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망가의 프랑스 버젼.


유럽에 돌아다니며, 인상적인 것 중
하나는 바로 ‘일식집' 입니다.

스시, 벤또 등 여러가지 종류로,
유럽 어느 도시를 볼 수 있는 일식집.
깔끔함, 웰빙 등 긍정적 이미지가 연상되는
브랜드 마케팅 덕분일까요
‘현지인’이 대부분 이용하는 모습에
일식의 힘(생명력)을 보는 것 같아 부럽습니다.

런던에 WASABI(와사비)라는 일식 프랜차이즈가
있습니다. 점포 수도 꽤 많고 지나며 볼 때마다
손님도 많아, 다시금 일식의 저력을 느꼈더랬죠.
그런데 나중에 알게된 사실은
이 프랜차이즈의 대표는 한국인이라는 것.

몇 십년 전, 포장마차부터 시작해
지금의 프랜차이즈로 키워냈다고.
모르는 분이지만 같은 한국인이라는 사실에
어쩐지 뿌듯함이 온천수 마냥 솟았습니다.

‘응? 그런데 왜 일식집을?’

기업이란게 민족의 무궁한 영광과 발전을
위해 운영돼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런 물음이 떠올랐습니다.
그 분은 왜 한식이 아닌 일식을 선택했을까

한국에 있을 때 읽은 신문에선
삼성, K-POP 등 뭐 한류가 시작됐다고 자축했었는데
우리나라를 나와 유럽에서 우리나라를 바라보니,
삼성은 집나간 아들이요,
'K-POP? 그건 뭐지?' 같은 반응의 뻘쭘한 분위기.
그나마 북한 덕분(?)에 '한국 사람'이야
라고 하면, ‘아~’ 같은 반응이 온답니다.
(그리고 '너희 나라 안전해?'라는 질문이..)

오늘 프랑스 친구 집에서
일본의 식도락 만화를 만났습니다.
한국에서 읽을 땐 단순한 만화였는데
프랑스 시골의 작은 마을에서도 만나다니...
일본의 소프트파워를 보는 것 같습니다.


프랑스. 횡단보도가 멀다...

왜일까요?

프랑스의 어느 정지선.
횡단보도에서 멀리 그려져있다는 게 신기하네요


프랑스 리옹

"예약 안 하셨는데 들어오시면 어떡해요."


예약이 꽉 찼다는 한인 민박집을 돌아나오며 쫓겨나는 기분을 지울 수 없었다. 스위스 인터라켄, 민박집을 찾아 비를 맞으며 걸어갔던 길, 비를 맞으며 다시 돌아섰다. 민박집 주인이 한 말이 계속 맴돌았다. “예약 안 하셨는데 들어오시면…” 예약 안 하면 사람이 아닌가. 옆에 있던 아버지에게도 괜한 말을 듣게 한 것 같아 더 무안했다.

여행을 시작한 지 5개월쯤, 처음으로 한인 민박집에 갔다. 긴 추석 연휴에 휴가를 더한 아버지가 유럽에 왔고 나는 한인 민박을 인터넷으로 찾았다. 역시 한국은 IT 강국답게 민박도 예약을 초간편 하게 할 수 있었다. 는 자다가 씨나락 쪼아먹는 소리였다. 외국의 민박 사이트는 원클릭으로 예약이 된다. 한인 민박집은 민박집을 일일이 검색. 정보를 비교. 이메일로 예약할 수 있는지 문의. 답변이 오면 예약금을 계좌이체... 나는 (모든 과정을 무시하고) 민박집을 찾아갔다. 벨을 눌렀고 주인이 나왔다. 빈방이 없었다. 그리고 주인은 말했다. “예약 안 하셨는데 들어오시면 어떡해요.” 아, 이런 걸 주거침입이라 부르는 것이군요. “죄송합니다.” 혹시 다른 한인 민박집은 어디 있는지 물었다. 민박집 주인은 (어머, 그런 건 당연히 관광 안내소 가서 물어보셔야지요. 모르셨어요? 의 분위기로) 관광안내소가 어디 있는지 알려주었다. 

 겨우 한 곳의 경험이었을 뿐이다. 겨우 한마디 말이었을 뿐이다. 그렇게 넘어가고 싶었다. 하지만 사람을 돈으로 보는 장사치의 모습을 나는 한인에게서만 유독 꾸준히 보았다. 물론 만나보진 못했지만 분명 그렇지 않은 한인도 있으리라 믿는다. 믿고 싶다. 단순히 돈과 물건을 주고받는 게 아니라 가치와 가치의 교환을 시장활동의 본질이라 생각한다. 그리고 나는 많은 장사치에게 불쾌함을 선사 받았다.

 어느 연구에 따르면 페이스북 사용자는 페이스북을 하면서 불행을 느낀다고 한다. 사람들은 페이스북을 보며 질투, 외로움, 좌절감 등 부정적인 감정을 얻게 되는 데, 가장 큰 요인은 바로 다른 사람의 행복한 모습이라고 한다. 여행을 출발하기 전, 나는 페이스북 페이지를 열었다. 여행 영상도 만들어서 올렸다. 세계여행을 할 수 있는 건 운이 좋았기 때문이라는 생각을 했기 때문이다. 국민 세금으로 10년을 살아온 최소한의 보답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어느 날 오히려 페이스북으로 다른 사람에게 박탈감을 주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했다. 사진과 글을 올리면 많은 친구가 댓글을 달아주었다. ‘부럽다.’, ‘멋지다.’ 같은 말이 점점 많아지는 걸 보았다. 물론 친구들은 아무 의미없이 쓴 말일 수 있지만 괜한 걱정이 되었다. ‘멋지다'와 ‘부럽다'는 말속에 본인의 상태를 낮춰보거나 내 상태를 높이 보고 있다는 느낌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 자체로 멋진 각자의 삶이, 어쩐지 나로인해 그림자가 드리워진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의도했던 의도하지 않았던 내 여행은 사람들에게 불행을 주고 있었다. 

 빛이 있으면 그림자가 있듯, 누군가의 행복은 다른 이에게 그림자를 드리울 수밖에 없는 걸까? 내 여행은 그림자를 만들 수밖에 없을까. 내 여행과 내가 그렇게 욕했던 장사치는 결국 똑같은 것일까. 인류사에 큰 빛이었던 마더 테레사가 생각났다. 그녀로 인해서도 그림자가 생겼을까. 그녀의 행동은 무엇이 달랐을까? 그녀의 빛은 무엇이었을까?

정약용 선생은 이렇게 말했다. “몸을 닦는 일은 효우로 바탕을 삼아야 한다. 그렇지 못한다면, 제아무리 학식이 고명하고 문사가 아름답다 해도 흙담에 대고 색칠을 하는 것일 뿐이다.” 공부하기 전에 사람이 되라는 말씀이다. 다산은 이어서 말했다.

 사람이 문장을 지님은 초목에 꽃이 피는 것과 같다. 나무 심는 사람은 처음 심을 적에 뿌리를 북돋워 줄기를 안정시킨다. 이윽고 진액이 돌아 가지와 잎이 돋아나, 이에 꽃이 피어난다. 꽃은 갑작스레 얻을 수가 없다. 정성을 쏟아 바른 마음으로 그 뿌리를 북돋우고, 도타운 행실로 몸을 닦아 그 줄기를 안정시킨다. 경전을 궁구하고 예법을 연구하여 진액이 돌게 하고, 널리 듣고 예를 익혀 가지와 잎을 틔워야 한다. 이때 깨달은 바를 유추하여 이를 축적하고, 축적된 것을 펴서 글을 짓는다. 문장이란 것은 갑작스레 얻을 수가 없다. (…) 어찌해야 효우의 마음가짐을 내 안에 깃들일 수 있는가? 언제나 만백성을 이롭게 하고 만물을 길러내겠다는 마음을 지닌 뒤라야 바야흐로 책을 읽은 군자가 될 수 있는 법이다. <다산 선생 지식경영법>에서

정약용 선생의 사람이 되라는 말은 비단 공부에만 한정되지 않을 것 같다. 배웠다는 사람이 많은 이들의 가슴을 아프게 하는 경우를 많이 본다. 검을 쓰는 기술은 배웠으나 검을 어디에 써야 하는지 길(道)을 배우지 못한 사람들을 많이 본다. 빛은 그림자를 만들 수밖에 없는 건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쩌면 마더 테레사가 되려 노력한 것은 빛이 아니라 오히려 그림자가 아니었을까 생각이 든다. 그녀는 찬란한 태양이 되려 했던 게 아니라 사람들이 밟고 설 수 있는 넓은 땅이 되려 했던 게 아닐까. 성숙해간다는 것, 깊어져 간다는 건 이런 것이 아닐까.



영국 옥스포드의 골목



파묻힌 생명 ㅡ 매슈 아널드

지금, 우리 사이에 가벼운 농담 오고 가지만
보라, 눈물 고인 나의 눈을, 
이름 모를 슬픔이 가슴을 울리누나.

그렇다 그렇다 우리는 안다.
농담을 주고받을 줄 알고
미소도 지을 줄 안다.
그러나 이 가슴에 무언가 있어
그대의 농담 안식이 못 되고
그대의 미소 위안이 못된다.

그대의 손 내 손에 얹고 잠시만 침묵해다오.
그대의 맑은 눈동자를 내게 돌려
그대의 마음 깊은 곳, 사랑하는 그대의 영혼을 읽게 해다오.

아 사랑조차 약하여
마음 열고 고백하지 못하는가.
사랑하는 사람들조차 용기가 없어
가슴에 품은 진심을 고백하지 못하는가.
나는 안다, 사람들이 한사코 자기 생각을 감추려 함을.
솔직히 고백했다가
멸시받을까, 비난받을까 두려워함이라.
나는 안다, 
사람들이 가면을 쓰고 타인에게도 자신에게도 낯선 사람으로 살아감을.
그러나 모두의 가슴에서 뛰는 것은 
똑같은 심장이라.

사랑하는 이여!
그러한 저주에 가슴과 입이 마비되어
우리마저 벙어리가 되어야 하는가.

아 한순간일지라도
우리 가슴의 빗장을 열 수 있다면
여태껏 묶어 두었던
우리 입술의 사슬을 풀 수 있다면 
그것으로도 족할 것을!

예견된 운명,
변덕스런 아이가 되어
때로는 장난에 마음을 빼앗기고
때로는 온갖 싸움에 몸을 던지고
본성마저 변하는구나.
그러나 운명은,
변덕스런 장난 속에서도 
순수한 자아를 지키고
존재의 법칙에 순응케 하기 위해
보이 않는 생명의 강에 명령하여
우리 가슴 깊은 곳에 파묻혀 흐르게 하였구나.
그래서 인간의 눈은
파묻힌 그 흐름을 보지 못하고
장님 같은 불안 속에서 생명의 강과 함께 정처 없이 흐르며
영원히 떠도는 것 같구나.

그러나 세상의 온갖 혼잡 속에서도
그러나 어두운 투쟁 속에서도
파묻힌 생명을 알고자 하는 욕구가
자꾸 솟구쳐 오른다.
그것은 정열과 한없는 힘을 쏟아
우리의 참된 본질적인 생명의 길을 가려는 욕망.
강렬하고 깊이 울리는 가슴의 신비를 알려는 갈망.
우리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찾아내려는 열망.
수많은 사람들이 제 가슴속을 파헤쳐 보지만
아, 너무 깊어 끝까지 파지 못하누나.
우리들, 수많은 일터에서 
그 힘과 기량 모자람 없었건만
우리의 본질적인 일터에서 
본질적인 자아가 되어 본 적은 거의 없구나.
가슴에 흐르는 감정 한 가닥조차 표현할 능력이 없구나.
그리하여 우리의 감정은 표현되지 못한 채 지나가 버리누나.
감춰진 자아를 말하고 행동하려 애썼지만 모두 허사였나니
우리가 말하고 행동하는 것은 감동적이고 근사하지만
진실은 아니리!
우리는 이제 갈등으로 더는 괴로워하지 않으리라.
순간순간에게 마비의 힘을 갈구하지 않으리라.
그렇다! 그것은 우리의 요구에 따라 우리를 마비시켰다.
그러나 아직도 이따금
영혼의 심연에서 생겨난 미풍의 선율과 떠도는 메아리가
아득히 먼 땅에서 온 듯 어렴풋이 홀로 찾아와
우리의 나날에 우수를 더한다.

비록 아주 아주 드문 경우지만,
어느 사랑하는 손이 우리 손에 쥐어질 때
기나긴 시간의 소음과 섬광에서 헤어나
타인의 눈을 분명히 읽을 수 있을 때
세속에 귀먹은 우리의 귀를 
사랑스런 목소리가 어루만질 때
이때만은 우리 가슴속 어디에선가
빗장 열리는 소리 들리고
오래도록 잊었던 감정의 맥박이 다시 뛴다.
눈은 고요해지고 가슴은 편안해지며
우리는 하고자 하는 말을 하게 되고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게 된다.
인간은 자기 생명의 흐름을 보게 되고
굽이치는 속삭임을 듣게 되며
펼쳐진 초원, 따사로운 햇살, 부드러운 바람을 보게 된다.

달음질 치듯 날아가 버리는 휴식의 그늘을 좇던 치열한 경주가 마침내 잦아든다. 
서늘한 바람이 얼굴에 스치고,
낯선 고요가 가슴에 번진다.
그럴 때 인간은 안다고 생각한다.
자신의 생명이 생겨난 언덕과
그 생명이 흘러갈 바다를...... 



책<독일인의 사랑>에서 만남.




소설가 김연수씨는 이렇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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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읽는 동안 우리는 어쩔 수 없이
무용한 사람이 된다.
시를 읽는 일의 쓸모를 찾기란
무척 힘들기 때문이다.

아무런 목적 없이 날마다 시를 찾아서
읽으며 날마다 우리는 무용한 사람이 될 것이다.
하루 24시간 중에서
최소한 1시간은 무용해질 수 있다.
아무런 이유가 없는데도 뭔가 존재한다면,
우리는 그걸 순수한 존재라고 말할 수 있으리라.
우리는 날마다 시를 읽는 것만으로도
그 순수한 존재를 경험할 수 있다.

<우리가 보낸 순간>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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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발끈과 싸우는 고양이를 보노라면
무용의 느낌을 조금은 알 것 같다.

유럽에 와서 만나는 고양이의 매력
언젠가 고양이와 살아보고 싶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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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아원에서 지내며 내심 불안했다.
아이들과 잘 지낼 수 있을까.

1주일 후
고아원을 떠나는 날,
결국 영제는 아이들을 울렸다.
이영제 나쁜놈.

Youngje, My WOW,
made angels cried
on Leaving day.

작별


그대 어디에서 와 어디로 흘러 가는가.

붙잡으려 하면 응어리지는 그대를
속 시원히 풀어내면 될 것을
바보같은 나는 그대를...

숨결에 따라
흐르는 그대를
돌이킬 수 없기에
붙잡을 수 없기에
삼켜보네.

그대, 콧물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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