 있는지를 보면서 그 원인을 역추적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과정에서 여가와 풍요의 시대에 나타나는 역설적 현상 앞에서 우리의 삶을 반추하고, 더 나아가 삶과 세상에 대한 ‘여가적 상상력’을 통해 과거와 현재를 종합하는, 가치와 사실을 담아내는 다양한 삶의 모델을 제시할 수 있을 것이다.

18. 인간은 일하지 않고 살 수 없고, 동시에 여가없이 살 수 없는 존재이다. 일은 여가의 경제적 기반이고, 여가는 일의 심리적 동기에 해당한다. 이를 일과 여가의 구분을 넘어 일과 여가의 교호성이라 부르고자 했다. 일과 여가의 교호성은 인간의 삶을 지속시키고, 건강하고 의미 있는 생활을 위해 수행하는 이원적 율동과도 같다. 이것은 인간과 함께하는 자연스러운 삶의 리듬인 것이다.

19. 이 책에서는 일과 여가의 기능적 관계를 넘어서 삶의 존재 양식으로 일과 여가의 이원적 교호성의 개념과 의미를 설명할 것이며, 이 개념을 이 책의 종지로 사용할 것이다.

24. 말하자면 본원적 수준에서 즐거움과 기쁨을 주고 그래서 행복한 그런 충만한 여가가 아니라 스트레스 해소를 위한 ‘탈출’과 ‘재충전’이 목적인 표피적 수준의 1차원적 여가인 것이다.

오늘날의 여가 개념은 노동하지 않는 시간으로 이해되는데, 이는 노동 개념을 중심으로 한 편협한 시각일 뿐 아니라 경제 중심적인 한계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이다. 우리는 이런 틀을 벗어나 여가를 넓고 깊게 이해하기 위하여 교시적 틀을 도입했다. 이 틀은 인간의 존재 양상을 자유-필연, 가치-사실이 교차된 평면에서 종합적으로 조명하기 위한 것이다.

25. 반면 우리는 여가를 자유의 영역에 배치하고 자유와 여가의 내재적 관계를 탐색했다. 여가는 우선 노동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자유 시간이지만, 더 나아가 아리스토텔레스의 지혜를 빌려 마음이 바쁘지 않은 상태라야 여가가 될 수 있다고 보았다. 나아가 여가는 자기 발생성이라는 맥락에서 자유롭고 의미 있는 활동이어야 진정한 여가가 될 수 있다고 설명하려 한다. 여기서 여가는 활동을 의미할 뿐만 아니라 사유 또한 포함하는데, 세상의 번잡한 일로부터 자유로운 무위 수준에서 사유 삼매경에 몰입되어 이쓴ㄴ 것도 여가라 할 수 있다. 일의 세계는 목적 합리성과 도구적 합리성이 지배하는 인위적 세계이므로 마음의 여유를 바탕으로 인위의 무화를 통한 여가 상태로의 진입을 본원적 여가라 했고, 본원적 여가의 한 가지 형태를 성찰적 여가로 개념화했다. 그리고 성찰적 여가가 진정한 것일 때 비로소 여가적 성찰의 경지에 들어간다고 보았다.

56. 동양의 전통에서 관광은 ‘주역’ 관괘에 나오는 ‘관국지광’의 형태로 처음 등장한다. ‘관국지광’은 나라의 빛을 본다는 뜻이다. 당시 관국지광의 주체는 공경과 현자였고, 그 대상은 자연경관이 아니라 예악형정이었다.
공경은 주나라의 높은 관직자를 가리켰고, 예악형정에서 예는 예법 제도, 악은 음악, 형은 형벌, 정은 정령을 지시한다. 이렇게 볼 때 관국지광 및 관광에서의 광은 문자 그대로 자연 현상으로서의 빛남을 넘어 일국의 문물 및 제도의 탁월함, 빼어남을 의미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때 ‘국지광’의 내용은 예악형정이었으며, 곧 정치에 대한 음미와 그에 기반한 평가였다. 말하자면 관국지광은 국정의 예악형정에서 탁월함을 감별하고 기록함으로써 이를 평가하는 행위를 뜻했다. 전통 시대에는 예악형정이 서로 조화를 이뤄야 나라가 바로 선다고 생각했다.



칠흑 같은 밤과 마주할 때면, 
앞으로의 계획이 성공할 수 있을까 하는 의심이 나를 사로잡는다. 
안정을 벗어나 울타리를 넘을 때 의례 나타나는 전형적인 현상인 줄 알지만 
이 틈을 부지런히 노리는 의심을 쉽게 뿌리치기 힘들다.

그 동안 이 사람, 저 사람에게 내가 여행을 떠나는 이유를 수도 없이 말했다.
내 나이 스물여섯. 바람에 몸을 맡긴 스무살에서 이젠 뿌리를 내려야하는
때를 향해 가야 한다. 하지만 울타리가 되어주고 많은 배움을 주었던
10년의 군생활을 마무리 하고 새롭게 길을 나서려 한다.
이 이상 머무는 것은 정착이라는 느낌보다는 퇴보라는 느낌이 들었다. 
군대에서 삼십 년을 상상해 본다. 그 모습은 너무도
서글프다. 그것은 진정 내가 원하는 삶이 아니다.

부모님, 내 삶의 큰 기둥들이신 분들. 그분들의 은혜를 어찌 갚을 수 있을까.
둘째 아들이 이제 혼자 앞가림 한다 싶으셨을 텐데
걱정과 불효를 드린다. 하지만 어느날 보았던 햇볕을
쫓아 기괴한 모습으로 자라버린 무화과 나무.
있어야 할 곳이 아닌 곳에 뿌리를 내려버린 존재처럼 살 수는 없다.

포근한 안개속을 걷듯 행복했던 어린 시절, 내 존재를 드러내기 위해 조바심
내던 이십대 초반, 나만의 길을 찾아온 요즘까지. 나는 정말 안정적인 인생을 살았다. 

그런데 왜 이것이 중단되어야 하는가. '나의 행복을 바라는 이들’이 내게 진정
바라는 것은 무엇일까? 침착하게, 체념하듯 따뜻한 아파트 안에서 책을
읽거나 소파에 누워 TV를 보면서 노년의 덜미에 붙잡히기를 기다리는 것?
아니 내게 그런 세월은 없을 것이다. 

내 안에서는 새로운 만남과 배움 그리고
새로운 삶에 대한 막연하지만 분명한 욕망이 나를 부르고 있다.
머나먼 초원과 얼굴로 쏟아지는 비바람과 느낌이 다른 햇살아래 몸을
맡기는 것을 꿈꾼다. 변명하기 위한 삶을 살지 않겠다.
이제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넌다.
아직 아무것도 시작되지 않았다.

2012년 12월 5일.
전역 신청서를 제출하며


1) 타즈마할을 가기로 했다. 인도, 너를 좋아 할 수 있는 노력을 해보자는 생각에서 온 것이다. 

 우리는 아무런 정보없이 무작정 델리의 버스터미널로 갔다. 관광객용 고급버스(에어컨이 있는)는 7시에 이미 출발해버린 것을 알게 되었다. 인도사람들이 이용하는 로컬 버스를 타야했다. 자연이 우리의 에어컨이다라고 말하는 버스는 모든 창문을 열어 차량 내부를 시원히 해주는 친환경 차였다. 쇼바도 없는 버스. 작은 속도 방지턱에도 앞바퀴 쪽, 뒤바퀴 쪽 승객들이 약간의 시간차를 두고 펄쩍 펄쩍 뛰어 오른다.

...그래 어찌됐든 타즈마할에 도착하면 되지.


2) 아침부터 타즈마할에 간다고 짐을 챙기고 난리를 피워 밥을 먹지 못했다. 버스를 타기 전 간단히 요기를 할 수 있는 간식을 샀다.

단 음식을 싫어하는 내 입맛을 고려해서 영제가 다이제스티 같은 쿠키들을 잔뜩 사왔다. 

몽골의 고비사막이 생각나는 쿠키였다. 씹을수록 내 입속의 수분을 급속히 흡수하는 쿠키… 나중에 알았지만 오늘의 날씨는 38도. 가히 가만있어도 땀이 나는 날씨. 고맙다 영제군.


3) 타즈마할에 도착.

왕비를 위해 지었다는 아름다운 이야기가 있든 인도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이라던가의 이유보다는 기념사진(사랑해)을 찍기 위해 간 우리는 목표 수행을 위해 미리 적어간 스케치북을 꺼냈다. 한 장 신나게 찍으니 보안요원이 우리를 불러 이곳은 종이 소지가 허용이 안된다고 한다. 알겠습니다. 나는 물구나무를 서서 사진을 찍었다. 또 아저씨들에게 불려갔다. 미안합니다. 플래너를 꺼내 감상을 적고 있었다. 아저씨가 왔다. 미안합니다.


4) 타즈마할을 둘러보니 4시쯤. 우리는 주변에서 아침겸 점심겸 저녁을 겸하는, 어쨌든 그날의 첫끼를 먹었다.

 운이 좋았는지 루프-탑(멀리 타즈마할이 보이는 지붕위) 식당에 갔다. 사람 좋은 웨이터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는 하늘 가까이 보이는 먹구름을 가리키며 특유의 낙천적인 어투로 곧 쏟아지는 빗속에서 식사를 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거 참 낭만있겠다.라고 생각을 하고 맛난 식사를 했다. 그리고 버스를 타러 돌아가는 길에 비를 쫄딱 맞았다.


5) 돌아가는 버스. 오랜만에 합리적인 선택?

걱정이 됐다. 우리가 아침에 예약한 버스는 에어컨이 세차다 못해 춥기로 유명한 동남아버스. 방금 비를 쫄딱 맞아 쥐 꼴이 되어 있었다. 감기에 거릴 걸 걱정하고 있는데 이 버스가 30분정도 늦을 것 같은데 다른 버스를 타는게 어떻겠냐고 물어왔다. 에어컨이 없는 버스란다.

 우리는 왠 행운이냐며 그 버스를 탔다…

앗… 이 버스는 아침에 타고 온 버스보다 더 최악…

고속도로를 이용하지 않는 이 버스는 국도를 달렸다. 아침체 올 때는 3시간 걸렸는데 돌아가는 길은 6시간이 걸렸다. 아침의 쇼바없는 버스에서 더 나아가, 속도방지턱에서 덜컹 하는 순간 시트와 함께 땅바닥에 나뒹굴어야 했다.


모로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고는 하지만 집에 돌아갈 수 있을까...

아, 시원해서 좋다.

그런데 이 문 언제 닫히는 거지?
결국 문은 3시간 동안 닫히지 않았습니다.    


심하게 흔들리는 

찜통 버스에서도 뛰놀 수 있는 아이들의 파워

타즈마할은 이 사진이 전부…
정교하게 잘 만들어지긴 했는데, 
감동은 비교적 덜하네요.
소문난 잔치에 먹을 것 없다더니. 실망~

루프-탑 식당 위에서 본 타즈마할&먹구름



날 좀 신경써달라고요!
아이는 울어버렸습니다. 
가족… 이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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