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식은 부모님으로부터 

그 생명을 받습니다.


하지만 김과장님도 말하듯,

인생이란 쏜살같이 지나가버리고

자식은 살아가는만큼 

부모님으로부터 멀어져가고 

원래의 방향이 아닌 곳을 향해 

삶이라는 불을 밝히며 나아가는 것 

같습니다.


추석연휴에 휴가를 덧대신 아빠가

15일여간의 유럽여행을 왔습니다.

제 기억에 아빠와 단둘이는

처음인 여행같습니다.


친구와는 또다른 느낌의 여행.

부자의 여행.

가족이라는 이름의 여행.


점과 점이 멀어지는 단절이 아닌

점과 점이 이어져 선이 만들어지듯 

연결이되는 여행이 됐으면 좋겠습니다.


스위스 취리히 인터라켄 여행긴 추석연휴를 맞이하여 유럽에 배낭을 매고 오신 아부지



인기를 얻고 싶으십니까

건강해지고 싶으십니까
여기 그 답이 있습니다.

그리스 터키 자전거 여행

- 이건 벨기에 친구 캐롤린, 그녀의 집 벨기에의 작은 마을, 후셀트에서 신세를 지고 있을 때의 이야기.

2013년 9월 20일, 유럽에 온 지 2개월이 지날 즈음이었다. 유럽 물가는 정말 비쌌다. 이란에서 터키로 이동했을 때 물가가 30% 정도 비싸졌다고 느꼈는데 터키에서 그리스로 넘어가니 물가가 또 30% 정도 비싸졌다(이란에서 캔콜라를 500원 정도에 사 먹었는데 그리스에서 2,000원에, 숙박비는 만 원 정도에서 삼만 원 이상으로 올랐으니, 한 달 정도의 기간 동안 막차 끊긴 후 택시 같은 따따블 인플레이션이 몰아친 것이다. 그제야 나는 유럽 친구들이 왜 동남아시아에 와서 돈을 펑펑 쓸 수 있는지 이해할 것 같았다). 이런 궁색한 연유와 파리든 런던이든 그저 비슷하게만 보일 뿐인 유럽 관광지들을 피해 갈 곳이 필요했다. 그리하여 예정에 없던 벨기에지만 친구가 있는 벨기에에 달려갔다.

 하늘도 내 응큼한 마음을 알았는지 내가 벨기에에 도착한 날부터 떠나는 날까지 날씨는 우중충했고 추웠다. 나는 부지런한 사람이지만 아침은 날씨도 춥고 졸리고 귀찮기때문에 밖에 나가지 않는다. 점심쯤이 되어서야 한량처럼 동네를 어슬렁어슬렁 돌아다녔는데, 벨기에에 간지 사흘째가 되던 날, 나는 듣고 말았다. 동네 근처에 오래된 중세 성이 있다는 사실을. 성 뒤로는 과수원도 있다는 사실을. 

 캐롤린의 집 주변에는 두 개의 케이크 가게가 바로 옆에 붙어 있었다. 그즈음 둘 중 어디가 더 맛있나 기웃거리던 게 하루의 낙이였는데, 참신한 일과가 생겼다. 캐롤린이 친절히도 구글맵을 이용해서 성으로 가는 경로를 찍어줬다. "큰길로 갈 수도 있느데, 그 길은 주변 풍경이 심심하니까 볼 것 많은 길로 가” 캐롤린은 내게 골목길을 가르쳐줬다. 그리고 다음날, '사나이는 자고로 큰길을 가야 하는 기라'라고 말했던 고등학교 친구가 생각난다. 나는 길을 잃었다. 분명 제대로 가고 있었(다고 생각했)는데 한참을 걷다가 약간 서늘한 기분이 들었다. 원래 고속도로를 지나야 하는 건가? 지도를 켜보았다. 역시나 엉뚱한 곳을 향해 가고 있었다(심지어 정반대 방향으로). ‘어쩐지 걸어도 너무 걸었어’ 이성적 사고기능도 뒤늦게 작동됐다. 

‘그래, 원래 목적은 산책이었으니까’
난 길을 계속 걸었고, 그제야 그곳의 가을을 보았다. 한 해를 살아낸 낙엽이 쌓인 길을, 나무와 나무 사이로 흙내음이 담긴 안갯길을, 여름의 자리를 가득 채운 가을의 길을 걸었다. 길을 잃어보니 이런 생각이 든다. 길이란 역시 걷기 전에는 알 수 없다. 길은 우리가 걸을 때 가지가 자라듯 뻗어 나가고 그 전에 알지 못했던 길이 열리는 게 아닐까. 벨기에에 간 것도, 정말 생각지 못한 길이었다. 여행 중에 만나게 된 새로운 길, 그곳이 벨기에 였나보다. 

 벨기에에서 일주일을 머물렀다. 사귐 넓은 캐롤린 덕분에 난 매일매일 그녀의 가족들과 친구들을 만날 수 있었고, 그들에게 남북한의 관계, 한국 사람들의 생활, 정치, 역사, 교육 등을 이야기해주었다. 그리고 벨기에 맥주(수천 종이 넘는 벨기에 맥주에 대한 그들의 무궁한 자부심)를 마시고, 벨기에식 프렌치프라이(사실 다른 프렌치프라이와 무슨 차이가 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를 먹으며 지냈다.

 우연히 만난 길이었지만 벨기에가 그렇고 그랬던 유럽 중에 가장 기억에 남는 이유는 현지인들의 실제 삶을 보자는 여행 목적에 맞았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 고성이 목적이 아니라 산책이 목적이었던 것처럼 말이다. 나뭇가지처럼 자라났던 여행길, 그 길에서 '하지만 난…'이라던가, ‘나중에'라던가 하는 주문을 외우는 순간 ‘우연히’라는 마법은 사라졌다. 그 순간을 온전히 받아들이려는 자세. 어제의 계획은 어제의 계획일 뿐. 진짜 멋지고 생각지 못한 길은 길 위에 있었다.










일제시대에 사할린으로 강제이주된 부모님의 자식으로 

태어나 평생을 소련에서 자란 할아버지를 배에서 만났죠. 
다행히 ... 목적지(하바롭스크)도 같아서 기차도 같이 탈 수 있었습니다.










D-1] 여행의 시작

약 23시간 이스턴드림 호를 타고 도착한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

얼어있는 바다를 보며 제 마음도 얼어붙는 기분이 ...

동해항 환전소 아주머니께서 내가 오랜 여행을 한다는 말에 동전을 잔뜩 서비스로 주셨다. 

아, 이런게 사람 사는 정이라는 걸까... 하지만 러시아에서 동전은 거지도 안 줍는 놀라운 가치를 지니고 있었다. (동전 14개가 100원쯤 됐던 것 같다)








숫자 3처럼 보이지만 글자라는 사실!


거지도 안줍는 동전





- 이건 동해항을 떠나 러시아 하바롭스크까지 가면서 있었던 이야기.

 2103년 3월 31일, 그날은 아기다리고기다리 세계 여행이 시작되던 날. 서울 강변터미널에서 새벽 버스를 타고 도착한 동해. 동해항에서 승선한 이스턴드림 호에서 바라본 동해항. 어쩌면 다시는 못 돌아올 이곳. 눈부시던 햇살, 바다 내음, 그야말로 시작이라는 말은 이런 날에 붙여야 하지 않을까 하는 날이었다. 그래, 오늘부터 세계여행이다. 하지만 그토록 학수고대해오던 날이지만 사실 그날 난 눈앞이 캄캄했다. 속박과 관습에서 벗어나려는 그때 자유의 그림자가 나를 뒤덮었다. 내 앞에 펼쳐진 동해의 끝없는 바다와 그 수평선 너머의 어둠. 두려웠다. 출항을 알리는 뱃고동소리가 들렸다. 그때까지의 내 삶은 뒤편 파도 속으로 사라지고, 앞에는 예측할 수 없는 세계가 기다리고 있는 게 느껴졌다.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하면 인터넷으로 만난 러시아 친구 집에서 이틀 밤을 묶고 영제가 있는 하바롭스크로 이동(영제는 나보다 2주 먼저 러시아에 갔다). 이게 원래 계획이었다. 하지만 난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하자마자 곧장 영제가 있는 하바롭스크행 기차를 탔다. 인터넷 친구에겐 연락도 하지 않았다. 하바롭스크로 향하던 시베리아 기차에서의 밤. 잠을 잘 수 없었다. 나는 도망친 것이다.

 러시아로 가는 배에서부터 하바롭스크까지의 2박 3일. 두려움으로 어둡고 어두웠던 길을 함께한 사람이 있다. 할아버지와는 이스턴드림 호의 같은 방에서 만났다. 할아버지는 마른 북어를 안주삼아 위스키 ‘도라지’를 마시고 있었다. 염색을 한 지 꽤 지난 듯 검은 기운이 거의 사라져버린 흰 머리와 역시 하얗지만 잘 다듬어진 콧수염, 웃으면 주름 속에 묻혀버리는 작은 눈. 할아버지는 북한 말씨를 썼다. 내게 위스키를 따라주었다. 할아버지는 하바롭스크에 사는 딸과 손주를 만나러 가는 길이었다. 

 할아버지의 부모님은 1942년 일제에 의해 사할린으로 강제 이주됐다. 1944년 할아버지는 그곳에서 태어났다. 할아버지가 5살이 되던 즈음 아버지가 남한의 광산으로 다시 징집됐다. 일본의 패전으로 사할린은 다시 소련 땅이 되었다. 아버지는 돌아오지 못했다. “돈 벌러 다녀오마” 이게 어린 아들이였던 할아버지가 들은 아버지의 마지막 말이었다. 소련에서 자란 할아버지. 한국인으로서 겪어야 했던 인종차별과 같은 동포들끼리의 갈등. 1988년 할아버지가 사십 대 중반이 되던 즈음 남한에서 올림픽이 열렸다. 이 소식이 할아버지가 처음으로 접한 남한 소식이었다. 북한 소식만 들어왔던 할아버지가 발전된 남한의 모습에 굉장히 놀란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1991년 소련은 해체되었다. 냉전도 끝났다. 적십자의 도움으로 할아버지는 한국 땅을 밟아볼 수 있었다. 46년 전에 헤어진 아버지도 그때 만날 수 있었다. 하지만 아버지는 곧 폐병으로 돌아가셨다. 몇 년 전 한국 국적을 받고 지금은 한국에서 생활하고 계신다고. 하지만 할머니는 국적을 얻기 전에 돌아가셨다고. 

 일제 강점기와 소련, 냉전의 종식과 러시아로의 이데올로기를 말 그대로 몸으로 겪은 할아버지. 나로선 머릿속에 그려보기도 힘들었던 그 장면들. 그 시간을 지나오는 느낌은 어땠을까. 이야기에서 느껴지던 무게, 이걸 삶의 무게라고 하는 걸까. 할아버지는 덤덤히 말했지만, 나는 듣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먹먹했다. 도망칠 곳 없는 삶을 살아온 할아버지와 여행을 시작하자마자 도망치고 있는 나. 그날 밤 기차는 끝없이 덜걱거리며 어둠 속을 달리고 달렸다.

어느새 날이 밝아 할아버지와 나는 하바롭스크에 도착했다. 하바롭스크 거리엔 여전히 눈이 쌓여 있었고, 사람들은 두꺼운 외투를 입고 있었다. 4월의 러시아는 아직 겨울이었다. 하지만 기차역에 마중나온 영제를 보자 마음에는 봄이 오는 것 같았다. 할아버지와 헤어져야 할 시간이 됐다. 사실 나는 그제야 할아버지를 믿을 수 있었다. 할아버지의 북한 말씨와 나를 처음 보는데도 이것저것을 사주던 모습을 나는 사기꾼이 아닐까 의심을 했었다. 내 스스로가 참 아둔하고 눈이 어둡구나 싶지만, 두려움은 진실조차 보지 못하게 한다는 걸 그때의 내가 알 리 없었겠지. 하지만 어두운 길을 걸을 때에 누군가 곁에 있어준다는 것만으로도  그 어둠조차 걸어볼만 해진다는 건 지금도 잊히지 않는 교훈이다. 할아버지와 나는 내일 다시 만날 것처럼 홀연히 헤어졌다. 할아버지를 다시 한 번만 더 만나볼 수는 없을까. 어쩌면 동해항에서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로 가는 이스턴드림 호를 타면 만날 수 있지 않을까? 할아버지는 마른 북어를 안주삼아 위스키 ‘도라지’를 마시고 계시겠지. ‘도라지'를 한 잔 따라주시겠지.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 항


* 러시아 여행 비디오 

1) 영제의 시선(3분21초) http://www.youtube.com/watch?v=5BPJuVGzmx4
: 두 불나방의 좌충우돌 하바롭스크 여행
2) 동호의 시선(3분19초) http://www.youtube.com/watch?v=yK2LatDCHRI
: 아름다움은 우리 안의 생명으로부터 나오는 빛(헬렌켈러)

훗날 피핀은 그 눈에 대한 첫인상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그 눈의 안쪽에는 여러 시대에 걸친 기억과 오랫동안 꾸준히 사고로 가득 찬 거대한 샘이 있는 것 같았다. 그러나 눈동자는 거대한 나무의 바깥쪽 잎새에 부딪히는 햇살처럼, 또는 아주 깊은 호수의 잔물결처럼 현재의 빛을 내뿜고 있었다. 잘은 모르지만 그것은 마치 지상에서 자라는 어떤 것, 잠들어 있다고도 할 수 있고 또는 자신을 뿌리와 나뭇잎 사이나 깊은 대지와 하늘 사이의 어떤 것으로 느끼는 그것이 갑자기 깨어나서는, 무한한 세월에 걸쳐 자기 내면의 일에 쏟아온 바로 그 느긋한 관심의 눈길로 지금 우리를 살펴보는 것 같았다.’

난 내가 안다고 생각하던 많은 것을 잊어버렸다가 다시 배웠지. 멀리 떨어진 많은 것들은 볼 수 있었지만 바로 가까이 있는 많은 사실들은 볼 수가 없었어. 

그것들은 산 위에 내리는 비처럼, 초원을 스치는 바람처럼 지나가 버렸네. 
그 시절은 구릉지대 뒤 서편으로 기울어 그림자 속으로 사라졌네.
누가 불타는 죽은 숲의 연기를 거둘 것인가.

대개는 그 목소리를 듣는 것이 즐거웠다는 사실만을 기억할 뿐이었다. 그 목소리가 하는 말은 모두 합당하고 현명하게 들렸으며, 따라서 자신들도 그렇게 현명해 보이기 위해 당장 그에 동의하고 싶은 욕망에 사로잡혔다. 다른 사람들의 말은 그 목소리와 대조되어 더욱 투박하고 귀에 거슬리게 들렸다. 만일 그 목소리를 거부하는 자들이 있으면, 주문에 걸려든 사람들의 마음에 분노의 불길이 일어났다. 어떤 이에겐 그 목소리의 주문이 그들 자신에게 말하는 동안에만 마법이 지속되기 때문에, 다른 이들이 그 목소리를 듣고 취하는 동안에는 마법사의 계략을 환히 들여다본 것처럼 빙그레 웃는 경우도 있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목소리에 매혹되고 말았다. 그 목소리의 주문에 정복당한 사람들은 그 목소리와 멀리 떨어져 있을 때도 마법이 지속되어 그 부드러운 소리가 자신에게 속삭이며 재촉하는 것을 들을 수 있었다.
 그 목소리를 듣고도 동요되지 않는 사람은 없었다. 정신과 의지를 갖고 노력하지 않으면, 그 목소리의 지배자가 통제하는 한 누구라도 그 목소리가 간청하고 명령하는 바를 물리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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